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원씨의 달항아리전이 22일부터 27일까지 '인사아트프라자' 1층 그랜드관에서 열린다.

개막식이 열리는 지난 22일 건축가 임태종씨를 만나기로 한 장소가 바로 그 전시장이었다.

사진을 차일피일 미루다 그날 전해주기로 한 것이다.

 

마침 개막식을 앞둔 시간이라 전시작가를 비롯하여

유 준, 정영신, 박흥순, 손병주씨 등 반가운 분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전시된 작품들은 80년대 보았던 민중미술 계열의 작품과는 사뭇 달랐다.

그 당시는 정치 현실에 대한 비틀기식의 비판적 발언에 통쾌함도 맛볼 수 있었다.

 

이홍원씨는 작품에 문신을 끌어들인 적도 있었다.

그의 작품관이 풍자와 해학에 기조를 두었기에 문신에 관심을 둘 만도 했다.

 

 ‘문신회화’는 그림에 그림을 더한 것이라 또 다른 회화의 방법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대체적으로 그림을 재미있게 그리려 노력하는 것 같았다.

 

그의 비판은 마당놀이에서 뱉는 걸쭉한 농담이나 냉소같은 뼈있는 농담이었다.

비판이란 놀이 같은 속성에서 움직이는 것이라 이홍원이 추구하는 재미있는 그림과 맥을 같이 했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 중에는 달항아리 그림에 느닷없이 마리린 몬로가 그려지기도 했다.

동서양의 이질감을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보기엔 편치 않았다.

그 외에는 동화적인 작품들이 주종을 이루었.

 

개막식이 시작될 무렵, 전시장을 빠져나와 부산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몇년 만에 '부산식당'의 생태탕을 맛보았는데, 그 맛은 여전했다.

 

돌아가신 '부산식당' 주인 조성민씨는 참 인정 많은 분이었다.

가난한 예술가들 전시장에 나타나 축의금 전해 준 식당주인은 그분이 유일했다.

 

15년 전에 찍어 드린 그분 입상 사진이 아직도 '부산식당'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지키고 있었다.

사람은 떠났지만 사진은 남은 것이다.

 

임태종씨 덕에 모처럼 '부산식당'에서 생태탕으로 맛있게 먹었는데,

‘TEXT BOOK’이란 처음 본 와인까지 선물 받았다.

 

차 때문에 못 마신 술을 집에서 마셔보았는데, 와인 맛이 귀가 막혔다.

G7이 내가 마시는 유일한 와인인데, 이제 그 술은 못 마실 것 같았다.

이처럼 간사한 게 인간임을 어쩌겠는가?

 

임선생! 고마워요.

 

사진, / 조문호

 

 




지난 5일, 반가운 손님 오셨다는 연락을 정영신씨로 부터 받았다.
문경의 문화활동가 이선행씨가 인사동 왔다는데, 점심이나 같이 먹잖다.






하필 ‘헌법제판소’ 부근이라는데, 요즘은 헌법 이야기만 들어도 열 받는다.
부지런히 내려가니, 이선행씨와 함께 골목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9월 문경장에서 뵙고 처음인데, 그 때보다 살이 좀 빠진 것 같았다.
여자 분들은 살이 빠지는 것이 좋은지 모르지만, 난 든든한 미인이 좋더라.






그 곳에 맛있는 만두집이 있다는데, 자주 들락거리는 나보다 시골 사람이 더 잘 알았다.
가보니 '깡통만두'집인데, 사람들이 줄지어 있었다.
동자동에서 줄 세우는 게 지겨워, 줄서는 건 딱 질색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만두라 먹기도 편하지만, 기다리다 먹으면 더 맛있잖아.





원님 덕에 나팔 분다고, 맛있게 먹었으면 그만이지, 빈대떡 도시락까지 싸 왔다.
두 분이 인사동에서 차 한 잔 한다지만, 난 자판기 스타일이라 빠졌다.






나온 김에 볼 전시가 있어 인사동 거리로 나서는데, 뒤에서 누군가 불렀다.
돌아보니 안면 있는 분인데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야! 이럴 때, 정말 입장곤란하다.
기억이 날 듯 말듯 머뭇거렸더니, 봉화 도예가 신동여씨 이야기를 꺼냈다.
그 때야 오랜 기억이 떠올랐는데, 영주의 권오진씨 였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이종문씨와 적음까지 그리워졌다.






