인사동은 고향도 아니고 사는 곳도 아니지만,

비 온다고 나가고 날씨 개였다고 나간다.

전시한다고 나가고 사람 만난다고 나간다.

 

정든 사람 떠난 인사동을 허구한 날 맴돈다.

더러는 저승으로 떠나고 더러는 오리무중이다.

남은 건 인사도 안 하는 인사동이란 이름뿐이다.

아니면 술에 취해 인사 불성된 기억만 떠돈다.

 

가게들은 간판을 바꾸고 주인까지 바뀌었지만,

꼬불꼬불 미로처럼 얽힌 좁은 골목만 그대로다.

 

그러나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기억의 저장고다.

그리움이 안개처럼 맴도는 추억의 공간이다.

 

삭막한 거리를 떠돌며 지워진 이름을 떠 올린다.

 

천향각, 실비집, 시인통신, 누님칼국수, 하가, 귀천,

레테, 춘원, 평화만들기, 수희재, 인사동사람들...

 

그리고 별이 된 사람들도 떠 올린다.

 

민병산, 박이엽, 천상병, 박재삼, 강 민, 심우성,

이구영, 김동수, 김대환, 이계익, 이호철, 목순옥,

원광스님, 중광스님, 적음스님, 김용태, 문영태,

김종구, 이존수, 여 운, 이동엽, 김영수, 강용대, 박광호...

 

다들 일상 너머 세상을 꿈꾸는 낭만적인 사람들이다.

지나간 세월이 그립고, 떠나 간 사람들이 보고 싶다.

 

사진, 글 / 조문호

 

[사진은 지루한 장마가 끝난 지난 일요일에 찍었다]




지난 초복 날, 인사동에서 사진동지 정영신씨와 삼계탕 미팅이 있었다.
일 년에 한 번 몸보신하는 날로, 인사동 ‘무교 삼계탕’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유달리 이집 삼계탕만 찾는 것은 인사동의 오래된 맛집이기 때문이다.
맛은 변함없었지만, 작년에 비해 삼천원이나 올라 한 그릇에 만 오천원 했다.
분에 넘치는 밥 값을 물었지만, 너무 맛있어 살찌는 소리가 “뿌드득”하더라.





그런데, 식사하고 나오는 길에 인사동의 유서 깊은 회화나무를 만난 것이다.
인사동에서 가장 오래된 볼거리 중 하나가 ‘이율곡 집터‘ 자리에 있는 이 회화나무 고목이다. 
비록 은행 건물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400년을 지켜 온 인사동의 살아있는 역사다.
입구에는 흡연금지라는 큼직한 팻말이 있으나 인근 회사원들의 흡연 장소가 되어버렸는데,
회화나무가 담배연기에 절어 죽을 맛일 게다.





옛날에는 회화나무가 있는 이 곳을 독녀혈이라 불렀다고 한다.
독녀혈은 과부가 많이 나온다는 말로 과부골이란 뜻이란다.
그런데 과부골에 율곡 같은 대학자가 살았다는 게 잘 이해되지 않았는데,
‘영탑산사’ 학암스님께서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독녀혈은 3대에 한 번씩 큰 요동을 치는 자리인데, 보이지 않는 큰 구멍이 있다.
그 구멍은 여인의 자궁을 상징하는 곳으로 3대에 한 번씩 요동칠 때마다 불운이 따른다. 
큰 구멍을 막으려 나무를 심는데, 이 회화나무도 그래서 심은 것이다.
율곡도 3대에 한 번씩 요동치는 그 시기를 비켜섰기 때문에 아무 탈이 없었다.”고 한다.





인사동에는 이율곡의 절골(인사동의 옛 이름)집터를 비롯하여 세도가 김좌근 집터도 있다.
민익두, 민영환, 박영효가 살았던 고가를 비롯하여,
책방이나 집필묵 가게, 표구점, 골동가게, 화랑들이 옹기종기 모인 곳이 인사동 본래의 예스러운 모습이다.






인사동하면 뺄 수 없는 사람으로는 자기류의 특이한 서예글씨를 인사동가게 여기저기에 남긴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 선생과 '귀천'의 시인 천상병, 작가 박이엽선생이 먼저 떠 오른다.
‘통문관’의 이겸로 선생, 민화를 전통문화로 처음 드러내신 조자용 선생, 통인가게 김정환선생,
백자를 품위 있게 누리신 ‘아자방’의 시인 김상옥선생과 노촌 이구영선생도 기억할 수 있겠다.

