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날 24일 정오 무렵, 그랜드 하얏트 호텔 (2층 낙산홀)에서

박정숙씨 아들 최용석 군과 조정호, 김순화씨 딸 조은겸 양이 결혼식을 올렸다.

 

사랑스러운 막내 조카 은겸이가 추석을 앞두고 시집을 간 것이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너무 좋아 춤을 너울너울 추셨을 거다.

막내 손녀로 태어 나 어머니 사랑을 독차지했기 때문이다.

 

사랑을 많이 받아 그런지, 수많은 조카 중에 은겸이 처럼 인정 많고 착한 조카는 없다.

멀고도 먼 정선 만지산 할머니 묘소에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꽃을 사 들고 찾아왔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는 전시회는 어떻게 알았는지 매번 찾아온다.

 

지난달 인사동에서 열린 정영신의 혼자 가본 장항선 장터 길전시에는

결혼할 최용석 군을 비롯하여 시어머니가 될 박정숙 여사도 모시고 왔었다.

결혼하기도 전에, 시어머니 될 분께서는 인정이 많다며 은겸이 칭찬을 한다.

 

지난 24일은 은겸이 시집가는 날이라 일찍부터 서둘러야 했다.

식장인 하얏트 호텔은 동자동에서 멀지 않지만,

정동지를 대동하려면 녹번동부터 들려야 하기 때문이다.

 

아슬아슬하게 시간은 맞추었으나, 호텔이라 낯설기 그지없었다.

어떤 연유로 호텔 식장을 잡았는지 모르지만 지나친 낭비였다.

돈 한 푼 내지 않으면서 탓할 처지는 아니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식장에 들어가니, 반가운 이산가족이 다 모여 있었다.

결혼식 치루는 형님 댁 조카 조웅래, 조향, 조지향 가족을 비롯하여

돌아가신 형님 딸 조봉숙도 와 있었다.

 

조영희 누님의 조카 박형준, 박홍전, 박유전 가족을 비롯하여

남동생 조창호의 딸 조아라와 여동생 조진옥과 김종성의 딸 김소원,

아들 조햇님을 비롯하여 귀여운 손녀 하랑이까지 와 있었다.

집안 대사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가족 총 동원령이 발동한 것이다.

 

도착하자마자 신랑 신부가 입장하여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자리에 앉았는데,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 입은 은겸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다.

결혼식 주례도 따로 없이, 신부 아버지인 형님이 대신하여 서로 위해주며 잘 살라는 덕담을 했다.

축가에 이어 신랑 누님의 피아노 연주도 이어졌다.

 

예식이 끝난 후 기념사진을 찍는 중에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먹기 바쁘게 다른 음식이 나왔다. 부담스럽지만 맛은 있었다.

결혼식장을 장식한 수많은 생화도 하객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싸 주었다.

 

마침 고향의 형님 친구 네 분이 찾아와 반겼는데, 누가 누구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릴 때 본 형님들이 할아버지가 되었으니, 어찌 기억할 수 있겠는가?

저마다 손에 꽃을 든 할아버지 기념사진만 찍었다.

형님들께 죄송하지만, 내가 더 늙은 것 같다.

세월이 참 무정 타.

 

그런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접수대에 타고 온 차량번호를 적었는데, 치매 끼가 있어 번호를 잘 못 적은 것 같다.

주차장 출구 차단막이 올라가지 않고, 주차비가 45천원이나 나왔다.

차를 되돌리고 싶지만, 대기한 차들 때문에 돌릴 수도 없었다.

반세기 동안 운전한 중에 최고로 많이 낸 주차비가 아닌가 생각된다.

더구나 없는 사람에게 보탠 것이 아니라 가진 놈 아가리에 털어 넣은 게 더 분했다.

“늙으면 죽어야지”를 곱씹는다.

 

최서방, 그리고 은겸아! 돈은 버는 것보다 쓰는 게 더 중요하단다.

행복하게 잘 살아라.

 

사진, / 조문호

 

 

 

 

지난 31일은 돌아가신 어머니 기일이었다.

