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가 끝나는 날, 연출가 기국서씨로 부터 술두 통지가 날아왔다.
해 바뀌어 술 한 잔하자는 기별인줄 알고 갔더니,
초저녁부터유목민’에 여러 명이 모여 작당하고 있었다.



연극연출가 기국서씨를 비롯하여 마임이스트 유진규씨, 언론인 윤상길씨,

연출가 최유진 교수 등, 다 한 가닥씩 하는 분들이 모여 있었다.

성악가이자 배우인 박준석씨, 문화평론가이기도 한 최정철 감독 등

처음 보는 분도 두 분이나 있었다.



명절 덕담으로 시작된 술자리는 언론개혁의 당위성을 비롯하여

문체부, 예술의전당, 국립극단, 한국에술위원회, 서울문화재단 등으로 옮겨가며,

예술가 엿 먹이는 기관에 대한 불만들이 쏟아져 나왔다.



먼저 언론인 윤상길씨가 말을 꺼냈다.

윤상길씨는 ‘부산일보’에서 시작하여 ‘국민일보’, ‘시사저널’에서 일하다 명퇴하여 조용히 살던 분이다.

이달 초부터 온라인 종합 신문 ‘뉴스코프’ 제작위원과 ‘스포츠 투데이’ 편집위원 자리를 맡아,

다시 일하게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얼마 전 들었다,



자유롭게 살고 싶은 본인의 뜻을 존중해 비상임으로 맡겨 준 대표와 후배들을 고마워했는데,

막상 일을 하다 보니, 기가 막히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기자들이 모니터를 끼고 일하는 모습이 마치 닭 싸움하는 것 같단다.

발로 뛰며 기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에 뜨는 이야기 짜깁기하느라 컴퓨터와 싸운다는 것이다.



전람회나 연극공연 등 좋은 기사를 찾아나서지 않아, 왜 가서 취재하지 않느냐고 말하면,

‘그긴 왜 가느냐?’는 것이다. 보도자료를 비롯하여 필요한 정보가 인터넷에 있으니까...


 

문제는 인터넷 신문이 살아남으려면, 기사의 질보다 양이란다.

광고주들이 신문매체의 클릭 수에 따라 광고를 주니, 하루에 수십 건의 기사를 올려야 하는데,

기껏 한 두건 밖에 쓸 수 없는 현장 취재는 할 수 없다고 한다.



기사 내용보다 자극적인 헤드라인에 쏠리니, 제목과 무관한 기사도 있단다.

예를 들면 이 이야기 제목처럼 관심을 가지게 만들어야하고,

나무 한 그루를 소개하려면, 가지 따로, 잎 따로, 뿌리 따로의 수십 개 이야기를 만들어,

엉터리지만 많이 올리는 것이 살아남는 방법이란다.



클릭수가 많은 것도 연예, 스포츠, 만화 같은 기사가 주종을 이루는데, 흥미위주의 추측기사가 많단다.

그러니 쓰레기 기사를 양산하는 기레기들이 판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검찰개혁 못지않게 시급한 것이 언론개혁이었다.



두 번째는 성악가 박준석씨가 말을 꺼냈다.

‘예술의 전당’에 크게는 년봉 1억이 넘는 수백 명의 직원들이 벌어 먹지만,

그 곳에 과연 예술가가 몇 명이나 있냐는 것이다.

‘세종문화회관’을 비롯한 '국립극단'과 각종 문화재단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예술가들이 일할 자리를 예술과 무관한 이들이 좌지우지하는데,

심지어 ‘세종문화회관’ 관장도 회계사 출신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엄청난 문화예산을 각종 재단이나 관련 기관을 통해 쏟아 붓지만,

가난한 예술가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다.



나 역시, 지인과 출판사의 권유로 몇 년에 걸쳐 두 차례나

‘서울문화재단’에서 실시하는 ‘중견작가작품집제작지원’에 신청한 적 있다.

그동안의 작품을 정리하여 묶는 유고집 비슷한 성격의 사진책이었다.



탈락되어 어떤 분들이 받았는지 궁금해 발표된 내용을 살펴보니,

사진부문은 한 사람도 지원받은 사람이 없었다.

더 웃기는 것은 두 번 모두 사진 전문 심의위원을 배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는 쓸데없는 짓거리에 들러리 서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런 일에 시간 낭비하고 마음 상하는 작가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난, 사기꾼 되기 십상인 고상한 예술 따윈 집어 치운지 오래다.

잘 못된 것을 바로 잡는 일에 여생을 바치기로 작정한 놈이다.

