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열의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은 오윤의 판화나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에 등장하는 숱한 사람들처럼 익명적 민중성을 확보한다. 다만 오윤이나 리베라가 객관적으로 기호화된 인물의 전형성을 확보했다면, 김진열의 인물들은 정서를 환기하는 추상적 기운으로 기능하는 점이 다르다. 김진열의 작업이 사실주의적 재현성보다는 표현주의적 속성에 가까운 건, 정형적으로 패턴화된 캐릭터를 부여받은 인물 구성 방식에서 이탈하는 그의 조형적 특성으로 인해서다. 그런 면에서 김진열의 비정형적 형상성의 회화적 긴장감은 오히려 싱싱하다.”
지난 5일, 반가운 손님 오셨다는 연락을 정영신씨로 부터 받았다. 문경의 문화활동가 이선행씨가 인사동 왔다는데, 점심이나 같이 먹잖다.
하필 ‘헌법제판소’ 부근이라는데, 요즘은 헌법 이야기만 들어도 열 받는다. 부지런히 내려가니, 이선행씨와 함께 골목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9월 문경장에서 뵙고 처음인데, 그 때보다 살이 좀 빠진 것 같았다. 여자 분들은 살이 빠지는 것이 좋은지 모르지만, 난 든든한 미인이 좋더라.
그 곳에 맛있는 만두집이 있다는데, 자주 들락거리는 나보다 시골 사람이 더 잘 알았다. 가보니 '깡통만두'집인데, 사람들이 줄지어 있었다. 동자동에서 줄 세우는 게 지겨워, 줄서는 건 딱 질색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만두라 먹기도 편하지만, 기다리다 먹으면 더 맛있잖아.
원님 덕에 나팔 분다고, 맛있게 먹었으면 그만이지, 빈대떡 도시락까지 싸 왔다. 두 분이 인사동에서 차 한 잔 한다지만, 난 자판기 스타일이라 빠졌다.
나온 김에 볼 전시가 있어 인사동 거리로 나서는데, 뒤에서 누군가 불렀다. 돌아보니 안면 있는 분인데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야! 이럴 때, 정말 입장곤란하다. 기억이 날 듯 말듯 머뭇거렸더니, 봉화 도예가 신동여씨 이야기를 꺼냈다. 그 때야 오랜 기억이 떠올랐는데, 영주의 권오진씨 였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이종문씨와 적음까지 그리워졌다.
잘 아는 분 전시가 있어 왔다기에 따라갔더니, ‘인사아트’에서 열리는 김흥배씨의 ‘달항아리’전이었다. 달 항아리가 정말 달덩이처럼 훤하게 잘 생겼더라. 녹차는 얻어 마셨지만, 그 곳도 자판기 커피는 없었다.
전시장을 나와 김진열, 장경호, 정복수씨 삼인전이 열리는 ‘나무화랑’으로 올라갔다. 전시장에는 김진하 관장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34년만의 "조우 또는 해우“ 김진열, 장경호, 정복수전은 ’나무화랑‘ 기획전이다. 김재홍, 김영진, 박불똥의 36년만의 만남-오!레알?』展에 이어 '중견작가 되돌아보기 시리즈' 두 번째 전시다.
강렬한 물질성과 형상성으로 민족의 아픔을 말하는 김진열씨, 초지일관 인간에 대한 발언을 쏟아내는 정복수씨, 한 때 ‘한강미술관’을 운영하며, 민중미술에 기름을 부었던 장경호씨 등 다들 한 가닥 하는 배트랑 작가전이라 볼만하다.
그러나 방명록에 흔적만 남기고, 얼른 줄행랑쳤다. 사실 장경호 만나지 않으려고, 개막식을 피해 일부러 일찍 간 것이다.
그는 동생처럼 생각하는 친구지만, 요즘은 일체 상종을 않는다. 한 달 전에 부린 주정이 내게 부린 술주정이라면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건 정영신에 대한 모욕이라 참을 수 없었다. 지금은 내 기집이 아니지만, 십 몇 년 살아보니 참 착한 년이더라. 여지 것 그 여자 힘들게 하면 누구든 그냥 두지 않았다.
그러나 화는 시간만 지나면 풀리지만, 이 참에 버르장머리를 고칠 작정이다. 그만큼 서럽고 외로웠으면 작업으로 토해낼 때도 되었는데, 허구한 날 술로 세월 보낸다. 그것도 조용히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쌓인 분노를 술 친구에게 다 풀어 주변에 술친구가 없다.
사실 좋은 신작이라도 내놓았다면, 오히려 내가 사과하려 했다. 무슨 철천지 원수진 것도 아니지만, 작업에 매달리지 않는 한 보지 않을 생각이다.
