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열린 장경호의 '묵시'전에는 반가운 손님이 많았다.

 

뒤풀이 집으로 정한 낭만에는 앉을 자리가 없었다.

전시장에서 만났던 김진하, 이정황, 안원규, 류연복, 우문명, 김정업, 박윤호, 배성일, 정동용,

황준연, 최석태, 김세규, 조준영, 정희섭, 심정수, 김재홍, 최민화, 박불똥, 전강호, 신동여씨 는 물론,

신학철 선생을 비롯하여 칡뫼김구, 나종희, 임경일, 이강군, 양상용, 김영진, 이명희, 김수길, 김정대, 강경석

서인형, 이명신, 김이하, 조경연, 박은태, 김윤기, 박영애, 임정희, 김정환, 황정아, 이재민, 이도윤, 김상천,

이현정, 김보영씨 등 많은 분이 모여 있었는데, 늦게는 현장스님, 이효상, 노형석, 하태웅씨도 오셨다. 

 

전시를 축하하는 자리지만 술로 한세상 인사동을 풍미했던 당사자는 뇌경색에 졸아 술 한 잔 마실 수 없었다.

 

다들 장화백의 빠른 회복을 바라며 대신 마셨다.

 나는 너무 마셔 이틀을 드러누웠지만... 

 

어쨌거나, 장화백 덕에 인사동 풍류객들이 모처럼 한 자리 앉아 즐겁게 마시고 놀았다.

봄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가기 싫어 생 지랄발광을 했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의 멋은 구불구불 미로처럼 이어진 골목에 있다.

주막에서 흘러나오는 취객들의 웃음소리로 항상 왁자지껄하고,

천장 낮은 한옥의 거친 흙벽과 문살 사이로 번지는 불빛조차 포근하다.

 

다들 인사동이 변했다고 탄식하지만, 아직은 골목문화가 살아있어 그리 비관적이지는 않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오래된 술집이나 찻집에 인사동의 풍류와 낭만이 꿈틀댄다.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정적 이미지가 아니라,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동적 이미지를 연출한다.

 

북인사마당에서 남인사마당을 잇는 큰길 사이로 20여개의 골목과 샛길이 이어졌다.

 

도로명이 생겨나며 인사동 골목은 1길에서 30길까지 나름의 길 번지가 생겼는데,

인사동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골목은 아무래도 인사동16길이다.

 

그 골목은 안국역 6번 출구에서 관훈주차장 사이길인 벽치기길과 연결되었는데,

‘유목민’, ‘푸른별이야기’, 누룩나무, 사랑채 등의 많은 술집이 모여 있다.

한식집도 여럿 있고, 옛날의 사랑방모텔도 이 골목에 있다.

 

'이즈갤러리' 옆 골목인 인사동14길은 ‘선천집’, ‘사천집’, ‘이모집’, 등의 한식집과 ‘여자만’도 있다.

‘귀천’, ‘소담’, ‘흐린 세상 건너기’등 찻집도 즐비해 식사와 차 마시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길이기도 하다.

 

쌈지 옆길인 인사동12길로 들어가면 ‘보릿고개추억’, ‘달새는 달만 생각한다’가 있고,

서인사주차장으로 가는 인사동11길에는 생태탕으로 유명한 ‘부산식당’과 오래된 전통찻집 ‘초당’도 있다.

 

그리고 수도약국 옆에 있는 인사동10길로 가면 ‘경인미술관’ 입구에 ‘개성만두 궁’이 있다.

반대편의 인사동9길에는 ‘안동국시 소담’이 있다.

 

 옛날부터 인사동을 출입한 분이라면, 실비대학으로 불린 ‘실비집' 자리 인사동8길을 잊을 수 없다.

지금은 실비집 대신 만두전골로 유명한 ‘사동집’과 ‘인사동수제비’가 있고,

‘대감집’을 돌아 막다른 곳에 자리 잡은 ‘낭만(풍류사랑)’도 인사동사람들이 자주 애용하는 주막이다.

 

 

큰길인 인사동 사거리에는 낙원동 가는 인사동4길이 있고,

반대편의 낙원떡집 방향으로 가는 인사동5길에는 음식점 '경복궁'이 있다.