 


 


이제 그러한 오래된 역사와 전통은 점점 묻혀가고, 관광객들이 들락거리는 싸구려 거리로 변해 가고 있다.
어쩌겠는가?
돈에 묻혀가는 세월이지만, 이렇게라도 추억할 수밖에...

사진, 글 / 조문호






















볼만한 전시가 있어 모처럼 인사동 나왔다.




옛 민정당사 자리 호텔공사는 이제 마무리를 했다. 머지않아 인사동이 더 낯설 것이다.




거리에는 임금님이 나와 광고판을 들고 있고, 지난날이 그리운 유랑 악사는 멀쩡한 날 ‘봄비’를 불렀다.




요즘 인사동에 나와도 갈만한 술집이 별로 없다.
돈에 밀리고 젊은이에 밀려, 길 잃은 기러기 신세다.
아지트로 죽치던 ‘유목민’도 젊은이 아닌 돈에 밀려났다.




사실상, 인사동을 못 잊어 배회하는 것은 공간의 추억이 아니라, 그 곳에서 놀던 사람들의 추억이다.




그것도 살아남은 자 보다 죽었거나 볼 수 없는 자들의 추억이 짙다.
제일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천상병시인이고,
뒤이어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 방송작가 박이엽선생, 인사동 풍류객 이계익선생,
넋을 부르는 민속작가 심우성선생 같은 많은 분들이 생각난다. 



땡초시인 적음과 최루탄 냄새 풀풀 풍기던 사진기자 김종구, 별만 그렸던 강용대,
콧수염 사진가 김영수, ‘민예총’의 대부 김용태, 밤안개로 불리는 목탄화가 여운,
강단 있는 민중화가 문영태, 그리고 살아있어도 볼 수 없는 화가 박광호와 이청운도 있고,
미국으로 떠난 최정자시인도 그립다.




그들과 어울리던 ‘실비집’이나 ‘누님칼국수’, ‘시인통신’, '하가', '레떼'

‘수희제’는 모두 사라졌지만, ‘부산식당’이나 ‘사동집’, ‘귀천’ 은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잘 가지 않는 것은, 집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만났던 사람이 그리운 거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도 만나려면 만날 곳이 있어야해 ‘다리 밑’에 자리 잡기로 했다.
‘다리 밑’은 낙원상가 계단 밑에 있는 코 구멍만한 술집인데, 간판이 없어 계단집으로 불렸다.
통인의 관우선생이 ‘다리 밑 집’으로 고쳐 불렀으나, 더 줄여 ‘다리 밑’으로 부른다.
옛날엔 거지들이 다리 밑에서 살았으나, 대개 태어날 때의 고향인 다리 밑을 좋아한다.
공사판의 함바집처럼 서민적이라 더 정겹다.




주종은 불문이나 관우선생이 개발한 시원한 생맥주에 막걸리를 타 먹는 막맥이 맛있다지만
통풍 때문에 맥주를 못 마시니 그 맛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안주가 싸다. 쫀득쫀득한 감자전 같은 대부분의 안주가 오천원이다.




이 날은 건축가 김동주씨와 통인의 관우선생을 만나기로 했는데, 처음보는 여인도 나타났다.
미끄러질 것 같은 입술도 매력적이지만 생글 생글한 눈웃음이 죽이더라.




그런데, 옆 자리에 아는 분이 있었다.
막사발 장인 김용문씨처럼 상투를 틀어 올린 권도경씨인데,
사진가 하형우씨께 전화 걸어 바꾸어 준 것이다. 세상에 사람은 많지만 좁았다.




그들의 건배사가 더 재미있더라.
술잔을 치켜들며 “이것이 무엇이요?”하니, 다같이 “정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정’이란 노래를 처절하게 합창했다.




“정이란 무엇일까? 받는 걸까 주는 걸까, 받을 땐 꿈 속 같고 줄 때는 안타까워...“




그렇다. 다들 그 놈의 정 때문에 좋아했다 미워하는 것이다.




다음부터 그리운 사람 만날 때는 다리 밑에서 만나자.
받을 때나 줄 때나 한 결 같이 꿈속 같도록...

