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낳은 의인 방동규선생의 미수연이

지난23일 정오 무렵, 조계사 옆 '은성한정식'에서 열렸다.

 

지난해 통일뉴스창간 21주년을 맞은 시상식에서

유튜브 채널의 첫발을 떼게 한 방배추 유튜브팀이 특별공로상을 수상함에 따라, 

'통일뉴스'에서 방동규선생 미수연을 마련한 것 같았다.

 

올해로 88세를 맞이한 방동규선생 미수연에는 사모님 이신자여사,

딸 방그레와 방시레 등 가족을 비롯하여 이계환, 구중서, 염무웅, 김승환, 백낙청,

정지창, 유인태, 주재환, 신학철, 김정헌, 민정기, 명진스님, 김명성, 최원일, 임진택,

장순향, 장봉숙, 정영신, 김지영, 채원희, 경복궁 재직동료 등 친구와 후배 

30여명이 참석하여 선생의 생신을 축하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소리꾼 임진택씨가 농부가와 사철가를 부르자

춤꾼 장순향씨가 나서서 너울 춤을 추는 등, 잔치가 흥겨웠다.

 

방동규 선생께서는 어린이들이 부르는 동요를 불러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으나,

사모님 이신자여사의 노래솜씨는 보통이 아니었다.

 

아마 젊은 시절 성악가로 활동하셨는지,

아직까지 프로 못지않은 훌륭한 솜씨를 보여주었다.

 

명진스님은 스님답지 않게 정태춘의 '떠나가는 배'를 부르기도 했다.

 

미수연에 참석한 분들이 차례대로 축하말씀이나 선생의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어찌나 기구한 사연이 많은지, 이야기 듣느라 음식을 먹지 못할 지경이었다.

 

재야운동가 고 백기완선생, 소설가 황석영씨와 더불어 조선의 삼대 구라로 불리는

방동규선생은 입심뿐 아니라 주먹도 보통주먹이 아니다.

 

되지 못한 세상에서는 / 꼭 엉뚱하기는 / 천장에 매달린 / 대들보 같은 사람이 있어야 했다 /

힘깨나 쓰지만 힘자랑보다 / 입심 좋아 / 그 입심에 술자리 눈과 귀 집중하다가 /

술자리 입들 짝 벌어져 / / 와 웃음 터진다.”

 

20여년 전에 고은 시인의 '만인보'에서 방동규선생을 묘사한 시다.

땅에 뿌리 박고 천장을 받치고 있어야 할 대들보가 천장에 매달린 형국이라니,

방선생의 인생이 그만큼 기묘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방선생은 1935년 황해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48년 월남하여 서울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며 시라소니 이후 최고의 주먹으로 불렸고,

튼실한 체력을 바탕으로 체육특기생으로 홍익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백기완, 이부영, 김태홍, 구중서선생 등 수많은

재야세력과 교분을 쌓아 지난한 민주화 현장을 지켜본 목격자다.

 

광화문 촛불집회도 빠지지 않았지만, 아직도 투쟁 현장에서 선생을 종종 뵐 수 있다.

그러한 몸사리지 않는 투쟁정신에 어찌 고난이 따르지 않을소냐?

 

재야인사들과 접촉한다는 이유로 간첩 혐의로 복역하기도 했고,

86년에는 지 사건에 휘말린 김태홍 전 의원을 숨겨줘, 고문기술자에게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그리고 일에는 귀천이 없다는 듯 이일 저일 가리지 않는다.

서른이 되던 해에는 파독 광부생활을 했고, 4년여 파리에서 유랑생활도 했다.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고급양장점 살롱드방을 운영했고

73년에는 강원도 철원의 노느메기밭에서 공동체생활의 꿈을 이뤘다.

 

79년부터 2년 동안 중동 아랍에미리트에서 근무한 적도 있었다.

 91년에는 서해화성 CEO로 취임했고, 94년에는 중국공장 대표이사로 활동했다.

