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밤이 가장 긴 동짓날이 되면 서울역광장에서 홈리스 추모제가 열린다.

한 해 동안 거리나 시설, 쪽방과 고시원 같은 열악한 곳에서 죽어 간 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자리다.

 

홈리스의 죽음을 추모하는 자리는 올해로 21년째다.

빈곤사회연대, 홈리스행동, 동자동사랑방 등 많은 단체가 연합한

'홈리스 추모제 공동기획단'에서 마련한 행사다.

 

올해는 비명에 죽어 간 무연고자가 모두 395명이라고 한다.

이 숫자는 시민단체에서 파악한 비공식 집계로,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 수는 알 수도 없다고 한다.

 

그리고 지난달부터 서울 곳곳의 노숙인시설과 쪽방, 고시원 등에서 코로나 집단 감염으로

확진자가 번져가고 있으나 방역당국은 그 규모조차 공개하지 않는 다는게 추모제기획단의 설명이다.

아마 그동안 치뤄 온 홈리스 추모제 중 가장 많은 숫자로 추정된다.

 

작년 초부터 시작된 코로나는 집 없는 노숙자나 가난한 자들에게 더 가혹했다.

정부의 전염병 대책은 안정적 거처를 전제로 한 자가격리와 재택치료인데,

노숙자는 집이 없으니 정부 대책에 포함될 수가 없는 것이다.

고시원과 쪽방엔 주방이 없고 화장실도 한 층에 하나밖에 없어 다들 함께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개의 쪽방에는 창문 없는 방이 많아 환기를 위해 방문을 열어놓을 수밖에 없으니

자가격리나 재택치료라는 말은 허황한 지침에 불과하다.

 

지난 11월, 단계적 일상회복이 시작한 후 용산구의 한 고시원에서 집단 감염이 발생했다.

확진자가 생활치료센터에 들어가지 못해 방치되는 사이, 바이러스가 고시원 전체에 번져버린 것이다.

나중에는 확진자보다 걸리지 않은 사람을 찾는데 혈안이 되었다고 한다.

서울역에서 노숙하는 어떤 이는 코로나19에 확진된 후에도 갈 곳이 없었단다.

광장에 머물며 사람들이 다가오면 ‘확진됐으니 다가오지 말라’며 손사래를 쳐야 했다.

감염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개인의 몫일 뿐 이었다.

 

추모제가 열린 지난 22일에는 서울역광장 ‘홈리스 기억의 계단에 무연고사망자의

이름만 적힌 사진 없는 액자 앞에 장미 395송이가 빼곡히 놓여있었고,

 2021 홈리스 인권 10대 뉴스와 홈리스 추모제 핵심요구안이 적힌 가두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홈리스 추모제가 열리는 동짓날에는 동지팥죽을 끓여 나누어 주었지만

코로나 여파로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팥죽 없는 조촐한 추모제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코로나 때문인지 노숙하는 이들의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추모제가 열리는 오후 6시가 가까워오니 서울역 광장으로 추모객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차례대로 나와 빼곡이 나열된 영전에 추모했다.

 

주장욱 아랫마을 홈리스야학 교사의 사회아래

춤꾼 이삼헌씨의 위령무 춤사위가 시작되었다.

비통한 몸짓 속에 떨어지는 꽃잎은 그들의 넋인 냥 처연했다.

 

추모발언에 나선 동자동 정대철씨는 유영기이사장을 기억하며 그리워했다.

정씨는 좀처럼 쪽방 밖으로 나가지 않고 혼자 지냈으나 유영기씨 덕에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주민들을 만나고, 사랑방 소식지를 나누어 주는 등의 봉사활동에 보람을 느꼈단다.

집에만 있을 때보다 몸도 덜 아프단다.

 

‘양동쪽방주민회’에서 장례위원을 맡고 있는 이차복씨는

한 해 동안 양동 쪽방촌에 살다 돌아가신 분이 29명이나 된다고 했다.

전체 주민 400여명에서 29명이 죽었다는 것은 뉴스에 나올 법도 하지만,

아무도 모르게 외롭고 쓸쓸히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 분들 평균 연령은 48세란다.

이건 병사가 아니라 정부와 사회가 죽인 살인이나 다름없다..

 

‘빈곤사회연대’ 정성철 사무국장은 안타깝게 죽어 간 주광석의 사연을 풀어놓았다.