잘 아는 분 전시가 있어 왔다기에 따라갔더니,
‘인사아트’에서 열리는 김흥배씨의 ‘달항아리’전이었다.
달 항아리가 정말 달덩이처럼 훤하게 잘 생겼더라.  
녹차는 얻어 마셨지만, 그 곳도 자판기 커피는 없었다.






전시장을 나와 김진열, 장경호, 정복수씨 삼인전이 열리는 ‘나무화랑’으로 올라갔다.
전시장에는 김진하 관장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34년만의 "조우 또는 해우“ 김진열, 장경호, 정복수전은 ’나무화랑‘ 기획전이다.
김재홍, 김영진, 박불똥의 36년만의 만남-오!레알?』展에 이어
'중견작가 되돌아보기 시리즈' 두 번째 전시다.






강렬한 물질성과 형상성으로 민족의 아픔을 말하는 김진열씨,
초지일관 인간에 대한 발언을 쏟아내는 정복수씨,
한 때 ‘한강미술관’을 운영하며, 민중미술에 기름을 부었던 장경호씨 등
다들 한 가닥 하는 배트랑 작가전이라 볼만하다.






그러나 방명록에 흔적만 남기고, 얼른 줄행랑쳤다.
사실 장경호 만나지 않으려고, 개막식을 피해 일부러 일찍 간 것이다.





그는 동생처럼 생각하는 친구지만, 요즘은 일체 상종을 않는다.
한 달 전에 부린 주정이 내게 부린 술주정이라면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건 정영신에 대한 모욕이라 참을 수 없었다.
지금은 내 기집이 아니지만, 십 몇 년 살아보니 참 착한 년이더라.
여지 것 그 여자 힘들게 하면 누구든 그냥 두지 않았다.






그러나 화는 시간만 지나면 풀리지만, 이 참에 버르장머리를 고칠 작정이다.
그만큼 서럽고 외로웠으면 작업으로 토해낼 때도 되었는데, 허구한 날 술로 세월 보낸다.
그것도 조용히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쌓인 분노를
술 친구에게 다 풀어 주변에 술친구가 없다.






사실 좋은 신작이라도 내놓았다면, 오히려 내가 사과하려 했다.
무슨 철천지 원수진 것도 아니지만, 작업에 매달리지 않는 한 보지 않을 생각이다.





나 역시, 존경하는 선생이던 친구든 후배든, 가리지 않고 입 바른 소리를 해 사람 많이 잃었다.
그렇지만, 그런 모욕에도 깨우치지 않는다면, 다시 만날 필요 없다.
좋은 사람 만나기도 바쁜데, 덜 된 사람 만날 필요가 뭐 있겠는가?






그나저나, 커피생각은 간절한데 인사동에는 커피자판기가 없다.
커피 한 잔 얻어 마시러 계동 ‘민예총’사무실로 올라갔더니,
정영신씨는 없고 서인형 국장과 미술평론가 최석태씨가 있었다.
다들 ‘민예총’ 기금 마련전 준비로 바쁜 것 같았다.
커피 한 잔 얻어 마시니, 그때야 정영신씨와 이선행씨가 올라왔다.






마침 탁자 위에 2003년도 ‘문예진흥원’에서 만든 신학철선생 전시도록이 있었다.
신학철화백의 걸작들을 다시 볼 수 있었는데, 끔찍한 작품 한 점이 눈에 밟혔다.






난, 세상만사 미리 정해져 일어난다는 운명론보다 인간이 짓는 업보를 믿는 편이다.
저 그림이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지만, 자꾸 마음에 걸렸다.
세상사 누가 알겠냐마는, 좋은 것이 좋다는 어른들 말씀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닐 게다.






지금 선생께서 처한 슬픔이, 한낱 기우에 그쳤으면 좋겠다,
제발 기적이 일어나길 빈다. 간절히...



