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아트 기금마련전 'plan B를 위하여

지난 1011일부터 16일까지 인사동 57th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화가들이 나서고 예술하라‘, ’네오룩이 후원한 이 전시는

미술평론가이자 기획자인 김진하씨에게 드리는 상이자 짐이다.

 

30여 년간 '삶의 미술''비판적 형상성'을 지향하며

현장성 미술을 중시해온 나무아트의 또 다른 도약을 바라는 전시다.

 

  사실나무아트'그림마당 민'을 이은 인사동의 자존심이었다.

우리나라 민중 미술의 본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무아트'를 기점으로 우리나라 현장성 미술을 더욱 발전시켜,

사회에 기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많은 작가가 동참한 것이다.

 

  원로급에 속한 주재환, 신학철, 김정헌화백을 비롯하여 김보중, 김상구, 김억, 김재홍,

 김주호, 김준권, 김진열, 류연복, 박진화, 손기환, 송창, 안창홍, 윤여걸,

이동환, 이인철, 이태호, 이흥덕, 장경호, 정복수, 최경선, 최병민 등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민중미술가 24명이 작품을 내 놓았다.

 

  늦장 부리다 지난 14일에서야 정동지 만나 전시장에 들리게 되었는데,

주말을 맞은 인사동과 연결된 송현동 주변에는 가을 소풍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전시장에 올라가니, 우리나라 민중 미술의 원조를 만난 듯 눈에 익은 작품이 늘렸다.

 

  송현동 꽃밭 가는 길은 북새통이라 사람을 비집고 들어갔는데,

옆에서 열리는 좋은 전시에 사람이 없어니, 기분 더럽더라.

이건 모르는 국민들 잘못이 아니라 이끌고 알려야 하는 정치와 행정의 잘못이다.

 

  전시장은 홍성미씨가 지켰고, 옆 베란다에서 손기환, 김진하씨가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술이라도 한잔 마셔야 속이 풀릴 것 같았는데, 몸이 불편해 끌고 나온 차가 발목을 잡았다.

딱 한 잔만 얻어 마셨는데, 그 맛에 끌려 인사동 벽치기 골목을 배회했다.

 

  사실은 페이스북에서 보았던 이태호씨가 새긴 홍범도장군 벽화가 보고 싶었다.

마치 유목민상표처럼 유목민앞을 버티고 섰는데, 골목 분위기가 꽉 잡혔다.

이놈들! 어디 나타나기만 하라” 는듯 골목을 지켜주니, 어느 잡귀가 얼씬거리겠나?

 

  ’57th갤러리에서 열리는 나무아트 기금마련전 'plan B를 위하여

오늘이 마지막이라 보실 분은 서둘러야 한다.

일단 좋은 작품이 많다. 볼거리도 볼거리지만, 함께하는 의미는 더 크다.

 

사진, / 조문호

 

김진열씨의 ‘모심’전이 지난 5월17일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개막되었다.

그는 좋아하는 화가 열 손가락에 꼽히는 분이라, 기대했던 전시였다.

 

전시장으로 가다 지리산에 은거하는 무예가 하태웅씨를 만났다.

그 역시 ‘모심’전을 보고 가는 길이라는데, 그날 일진이 만만찮을 것 같았다.

 

그 날은 가야 할 전시가 세 곳이나 되어 ‘일타삼피’라며 좋아했으나,

반가운 분들 만나다 보면 술에 녹초가 될 것은 불을 보듯 훤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덱스갤러리’에서 열리는 이창성의 ‘나는 시민군이다’전과

김진열의 ‘모심’전은 민중의 한과 연결되어 궤를 같이한 전시라고 느껴졌다.

김진열씨의 형상미술은 민중들의 아픔을 담아내는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다.

 

4시에 개막식이 열린 ‘나는 시민군이다’부터 보고 갔더니,

김진하관장과 나종희씨 두 분만 남아있고 모두 뒤풀이 집으로 가버렸다.

 

전시된 작품을 돌아보니 입이 쩍 벌어졌다.

‘레오록’에 소개된 작품을 보긴 했으나 실제 작품과는 완전히 느낌이 달랐다.

 

철판이나 양철을 덧붙여 만든 작품들은 마치 찢기고 분열된 민중의 노동이고 상처였다.

투박한 질감은 존재 자체의 진정성을 담아내고 있었다.

 

용도를 다해 휘어지고 녹슬거나 쇠락한 사물을 연결하거나 덧붙인 형체 위에

붓질한 드로잉은 막 쌓아 올린 토담처럼 간결하면서도 원시적 편안함을 주었다.

 

투박한 조형적 감수성이 빚어낸 그의 작품에서 삶에 대한 경외감이 일었고,

버려진 사물이 새롭게 태어나는 역동적 에너지가 꿈틀거렸다.

 

작가의 삶이 베인 원시적인 힘은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직관이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물질과 거침없는 붓질에서 민중의 울림이 일었다.

생명에 대한 존중감이 저절로 우러났다.

 

김진열씨의 생명존중 작업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미술평론가 김진하씨의 비평 ‘투박한 존엄, 그 생명의 모심’으로 부족한 소견을 대신한다.

