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삼일절엔 동자동 사진 찍느라 고향에서 열리는 '영산삼일민속문화제'는 커녕 '탑골공원'도 못갔다.

봄바람에 치마가 날리는 게 아니라 게양대에 걸린 태극기만 휘날렸다.

 

그 이튿날은 만사를 제쳐두고 정동지와 전시 보러 나섰다.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리는 김동진의 ‘나의 살던 고향’ 부터 들렸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전시장은 조용했다.

 

전시작들은 작가의 고향인 만덕동의 오래전 모습을 살벌한 도심풍경에 빗대어 그리워했다.

자연과 주변 환경만 바뀐 게 아니라 인간의 정신까지 바뀌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사라져버린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진가의 고향노래였다.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물질문명 속에 살아가며,

고향이란 말조차 잊어버린 현대인들에게 보내는 추억의 서사다.

 

이 전시는 3월 12일까지 열린다.

 

두 번째는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김인규씨의 ‘산 넘어 남촌'을 찾아 인사동으로 넘어갔다.

이 전시 역시 고향에 대한 향수로, 전시장 입구에는 ‘갤러리의 봄’이란 또 다른 현수막도 걸려 있었다.

 

봄은 실감할 수 없으나, 전시장은 온통 고향을 그리는 봄 노래였다.

 

‘나무화랑’으로 올라가니 전시 작가는 보이지 않고, 김진하관장을 비롯하여 정복수, 김 구, 장경호씨가 있었다.

 

작품들은 고향의 봄을 연상케 하는 소담한 풍경이었다.

화사한 파스텔 톤의 부드러운 색감이나 초가집과 구릉들이 나열된 공간구성.

거기에 평면적인 입체감을 두리 뭉실하게 드러내어 꿈인지 현실인지 아리송한 풍경으로 끌어갔다.

 

단조로운 내용이 오히려 눈길을 끌게 만들었다.

일체의 기교로부터 탈피한 그리기의 원형을 보여 주는듯한 소박함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원초적 미감의 봄바람 같은 분위기였다.

 

포근하고 아늑한 화면은 조선 민화 같은 담백한 맛을 내는데,

마치 동화를 보는듯한 유치찬란함 그 자체였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구름처럼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전시로, 13일까지 열린다.

 

화가 정복수씨의 술 마시러 가자는 꼬임에 끌려 장경호, 김구씨와 ‘사랑채’로 내려왔다.

운전 때문에 막걸리 한 잔만 마시기로 했으나, 한 잔으로 끝내기란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려웠다.

모시고 가야할 차주 눈치 보느라 술인지 맹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개마서원’의 장의균씨 내외와 안원규씨도 합류했다.

 

아직 보아야 할 전시가 남아 있어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갤러리담’에서 열리는 한상진씨의 ‘무경계’를 찾아 가다 거리에서 춤평론가 이만주씨를 만나기도 했다.

 

‘갤러리담’에는 전시작가 한상진씨를 비롯하여 최석태씨, '스마트협동조합' 서인형이사장 등 반가운 분도 여럿 있었다.

 

전시된 주요 작품은 먹 드로잉이었다.

작업실 주변이나 길에서 만난 하잘 것 없는 사물들을 형상화했다.

풀포기에서부터 하늘에 떠있는 구름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경계 없이 먹으로 그렸다.

 

본래의 의미로부터 벗어나 버린, 버려진 사물에 대한 애착의 발로였다.

변해가는 사물이나 풍경처럼 세월을 멈출 수 없는 현대인의 고뇌를 담은 것 같았다.

무미건조하고 불안한 일상의 파편에 다름 아니다.

 

미술평론가 최석태씨 말로는 지난 전시보다 훨씬 단단해진 미감이라며 만족감을 표했다.

이 전시는 3월21일까지 열린다.

 

재미 사진가 김인태선생의 ‘선율’전이 열리는갤러리인사1010’으로 발길을 돌렸다.

 

15년 만에 찾은 김인태씨의 귀국 초대전은 장엄하면서도 아름다운 미국 대자연의 풍광을 보여주었다.

80년대 중반에 발표한 광활한 사구의 기하학적 구성을 드러낸 작품들도 눈길을 끌었다.

 

이번 '선율' 전에 나오는 작품들은 때로 사색에 빠져들게도 만들었다.

특히 시들어가는 꽃송이를 크로즈업 한 사진은 명상적이고 철학적인 사유가 담겨있다.

 

김인태의 ‘선율’전은 14일까지 열린다.