사진, 글 / 조문호

































달항아리_자연 속 한지를 그 안에 담다

김보영展 / KIMBOYEONG / 金寶英 / painting
2014_1210 ▶ 2014_1216

 

김보영_닮다_한지에 천연염료 염색, 백토_163×130cm_2014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0625f | 김보영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30pm

공아트스페이스GONG ART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 5길 14(관훈동 198-21번지)

Tel. +82.2.730.1144/735.9938

www.gongartspace.com

 

달항아리_白磁大壺 ●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도자기 중에 큰 키에 둥근 모습을 한 백자항아리가 있다. 이 항아리는 조선시대 18세기에 100년간 집중적으로 생산되고 사라진 기형이다. 하얀 색의 둥글고 펑퍼짐한 모습을 본 사람들은 '푸근하다, 소박하다, 담백하다, 둥근 곡선이 아름다우며, 한국적인 美를 보여준다.'등 많은 찬사를 내놓으며, 항아리에 달이라는 단어를 붙여 '달항아리'로 부른다. 왜 이 항아리에 달이라는 명칭을 붙였을까? '달'은 예로부터 염원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농경사회에서는 달이 차오르고 비어지는 주기가 삶을 결정짓는 큰 부분을 차지하며,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현대인의 삶에서 달이라는 존재가 생계를 움직일 정도의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몸소 느끼지 못하지만, 항아리에 달이라는 명칭을 붙여 부를 만큼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자연에 대한 무의식이 존재한다. ● 달항아리는 높이가 40cm이상이고, 높이와 항아리의 둘레가 1:1의 비례가 되어, 마치 컴퍼스로 원을 그리듯 둥근 형태이다. 아무런 문양이 들어가지 않는 이 대형의 항아리는 심미적인 이유로 달항아리가 上·下·左·右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당시 사대부들의 주관심사인 周易의 太極을 형상화하여 이를 감상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이 기형은 중국과 일본에서 나타나지 않는 형태로 조선만의 양식을 담고 있다. 그 당시 중국과 일본, 유럽 등지에서 제작된 도자기들은 화려한 문양과 다양한 기교를 담은 인위적인 형태의 도자기들이 유행하였다. 조선에서 달항아리와 같은 기형이 만들어진 것은 당시 왕실의 든든한 후원과, 사대부 문인의 수요층이 새롭게 등장하면서 최고의 품질의 백자가 집중적으로 제작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가장 조선적인 기형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김보영_달을 담다 1_한지에 천연염료 염색, 백토_145×145cm_2014

 

김보영_달을 담다 2_한지에 천연염료 염색, 백토_145×145cm_2014

 

김보영_달을 담다 3_한지에 천연염료 염색, 백토_145×145cm_2014

 

 

달을 담다. ● 작가는 조선시대 18세기에 제작되어 현재 전해지고 있는 백자달항아리의 모습을 보고 천연 염색한 한지라는 소재를 사용하여 새로운 형태의 달항아리를 이번 개인전에서 전시한다. 지금 우리가 보는 달항아리는 흰 바탕에 이리저리 얼룩이 져있고, 제작되었을 당시의 순백색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달항아리는 액체를 담기 위해 제작된 그릇으로 사용하는 사람과, 장소에 따라 무언가 담고 비우는 반복되는 과정에서 그 안에 흔적이 스며있다. 본성은 변하지 않지만, 그 안에 시간과 자연을 담아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김보영_달을 담다 4_한지에 천연염료 염색, 백토_145×145cm_2014

 

김보영_달을 담다 5_한지에 천연염료 염색, 백토_145×145cm_2014

 

 

한지도 작업과정에서 당시의 환경이나, 날씨, 온도 등의 모든 조건들을 담아 각기 다른 무한한 색으로 표출한다. 천연염색을 통해 얻어진 색은 자연이 주는 강한 생명력을 한지 안에 오롯이 담아낸다. 이러한 색은 현대인들이 만들어내는 인공적이고, 인위적인 색감이 아닌 자연 그 본성이 한지 안에 나타난다. 작가는 염색작업을 통해 자연이 담긴 한지를 만들어간다. 한지는 자연이 주는 순 원료(쪽, 쑥, 오리목, 소목, 홍화 등 자연염색의 소재)를 이용하여, 염료를 끓이거나 물에 담궈 색을 추출하여 염액을 만들고, 한지를 담궈 말려 색을 정착하는 과정이 이루어진다. 이는 작품에 필요한 일차적인 재료를 얻어내는 과정이자 작가 자신을 한지에 담아내는 과정이다.

