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추억에 파고드는 우리의 모습이 청승보다 낭만에 가깝도록 만들어주는 최고의 핑계거리다. 

세 명의 에디터가 가을을 핑계 삼아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었다.

 

 

노래의 온도_Editor 조하나



바람이 불어오니 귀가 열리고마음이 데워진다.


이상하다. 코끝에 알싸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몸이 먼저 동한다. 내 경우엔 귀가 먼저 알아챈다. 음악은 계절을 말한다. 빈틈없이 채워진, 화려하게 치장된 음악보단 수수하고 담백한 음악을 귀가 먼저 찾는다. 음악은 또 공간을 채운다. 무더운 한여름 외부로 통하는 모든 문을 걸어 닫고 에어컨 찬바람으로 채워놓던 도시의 공간들이 유일하게 자연 바람을 들이는 계절이 바로 지금이다. 추위를 병적으로 싫어하면서도 한국에 네 마디로 구분지어 부를 수 있는 분명한 계절이 있다는 게, 1년 동안 사계절 골고루 지내는 게 새삼 감사할 일로 느껴지는 시간이 바로 지금, 가을이다.



사람이 신체적으로 체온의 변화를 느끼면 따뜻하고 감성적인 무언가를 찾게 된다는 건 과학자들의 실험이나 마케팅 전문가들에 의해 이미 증명된 사실이다. 후덥지근한 무더위가 지난 후 찾아오는 쌀쌀함이라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아마 더욱 그럴 거다. 9월이 되면 푸른 나무들이 색색의 고운 단풍 옷으로 갈아입듯 각종 음원 사이트의 검색어도 바뀐다. 봄이 되면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엔딩'이 검색어에 오르는 것처럼 가을이면 나얼의 '바람기억'과 김광석의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가 갑자기 검색어 순위에 출현한다. 사실 이럴 땐 스산한 이 가을밤, 잠 못 들고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게 나뿐만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괜한 안도감도 든다. 제아무리 난 체해봤자 옷깃이 절로 여며지는 계절의 변화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버리는 나약한 사람이라는 걸, 당신도 나도, 우리 모두 다르지 않다는 생각까지 이어지는 걸 보니 역시 가을은 가을인가 보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저마다의 섬을 가진 것처럼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데 이 섬 사이를 잠깐이라도 이어줄 작은 돛단배 같은 역할을 해주는 건 노래뿐인 것 같다. 힘든 일 겪고 있는 친구에게 백 마디 말보다 노래 한 곡 들려주는 게 더 낫고, 자신의 심리 상태를 노래 한 곡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만큼 멋진 일이 없는 것 같다.

노래를 짓고 부르고 듣는 여러 이유 중 내가 본질적으로 믿고 있는 노래의 힘은 자기 고백에서 오는 진정성이다. 자신의 경험과 상념에서 얻은 이야기를 노랫말로 지어 부르는 한 싱어송라이터는 "그래서 내가 무대에 오르면 벌거벗겨진 느낌"이라고 했지만 무대 위에서 기꺼이 나체가 되어 부른 노래 한 곡이 한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적당한 외로움은 즐길 수 있지만 두려움으로 변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 공포와 불안으로 치닫지 않을 정도만큼 외로움의 농도를 조절하기 위해 우리는 책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사람이든, 무엇인가를 통해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려 발버둥 치기 때문이다.