사진, 글 / 조문호


















[서울문화투데이]

▲조문호 사진가

싱그러운 봄은 찾아왔건만, 정작 인사동의 봄은 기약이 없다. 

그토록 인사동에 대한 문제점과 개선책을 떠들어도 다들 ‘마이동풍’이다.

“조 통수는 불어도 세월은 간다”며 예전 군인들이 비아냥거리듯, 관련부서는 코 방귀조차 안 뀐다.

작은 이득에 눈이 어두워 큰 것을 보지 못하는 인사동 상인들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단지 말 빨 없는 예술가들의 넋두리만 술집으로 흘러 다닐 뿐이다.

한 때, “포도대장과 순라꾼들이 사용한 ‘인사문화마당’을 포장마차 장사꾼들로부터 되찾아 예술공간으로 활용하자” /

“인사동에서 열리는 전시의 주단위 리플렛을 거리에 내 놓아 관광객들을 전시장으로 끌어들이자” /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 언덕의 테르트르 광장처럼, 거리에서 작업도 하고 작품도 팔 수 있는 무명작가 거리를 조성하자“ /

인사동을 우리나라 미술시장의 메카로 만들기 위해 인사동과 북촌지역을 연계하는 국제적인 아트페어를 개최하자“는 등

예술가들의 제안을 나팔 불어댔지만, 쇠귀에 경 읽기였다. 
 
지금 전통문화거리를 표방하는 인사동에 ‘한국은 없다’는 볼멘소리가 거세다.

치솟는 임대료를 못 견뎌 문화관련 업소들은 외각이나 다른 지역으로 밀려나고 있다.

거리의 상품 90%가 중국산으로, 마치 인사동이 차이나타운 같다.

특색 없는 유락지로 전락한 중국 베이징의 ‘유리창(琉璃廠)’을 꼭 닮아간다.

인사동 한복판에 대형 관광호텔과 곳곳에 상가건물이 지어져, 국적불명의 관광지화는 가속화될 것이다.

이제 문화특구로 내세울만한 예스러움이나 인사동 풍류는 오간데 없다.

인사동은 조선 말기부터 100여 년간 고미술의 메카였다.

양반들은 북촌에 살았고 화공이나 도공 같은 중인들이 살던 곳이 인사동이다.

1924년 ‘통인가게’가 생기면서 이 일대에 고미술 관련 상가들이 들어섰다고 한다.

인사동이 현대적인 화랑거리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다.

현대화랑에 이어 동산방, 선화랑, 경인미술관, 학고재, 국제화랑, 미화랑, 진화랑 등

오늘날 한국 현대미술을 이끄는 메이저급 화랑들이 빠짐없이 인사동에 문을 열었었다.

이들 따라 크고 작은 화랑뿐 아니라 골동품점, 표구점, 필방, 공방 등 미술 관련 가게들이 들어서며,

인사동이 명실 공히 ‘한국 미술의 메카’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인사동 거리에 관광객들은 넘쳐나지만, 백 개가 넘는 인사동 전시장들이 텅텅 비어있다.

외국 관광객들이 왜 인사동을 찾겠는가? 인사동 고유의 색깔이 없는데, 다시 올 리 없다.

그들에게 인사동만의 문화와 풍류를 느끼게 하려면, 군것질거리나 잡동사니를 파는 거리환경을 정비하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스토리텔링을 해야 한다.

인사동은 조선시대 궁중화가들의 작업실인 도화서가 있던 곳이다.

그 도화서를 복원해 작가들을 선발하는 방법은 없는가?

그 곳에서 전통적인 민화나 서예, 도예 등을 제작해 외국관광객들에게 직접 판매할 수 있도록 하자.

그리고 연암 박지원과 율곡선생도 인사동에 살았었다.


민영환 선생의 자결 터와 민병옥대감의 저택인 ‘민가다헌’도 잘 보존돼 있다.

이를 알리는 표지판들도 너무 작거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러한 역사적 자취를 바탕으로 이야기 옷을 입히자.

가깝게는 80년대 인사동 낭만을 풍미한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 중광스님도 있다.

어쩌면 먼 조선시대 이야기보다 더 가깝게 와 닿을지도 모른다,

어깨에 늘 봇짐을 메고 다녔던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을 비롯하여

‘귀천’에 죽치며 막걸리 집을 드나들었던 천상병시인과

영국산 장미뿌리 파이프를 문채, 술보다는 커피 향을 더 즐기던 박이엽 방송작가,

그리고 거지행색으로 인사동을 누비던 중광스님의 자유분방한 행색들 말이다.

