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봉현의 느낌이 있는 ‘新 풍물기행’

 

 

그래픽=송재우 기자

                                   ▲ 서울 종로구 삼청동 길은 예스러움을 간직한 한옥과 현대적인 분위기의 건물들이 어우러져 독특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어떤 이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했다. 외국의, 특히 유럽 쪽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며 들었던 생각이 세상은 넓고 볼거리는 참 많다는 것이었다. 정말 아름답고 멋진 거리들이 많았다. 나는 파리나 런던, 뉴욕 같은 너무도 크고 유명한 도시들에는 그리 큰 매력을 못 느끼는 것 같다. 그보다는 약간 작지만 옛것들이 더 많이 살아 숨쉬는 그런 곳들이 더 좋았다. 그래서 큰 도시보다 조금은 작은, 그리고 개발이 좀 느리게 진행된 유럽의 중소도시나 시골 풍경들이 나에게는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체코의 프라하 카를교 부근의 카페골목, 그리스 미코노 섬의 미로 같은 뒷골목들, 독일의 브레멘이나 로덴버그의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골목 풍경, 리투아니아 카우나스의 옛 거리, 루마니아의 히기소하라나 브라쇼프 같은 지방도시의 골목들…. 하나씩 꼽기 힘들 만큼 많은 곳들의 아름답고 낭만적인 풍경들을 접할 때마다 가슴이 벅찼다. 그런 곳들은 뭔가 자기들만의 독특한 것들을 품고 있어서 뭐라고 말로 설명하기 힘든 색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그런 아름다운 거리를 걸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왜 그런 멋진 곳들을 찾기 힘들까 하는 생각들을 막연히 해보곤 했었다. 서울 대학가와 강남 등의 유명 거리를 가 보면 너무나 소란스럽고 북적거려 은근히 마음을 들뜨게 하는 낭만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뭔가 가슴에 스미는 그런 아련한 느낌 같은 건 없었다.

그러다 오랜만에 가보게 된 삼청동 길.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펼쳐지는 독특한 거리 풍경에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예스러움을 간직한 한옥 건물과 예쁘고 현대적인 분위기의 건물들이 어우러져 멋진 장면과 색다른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골목 안팎과 언덕배기에 질서가 있는 듯 없는 듯 섞인 다양한 분위기의 가게와 카페, 음식점들, 그리고 그 길을 걷고 있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독특한 매력을 풍긴다. 아무데나 카메라를 들이대도 멋진 작품사진이 될 것 같은 분위기에 취해, 이 골목 저 골목 거닐다보면 언제부터 이런 보물 같은 거리가 생겨났는지 신기한 생각이 든다.

가게 안의 물건 하나하나, 음식점의 메뉴 하나하나가 깔끔하고 정갈해 보여 주인의 세심한 손길과 정성이 느껴진다. 아, 우리에게는 없는 듯해 늘 아쉬웠던 그런 거리가 이미 여기 있었구나!

한동안 못 와본 사이에,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곳은 벌써 아주 멋진 거리가 되어 있었고 계속 더 아름답게 진화 중인 것을 여기저기서 감지할 수 있다. 최첨단 디지털이 관통하는 서울 안에 이런 아날로그적 감성이 살아 숨쉬는 곳. 도심 한가운데서도 청량한 기운을 간직하고 있는 이곳이 바로 삼청동 길인 것이다.

먼 옛날 나의 대학시절, 삼청동은 그쪽 버스 종점 오지로, 여름방학 때 친구들과 큰 맘 먹고 가서 계곡에 들어가 발 담그고 놀다 왔던 기억이 있는 정도의 곳이었다. 언젠가부터 북촌 한옥마을이 매스컴에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점점 더 관심을 끌고 있지만 삼청동과 직접 연결시켜 생각하진 않았었는데 삼청동이 이 북촌에 속하고 그 끝자락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행정동으로서 삼청동은 삼청동, 팔판동, 안국동, 소격동, 화동, 사간동, 송현동 등 여러 동을 아우르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언급하는 삼청동 길은 작은 의미의 삼청동을 말한다. 삼청동의 지명이 도교의 삼청전이 이곳에 소재한 데 유래하지만 산이 맑고 물이 맑아서 사람들의 인심 또한 맑고 좋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고 보니 하늘도 맑고 길 너머로 보이는 북악산 숲도 맑고 코끝을 스치는 바람마저 상쾌하다. 길가에 들어선 건물들, 골목길을 걷는 사람들도 모두 맑아 보이고, 그 속에 함께 섞여 걷고 있는 나 또한 맑아지는 느낌이다.