2001년에는 헬스클럽 강사로 변신했고, 경복궁 관람안내 지도위원으로도 일했다.

 

최고의 자리에서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안 해본 일이없다.

얼마 전에는 서울시장배 보디빌딩 대회에 최고령자로 참가해 상을 받았는데,

구순을 눈앞에 둔 지금까지 꾸준한 근육운동으로 몸 관리를 하신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은 16년 전 선생께서 펴 내신

'배추가 돌아왔다"[전2권]에 실렸는데, 이름보다 방배추가 더 잘알려진 이유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직까지 일손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몇 푼되지 않는 돈을 벌기위해 가내수공업 잔업까지 하신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을 자격도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진정한 어른이 없는 시대가 아니던가?

정도를 보여주는 어른이 귀한 세상이라

젊은이들이 나쁜 짓을 해도 다들 못 본척 몸을 사리는데,

선생께서는 절대 그냥 두고 보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 지병으로 운신을 못하거나 치매에 걸려 정신없는 현실도 서글프지만,

그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정정한 노인들의 추함이다.

 

나이가 들수록 심해지는 아집과 독선, 물질과 허명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집착 등은 차라리 치매가 나을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늙어감을 추잡하게 만든다.

 

그런 것으로 부터 훌쩍 벗어난 분이 바로 방동규선생인 것이다.

연세와 상관없이 소년처럼 무구하고 신선처럼 가벼워 보이기 까지 한다.

탐욕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어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던가?

 

겸손하기 이를데 없는 선생의 답사도 재미있었다.

"난,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니다. 어영 부영 열심히 살았다:"

 

팔팔하신 방동규 선생님의 미수연을 축하하며 만수무강을 빕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이 사진은 누가 찍은 사진인지 모르지만, 장순향씨 페북에 있는 사진을 옮겨 트리밍했다.

이날 방동규선생 미수연은 아들 선거사무실 개소식과 겹쳐

인사만 드리고 갈 작정이었으나, 이야기를 듣다보니 금새 두시간이 지나버렸다.

잔치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떠 마지막 기념사진을 찍지 못했는데,

마침 다른 분이 찍은 사진이 있었다. 양해를 구하지 못해 죄송하다. 

2021.10.1

지난 28일은 많은 화가들이 방문해 주셨다.

원주에서 김진열씨가 올라와 김진하, 이태호, 김정헌씨가 모여 역적모의 하는 ‘이모집’으로 안내했다.

 

그 자리는 김수영시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그림전을 협의하는 오찬 자리였다.

‘흐린 세상 건너기’로 건너가 차 한잔하고 전시장에 돌아오니, 사진가 최정균씨가 와 계셨다.

 

이 분은 나와 동갑인데 무슨 비결이 있는지, 나보다 10년은 젊어 보인다.

그리고 전시장 올 때마다 봉투를 내 놓으며, 좋은 전시를 어찌 그냥 볼 수 있냐고 하신다.

그 보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뒤이어 류연복, 박진화, 손기환, 이인철, 정복수, 박문종씨 등 화가들이 전시장을 방문해 주셨다.

 

그날은 학고재에서 개막된 박영균의 ‘보라색 언덕 너머’와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정비파의 ‘한라에서 백두까지’ 목판화 전시까지 겹쳐

겸사겸사 서울 나들이를 하신 것 같은데, 다들 그리웠던 얼굴이었다.

 

문 닫은 전시장에서 숨겨 둔 와인으로 마시는 술맛은 더 좋았다.

발동 걸린 술자리가 ‘사랑채’로 이어졌는데,

술안주로 내놓은 나물에 취했는지 한 사람 한 사람 쓰러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김진열씨가 어지럽다며 일어나더니, 류연복, 이인철씨까지 다락방에 더러 누웠다.