공감이 교감이 되는 순간, 단 한 명의 뮤지션과 관객이라도 세상에 둘도 없는 유대감을 갖게 된다. 물론 여기엔 몇 가지 조건이 깔려 있다. 직접 지은 가사를 얹어 불러야 한다는 것, 사람의 심장 박동 수보다 조금 느린 템포에 컴퓨터의 기교를 최대한 배제한 노래여야 한다는 것.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것일수록 복잡하지 않다. 단순하고 투박한 노래가 들을수록 질리지 않고 깊은 울림을 느낄 수 있다. 공연장에서 박주원의 플라멩코 기타 연주에 맞춰 탱고 풍으로 편곡한 '낭만에 대하여'를 부르는 최백호를 보며 노래 안의 빈 공간이 비록 들리진 않지만 얼마나 많은 소리들로 채워져 있는지를 깨달았다. 가사는 노래의 여백에서 두고두고 곱씹힌다. 노래하는 이와 듣는 이가 연결되는 순간이다. 같은 것을 느끼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그 순간, 노래는 더 이상 가수의 것이 아니다. 통기타 한 대에 목소리만 얹은 김광석은 어떤가. 그는 1990년대에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젊은이들의 송가로 수없이 리메이크되며 사랑받고 있다. 이제 김광석의 노래는 그만의 것이 아니다.

1990년대를 들먹이며 꼰대처럼 말하긴 싫지만 사실 요즘은 그런 가수, 그런 노래 찾기 힘들다. 온전히 자신이 가진 이야기와 목소리만으로 누군가에게 다가갈 수 없는 세상이 된 건 누구의 탓이 딱히 아니기에 오래된 앨범들을 뒤적이며 당시의 시간에 나를 이입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 나의 시대에 태어나 반짝이는 걸 찾고 싶기도 하다. 얼마 전 그런 가수를 찾았다. 바람과 볕이 좋은 가을 휴일, 사람들로 붐비는 전철 안에서 여느 때처럼 이어폰을 꽂았다. 무심하게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고 나는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었다. 통기타 소리와 목소리뿐이었는데 그가 노래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에 꽂혔다. 그것은 가을의 힘이기도 했고 노래하는 자의 힘이기도 했다. '우리 세대의 김광석이구나. 이 사람은 어디서 왔을까. 요즘 같은 때에 어떻게 이런 앨범을 낼 수 있었을까.' 용기가 있거나 미련하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요즘은 아무도 이런 노래에 귀 기울이지 않으니까. 누군가의 생각을 담은 노래를 귀담아듣기엔 우린 너무 바쁘고 피곤하니까. 그의 이름이 강태구라고 했다. 홍대 인근 소규모 라이브 공연장에서 간간이 공연을 하다 얼마 전 텀블벅으로 앨범 제작비를 후원받아 아를이라는 뮤지션과 함께 앨범을 낸 멀끔한 청년이었다. 강태구는 사람들이 자신의 음악을 발견하기엔 가을이 충분히 길지 않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어느 작은 공연장에 자리 잡고 앉아 자신의 노래를 기다리는 몇몇 관객을 보며 이거면 충분하다, 만족했을까. 지금으로선 알 길이 없다. 그는 얼마 전 입대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당분간 강태구의 앨범을 들으며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작정이다. 바쁘고 고단한 잡지사 에디터라지만 각박한 사람이 되고 싶진 않다.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더위가 물러갔다. 매년 여름은 이렇게 끝나지 않을 듯하다 결국 끝나버린다. 쌀쌀한 바람이 조금이라도 느껴지면 하늘부터 올려다본다. 자연스레 그다음엔 주위를 둘러보고 뒤를 돌아본다. 찾아오는 것들보단 떠나보낼 것들이 더 많아지는 계절이고, 그 모든 것들이 끝나면 또 한 해가 간다. 나도, 사람들도 외로워진다. 사는 내내 외로운 게 사람이라지만 가을엔 특별히, 좀 더 외롭다. 서울의 인구밀도는 세계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라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외롭다. 그럴 때 나는 노래를 듣는다. 음악 한 곡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음 곡 재생' 버튼을 눌러버리는 요즘, '1분 미리듣기'로 그 노래의 운명이 좌우되는 요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 한 곡을 천천히 곱씹어 듣기 좋은 가을이다. 내가 공감하고 사랑하는 노래들은 시간과 함께 쌓인다. 이렇게 쌓인 노래들은 추억이고 취향이다. 그리고 언젠가 어디서든 나와 취향이 비슷한 누군가를 만나면, 우리는 친구가 되겠지.