 

김보영_마음을 담다_한지에 천연염료 염색, 백토_90×90cm×9_2014
 

이번 전시되는 달항아리는 백자를 만들 때 일차적인 원료인 白土를 화판 전체에 바르고, 순백 바탕의 달항아리에 자연의 元氣를 담고 있는 한지 한 조각, 한 조각이 어우러져 유기적인 존재로 결합하고, 그 배열을 통해, 각기 뽐내고 싶은 생명력을 담아 하나의 형상이 만들어진다. 작가는 자신이 반복적으로 행하는 작업과정을 통해 자연과 자연이 결합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가 이루어내는 한지의 결합은 '달항아리'라는 결정체로 재탄생된다. 작가는 그동안의 작업에서 자연에서 얻은 색이 담긴 한지로 자연의 이미지를 형상화 하는 작업을 해왔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無에서 形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순백의 백토 위에 한지를 사용하여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달항아리를 만들었다. 작가는 현재 전해지는 조선시대 달항아리 모습 뿐 아니라 작가의 시점에서 재조명한 달항아리 기형도 선보이다. 조선시대 만들어진 도자기 중에서도 한국적인 기형인 대형의 백자항아리를 선택한 것은 작가가 전통과 현대를 이어가는 끈을 '달항아리'로 연결한 것이다. 작가가 시도한 이 작업은 전통적인 소재와 전통 기법의 만남이며, 이번 전시를 통해 전통과 현대가 소통하는 시간이 되고자 한다. ■ 전남언

 

 

 

Vol.20141209e | 김보영展 / KIMBOYEONG / 金寶英 / painting

 

 


경북 고령에서 3대째 가업을 이어 온 조선백자 장인 백영규씨의 달항아리 ‘조선달 月’전이, 11월 5일부터 11일까지 인사동 ‘아라아트’3층에서 열린다.

방송인 전유성씨가 기획하여 추진한 '조선달'전에 소설가 박인식씨가 나섰는데, 전시도록의 발문 내용도 좋았지만 표제로 쓴 “조선달 月”이란 글이 너무 멋졌다. 돈 안 되는 소설가보다는 서예가로 나서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5일 오후6시에 시작된 개막식에는 작가 백영규씨 내외를 비롯하여 전유성, 박인식, 무세중, 무나미, 송상욱, 서수남, 신영수, 김호근, 심철종, 최일순, 권순철, 이명희, 김정남, 노광래, 편근희, 이상철, 정영신, 인오스님 등 많은 분들이 전시를 축하하며, 달항아리의 멋에 흠뻑 빠졌다.  풍만한 몸체를 가진 달항아리 절정의 원숙미에 취해....

개막행사의 하나로 행위예술가 심철종씨의 퍼포먼스가 있었는데, 멀쩡한 달항아리를 망치로 때려 부수는 것이었다.
조그만 사발 하나 값도 만만찮다는데, 그 돈의 가치를 깨부수는 통쾌함을 다 함께 맛 보게 한 것이다.
심철종씨에 따라 전유성씨도 항아리를 깼으나, 백영규씨가 깨는 소리에 비교될 수가 없었다.
둔탁한 소리가 난 두 분에 비해, 소리의 파장이 훨씬 크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동안 수 많은 항아리를 깨트려 온 백영규 장인의 관록을 누가 당할 수 있겠는가?

인사동 '유목민'에서 '로마네꽁띠'로 옮겨 간 전시 뒤풀이는 밤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다.

사진,글 / 조문호

 

 

 

 

 

 

 

 

 

 

 

 

 

 

 

 

 

 

 

 

 

 

 

 

 

 

 

 

 

 

 

 

 




[People] ‘달항아리’ 도예가 박부원 명장

1956년 열여덟 살 소년은 고향 전북 김제를 떠나 무작정 상경 길에 올랐다. 밀양 박씨 종손 집안에서 모자람 없이 자란 그였다. 하지만 가세(家勢)가 기울더니 유난히 아끼고 보듬어 주시던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혈혈단신으로 도시로 올라간 소년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공부했다. 강도 높은 노동에 학업까지 병행하려니 몸이 남아나질 않았다. 불광동과 구파발을 잇는 도로공사 현장에서 돌을 지고 가다 굴러 떨어져 죽을 뻔한 적도 있다. 그러던 그는 스물넷이 되던 해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서울 인사동 길을 걷다 쇼윈도에서 우연히 본, 고(故) 도암 지순탁 선생의 도자기가 그의 영혼을 건드렸다.