 

화단의 술 판을 휩쓸던 역전의 용사들이 차례대로 무너진 사건은 오랫동안 구설수에 오를 것이 틀림없다.

그 와중에 정복수씨는 내 초상화까지 그렸는데, 마치 지명수배된 범죄자 형상이었다.

 

그 다음 날인 29일에는 일찍부터 구중서선생을 비롯하여 장봉숙, 서정란 시인이 오셨다.

어려운 걸음을 하신 구중서 선생께서 식사하러 가자는데, 어찌 나 몰라라 하겠는가?

 

더구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나온데다 전시장에서 만나기로 한 선약까지 있었다.

대전의 이석필씨에게 연락받은 김문호씨가 먼저 전시장으로 올라왔지만,

잠시 기다리게 하고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두 분 식사하는 자리에 끼어 술만 홀짝홀짝 마셔야 했다.

그런데, 밥 값 내려고 따라 나섰는데 구중서 선생께서 계산해 버렸다.

그렇다면 차라도 대접해야 하지만 기다리는 사람이 마음에 걸려 찻집은 따라갈 수 없었다.

그나저나 술을 급하게 마셨더니 일찍부터 취해버렸다.

 

헐떡이며 4층까지 올라갔는데, 다들 식사하러 가고 없었다.

‘마중’에 갔다던 이석필씨와 김문호씨는 간판을 잘못 보았다며 개성만두집에 앉아 있었다.

 

이차로 자리 잡은 ‘유목민’ 골목에서는 조명환, 기국서, 장 춘씨가 합석했고,

김기덕, 유진오, 김발렌티노도 만났다.

 

30일엔 사진가 하재은씨를 비롯하여 김문경, 윤현선, 김석철씨가 찾아오셨다.

운현선씨가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 동영상을 만들어 보여 주는데, 너무 멋지더라.

‘유목민’ 골목에서는 사진가 권양수, 박윤호씨를 만났는데, 외국에 나갔던 안애경씨도 오셨다.

 

뒤늦게는 화가 강지현, 이현숙씨와 어울려 술 한잔했다.

강지현씨는 이현숙씨 초상화를 그려 오셨더라. 다들 페이스북에서 가까워진 사이 같았다.

 

노재학, 임경일씨가 차례대로 오가기도 했고, 김이하 이승철씨는 맞은 편에 자리 잡았다.

 

이틀 만에 올리던 보고서가 삼일만에 올리게 된것은

술로 점차 기력이 쇠진해가는 징표이오니 널리 양해해 주시길 바란다.

아무튼 전시장을 찾아 주신 많은 분에게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 아리랑'을 노래한 원로시인 강민선생께서 지난 22일 오전 6시 55분 먼 길을 떠나셨다.
이제 천국에 잘 도착하여 사랑하는 이국자선생님도 만나고,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 신봉승, 심우성선생 등 먼저 가신 친구들 만나
인사동 이야기들 하시느라 바쁠 것이다.




 선생님!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은 틀린 말이지 예?

 그 곳은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가 있는 차별의 세상도 아니고요.

설사 차별이 있다 해도 집사님 빽으로 지옥에 내치지는 않겠지요.

머지않아 선생님 좋아하시는 복분자술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선생님 가신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눈물이 말랐네요.

고마웠다는 인사도. 먼저 떠나 섭섭하다는 원망도,

모두 바람에 날아 가 버렸습니다.


선생님! 사람 사는 게 바람처럼 이렇게 가벼운 것입니까?

요즘 부쩍 눈물이 자주 흐르는 걸 보니, 나도 늙었나봅니다.

후회가 더 많은 세월이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이 계시지 않는 인사동은 불 꺼진 등불입니다.

누가 선생님처럼 가슴 아파하며 골목골목을 찿겠습니까?

외로운 친구들과 사랑하는 제자들 불러내어 곰탕 건대기 건져놓고

소주 잔 부딪히는 그런 시간을 어찌 만나겠습니까?