20여 년 동안 정선 만지산에 어머니를 모셔 두고 제사를 지냈는데,

묘지 벌초하는 모습을 지켜본 조카의 만류도 만류지만,

거리가 멀어 자주 올 수 없다는 가족들의 원망에 손을 들고 말았다.

 

어머니 유골을 일산 '하늘문 납골당에 모신 후, 제사마저 인천 형님 댁으로 옮겨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인천 형님 댁에 제사상을 차려놓고, 한쪽에서 예배를 보았으나

그 다음부터 아예 제사상을 차리지 않고 예배만 보아 발길을 끊은 것이다.

밥 한 그릇만 떠 놓아도 혼자 제사 지내는 게 속 편했다.

 

, 무신론자로 제사마저 부질없는 줄 알지만,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제사로 어머니를 기리고 싶은 것이다.

결국 융통성 없는 기독교 교리가 가족 간의 마음을 상하게 한 촉매 역할을 한 셈이다.

 

이번 기일에는 어머니를 모셔 둔 하늘문납골당에서 가족들이 모이기로 했다.

누님 조영희를 비롯하여 형님 조정호, 동생 조창호, 조진옥, 매제 김종성,

그리고 정영신 동지를 비롯한 조카 박홍전, 조아라, 조은겸 등 10명이

 한자리에 모여 어머니를 기리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다들 사는 게 그렇게 바쁜지 집안에 길흉사가 없으면 일 년에 한 번도 만나기 어렵다.

모두 수도권에 살면서도 어찌 남보다 못한 이 지경이 되었는지,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모처럼 집안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건 아니다 싶었다.

형수가 아파 병원에 입원했다는 연락마저 퇴원을 앞두고 한 것이다.

그리고 막네 조카 은겸이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도 주었다.

은겸이는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끔찍이도 끼고 돌아, 누구보다 어머니께서 좋아하실 것 같았다.

 

또 하나 놀라운 소식은 막내 여동생 진옥이가 화가라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우연히 매제 김종성씨가 집사람이 상을 받았다며, 휴대폰으로 이미지를 보여주는데,

수상작보다 자신의 색깔이 뚜렷한 일련의 그림 이미지에 더 놀란 것이다.

남편 뒷바라지나 하며 자식을 키운 아낙으로 살아 온 줄 알았는데,

긴 세월동안 동생이 뭘 했는지도 모르고 살았으니, 귀가 막힐 노릇이었다.

 

하기야! 나 역시 여태 사진집을 출판하거나 여러 차례 전시를 열었지만,

한 번도 식구들에게는 연락하지 않았으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다.

스스로를 내 세우기 싫어하는 집안 내력인 것 같았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릴 때 잠깐 문 닫았던 진주청국장 그만 두겠다는 조카 홍전의 말에 또 한 번 놀랐다.

진주에서 여의도로, 여의도에서 서초동으로 옮겨가며 돈을 많이 벌었으나, 미련 없이 손을 털기로 했단다. 

누님은 자신이 만들어 온 독특한 경상도 음식 맛이 사라질까 아쉬워하지만,

조카 홍전의 쉽지 않은 결단에 존경심이 일었다.

고생하는 어머니를 편히 쉬게 하려는 효도에서 비롯되었지만,

벌면 벌수록 강해지는 돈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욕심은 무섭기 때문이다.

 

모처럼 이산가족이 한자리에 만나는 즐거운 시간이 되었는데.

도대체 누굴 위해 사는지, 산다는 게 뭔 지 모르겠다.

고향도 가족도 잊은 채, 어찌 이리 비정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사진, / 조문호

 

 

 

어머니! 그립습니다.

정선 만지산에서 ‘하늘문 납골당으로 모신지도 벌써 일 년이 넘었군요.

적막한 산골짜기 보다야 아파트 같은 납골당이 좋겠지요?

끝까지 어머니를 지키지 못한 자식놈을 용서하십시요.