방을 구하거나 병원에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등 각별히 챙겼지만,

고시원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는 부고를 받았단다.

그의 형이 시신 인수를 포기했다는 소식을 보름 전에 들었어나 아직 공영장례 공고가 나지 않아

두 달 가까이 그의 장례를 치루지 못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연고자가 나타나기만 기다리는 시간은 기약이 없다,

죽어서도 영안실 냉동고에 누워 하염없이 장례 치루어주기만 기다려야 하는가?

죽은 신체에 관한 권한은 혈연 가족만이 소유할 뿐,

그가 살아 생 전 맺은 숱한 관계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민중가수 박준 씨가 나와 ‘전태일 다리에 서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아랫마을 홈리스야학 학생인 로즈마리와 꺽쇠 씨가 나와 ‘우리가 만든 홈리스 권리선언문’을 낭독했다.

“홈리스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구조적 문제이며,

치료다운 치료, 존중받는 밥상, 애도할 권리 등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요구했다.

 

추모제가 끝날 무렵, 홈리스추모제 참가자들이 권리선언문이 적힌 종이를

비행기로 접어 정부와 서울시를 향해 날렸다.

그 종이 비행기에는 눈물겹게 죽어 간 395명의 넋이 실려 하늘나라로 날아갔을 것이다.

 

부디 극락왕생하여 차별 없는 세상에서 영생을 누리소서!

 

사진, 글 / 조문호

 

 

돈에 떠밀려 죽었다.

비정한 세상이 죽였다.

 

비참하도록 슬프게 죽었다

돈에 병든 사람이 사람을 죽였다.

 

아무도 울지 않았다.

사람이기를 포기했다.

 

"내 주검에 침뱉지마라"

 

‘2021홈리스추모제’에서...

사진, 글 / 조문호

요즘 느닷없는 ‘인사동 이야기’ 사진전 준비하느라 똥줄이 탄다.

며칠동안 정신없이 지내다 액자를 맡긴 이제사 한시름 놓았다.

 

뭐보다 머리가 아픈 건 그 많은 사진에서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였다.

오늘의 인사동을 말할 수있는 '묵시록'에 걸맞는 이미지를 골라

흑백으로 바꾸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 건 아니다 싶었다.

 

흑백으로 전환하면 사진의 리얼리티를 훼손하기도 하지만,

그 장면에 따른 컬러의 독특한 분위기가 사라져서다.

다시 스트레이트한 본래의 사진으로 바꾸었더니, 훨씬 감이 좋았다.

이제 사진자료들을 정리하여 알리는 일만 남았다.

 

돈 버는 일을 이렇게 열심히 했더라면 강남에 아파트라도 한 채 생겼을까?

돈을 우습게 여긴 스스로의 업이니 누굴 탓하랴 마는 평생 해온 일에 후회는 없다.

 

이제 정부에서 주는 돈으로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으니, 또 다시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점점 힘들어지는 것을 보니, 일을 줄여야 할 때는 된 것 같다.

 

모처럼 컴퓨터 앞에 앉아 지난 이야기라도 끌적일 여유가 생긴것이다.

 

며칠 전에는 일손이 잡히지 않아 바깥 나들이를 했다.

'동자동 사랑방'에 커피 한잔 얻어 마시러 갔더니,

회의 중인지 사람들이 많아 새꿈공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낙엽을 머리에 이고 고독을 씹던 가을남자 이대영씨가 반겨주었다.

혼술을 즐기는 이씨가 그 날따라 분위기에 쏠렸는지 술 잔을 권했다.

 

그렇게 시작된 술자리는 짹짹이 아낙의 술 공수로 한 병 두병 늘어 갔는데,

영등포에서 동자동으로 이사오기로 한 차씨 아주머니의 등장과

눈 먼 권관수씨 등 술꾼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권씨는 기자들이 몇 명 찾아와 인터뷰를 하고 갔다며 떠벌렸다.

현금을 안 주고 통장에 넣어준다고 불평 했지만, 인터뷰료 들어 올 건수 생겼다는 자랑인 셈이다.

 

요즘 케이비에스에서 연말 특집 제작한다며 동자동을 헤집고 다니는 모양이다.

오전에는 내방에도 찾아와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갔다.

아무튼, 빈민들의 현실이 알려져 희망을 갖고 살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으면 좋겠다,

 

눈먼 권씨는 소주를 패트병에 담아 가슴에 품고 다니며 마신다.