“그 그릇을 보고는 도자기에 단단히 미쳤죠. 수소문 끝에 지순탁 선생을 찾아가 도예에 몸 담은 지가 어느덧 반세기가 지났네요.”

광주 왕실 도자기 초대 명장인 지당 박부원 명장의 이야기다. 올해로 도력(陶歷) 52년에 접어든 그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도예가로 불린다.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지난 7월24일,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도원요에서 박 명장을 만났다. 백발의 노(老) 도예가는 곧은 자세로 앉아 자신의 다기(茶器)에 차(茶)를 달였다. 찻잔을 건네받아 두 손으로 감싸니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주위에는 명장의 대표작인 달항아리를 비롯한 도자기들이 전시돼있었다.

둥그스름한 형태가 보름달처럼 생겼다 해 이름 붙여진 달항아리는 17세기 후반 숙종 때부터 18세기 영·정조 때까지 많이 만들어졌다. 18세기가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것도 도예를 비롯한 예술이 융성했기 때문이다. 특히 달항아리는 중국과 일본에는 없고 오직 한국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문화적 가치가 크다. 완벽한 원형이 아니라 약간 불균형하게 왜곡된 미(美)도 달항아리만의 맛이다.

 

 

 박부원 명장이 자신의 작품 ‘주동채용천 달항아리’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작품에 표현된 빛깔은

요변(窯變) 과정에서 만들어졌다”며 “자연과 인간이 함께 만든 색상”이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도예 정수 ‘달항아리’ 대가


박 명장은 달항아리 대가다. 그는 조선 달항아리를 재현한 것은 물론, 이를 한층 더 발전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 특히 새로운 시도를 하기로 유명하다. ‘분청귀얄암각문항아리(粉靑刷毛目岩刻文壺)’에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서 영감을 받아 수천 년 세월 속에서 풍화된 바위의 모습을 담았다. 그런가 하면 지난 5월에 열린 전주대학교 개교 50주년 초대전에서는 다양한 빛깔의 달항아리를 선보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는 “18세기 분원의 달항아리는 그 시대의 문화와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전통 정신을 계승하되 21세기 시대상에 걸맞은 작품이 나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색이 들어간 달항아리를 만들었다”고 제작 배경을 설명했다.

그중에서도 ‘주동채용천(朱銅彩溶川) 달항아리’는 그가 특히 애착을 갖는 작품이다. 넉넉한 원형이 아닌 마름모 형태로 빚어졌으며, 가마 안에서 산화동 유약이 요변(窯變·도자기를 구울 때, 불꽃의 성질이나 잿물의 상태 따위로 가마 속에서 변화가 생겨 도자기가 예기치 못한 색깔과 상태를 나타내거나 모양이 변형되는 일)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푸른 바탕 위에 붉은 빛이 갈라지는 모습의 달항아리가 탄생했다. 이 작품을 보고 전광식 고신대 총장은 “전통 항아리의 질박미를 뛰어 넘는다”며 “혼돈과 공허가 깨지면서 천지가 만들어지는 창조의 장엄한 순간이 보인다”고 격찬했다. 화려한 색상에 익숙한 중국 도예가들조차 “이처럼 신비로운 색은 중국에서도 만들지 못한 빛깔”이라며 감탄할 정도였다.

박 명장은 자연과 호흡하는 자세가 좋은 도자기를 만든다고 말한다.

“도예는 자연과의 소통입니다. 저는 흙을 빚고 불을 때지만, 가마 안에서는 전적으로 자연의 몫이죠. 도자기가 구워지면서 요변이 일어나기 때문에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몰라요. 그뿐인가요. 계절과 기후마다 가마 불 색깔이 달라요. 여름엔 탁하고 봄·가을엔 밝죠. 도자기를 굽고 싶다고 해서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절기를 기다리고 때를 맞춰야 하죠. 마치 추수 때를 기다리는 농부와 같습니다.”

그가 자연을 이해하는 데는 시골에서 보낸 유년시절이 영향을 미쳤다. 그는 어릴 적 김제평야가 황금빛으로 물드는 과정을 보면서 자랐다. 서리 내릴 무렵엔 메뚜기며 참게를 잡으러 다녔다. 친구들과 동진, 신포바닷가 개펄에서 맨발로 뛰어놀기도 좋아했다. 그 기억을 되살려 만든 작품이 어릴 적 뛰놀던 서해 개펄을 표현한 ‘개펄 다완’이다.