 

만지산에 계실 땐, 메주알 고주알 세상 이야기를 전해드렸으나

이젠 기일이 아니면 어머니께 말씀드릴 겨를이 없습니다.

 

이장을 결정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만지산 집에 불이 났습니다.

모든 걸 태워 몸 둘바를 몰랐으나,

정선을 떠나라는 어머니의 계시로 알고 만지산에 대한 미련은 접었습니다.

 

모든 게 무위로 끝나는 세상이치지만, 지난 세월의 그리움은 지울 수가 없네요. 

그동안 제일 무서운 돈병은 들지 않고 잘 살았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삶, 하던 일 마무리하고 따라 가겠습니다.

 

오늘따라 어머니의 십팔번 ‘삐빠빠 룰라’가 유난히 듣고 싶습니다.

 

불효자식 문호가 기도 올립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어머니 기일인 지난 12 정오무렵, 정동지와 함께 고양 하늘문납골당으로 갔다.

그곳에는 누님 조영희, 형님 조정호, 동생 조진옥을 비롯하여

형수 김순화, 매부 김종성, 조카 조웅래, 박홍전 등 여러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가족도 이런 날이 아니면 만날 수 없을 정도로 다들 뿔뿔이 흩어져 바쁘게 산다.

반가움에 지난 날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위안한 하루였다.

 

 

 

 

 



양재동에서 ‘진주청국장’을 운영하는 조영희 누님이 병원에 입원했다는 전갈을 받았다.
어깨뼈를 다쳐 분당 '서울대병원'에서 수술 받았는데, 수술결과는 좋다고 한다.




진주에서 여의도로, 여의도에서 양재동으로 40여 년 동안 청국장 끓이는 일에 매달렸으니,
쇠덩어리라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맏딸 박홍전이가 시집도 가지 않고 장사를 이어 받았는데, 골병드는 일이 식당일이다.
돈은 좀 벌었겠지만, 건강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랴!




지난 년말, 일산 사는 동생 조창호와 조옥희, 매제 김종성씨와 함께 병문안 갔다.




누님께서는 “수술을 잘 끝내고, 다른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며 반갑게 웃었는데,
팔 밑에 받침대를 댄 모습이 어릴 적 본 아이스케키 통 맨 사람 같았다.
‘아이스케키 좀 팔았냐?’는 농담도 했는데, 얼굴만 보아도 즐거운 것이 가족이다.




이제 팔순을 넘겼으니, 식당에서 은퇴할 나이가 넘었다.
여기 저기 놀러 다니면 좋으련만, 시집가서 식당일만 해서 노는 것도 잊어버렸을 것이다. 
기껏 하는 일이 조계사에 기도하러 가는 것 뿐이다.




가족들이 다 수도권에 살지만, 좋은 일이던 나쁜 일이던, 일이 생기지 않으면 만날 수도 없다.
모처럼 만났으니,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지만 할 말은 많았다.




아들 햇님이가 카톡으로 보낸 손녀 하랑이 사진을 돌려보기도 했다.
장가 간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손녀 하랑이 첫돌이란다.




매제 김종성씨는 대학에서 정년퇴임하여, 딸 소원이가 운영하는 약국의 셔터맨으로 봉사한단다.

다들 생활전선에서 물러 날 때가 되었으니, 이제 재미있게 사는 일만 남았다.




못 다한 이야기는 퇴원 후로 밀쳐두고 다들 물러났다.



"새해에는 오짜던둥 건강 잘 지켜 재미있게 삽시더.

조씨 집안이 노는대는 일가견이 있다 아이가"



옛날에는 꽃놀이 술판을 '회초'라 그랬는데, 사전에는 없어 어원을 모르겠네.





"날 풀리마 꽃놀이 술놀이나 한 판 벌립시더!

이빨 사이로 새는 '봄날은 간다'도 색다르게 쌕시하다."


사진, 글 / 조문호





 

 둘째 누님 (조미희(69) / 세실리아)께서 지난 15일 세상을 떠났다.