그까짓 사진집은 만들어 어디에 쓸 것이며, 팔리지 않는 전시는 해서 무엇 한다 말인가?



그 날 모임에서 예술가들이 정부나 조직에 이용만 당하는 세상을

더 이상 두고 보지 않기로 하나 같이 뜻을 모았다. 이니, 공산당 선언 하듯 결기를 다졌다.



예술가를 예우하는 나라일수록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이고,

문화의 향기가 넘치는 살기 좋은 나라임을 정책가들이 정말 모른단 말인가?

문화체육관광부 박양우장관은 행정과 관광의 전문가라는데,

도대체 예술행정을 어떻게 하는지 묻고 싶다.



뒤늦게 ‘76극장장’이며 조명전문가인 주성근씨가 나타났다.

이 분은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그 속에서 살아나온 분이라 했다.

옆자리의 최유진씨도 '삼풍백화점' 사우나를 매일 이용했는데,

그 날 따라 가지 않아 살아남았다며, 지난 날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기국서씨는 술을 너무 급하게 마셨다.

술을 따르기 무섭게 단 숨에 들이켰는데, 그렇게 마시면 항우장사인들 견딜 수 없다.

술기운에 과격한 발언도 서슴치 않았지만,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공산당 선언 같은 메시지를 내 세워, 다들 상복 차려입고 침묵시위를 하자"는 것이다.

옆에 있던 최정철 감독이 좋은 생각이라며, 상복 값은 자기가 대겠다며 맞장구 쳤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입으로 떠벌리는 예술가가 아니라 행동하는 예술가들이 아니던가?

이제 날 잡아 실행에 옮기는 일만 남았다.



한 술집에서 세 시간 넘도록 버티면 장사 망친다며, 2차를 가자고 술값을 거두었다.

다들 일어나 옆 골목에 있는 맥주집 ‘예당“으로 자리 옮겼다.



술이 거나하게 취해 ‘가자’, ‘아제’, ‘샬라’ 등 다양한 구호들이 나왔는데,

술 취한 기국서씨가 소리 높여 외쳤다. “니미 씨발~”

‘니미’는 추임새에 불과하지만, ‘씨발(始發)’은 최고의 구호가 아닌가?

역시 천재적 기질의 연출가였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뜻밖의 사람이 등장했다.

터키 국립 하제테패대학 도예과 초빙교수로 가 있는 막사발 장인 김용문씨 였다.

지금 막 공항에서 오는 길이라지만, 일행이 있어 긴 이야기는 나눌 수 없었다.



한 달가량 국내에 체류하며 한 판 벌이겠다는데, 무슨 일일지 궁금했다.

개인적인 소모전보다 세상 바꾸는 일에 힘을 모았으면 좋겠다.



우리나라에서 예술에 이바지하는 사람들은 살아남기 너무 힘들다.

이제 예술가들도 당하고만 살지 않을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3일 전북 완주로 보름 대목장 찍으러 가는 정영신씨를 따라 나섰다.
그 날은 인사동 ‘통인갤러리’에서 김용문씨 막사발 전이 개막되는 날이지만,
그 보다 문 닫는 삼례 ‘세계막사발미술관’이 더 궁금해서다.






삼례 역사를 개조하여 개관한 ‘세계막사발미술관’은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문전에 흩어져 있는 우편물에는 먼지만 수북이 쌓여있고,
건물 입구에 세워진 막사발 조형물과 도공을 기다리는 장작가마만 반겼다.






주변에 있는 주민에게 '세계막사발미술관'이 문 닫게 된 이유를 물어 보았다.
“지역 텃세에 쫓겨 난거지요. 단체장이 바뀌면 이전 업적을 뒤집는 것도 문제고요.”
그렇다면, 맞은편에 있는 ‘삼례문화예술촌’은 문제가 없냐고 물었더니,
‘막사발은 미운털이 박혔던지, 아니면 그 자리를 탐내는 모함이 있었던 게 아니겠냐“는 것이다.





짐작은 했지만, 어이가 없었다.
우리문화의 가치도 모르는 사람들이 '세계막사발박물관'을 유치한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문제는 관청의 담당부서에 전문가가 없다는 점과 좀 알만하면 다른 부서로 옮기는 조직의 현실이었다. 

다들 제사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많은 것이다.






나선 김에 '삼례문화예술촌'도 둘러보았다.
평일인데도 관람객이 더러 있었는데, 특히 농협창고를 개조한 미술관이 인상적이었다.
삼례양곡창고는 일본 놈들이 양곡을 수탈해 간 대표적 저장고가 아니던가.
삼레역 철도를 이용하여 군산으로 양곡을 실어 나르는 전진기지 역할을 했던 곳이다.





