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수호

 

 

금요일의 인사동은 소란 속에 정겹다. 곳곳에서 이국 청년들의 버스킹이 열리고, 물방울 마술이 펼쳐지는 동안, 사람들은 느릿한 걸음걸이로 전통의 냄새를 즐긴다. 상업화의 물결 속에 굳건히 살아남은 키 낮은 집들, 화랑과 필방, 좁게 굽어지는 골목길에 우리 맛을 지키려는 음식점이 있어 고맙다.

이생진 시인도 매월 마지막 금요일에는 어김없이 인사동으로 향한다. 도봉구 방학동 집에서 마을버스로 나와 4호선 쌍문역에서 지하철을 타고는 충무로역에서 3호선으로 환승해 안국역에 내리는 코스. 86세 노인이 1시간 걸려 닿는 곳은 ‘순풍에 돛을 달고’라는 이름의 갤러리 카페다.

지난 31일, ‘잊혀진 계절’이 국민가요처럼 울려 퍼진 그날, 순풍카페에선 시낭송 모꼬지 ‘진흠모’(이생진을 흠모하는 모임)의 월례 시회(詩會)가 열렸다. 6시 반인데도 좌석은 꽉 찼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환영이다. 잔치 참가비 2만원을 내면 삶은 돼지고기와 묵과 나물과 찌개와 밥에 막걸리가 자꾸 나온다.

순수를 노래하는 인사동의 시낭송 모꼬지

이날 테이블에 놓인 팸플릿에는 ‘111+53’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다. ‘111’은 인사동 보리수 카페에서 이뤄진 모꼬지가 111개월 동안 이어왔다는 뜻으로, 이 모임을 주도한 이가 이생진 박희진 시인이었다. 그러다 보리수에 사정이 생겨 이 시인 혼자 ‘순풍’으로 이사한 게 53회째라는 이야기다. 지난 8월의 순풍 4주년 기념식에는 84세의 동료 박희진 시인과 97세의 황금찬 시인이 참석해 생일을 축하했다.

‘111+53’ 모꼬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동인들의 발표와 낭송으로 꾸며졌다. 어떤 이는 자작시를 읽고, 또 어떤 이는 남의 시를 읽는다. 이생진 시인은 “제발 나의 시를 읽지 말라”고 당부하지만 제자들의 배반은 어쩔 수 없다. 이날도 그랬다. 여수 앞바다 금어도에서 올라온 박숙희 회원이 기어이 ‘그리운 바다 성산포’를 암송했다. 촉촉한 입술과 젖은 눈으로 긴 시를 외는 동안 시인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낭송가 김경영은 박산 시인의 ‘인사島 순풍港’을 읽었다. “달 끄트머리 금요일/ 인사도 순풍항에서는/ 이생진 시인이 시로 노를 젓는데/… 노 젓기 앞소리에/ 박자 맞춰 어기여차 우렁찬 뒷소리/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시인께서 반 고흐를 모셔온다/ 사이프러스를 보면 사이프러스를 그리고 싶고/ 술을 보면 술을 마시고 싶고/ 여자를 보면 여자를 안고 싶고….” 자신들의 모꼬지 풍경을 시로 노래한 것이었다.

“바다가 보이면, 됐어!” 시 읽는 세상 꿈 꿔

마지막으로 이생진 시인이 일어선다. 팔순 나이에 갤럭시 노트4를 쓰고 있었다. 허리 꼿꼿하고 목소리 쩌렁쩌렁. 우리나라 섬 구석구석을 밟아 서정시로 빚어낸 시인이지만 이날은 돈 매클라인의 아메리칸 파이와 빈센트를 연결한 래퍼로 변신했다. 그 열정과 기억력에 박수 작열! 그러고는 신작 ‘시를 훔쳐가는 사람’을 발표했다. “…시 쓰는 사람도/ 시 읽는 사람도/ 원래는 도둑놈이었다/… 내 시도 많이 훔쳐가라/ 하지만 돈 받고 팔지는 마라/ 세상은 돈 때문에 망했지, 시 때문에 망하지는 않았다.”

이날 모인 멤버는 화랑 대표, 라인댄스 강사, 교수, 교사, 디자이너, 예비역 장성, 변호사, 주부, 상인 등 다채로웠다. 전주에서 왔다가 막차 타고 내려가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시가 있는 아름다운 사회를 꿈꾼다. 시를 읽으면 마음이 착해지고, 눈이 아닌 소리로 읽는 시가 삶에 활력과 영감을 준다고 했다.

뒤풀이 시간에 이 시인이 이곳에만 통용되는 건배사를 외친다. 떨리는 손으로 잔을 들고 “됐어!”라고 선창하니 “됐어!”라는 호응이 따른다. 다시 “바다가 보이면”이라고 외치자 “됐어!”라고 화답이 이어졌다. “됐어! 됐어! 됐어!” 가수 현승엽의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가 곁들여지는 동안 막걸리잔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인사동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달빛이 사위어가는 동안 시는 뜨겁게 살아나고 있었다. 시월(十月)은 시월(詩月)로 충분했다.

[국민일보] 손수호 (객원논설위원·인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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