 

전시 준비로 문병을 미루어오다,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은 14일에서야 서둘러 부산으로 내려갔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던 누님께서 잠시 나를 알아봤을 뿐,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얼마나 간절한 기도를 올렸으면, 손에 쥔 십자가가 묵주처럼 매끄러웠다.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지난 세월의 아련한 추억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계속되는 전시 스케줄에 쫒겨 이틀 날 아침 부랴부랴 상경하였는데,

서울 도착하기가 무섭게 임종하셨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16일 오후10시 무렵에야 도착한 부산 성모병원 장례식장에는

매형 조한길씨를 비롯하여 조카 조은상, 조가을, 동생 조창호, 조진옥, 매제 김종성씨 등

가까운 가족들만 침통한 표정으로 모여 있었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누님의 장례미사는 17일 오전9시 무렵,

성모병원 영결식장에서 장엄하게 치루어졌다.

 

 유골은 납골당이 있는 김포 사당에 안치했는데,

매형께서 일가 유골을 한 곳에 모실 수 있는 사당을 만들어 두어,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설날인 삼오제에는 모두들 김포사당에 모여 제를 올리기도 했다.

 

“고생만 하다 떠나버린 불쌍한 누님! 부디 영면하시어 편안히 쉬십시요.”

 

 

 

 

 

 

 

 

 

 

 

 

 

 

 

 

 

 

 

 

 

 

 

 

 

 

 

 

 

 

 

 

 

 

 

 

 

 

 

 

 

 

 

누님 이야기

 

누님은 어린 시절 부모님의 사랑을 제대로 받고 자라지 못했다.

9남매 중 6번째로 태어난 여식이라 교육에서부터 모든 순위가 다른 형제자매에 밀렸던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형님이 집어던진 나무토막에 눈을 맞아 실명 위기를 맞기도 했다.

아버지께 운동화를 사 달라며 조르던 형님께서 따라오는 동생을 쫓으려 목제소에 나딩구는 나무토막을 던졌는데,

그게 하필이면 누님의 눈에 맞았던 것이다. 실명은 면했지만, 여성으로서 치명적인 상해였다.

 

그래서 인지 누님은 어릴 적부터 자립심이 남달랐다.

일찍부터 낯설은 서울로 올라가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형제자매 중 가장 먼저 자립하여 사당동에 대궐 같은 집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이르기까지 근검절약은 물론 자린고비처럼 돈을 쓰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들이 편히 쉴 때, 누님은 일 했고, 남이 배부를 때, 누님은 배를 곯았다.

 

한 때는 미국 이민가려 모든 가산을 정리한 때도 있었다.

'중앙정보부'에 근무하던 매형께서 직장까지 그만두고 이민을 준비했으나 

출국장에서 크레임이 걸려 이민을 포기해야 하는 불상사가 생겼던 것이다.

 

몇 년 뒤 다시 이민 길에 올라 외로운 이국생활에 적응해 나갔으나, 세상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고생을 너무 많이 한 탓인지, 중병에 걸려 지난 여름 급기야 귀국하게 된 것이다.

이국 땅의 근거를 놓치지 않으려고 매형까지 미국에 남겨 둔 채 말이다.

 

병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궁암에서 방광암으로 전위되고, 급기야는 폐암으로 목숨을 잃게 된 것이다.

그까짓 돈이 대관절 무엇이길래...

 

사진,글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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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북적이고 활기 돋는 장터 가운데 하나인 강원도 정선오일장.
ⓒ 정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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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전철을 타고 갈 수 있는 경기도 성남 모란역 앞 모란장, 일산역 앞 일산장, 파주 문산역 앞 문산장 등 수도권에 있는 오일장 장터들을 알게 된 건 정영신 작가의 사진집 <한국의 장터>를 읽고 나서다.