가는 도중에 베트남요리인 ‘하노이의 아침’과 ‘무교삼계탕’도 있다.

 

인사동 사거리에 있는 4길과 5길, 그리고 인사동10길 만이 차량통행이 가능한 넓은 길이다.

 

인사동4길 옆의 인사동6길로 들어서면 된장비빔밥으로 유명한 ‘툇마루’, 그리고 ‘나주곰탕’도 진국이다. 

 

맛있고 분위기 좋은 집이 어디 그뿐이겠는가?

맛과  흥과 예술이 어우러진 인사동 골목문화는 인사동만의 자랑이다.

 

골목마다 지난 시절의 낭만과 향수를 한 자락씩 깔고 앉은 예술가들이 인생과 예술을 노래한다.

 

인사동 골목 골목 자리잡은 풍류객들이 그리워 오늘도 인사동 간다.

 

'신촌부루스' 엄인호의  '골목길' 노래가 생각난다.

“골목길 접어들 때면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사진, 글 / 조문호

 

지긋지긋한 더위가 한풀 꺾여, 이제야 한 숨 돌릴 것 같다.

쪽방에서의 여름나기는 고행의 연속이었다.

수행자처럼 버텨내지만, 허리 협착증까지 도져 죽는 게 편하겠더라.

 

일기처럼 쓰던 주변 잡기에서부터 전시리뷰에 이르기 까지 모든 일을 중단했다.

주제넘은 이야기로 욕 먹는 일도 지겨웠지만, 죽기 전에 마무리해야 할 일이 많았.

사진 정리가 되지 않아 사진 한 장 찾으려면 온종일을 허덕여야 한다.

 

얼마 전에는 돌아가신 한정식선생과 찍은 기념사진 한 장 보내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원본 찾느라 몇시간을 헤매다 결국 포기하고 말았는데, 늦게 사진을 정리하려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오래된 필름 찾아 스캔 받는 일은 손도 대지 못했다. 

 

여름 내내 전시장 방문은 물론, 사람 만나는 일까지 피해 가며

컴퓨터와 씨름하였으나 도무지 일의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오죽하면 정선 집 불났을 때, 남은 짐까지 모두 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겠는가?

죽고 나면 아무 소용없는 일에 매달리는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이 사진들은 한 달 전에 인사동에서 찍은 사진이다.

 

지난 7월 27일, 양산의 공윤희씨가 온다는 연락을 받아 모처럼 정동지를 만나 인사동에 나갔다. 

쌈지 담벼락에는 궁녀가 임금 기다리다 죽었다는 설화의 꽃, 능소화가 피었더라.

 

약속했던 ‘풍류사랑 낭만에는 공윤희씨 외에 김수길씨도 왔더라.

용태씨 미망인 박영애여사는 민어에다 홍어, 돼지 수육까지, 그득하게 상을 차려주었다.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만나 이야기 나누기 보다 음식 먹느라 정신없었다.

사실, 귀가 어두워 소통이 안 되니 술이 약인 것이다.

 

인사동 지킴이로 알려진 공윤희씨는 퇴역한지가 수십년이 되었으나 아직까지 공대위로 불린다.

몇십 년동안 인사동에서 일 하며 살았으나, 장가는 못 간게 아니고 안 갔다.

요즘은 먹고살기 위해 양산에서 학교 일을 돕는다는데, 여름휴가를 받은 것 같았다.

 

휴가를 받았으면 바다나 산으로 갈 것이지, 인사동에는 무슨 미련이 남아 왔는가?

 

이차로 유목민’에 갔더니, 골목에는 장경호씨와 한상진씨가 있었고,

안쪽에는 전활철, 안원규, 유 준, 발렌티노김 등 아는 분이 많았다.

 

만나 반가운 시간은 잠깐이었다.

소통이 되지 않아 술만 빨다 정량 차면 일어나니,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파장 인생의 설움이다.

 

사진, / 조문호

 

 

 

며칠 전 조준영 시인으로 부터 연락이 왔다.

‘"인사동에서 초촐한 망년회라도 한번 해야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방콕에서 해방된 날은 28일이었다.