 

“김진열의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은 오윤의 판화나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에 등장하는 숱한 사람들처럼 익명적 민중성을 확보한다. 다만 오윤이나 리베라가 객관적으로 기호화된 인물의 전형성을 확보했다면, 김진열의 인물들은 정서를 환기하는 추상적 기운으로 기능하는 점이 다르다. 김진열의 작업이 사실주의적 재현성보다는 표현주의적 속성에 가까운 건, 정형적으로 패턴화된 캐릭터를 부여받은 인물 구성 방식에서 이탈하는 그의 조형적 특성으로 인해서다. 그런 면에서 김진열의 비정형적 형상성의 회화적 긴장감은 오히려 싱싱하다.”

https://blog.naver.com/josun7662/223105243701

전시는 5월30일까지 열린다.

 

작품에 대한 여운을 안은채, 뒤풀이 장소인 ‘사랑채’로 갔더니, 김진열씨 외에도 미술평론가 최석태,

화가 장경호, 김 구, 손기환, 김재홍, 이태호, 이재민, 이운구, 이흥덕, 조신호, 김이하시인 등 여러 명이 있었다.

앞쪽에는 지방에서 오신 손님들이 계셨고 다락방까지 가득 차 끼일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반가운 분들 사진 찍느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마신 술에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소주를 드시는 분이 없어, 탈 많은 막걸리를 마신 게 마음이 걸렸다.

 

정동지를 '사랑채'에 남겨둔 채, 이창성씨 뒤풀이가 열리는 ‘부산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개막식에서 사람이 많아 인사도 드리지 못한 이창성선배께 인사도 드리고,

시민군 방송원이었던 차명숙씨 더러 40여 년 전에 찍힌 예쁜 모습에 반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왜 술만 취하면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는지 모르겠다.

평소에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 내성적인 성격인데, 그놈의 술만 들어갔다 하면 180도로 바뀌어 버린다.

정동지라도 같이 있으면 덜 할 것 같아 부산식당으로 불렀으나, 이미 파장이었다.

 

김문호, 이규상씨와 ‘사랑채’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 곳은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김문호씨와 이규상씨는 언제 갔는지도 모르겠고, 정동지마저 줄행랑쳤다.

오죽하면 인사동 물귀신 장경호씨가 택시에 태워 집까지 데려다 주었겠나?

뒤늦게 찍은 사진을 보니, '예당'에서 찍은 사진도 있고 임경일씨 모습도 보였다

 

제 버릇 개 주지 못해, 술 자리는 일체 가지 않기로 맹세했으나, 이 역시 개 맹세 될까 두렵다.

 

사진, 글 / 조문호

 

[2023.5,20작성]

2021.10.1

지난 28일은 많은 화가들이 방문해 주셨다.

원주에서 김진열씨가 올라와 김진하, 이태호, 김정헌씨가 모여 역적모의 하는 ‘이모집’으로 안내했다.

 

그 자리는 김수영시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그림전을 협의하는 오찬 자리였다.

‘흐린 세상 건너기’로 건너가 차 한잔하고 전시장에 돌아오니, 사진가 최정균씨가 와 계셨다.

 

이 분은 나와 동갑인데 무슨 비결이 있는지, 나보다 10년은 젊어 보인다.

그리고 전시장 올 때마다 봉투를 내 놓으며, 좋은 전시를 어찌 그냥 볼 수 있냐고 하신다.

그 보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뒤이어 류연복, 박진화, 손기환, 이인철, 정복수, 박문종씨 등 화가들이 전시장을 방문해 주셨다.

 

그날은 학고재에서 개막된 박영균의 ‘보라색 언덕 너머’와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정비파의 ‘한라에서 백두까지’ 목판화 전시까지 겹쳐

겸사겸사 서울 나들이를 하신 것 같은데, 다들 그리웠던 얼굴이었다.

 

문 닫은 전시장에서 숨겨 둔 와인으로 마시는 술맛은 더 좋았다.

발동 걸린 술자리가 ‘사랑채’로 이어졌는데,

술안주로 내놓은 나물에 취했는지 한 사람 한 사람 쓰러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김진열씨가 어지럽다며 일어나더니, 류연복, 이인철씨까지 다락방에 더러 누웠다.

 

화단의 술 판을 휩쓸던 역전의 용사들이 차례대로 무너진 사건은 오랫동안 구설수에 오를 것이 틀림없다.

그 와중에 정복수씨는 내 초상화까지 그렸는데, 마치 지명수배된 범죄자 형상이었다.

 

그 다음 날인 29일에는 일찍부터 구중서선생을 비롯하여 장봉숙, 서정란 시인이 오셨다.

어려운 걸음을 하신 구중서 선생께서 식사하러 가자는데, 어찌 나 몰라라 하겠는가?

 

더구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나온데다 전시장에서 만나기로 한 선약까지 있었다.

대전의 이석필씨에게 연락받은 김문호씨가 먼저 전시장으로 올라왔지만,

잠시 기다리게 하고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두 분 식사하는 자리에 끼어 술만 홀짝홀짝 마셔야 했다.

그런데, 밥 값 내려고 따라 나섰는데 구중서 선생께서 계산해 버렸다.

그렇다면 차라도 대접해야 하지만 기다리는 사람이 마음에 걸려 찻집은 따라갈 수 없었다.