특히 아파트들이 빈틈없이 들어선 신도시 일산에선 능숙한 솜씨로 여러 모양의 칼을 다루는 칼갈이 할아버지, 각종 곡식이 담긴 양철통 옆에서 연신 쇠통을 돌리는 뻥튀기 부부, "꼬끼오~" 우렁찬 목소리로 우는 수탉 등의 모습들은 언뜻 비현실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이외에 강원도 양양장에서 제주도 모슬포장까지 책 속엔 500개가 넘는 오일장터 사진들이 담겨 있다. 사진들을 보며 아직도 전국 동네방네 곳곳에 저마다의 날짜에 맞춰 오일장들이 서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소읍은 물론 시골 마을까지 들어선 대형 마트와 기업형 슈퍼마켓, 편의점들의 세상에서 이런 오일장터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자생하고 있다는 게 고마웠다. 이후 여행 삼아 가까운 곳부터 찾아가보곤 했다.

내겐 좋은 여행 가이드이기도 했던 <한국의 장터>의 저자 정영신 작가가 남편인 조문호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와 함께 전국의 오일장 522곳을 약 30년에 걸쳐 기록한 사진들을 모은 사진 전시회 <장에 가자>를 열고 있다(오는 17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아라아트센터). 1987년부터 최근까지 전국의 전통 시장을 돌며 사진으로 담아낸 작품 80여 점을 볼 수 있다. 추억 속 장터와, 동네주민이자 장꾼들의 삶, 장터의 변두리 풍경 등이 정겨우면서도 애잔하게 펼쳐진다.

정겨움과 쓸쓸함이 공존하는 우리네 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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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간이 보이는 흑백사진은 더욱 진하고 뭉클하게 다가온다.
ⓒ 정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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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반 이상이 모여 사는 아파트, 모든 것이 편리하지만 이웃 간 소통하고 사는 이는 드문 한국의 도시. 이렇게 팍팍하고 메마른 도시 생활에 도무지 정이 안 갈 때 찾은 오일장은 고향 같은 푸근함을 느끼게 해줬다. 유년 시절 방학 때마다 놀러 갔던 시골 외갓집에 대한 기억이 유일한 내게 오일장이 펼쳐지는 공간은 고향의 정감을 나눠주는 곳이다.

그런 정경을 기대하고 찾아간 사진전에서 의외의 풍경과 마주쳤다. 아내인 정영신 작가의 감성적이며 푸근한 인간미가 넘치는 사진들이 있는가 하면, 남편인 조문호 작가의 사진은 마트와 시대에 밀려나고 있는 장터에 드리운 그늘과 스산함을 담아냈다. 승자보다는 패자, 강자보다는 약자에 시선을 돌려 톺아보는 다큐멘터리 사진 앞에서 자꾸만 서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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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와 시대에 밀려 스러져가는 시골 오일장.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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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기록하고 증언하는 생생한 현장감 외에 그만의 내공과 미학이 느껴지는 조문호 작가의 '불편한' 사진들은 묘한 공감과 감동을 전해줬다. 타인의 어려움과 아픔에 동정심보단 혐오를 드러내는 삭막한 시대에 다큐멘터리 사진이 좋은 보루가 되겠구나 싶었다.

전시장은 정 작가의 '희망을 엮는 집어등'으로 시작해 조 작가의 '장날, 그 쓸쓸한 변두리 풍경'으로 끝난다. 잔돈을 거슬러주며 물건 파는 장꾼의 생동감 있는 얼굴이 있는가 하면, 짐을 짊어지고 어딘가로 가는 노인의 쓸쓸한 뒷모습 사진은 내 부모의 모습 같아 가슴 한구석이 뭉클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컬러 사진 외에 간간이 보이는 흑백 사진 또한 푸근한 장터를 색다르게 느끼게 했다. 화려한 색을 뺀 단순한 흑백 사진이지만, 사진을 보면 볼수록 이상하게 여러 감정이 배어 나왔다. 손님이 뜸한 늦은 오후 머리를 맞대고 단출하게 차린 밥을 먹고 있는 장꾼 부부. 사람이 그리워 채소 몇 단, 호박 몇 덩이 가지고 나와 장터 외진 곳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는 할머니. 하루 종일 바람과 햇볕에 고스란히 노출되면서도 오일장터를 지키는 사람들의 사진은, 누가 굳이 눈물샘을 자극하는 이야기를 말해주지 않아도 정겨우면서도 아릿했다.