나 역시, 존경하는 선생이던 친구든 후배든, 가리지 않고 입 바른 소리를 해 사람 많이 잃었다. 그렇지만, 그런 모욕에도 깨우치지 않는다면, 다시 만날 필요 없다. 좋은 사람 만나기도 바쁜데, 덜 된 사람 만날 필요가 뭐 있겠는가?
그나저나, 커피생각은 간절한데 인사동에는 커피자판기가 없다. 커피 한 잔 얻어 마시러 계동 ‘민예총’사무실로 올라갔더니, 정영신씨는 없고 서인형 국장과 미술평론가 최석태씨가 있었다. 다들 ‘민예총’ 기금 마련전 준비로 바쁜 것 같았다. 커피 한 잔 얻어 마시니, 그때야 정영신씨와 이선행씨가 올라왔다.
마침 탁자 위에 2003년도 ‘문예진흥원’에서 만든 신학철선생 전시도록이 있었다. 신학철화백의 걸작들을 다시 볼 수 있었는데, 끔찍한 작품 한 점이 눈에 밟혔다.
난, 세상만사 미리 정해져 일어난다는 운명론보다 인간이 짓는 업보를 믿는 편이다. 저 그림이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지만, 자꾸 마음에 걸렸다. 세상사 누가 알겠냐마는, 좋은 것이 좋다는 어른들 말씀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닐 게다.
지금 선생께서 처한 슬픔이, 한낱 기우에 그쳤으면 좋겠다, 제발 기적이 일어나길 빈다. 간절히...
『김진열/장경호/정복수- 34년만의 조우 또는 해후』展은 나무화랑의 지난 『김재홍·김영진·박불똥의 36년만의 만남-오!레알?』展에 이어 '중견작가 되돌아보기 시리즈' 두 번째로 기획 되었다. ● 1984년 관훈미술관(지금은 갤러리)에서 김진열/장경호/정복수 3인전이 열렸었다. 80년대 초반, 뒤숭숭하고 혼란스런 화단엔 온갖 다양한 모색과 발언들이 70년대식 미술을 거부하며 명멸했다. 많은 그룹들과, 많은 기획전, 그리고 많은 선언들이 스스로를 80년대의 적자라고 주장을 하며 등장 했다.
김진열_두일리 농부_종이에 아크릴채색, 금속_2018
김진열_두일리 농부_종이에 아크릴채색, 금속_2018
장경호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011
이때 이들 3인전의 '형상성'은 놀라웠다. 기존에 전혀 보지 못했던 양식과 스타일로 회화의 근거에 대한 새로운 문제를 던졌다. 그리고 자신 내부로부터 동시대 현실을 향해서, 또 동시대인으로서 자기 내부에로 무언가 강력한 신호를 교신하고 문제를 제기했다. 개별 존재인 화가 자신과 세계와의 이질과 불화를 직접적 몸의 표현성으로 남기면서. ● 거기에 회화는 잘 어울리는 미디어였다. 촉감과 액션, 붓질과 흔적, 속도와 물질감 등이 빚어내는 야생적 원초성은 오히려, 관습화된 미술의 허구에 일대 파열구를 내기에 충분한 현실적결과물이었다. 미술이... 그림이... 생생하게 살아서 말하고 배설하고 욕을 하고 일기를 쓰는 것처럼, 회화가 우리들의 피부가 되고 근육이 되고 움직임이 되는 원시적 충동의 새로운 형식으로 전치되었다. 이들 3인 작품의 매력은 바로 그것이었다. 어떤 선모델링이나 매너리즘 같은, 앞선 미술사에 대한 표절 없이 당시 자신이 마주한 세계에 대한 생생한 형상성과 표현성에 접근한 것이었다.
정복수_기쁨의원형12_하드보드지에 색연필, 연필_41×28cm_2003
정복수_마음의일기_패널에 유채_110.5×121cm_2003
이들이 34년 만에 다시 '조우'했다. 아니 '해후'라 해야 하나? 30대 젊은 시절의 강렬한 물질성과 형상성을 유지하고 있는 김진열, 초지일관한 주제의식으로 더 세련되어진 화면으로 인간에 대한 발언을 지속하는 정복수, 동일자의 지옥에서 아토포스적 타자를 묵시적으로 호명하는 장경호의 재회는, 60대 중반에도 쉬지 않고 자신의 작업을 반성하는 결과를 보고하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본다. 그만큼 이 작가들의 작업에 대한 쉼 없는 모색은 비판적 형상미술의 토대를 풍부하게 해 주는 단서가 되고 있다. ■ 김진하
셋째 수요일은 인사동 사람들이 서로 만나 새로운 전시도 보고, 반가운 분들과 술 한 잔 하는 날로 정한지가 오래되었지만, 다들 별 관심이 없다. 오래 된 인사동 사람은 너무 잘 알아 지겹기도 하겠지만, 인사동 자체에 대한 매력을 잃어버린 것 같다. 그러나 관심 갖는 인사도 더러 있어, 나가지 않을 수도 없다.