 

마지막으로 박진흥전시를 보러 '갤러리 더원'에 들렸다.

박진흥씨는 박수근화백의 손자이고 박성남화백의 장남이다.

삼대째 그림을 그리지만, 박진흥 작품은 한번도 보지 못해 작정하고 나선 것이다.

 

박진흥의 '흙결의 시간, 그리고 목련'

박진흥씨의 ‘흙결의 시간, 그리고 목련’이 열리는 ‘갤러리 더원’은 문이 잠겨 있었다.

전시도 보지 못한 채 뒤풀이 장소인 ‘마중’으로 가야 했다.

 

'마중'에서 전시 작가인 박진흥씨는 물론, 부친 박성남화백도 만났다.

오랜 만에 만나 반갑기 그지없으나, 박성남씨의 능글능글한 농담은 변함 없었다.

 

작가의 흙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얼마나 진지한지, 다시 인사동에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이 전시는 13일까지 열리니, 인사동 봄바람 맞으며 전시보러 가자.

 

사진, 글 / 조문호

 

 

장애학생돕기 자선전인 함께 맞는 비가 지난 921, 오후4인사동 마루아트센터3층 그랜드관에서 개막되었다.

 

화가, 조각가, 만화가, 사진가, 도예가등 40여 명의 예술가가 참여하는 함비전

비장애인이 어려운 장애아의 눈이 되고 귀가 되어, 우산을 같이 쓰며 함께 비를 맞는 아름다운 행사다.

 

이날 개막식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두렵기까지 했다.

 

주홍수, 유준, 박성남, 강레아, 조풍류, 정영신, 조명환, 조신호, 임동은, 김수길, 박복신,

김발렌티노, 이한복, 공윤희, 전활철 씨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누군지도 모르겠더라.

 

운영위원과 출품작가를 비롯하여 관람객까지 더해 넓은 전시장을 가득 메웠다.

발 디딜 틈이 없어 작품감상에 지장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함비전에 대한 일반인의 지대한 관심은 장애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청신호가 아니던가?

 

이 자선전은 많은 분의 참여를 이끌기 위해 작품가격도 기존 가격보다 대폭 낮추어 판매한다.

 

유명 작가의 작품을 저렴하게 소장할 좋은 기회다.

많은 분의 동참을 부탁드린다.

 

부디 첫 함비전이 오색 단풍처럼 아름답게 물들어, 그 소중한 마음을 모아 좋은 결실로 이어지길 바란다.

이 전시는 27일까지 계속된다.

 

공윤희, 정영신, 김수길씨와 전시장을 먼저 빠져나와

인사아트센터4층 부산갤러리에서 열리는 여성현대미술작가회원전에 갔다.

 

참여작가인 양계선씨를 축하해주기 위해서였다.

 

인사동 늘마중에서 막걸리로 목을 축인 후

식사를 예약해 두었다는 베이징 코아로 자리를 옮겼다.

 

베이징 코아는 예전에도 그랬지만,

주 메뉴인 오리구이보다 마지막에 나온 짜장면이 압권이었다.

오리고기 맛을 몰라 그런지 모르지만, 잘 삶은 삼겹살보다 못했다.

 

촌놈에게는 비싼 중국요리보다 오로지 짜장면이다.

양파 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먹어 치웠다.

오리고기 가격이 만만치 않으나, 짜장면 먹으러 다시 가고 싶다.

 

사진, / 조문호

 

 




박성남씨 초대전이 지난 12일 수송동 ‘갤러리 고도’에서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너무 늦게 전시장을 찾아 때 늦은 소식이 되고 말았지만...

박성남씨의 작품은 아버지 박수근화백의 잔영이 너무 짙게 깔려있었다.
그건 아버지가 작업해온 전반을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화가 박성남은 “전쟁으로 몇 번의 이별과 만남을 거듭하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극적인 상봉을 한 후
다시는 헤어지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자신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아직 그 작품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토록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과 그리움이 많아 아버지가 그린 대상과 표현방법마저 동경해 왔는지도 모른다.

전시를 하루 남겨두고 전시장에 들렸더니, 여러 사람들이 전시를 관람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작품처럼 서민들의 애환을 박성남씨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강한 입김 때문인지, 그보다 더한 감흥은 끌어낼 수 없었다.
이제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1일, 모처럼 인사동에 나갔다.

인사동 ‘고도’에서 열리는 박성남씨 전시에 들렸다가 ‘툇마루’로 갔다.