그 분들의 동상을 만들어 앉혀, 인사동 거리분위기부터 한 번 바꾸어보자.

아기자기한 인사동만의 골목 문화를 가꾸어, 인사동을 드나드는 예술가들의 사람냄새도 담자.

다 같이 힘 모아, 인사동을 낭만1번지로 되돌리는 봄바람 한번 일으키자.
 



지난 18일 오전 무렵, 별 볼일 없이 인사동에 나갔다.
주말은 봄나들이 나온 관광객들로 붐빌 것 같아 금요일을 택했는데,

포근한 봄 볕 탓인지 거리가 유난히 정겨웠다.

유치원 어린이들의 재잘거림도 여기저기 들리고,
장대만한 흑인이 피에로처럼 머뭇거리는 모습도 만났다.
‘이즈갤러리’ 건물은 한국화가 김현정의 전시 광고로 뒤 덥혀 있었다.
4개 층 전관을 한 달 가까이 빌려 ‘내숭놀이공원’이란 전시이벤트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인사동에 대한 향수를 달랠 수 있는 예스러움은 만날 수 없었다.


한 때, 80년대 인사동 낭만을 풍미한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선생의
동상을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가 추진된 적이 있었다.

‘아라아트’를 운영하는 김명성씨가 사재를 들여, 벤취에 앉히거나
골목 어귀에 세우기 위해 조각가 최옥영씨에게 맡겨 시안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그 뒤 김명성씨가 빚더미로 벼랑에 내몰리며 보류되고 만 것이다.

그 프로젝트를 서울시에서 물려받아 재추진하는 방법은 없을까?
지금 국적불명의 관광지가 된 인사동에 변화를 줄 수 있는 물꼬를 터야한다.
인사동만의 문화와 풍류를 위한 다양한 사실적 스토리텔링이 절실한 것이다.
그 분들의 동상을 만들어 앉혀, 인사동 거리분위기부터 바꾸어보자.

사진,글 / 조문호























느낌이 있는 "신 풍물 기행"

작가 박인식이 본 인사동

 


인사동과 나 사이는 오래 묵은 된장이다.

그가 내 속에 들어와, 아니 내가 그 속으로 파고들어 정 주고받은 지 벌써 서른 몇 해를 넘겼다. 그동안 많은 인사동 사람을 만났다. 더러 꽃 시샘 바람으로 구차하고, 더러는 꼭두서니 빛으로 반짝였고, 또 더러는 평생 마실 술을 젊은 시절에 몰아 마셔 일찌감치 세상을 떴고, 또 다른 몇몇은 머리 깎고 산으로 들어갔다가 하산하여 도로 머리 기르고 장가들었다.

그들의 삶이 인사동 풍류 세상에서 빛나고, 또 예술세계에서 깊이 묻히거나 아주 저물다가 소식이 가물거릴 때마다 그들을 그리워하는 내 추억의 마음 한 자리에는 이야기가 되고 시가 된 사연들이 장독대에 내려앉은 함박눈(이 글을 쓰다 창밖을 보니 마침 함박눈이 퍼붓고 있네)처럼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 눈을 맨손으로 ‘쓰윽’ 쓸어본다. 아주 잠깐 손끝이 시려올 뿐, 차가운 듯하면서도 따사한 기운이 손바닥을 부드럽게 감싸온다. 인사동과 내가 정분이 난 게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사랑이 이런 걸까. 만질 수 없는 그리움까지, 눈썹 밑에 살풋 밟혀온다.

인사동으로 나서면 언제나 그 그리움과 정분에 (60대 중반에 이른 할배 주제에) 철없이 온몸 들썩이게 된다. 그래서 나의 인사동 나들이는 낭만에 한목숨 건 ‘낭만파’이자 ‘인생파’인 인사동파 문화예술인의 삶 속을 걷는 오디세이가 된다.

‘기억의 방/기역자 모서리/추억의 기역자 방에서/기역으로 꺾어져/그리움의 지느러미 흔들며/헤엄쳐 나오는 기억의 물고기들/살가워 그리워라/하마, 서른 해나 정들었지.’ <박인식의 시 ‘아원의 추억2’>

쌈지길 들목에 있는 아원 공방의 그 기역자 방에서 나는 ‘인사동 3전설’의 한 분인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 선생을 처음 그리고 자주 뵈었다. 뵐 때마다 선생은 기침을 콜록였고, 말이 없었다.