그나저나 술을 급하게 마셨더니 일찍부터 취해버렸다.

 

헐떡이며 4층까지 올라갔는데, 다들 식사하러 가고 없었다.

‘마중’에 갔다던 이석필씨와 김문호씨는 간판을 잘못 보았다며 개성만두집에 앉아 있었다.

 

이차로 자리 잡은 ‘유목민’ 골목에서는 조명환, 기국서, 장 춘씨가 합석했고,

김기덕, 유진오, 김발렌티노도 만났다.

 

30일엔 사진가 하재은씨를 비롯하여 김문경, 윤현선, 김석철씨가 찾아오셨다.

운현선씨가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 동영상을 만들어 보여 주는데, 너무 멋지더라.

‘유목민’ 골목에서는 사진가 권양수, 박윤호씨를 만났는데, 외국에 나갔던 안애경씨도 오셨다.

 

뒤늦게는 화가 강지현, 이현숙씨와 어울려 술 한잔했다.

강지현씨는 이현숙씨 초상화를 그려 오셨더라. 다들 페이스북에서 가까워진 사이 같았다.

 

노재학, 임경일씨가 차례대로 오가기도 했고, 김이하 이승철씨는 맞은 편에 자리 잡았다.

 

이틀 만에 올리던 보고서가 삼일만에 올리게 된것은

술로 점차 기력이 쇠진해가는 징표이오니 널리 양해해 주시길 바란다.

아무튼 전시장을 찾아 주신 많은 분에게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7일, 동지로부터  원주 새벽시장 촬영 떠난다는 지령이 떨어졌다.

오래 전부터 원주 김진열씨가 원주장 오는 길에 한번 들리라는 말을 했지만 못갔다.

일정이 맞지 않아 미루어 왔는데, 드디어 갈 기회가 생긴 것이다.

 

새벽시장을 보기 위해 일찍 출발하느라 잠을 설쳤다.

오전 다섯시 무렵 출발했지만, 정확한 정보가 없어 허탕쳤다.

원주 새벽시장은 봄 야채가 나오는 4월부터 선단다.

 

화가 김진열씨는 정오 무렵 만나기로 약속해 원주 인근의 유적부터 돌아보았다.

문막 반계리에 있는 은행나무 부터 찾아 갔는데, 수령이 800년이나 되었지만 건강했다.

 

땅에서 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서는 2∼3m 높이에서 다시 갈라져

가지가 사방으로 고루 퍼졌는데, 그 웅장한 자태가 장관을 이루었다.

마을사람들은 이 나무를 신목으로 섬긴다고 한다.

 

은행나무 주변 빈터에 돋아 난 쑥을 캐, 다음 날 쑥국을 끊였으나 향기가 없었다.

요즘 시중에 나오는 쑥들이 왜 쑥의 고유한 향기가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다음에는 주포리 미륵산에 있는 미륵불을 찾아 나섰다.

미륵산 자락에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경천묘가 있고,

황산사 터에는 삼층석탑도 있는데, 이 지역이 원주팔경에 들어간다.

 

 

경순왕은 정권을 이양한 뒤 전국의 명산을 두루 다니다가

미륵산 경관에 반해 이 곳에 미륵불상을 조성하여 의탁했다고 한다.

미륵산은 경순왕의 애환이 서린 산이라고 전해진다.

 

경천묘를 지나야 황산사터가 나온다는데,

사지는 어딘지? 미륵불은 어디 있는지? 안내판이 없어 알 수가 없었다.

조금 더 올라가니 부도 탑이 나왔는데, 사방을 둘러 싼 돌탑이 정겨웠다.

 

한참을 올라가니 고려시대 석탑으로 추정되는 3층 석탑이 나왔다.

두꺼운 지붕돌의 처마 받침을 3단으로 나눈 삼층석탑이었다.

몸돌이 가늘고 높아 전체적으로 길쭉한 느낌을 주었다.

 

그런데, 그 곳에도 미륵불은 보이지 않았다.

옆에 있는 이정표에 1km를 더 가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시간이 촉박했으나 돌아 갈 수는 없었다.

아무런 등산준비도 없이 여기까지 왔는데, 어찌 그냥 갈 수 있겠는가?

 

정동지는 경마장 가는지 부츠를 신었고, 난 쪽방 촌에서 얻은 운동화를 신었는데,

신발이 맞지 않아 수시로 벗겨졌지만.포기할 수 없었다.

정동지 더러 석탑에서 기다리라 말하고 혼자 서둘러 올라갔다.

 

급경사가 많아 숨이 점차 가빠지기 시작했는데, 가파른 산길 1km는 만만치 않았다.

석불이 산봉우리에 있었다면 아예 올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벗겨지는 신발을 묶기 위해 줄을 찿았으나, 칡능쿨조차 보이지 않았다.

 

도중에 포기할 수 없도록 확실한 목표를 정해 버렸다.

미륵불을 만나 소원을 빌지 않는다면 눈앞에 닥친 일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며,

미륵불이 나를 시험한다고 못 박은 것이다.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라도 그 소원은 꼭 이루어져야 했다.

동자동 재건축이 계획대로 추진되어 쪽방주민들이 한 곳에 입주하는 일이다.