 





영화의 고향_Editor 조진혁

한때는 시네마테크를 기웃거렸다.


난 정말 돼지국밥이 싫었다. 돼지고기를 끓이는 냄새가 역했다. 끈끈한 테이블에 팔을 올리면 살갗이 들러붙을 것만 같았다. 숟가락과 젓가락마저 찝찝했다. 깍두기의 위생 역시 의심스러웠다. 그럼에도 우리는 돼지국밥집에 갔다. 탑골공원의 할아버지들 사이에서, 벌어진 이 사이로 떨어지는 오래된 욕설을 들으며 밥을 먹었다. 선배 형은 다 먹었고, 나는 반만 먹었다. 우리는 현금 1만원으로 계산을 하고,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낙원상가를 도서관처럼 여기던 시절이었다.

시네마테크는 낙원상가 4층에 있다. 낙원상가는 오래되고, 낡았다. 아파트는 누렇고, 상가 건물은 빛바랜 푸른색이다. 낙원이 이런 모습이라면 아무도 교회에 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이곳을 낙원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시네마테크 앞의 공터 때문이었다. 4층은 상가 옥상으로 콘크리트 바닥을 드러낸 넓은 공터가 있었다. 앉을 곳은 없다. 사람들은 난간에 기대 서서 북한산을 넘어가는 노을을 바라보거나, 인사동을 걷는 사람들을 보며 담배를 태웠다. 우리도 영화가 끝나면 자판기 커피를 들고 난간으로 향했다. 영화의 신에 대한 질문을 했다. 내가 질문하면, 형은 반문했다. 우리는 답을 내놓은 적이 없었다. 정답을 모르니 매일 시네마테크로 향했다.

언젠가는 영화를 찍고 말 것이다. 영사기가 내가 쓴 시나리오와 연출한 영상을 스크린에 읽어 내리는 날이 오리라. 창피한 마음으로 관객석을 돌아보고,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며 의자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 끝내는 스크린 속으로 녹아 들어간다 해도, 영화를 찍고 싶었다. 나의 언어와 삶은 영화 제작을 위한 장비와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7년이 지나자 가을이 왔다. 시네마테크에서 마지막으로 영화를 본 게 몇 년 되었다. 상영 프로그램들이 대부분 봤던 영화라 또 보고 싶지 않았다. 첫 번째 핑계다. 두 번째 핑계는 주차할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시네마테크는 지하철을 타고 종로3가역 5번 출구로 나와서 걸어가는 게 가장 짧고, 효율적인 동선이다. 하지만 몇 년 전 중고차를 구입한 이후로는 더 이상 시네마테크를 찾지 않았다. 시간도 없다. 매주 블록버스터 영화가 개봉되는데 굳이 옛날 영화를 봐야 할 이유가 없다. 좁은 극장의 작은 스크린에서는 압도적인 경험을 할 수 없다. 시네마테크와 연을 끊은 이유는 매해 늘어갔다. 하지만 아직도 종로2가를 지날 때면 미안해진다. 7년 전 내게 카톡을 보낼 수만 있다면, '낙원을 잃고, 다른 낙원을 찾고 있는데 쉽지 않다. ㅋㅋ'라고 보낼 것이다.

나와 달리 선배 형은 여전히 영화판에 있다. 입봉작을 준비하고 있다. 처음 입봉을 준비한 게 재작년 가을이었는데, 형은 아직 신인조차 되지 못했다. 가끔씩 홀로 시네마테크를 가고, 낮에는 영화사에서 알바를 하고 있다. 도서관을 매일 간다고 모두 시험에 합격하는 건 아니다. 탈락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우리가 증명해냈다.