오래된 건물을 허물어 무조건 토목공사부터 벌여 뒷돈이나 챙기는 현실에,
역사적인 장소를 보존해 문화공간으로 활용한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모모미술관’을 비롯하여 ‘김상림목공소’, ‘책공방’ 등 여러 곳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다.






돌아오며 삼례장에도 한 번 들려 보았더니, 몇 년 전에 본 장터의 모습은 오 간데 없었다.
오일장이 아니라 상설시장으로 바뀌었는데, 신축된 상가 건물들이 낯설기 짝이 없었다.
난, 오일장 자체를 포기한지 오래지만, 낙심한 정영신씨의 표정이 안 서러웠다.






지난 토요일엔 김용문씨 막사발 전시가 열리는 인사동 ‘통인갤러리’에 들렸는데,
마침 전시 작가인 김용문씨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터키에서 만든 막사발을 서울로 옮겨 왔다는데, 한 점 밖에 파손되지 않았다고 한다.

김용문 막사발 특유의 투박한 질감이나 다채로운 빛깔이 매혹적이었다.





한 점에 15만원에서 최고 30만원까지 구분되어 있었지만, 그 정도면 싼 편이다.
한 평생 막사발에 바친 도공의 작품을 어디에서 그 가격에 구입할 수 있겠는가?






틈틈이 그려 온 묵화도 걸렸는데. 도공의 그림 솜씨도 보통은 아니었다.
긴 세월 익혀 온 옹기의 지두문이 바탕이 되었겠지만, 도공에서 화가로 전업하지 않을가 걱정되더라.

돈 안 되는 막사발보다는 그림 값이 더 비싸기 때문이다.






폐관 직전에 있는 삼례 ‘세계막사발미술관’을 둘러 본 이야기를 전해 주기도 했는데,
어느 지역에서 옮겨가겠다는 제안이 들어 와 협의 중이라는 반가운 소식도 전해들었다.



정영신사진



부디 곡마단처럼 떠도는 막사발박물관이 아니라,
영구히 못 박을 수 있는 막사발 박물관으로 자리 잡길 기원한다.



사진, 글 / 조문호
























김기춘 '우포의 아침'



지난 1일 터키에 초빙교수로 가 있는 김용문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랜만에 인사동 나왔으니, 대포 한 잔 하자는 전화였다.






이틀 전, 인사동 출입을 자제하며 사람을 가려 만나겠다는 결의문에 가까운 글을 올렸건만, 안 나갈 수 없었다.
그는 30여 년 동안 인사동에서 어울려 온 ‘인사동 사람들’ 원조가 아니던가.
‘사나이 명세 개 명세, 자고 나면 새 명세’란 말이 딱 맞았다.

몇 일을 참지 못한 채, 결심 자체가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렸다.





담배 못 끊는 것이나 사람 못 끊는 것이나 똑 같은 이치다.
의사가 담배를 끊지 않으면 죽는다는 협박에 가까운 말에도 피우듯이,
인연을 끊는다는 것도 아무나 하는 일은 아니었다.






초저녁부터 인사동으로 들어서다, 초입에서 시나리오 작가 최근모씨를 만났다.

정영신씨 상가에서 만난 후 처음이라 같이 술 한 잔하고 싶었다.

그와 함께 ‘마루’에서 열리는 김기춘씨 전시회 부터 들렸는데,

전시 작가인 김기춘씨를 비롯하여 배병수씨도 와 있었다.






김기춘씨는 내 고향 옆 동내인 ‘우포늪’으로 간지가 7년이 되었다는데,
전시된 사진도 ‘우포늪’을 소재로 하고 있었다.
추측은 했지만, 우포늪의 생태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풍경을 찍은 사진이었다.

곽봉수, 김갑진, 김경화, 김권하, 이상근, 추향자씨 등 화가들과 어울려 여는

단체전이라 그런지, 사진보다 그림에 가까웠다.
‘마루’의 ‘빛그늘 초대전’은 오는 12일까지 열린다.






김용문씨가 기다릴 것 같아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다.
‘유목민’은 밖이 보이도록 통유리로 창을 만들어 놓았더라.
천상병선생께서 막걸리 드시며 윙크하는 오래된 내 사진을

투명판에 프린트해 붙이겠다는데, 공정이 까다롭지 않은지 모르겠다.