전통도자를 재현하며 기본을 다졌던 경험도 창작의 밑거름이 됐다. 지난 1962년 박 명장은 도암 지순탁 선생 문하생으로 들어가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에서 1세대 도예가들과 함께 재현 작업에 참여했다. 일제 침략으로 맥이 끊긴 전통도예를 되살리는 일은 한국 도예 부흥을 위한 숙명이었다. 그는 “춥고 배고픈 와중에도 뭔가에 씐 사람마냥 계속 도자기를 만들었다”며 “밥을 못 먹어 얼굴이 붓고 동상으로 고생도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렇게 열정을 쏟은 결과, 2년 6개월 동안 청자와 백자, 분청사기까지 모두 재현할 수 있었다. 작업 성공 이후에도 10년간 도암 아래에서 더 배우며 전통도예를 익혔다. 1974년엔 독립해 나와 도원요를 설립했지만 여전히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불 다루기가 쉽지 않아 가스 가마로 돌아선 도예가도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한 눈 팔지 않고 전통 가마만을 고집했습니다. 전통적 바탕 위에 새로움을 심어낼 때 깊이 있는 작품이 나온다고 생각했어요. 옛 것을 모방만 하는 일도 창작이라고 할 수 없고, 기본 바탕 없이 새로움만 추구해서는 작품의 격조를 높일 수 없죠.” 그의 대답에서 법고창신(法古創新·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함)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도자기 만드는 일은 설레임의 연속


만 76세. 은퇴를 생각할 법한 나이지만 박 명장은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도자기를 만들고 있다. 앞으로는 손 위에 올려놓고 감상할 수 있는 소물(小物)도 선보일 예정이다.

“도자기를 만들면서 잠시도 지루했던 적이 없어요. 이번엔 어떤 녀석이 나올지 생각하면 무척 설레거든요. 50년 넘게 설렌다는 건 행복한 일이죠.”

말하는 그의 얼굴에 순간, 엷은 미소가 번졌다.  

 

▒ 지당 박부원 명장은…
1938년 11월 12일 전북 김제 출생, 62년 도암 지순탁 선생 문하로 도예 입문, 74년 도원요 설립, 2008년 광주 왕실 도자기 초대 명장, 2012년~현재 광주 백자 공모전 심사위원·광주 왕실 명장 심사위원


[이코노미조선 / 이수빈 인턴기자]

30억대 도자기 먹고 “나 잡아봐라~”

[일요신문] 조용하던 인사동에 바람이 불었다. 지난해 7월 강남 부동산 재벌 ‘송 회장’이 인사동에 등장하면서 이 일대의 골동품 업계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송 회장이 역삼동 소재 250억 상당의 부동산과 인사동 일대의 골동품을 교환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송 회장에게 줄을 대려는 골동품 상인들의 경쟁이 치열해진 것이다. 불황이 이어지던 인사동 일대 골동품 상인들에게 송 회장의 등장은 생명줄과 다름없었다. 송 회장은 고미술품계 원로는 물론 주변 상인들과도 오랜 시간 교류를 하며 신뢰를 쌓았다. 그렇게 송 회장은 청화백자 2점과 조선시대 달 항아리 1점, 국보급 고려청자 진사화병 1점 등 총 4점의 골동품을 나중에 값을 치른다는 조건으로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시가만 해도 총 30억 원에 달하는 도자기였다. 도자기를 손에 넣은 송 회장은 “날 잡을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잠적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조용했던 인사동 골동품 업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송 회장과 그를 도운 일당의 기막힌 사기극 전말을 따라가 봤다.


▲ 국보급 청자 등 도자기 4점을 가로챈 골동품 사기사건이 벌어져 인사동 업계가 패닉에 빠졌다.

위 사진은 골동품 가게 CCTV에 찍힌 주범 ‘가짜’ 송 회장과 민 씨.
 