가을에 시네마테크를 찾으면 은행 냄새부터 맡게 된다. 구린 냄새를 맡다가, 비릿한 돼지국밥 냄새도 맡아야 한다. 낙원에 이르는 길이니 난관은 당연히 있다. 국밥집 할머니가 돼지 머리를 썰고 있었다. 원형을 알 수 없는 형태로 잘려나가는 돼지를 보자 형이 생각났다. 형은 오리털 파카를 입고 다녔는데, 파카에서는 누린내가 났다. 형의 뒷모습은 돼지의 등처럼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파카를 벗고 극장에 앉아 있던 형은 말랐었다. 아무리 돼지를 먹어도 마르기만 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긴장됐다. 내가 왜 시네마테크에 와야 하나? 흥미로운 클래식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지만, 시대와 동떨어진 과거를 상기하는 곳이기도 하다. 유행을 좇기에도 버거운 내게 과거를 탐험한다는 것은 비효율적인 일처럼 느껴졌다. 티켓 부스에서 3시 영화표를 구입했다. 마스무라 야스조 회고전이 열리고 있었다. 공터는 변해 있었다. 바닥에는 나무 데크를 설치했고, 인공 잔디와 나무도 심었다. 가끔 공연이 열리는지 무대도 있었다. 나보다 먼저 인공 낙원을 꾸몄다. 실버극장의 노인들이 시네마테크 관객들보다 더 많았다. 시네마테크 아카이브에서 팸플릿을 집어 들었다. 시네마테크 팸플릿에는 작가론과 작품론이 대부분이다. 누가 이런 걸 읽겠느냐만은 시네마테크 관객은 모두 읽는다. 3시 영화 제목은 <남편은 보았다>다. 예쁜 유부녀가 젊은 부자를 꾀어서 그의 재산을 가로채는 이야기다. 1964년의 스릴러라고 팸플릿에 소개되어 있었다. 복도 쪽에 앉았다. 영화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광고가 없기에 영화는 금방 상영된다. 불이 꺼지고 어두운 화면에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느다란 한숨을 쉬었다.

영화를 보고 난간에 갔다. 황혼이 북한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인사동에는 가로등이 켜졌고, 사람들은 바쁘게 지나다녔다.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보고 나면 말을 잃는다. 어떤 영화들은 여운이 길어서 극장 밖을 나서도 스크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가 있다.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가 그랬다. 예쁜 유부녀의 목소리를 떠올렸고, 젊은 부자의 유부녀를 만나기 전 삶을 생각했다. 캐릭터의 입체감, 사건의 개연성, 플롯의 전개 속도 등을 따져봤다. 습관이었다. 버릇은 자판기 커피를 뽑게 했다. 풍경과 커피 맛은 그대로였고, 나는 7년 전보다 더 작아졌다. 울지는 않았지만 형의 마른 등을 보게 된다면 울 것 같았다. 고향에 왔지만 떳떳하지 못했다. 형을 버리고, 홀로 온 고향은 변한 게 없었다. 고향은 늘 그대로다. 변하는 건 떠난 사람이다.

왜 옛날 영화를 다시 봐야 할까? 지난해 시네마테크 프로젝트 기사를 진행하며, 영화인들에게 물었다. 빤한 대답을 들었다. 이야기의 원형을 탐구해야 한다고, 고전 소설을 읽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했다. 그런 말은 교과서에 쓰일 답변이다. 우리가 옛날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는 고향이기 때문이다. 고전 영화는 과거의 공기를 담고 있다. 다시는 맡을 수 없는 그 시대를 담고 있다. 과거는 기억의 재해석을 여러 번 거쳐 현실에 도달한다. 좋은 것만 기억하려 한다. 싫은 기억은 제거된다. 과거는 왜곡된 기억이므로 행복하다. 우리는 현실에서 도피할 공간으로 과거의 일정 부분을 선정한다. 그리고 그 기억으로 회피한다. 많은 사람들의 습관이다. 고전 영화는 왜곡된 기억을 불러낸다. 오래된 영화를 보면 그 안에 머물 수 있다. 그래서 형은 아직도 과거에 머물러 있는 걸까? 그래서 새로운 사람이 되지 못한 걸까?