그 때까지 주인공이 오지 않아, 최건모씨와 먼저 자리 잡았으나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에 김용문씨가 나타나니,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반가운 분들이 모여 들었다.
최종선, 공윤희, 김명성, 이인섭, 유진오씨가 나타났고, ‘풍류사랑’에서 넘어 온 ‘민미협’ 팀들도 속속 등장했다.
최석태, 최병수, 이인철, 김명희, 김정환, 심정수씨 등 십여 명이 모여드니, 술집이 북적이기 시작했다.






터키에서 귀국한 김용문씨는 인사동 여관방에 짐을 풀고 묵는 중이라 했다.
오는 13일부터  '통인갤러리’에서 막사발전이 ‘열린다는 소식도 전해주었다.
흐르는 세월을 잡을 수 없는 듯, 그도 삭아가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빠져 그런지, 말아 올린 상투가 애들 고추처럼 작아 졌더라.






그날의 이야기 거리는 ‘세계막사발미술관’이었다.
완주 삼례에서 ‘막사발미술관’을 폐관한다는 소식은 진즉 들었으나,
그 때가지 이전할 수 있는 뾰족한 방안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터키에서 ‘막사발미술관’을 옮겨가겠다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김명성씨의 야심찬 프로젝트도 들었지만, 아직 밝힐 단계는 아닌 것 같아 입을 다물어야겠다.
김명성, 김용문, 최근모씨가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으나, 취기가 올라 합 바지 방귀 새듯 사라졌다.






늘 인사동에서 술 취해 나오면 갈등을 느낀다.
동자동으로 갈 것인가? 녹번동으로 갈 것인가?
유행가 가사처럼, 차라리 미아리로 가고 싶다.



사진, 글 / 조문호



























'세계 막사발 미출관' 관장인 도예가 김용문씨



세계막사발 미술관터키로 옮겨야 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완주군의 폐관 통보로 오갈 때 없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지 한 참인데,

그 사실을 알게 된 터키 하제테페대학교 측에서 옮겨 가겠다고 한단다.

 

세계막사발미술관은 폐역이 된 삼례역사를 보수하여 2011년 개관되었다.

괴산에 있던 세계막사발미술관을 어렵사리 옮겨 운영해 왔는데,

완주군에서 느닷없는 폐관을 결정한 것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밷는 정형적인 관료의 횡포다.

 

지자체에서 예술가들을 이용해 먹고, 내 팽개치는 짓이 한 두번이 아니다.

청도군에서 세운 철가방극장과 화천군의 감성테마문학공원이 대표적이다.

성공적으로 자리 잡도록 한 전유성씨는 쫓겨났고, 이외수씨는 쫓겨날 처지에 있다.

이건 해도 너무하다. 예술가들이 무슨 공무원들의 밥인가?

 

도예가 김용문씨는 오로지 막사발을 고집해 온 가히 전설적인 장인이다.

나는 막사발이다라는 책을 펴낼 정도로 반 평생을 막사발에 전념해 왔기에,

김용문 하면 막사발이 떠오르고, 막사발 하면 상투를 튼 김용문이 연상될 정도다.

 

그는 홍대미대 공예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후,

전통 옹기에 빠져 다양한 옹기 작품을 탄생시켰고, 막사발에 승부를 건지는 30여년이 되었다,

 

경기도 오산, 충청도 괴산, 전라도 삼례 등지로 세계 막사발 미술관을 옮겨가며

세계막사발축제36년 동안 이끌어 왔다.

또한 세계막사발심포지엄 19, 국내외의 개인전도 45회나 개최했다.

지금은 터키 국립 하제테페대학교 도예과 초빙교수로 터키와 삼례를 오간지 9년째다.

 

그의 예술세계는 막사발에 한정되지 않고, 퍼포먼스와 글과 그림까지 전방위 작가다.

그러한 다양한 작업들도 막사발을 위한 부대작업에 불과했다.

그동안 막사발 실크로드라는 이름으로 중국 산동성과 터키 앙카라를 떠돌며 막사발 세계화에 온 힘을 쏟아왔다.

그런 노력의 성과를 어떻게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도록 만들 수 있겠는가?

 

우리의 막사발이 일본에서 최고의 찻 사발로 떠받들어 진지가 400여년이 넘었다.

옛날 한국적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불리는 달항아리가 관요에서 만들어진 반면

막사발은 지방의 민간가마에서 구워졌기에 더 친숙하게 다가온다.

 

대개 막사발을 천한 그릇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많아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는데,

국어사전조차 막사발을 품질이 나쁜 그릇으로 표기하고 있으니, 한심할 뿐이다.