장경호씨를 비롯하여 김이하, 이승철 시인, 그리고 인사를 나누지 못한 최명철씨도 함께 있었다.

최명철씨는 광화문광장에서 여러 번 본 기억이 있는데, 화가 박광호씨를 너무 닮았다.
이미 술판은 파장이었고, 막걸리 한 두 잔 마시고 나와야 했다.





다들 술이 취했으니, 노래 할 수 있는 술집으로 가자했다.
‘아리랑’으로 갔으나, 이른 시간이라 문이 잠겨있었다.
그 다음 찾아 간 곳이 ‘백상사우나’ 부근에 있는 ‘갤럭시 노래방’이었다.
처음 가본 곳인데, 대뜸 최명철씨가 아가씨 네 명을 불렀다.
술 취한 사내가 여인네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마는
난, 술도 취하지 않았지만 너무 뜻밖이라 걱정 되었다.
한 두 사람도 아니고 짝 맞춘다면, 그 돈은 어쩔건가?





이미 엎질러 진 물로, 양주가 나오고 아가씨 네 명이 사내들 옆에 끼어 앉았다.
최명철씨는 노래하느라 바빴고, 아가씨들은 술 권하기 바빴다.
맨 얼굴로는 도저히 마주 볼 수 없을 것 같아 바쁘게 술을 마셔댔다.
빈속에 들어가니, 금세 본색이 더러 났다.
그 때야 옆에 앉은 여인에게 나이를 물어 보았다. 딸이나 마찬가지였다.


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뭐냐고? 다시 물었다.
한 마디로 돈이라 했다.
돈은 중요한 목적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쾌락이라 고쳐 말했다.
너무 솔직한 대답이었다.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즐길 수 있으니까...





취기가 올라 맞은편에 앉은 여인에게 춤을 추자고 권했다.
파트너였던 김이하시인이 마침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그녀는 40대로, 그중 나이가 들어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춤은 추지 못하지만, 그녀를 안아보고 싶었다.


여인네의 살 냄새에 강한 욕정이 일었다.
몸에서 피가 끊었고 힘이 흘러 넘쳤다.
살아 있다는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금세 한 시간이 지나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다들 술이 취해 시킨 술도 마시지 못했건만, 3차로 ‘아리랑’에 갔다.
‘아리랑’엔 먼저 온 손님들이 이미 놀이판을 휘잡고 있었다.
마실 만큼 마셨으면 그만 헤어지지, 왜 방황하는지 모르겠다.





원님 덕에 나팔 불듯 잘 놀았으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자정이 가까워서야 도망쳤는데, 맡겨 둔 짐 보따리 찾느라 유목민에 들렸다 지하철을 놓쳐버렸다.

술 취한 거지를 어떻게 알았는지, 오는 택시마다 도망치네. 제기랄~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5일 오전 무렵, 강 민선생으로 부터 인사동에서 점심이나 먹자는 연락이 왔다.
전 날 정영신씨와 밤늦도록 퍼마신 생일 술에 빌빌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선생님을 뵌 지도 오래되었지만, 요즘 식욕마저 없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냉수만 들이 키고 세수도 못한 채 나갔으나 선생님께서 먼저 나와 계셨다.

툇마루 건물 1층의 ‘나주곰탕’집에 돌아 앉아 계셨는데, 그 뒷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계절 탓일까? 아니면 친구들이 떠난 빈자리 때문일까?






선생님께 인사드렸더니 대뜸 “요즘 인사동에 나오면 아무도 못 만나.
‘유목민’까지 문 닫혀 갈 곳도 없어”라고 안타까워 하셨다.
그렇다. 요즘은 미리 약속 하지 않고 나오면 완전히 낙동강 오리알 신세다.
저녁시간이라면 단골 술집에서 우연히 만나는 분이라도 있지만,
낮 시간에는 갈 때도 마땅찮아 관광객처럼 거리만 기웃거려야 한다.






인사동에서 자주 만났던 심우성 선생은 요즘 ‘공주요양원’에 가 계시고,
방동규선생은 바쁜 일로 뵐 수 없고, 오늘은 김승환선생 마저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창백한 선생님의 얼굴빛에서 외로움이 묻어났다.
식욕도 잃고 몸이 편치 않은 것도 외로움에서 비롯되었을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주변머리가 없어 선생님께 위안조차 드릴 수 없었다.