 

쪽방에서 벗어나 모처럼 사람답게 살 수 있겠다고 다들 위안하고 있다.

남은 것이라고는 수십년 동안 쌓아 온 이웃 뿐인데,

가진자들 논리로 여기 저기 내 쫒아 외롭도록 만들어야 하겠는가?

 

정부의 동자동 재개발 사업을 이어 갈 사람은 박영선후보가 적임이라는 생각이다.

건물주들은 재건축을 반대한다며 골목 골목 붉은 깃발을 꽂아 저항하고 있는데,

한 패나 마찬가지인 보수 권력의 시장이 된다면 그 사업에 협력하겠는가? 

그 일을 위해 박영선후보가 되도록 기도하려는 것이다.

 

확실한 목표가 생기니, 그 때부터 발길도 빨라졌고 힘도 덜 들었다.

 

철계단이 나오기에 다 온 줄 알았더니,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로프를 사용해 가며 철계단을 세 번이나 거쳐야 했다.

계단도 말이 계단이지 사다리나 마찬가지였다.

등산이란 말만 들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놈이 제대로 걸린 것이다.

그래도 그런 절경을 어디서 볼 것이며, 이런 체험을 언제 해 볼 것인가?

 

드디어 정상에 다 올랐다. 펼쳐진 자연풍광에 가슴이 뻥 뚫렸다.

미륵산 정상 가파른 절벽 동쪽을 향해 대형 미륵불을 새겨놓았는데,

가까이는 그 모양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고 멀리서 보아야만 형체를 알 수 있었다.

 

미륵불 앞에 엎드려 박영선후보가 당선되도록 빌었다.

난생처음 주머니를 털어 시주까지 했다.

오래전부터 불교유적을 찾아 전국 사찰을 다 다녔지만, 시주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돈도 없었지만, 돈에 눈 먼 중이 싫어서다.

 

미륵상을 담기 위해 주변을 돌아보았으나, 위치가 마땅치 않았다.

미륵상이 다 나오려면 멀리 떨어져야 하는데, 허공에서 찍어야 했다.

드론이 아니고는 정면 촬영이 안 되는지라, 부득이 원주시청 홍보사진에서 한 컷 옮겼다.

 

드론으로 정면에서 촬영한 미륵불상 / 사진, 원주시청

내려오려고 발길을 돌리니, 멀리 정동지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함지 같은 엉덩이를 휘젓고 올라오는데, 미칠 지경이었다.

하기야! 600여 곳이 넘는 전국 장터를 모두 찾아다닌 악바리가 아니던가?

그 역시 포기할 줄 모르는 동지다.

 

목적을 이루고 나니 갑자기 마음이 바빠졌다.

가기로 한 '보문사 청석탑'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김진열씨와 약속한 정오가 훨씬 지나버렸기 때문이다.

좀 늦겠다는 전화는 했으나 예삿일이 아니었다.

 

배도 고프고 목이 말라 허급지급 내려왔다.

약속한 ‘원주복추어탕’집에 도착하니, 오후 두시가 되었다.

미륵불 찾아 온 산을 헤매다 왔는데, 진짜 생불은 추어탕 집에 앉아 계셨다.

너무 반가워, 미안한 생각도 잊어버렸다.

 

추어탕을 시켜 놓았는데, 얼마나 맛있는지 밥 알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비웠다.

시장기도 한 몫 했지만, 추어탕이 너무 맛있고 밑 반찬도 정갈했다.

배를 채우고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여유가 생겼다.

 

옛날 장터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는지, 옛날 장바구니 이야기를 꺼냈다.

오래 전에는 군용 삐삐선으로 엮은 장바구니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나도 어렴풋이 생각났다. 갑자기 재미있는 기획안이 떠올랐다.

옛날 장터의 기억을 찾아 내는 여러 작가들의 장터 향수전 같은...

 

김진열씨가 상지영서대학 총장으로 있는 줄 알았는데,

정년 퇴임한지가 한 참 되었다고 했다. 세월이 너무 빨랐다.

그리고 한반도지형이 있는 영월군 선암길에 작업실을 만들기 위해

부지를 마련했다는 소식도 전해 주었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지만, 김진열씨 안내로 원주 풍물시장에 들렸다.

마땅히 찍을 것도 없는데다, 옆에서 기다리는 것도 마음에 걸려

서둘러 다음 갈 곳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원주 흥업면에 있는 원주천주교 대안리공소로 갔는데,

안내하는 김진열씨 조차 한 참을 헤매었다.

가본지가 10년이 되었다는데,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 않던가?

대안리공소 위가 산이라 아무 것도 없었다는데,

산을 개간하여 많은 전원주택들이 들어 서 있었다.

 

천주교 대안리공소는 목조 여섯 칸 한옥 건물인데, 참 아담했다.

원주지역에 유일하게 남은 공소로 1900~1906년 사이 뮈텔 주교가 건립했단다.

한국 전쟁시에는 인민군 막사로 사용되기도 했고,

전쟁 후에는 미군 구호물자 보급소로 활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지역 교회사적 가치가 높은 건축물이었다.

 

비 맞아가며 돌아다닐 처지가 아닌지라, 아쉽지만 헤어져야 했다.