그러한 서러움을 무릅쓰며 투박한 질감의 우리 막사발에 목을 매고 살았는데,

갑작스런 폐관 통보에 어찌할 바 몰라 손을 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터키 하제테페대학교 측에서 세계막사발박물관을 건립하여 옮겨 가겠다지만,

김용문씨의 생각은 달랐다. 막사발 본가는  우리나라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막사발이 우리민족의 유산이지 터키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 역시, ‘세계막사발미술관을 어떻게 해서라도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지자체에서 수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맥을 이을 해결 방안은 없는지, 많은 분들의 관심과 조언을 바란다.

 

사진, / 조문호

 

 

 

 

 

 

 







지난 11일은 낮술에 취했다.
컴퓨터를 열어보니, 잘 아는 사진가가 다큐사진으로 살기 힘든 현실을 적어 놓았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가슴이 먹먹했다.
그러니, 살아남기 위해 줄서고 눈치보는 사진인이 많아진 것이다.
술 김에 카메라 렌즈가 총구였으면 좋겠다는 악담을 늘어놓았다.






또 다른 댓글은 열 받게 만들었다.
다 아는 사실을, 자기는 뒷 짐 지고 나서지 않으면서 말로만 잘난 척하는 꼴이 거슬렸다. 
그 전에는 그림 그리는 친구가 아주 저질스런 어투의 야유를 페북에 올려놓았다
둘 다 2-30년이나 된 오랜 지기지만, 사정없이 페친에서 잘라버렸다.
무슨 특권가진 대법관 방망이 휘두르듯...






술 취해 늘어져 자는데, 정영신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북촌에서 냉면이나 먹자는데, 배고픈 줄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
하루 종일 밥은 안 먹고 술만 마셨더니 속이 쓰려 죽을 지경이었다.






집 나서기가 무섭게 장경호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인사동 ‘유목민’으로 술 한 잔 하러 오라는 것이다.
냉면은 못 먹어도 콩국수라도 먹자며 정영신씨를 꼬셨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술 취해 저지른 만행이 마음에 걸렸다.
왜 이리 아무것도 아닌 일에 마음이 각박해 졌을까하는 자책이었다.
몇 년 전, 페북에 들어오며 더 그런 것 같았다.
정영신씨 말처럼, 중독되었다고 생각하니 남새 서럽다






이제 마약 같은 페북을 끊는 일만 남았다.
끊는 일이야 간단하겠지만, ‘티브이도 신문도 보지 않으니
세상과 소통은 어떻게 해야 할까?‘ 변명 같은 고민도 한다.






‘유목민’에 도착하니 장경호씨와 전활철씨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이 목구멍에 들어가기 시작하니 깬 술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렸다.
난, 술 취하면 농담을 자주 하는 편이지만, 장경호씨는 질색을 한다.
술 마시는 코드가 잘 맞지 않는데도 자주 어울리는 것 보면 신기하다.
술자리에서 시시껄렁한 소리나 하며 웃어야지,
거룩한 표정 짖고 앉았으면 뭐하냐? 는 게 내 생각이다.






술에 녹초되지 않으려고 부지런을 떨어댔다.
그 날 인사동 '리갤러리'에서 김용문, 윤진섭 도판화 2인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용문씨가 있다는 술집 ‘시가연’에도 들리고,
인사동 거리에서 노는 외국인 노래 장단에 맞추어 엉덩이도 흔들어댔다.
소울이 있는 친구들이었다.
가게에서 손님 받는 전활철씨까지 데려가 함께 흔들었다.






“노세노세 늙어 노세, 죽고 나면 못 노나니...”

사진, 글 / 조문호





























산과 나무의 단상‘展 오는 13일까지 ‘나무화랑’에서 열려... 
2018년 02월 05일 (월) 14:54:18 조문호 사진가 press@sctoday.co.kr  


인사동에서 도예가 김용문의 도판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산과 나무의 단상‘이란 제목이 붙여진 도판화전은
오랜만에 보는 그의 귀국 전시로, 새로운 수묵드로잉까지 보여주며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김용문 하면 막사발이 먼저 떠오르고, 막사발 하면 머리말아 올린 김용문의 상투가 연상된다.




▲ 도예가 김용문씨, (사진=조문호)


가히 전설적인 장인이다. 젊은 시절부터 옹기에 매료되어 다양한 옹기 작품을 탄생시켰다.

그의 예술세계는 막사발을 만드는 도예에 한정되지 않았고 퍼포먼스에서 글과 그림까지 전방위 작가다.

그러한 다양한 작업들도 결국은 막사발을 위한 부대작업에 불과할 것이다. 오죽하면 ‘나는 막사발이다’라는 책까지 펴냈겠는가?