또, 김승환선생과 방동규선생은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선생님께서 인사동을 방황하던, 골목골목의 가게들이 생각납니다.

단골로 드나드셨던 나주곰탕을 비롯하여 귀천’, ‘인사동 사람들’, '여자만'

포도나무집’, ‘유목민어디를 가도 선생님을 뵐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막막합니다.



선생님의 시에 대한 지조를 사랑했고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을 사랑했습니다.

  

 


선생님은 가셨지만, 선생님의 노래 인사동 아리랑은 영원할 것입니다.

주인 바뀐 황량한 인사동 골목 어디에선가 선생님의 시가 흘러나올 것이다.

선생님의 슬픈 인사동 노래가...


 

그동안 미친 망둥이처럼 날 뛰는 나를 보며 마음은 또 얼마나 졸였겠습니까?

부디 용서하십시오.

돈에 눈이 멀어 인간이기를 포기한 더러운 세상, 어찌 미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미안하고 미안합니다.


 

선생님을 잊을 수 없는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칩니다.

전시 사진 들고 동오리 찾았을 때 일입니다.

그 날 선생님 내외분의 행복한 모습은 잊혀지지가 않네요.

밥이라도 먹고 가라며 기어이 끌어 앉혔는데,

이국자 선생님께서 끓어주신 된장국은 콧등이 시리도록 맛있었습니다.

문 앞마당에 흐드러지게 핀 목련은 왜 그리 슬퍼 보이는지,

어쩌면 행복이란 것 자체가 슬픈 것일까요


 

 

그리고 천상병선생 20주기 맞았을 때 일입니다.

인사동 봄 소풍 잔치 때도 오직 선생님만 걱정에 걱정을 하셨습니다.

여기 저기 구걸하여 만들어 준 그 돈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말씀은 없지만, 그 따뜻한 마음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돌아 가실 때마다 선생님 뒷모습이 얼마나 슬퍼 보이는지,

아마 선생님은 속울음을 삼키고 계셨을 것입니다.


 

이제 모든 것 잊으시고 편안하게 잠드십시오.


 

못난 조문호가 큰 절 올립니다.


 

 강민 선생의 장례식은 지난22일부터 24일까지 분당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렸다.

국제 PEN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 한국작가회의에서 주관한 문인장으로 열렸는데,

824일 오전 930분 분당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추모식도 열었다.

8241030분에 발인하여 용인, ‘양주 장충동산에 안장되었다.




 

지난 23일 오후 4시경 정영신씨와 분당 장례식장을 찾았다.

입구에서 담배 피우던 김명성씨와 김상현, 김상윤, 전태수씨를 만났는데.

장례식장에는 정승재, 조준영, 서정란, 김가배, 이도연, 김이하, 정복수, 전활철, 노광래,

서정춘씨가 있었고 뒤늦게 구중서선생님도 오셨다.




- 강민 시인이 병상에서 남긴 마지막 시-  


<이승의 간이역>

내 떠나야 할
인생의 간이역은
화려하면서도 소박한
꽃밭이다





































 


1933년 서울에서 태어 난 강민 시인은 1962자유문학으로 등단해 시집 물은 하나 되어 흐르네’,

 ‘기다림에도 색깔이 있나보다’, ‘미로(迷路)에서’, ‘외포리의 갈매기와 공동시화집 , 파도, 세월’,

시선집 백두에 머리를 두고를 펴냈다 공동 산문집 우리는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도 있다.

전쟁과 분단, 독재로 이어진 현대사를 몸소 체험하며 삶의 애환과 고통스러운 저항의 노래를 불렀다.

시 동인지 현실과 드라마 동인 네오 드라마에도 참여했다.

고인은 학원을 비롯해 주부생활편집국장, 금성출판사 상무이사 등 출판계에 몸담았고

많은 문인과 교류해 걸어 다니는 한국 문단사로 불렸다.