차나 한 잔 하자며 문막의 ‘애뜰리’란 찻집으로 안내했다.

벽난로에 장작불까지 지펴놓았는데, 젖은 옷 말리기 딱 좋았다.

 

찻집이 제법 넓은 공간인데, 천장이 낮으니 아늑했다.

그걸 보니 전시장이 무조건 높아야 할 것은 아니었다.

천장이 높아야 작품 설치도 용이하고 시각적인 존재감도 높여주지만, 다 그럴 필요는 없는 것이다.

때로는 이처럼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는 천장 낮은 전시장이 효과적인 작품도 많다. 

 

김진열씨는 교육자고 화가였지만, 농사꾼이기도 했다.

나야 정선에서 텃밭 좀 일구면서도 난리를 치는데, 제법 많은 농사를 짓는단다.

농군답게 촉촉하게 내리는 봄비는 단비라 했다.

심어 둔 감자가 잘 자라겠다며 흐뭇해했다.

 

그 모습이 바로 생불이었다.

사람도 진국이지만, 그림도 죽인다.

내가 좋아하는 우리나라 생존화가 다섯 손가락에 꼽는 한 사람이다.

그의 그림은 거칠다.

임꺽정 같은 격정의 힘과 분노가 치솟는다.

 

새벽시장에서 바람맞아 미륵산을 헤매는 시련은 있었지만, 오늘 일진은 대통이다.

미륵불에 기도 올리고, 생불만나 기 받았으니, 이보다 더 좋은 날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간곡히 부탁드릴 일도 있습니다.

 빈민들의 소원을 이룰 수 있도록 박영선후보를 지지해주세요.

 

박영선후보가 내세운 공약은 오세훈후보가 내세운 민간주도 재개발도 아니고

정부 여당이 내 세운 공영주도와도 다소 결이 다른 안을 내 놓았다.

공공주도원칙에서 공공민간참여형으로 전환하겠다는 공약이다.

건물주 반대로 무산될 수도 있는 재건축을 함께 협력하여 풀어가겠다는 의지로 잃힌다.

 

여러분! 다시 부패한 정치로 되돌릴 수야 없지 않습니까?

문정부가 내세운 '사람이 먼저다'는 깃발을 세울 수 있도록 기회 한 번 줍시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지난 5일, 반가운 손님 오셨다는 연락을 정영신씨로 부터 받았다.
문경의 문화활동가 이선행씨가 인사동 왔다는데, 점심이나 같이 먹잖다.






하필 ‘헌법제판소’ 부근이라는데, 요즘은 헌법 이야기만 들어도 열 받는다.
부지런히 내려가니, 이선행씨와 함께 골목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9월 문경장에서 뵙고 처음인데, 그 때보다 살이 좀 빠진 것 같았다.
여자 분들은 살이 빠지는 것이 좋은지 모르지만, 난 든든한 미인이 좋더라.






그 곳에 맛있는 만두집이 있다는데, 자주 들락거리는 나보다 시골 사람이 더 잘 알았다.
가보니 '깡통만두'집인데, 사람들이 줄지어 있었다.
동자동에서 줄 세우는 게 지겨워, 줄서는 건 딱 질색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만두라 먹기도 편하지만, 기다리다 먹으면 더 맛있잖아.





원님 덕에 나팔 분다고, 맛있게 먹었으면 그만이지, 빈대떡 도시락까지 싸 왔다.
두 분이 인사동에서 차 한 잔 한다지만, 난 자판기 스타일이라 빠졌다.






나온 김에 볼 전시가 있어 인사동 거리로 나서는데, 뒤에서 누군가 불렀다.
돌아보니 안면 있는 분인데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야! 이럴 때, 정말 입장곤란하다.
기억이 날 듯 말듯 머뭇거렸더니, 봉화 도예가 신동여씨 이야기를 꺼냈다.
그 때야 오랜 기억이 떠올랐는데, 영주의 권오진씨 였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이종문씨와 적음까지 그리워졌다.






잘 아는 분 전시가 있어 왔다기에 따라갔더니,
‘인사아트’에서 열리는 김흥배씨의 ‘달항아리’전이었다.
달 항아리가 정말 달덩이처럼 훤하게 잘 생겼더라.  
녹차는 얻어 마셨지만, 그 곳도 자판기 커피는 없었다.






전시장을 나와 김진열, 장경호, 정복수씨 삼인전이 열리는 ‘나무화랑’으로 올라갔다.
전시장에는 김진하 관장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34년만의 "조우 또는 해우“ 김진열, 장경호, 정복수전은 ’나무화랑‘ 기획전이다.
김재홍, 김영진, 박불똥의 36년만의 만남-오!레알?』展에 이어
'중견작가 되돌아보기 시리즈' 두 번째 전시다.






강렬한 물질성과 형상성으로 민족의 아픔을 말하는 김진열씨,
초지일관 인간에 대한 발언을 쏟아내는 정복수씨,
한 때 ‘한강미술관’을 운영하며, 민중미술에 기름을 부었던 장경호씨 등
다들 한 가닥 하는 배트랑 작가전이라 볼만하다.






그러나 방명록에 흔적만 남기고, 얼른 줄행랑쳤다.
사실 장경호 만나지 않으려고, 개막식을 피해 일부러 일찍 간 것이다.