이곳 삼청동 길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쑥 지나가면 한 시간 정도면 걸어 지나갈 거리지만 구석구석 보물처럼 감춰진 가게에서 쇼핑도 하고, 차나 커피 맛도 보고, 배고프면 양식이건 한식이건 입맛에 맞는 맛집을 찾아 들어가 즐기다 보면 한나절이 훌쩍 지나가고 만다. 또 도시생활에 지친 머리를 식히기에 딱 좋은 삼청공원의 맑은 숲이 여기에 있다. 북악산에 이어진 산 속의 공원인 이곳은 수백년 된 소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 이곳 솔향이 지친 영혼에 좋은 휴식을 줄 듯 싶다.

이 길은 주변으로 인사동 쪽에서 정독도서관 쪽, 사간동·소격동 쪽 인근에 갤러리가 밀집돼 있어 예술작품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광화문, 경복궁이 바로 인근이니 친구들 또는 연인들이 한가한 시간에 고궁 산책이나 예술품 감상을 하고 이곳을 찾아들어 맛있는 것도 먹고 구경도 한다. 쇼핑, 외식, 레저를 함께 즐기며 추억거리를 만들어줄 수 있는 도시 안 복합 문화공간, 휴식공간으로 일품이다. 삼청동 길의 메인 도로변은 말할 것도 없고 뒷골목 여기저기 숨어있는 옷가게, 카페, 식당들이 저마다의 독특한 외모와 개성 있는 상품, 메뉴로 손님을 맞고 있어 어느 몇 군데를 가보고 삼청동을 다 보고 온 것처럼 말하는 건 무리일 것이다. 그래서 삼청동은 어느 한 곳을 정하고 가보는 것보다는 삼청동, 삼청동 길 자체를 느끼며 여기저기 숨겨진, 마음에 드는 곳들을 천천히 꼼꼼하게 살펴보는 게 더 즐거울 듯싶다.

삼청동 길은 처음에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 작품 활동을 하면서 생성됐다. 하지만 거리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북적대면서 비즈니스화 되기 시작했다. 고도의 상업자본이 이곳을 잠식해 들어오면서 원래 추억이 깃들었던 이곳만의 독특한 모습들이 처음과 달리 변질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들도 나온다.


커다란 규모와 화려한 외형만을 자랑하는 건물들이 거리를 점령해 버리면 이곳도 도심의 다른 삭막한 공간과 크게 다를 게 없어져 이곳만이 갖는 매력이 급격히 떨어지게 될 것이고, 결국에는 찾는 사람들도 점점 줄어들게 될 것이다. 삼청동 길이 멋진 추억과 낭만의 거리로 오래도록 보존되게 하려면 이곳을 지키는 문화, 예술가들이 어떤 이유로든 여길 뜨고 싶어하지 않게 배려하는 방안이 지속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젠 이런 멋진 거리가 있어, 문득 생각나면 이곳을 찾아 거닐고 한가로이 거리 풍경을 감상하며 머리를 식힐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이제 나는 외국인 친구들이 방문하면 맨 처음 데려가 보여주는 곳이 이곳이 되었다. 옛것과 초현대식이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절묘하게 조화된 아름다운 이 거리가 오래 간직되기를 기원해본다.

[스크랩/ 문화일보] 박봉현 : 소설 ‘카투사’ 저자

[노래가 있는 풍경] 안성현 ‘부용산’

1947년 목포 항도여중 교사 박기동이 24세에 요절한 누이를 추모해 시를 지었다. 여기에 같은 학교 음악교사 안성현이 열여섯 살 여제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선율을 붙였다. 달 밝은 밤, 빨치산들이 부르던 노래, 그래서 오랫동안 금지곡이었던 노래. 벌교 사람들은 꼬막 팔아 번 돈으로 이 노래 ‘부용산’을 살려냈다.

부용산 자락에서 내려다 본 벌교읍내 전경. 한적한 포구였지만 수탈을 목적으로 일제가 개발해 오늘에 이르렀다.

역사의 시곗바늘을 몇 년 전으로 돌려보자. 부엉이바위의 비극이 발생하기 22일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에 소환되고, 한나라당이 재선거에서 전패한 2009년 4월 30일 밤이다.

서울 종로구 운현궁 뒤켠 주점 ‘낭만’에 애절한 노랫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부르는 목소리는 각기 달랐으나 노래는 딱 한 가지, 대중에게는 낯선 단 한 곡의 노래를 번갈아 가며 정성을 다해 부르고 있었다. 모인 사람들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정·관계, 문화계를 움직이던 쟁쟁한 인사들.

