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 장병욱 선임기자 aje@hk.co.kr

 

 

  • 눈 내리던 날 딸의 작업실에서 이뤄진 인터뷰 후 아버지는“너무나 행복했다”는 메일을 보내왔다. 홍인기기자 hongik@hk.co.kr
  • ● 아버지의 '순수'는 어떤 풍경
    1980년 파격적 행위예술 무대
    삼일로 창고극장상 등 일찍이 일가 이뤄
    결혼 때 '혼인 이벤트'도 장안의 화제

    ● 장맑은 "누드는 수행의 도구"
    서울 생활 방편으로 누드 모델 나서
    모멸감 들때 독서·명상으로 자아 찾아
    민중 엔터테인먼트도 수행의 한 방법

    ● 따로 또 같이
    사회적 통념·일상에 삐딱한 시선
    "미디어에 의해 거세돼 있는
    인간 본연의 감각 되살리고 싶어"


    상업 자본이 흥건히 괴어 있지만, 이른바 홍대앞은 여전히 해방구이자 실험 공간이다. 15일 막 내린 나흘간의 전위 예술 축제 '2013 한국실험예술제'는 상업자본의 범람과 침식을 용케 버텨낸 예술의 힘을 보여주기 족했다. 아주 약간의 물기와 햇빛만 있으면 돋아나는 민들레 같은.

    오래 전, 그'홍대앞 아이들'이었던 행위예술가 장맑은(33)씨는 지금 남영동 한 켠의 작업실에서 꿈을 이어가고 있다. 입구에는'흑표범 스튜디오'라는 옥호가 조그맣게 달려있다. 흑표범이란 그녀의 애칭이다. 그 작업실로 아버지 장석원(61ㆍ전남대 미대 교수ㆍ미술평론가)씨가 모처럼 찾아 왔다. 수개월 만에 만나도 이들은 또 작품 이야기다. 그들이 말하는 작품이란 캔버스도 화랑의 전시장도 아닌 현장이다. 비일상적인 상황들을 범상한 일상 속에 던져주고 호기심 어린 시선들을 온몸으로 감내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

    2007년 홍대 앞 다원예술공간에서의 행위다. 당시 거리에 널브러져 있던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끌고 나와 나체로 있던 자신에게, 장맑은은 샤워 하듯 쏟았다. 그녀에 의하면 처음으로 진지하게, 자신의 작업에 대해 고민한 결과였다. 당시 그 광경을 지켜 본 아버지의 q반응은 이러했다. "됐다. 이제 내가 더 이상 개입 안 해도 되겠다."

    두 사람은 "우리는 가족이라기보다는 친한 친구, 아니면 예술 동지"라는 데는 일치한다. "1년 만에 만나도 작업 이야기만 한다"는 점에도. 그러나 속내는 판이하다.

    2011년 7월 전남 광주시 옛 도청 앞 분수대에서 벌인 개인전이자 시위 퍼포먼스'정오의 목욕'은 이 시대 행위예술의 존재 방식을 증명하는 자리였다. 얼룩말 무늬 같은 과녁을 몸에 그린 뒤 분수대에 들어가 목욕한 것이다. 각지에서 쇄도한 기자들의 모습에 오히려 본인이 놀랄 지경이었다. 실시간 인터넷 검색 최고를 기록한 '사건'이었다.

    역사의 무게를, 더께를 그녀는 걷어내고 싶었다. 1980년 당시 정오에 애국가가 울려 퍼지며 발포는 시작됐지만, 30년 뒤 그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현재의 일상이었다. 역사의 무게에 눌려있던 바로 그 현장에서, 여성의 몸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모습에 주목할 것을 파격적으로 요구한 것이다. 그 해 10월 부산 비엔날레에서 철조망을 닮은 훌라후프를 몸에 두르고 돌린 것 또한 비슷한 맥락이다.

    10대에는 래퍼가 되려 했던 딸. "우리 집에 딴따라는 안 된다"며 17세 딸의 튀는 행보를 반대하던 아버지. 당신의 반대는 '순수'에 집착했기 때문이라는 딸의 해석이다. 그렇다면 아버지 장석원씨의 '순수'는 어떤 풍경일까. 자신이 전시 기획실장으로 활동했던 2000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중국작가 마류명(馬六明)이 행했던 퍼포먼스를 보자.

    중장년 남성이 앉아 있는데 옆에는 한 여인이 나체로 널브러지다시피 해 앉아 있다. 바로 마 작가다, 수면제를 먹고 와 서서히 잠든다는 의도였는데 관객들이 비명 지르는 등 일대 혼란 상황이 빚어졌고 운집한 국내 미술인들은 사진 찍느라 여념 없었다. 곯아떨어진 마 작가를 친구가 업고 나가기까지 15분 걸린 '작품'이었다. 일상의 틀을 깨고, 신식민주의적 상황에서 정신을 각성시키자는 메시지를 아주 과격한 방식으로 전달한 셈이다. 시인 김수영의 표현을 빌면 그것은 '침을 뱉는 시(詩)'였다.

    그는 1980년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전위적ㆍ파격적 행위 예술 무대 '장석원 이벤트'를공연해 삼일로 창고극장상을 받는 등 일찌기 일가를 인정 받은 행위예술가다. 1977년 4월 결혼 당시 펼쳤던'혼인 이벤트'는 장안의 화제였다. 인사동의 한 화랑에서 그 같은 이벤트를 한다고 알린 뒤 운집한 관객, 즉 하객 앞에서 예비 부부가 혼례식을 올리는 행위 예술이었는데 그것이 곧 자신의 실제 결혼식이었던 것이다. 일체의 과정은 미리 녹음테이프에 따라 실행됐다. 그 명령에 따라 키스도 치러졌다. 당시 주례는 덕담 대신 현재의 예술 이야기만 잔뜩 펼친 자리였으나 엄연히 진짜 결혼식이었다(20년 후 이혼 했지만).