그는 동생처럼 생각하는 친구지만, 요즘은 일체 상종을 않는다.
한 달 전에 부린 주정이 내게 부린 술주정이라면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건 정영신에 대한 모욕이라 참을 수 없었다.
지금은 내 기집이 아니지만, 십 몇 년 살아보니 참 착한 년이더라.
여지 것 그 여자 힘들게 하면 누구든 그냥 두지 않았다.






그러나 화는 시간만 지나면 풀리지만, 이 참에 버르장머리를 고칠 작정이다.
그만큼 서럽고 외로웠으면 작업으로 토해낼 때도 되었는데, 허구한 날 술로 세월 보낸다.
그것도 조용히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쌓인 분노를
술 친구에게 다 풀어 주변에 술친구가 없다.






사실 좋은 신작이라도 내놓았다면, 오히려 내가 사과하려 했다.
무슨 철천지 원수진 것도 아니지만, 작업에 매달리지 않는 한 보지 않을 생각이다.





나 역시, 존경하는 선생이던 친구든 후배든, 가리지 않고 입 바른 소리를 해 사람 많이 잃었다.
그렇지만, 그런 모욕에도 깨우치지 않는다면, 다시 만날 필요 없다.
좋은 사람 만나기도 바쁜데, 덜 된 사람 만날 필요가 뭐 있겠는가?






그나저나, 커피생각은 간절한데 인사동에는 커피자판기가 없다.
커피 한 잔 얻어 마시러 계동 ‘민예총’사무실로 올라갔더니,
정영신씨는 없고 서인형 국장과 미술평론가 최석태씨가 있었다.
다들 ‘민예총’ 기금 마련전 준비로 바쁜 것 같았다.
커피 한 잔 얻어 마시니, 그때야 정영신씨와 이선행씨가 올라왔다.






마침 탁자 위에 2003년도 ‘문예진흥원’에서 만든 신학철선생 전시도록이 있었다.
신학철화백의 걸작들을 다시 볼 수 있었는데, 끔찍한 작품 한 점이 눈에 밟혔다.






난, 세상만사 미리 정해져 일어난다는 운명론보다 인간이 짓는 업보를 믿는 편이다.
저 그림이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지만, 자꾸 마음에 걸렸다.
세상사 누가 알겠냐마는, 좋은 것이 좋다는 어른들 말씀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닐 게다.






지금 선생께서 처한 슬픔이, 한낱 기우에 그쳤으면 좋겠다,
제발 기적이 일어나길 빈다. 간절히...



사진, 글 / 조문호

































34년만의 조우 또는 해후

김진열_장경호_정복수展 

2018_1205 ▶︎ 2018_1218




초대일시 / 2018_1205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82.(0)2.722.7760



『김진열/장경호/정복수- 34년만의 조우 또는 해후』展은 나무화랑의 지난 『김재홍·김영진·박불똥의 36년만의 만남-오!레알?』展에 이어 '중견작가 되돌아보기 시리즈' 두 번째로 기획 되었다. ● 1984년 관훈미술관(지금은 갤러리)에서 김진열/장경호/정복수 3인전이 열렸었다. 80년대 초반, 뒤숭숭하고 혼란스런 화단엔 온갖 다양한 모색과 발언들이 70년대식 미술을 거부하며 명멸했다. 많은 그룹들과, 많은 기획전, 그리고 많은 선언들이 스스로를 80년대의 적자라고 주장을 하며 등장 했다.


김진열_두일리 농부_종이에 아크릴채색, 금속_2018

김진열_두일리 농부_종이에 아크릴채색, 금속_2018


장경호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011


이때 이들 3인전의 '형상성'은 놀라웠다. 기존에 전혀 보지 못했던 양식과 스타일로 회화의 근거에 대한 새로운 문제를 던졌다. 그리고 자신 내부로부터 동시대 현실을 향해서, 또 동시대인으로서 자기 내부에로 무언가 강력한 신호를 교신하고 문제를 제기했다. 개별 존재인 화가 자신과 세계와의 이질과 불화를 직접적 몸의 표현성으로 남기면서. ● 거기에 회화는 잘 어울리는 미디어였다. 촉감과 액션, 붓질과 흔적, 속도와 물질감 등이 빚어내는 야생적 원초성은 오히려, 관습화된 미술의 허구에 일대 파열구를 내기에 충분한 현실적결과물이었다. 미술이... 그림이... 생생하게 살아서 말하고 배설하고 욕을 하고 일기를 쓰는 것처럼, 회화가 우리들의 피부가 되고 근육이 되고 움직임이 되는 원시적 충동의 새로운 형식으로 전치되었다. 이들 3인 작품의 매력은 바로 그것이었다. 어떤 선모델링이나 매너리즘 같은, 앞선 미술사에 대한 표절 없이 당시 자신이 마주한 세계에 대한 생생한 형상성과 표현성에 접근한 것이었다.