쏙이 쓰렸지만, 밥보다는 술이 더 땡겼다.
빈 속에 들어가는 소주의 짜릿한 쾌감을 한 두차례 느꼈더니, 바로 어제 밤으로 돌아갔다.
그때사 연극배우 이명희씨가 나타나 주절주절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으니
머쓱한 술자리도 훨씬 부드러워졌다.
나이가 들면 유식한 말보다는 실없는 이야기들이 훨씬 듣기 편하다.






마침 밥집 앞을 지나가던 화가 박성남씨와 눈이 마주쳤다.
오랜만이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는데,
수송동의 ’고도‘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는 따끈따끈한 소식도 주었다.
아버지 박수근화백에 이어 아들까지 화가 길을 들어 서,
이제 삼대 째 화업을 이어가고 있는 집안인데, 그의 전시 작품이 궁금했다.
박화백은 동갑내기지만, 나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멋쟁인데,
몇 년 사이 많이 늙어 보였다. 흐르는 세월은 아무도 말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소주를 한 병 더 시키는 실수를 저질러 버렸다.
혼자 낮술에 취해 추접을 떨어 댔는데, 아무래도 죽기 전에는 철들기 어려울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밀려오는 외로움에 지랄발광을 떨지만, 공허할 뿐이다.
그 사이 강민 선생님께서 밥값을 먼저 계산해 버렸다.
모처럼 밥 한끼 대접하려고 단단히 마음 먹었는데, 그마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인사동 사람들’ 찻집으로 자리를 옮겼더니, 서서히 취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술을 너무 급하게 마신 것 같았다.
다방커피 한 잔으로 먼저 일어나야 했는데, 선생님께 인사라도 제대로 드렸는지 모르겠다.





돌아오던 지하철에서 맞은 마광수씨의 자살 소식에 술이 뻔쩍 깼다.
그건 마광수씨 개인의 죽음에 앞서 사회적 소외와 인간적 외로움에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을 대변하는 죽음이었고, 사회를 향한 일종의 경종이었다.



사진, 글 / 조문호
































MBN이 주최하고 '페인티안'이 주관하는 아름다운 TV갤러리와 함께하는 페인티안 초대전 개막식이 지난 15일 오후6시 인사동 '아라아트'2층에서 열렸다.

문화예술을 통한 사회공헌 전시인 <매일경제TV Mmoney 아름다운 TV 갤러리 - 페인티안 초대전>에는 힐링을 주제로 총 170여 점의 작품이 소개되었다. 작가들의 드로잉 작품과 기부작품 30여 점, 기업 브랜드와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한 아트광고 등이다.

15일 저녁 6시에 열린 오프닝 행사는 방송 사상 최초로 매일경제TV Mmoney를 통해 생방송으로 송출되었는데, 참여 작가들과 만남의 장을 제공하는 토크와 관람객들을 위한 참여 작가의 퍼포먼스 등 다양한 이벤트로 구성되었다, 참여작가는 도성욱 낸시랭, 신철, 정기호, 이목을, 백진, 박성남, 조문호, 김남용, 전인경, 권두현, 김용문, 허미자, 정영신, 안윤모, 임채욱, 이청운, 강찬모, 김진석, 프레디, 두츠 등 90여명의 작품이 선보인다.

박혜영 페인티안 대표는 “많은 분들이 이번 전시를 통해 미술품을 통한 힐링을 느껴보시기 바란다”며 “페인티안이 작가와 기업, 개인 콜렉터가 함께 참여해 문화예술을 통한 사회공헌을 실천하는 온라인 미술입찰 사이트를 지향하는 만큼, 작가와 기업, 대중이 함께 기부에 동참할 수 있도록 매개체 역할을 해나가겠다”고 전했다.

개막식에는 '페인티안' 박혜영 대표를 비롯하여 '아라아트' 김명성 대표, mbn 정완진 국장, 미술평론가 김종근씨, '2014광장아트페스티벌' 변석 대표가 참석했고, 이청운씨 등 70여명의 출품작가 외에도 함상희. 조경석, 조준영, 임태종, 노광래, 편근희, 공윤희, 정순겸, 고상준, 전인미, 이명희, 김민경, 주승자, 전강호, 김상현, 조성호, 권영진씨 등 200여명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식순에 의해 진행자 김종근씨의 전시 취지에 대한 소개말과 김명성씨의 축사, 참여작가들의 인사말 등이 이어졌으며, 전시회의 성공적인 개최와 사회공헌에 기여한 공로가 있는 참여 작가에게는 감사패도 수여되었다.

 

이 전시는 아라아트 2,3,4,5층 전시실에서 7월21일까지 이어진다.