형이 보고 싶었다. 형에게 나는 실패한 영화인쯤으로 여겨질 것이다. 형에게 돼지국밥이 아니라, 쇠고기국밥을 사줘도 형의 시선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왜 변했을까? 지난 몇 년간 열심히 살았지만 목적이 없었다. 목적 없는 행동들은 일종의 반항이었다. 그러니 지난 7년은 적의로 가득한 세월이었다. 과거의 나에게서 카톡이 온다면 무슨 말이 쓰여 있을까? '내 그럴 줄 알았다. ㅋㅋㅋ' 낙원동의 밤이 되자 커트 보네거트의 묘비명이 떠올랐다.

 



 

오래된 그녀의 책_Words 임경섭(시인)

앤티크 카페에 앉아10년 전 읽었던 두 권의 소설을 다시 읽었다.


카페 앞에 놓인 나무 계단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삐걱거려서 사람을 조심스럽게 만든다. 마음을 가다듬으며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 통나무를 겹쳐 만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따라 들어온 볕이 카페 입구 낡은 탁자를 비춘다. 탁자 위엔 쓰인 지 30년은 족히 돼 보이는 타자기가 놓여 있다. 군데군데 녹이 슬어 있지만, 문틈 사이로 들어왔던 볕이 사라지자 녹들은 음지 속으로 금세 몸을 감춘다. 그래도 이름이 지워진 자판들은 제 얼굴을 감추지 못한다. 타자기 뒤로는 먼지가 제법 내려앉은 액자가 걸려 있고, 액자 안에선 노부부가 삼지창을 들고 나를 노려보고 있다. 그랜트 우드의 그림 <아메리칸 고딕>이다. 오래된 모작(模作)이겠지만, 오랜만에 마주친 그들의 눈초리는 여전히 따갑다.

그들의 시선을 피해 앞으로 놓인 복도를 따라 몇 걸음 더 들어간다. 나무로 된 바닥은 역시나 삐걱거리지만, 이내 복도 양옆으로 작은 방의 입구들이 나온다. 한쪽 방에는 차가운 재가 쌓여 있는 북구풍 벽난로와 몇 군데 상처가 난 두 개의 탁자, 그리고 칠이 조금씩 벗겨진 나무 의자 네 개가 있다. 다른 방에는 볕이 들지 않는 창과, 창의 이쪽과 저쪽으로 서로 다른 모양의 비즈 스탠드가 놓여 있는 낮은 탁자 두 개, 그리고 가죽이 헐기 시작한 소파 몇 개가 놓여 있다. 나는 창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 가장 구석에 놓인 소파에 앉는다. 내가 앉자 소파는 한참 동안 숨을 뱉어내며 천천히 나를 품는다. 조그만 스피커에선 시크릿 가든의 우울한 경음악이나 사라 브라이트만의 고요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나와 그녀는 앤티크풍의 이 카페를 좋아했고, 이 방 소파에 오래도록 앉아 음악 듣기를 좋아했다.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찾아온다. 내게도 역시 첫사랑은 찾아왔다. 그것은 대학 1학년 가을의 일이었다. 동기 여자애가 지갑에 가지고 다니던 사진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다. 사진 속 그녀는 예뻤다. 긴 생머리의 그녀는 청아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연약해 보였지만, 입가에는 단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 표정은 나를, 그녀를 감싸주고 싶은 동시에 그녀에게 의지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런 그녀를 꼭 한 번 만나고 싶었고, 나는 그 동기애를 몇 날 며칠 쫓아다니며 졸랐다. 끈질긴 애원 끝에 그녀와 만날 날짜를 정했고, 그날이 다가왔다. 우리는 내가 다니던 학교 앞 한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시험 기간이어서 학교 앞은 한산했다. 답안을 어떻게 써냈는지도 모를 정도로 허겁지겁 강의실을 빠져나온 나는 한달음에 카페로 달려가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순간, 세상의 모든 정적이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멀찍이 그녀를 발견한 순간부터 세상은 온통 흑백 필름으로, 동시에 슬로모션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특이했던 건, 유독 그녀에게서만 총천연색의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는 것.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그녀는 인사 대신 웃으며 말을 건넸다. "너, 신발 끈 풀렸어."