날 잡은 김에 다 만날 작정으로 녹번동부터 갔다.

 

정동지 일로 충무로 가려는데, 조해인 시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응암동 콩나물국밥'에서 김수길씨와 한 잔 한다는데, 어찌 모른척 할 수 있겠는가?

 

일이 늦게 끝나 바쁘게 찿아 갔더니, 이미 술자리는 파장이었다.

사이클이 맞지 않아 부어 주는 쪽쪽 마시다보니 금방 취해버렸다.

김수길씨는 "'케이비에스'에서 동자동을 소개한 방송을 보았냐?"고 물었다.

쪽방은 물론 정동지 집에도 티브이가 없으니, 세상돌아 가는 걸 잘 모른다.

인사동 약속시간을 30분 남기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인사동은 연말분위기가 실종된지 오래다 

옷 가게들이 점령해 가는 거리 풍경은 낮 설기만 하다.

 

인사동만 나오면 습관적으로 사진을 찍는다.

그 장면에 그 장면이지만, 출근부 도장 찍듯 찍는다.

 

 만나기로 한 장소는 고)김용태씨 미망인 박영애여사가 운영하는 ‘낭만’이었다.

어디쯤 왔느냐의 전화를 받고서야 인사동 순찰을 마쳤는데,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공윤희, 임태종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거리두기 지침에 맞추어 네 사람만 모인 것이다.

 

박영애여사가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잔뜩 차려주었다.

돔 찜에다 돼지수육과 홍어, 그리고 과메기까지 등장했다.

세상에! 얼마나 맛있는지, 술 마시며 안주를 그렇게 많이 먹어본 적이 없다.

 

나온 사람 몇 명 없는 조촐한 '인사동 사람들' 망년회지만, 음식이 너무 푸짐했다.

공윤희씨가 먼곳에서 공수해 온 꼬냑까지 꺼냈다.

난, 일편단심 민들레만 마셨다. 양년이 싫어서가 아니라 지레 겁 먹은 것이다. 

 

최석태씨가 ‘유목민’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전갈에 자리를 옮겼다.

장경호, 김이하, 안완규씨도 있었으나, 술이 취해 더 마실 수가 없었다.

 

새해에는 신나는 일만 주렁 주렁 열리길 바란다.

코로나 끝나는 봄 날, 때거리로 한번 젖어보자.

 

사진, 글 / 조문호

 



지난날의 인사동을 그리워하지만, 모든 건 바뀔 수밖에 없다.
세월 따라 옷을 갈아입을 수밖에 없고, 바뀐 손님 취향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장사 속성 아니겠는가?

싸구려 기념품점과 장신구점, 옷가게나 화장품 가게들이 줄줄이 들어서지만, 아무도 탓할 수 없는 일이다.



연세가 듬직한 분들이야 아쉽겠지만. 젊은이들은 오늘의 인사동이 즐거운 걸 어쩌랴?

그립다고 옛날로 돌아갈 수 없거니와 변화를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긴 세월동안 쉼 없이 변모 한 것처럼, 앞으로도 인사동은 계속 진화할 것이다.


 

그러나 인사동 곳곳에는 역사의 격변을 겪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을 주도한 박영효의 집터에는 경인미술관이 들어섰고,

명성황후의 조카 민익두의 집은 민가다헌이란 식당으로 탈바꿈했다.

동학의 후예를 자처하는 천도교의 중앙교당도 아직 우뚝 서 있다.

이곳은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의 발상지가 아니던가.


 

인사동 초입의 승동교회지하실에서 3·1 독립선언문 일부가 인쇄됐고,

태화빌딩 자리는 태화관에서 명월관으로 바뀐 역사적 자리다.

그곳은 민족대표들이 모여 기미독립선언서를 읽었던 자리가 아닌가.


 

인사1길 골목 깊이 숨은 100년 넘은 오동나무와 오래된 한옥 서까래들이 그 시절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니 인사동을 한 번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근대사의 자취를 밟아볼 수 있는 일이다.


 

인사동이 구한말부터 문화의 거리로 불려왔지만,

우리시대의 인사동은 1960대부터 70년대에 형성된 인사동 문화를 추억하고 있다.