인사동이 한국전통문화예술의 갯벌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을 파고들면 끝내 민병산이라는 ‘사람의 산’과 마주하게 된다.

바둑을 즐긴 선생은 원래 ‘한국기원’이 있던 관철동이 놀이터였다. 1980년대 들어서 관철동이 장사치들로 번잡스러워지자 선생은 늘 책이 한두 권씩 들어있는 헌 가죽가방을 메고 종로 큰길 건너편인 인사동으로 슬며시 발길을 옮겼다. 선생이 옮겨가자 선생을 따르는 숱한 문인과 화가와 언론인들도 아지트를 인사동으로 옮기게 되었다. 출애굽기처럼 출관철동기 또는 입인사동기는 선생으로 인해 이토록 은밀하면서도 장엄했다.

그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아 선생의 회갑이 돌아왔다. 선생을 따라온 인사동 사람들이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한복도 한 벌 지어드리고 생일엔 모두 주머니 털어 자주 가던 ‘누님국수’집에서 회갑연을 열기로 했다. 그런데 생일 당일 모든 인사동 사람들은 자신이 소속된 인사동 계파의 연락책으로부터 이런 전화를 받게 된다. “음, 난데, …… 누님국수집으로 올 때 말이야. 부조금 봉투를 다시 써와! 민 선생이 아침에 돌아가셨대.”

‘…몸을 저승에 보내고도 인사동에서만 맴돈다/… 그의 죽음을 서러워하는 인사도 인사동에 앉아서 받는다//세상을 떠나서도/가진 것이 없을수록 좋더라면서/움직임이 적을수록 좋더라면서’<신경림의 시 ‘민병산 선생을 애도하며’의 부분>

출관철동기에 선생을 따라 인사동으로 들어온 시인으로 이 추모시를 쓴 신경림 시인 곁에 천상병 시인이 있었다.

‘내 나이 마흔다섯/노인으로 자처한다’ 했던 천상병 시인은 ‘인사동’이라는 음식을 세상 사람들이 맛있게 들 수 있도록 간을 제대로 맞춰준 사람이다. 그 역할로 천 시인 또한 ‘인사동 3전설’의 반열에 올랐다.

아원공방의 기역자 방에서 두 번째로 헤엄쳐 나온 기억의 물고기는 그곳에서 북쪽으로 얼마쯤 떨어진 학고재 골목길로 쫄랑쫄랑 지느러미 흔들며 앞서 갔다. 그곳에 천 시인의 아내 목순옥 여사가 꾸려가던 찻집 ‘귀천’이 있다. 목 여사도 몇 해 전 세상을 떴다. 지금은 목 여사의 질녀가 ‘귀천’의 팽주(烹主·차 따르는 사람)다.

천 시인에게 세상살이는 소풍이었다. 어린 시절 소풍날 김밥을 챙기듯, 천 시인은 막걸리값을 챙겨 허구한 날 인사동으로 소풍 갔다. 인사동 쪽에서 보면 소풍 왔다. 소풍 오는 사람이 워낙 열심이어서 인사동은 천 시인으로 인해 날마다 소풍날이었다. 소풍 온 사람은 소풍날을 만들어 준 사람답게 막걸리값을 뜯어냈다. 1980년대 초에 1000원이던 막걸리값은 그 뒤로 이어진 경제성장에 힘입어 1990년대 초에는 3000원으로 인상되었다. 하지만 3000원이 상한가였다. 1994년에 천 시인이 소풍을 끝내고 ‘귀천’해버린 까닭이다.

천 시인에게 시 한 수는 막걸리를 다섯 번 즐길 수 있는 술값이었다. 시를 얻게 되면 냅다 관훈미술관 3층에 있던 ‘한국문학’사로 달려간다. 이근배 시인이 오랫동안 편집주간을 맡았던 그 문예지 사무실로 시 한 편 들고 소풍 나온 날의 천 시인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주간! 이 주간! 내 시 한 편 써왔다. 원고료 5000원만 도! 5000원만 도!”