 

 

 

 

 

 

 

 

 

 

 

 

 

 

 

 

 

 

 

 

 

 

 

 

 

 

 

 

 

 

 

 

 

 

 

 

 

 

 

 

 

 

 

 

 

 

 

 

 

 

 



 [내일을 열며-이광형]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국민화가 박수근을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생몰연도가 ‘1914년 2월 21일∼1965년 5월 6일’로 나온다. 태어난 날을 2월 21일로 기록한 것은 박 화백의 친필 이력서와 아내 김복순 여사의 회고록을 토대로 했다. 이 날짜를 음력으로 환산하면 1914년 1월 27일이 된다. 하지만 박 화백의 실제 음력 생일은 1월 28일이다.

아내는 남편의 일생기에서 “나도 그이 생일날이면 손수 뜨개질을 해서 보내곤 하였다. 그이의 생일은 음력 정월 28일이었다”고 적었다. 또 아직 생존해 있는 박 화백 제수씨도 음력 1월 28일 박 화백의 생일잔치를 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고 증언했다. 그렇다면 박 화백이 태어난 날은 양력 2월 21일이 아니라 22일이 맞는다.

그럼에도 2월 21일로 돼 있는 것은 박 화백과 아내가 음력을 양력으로 계산하면서 하루 빠른 날짜로 착각한 것이 아닌가 싶다. 당시에는 양력보다 음력이 보편화돼 있었기 때문이다. 강원도 양구에 위치한 박수근미술관은 지난 27일(음력 1월 28일) 오전 11시30분 미술관 근처의 박 화백 부부 묘소에서 박 화백 탄생 10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행사에는 아버지를 이어 화가로 활동 중인 장녀 박인숙(박수근미술관 명예관장)씨와 장남 박성남씨, 손자·손녀와 친인척 등이 참석했다. 추모식은 박 화백이 평소 좋아하던 백합을 묘소에 헌화하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박 화백 부부에 대한 추도예배로 진행됐다. 미술관은 앞으로 음력 1월 28일을 박 화백의 정식 생신기념일로 삼기로 했다.

박 화백은 1남3녀 중 삼대독자로 태어났다. 위로 딸만 셋이 있어 간절했던 아들이었기에 건강하게 오래 살라는 뜻으로 이름을 ‘목숨 수(壽) 뿌리 근(根)’으로 지었다. 일곱 살에 양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그는 그림에 타고난 재능을 보였다. 당시 밀레의 ‘만종’을 도판으로 처음 보고 “하나님, 저도 이 다음에 커서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

18세가 되던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수채화 ‘봄이 오다’를 출품해 입선한 것을 계기로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빨래터’ ‘시장 여인들’ ‘농악’ ‘노상의 사람들’ 등 300여점을 남겼다. 지병인 간경화와 응혈증이 악화된 그는 65년 5월 6일 새벽 1시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국민화가로 추앙받는 이유는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일구었기 때문이다.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우리 이웃과 가족을 향한 따스한 시선과 풍경이 시대를 뛰어넘어 감동으로 다가온다는 평가다. 서울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3월 16일까지 열리는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 관람객들이 몰려드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하지만 박 화백은 자신의 작품 진위 논란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 국내 미술품 경매에서 최고가(45억2000만원)를 기록한 ‘빨래터’의 경우 “위작으로 볼 수 없다”는 법정 판결이 나왔으나 의구심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일부 목판화도 박 화백 사후에 찍은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위작을 진품으로 속이는 것도 나쁘지만 진짜를 가짜로 만드는 것은 더 나쁘기 때문에 위작 제기는 확실한 근거를 바탕으로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국내에는 공인된 미술품감정기구가 없어 진위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주장이 난무한다. 탄생 100주년을 맞아 생일 날짜를 바로잡고 행사를 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의 작품을 체계적으로 정리·연구하는 작업도 시급한 과제가 아닐까.

이광형 문화생활부 선임기자 ghlee@kmib.co.kr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展··· 서울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 17일 개막

 

 

박수근 '고목과 행인', 1960년대, 캔버스에 유채, 53x40.5cm /사진제공=가나아트

 

"괜찮아, 괜찮아"
박수근 화백이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던 말이란다. 그의 장남 박성남씨(67·서양화가)는 아버지를 회상하며 "'괜찮아'라는 말은 아버지의 트레이드마크였다"고 했다.