정복수_기쁨의원형12_하드보드지에 색연필, 연필_41×28cm_2003


정복수_마음의일기_패널에 유채_110.5×121cm_2003


이들이 34년 만에 다시 '조우'했다. 아니 '해후'라 해야 하나? 30대 젊은 시절의 강렬한 물질성과 형상성을 유지하고 있는 김진열, 초지일관한 주제의식으로 더 세련되어진 화면으로 인간에 대한 발언을 지속하는 정복수, 동일자의 지옥에서 아토포스적 타자를 묵시적으로 호명하는 장경호의 재회는, 60대 중반에도 쉬지 않고 자신의 작업을 반성하는 결과를 보고하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본다. 그만큼 이 작가들의 작업에 대한 쉼 없는 모색은 비판적 형상미술의 토대를 풍부하게 해 주는 단서가 되고 있다. ■ 김진하


Vol.20181206i | 34년만의 조우 또는 해후展

 






셋째 수요일은 인사동 사람들이 서로 만나 새로운 전시도 보고,
반가운 분들과 술 한 잔 하는 날로 정한지가 오래되었지만, 다들 별 관심이 없다.
오래 된 인사동 사람은 너무 잘 알아 지겹기도 하겠지만, 인사동 자체에 대한 매력을 잃어버린 것 같다.
그러나 관심 갖는 인사도 더러 있어, 나가지 않을 수도 없다.






지난 17일은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김진열씨의 목판화전으로, 그런대로 많은 분을 만났다.
전시장에서 김진열씨를 비롯하여 김진하, 이태호, 최석태, 김 구, 손기환, 나종희, 이흥덕,
이인철씨를 만날 수 있었고, 뒤풀이집 ‘자미향’에서는 정복수, 김종업씨도 만났다.
그런데, 다시 만나지 않기로 한 장경호씨가 나타나 불편한 술자리가 되었다.
더 슬픈 것은 사과는 커녕, 변화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떻게 그런 소리 듣고도, 술이 목구멍에 넘어갈까?





간다는 소리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더니, 골목에서 이인섭씨와 노광래씨를 만났다.
다들 술이 고픈지, ‘평화만들기’에 한 잔 하러 가는 것 같았다.




 


돌아가는 길에 ‘유목민’에 잠시 들렸더니, 조해인 시인과 남해의 진공선사와 함께 있었으나,
반가운 설 주 한잔으로 물러나야 했다.






그런데, 자고 일어나 페북을 열어보니, 귀가 찬 내용이 올라와 있었다.
몇 일전 이화동 벽화마을에서 만났던 박윤호씨가 이상한 표정의 내 사진을 올려놓고,
줄줄이 장난질의 댓글을 올려놓았다.






그는 사진을 찍어도 너무 공격적으로 찍는다.
그렇게 많이 찍었는데, 하필이면 그런 사진을 고른 저의도 의심스러웠다.
더 한심스러운 것은, 명색이 변호사란 최혁배씨가 문호 꼴 보기 싫다는 등 작난 글을 올려 놓았는데,
내가 지 친구거나 후배라도 그 따위 말을 페북에 올릴 수 없다.






그보다, 미운 정이니 어쩌니 댓글 단 박윤호씨의 처사가 더 괘씸했다.
그것도 나에게 링크까지 해둔 걸 보니, 나 보라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속이 뒤집어 졌지만, 지랄 떨다 내리겠지 생각하고 양양으로 촬영을 떠났다.
한 밤중에 돌아와 확인하니, 그대로 있었다.

두 사람의 처사를 나무라며, 지켜보겠다는 댓글만 올려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 다음날 자고 일어나 확인하니, 한 마디 사과도 없이 문제의 댓글만 지워버린 것이다.

사진은 그대로 있었지만, 나도 사진 찍어 올리면서 사진 내려달라는 이야기는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럴려면 나부터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올려 놓는 박윤호씨 사진은 모두 내려야 했다.





작심하고 컴퓨터에 눌러 붙어 박윤호씨 이름과 사진을 모두 지우기 시작했다.
몇 년을 인사동에서 만났으니, 그가 찍힌 사진이나 글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 때문에 함께 찍힌 다른 분들 사진까지 내려야 할 경우가 많았다,
온 종일 찾아 지웠는데, 내가 뭣 때문에 개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더라.
다 지우고 나서, 다시 페북에 들어가 당신의 사진과 글은 모두 삭제했으니, 내 사진을 내려 달라는 글을 올렸다.
한 참 후에야 사진을 내리고는 줄줄이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일체의 전화를 받지 않고, 스스로를 돌아 보았다.
내가 여러 후배들에게 이 따위 대우를 받는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단지 죄라면 30여년 인사동을 들락거리며, 웃기려 애썼던 것 뿐이다.
술자리에서 개똥철학이나 풀며 거룩한 표정 지어봤자, 피차 피곤하다.






씨잘 데 없는 소리지만, 술 자리에서 한 번 웃으려고 한 말을 두고,
그 자리에선 좋아하면서도, 돌아서서는 비웃고 욕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를 흑사리 쭉지로 알고, 몰캉하게 본 것 같다.

이젠 사람 좋다는 옛날의 조문호가 아니다.






씨바! 난, 죽는 것도 두렵지 않은 막다른 길의 싸움꾼이다.
선배고 후배고 세상에 민폐 끼치는 인간들은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요 모양 요 꼴이 된 것도, 다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들 때문이다.