담배 한 가치는 항상 귀에 꼽고 다니는데, 어디 떨구었는지 담배 찾느라 여기 저기 더듬었다.

 

귀가 밝아 비둘기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섭하는 판에

잠바 속으로 담배 떨어지는 소리는 왜 못 들었는지 모르겠다.

 

낙엽이 떨어지는 공원의 술상은 어느 술상보다 멋졌다.

 

"하나님! 전기세 많이 나가니 에어컨 좀 꺼 주세요"라고 이씨가 허공에 외쳤다.

날씨가 점차 쌀쌀해 진다는 소리다.

 

 박씨는 뭐가 그리 눈에 거슬리는지 낙엽 떨어지기가 무섭게 쓸어담았다.

지저분해서가 아니라 소일거리로 하는 일이라 말릴 수도 없었다.

 

권씨는 보이지도 않으면서 짤짤이나 고스톱만 하면 딴다고 자랑질이다.

 

본격적인 추위가 몰려오면 다들 방에 처박혀 살아야하니,

오늘이 가을의 마지막 술상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봄이야 다시 오겠지만, 동자동의 봄은 언제 오려나?

 

사진, 글 / 조문호

 

 

노숙인 들이 제일 힘들어하는 시기가 한겨울보다 갑자기 추워지는 이때다.

갈아입을 방한복은 물론 내복조차 없으니, 온종일 바들바들 떨며 지낸다.

 

세상살이 고달프다지만, 노숙인보다 더한 사람이야 있겠는가?

추위를 이기려고 술을 찾게 되고, 술이 술을 마셔 다들 제 정신이 아니다.

술 때문에 노숙인 임시대피소에도 들어갈 수 없는데,

저러다 길에서 얼어 죽지 않을까 걱정이다.

 

요즘 들어 노숙하는 이들의 새로운 풍속도가 생겼다.

노숙의 길로 들어 선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은

다 버려도 못 버리는 것이 바로 핸드폰이다.

어디 연락할 곳이 있어서가 아니라 게임에 중독되어서다.

 

그러니 핸드폰을 꺼트리지 않으려면 충전할 곳이 필요해

충전 연결코드가 있는 지하도 요소요소에서 온종일 죽치는 것이다.

그런데, 핸드폰 사용료는 어떻게 마련하는지 모르겠다.

 

그들이야 지하도에 머물러 추위도 덜한데다,

알콜에 중독되어 술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노숙인 보다 백배 낫다.

다들 자리 뺏기지 않으려고 한 자리에서 버텨

지나칠 때 마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도대체 밥도 먹지 않고 화장실도 안 갈까?

 

하기야! 페이스북에 중독되어 하루 종일 핸드폰을 끼고 사는 세상에

그들인들 핸드폰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죽음의 골자기로 내몰린 노숙인을 걱정하는 정치인들은 왜 없을까?

복지공약을 밥 먹듯 쏟아내는 대선후보들이

노숙인들의 추위를 보살피려는 아량은 왜 베풀지 못할까?

당사자들 표야 없겠지만, 나라도 그런 후보에게 한 표 줄 것 같다.

 

사진, 글 / 조문호

 

 

요즘은 너무 바빠 불알에 요령소리가 날 지경이다.

전시 치루느라 정신 차릴 겨를도 없었는데, 또 다시 전시 아닌 전쟁을 치루어야 할 판이다.

여기 저기 바쁘게 쫓아 다니다보니 반가운 사람도 많이 만났다.

 

어제는 '눈빛출판사' 예술산책으로 교정보러 갔는데, 사진평론 하는 진동선씨가 와 있었다.

둘 다 부산에서 올라 온 처지라 어찌 사는지 항상 궁금했는데,

한동안 병원에서 고생하다 살아났다는 뜻밖의 소식도 전해주었다.

사진평론집 출판을 위해 왔다는데, 반갑기 그지없었다.

 

나 역시 사진집이 나와 전시까지 준비해야 할 처지가 되어버렸다.

16일부터 정영신의 ‘장날’전이 '돈화문박물관마을'에서 열리기도 하지만,

24일부터 나의 '인사동 이야기'도 '나무화랑'에서 열린다.

 

얼마전 노광래씨가 추진한 ‘인사동 이야기’ 복간이 생각보다 늦어졌기 때문이다.

‘노숙인, 길에서 살다’현수막 전시 때 싸 잡아 출판 기념회까지 열 작정이었는데,

한 분이라도 더 찍어 제대로 된 개정판을 만들려는 욕심이 문제였다.