토우와 도자기로 삶의 애환을 담은 퍼포먼스도 여럿 있었다. 그를 처음 알게 된 것도 단양 충주댐에서 가진 ‘수장제’였다.

84년 단양 하방리를 지켜 온 좌청룡과 우백호, 전주작, 후현무의 네 풍수 동물을 토우로 빗거나 조각해

많은 이주민들이 울부짖는 통곡에 장단 맞춰 댐 속으로 잠기게 하는 퍼포먼스를 한 것이다.


최고의 퍼포먼스라 메스컴에서도 일제히 나발 불었다. 그리고 87년 대학로에서 가진 ‘옹관장전’도 파격적이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화가 강용대씨가 상여에 실려 가는 모습,

큰 칼로 옹기 작품을 내려치는 무속인 무세중씨의 모습은 아직까지 기억에 생생하다.


인사동에서 한 전시도 여럿 기억난다. 인사동 거리에 좌판 깔아놓고, 푼돈 받고 토우 파는 전시에서부터,

인사동에서 제일 넓은 ‘아라아트’ 전시장 바닥에 수천 개의 막사발을 펼쳐 전시를 하는 등 특이한 전시가 많았다.



33x33cm 도판2 2017


그는 홍대미대 공예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후 토속적인 막사발에 승부를 걸고 활동 해 온 작가로,

지금은 터키 국립 하제테페대학교 도예과 초빙교수로 떠난 지가 8년째라 자주 볼 수 없는 작가다.


경기도 오산, 충청도 괴산, 전라도 삼례 등지로 막사발 박물관을 옮겨가며 ‘세계막사발축제’를 36년째 이끌어 왔다.

또한 세계막사발심포지엄 19회, 국내외에서 가진 개인전도 43회나 개최했다.


투박한 토속적 미감의 막사발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구축한 도예가 김용문의 도판(陶板) 그림전은

산과 나무를 대상으로 한 추상화인데,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예술혼을 담아냈다.



67x67cm 화선지3 2017


우리 문화의 속내가 들어다 보이는 대개의 작품들은 지두문(指頭紋) 기법으로 이루어졌다.

지두문(指頭紋)이란 유약이 마르기 전 빠른 손가락 놀림으로 풀, 나무 등의 문양을 그려 넣는 기법인데,

손가락이 스쳐간 자국들은 우리 선조들의 멋이고 아름다움이다.


대개의 지두화(指頭畵)가 둥근 접시나 정사각형 도판 형태로 이루어지는데,

보통 지름 25cm정도의 작은 작품서부터 지름 70cm가 넘는 대형 작품 등 다양한 크기로 제작된다.


이번에 처음 선보인 수묵드로잉전은 김용문씨의 또 다른 미적영역 확장이었다.

다들 자기 영역 밖의 작업을 하다보면 다소 어설퍼 보일 때가 더러 있으나, 거침없이 그려낸 그의 솜씨는 달랐다.

이는 막사발에 길들여진 원숙한 솜씨와 오랜 세월 몸에 베인 지두문 화법이 그대로 화폭에 옮겨 진 것이니,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88x58,5cm 화선지7 2017

67x67cm 화선지1  2017


주로 먹과 안료, 붓과 지두문으로 표현한 드로잉은 때로는 힘이 솟는 박진감이 넘치고

때로는 막사발 질감처럼 투박하거나 거칠도록 자유롭게 넘실댄다. 여지 것 보아 온 수묵화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것 같은 폭발력을 가진 작품이 있는가 하면,

전형적인 우리 민족의 미감을 드러낸 인물상에서는 마치 자애로운 불상을 닮은 듯 편안하다.



88x58,5cm 화선지4 2017


어떤 작품은 난을 치듯 나무나 잡초를 그리기도 했는데,

흥선대원군의 난이 여인네의 여림이라면, 김용문의 난은 남정네의 투박함으로 말할 수 있겠다.


지난 31일 가진 개막식에서 보여 준 강만홍교수의 퍼포먼스도 인상적이었다.

마치 도공들의 원혼을 불러 모우는 것 같은 동작으로 작품에 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이 전시는 2월 13일까지 ‘나무화랑’(02-722-7760)에서 열린다.







  





해가 바뀔 때마다 원로사진가 한정식선생께서 마련하는 신년 오찬회가 인사동에서 열린다.

십년이 넘었건만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는데다, 매번 밥 값을 한정식선생님이 낸다는 것이 송구스럽다.