인사동에서 고미술품을 15년간 취급했다는 정 아무개 씨는 요즘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지경이다. 20년 전부터 알고 지낸 후배 민 아무개 씨와 그가 양 아버지로 모신다는 송 회장이 시가 5억 원 상당의 조선시대 달 항아리 1점과, 감정가 15억 원 상당의 국보급 고려청자 진사화병 1점을 교묘한 수법으로 편취했기 때문이다. 지난 4일 실제 강남 부동산 재력가인 송 회장을 사칭한 박 아무개 씨(67)가 경찰에 체포되면서 조선시대 달 항아리는 회수했지만 정 씨가 아꼈던 국보급 고려청자 진사화병은 여전히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송 회장을 사칭한 박 씨 일당의 사기극은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피해자 정 씨는 고미술품을 찾는 고객과 식사를 하기 위해 찾은 식당에서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동생 민 씨를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 변변한 직업조차 없었던 민 씨는 어느새 인사동 인근 큰 식당 3곳에 투자까지 하는 재력가가 돼 있었다. 민 씨는 정 씨를 비롯해 인사동 일대 고미술품 상인들과 교류를 하며 친분을 쌓기 시작했다. 언변이 화려하고 붙임성이 좋았던 민 씨는 금세 자신의 입지를 넓혀갔다.


▲ 피해당한 가게 주인.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민 씨가 은연중 사람들에게 송 회장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면 민 씨는 ‘송 회장님’과 통화를 하기도 했다. 민 씨는 송 회장을 수백억 원대의 부동산을 가지고 있는 재력가로 소개하며 4년 전 우연히 골프장에서 만났다고 설명했다. 민 씨는 송 회장의 가정사까지도 세세하게 알고 있었다. 송 회장의 친아들이 송 회장의 불륜을 뒷조사해 어머니와의 이혼을 강요하고, 유책사유(책임이 있는 사유)로 재산을 요구한다는 이야기였다. 이에 인생의 허망함을 느낀 송 회장이 부동산도 정리할 겸 250억 원 대의 고미술품을 사들일 것이라는 정보도 흘렸다. 그때까지도 민 씨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피해자 정 씨는 “민 씨가 소개해준 송 회장은 인사동 고미술품 업자들에게 역삼동 소재의 공시지가 180억 원 상당의 건물과 대지를 가지고 있다는 공증받은 서류를 보여줬다. 실제로 몇몇 업자들은 역삼동으로 가서 건물주를 확인하기도 했다. 틀림없는 송 회장의 소유였다”며 “이후 송 회장을 소개시켜 준 민 씨는 고미술품계의 떠오르는 샛별 혹은 다크호스로 통했다. 10원짜리 대출하나 없는 깨끗한 땅을 250억 상당의 고미술품과 바꾼다고 하니 고미술업계 원로들까지 현혹됐다. 다들 민 씨를 잡으면 살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혈안이 돼 있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피해자 천 아무개 씨는 “사업장으로 민 씨와 송 회장이 찾아와 가끔 차도 마시고 이야기도 나눴다. 직접 송 회장의 건물로 가서 건물주를 확인하고 온 사람들도 있었기에 송 회장은 상인들 사이에서는 신원이 확실한 사람으로 통했다”며 “송 회장이 미국에 있는 자신의 내연녀로부터 얻은 11살가량의 아들이 하나 있다고 했다. 그 아들에게 유산을 물려주려 하는데 땅을 물려주면 상속세 문제도 있고 해서 골동품을 사서 주려고 한다고 말해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1년간 고급승용차와 재력을 과시하며 사람들의 눈을 속여 온 가짜 송 회장 박 씨와 그의 공범 민 씨는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민 씨는 시가 5억 원 상당의 조선시대 달 항아리를 보유하고 있는 정 씨에게 접근해 구입의사를 밝혔다. 얼마 후에는 민 씨가 송 회장의 심부름으로 왔다며 정 씨가 보유하고 있던 감정가 15억 원 상당의 국보급 고려청자 진사화병도 미리 가져가겠다고 했다. 정 씨는 워낙 고가의 물건이라 동행 하에 송 회장의 자택까지 운반하겠다고 했지만 민 씨는 “송 회장은 외부인이 집에 들어오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며 극구 반대했다. 피해자 정 씨는 “신원이 확실한 사람에게는 관례상 확인증과 보관증을 받고 돈을 받기 전 물건을 건넨다. 상대방이 감정을 원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라며 “LH공사 주택지구로 지정된 군포의 땅이 팔리면 대금지불을 하겠다고 해 그때까지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 여전히 행방이 묘연한 15억대 고려청자 진사화병 인증서. 아래는 피해당한 가게 내부 모습.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민 씨는 정 씨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정 씨가 꺼내놓은 물건을 들고 나갔다. 민 씨는 물건을 먼저 가져간 뒤 “내가 바빠서 물건을 먼저 가져가 송 회장님께 건넸으니 걱정 말아라”고 정 씨를 안심시켰다. 민 씨는 또 다른 피해자 천 씨의 청화백자 2점도 똑같은 방식으로 빼돌렸다. 천 씨가 자리를 비운 사이 물건을 가져 간 다음 차후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보관증을 써주는 수법을 사용했다. 당장 신고가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한 수법이었다.