 

사진원고가 지체된데다 책 만드는 ‘눈빛출판사’까지 요즘 일손이 모자란다.

출판사 운영이 어려워 파주로 옮긴 후로 이대표 혼자 살림 살아가며 책을 만들어야하니

날짜 맞추기가 힘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달 하순경 책이 나온다는데,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는가?

전시 소리만 들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만,

적자를 무릅쓰고 내주는 출판사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가 아니겠는가?

사진은 못 팔아도, 책이라도 한 권 팔려는 속셈에서다.

 

문제는 전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전시에 들어 갈 경비야 차지하고라도, 요즘 몸이 말이 아니다.

보름동안 전시 치루느라 퍼마신 술병 후유증으로 빌빌거리며 돌아다니는데,

죽지 못해 움직이는 산송장에 가깝다.

 

그렇다고 정동지 돕는 걸 포기할 수도 없지만, 아는 분들 행사도 어찌 모른척 할 수 있겠나?

근 한달 가까이 돌아 다니며 찍은 사진이 첩첩이 쌓였지만 그대로 처박아 둔 것이다.

이미 시기를 놓쳐 포스팅할 필요도 없는 것이 태반이라 정리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졌다.

이 포스팅도 근 열흘 동안의 사진과 이야기를 짜집기 한 것이다.

 

며칠 전 정동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전시할 '장날' 사진을 프린트하니 좀 옮겨 달라는 기별이었다.

'스마트협동조합'으로 가보니, 때 마침 김문호씨가 와 있었다.

예술인 등록하는 일이 까다로워 도움받으러 왔다는 것이다.

짐부터 옮겨놓고, 서인형이사장과 어울려 전으로 시작해 전으로 끝나는

전집에서 시작된 술자리는 녹번동 정동지 집으로 이어졌다.

 

김문호씨는 나를 처음 만난 오래된 이야기를 꺼냈다.

부산에 계셨던 사진가 최민식선생을 만나러 갔더니, '서울에 있는 조문호를 만나 보라' 했단다.

그래서 이석필, 안해룡, 김봉규, 추연공, 이한구씨등 여러명이 규합하여 ‘사진집단 사실’이란

동아리를 만들었고, 김문호씨와는 충무로에서 같은 사무실을 사용한 인연도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이튿날은 아산에서 ‘공유공간 마임’을 운영하는 김선우씨가 녹번동 집으로 찾아왔다.

정동지가 ‘장날’전을 보조할 장터 소품 좀 알아보라 부탁한 모양인데,

어디에서 구했는지 바리바리 싸 들고 왔더라.

골동 가게에서도 구하기 힘든 물건이 있어 깜짝 놀란 것이다.

 

옛날 아리랑 성냥각에서 부터 손저울, 됫박, 체 등 귀한 것들만 챙겨왔다.

김선우씨는 안 되는 게 없는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다. 무조건 밀어부치는데는 선수다.

늦도록 노닥거리다 아산으로 돌아갔는데, 자정이 넘어서야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난 주말에는 정영신씨와 가을 나들이 겸 장터 촬영을 떠났다.

모처럼 호젓한 시간을 가졌으나, 머리는 온통 눈 앞에 닥친 전시 걱정뿐이었다.

전시할 마음을 먹었다가 취소하기를 여러차례 번복하니,

정동지가 ‘나무화랑’ 김진하 관장께 전화 걸어 전시할 날을 잡아버린 것이다.

이제 날자가 정해졌으니, 죽기 살기로 매달릴 수밖에 없다.

 

있는 사진 골라 전시하는 건 어려울 것 없으나, 무슨 말을 하느냐가 문제다.

조그만 전시장이지만 인사동 정체성도 말하고 싶고, 흘러간 풍류도 되새기고 싶고,

암울한 인사동 현실을 보여주고 싶은 생각 등 온갖 욕심만 난무했다.

전체적인 내용은 내년에 마무리할 ‘인사동 풍류 40년’ 출판전 때 하기로 하고,

며칠 동안 한가지에 집중해 사진을 찾아 보기로 했다.

 

지난 5일은 아침부터 연이어 연락이 왔다.

제일 먼저 케이비에스 이석재 피디 였는데, 오늘 만날 수 없냐는 것이다.