소중하게 지키고 보존해야 할 생활 문화 박물관, 오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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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장에서 관람객을 맞이해 주는 부부 다큐 사진가 정영신, 조문호 작가.
ⓒ 마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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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1970, 1880년대 경제 성장기를 거치면서 그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세계 12위의 경제 대국 국민이 됐지만, 마을 공동체와 정다운 이웃 사촌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어느 외국 작가의 말대로 기적을 이뤘지만, 기쁨을 잃고 말았다. 약자를 배려하고 슬픔과 고통을 함께하던 미풍양속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이렇게 경제적 부(富)와 바꾼 것들을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모여 아직도 이렇게 오일장터가 남아 있게 된 것일 게다.

오일장터라는 공간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 아니다. 오일장은 서양의 대형 할인마트처럼 대량으로 상품이 거래되는 곳이 아니라 5일간의 일용할 양식과 물품을 장만하던 소박한 유통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의 강점은 서구인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람 간의 교류와 정(情)이라는 무형의 물품이 함께 유통된다는 것. 장터는 단순히 물건을 구매하거나 교환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대처의 소식을 듣거나 인근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정보를 교환하는 광장이요 소통의 공간이었다. - 정영신 사진집 <전국 오일장 순례기> 가운데

동학 혁명이나 3·1운동도 장날을 참고해 전개됐다 하니, 오일장의 사회적 의미는 큰 것이었다. 두 작가 또한 "​장터라는 공간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 아니라, 그 지역의 생활 문화를 꽃피우는 무대요, 전국에 흩어진 장터들은 우리가 소중하게 지키고 보존해야 할 생활 문화 박물관"임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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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장터 사진 앞에서 옛 추억을 나누는 어르신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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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에 가면 흔히 마주할 수 있는 장면이 오롯이 담긴 사진들은 언뜻 '이런 사진은 나도 찍겠다'는 생각이 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눈으로 보기는 쉬워도, 사진에 담아내기 어려운 게 장터 사진이다. 생계가 걸린 고된 장터 일을 하는데 낯모르는 타인이 와서 카메라를 들이미는 것을 좋아하는 이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마침 전시장에 정영신 작가가 나와 있길래 어떻게 장터 사진을 자연스럽게 찍을 수 있었는지 몇 가지 궁금했던 점을 물어보았다. 카메라보다는 먼저 인사를 건네고 물건도 사고, 조금씩 얘기를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사진을 찍는다고 한다. 오일장터에 구경 가서 사진을 찍게 될 때 참고해야겠다.

 

 

오마이뉴스/김종성 시민기자 

 

김종성 장로 모친 박분남성도께서 이땅에서의 삶을 끝내시고 주님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다시 뵙지 못할 것을 생각하면 아쉽고 슬픈 일이지만,

연로하신터라 주님계신 천국으로 가신 것을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91년의 이승 삶을 마감하는 동안 주님을 영접한 신앙생활은 너무나 갚을 길 없는 큰 은혜였습니다.

 

부산 온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룬 장례식에는 상주인 아들 김종성, 김종옥, 김종욱, 김종직씨를 비롯하여

많은 일가친척과 조문객들이 참석하여 고인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장례식장의 예배는 일산 예수사랑교회 조덕래목사님을 비롯한 많은 성도님들이 참례하였고,

창원시립상복공원 화장장에서는 장유 호산나교회 최상근 목사님의 집례로 화장예배가 있었습니다.

 

선산이 있는 창녕군 계성면의 납골당 "영모원"에 유골을 안치하는 것으로 모든 장례절차를 마쳤습니다.

선산에는 고향의 많은 이웃과 친지들이 찾아와 고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조문하였고,

오랜만에 만난 고향 이웃들의 안부를 물으며 반가운 시간들도 가졌습니다.

 

화장장에서 예배를 마치며 부른 가족친지들의 찬송가 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맴돕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아서 날마다 기도합니다." 

 

사진,글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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