윤동주문학상, 동국문학인상, 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어저께 인사동 터줏대감 강민 선생의 운명이 임박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니 방에 틀어박혀 있을 수 없었다.

선생께서 자주 들리시며 친구들을 불러 모았던 인사동 '나주곰탕' 앞에서 한 참을 서성이며 선생을 생각했다.



사실, 인사동 인사동 노래를 부르며 들락거리지만, 공간의 추억보다는 사람의 추억이다.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선생은 오래전에 전설이 되었지만, 김동수, 이계익, 신봉승, 심우성선생께서 차례로 떠나가셨고,

마지막 터줏대감으로 여겼던 강민시인 조차 오늘 내일하고 있으니, 이제 인사동도 막 내려야 하는 것인가?

아직 구중서, 김승환, 민 영, 방동규. 신경림, 황명걸선생 등 인사동을 사랑하는 원로들이 계시지만,

강민선생이 계시지 않으면 뵐 수는 있을까?


 

80년대 중반 '나주곰탕'집 자리는 망각 강이라는 술집 ‘레테’가 있던 자리다.

소설가 배평모씨를 그 곳에서 처음 만나 이틀 동안 쉬지않고 마셨던 곳이기도 하다.

그 술집은 이점숙씨가 운영했는데, 펑퍼짐한 엉덩이를 가진 미색도 죽이지만,

숨이 끊어질듯 애절하게 부르는 춘향가의  ‘갈까보다’라는 소리에 숨이 턱턱 막힌다. 



"갈까보다, 갈까보다. 님 따라서 갈까보다.

천 리라도 따라가고, 만 리라도 갈까보다.

바람도 쉬여 넘고, 구름도 쉬여 넘는..." 

강민 선생님 앞에서 이 소리 한 자락 불러 드렸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사실, 배평모씨는 친구 좋아 날밤 까며 이틀 동안 술을 마셨다지만, 그 여인이 없었다면 어림없었다.

가끔 임춘원 여사가 출몰하여 불러주는 뚝뚝 떨어지는 ‘목련’도 기가 막혔다.

그 때부터 인사동 예술가들 술값 뒷바라지 한 김명성씨는 다 털어먹은 지금까지 술값 대느라 바쁘다.



'레테'가 있던 윗층에는 박중식시인이 운영한 '툇마루'가 생겼지만, 

옆 건물 옥탑방에 내가 사용한 '카메라워크'가 있어 자주 들락거릴 수 밖에 없는 골목이었다. 

강민선생을 '나주곰탕'에서 그리워하며, 망각의 강에서 '갈까보다'를 듣고 싶었다.





그외 인사동을 추억할 만한 장소는 찻집'귀천'과 실비대학으로 불리던 '실비집'이었다.

'귀천'에서 천상병시인에게 저승가는 노자돈을 바치거나, 민병산선생의 서예글씨를 만날 기회가 많았다.

운이 좋은 날에는 '한국일보' 사진기자 김종구를 만나 진토닉까지 얻어 마실 수 있었지만...




그리고 '실비집'은 가난한 인사동 예술가의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인심이 후해 술값이 싸니, 누구든 막걸리 한 병 값만 있으면 갈 수 있고, 외상까지 통한다.
안주를 시키지 않아도 김치나 콩나물을 내주지만, 버스가 끊겨 자는척하는 날에는 이튿날 해장국까지 얻어 먹을수 있었다. 
이북이 고향인 주모 아닌 실비대학 총장님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없다. 



또 한가지 잊을 수 없는 일은 '실비집'에서 가진 결혼식 뒤풀이였다.

대학로에서 혼례식을 끝냈으면 신혼여행이나 갈것이지, 실비집에 자리를 왜 잡았는지 모르겠다. 
그 당시 '87민주항쟁' 개인전을 말리는 이사장이 싫어, '사진협회를 그만두고 박한웅씨를 밀어넣었는데.