한 번 지켜보라. 나쁜 놈들을 어떻게 작살내는지... 
그리고, 인사동 사람들이 만나는 셋째 수요일은 죽는 날까지 지킬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김진열씨의 목판화전 ‘이웃’과 ‘모심’이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가 열린 지난 17일 오후6시 무렵, 전시장에는 전시작가인 김진열씨를 비롯하여 '나무화랑' 김진하 관장,

미술평론가 이태호, 최석태씨, 화가 김 구, 손기환, 이인철, 이흥덕, 나종희씨 등 여러 명이 작품을 돌아보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반가움을 뒤로하고 작품부터 돌아보니, 몇 년 전 그 장소에서 보았던 작품의 대상과 소재만 달랐지 작가가 말하는 메시지는 일맥상통했다.

철판을 주워 모아 시뻘겋게 녹 슨 금속의 질감으로 담아내었던 그 때 작품이나,

한 스린 민초들의 삶을 통해 우리민족의 아픔을 나타내는 시대정신은 한결같았다. 그런데, 작품이 너무 좋았다.

거친 노동의 투박한 질감이 주는 동질감이 가장 한국적인 작품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전시된 김진열씨의 목판화에서 한 평생 인간에 초점을 맞추다 세상을 떠난 휴머니스트 사진가 최민식선생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바로 그의 작품이 소외된 서민을 통해 인간애를 담아내고 동시대의 아픔을 그려내려 했던 최민식선생의 작업과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아래로부터 자신의 미학을 구현하며, 묵묵히 견뎌내는 서민들의 초상으로 우리 시대의 아픔과 존재의 진정성을 담아내고 있었다.






작년에 박수근 미술상을 수상하였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꼭 받아야 할 작가라고 여겼다.

박수근 화백의 작품과 정신세계에 가장 적합한 작가가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앉아서 그림만 그려내는 화가가 아니다. 그 생각을 온 몸으로 실천하는 작가다.

오랫동안 원주에서 환경 운동을 하며 후학들을 지도해 왔는데, 지금은 대학 총장 직책까지 맡아 그 임무를 다 하고 있다.

학교를 개선하기 위한 일련의 노력을 접하며, 진짜 그 학교는 복 받은 학교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썩어 빠진 교육 권력이 난무하는 현실에 한 가닥 희망이 아닐 수 없다.






민중미술 경향의 칙칙하고 거친 질감으로 표현한 작품들은 강한 소구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사람중심의 작품에서 생명존중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작품의 대상을 머리나 책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공간인 원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찾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오래 전부터 스쳐 가는 사람 모습을 스케치하며 사실적인 현장감을 작품 속에 불어넣어 온 것이다. 

버스터미널을 중심으로 이동하는 서성이거나 기다리는 모습에서,

서민적인 인간애를 넘어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말하며, 그 배후에 존재하는 권력과 착취의 이데올로기를 인식케 하는 것이다.






전시 제목에 붙은 이웃과 모심(母心)은 그 모심을 통해 생명존중과 평화공존을 말하는 것이다.
이번에 보여 준 목판화도 처음 보았지만, 드로잉과 사진들을 나란히 배치한 작품도 인상적이었다.

왼쪽에 배치한 흑백사진의 버려진 황량함과, 오가다 만난 사람을 드로잉한 그림을 나란히 배치하였는데, 자세와 표정이 다양했다.

많은 볼거리와 생각거리를 준 그 작품으로 작가가 이야기하려 한 것이 무엇일까?

인간의 소외감에서 한 걸음 나아가 인간성 상실을 질책하는 것은 아닐까 유추해 본다.






아무튼 인간과 자연에 대한 애정을 자신만의 특유한 기법으로 구현하는 김진열씨의 작업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쓰레기 같은 작가가 넘쳐나는 세상에 이런 훌륭한 작가도 있다는 것이 살아야 할 한 줄기 빛이고 유일한 위안이다.


미술평론가들은 "김진열은 삶의 체험적 질료를 중시하는 작가"라고 규정한다.

"그의 작품 속에는 우리 시대의 인간적 꿈, 우리 자신이 간과하고 상실해온 꿈이 끈적끈적하게 깃들어 있다"고 설명한다.

우리들의 벌거벗겨진 자화상이라는 것이다.

 

이 전시는 30일까지 이어진다.







작가 김진열씨를 비롯한 일행들이 모두 전시장에서 내려와 뒤풀이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인사동 ‘평화만들기’ 옆에 있는 ‘자미향’은 숨은 가게라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민예총 관련 인사들이 자주 찾는 술집이다.

술 안주가 깔끔하고, 조용해서 좋다. 열 명 남짓 이층에 자리 잡았는데, 독방이라 술 마시며 놀기 안성마춤이었다.

뒤늦게 화가 정복수씨와 한겨레 임종업 기자가 들어오니 자리가 꽉 찼다.

 




그런데, 간장게장에 밥 비벼 맛있게 소주 한 잔 하는데, 개 한 마리가 들어왔다.

개도 개 나름인지라, 보기 싫어 고개도 들지 않고 뒷자리로 옮겼으나, 영 맘이 편치 않았다.

사람 될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 무슨 말을 하겠는가?

김진열씨가 곧 잘 하는 판소리 한 자락 못 듣고 와 버렸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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