이들이 이날 이 허름한 주점을 찾은 이유는 간단하다. 참석자 저마다 노래 ‘부용산’을 돌아가며 부르고 또 듣기 위한 것이었다. 딱 한 곡을 두고 40여 명이 젖 먹던 내공까지 다해 노래를 부르는 해괴한 풍경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술자리는 점차 숙연해져 비장감마저 넘쳐흘렀다. 부르는 이마다 제각기 간절함을 더해 각기 다른 가락으로 뽑아낸다. 어떤 이는 남도 민요조로, 또 어떤 이는 엄숙한 성악풍으로, 저마다 노래에 사연을 녹여내 ‘부용산’을 불렀고 한쪽 구석에서는 숨죽여 훌쩍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슨 사연이 있고 무슨 까닭이 있기에 이다지도 많은 사람이 단 한 노래를 구슬프게 부르고 또 불렀던 것일까? 거슬러 본 사연은 노랫가락만큼이나 기구하고 애절하다. 한때 이 땅에서 ‘부용산’을 부르면 곧바로 당국에 끌려가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뒷골목 술집에서 주위를 살피며 숨죽여 노래를 불렀다. 단장이 끊어질 듯한 노래는 오랜 시절 금지곡으로 묶여 박제화되었다가 1980년대 후반 민주화와 더불어 햇빛을 보고 조금씩 일반 대중에게 다가가게 된다.

서울 종로 운현궁 뒤켠 허름한 골목길에 위치한 낭만식당. 노래 ‘부용산’ 부르기 경연대회가 열린 바로 그 공간이다.

 

악보 없는 노래

그러던 어느 날 언론인이었던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과 서상섭 전 국회의원, 김도현 전 문화부 차관 등이 ‘부용산’을 흥얼거리다 ‘(악보가 없어) 사람마다 곡조가 다르니 누구 노래가 더 나은지 한번 겨뤄보자’고 의기투합했다. 이를 들은 이두엽 교수(군산대)가 이날 행사를 기획, 진행하게 된다. 악보마저 금지되어 오랫동안 구전으로 전해온 연유로 음정도 박자도 제멋대로인 노래이지만, 이참에 마음 터놓고 한번 불러보자며 ‘작당’한 것이 바로 이날 노래 한마당이었다. 이날 노래자랑은 한겨레신문에 이같이 소개되면서 알려진다.

이날 노래자랑에는 김도현씨가 심사위원장, 소리꾼 임진택씨는 사회를 맡았다. 더벅머리의 송상욱 시인. 기타의 트로트풍 선율에 맞춰 나긋한 음색으로 ‘부용산’ 가사를 곱씹었고 지역 대표라는 벌교의 쪽물 염색 장인 한광석씨는 시원시원하면서도 구슬픈 여음 남는 목소리로 박수를 받았다. 감옥에서 노래를 익혔다는 운동권 출신의 서상섭 전 의원은 낭랑한 저음을 깔았다.“…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붉은 장미는 시들어지고/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한국전쟁 때 낙오한 인민군 장교에게 가락을 처음 들었다는 이계익 전 교통부 장관은 아코디언으로 애달픈 선율의 ‘부용산’을 들려주었고, 연주는 곧 합창으로 바뀌었다.

누가 누가 잘하나. 인사동 주점 ‘소설’의 주인인 ‘재야가수’ 염기정 씨의 차례에서 노래 마당의 흥은 절정에 올랐다. 문인들이 읊조린 노래를 어깨너머로 들으며 외웠다는 그는 매혹적인 탁성으로 고즈넉하게 ‘부용산’을 불러 열광적인 앙코르 요청을 받았다. 분위기가 이슥해지자 김도현 씨가 불콰한 얼굴로 일어났다.

“오늘은 진보, 보수 모두 실패한 날, 누구도 이기지 못한 날입니다. 노래를 들으며 좌절과 절망을 추억하고, 희망과 낙관을 떠올려봅시다.”

이날 심사 결과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밤늦도록 술잔 기울이며 ‘부용산’과 자기네 삶에 얽힌 이야기꽃을 피웠다. ‘부용산’이 엮어낸 애잔한 풍류의 밤이었다는 게 한겨레신문이 전한 내용이다.