1950년대 고단한 시대를 살았던 화가는 서민들의 정서를 그렇게 보듬었고, 예술로 승화시켰다. 그 가난하고 어렵던 시절에도 몸 녹일 따뜻한 아랫목이 있다는 것이 고마웠고 화우들과 낱개 물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대다수의 동네사람들이 인정하듯 '무능력한 성남이 아버지'라 불려도 괜찮았다. 당시 누가 그의 정신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겠나.

올해로 박수근 화백의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1914년 그가 태어난 때는 우리 근대미술이 막 태동하던 시기였다. 바로 전 해에 춘곡 고희동이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라는 칭호를 받았으니 그 시절 태어난 박수근이 성장해 이룬 업적은 곧 우리 근대미술의 성과인 셈이다. 그의 예술세계를 되짚어보기 위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린다. 오는 17일부터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그가 남긴 유화 작품 90여점과 수채화·드로잉 30여점 등 모두 120여점을 만날 수 있다. 역대 최대 규모의 기획전이다.  

 

박수근 '빨래터', 1959, 캔버스에 유채, 50.5x111.5cm /사진제공=가나아트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의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나 할머니 그리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故 박수근 화백)

'국민화가'로 칭송받기 이전 박수근 화백은 '서민화가'로 일컬어진다. 남루하고 가난했던 그의 삶도 서민 그 자체였고,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모두 서민의 일상이다. 골목길 풍경, 일하는 여인, 장터의 여인, 기름장수 여인, 아기를 업은 소녀, 공기놀이 하는 소녀들···.

그는 남자보다는 여인과 소녀들을 주로 그렸다. 당시 억척스러움으로 시대를 버텨내야 했던 것은 우리네 어머니, 할머니라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연약하지만 지혜롭고 어진 마음으로 가정을 돌보며 이웃 간에 정을 나누는 주체인 아낙들의 모습에서 민족의 희망을 발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희망을 화려한 색감이나 화사한 꽃, 인물들의 밝은 표정으로 담아내진 않았다.

대표작 '빨래터'(1960년대 초)를 보고 있으면 그렇게 덤덤할 수가 없다. 바위 질감의 재료가 주는 무게감도 있지만 빨래하는 여인들의 모습은 결코 화기애애하거나 수다스럽지 않다. 심지어 물소리도 멈춘 듯하다. 하지만 묵묵히 빨래하는 모습에서 얼룩지고 때 묻은 시대의 고난을 깨끗이 지우고픈 서민들의 애환과 희망은 더 뜨겁게 전해진다.

박수근 그림에 나오는 벌거벗은 나무의 의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뭇가지에 돋아나는 잎새 표현에도 인색했고 꽃은 거의 그리지 않았다. '모란꽃'과 '목련'을 남겼지만 두 작품 모두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애잔한 흰 꽃들이다. 가진 것 없이 외롭고 고단한 삶을 받아들인 채 조용히 새 봄을 기다리는 서민들의 간절한 희망을 그는 그리고 또 그렸다.
 

박수근 '책가방', 수채화, 25x31cm /사진제공=가나아트

 

박수근의 예술세계를 말할 때면 독특하고 매력적인 유화 작품이 크게 주목받지만, 수채화 역시 아름답고 완성도가 높다. 그의 수채화 작품 '고무신' '책가방' '과일쟁반' '복숭아' 등은 그 시절 서민들의 일상이 눈에 그려질 정도로 정겹고 서정적인 소품들이다. 고무신은 아내가 새로 사온 꽃신이었고, 책가방은 동덕여고 다니던 딸의 가방이었다.

인간정신의 고귀함을 사상이나 논리가 아닌 평범한 인물과 사물에 대한 지극한 애정으로 표현했기에 '서민화가'이지만 그림 값은 가장 비싼 화가로 남게 된 것이 아닐까. 소박하고 남루했던 그의 삶, 그리고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를 오롯이 들여다보게 할 박수근 화백의 작품들은 일상에 쫓겨 각박해진 우리네 마음도 다시 한 번 챙겨보게 한다.

전시는 오는 3월16일까지 59일간 휴관 없이 열리며, 매주 수요일은 저녁 9시까지 개관한다. 무료 특별강연도 열린다. △1월 19일 오후 2~4시 유홍준 △1월 24일 오후 2~4시 박성남 △2월 22일 오후 2~4시 윤범모 (사전신청 없이 현장에서 선착순 50명). 티켓은 일반 1만원, 초등학생 6000원. 문의 (02)736-1020. 


 

박수근 '과일쟁반', 1962, 수채화, 25x31cm (왼쪽). '청색 고무신', 1962, 수채화, 20.5x30.5cm /사진제공=가나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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