이렇게 도난당한 도자기 4점은 인사동의 고미술품 업계 사정을 잘 아는 또 다른 공범인 장물 브로커 김 아무개 씨에게 넘겨졌다. 김 씨는 이 도자기 4점을 3명의 장물업자에게 맡기고 억대의 돈을 대출 받았다.

결국 물건 대금을 지급하기로 한 기일을 3번이나 넘긴 송 회장은 자취를 감췄다. 송 회장을 사칭한 박 씨는 마지막 통화에서 “대한민국에 내 신원 아는 사람 얼마 없다. 나 잠수타면 그만이다. 나 못 잡을 거다”라고 말하는 대범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경찰의 계속되는 위치추적과 피해자들의 협조로 가짜 송 회장 박 씨는 지난 4일 경찰에 체포됐다.

경찰 조사 결과 범행을 주도한 박 씨는 실제 부동산 재력가 송 아무개 씨의 주민등록증을 위조해 범행에 사용해온 상습토지사기범으로 드러났다. 이때 사용된 위조금액 100만 원은 민 씨가 지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일당은 도자기를 담보로 대출받은 돈을 사설경마, 유흥비 등으로 탕진했다. 용산경찰서 관계자는 “장물업자들로부터 회수한 도자기 3점은 워낙 고가의 물건이라 문화재청의 협조아래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 의뢰했다”며 “나머지 1점의 행방을 확인 중이며, 추가 피해자가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실제 인물 송 회장은 자신의 신원을 도용해 벌어진 이번 사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


도난당한 도자기 뭐기에…



15억짜리 국보급 청자는 행방 묘연

  ▲ 달항아리

자국의 고미술품을 국내외에서 사들이는 수집가가 많은 중국에 비해 우리나라에는 고미술품을 사들이는 컬렉터가 적다. 그러다 보니 1990년대에 비해 오히려 고미술품의 값이 10배 이상 떨어졌고 고미술 시장의 불황이 계속되면서 ‘고사상태’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이번에 발생한 ‘인사동 고미술품 사기 사건’은 오랜 불경기를 겪고 있는 상인들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장물브로커가 개입돼 있어 그 피해가 더 컸다. 이번 사건에 연루돼 있는 장물 브로커 김 씨의 경우 누가 어떤 물건을 들고 있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고미술품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가짜 송 회장 박 씨와 공범 민 씨가 억대의 청화백자 2점과 달 항아리 1점, 국보급 고려청자 진사화병 1점 등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도 김 씨의 정보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천 씨가 보유하고 있던 청화백자는 각각 시가 1억 원과 2억 원에 거래되던 작품이었다. 청화백자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백자항아리의 한 종류로 푸른색의 청화 안료로 그린 문양들이 특징이다. 천 씨의 청화백자는 장물업자 정 아무개 씨에게 흘러들어갔다 현재 2점 다 회수된 상태다.

정 씨가 보유하고 있던 조선시대 달 항아리 1점과 국보급 고려청자 진사화병 1점의 시가는 각각 5억 원과 15억 원에 이른다. 특히 달 항아리는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한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부터 극찬을 받으면서 컬렉터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아졌다. 이 달 항아리는 장물업자 임 아무개 씨에게 흘러들어갔으나 임 씨가 포기각서를 쓰면서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그러나 가장 고가인 고려청자 진사화병은 주인에게 돌아오지 못했다. ‘진사’는 청자에 새겨진 붉은 문양을 뜻하는 것으로 청자 1000개 중 1개에서만 ‘진사’ 문양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희귀한 도자기다. 이 고려청자 진사 화병은 인천의 수백억 원대의 자산가 김 아무개 씨에게 흘러들어간 이후 처분된 것으로 알려졌고, 그 후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일요신문 / 배해경기자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