매년 1월에 치루어졌으나, 올 해는 한정식선생 사모님께서 위급한 상황이 생겨 어렵사리 자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지난 년 말, 폐렴으로 입원하신 사모님께서 이틀 만에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진단이 나왔다는 것이다.

의사인 며느리의 응급대처로 삼성병원 중환자실로 옮겼는데, 숨을 거둔 분을 기적적으로 살려 놓았다는 것이다.

최고의 의술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는 사람도 알아보고, 말도 알아들어, 한 숨 돌렸기에 자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옛 말이 생각난다.





지난 2일 정오무렵, 인사동 ‘수연’에서 가진 모임에는 한정식선생을 비롯하여 김생수, 이규상, 엄상빈, 김보섭, 이재준,

최경자, 정영신씨 등 아홉 분이 함께했다. 그 날 전민조씨는 집안에 응급환자가 생겨 모임을 잊어버렸다고 했다.





김기찬선생의 미망인이신 최경자씨는 요즘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아 바쁘다며 즐거운 비명을 질러댔다.

그 날의 화제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옛날이야기가 많았다.
주로 정식과 생수 두 분께서 배고팠던 시절의 말씀을 하셨는데, 이름자로 보면 다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된다.






휴지가 귀한 시절이라 신문지를 잘라 화장실에 걸어 둘 땐데, 한 번은 화장실에 갔더니 이태준선생 소설책이 달려 있었다고 한다.

책도 마음대로 사 볼 수 없는 시절이라 가져가서 감명 깊게 읽었다며, 화장실습득 1호로 아직까지 보관하고 있다고 하셨다.






디지털카메라 기능에 대해 해박하신 김생수씨는 최경자씨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었는데,

단종된 NIKON Coolpix P310카메라를 구할 수 없냐고 여쭈어 보았다.

지난 년 말, 노숙하는 이종민씨와 술 마시다 도둑맞은 카메라인데, 기능도 뛰어 나지만 손에 익은 카메라였다.

컴펙트카메라가 없으니 사진을 못 찍을 경우가 종종 생겨 여러 번 카메라점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가져가 팔 수도 없는 고물카메라이기도 했지만, 중고를 사도 몇 만원에 불과할 것이라고 아쉬워했더니,

엄상빈씨가 인터넷 중고시장에 알아보면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대뜸, 최경자씨가 오만원을 내 놓으며 좀 구해주라고 부탁하는 통해, 엄상빈씨가 짐을 떠안게 된 것이다.






염치없지만, 그 카메라를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길이 열렸는데, 뒤늦게 알아보니 중고가격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카메라점을 잘 아는 후배 사진가 마동욱씨 에게 한 번 알아보라고 부탁한 모양인데,

오찬 자리에도 없었던 마동욱씨 까지 카메라 구하는 일에 개입하게 된 것이다.

결국은 마동욱씨가 십만원, 엄상빈씨가 오만원, 정영신씨가 오만원을 보태어, 25만원에 그 카메라를 구해 준 것이다.





아무튼 한정식선생의 신년오찬회 덕에 반가운 분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도 가졌지만,

한 달동안 고민하던 숙제가 해결된 고마운 자리였다.






이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 카메라로 사진이나 많이 찍어드렸으면 좋을텐데,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좋은 사진 찍을 때마다 도움주신 분들의 고마운 마음을 세길 작정이다,






오찬회가 끝난 후, 엄상빈, 이규상, 김보섭, 이재준씨와 함께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김용문 도판화전에 들려 작품을 감상하는 시간도 가졌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도예가 김용문씨의 도판화 전이 오는 13일까지 열리고 있다.

‘산과 나무의 단상‘이란 제목이 붙여진 도판화전은 오랜만에 만나는 그의 귀국 전시로,

새로운 수묵드로잉까지 보여 줘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김용문 하면 막사발이 먼저 떠오르고, 막사발 하면 머리말아 올린 김용문의 상투가 연상된다.
가히 전설적인 장인이다. 젊은 시절부터 옹기에 매료되어 다양한 옹기 작품을 탄생시켰다.

그의 예술세계는 막사발을 만드는 도예에 한정되지 않았고 퍼포먼스에서 글과 그림까지 전방위 작가다.

그러한 다양한 작업들도 결국은 막사발을 위한 부대작업에 불과할 것이다.

오죽하면 ‘나는 막사발이다’라는 책까지 펴냈겠는가?






토우와 도자기로 삶의 애환을 담은 퍼포먼스도 여럿 있었다.

그를 처음 알게 된 것도 단양 충주댐에서 가진 ‘수장제’였다.