이근배 주간이 1만 원짜리를 건넨다. “아이다, 아이다. 원고료는 5000원이다. 5000원만 도. 5000원만 도.”

그 얼마 뒤에 지금 ‘툇마루’라는 음식점이 있는 골목 끝에 있었던 ‘실비집’으로 가면 5000원을 꼬불쳐 쥐고 막걸리 소풍 즐기는 순진무구한 영혼을 만날 수 있었다. 인사동 소풍놀이에 익숙해진 인사동 사람들은 그럴 때마다 1000원짜리 지폐가 지갑에 있는지 미리 확인해야 되었다. 아, 우리에게도 1000원이면 막걸리가 대폿잔에 한가득 따라지는 영혼의 시대가 있었구나.

 

 

 

▲ 서울 종로구 인사동 거리는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추억을 찾아 나온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세 번째로 헤엄쳐 나온 기억의 물고기는 인사동에서 가장 오랜 고서점인 ‘통문각’ 쪽으로 나아갔다. 인사동 큰길 곁이라 인파가 북적인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물고기에 신경 쓰지 않는다. 보이지도 않는가보다. 세 번째 물고기를 따라 들어간 곳은 ‘수희재’라는 전통찻집이다. 수희재의 다모(茶母) 장순정 씨가 정성껏 내린 녹차를 내놓자 물고기는 어느새 수천 마리 새끼를 부화시켜 내 콧속으로 들어오며 속삭인다.

“날 기억해? 여기서 차를 즐기던 박이엽 선생의 체취가 어린 차 향기 말이야.” 몇 년 선배인 민 선생을 닮아 박이엽 선생도 말이 없었다. 해소천식 환자였다는 점에서도 두 분은 닮았다. 그 지병으로 두 분 모두 일찍 귀천했다.

박 선생은 출중한 번역가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방송작가다. 1970년대 최고의 라디오드라마인 ‘아차부인 재치부인’의 작가다. 1970년대 말 군사정권에 의해 불순하다는 이유로 방송사 일은 끊어졌다. 기독교방송국만이 일거리를 줬지만 그걸로 생계 꾸리기는 어려워 막노동이나 다름없는 번역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가 번역하고 창비에서 출판한 ‘나의 서양미술 순례기’는 내가 가장 아끼는 귀중본이다. 미술에 별로 관심 갖지 않는 친구들에게도 선물해보면 그를 인사동에 보다 가까이 다가오게 만들 수 있었다.

이제 인사동이 인사동이 아니라는 장탄식이 무성하다. 다분히 그렇다. 주말이면 정나미 떨어진다. 관광지도 이런 관광지가 없다. 휴일에는 인사동에 인사동 사람들이 없다. 인사동의 정체성을 빛낸 여러 가게가 북쪽으로 서쪽으로 떠났다. ‘수희재’마저 2년 전에 문을 닫았다. 떠난 자리마다 ‘국적불명’의 관광상품가게가 들어섰다. 불난 호떡집에 사이비 엿장수가 설쳐댄다. 그게 인사동의 참맛인 줄 알고 꼬여드는 관광객들이 밀물 쳐 ‘인사동’이라는 이름의 짝퉁 한국전통 문화예술 기념품을 한 푼이라도 더 값싸게 사려고 이리 밀치고 저리 뛰는 장돌뱅이 판이 되고 말았다.

이런 날에는 인사동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살아 있을 인사동 골목으로 들어가야 한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만이 아니라 인사동 골목에서 만나도 서로 피하기 어렵다. 그러니 원수 될 일 저지르지 말며 살라고 좁디좁은 인사동 골목은 가르친다. 그 골목 끝자락에 지금은 사라진 ‘실비집’이 있었다.

누군가 실비집을 실비대학이라 불렀다. 그와 동시에 이 선술집의 여주인은 총장으로 출세했다.

그 총장 전용 서랍 속에서 시큼한 막걸리 냄새 풍기며 잠자던 외상장부는 참 두툼했다. 인사동 사람들의 이름이 모두 올라가 있었다. 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외상으로 마셔대던 막걸리는 유난히도 하?다. 하늘로 올라가서 다 함께 노상방뇨 하면 지금 내리는 저 눈발보다 더 함박스러운 함박눈이 되어 인사동 뒷골목에 납작하게 고개 숙인 한옥들의 낮은 어깨를 다독이며 ‘힘내라’ 격려해줄 수 있었을 테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