지난 17일은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김진열씨의 목판화전으로, 그런대로 많은 분을 만났다. 전시장에서 김진열씨를 비롯하여 김진하, 이태호, 최석태, 김 구, 손기환, 나종희, 이흥덕, 이인철씨를 만날 수 있었고, 뒤풀이집 ‘자미향’에서는 정복수, 김종업씨도 만났다. 그런데, 다시 만나지 않기로 한 장경호씨가 나타나 불편한 술자리가 되었다. 더 슬픈 것은 사과는 커녕, 변화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떻게 그런 소리 듣고도, 술이 목구멍에 넘어갈까?
간다는 소리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더니, 골목에서 이인섭씨와 노광래씨를 만났다. 다들 술이 고픈지, ‘평화만들기’에 한 잔 하러 가는 것 같았다.
돌아가는 길에 ‘유목민’에 잠시 들렸더니, 조해인 시인과 남해의 진공선사와 함께 있었으나, 반가운 설 주 한잔으로 물러나야 했다.
그런데, 자고 일어나 페북을 열어보니, 귀가 찬 내용이 올라와 있었다. 몇 일전 이화동 벽화마을에서 만났던 박윤호씨가 이상한 표정의 내 사진을 올려놓고, 줄줄이 장난질의 댓글을 올려놓았다.
그는 사진을 찍어도 너무 공격적으로 찍는다. 그렇게 많이 찍었는데, 하필이면 그런 사진을 고른 저의도 의심스러웠다. 더 한심스러운 것은, 명색이 변호사란 최혁배씨가 문호 꼴 보기 싫다는 등 작난 글을 올려 놓았는데, 내가 지 친구거나 후배라도 그 따위 말을 페북에 올릴 수 없다.
그보다, 미운 정이니 어쩌니 댓글 단 박윤호씨의 처사가 더 괘씸했다. 그것도 나에게 링크까지 해둔 걸 보니, 나 보라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속이 뒤집어 졌지만, 지랄 떨다 내리겠지 생각하고 양양으로 촬영을 떠났다. 한 밤중에 돌아와 확인하니, 그대로 있었다.
두 사람의 처사를 나무라며, 지켜보겠다는 댓글만 올려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 다음날 자고 일어나 확인하니, 한 마디 사과도 없이 문제의 댓글만 지워버린 것이다.
사진은 그대로 있었지만, 나도 사진 찍어 올리면서 사진 내려달라는 이야기는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럴려면 나부터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올려 놓는 박윤호씨 사진은 모두 내려야 했다.
작심하고 컴퓨터에 눌러 붙어 박윤호씨 이름과 사진을 모두 지우기 시작했다. 몇 년을 인사동에서 만났으니, 그가 찍힌 사진이나 글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 때문에 함께 찍힌 다른 분들 사진까지 내려야 할 경우가 많았다, 온 종일 찾아 지웠는데, 내가 뭣 때문에 개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더라. 다 지우고 나서, 다시 페북에 들어가 당신의 사진과 글은 모두 삭제했으니, 내 사진을 내려 달라는 글을 올렸다. 한 참 후에야 사진을 내리고는 줄줄이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일체의 전화를 받지 않고, 스스로를 돌아 보았다. 내가 여러 후배들에게 이 따위 대우를 받는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단지 죄라면 30여년 인사동을 들락거리며, 웃기려 애썼던 것 뿐이다. 술자리에서 개똥철학이나 풀며 거룩한 표정 지어봤자, 피차 피곤하다.
씨잘 데 없는 소리지만, 술 자리에서 한 번 웃으려고 한 말을 두고, 그 자리에선 좋아하면서도, 돌아서서는 비웃고 욕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를 흑사리 쭉지로 알고, 몰캉하게 본 것 같다.
이젠 사람 좋다는 옛날의 조문호가 아니다.
씨바! 난, 죽는 것도 두렵지 않은 막다른 길의 싸움꾼이다. 선배고 후배고 세상에 민폐 끼치는 인간들은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요 모양 요 꼴이 된 것도, 다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들 때문이다.
한 번 지켜보라. 나쁜 놈들을 어떻게 작살내는지... 그리고, 인사동 사람들이 만나는 셋째 수요일은 죽는 날까지 지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