며칠 전 만난 자리에서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는 대신 다른 방면으로 협조할 것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한 시간 분량의 연말 특집이라는데, 시달리는 시간보다 빈민들 내세워 잘 난채 하는게 쪽팔려서다.

동자동 사는 동안 여러 매체에서 요청해 온 인터뷰를 번번이 거절하는 것도 일이었다.

 

그렇지만 당면한 재개발문제에서부터 고통받는 빈민들의 현실을 알려

개선하는 일 또한 소홀할 수 없는 일이라 ‘동자동사랑방’ 선동수 간사장을 추천했다.

필요하다면 노숙인이나 쪽방 빈민 중에 힘든 사람을 연결시켜 주거나

그동안 찍은 스틸사진은 제공해 주겠다고 약속하며 일단락 지은 것이다.

 

전화 온 바로는 일전에 말한 노숙인 소개도 받고 싶고,

‘노숙인, 길에서 살다’ 책을 샀는데, 사인도 받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눈빛출판사' 이대표 약속이 내정되어 있어 월요일 오전으로 미루었다.

두 번째는 부산의 함창호씨가 오후 세시경 서울역에 도착한다지만,

그 또한 저녁 시간으로 미루었다.

 

녹번동에 들려 정동지를 태우고 경인선 책거리부터 갔더니,

생각지도 못한 진동선씨가 이규상대표와 함께 있는 것이었다.

 

이대표가 파주에서 챙겨 온 교정본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는데,

더러 이름과 사진이 바뀐 것도 있으나 초판보다 편집디자인이나 내용이 새롭고 알찼다.

인사동에서 50년 동안 리어카 끈 이방웅씨와

‘그림마당민’에서 잔뼈가 굵은 미술평론가 곽대원씨 사진까지 넘겨주고 마무리했다.

 

마지막 교정은 메일로 하기로 하고, 함창호씨가 기다리는 인사동으로 갔는데,

함창호씨는 짐 내려 놓고 온다며 좀 늦겠다고 했다.

'유목민'에는 장경호씨와 이기정, 한상진씨 등 반가운 분이 여럿 있었다.

골목에 앉아 술 마시다 보니, 벽치기 골목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정동용시인을 필두로 박건, 김수길, 백승호, 정영철, 황경애, 이인섭선생까지 줄줄이였다.

오랜만에 맛보는 인사동 주막 골목의 진미였다.

 

드디어 기다리던 함창호씨가 나타났다.

인사 나눈 뒤, 자리를 옮겨 사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 작업하는 주제는 사라지기 직전의 농촌가옥과 사람이었다.

농민들 사진은 입상사진이 주종을 이루었는데, 기존 사진과의 차별화가 난제였다.

 

그렇지만, 마지막 남은 농촌 옛모습은 곧 사라질 우리의 유산임에 틀림없다.

나 역시 한 때 '두메산골 사람들' 사진을 찍어사진집을 출판한바 있지만,

20년이 가까워지니 당시의 풍경은 모두 바뀌었고, 사람도 세상 떠난 사람이 더 많다.

내가 찍은 사진이 흑백사진인 반면 함창호씨 사진은 컬러사진이었다.

 

사실적인 측면에서는 컬러사진의 리얼리티가 더 강하다.

나 역시 예전에는 흑백사진만 고집했으나, 지금은 컬러사진의 생생함을 더 즐긴다.

함창호씨가 페북에 틈틈이 올리는 사진을 보아 왔는데,

자연이 주는 녹색의 푸르름과 따뜻한 황토색이 가슴에 와 닿았다.

 

무엇보다 틀에 갇히지 않고, 정제되지 않은 화면 자체가 마음에 들었다.

얽메이지 않고 자유롭게 작업하다보면 자기만의 틀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늦게 사진 세계에 빠져들었다지만, 기존 아마추어 사진과는 달리

자신이 좋아하는 한 분야에 빠져들어 나름의 가치를 찾아내고 있었다.

 

머지않아 농촌에 대한 그만의 사진세계가 확립되리라 기대되었다.

 

그나저나,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마시다 보니 주량을 초과해 버렸다.

마침 장경호씨와 함창호씨가 비슷한 연배인데다 둘다 경남고등학교 출신이라

두 사람을 붙여놓고 줄행랑 친 것이다.

 

거지 팔자에 대리기사까지 불러 뒷자리에서 비스듬히 누워 편하게 돌아왔다.

바쁘게 쫓아 다닌 하루였지만, 반가운 분들 만나 기분 좋은 날이었다.