‘부용산’은 슬픈 노래다. 누구나 한번 들으면 그 비장미에 온몸을 부르르 떨게 된다. 당초 출발은 한 요절한 누이를 추모하는 현대판 ‘제망매가’쯤 되는 노래였지만 세월을 잘못 만나 1960~80년대에는 저항가요로 한 시대를 장식한다. ‘부용산 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60년 묵은 구전가요 ‘부용산’은 이렇게 시작된다.

‘부용산’은 본디 1947년 목포 항도여중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시인 박기동(1917~2004)이 24세에 요절해 전남 벌교 부용산 자락에 묻은 누이를 추모해 지은 시였다. 여기에 같은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음악교사 안성현이 열여섯 살 여제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선율을 붙였다고 전한다. 우연히 두 여자의 죽음이 겹친 것이다.

 

작곡가 안성현은 일반 대중에게는 낯선 음악가다. 그러나 그가 김소월의 시에 가락을 붙인 저 유명한 ‘엄마야 누나야’의 작곡자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일제치하에서 우리 민족의 슬픔을 애절하게 노래했던 ‘엄마야 누나야’의 작곡가가 일반에게 알려진 건 얼마 되지 않는다. 오랜 세월 교과서와 노래집에는 김소월 시, 작곡가 미상으로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전남 나주 출신인 그는 6·25 당시 월북했으며 북한 국립교향악단 단장을 지냈다고 전한다. 그런저런 이유로 노래 ‘부용산’의 작곡자는 지난 권위주의 시대, 그 오랜 세월 동안 수면 아래로 사라지고 작곡자 이름은 백지로 남게 된다.

 

1960~80년대 저항가요

 

그러나 노래는 해방 공간의 폐허가 된 시대적 정서에 맞물려 호남 전역에서 소리 소문 없이 인기를 끌며 퍼져 나갔다. 특히 전라남도에서 유행했던 이 노래는 ‘좌익’들에게는 자신들의 군가처럼 받들어지며 애창된다. 실제로 지리산, 회문산 일대 골짜기의 달 밝은 밤이면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빨치산들이 워낙 구슬프게 불러대는 바람에 인근 마을 사람들까지 밤잠을 설쳤다고 한다. 애초 이념과는 무관했던 이 곡이 금지곡이 된 데에는 이처럼 빨치산이 즐겨 불렀다는 이유가 한몫한다. 사실 빨치산들도 노래에 이념성을 넣어서 불렀다기보다는 자신들의 처지가 고달파서 불렀겠지만 여순 사건 등을 거치면서 노래는 당국에 의해 엄격히 금지된다.

 

이 여파는 작곡자 안성현에게 옮겨져 1949년 안성현은 면직처분을 받았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월북해버렸다. 난데없이 유탄을 맞게 된 박기동 시인 역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부용산’의 작사자임을 철저히 숨겼다. 하지만 계속되는 당국의 가택 수색, 연금 등을 피해 호주로 이민 가게 된다. 이 같은 연유로 지하로 깊숙이 숨었던 노래는 1960~80년대 운동권, 진보 지식인들에게 작자 미상의 구전 저항가요로 은밀하게 전해졌다. 권위주의 시대, 극히 일부에게 전해지며 겨우 명맥을 이어오던 노래는 1980년대 후반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계기로 드디어 대중에게 존재감을 드러내게 된다. 그 뒤 가수 안치환이 음반을 낸 것을 기점으로 한영애, 윤선애, 이동원, 국소남 등 여러 가수가 경쟁하듯 불렀지만 실체를 아는 일반인은 여전히 손에 꼽을 정도다.

 

호남인의 애창곡인 ‘부용산’의 실체가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노래는 연고를 주장하는 지역 간 갈등의 씨앗이 되는 또 다른 기이한 운명을 만난다. 전술한 바와 같이 노래는 목포 항도여중 음악교사 안성현이 당시 사랑에 빠졌던 미모의 여제자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작곡했다는 일부의 주장에 따라 한동안 목포의 노래로 인정받게 된다. 당연히 목포지역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뒤늦게 벌교번영회가 중심이 된 열혈 벌교 주민들이 이에 반발, 벌교의 노래로 선언한다. 노래 한 곡을 두고 두 지역이 ‘원수’가 된 상황이다. 벌교 주민들의 정성은 뻗쳤다. 목포에 빼앗긴 노래를 되찾기 위해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이어 꼬막 팔아 번 돈으로 성금을 모아 호주로 떠난다. 호주로 이민 간 작사자 박기동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다.