84년 단양 하방리를 지켜 온 좌청룡과 우백호, 전주작, 후현무의 네 풍수 동물을 토우로 빗거나 조각해

많은 이주민들이 울부짖는 통곡에 장단 맞춰 댐 속으로 잠기게 하는 퍼포먼스를 한 것이다.

최고의 퍼포먼스라 메스컴에서도 일제히 나발 불었다.





그리고 87년 대학로에서 가진 ‘옹관장전’도 파격적이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화가 강용대씨가 상여에 실려 가는 모습,

큰 칼로 옹기 작품을 내려치는 무속인 무세중씨의 모습은 아직까지 기억에 생생하다.






인사동에서 가진 전시도 여럿 기억난다.

인사동 거리에 좌판 깔아놓고, 푼돈 받고 토우 파는 전시에서부터,

인사동에서 제일 넓은 ‘아라아트’ 전시장 바닥에 수천 개의 막사발을 펼쳐 전시를 하는 등 특이한 전시가 많았다.






그는 홍대미대 공예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후 토속적인 막사발에 승부를 걸고 활동 해 왔는데,

터키 국립 하제테페대학교 도예과 초빙교수로 떠난 지가 8년째라 최근에는 자주 볼 수 없는 작가다.

경기도 오산, 충청도 괴산, 전라도 삼례 등지로 막사발 박물관을 옮겨가며 ‘세계막사발축제’를 36년째 이끌어 왔다.

또한 세계막사발심포지엄 19회, 국내외에서 가진 개인전도 43회나 개최했다.






투박한 토속적 미감의 막사발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구축한 도예가 김용문의 도판(陶板) 그림전은

산과 나무를 대상으로 한 추상화인데,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예술혼을 담아냈다.






우리 문화의 속내가 들어다 보이는 대개의 작품들은 지두문(指頭紋) 기법으로 이루어졌다.

지두문(指頭紋)이란 유약이 마르기 전 빠른 손가락 놀림으로 풀, 나무 등의 문양을 그려 넣는 기법인데,

손가락이 스쳐간 자국들은 우리 선조들의 멋이고 아름다움이다.
대개의 지두화(指頭畵)가 둥근 접시나 정사각형 도판 형태로 이루어지는데,

보통 지름 25cm정도의 작은 작품서부터 지름 70cm가 넘는 대형 작품 등 다양한 크기로 제작된다.






이번에 처음 선보인 수묵드로잉전은 김용문씨의 또 다른 미적영역 확장이었다.

다들 자기 영역 밖의 작업을 하다보면 다소 어설퍼 보일 때가 더러 있으나, 거침없이 그려낸 그의 솜씨는 달랐다.

이는 막사발에 길들여진 원숙한 솜씨와 오랜 세월 몸에 베인 지두문 화법이 그대로 화폭에 옮겨 진 것이니,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로 먹과 안료, 붓과 지두문으로 표현한 드로잉은 때로는 힘이 솟는 박진감으로 넘치고

때로는 막사발 질감처럼 투박하거나 거칠게 자유롭게 넘실댄다. 여지 것 보아 온 수묵화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것 같은 폭발력을 가진 작품이 있는가 하면,

전형적인 우리 민족의 미감을 드러낸 인물상에서는 마치 자애로운 불상을 닮은 듯 편안하다.

어떤 작품은 난을 치듯 나무나 잡초를 그리기도 했는데,

흥선대원군의 난이 여인네의 여림이라면, 김용문의 난은 남정네의 투박함으로 말할 수 있겠다.






지난 31일 가진 개막식에서 보여 준 강만홍교수의 퍼포먼스도 인상적이었다.

마치 도공들의 원혼을 불러 모우는 것 같은 동작으로 작품에 기를 불어넣었다.

작가 김용문씨를 비롯하여 김진하, 조명환, 김진홍, 안창홍, 조신호, 김억, 장경호, 손기환, 김구, 채현국, 이인섭,

조해인, 이명희. 공윤희, 전인경, 편근희, 이회종, 김수길, 유진오, 임경일씨등 많은 분들이 함께했다.




‘유목민’에서 가진 뒤풀이에서는 다들 얼마나 퍼 마셨는지, 술집에 술이 부족할 정도였다.

채현국선생께서 모자를 벗어주며 술값 걷어 라는 명령에 자존심하나로 버티는 장경호씨가 졸지에 모자 돌리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어렵사리 걷었으나 고작 20만원 남짓이라는데, 모자라는 50만원은 어쩌지?

여지 것 술값이 정산 되지 않고 있다는데...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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