'인천의 성냥공장'이 입에 달삭거렸지만 허벅지를 꼬집어 가며 참았다.

 

사진, 글 / 조문호

 

 

 

 

 

“비러먹을 넘! 아직 배때지가 덜 고파서..”

이 말은 동자동 김씨 영감이 아들 같은 옆방 노씨에게 한 말이다.

엊그제 ‘쪽방상담소’에서 밑반찬을 나누어주었는데,

타러 가자는데 안 간다니 뱉은 욕이다.

 

‘비러먹다’는 말은 ‘빌어먹다’ 옛말로 남에게 구걸해 먹고 사는 것을 말하는데,

반찬 얻으러 가는 자체가 빌어먹는 일 아닌가?

얻으러 가는 놈이 빌어먹는 놈인데,

안 간다는 사람을 왜 빌어먹을 놈이라고 욕하는지 모르겠다.

 

사실 쪽방 사는 빈민 모두가 빌어먹는 사람에 다름아니다.

정부에서 지원금을 받는 것이나 구호단체에서 보내 주는

물품들을 받는 자체가 얻어먹는 일이 아니던가?

 

하기야! 자본주의 세상에서 남의 업체에서 일하는 사람도 다 빌어먹는 사람이다.

‘손바닥만한 땅때기 한 평만 있어도 빌어먹고 살지는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지주와 소작농의 관계에서부터 사장과 종업원에 이르기까지 모두 주종 관계다.

그러니 다들 갑의 자리에 서기 위해 돈 벌려고 눈을 벌겋게 설치지 않는가?

 

그리고 전문 경력이나 기술보다 앞서는 것이 돈이다.

몇십 년을 연구하여 개발해도 창업 자본이 없으면

그 분야에 아무 것도 모르는 자본가한데 빌어먹는 것이 세상 이치다.

가진 자들은 자손 대대로 갑의 위치에 살고, 없는 자들은 대대로 빌어먹는다.

 

없어도 자존심 하나로 살아가는 노씨는 줄 서서 얻는데는 잘 나서지 않는다.

그냥 준다는데도 가지 않으니, 영감 입장에서는 답답한 것이다.

두 달 전부터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 2주에 한 번씩 밑반찬을 나누어 주고 있다.

‘대한적십자’에서 보낸 ‘희망풍차’란 밑반찬 나눔인데, 다들 기다리는 품목이다.

 

노씨 대신 같이 가 보니, 의외로 줄 설 정도로 사람이 많지 않았다.

주민들을 격주로 나누어 분산했으니, 줄 세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받은 비닐봉지를 풀어보니, 콩조림과 멸치조림, 짜장이 각각 담겨 있었고,

단감 두 알도 보너스로 들어 있었다.

 

그 정도면 일주일쯤은 라면 신세를 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방 없는 쪽방 주민으로서는 그보다 고마운 선물이 없다.

 

반찬은 있으나 밥이 없어, 옆방에서 일회용 밥 하나를 빌렸다.

"젠장, 빌어먹는 짓도 가지가지 하네"

 

사진, 글 / 조문호

 

 

 

 

며칠 전 ‘노숙인, 길에서 살다’ 책 몇권을 배낭에 넣어 나갔다.

아직 못 챙겨 준 사람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갑자기 날씨가 싸늘해 그런지, 공원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어떤 전도사는 몸이 편치 않은 이에게 축도를 올렸고,

몇몇은 모여앉아 잡담을 나누었다.

 

공원에 책 줄 사람은 남기씨 뿐이었다.

일부는 쪽방으로 찾아가 전해주었고, 서울역에선 지은이밖에 주지 못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 같지 않았다.

농담도 하지 않고 뭔가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책 날개에 적힌 약력 때문일까?

작업하러 쪽방에 들어 왔다고 생각했는지 친밀감을 보이지 않았다.

그걸 염려해 여태껏 언론사 인터뷰 요청도 거절하지 않았던가.

 

사실 빈민들의 어려운 현실을 개선하려면 책만 낼 것이 아니라

널리 알리기 위해 언론 도움도 받아야 했다.

 

그나저나 앞으로 편한 관계로 지내려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걱정되었다.

그뿐 아니라 쓸쓸한 가을 날씨마저 우울하게 만들었다.

계절을 타는지 만사가 귀찮고 돌아다니기도 싫었다.