그 무렵 골동품가게가 하나 둘 들어서는 가운데, 표구점, 고서점, 화랑들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한 때는 인사동 대로변에 표구점들이 30여 곳이나 몰린 적도 있었다.

표구하던 그림을 길가에서 말려 인사동 거리자체가 미술관 같았다.


 

인사동에 돈이 몰린 시절도 있었다.

골동품과 그림의 거래가 활발하며 화상들이 돈을 쓸어 담았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어느 종갓집에서 고서 궤짝이라도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면 골동상들이 몰렸단다.

가끔은 추사를 비롯한 유명 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 발견되기도 했다는데,

눈 밝은 자들이 보석을 찾아내는 금광 같은 곳이었다.


 

화단을 좌지우지하는 큰 손들이 인사동에서 그림을 사 모으기도 했다.

재벌가 마나님들이 화랑을 만드는 등 인사동에 돈이 몰리며 인사동의 판도가 서서히 바뀐 것이다.

부자들에 이어 중산층도 그림을 사들였는데, 화랑을 드나드는 것이 교양을 과시하는 양 치부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분위기도 끝났다.



인사동에서 더 이상 비싼 그림이 거래되지 않고, 골동품이나 귀한 물건은 인사동까지 오지도 않는다

골동품상은 대부분 장안동으로 자리를 옮겼고, 표구사도 대부분 떠났다.

대신 중국에서 들여온 석물이나 골동이 그 자리를 메웠다.

'통인가게', 통문관’ 등 몇몇 업소가 옛 명성을 지키고 있으나, 신기하게도 필방은 대부분 남아있다.



지금은 고미술품이나 골동품은 대부분 옥션에서 경매를 통해 거래되는 것이 대세다.

은밀하게 보여주며 거래하던 시절은 끝난 셈이다.

미술품 경매업체 여러 곳이 인사동에 사무실을 열어 .정확한 감정과 경매를 통해 거래된다.


 

인사동 큰길가 상점에서 팔리는 그림도 싸게는 만원부터 5만원까지의 저렴한 작품들이다.

그런 그림이 대량 생산되는 곳은 대부분 삼각지라는데,

미대생들이나 아르바이트생을 통해 만들어져 인사동에 들어온다고 한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인사동 큰 길가의 매장들이 하루가 다르게 바뀐다는 것이다.

화장품 가게나 액세서리가게, 옷가게가 대세인 것은 오래되었지만, 최근에는 보석상과 악기점까지 줄줄이 생겨나고 있다.

이젠 집세가 두 배 이상 올랐으니 영세업자들은 버텨나지 못한다,

관광객들이 몰리는 부작용으로 인사동의 고유한 문화적 색깔은 서서히 퇴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사동에 화방과 필방, 지물포, 갤러리들이 남아있어 화가나 서예가 등 작가들은 드나들 수밖에 없다.

관광객들의 난장 속에서도 문화의 뿌리 한 가닥은 자리를 지키는 셈이다.


 

무엇보다 인사동을 정겹게 만든 것은 골목골목마다 박혀있는 술집들이다.

큰길에서 한 걸음만 들어가면 한옥으로 된 음식점들이 곳곳에 똬리 틀고 있다.

이리 저리 연결된 골목에는 술집과 한식당을 비롯하여 독특한 맛을 자랑하는

다양한 맛 집들이 몰려있어 그나마 옛 분위기를 일깨워준다.


 

인사동 화랑에서 전시가 개막되는 수요일 밤이 되면 인사동 골목은 북적이기 시작한다.

전시 작가는 물론 동료들과 지인들이 어울려 걸쭉한 술판을 벌이는데,

예전 같았으면 담배연기 자욱한 주청에서 노래 가락도 간간히 흘러나왔다.

술자리에서 예술과 철학을 논하다 된소리도 났으나, 요즘은 술 마시는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그래도, 주청에서 예술가들이 뿜어내는 풍류가 인사동을 인사동답게 만드는 것이다.

오래된 술집으로 아직까지 명맥을 잇는 곳이라면 부산식당사동집정도다,

실비집’, ‘하가’, ‘누님칼국수’, ‘실내악’, ’춘원‘ ‘시인통신등은 사라진지 오래고,

그 뒤에 생겨났던 평화만들기뜨락마저 사라졌다.