 

박기동 시인의 증언으로 폐병으로 사망한 누이동생을 벌교의 뒷산 부용산 자락에 묻고 오며 시를 지었고 항도여중 재직 당시 동료 교사 안성현이 노랫가락을 붙였다는 실체적 진실을 확보한 벌교 주민들은 마침내 ‘부용산’을 벌교의 노래로 선언한다. 그 뒤 해마다 벌교꼬막축제 등 크고 작은 벌교 행사에는 반드시 노래 ‘부용산’을 의무적으로 부르도록 했다. 박 시인은 1987년 ‘부용산’이 해금되고 그 뒤 노래 ‘부용산’이 재조명되자 2002년 일시 귀국해 산문집 ‘부용산’을 출판했고 노래가 벌교의 노래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해준다. 이후 2003년 호주 생활을 청산하고 영구 귀국했으나 이듬해인 2004년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


부용산 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붉은(병든) 장미는 시들었구나

부용산 산허리(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부용산’을 부르는 지역 주민 안택조 씨. 장좌리 별신굿 보존회장이기도 한 그는

부용산을 되찾기 위해 호주까지 쳐들어 갔다 온 열혈 부용산 노래 지킴이다.

 

 

벌교 주민들의 ‘부용산’에 대한 사랑은 용광로보다 뜨겁다. 노랫말이 1절밖에 없어 아쉬운 나머지 박 시인에게 청을 넣어 2절 노랫말까지 근사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지금의 2절 가사는 원곡보다 수십 년 뒤에 추가로 지어진 것이다. 주민은 성금을 걷어 벌교 뒷산 부용산 오솔길에 큼지막하게 화강암으로 노래비를 세우고 내친김에 산책로까지 조성했다.

그러나 벌교는 노래 ‘부용산’보다는 소설 ‘태백산맥’으로 친숙하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주 무대가 벌교이다 보니 벌교 곳곳에는 ‘태백산맥’의 흔적이 등장한다. 소설 속에서 토벌대가 공짜로 머물던 남도여관(당시 실제 상호는 보성여관)이나 지역 계엄사령관의 취임식 때마다 열병과 분열식이 벌어졌던 벌교 남초등학교 등이 여전히 역사를 증거한다. 남도여관을 뒤로하고 자그마하게 서 있는 산이 부용산이다. 말이 산이지 해발 192m에 불과한 동네 뒷산이다. 그렇지만 벌교 사람들에게 부용산은 정신적인 지주다. 행정관청과 번영회가 힘을 합쳐 조성해 놓은 ‘부용산 시오리 오솔길’을 오르다보면 부용산 노래비가 찾는 이를 반긴다. 이쯤 되면 외지인들은 ‘부용산’을 벌교의 노래로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해마다 벌교꼬막축제에서 부용산을 부르는 지역 주민 안택조(65) 씨는 “목포는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도 있고 ‘목포는 항구다’도 있는데 왜 벌교의 노래 ‘부용산’까지 탐내는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안씨는 지역 국회의원이자 경원대, 호남대 총장을 역임한 이대순(82) 씨와 더불어 20여 년 전 호주까지 ‘쳐들어가’ 박기동 시인으로부터 ‘부용산’이 벌교의 노래라는 구술 증언을 확보해온 ‘부용산’의 열혈 지킴이다.

 

벌교의 노래 ‘부용산’

 

이쯤해서 부용산을 모르는 사람은 유튜브나 스마트폰을 통해 한번 들어보기를 권한다. (http://www.youtube.com/watch?v=vXq3x4hz9gM) 노래는 지나치게 처연하고 넘치게 아름답다. 애상이 가슴을 꾹꾹 찌르고 있지만 깊고 그윽한 격조를 유지한다. 굳이 유식한 말로 표현하자면 애이불비(哀而不悲)다. 슬프지만 겉으로는 결코 슬픔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남루하지 않다. 일찍이 소월이 자신의 시 ‘진달래꽃’에서 강조한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와 맥을 같이한다고 보면 된다.

 

“벌교에서는 주먹 자랑, 여수에서는 돈 자랑, 순천에서는 인물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나는 문득 “벌교 가면 ‘부용산’ 빼고는 노래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 그 무섭다는 벌교 주먹이 언제 날아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뜨거운 여름이다. 그래서 슬픈 노래 ‘부용산’을 들으면 여름은 더욱 외롭다. 맞다, 그리움 강이 되어 맴돌아 흐르고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꿈도 간 데 없다. 벌교 부용산 저 멀리엔 재를 넘는 석양만이 홀로 섰고 병든 장미는 뙤약볕에 시들어간다.

 

 

글·김동률|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empas.com 사진·권태균|사진작가·신구대 교수 

(스크랩/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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