 

혼술은 청승맞아 정동지에게 전화 걸어 술 한잔 사 달라 했다.

둘이서 술 마시며 이런저런 하소연으로 시름 달랬다.

 

처음 사진을 시작할 때 새겼던 말도 곱씹었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항상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

그리고 잘못된 현실을 인식시켜 세상을 바로잡는 데 기여해야 한다.”

 

얼마나 계도에 보탬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정말 힘들고 어렵다.

소주잔에 모든 시름과 가을까지 담아 마셔버렸다.

 

사진, 글 / 조문호

 

 

 

보름 동안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과 노숙인 현수막전 치르느라 곤죽이 되었다.

매일 반가운 분들 만나 졸라 퍼 마시고도 살아남은 것이 용 타 싶다.

전시가 끝나자마자 신학철 선생 전시까지 이어졌는데, 이러다 알콜 중독자 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그동안 전시를 하면 힘들고 돈만 까먹는 일이라 피해 왔으나

사진집이 나오면 전시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팔리지 않는 책을 어렵사리 만들어 주었는데,

전시라도 해서 책이라도 좀 팔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번 정영신씨는 책만 아니라 작품도 제법 팔렸다.

큰 작품이 세 점이나 팔렸고, 소품은 30여 점이나 팔았다.

십만 원 하는 소품은 제작비와 갤러리 마진 제하면 몇 푼 남지 않지만,

보리 흉년에 이게 어딘가?

 

그나저나 다시 사진을 만들어 포장하고 배달하는 일도 만만찮았다.

그동안 전시 때문에 보지 못한 류연복씨 전시 보러 가다가 차가 밀려 진을 빼기도 했고,

미루어 둔 일 하느라 낑낑거리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지난 11일은 미처 철수하지 못한 노숙인 현수막 거두러 인사동 나갔다.

판매 작품 중 ‘나무화랑’에 맡길 사진도 있지만, 현수막은 빨리 거둬야 했다.

그냥 두어도 오가는 사람들이 보면 홍보야 되겠지만,

자기 들어간 현수막 사진 받으려고 기다리는 노숙인들 때문이다.

그리고 햇볕을 오래 받으면 탈색할 염려도 되었다.

 

며칠 만에 나간 인사동 거리는 월요일인데도 나들이한 사람들이 많았다.

액자를 갖고 ‘나무화랑’에 올라갔더니, 생각하지도 못한 류연복씨가 반겼다.

어제 안성 전시장에서 만났는데, 또 만난 것이다.

안성은 월요일이 휴관일이라 모처럼 짬 내어 신학철선생 전시 보러 왔단다.

 

사진을 전해주고 다들 유목민 골목으로 옮겼는데,

골목 어귀에 문 닫은 포도나무집을 보니 지난날이 생각났다.

돌아가신 강민 선생의 단골집으로 추억이 많은 주막이었다.

폐가처럼 창을 가린 대나무 잎이 강민 선생의 넋 인양 스산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 옆에는 거리 아티스트 이태호씨의 김수영시인 판화가 붙어있었다.

낡은 가스 배관 틈에 붙었는데, 그 밑에는 재떨이와 종이컵까지 놓여 있었다.

마치 김수영시인 100주년을 기념하는 제단 같았다.

큰길에서는 볼 수 없는 인사동 풍류 잔재다.

 

류연복씨 도움으로 현수막 철수는 간단히 끝냈으나, 그냥 헤어질 순 없잖아.

‘유목민’의 별미 감자전을 안주로 막걸리 한잔했다.

어제는 게장 집에서 밥은 얻어먹었지만, 차 때문에 술 한잔 못했다.

 

그런데, ‘유목민’ 전활철씨와는 같은 홍대 미대 출신이지만 서로 몰랐다.

전활철씨가 삼 년 선배라는데, 군 복무하느라 서로 마주치지 못한 것 같았다.

서로 안면도 터고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며 시간 보냈다.

 

류연복씨도 갈 길이 바쁘지만, 나도 동대문시장 가야 했다.

현수막을 사진 별로 재단하여 올이 빠지지 않도록 박아야 했다.

막걸리 세 병으로 끝낸 아쉬운 술자리였지만,

우연히 만나는 이런 맛에 인사동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달은 고생했으니, 사모님께서 보너스라도 좀 주실지 모르겠다.

야무진 꿈이라도 꾸어 보는 희망도 없다면야 무슨 재미겠는가?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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