사라진 가게를 대신해 유목민’, ‘낭만’, ‘시가연등이 옛날 풍류와 멋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사동의 트레이드마크처럼 큰길가에 자리했던 천상병 시인의 찻집 귀천은 뒷길로 밀려나고

초당또한 어렵사리 지탱하지만, 많은 풍류객이 드나들던 수희재인사동 사람들은 문을 닫고 말았다.



가는 세월 잡지 못하듯, 변하는 인사동을 어쩌겠는가?

변한 인사동보다 더 서러운 것은 정들었던 벗들도 가고, 훈훈한 인심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사진, / 조문호













엊그제 인사동에 들려 어느 외국관광객 팀을 따라 다니며 유심히 지켜보았더니,

대부분 큰 길가에 있는 잡화상만 기웃거리며 군것질만 하다 돌아갔다.
아무 매력을 느끼지 못한 듯 한데, 그런 사람들이 두 번 다시 인사동을 찾겠는가?




날이 갈수록 변질되어 가는 인사동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

전통과 예술의 거리로 살려 낼 방법을 다 같이 찾아내야 한다.
정체성을 잃고 잡상들만 득실댄다면, 인사동의 유명세를 언제까지 유지하겠는가?




인사동은 우리 전통과 함께 예술가들의 발자취가 담긴 곳이다.




먼저, 인사동의 역사부터 한 번 살펴보자.
조선 건국으로 수도가 된 한양은 창덕궁이 있는 북촌 주변에
고관들의 집과 양반들의 저택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멀리 떨어진 북악산과 남산자락에 모여 살던 양반들이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이후 북촌은 조선의 역사와 함께 500년의 역사를 지켜왔지만,
1900년대 초 일제에 의하여 왕조가 무너지고 신분제가 사라지며,
북촌 양반들의 가세는 하루가 다르게 기울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먹고 살기 막막해진 지체 높은 양반들이 집안의 귀중한 물건을 내다 팔기 시작하며
북촌주변이 점차 골동품시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한다.




일제는 1914년 관인방 일대의 이름을 인사동으로 바꾸었다.




해방 후에는 전통과 현대의 모습이 뒤섞인 매력에 끌려 예술가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전통찻집과 전시장들이 생겨나며 전통과 낭만의 거리가 형성된 것이다




인사동에 화랑과 표구점이 많이 들어서며 미술인의 출입이 꾸준히 늘어났다.
60년대 명동을 거점으로 모이던 문인들이 관철동을 거쳐,

70대 후반 인사동으로 옮겨오며 '사루비아'다방을 거점으로 인사동 문화가 꽃 피우게 된다. 
80년대 초반에 생긴 천상병시인의 찻집 ‘귀천’과 '누님칼국수'로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고,

'실비집'과 '하가'는 물론 피맛골'에 박종수시인이 문을 연 '시인통신'도 많은 예술가들이 더나들었다.

90년대 들어 이해림씨가 개업한 '평화만들기'에는 예술가들과 기자들이 많이 출입하기도 했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인사동에 시인들과 관련된 자리가 많았다는 점이다.

63년 김상옥시인이 '아자방'이란 골동품점을 차려 문인들의 교류처가 되었고,

목순옥씨가 차린 '귀천'에 이어 84년도에는 정동용시인이 교장으로 있던 '시인학교'도 개업했다.

그 이후에는 '순풍에 돛을 달고'에서 이생진시인이 정기적인 시낭송회를 가졌으며,

음유시인 송상욱씨가 인사동에 집필실을 차리기도 했다.

그리고 2014년 소리시인 이춘우씨가 시 낭송회를 위한 업소 '시가연'을 개업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시공간이 몰려 있어 미술인들의 출입이 많았던 반면, 문인들의 출입도 이에 못지않았다.
그 이후 '귀천'의 천상병선생과 목순옥여사를 비롯하여 민병산, 박이엽, 강 민, 심우성선생 등

인사동을 사랑하던 많은 분들이 돌아가시고, 살아계시는 분마저 몸이 불편해 잘 나오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제 대형건물이 여기 저기 들어서고 새로운 가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며
옛 모습은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예술가들의 발길마저 서서히 끊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인사동에 애정을 쏟아 붙는 사람들도 여럿 있다.