    호남대 미술학과 출신인 장맑은은 10대서부터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던 소녀였다. 가수 되겠다며 두 번 가출한 것은 통과의례였다. 머리에 노란 물 들이고, 청바지는 칼로 찢어 친구들과 도심을 휘젓고 다녔다. 당시 나이를 제목으로 딴 비디오 작품이자 졸업 작품 '스물넷'은 아버지의 구식 캠코더로 촬영한 또래의 일상이었다. 당시 부모의 이혼으로 받은 복잡한 심정을 다양한 자화상의 몽타쥬와 콜라쥬로 표현한 그 작품은 그를 이해하는 첫 단서이기도 하다.

    서울로 와 만든 영상 작품 'What's Art?'에서 그는 현대 도시의 일상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8㎜ 비디오 캠으로 찍은 60분짜리 영상물 30여 개로 홍대앞 군상의 모습을 무작위로 찍은 뒤 하나의 의미를 이루게 편집했다. 예술에 대한 의심을 유발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몸에 대한 시선은 부녀를 경계 짓는 구분선이다. 스튜디오에는 지난해 2월 전시한

    '털 달린 첼로'가 놓여 있다. 검은 깃털을 촘촘히 두른 첼로를 안기도 하고 내던져 두기도 하면서 2010년 펼쳤던 행위 전시회 'Black Jaguar'에서 선보인 작품이다. 악기라는 기하학적 물체를 무의식적인 것, 동물적인 유기체로 치환하고 싶었다는 딸의 말은 무표정한 사물에게도 몸의 온기를 투여하고 싶었다는 설명이다.

    벗은 몸은 사실 생활의 방편이었다. 서울에 처음 왔을 때의 '알바'였다. 생계에 도움 될까 해 홍익대 등지에서 누드 모델로 나서기 전, 아버지에게 의견을 물었고 "모델 일 하면서 너를 객관적으로 보기 좋게 하라"는 별난 허락을 얻었다. 동생들은 "언니는 게을러서 잘 맞을 것"이라며 뒤에서 킥킥댔다. 일 많을 때는 1주일에 대여섯 번까지 나가, 20분 포즈에 10분 휴식이라는 별난 일상을 '수행'했다.

    모욕감을 느끼게 되는 등 너무 하기 싫을 때도 닥치지만 그는 독서와 명상으로 자아를 찾았다. "나만 정좌해 있는, 아주 독특한 상황이잖아요?" 그는 모델 일을 하면서 가장 책을 많이 봤다. 쉬는 시간에,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김영하, 밀란 쿤데라 등의 작품을 그렇게 독파했다. 일제시대에서 한국전쟁까지를 서정적으로 그려낸 이범선의 '갈매기(1958년)'에 감명 받았다. 좋은 책들을 만나게 된 계기가 모델 일이었고, 책으로부터 현실을 인식했으니 누드는 수행의 도구였던 셈이다

    "딸의 전위성, 실험성, 전도된 생활 개념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아버지는 해석한다.그는 딸에게 한번도 뭐가 되라 한 적이 없다. 특히 작가와 평론가의 관계 같은 내밀한 문제 같은 주제는 꺼내지도 않는다. 당사자들은 극구 부인하지만 두 사람은 아무래도 매우 특별한 동지인 것 같다. 아웃사이더적 전위 의식으로 사회를 바꿔보려 하는, 참으로 예외적인 부녀이리라. 어버지의 말에 첨언이 없는 걸 보면 동의하는 눈치다.

    이들은 사회적 통념과 부대끼고, 그것도 모자라 역린을 거스르기까지 한다. 때로 그것은 결과론이긴 하지만 외설적이다. 행위 예술은 선정주의와 어떻게 다른가? 부친은 철학과 예술의 가장 민감하고도 극단적인 부분을 몸에서 찾는다. 연습도 않고 감상자를 의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퍼포먼스와도 구분되는 행위다. 시인 김 수영이 "온몸을 온몸으로 밀고 간다"고 했듯 삶과 예술의 합일이라는 것이다.

    딸은 좀 다르다. 스마트폰이 젊은 사람들의 감각을 마비시키고 있는 현재, 미디어에 의해 거세돼 있는 인간 본연의 감각을 되살리고 싶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있던 비장함이 거세됐다. 그는 예술가만의 특권인 양 행세하는, 아우라라는 말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본다. 이제 일상적으로 그런 것들을 많이, 다양하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바로 자신의 예술이 현실과 접합하는, 시쳇말로 소통하는 통로에 대한 고민으로 직결된다.

    다시, 그녀는 '수행'에 대해 말했다. 4대강 살리기 시위, 장애인 시위의 현장을 찾아가 그녀는 시위자들과 흥겹게 노래한다. 레게풍으로 판을 돋우는 가수 한받 등이 상징하는 민중 엔터테인먼트는 유효한 통로다. 크게 보아 민중 예술의 새로운 버전이며, 작게는 딸의 수행법이다.

    이 지점, 둘은 또 대립한다. (한 10년 뒤에는) 소소하게 일상 속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을 것이라는 딸의 말에 아버지는 발끈한다. 사회적으로 알려지건 말건 끝까지 가서 돌아오는 것, 그것이 성공이라며.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이 아마 저러다 나뉘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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