그 날 뒤풀이에서 사고를 치고 말았다.  삥땅 뜯는 땡초 적음을 대머리로 들이 받아 앞니를 부러트린 것이다.
뒤 이어 술 취한 내가 옷을 벗고 난리를 피웠으니, 신부를 비롯한 신부 우인들까지 질겁해 도망갔다.




잔치는 완전 개판 되었으나, 그 이튿 날이 더 문제였다.

적음의 치료비를 걱정한 화가 강용대가 부추겨, 출근하는 박한웅을 잡아가게 한 것이다.

새 직장에 나간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잘 못하면 목 잘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배평모씨와 둘이서 적음을 찾아가 고소를 취하하라고 얼마나 사정했는지, 입에서 화근내가 났다.



한참 뒤인 15년 전에 생긴 '작은 뜨락'이란 대폿집도 잊을 수 없는 공간이다.

'작은 뜨락'은 '한지추억'이란 점포로 바뀌었고, '시인통신'자리는 '古 ART'로 바뀌었더라. 

인사동 풍류객의 ‘참새 방앗간’으로 통한 이 곳은, 장사라고는 처음한 노인자씨가 운영한 곳이다.

원래 건물 옆에 버려진 골목을 차양으로 가리고, 건물 벽에 의지해 폭 1미터에 길이 5미터 남짓한 공간을 마련했다.

폭이 좁아 일반 탁자를 놓을 수가 없어 벽에 긴 나무판대기를 붙이고, 바닥에는 엉덩이를 걸칠 만한 간이의자를 놓았다.



이 집에서 먹고 마시기 위해서는 한껏 몸을 웅크린 채, 본의 아니게 면벽을 해야 한다.

그런 술집이 인사동풍류객들의 아지트가 되었는데, 술값은 자율적으로 먹은만큼 바구니에 담고 나갔다.

자리가 없으면 그 옆 건물 이층으로 이사 온 한귀남씨의 '시인통신'에서 죽치기도 했는데,

긴 세월은 아니지만, 한 동안 인사동을 풍미했던 대폿집이 틀림 없었다.

그림쟁이들을 자주 만나는 장소는 전시장보다 뒤풀이 장소인 '부산식당'과 '사동집'이었다.



그 날 만난 아는 분으로는 30여년 동안 인사동을 오가며 기름 행상한 권경선씨와 미술판의 방랑자 성기준씨 뿐이었다.

'갤러리 가이아'에서는 사보 클라라 페트라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고,

주인이 바뀌어 수리하는 점포나, 전시가 바뀌어 디스플레이 하는 전시장들이 많았다.



고서 파는 '통문관'은 셔터 내린 날이 더 많고, 그 옆에는 거대한 흉물 하나가 꿈틀대고 있었다.
옛 민정당사 터에 긴 세월동안 눈치 보며 터를 잡아 온 호텔공사가 마무리에 접어들고 있었다.

인사동 거리 쪽에 지어놓은 건물 벽에는 장사할 사람 찾는 임대광고가 붙어 있었다.



이러다 한 세기는 커녕 반세기 전의 인사동 모습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인사동의 오랜 정체성은 오간데 없고, 이름만 있는 껍데기만 남아버렸다.




10년 전 '눈빛출판사'에서 펴낸 '인사동 이야기'사진집에도 소개된바 있지만,
현재의 인사동 명칭은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에 생겼다.

조선시대 한성부의 관인방(寬仁坊)과 대사동(大寺洞)의 가운데 자인 인(仁)과 사(寺)를 따서 불러졌다.

인사동 거리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삼청동 개천에서 시작해 청계천을 따라 형성되었다고 한다.

국가에 공훈이 있는 신하들에게 상을 내리고 공적을 보존하는 일을 맡아보던 조선시대 관아인 충훈부도 이곳에 있었다.