천상병기념사업회’ 이사장 김명성씨는 긴 세월 동안 사재를 털어 인사동 예술가들을 지원해 왔다.

틈틈이 모임을 주선하여 예술가들의 판을 만들고, 원로들에게 여비까지 챙겨주는 애정을 보였다.

‘통인가게’ 김완규회장은 무료 판소리공연을 정기적으로개최하여 우리문화를 알리는데 힘 써 왔으며,

‘나무화랑’을 운영하는 미술평론가 김진하씨는 좋은 전시들만 유치하여 인사동 전시문화에 기여한 바가 크다.

그리고 작고한 김수영시인이 찍힌 판화를 담벼락에 붙이는 Street Art를 펼치는 이태호교수 같은 분이 있기에

인사동은 아직 희망이 있는 것이다. 내가 몰라 그렇지, 어디 이 뿐이겠는가?




지금이라도 전통과 낭만의 거리를 되찾기 위해 많은 분들이 지혜를 모아야 한다.
먼저 인사동에 몰려 있는 전시장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만들자.




그 첫 번째 시도로 인사동 전시 소식을 알려주는 간단한 주간지를 만들어 안내소에 배치하자.
미술평론가 한 분을 선정하여 전시 소식지를 만들고 좋은 전시를 집중적으로 소개하자.
또한 인사동에서 전시되고 있는 다양한 전시를 홍보하므로서, 명실상부한 전시문화의 본거지로 만들자.




둘째, 예술가들이 다시 인사동으로 모여들게 만들어 인사동 낭만을 부활시키자.
천상병시인, 민병산선생, 박이엽선생, 중광스님 등 돌아가신 분들의 동상을 골목에 세우는 등

인사동에 예술혼을 불어넣자.




인사동의 매력은 이리 저리 얽힌 수 많은 골목이 아니던가?
골목마다의 특징을 살려 문학의 거리나 미술의 거리로 지칭해
예술가들이 한 곳으로 모여들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찻집이나 술집, 어디를 가도 반가운 예술가를 만날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모여 들 것이고,
예술가들이 뿜어내는 멋이 낭만의 거리로 자리 잡게 할 것이다.




기존의 ‘인사전통문화보존회’는 상인들의 모임이라 기득권을 지키려 하고.
‘종로구청’ 또한 그들의 눈치나 보는 탁상행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제 인사동을 사랑하는 예술가들이 힘을 모아 나서는 길 밖에 없다.
다 같이 지혜를 모아 종로구청과의 협의체부터 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의 관심과 협력을 부탁드린다.

사진, 글 / 조문호


















‘한국민예총’의 재기를 위한 ‘민족예술, 다시 날아오르다’기금 마련전이 인사동 ‘관훈갤러리’ 전관에서 개막되었다.

미술평론가 최석태씨가 기획한 이 전시에는 신학철화백을 비롯한 민중작가 40여명이 참여한 대규모 전시다.





개막식이 열린 지난 19일에는 민예총 작가들을 비롯한 많은 인사동 사람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전시가 열리기 몇 일전부터 카메라가 고장나 사진을 찍을 수 없었는데,

이 날은 강민시인과 신학철화백, 미술평론가 김진하씨 등 많은 분들을 만났으나, 못 찍어 안절부절 했다.






전시 디스플레이 등 준비 상황도 기록하지 못했다.

뒤늦게 카메라를 빌려 개막식과 다과회, 그리고 뒤풀이에서 많은 분들을 찍었다.

사진이 너무 많지만, 한 번 살펴보기 바란다.

반가운 사람은 물론, 인사동 꼴통들도 많이 나오셨다.





그 날 만난 분들을 기억나는 대로 거명해 보겠다.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빠진 분들께 죄송할 뿐이다.