나는 오늘 이 소파에 앉아 두 권의 소설을 읽고 가기로 한다. 한 권은 신경숙의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또 한 권은 윤대녕의 <미란>이다. 두 권 모두 이미 10여 년 전에 읽었던 책들이지만, 이것들에 대한 어렴풋한 느낌만 남아 있지 세세한 내용들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올가을 나는 나에게 기억을 선물하고 싶었고, 해서 오늘 일부러 이 책들을 들고 이 카페에 찾아온 것이다. 이 두 책은 공통점이 있다. '미란'이라는 이름의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것도 같은 점이지만, 또 그 인물들이 하나같이 애잔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비슷한 점이지만, 이 두 책은 그녀와의 시간과 깊이 관련한다는 점 또한 공통점이다. <기차는 7시에 떠나네>에서부터 <미란>까지 읽는다는 것은 그녀와의 시간을 처음부터 끝까지 추억한다는 의미다. 나는 휴대폰에 이어폰을 꽂고 그리스 여가수 아그네스 발차의 노래 'To Treno Fevigi Stis Okto(기차는 8시에 떠나네)'를 반복 재생으로 설정한다.

우리는 맥주를 시켰다. 술을 한 모금도 하지 못했던 그녀는 나를 배려한다는 듯 함께 맥주를 주문했다. 우리는 그런대로 재미난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내가 그녀의 맥주잔까지 비운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철을 타러 가는 길에 우리는 서점에 들렀다. 지금은 사라진, '홍문당'이라는 이름의 작은 서점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선물을 했다. 나는 그녀에게 안도현의 시집 <그리운 여우>를, 그녀는 나에게 신경숙의 소설 <기차는 7시에 떠나네>를 사주었다. 집 방향이 같았던 우리는 전철을 함께 탔고, 그녀는 그곳에서 시집과 펜을 건네며 나에게 말했다. "책을 선물할 때는 뭔가 써주는 거야." 한참을 고민한 나는 내내 후회스러울 한마디를 그곳에 적고 말았다. '참 반갑습니다.'

입대하기 전 나는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여자친구의 전화번호도 기억하지 못했던 나는 그녀의 전화번호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지금도 그 번호는 잊지 않고 있다.) 여자친구와 헤어지자마자 나는 몇 달 동안 문자 한 통 주고받은 적 없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용건은 간단했다. 곧 군대에 간다. 가기 전에 한 번 보자. 그녀는 흔쾌히 승낙했고, 우리는 처음 만났던 그 카페에서 보기로 했다.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그녀를 나는 멀리서 발견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단발머리를 하고 나타난 그녀는 훨씬 더 이지적이었고 훨씬 더 아름다웠다. 그러나 빛을 뿜던 그녀는 그곳에 없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로 한 권씩 책을 준비했다. 나는 그녀에게 안도현의 시집 <바닷가 우체국>을, 그녀는 나에게 윤대녕의 소설 <미란>을 건넸다. 나는 역시나 부끄러운 한마디를 그 선물에 남겼다. '이번 생의 아름다움을 다음 생으로.' 우리는 근황이나 가족의 안부 따위의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다 헤어졌다. 그렇게 나는 입대했고, 군 생활 동안 딱 두 번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끊었다.

나는 <미란>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나서 뒷면에 안도현의 시 '고래를 기다리며'를 적어두기로 한다. '나 장생포 바다에 있었지요/ 누군가 고래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했지요/ 설혹 돌아온다고 해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요,/ 나는 서러워져서 방파제 끝에 앉아/ 바다만 바라보았지요/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치는 게 삶이라고/ 알면서도 기다렸지요/ (…)'



* ILLUSTRATION 이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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