백기환선생을 비롯하여 손장섭, 김정헌, 유홍준, 성완경, 이애주, 임옥상, 정복수, 김태서, 천호석, 이종구, 김천일, 박종관, 이수호, 이부영, 임진택, 유진규, 장순향, 정태춘, 임정희, 조경숙, 박불똥, 유순웅, 최석태, 정영신, 서인형, 이성호, 손병휘, 박세라, 조경연, 박홍순, 김영진, 김진열, 두시영, 심정수, 이명복, 이태호, 장경호, 최병수, 이광군, 최효준, 손기환, 양상용, 정세학, 나종희, 곽대훈, 김명지, 박 철, 김이하, 김도수, 최명철, 이양재, 손병주, 하태웅, 이재민, 정재안, 김 구, 신상철, 이미례, 이 반, 정영철, 김명성, 조준영, 김수길, 이명희. 공윤희, 민영기, 노광래, 임경일, 강선화, 박윤호, 권양수, 이희종, 박영애, 김보영, 최옥경, 김미진, 손영익, 안만욱, 김덕철, 김도수, 황의범, 이경란, 김다솜, 안광택, 이태환, 성기준, 고재열, 강영민, 유인택, 이승곤, 이성희, 양형규, 임영선, 정필주씨 등이다.






이 전시는 다음 달 6일까지 이어진다.
오전 10시 30분에 문을 열며, 매 월요일과 1월1일은 휴관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9일은 두 모임이 동시에 벌어져 졸라 바빴다.

김명성씨가 마련한 ‘인사동사람들’ 만찬과
신학철, 강고은씨가 마련한 만찬이 같은 시간에 있었다.

 

강고은 시인이 준비한 만찬모임은 신학철 선생이 사시는
장안평에서 한다는 연락을 받았기에 참석할 수 없었다.
신학철선생과 강고은 시인이 오래 전부터 연문을 모락모락 피웠으니,
중요한 자리라는 낌새는 알아차렸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경복궁’에서 열린 만찬에 이어 이차로 ‘유목민’ 가는 길에,
그때 사 신학철선생 모임이 인사동 ’낭만으로 변경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좀 일찍 연락해 주었더라면, 먼 길이 아니니 양쪽을 왔다 갔다 할 수 있었는데, 아쉽기 그지없었다.
늦었지만, 발길을 ‘낭만’으로 돌렸는데, 파장이긴 하지만 많은 분들이 모여 있었다.
신학철선생의 친구인 춘천 사시는 황효창화백 내외분도 와 계셨다.
분명 예사모임은 아니었다.

 

그 자리에는 원로 주재환선생을 비롯하여 민정기, 황의선, 김정환, 박불똥, 장경호, 이태호, 이인철,
김명희, 송진헌, 김진하, 박흥순, 김환영, 김정대, 최석태, 박영애, 정영신씨등 많은 분들이 있었다.

 

손장섭선생과 박세라씨도 왔다고 했으나, 먼저 가고 없었다.
당시는 똥인지 된장인지 몰랐지만, 여쭈어볼 겨를도 없었다.
술이 깨어 생각해보니, 신학철선생과 강고은 시인의 가연을
주변 분들에게 알리는 자리 같았는데, 축하 인사도 드리지 못했다.

 

강고은 시인은 작고한지 오래된 김진석화백의 미망인인데, 그분은 살아 생전 신학철선생의 절친이 아니던가.
신학철선생의 사모님께서도 오랫동안 투병하다 세상을 떠난 지가 3년이 지났다.
이제 긴 외로움을 떨치고, 새로운 가정을 꾸린다니 이보다 더 좋은 경사가 어디있겠나.

 

당시에는 술이 취한 상태라 사진만 몇 장 찍고 나왔으나,
뒤늦게 이인철씨에게 물어보았더니 후배들이 두 분의 가슴에
꽃을 달아드리고 주재환 선생께서는 즉석 주례사도 했다고 한다.

 

준비한 선물을 전달한 분도 있지만, 미처 준비하지 못한 분들은 십시일반 거두어
50만원 상당의 상품권을 뒤늦게 전달했다고도 한다.
그런 줄 알았더라면 두 분의 가약을 기념하는 사진이라도 제대로 찍어 드려야 하는데 말이다.

 

뒤늦게나마 두 분의 만혼을 축하드립니다.
부디 행복한 여생을 꾸리시길 바랍니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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