특히 도화원이 이곳에 있어 미술활동의 중심지가 되어 중인들이 주로 모여 살았다.




1910년대의 인사동은 소위 양반들이 몰려사는 북촌의 노른자위였다.

일제말기에서 해방직후까지 4-5개의 점포가 있었는데, 6,25후 혼란했던 사회가 안정돼 가자

일부 벼락부자와 정치인들 사이에서 골동품 붐이 일면서 골동품거리가 번창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을 겪는 동안 먹고 살기위해 집안에 가보처럼 모셔두었던 것을 인사동에 내다 팔기 시작했는데,

골동품을 똥값으로 후려 쳐, 비싸게 되팔아 부자가 된 골동품상도 많았다.

더 안타까운 일은 그렇게 수집된 상당부문의 고미술이나 골동품들이 쪽바리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그 이후 1930년대부터 인사동 길 주변에는 서적이나 고미술 관련 상가가 들어서면서 골동품 거리가 점차 형성됐다.

50년대 한국전쟁 이후에는 낙원상가 아파트 자리에 낙원 시장도 생겼다.

1970년대에는 최초의 상업 화랑인 현대 화랑이 생긴 것을 계기로 화랑들이 모여들면서 미술문화의 거리로 변신했다.

그러나 인사동엔 문화적 특성을 이용한 부동산 투자로 벼락부자가 된 사람도 속출했다.

난, 80년도 초에 인사동에 입성하여 그 이전 이야기는 노인들에게 주워 듣거나 사료에서 확인한 것이다.




1987년 인사동을 문화지구로 지정한 것은 전통문화의 보존이라는 측면에서는 좋은 일이었으나.

부동산 개발이라는 돈이 개입되며 개판이 된 것이다.

문화보다는 관광객들이 몰려들게 하여 주목받는 상권은 되었지만, 우리 전통문화는 흐지부지된 것이다.




지금의 인사동 문화지구는 인사동을 비롯하여 낙원동, 관훈동, 견지동, 경운동, 공평동을 아우르는 말인데,

동쪽으로는 운현궁 앞 삼일로, 서쪽으로 조계사 앞 우정국로, 북쪽으로 종로경찰서 앞 율곡로,

남쪽으로는 남인사마당과 종로가 붙어있다.




인사동이 전통문화의 거리로 지정되어, 한국을 상징하는 공간이자 외국인이 즐겨 찾는 명소는 되었으나, 속빙 강정일 따름이다.

문중을 지키는 종갓집 며느리처럼 명맥을 잇던 골동품 가게들이 치솟는 건물임대료에 쫒겨 대부분 장안동으로 밀려났다.

대신 커피체인점이나 옷가게 등으로 바뀌었고, 남은 것도 국적 없는 잡화상으로 변해 싸구려 관광거리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

2013년 지정된 ‘인사동문화지구 관리 변경 안’의 권장업체였던 공예품 가게는 인형이나 탈 몇 가지 진열해 둔 잡화상으로 변신한 것이다.

더욱 아쉬운 것은 수 많은 갤러리들이 인사동에 몰려 있으나, 작품 관람에는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이제 오래된 인사동 공간의 추억은 물론, 인사동의 풍류를 주도해 온 예술가들도 대부분 돌아가시거나,

살아 있어도 만나 보기 힘들어 인사동 기록을 접을 때가 된 것 같다.



10년 전 '인사동 이야기'사진집을 출판했으나, 오래전 절판되어 지금은 구할 수가 없다.

'인사동 이야기' 사진집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3년전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청량리588'사진전을 열 때 보관하고 있던 '인사동이야기' 한 권을

관객들을 위해 입구에 비치해 두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책이 사라진 것이다.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책이라 아깝기도 했지만, 어떻게 사라졌는지가 궁금해 못견디겠더라.

전시가 끝난 후 갤러리를 관리하던 공윤희씨와 CCTV를 확인해 보았는데, 깜짝 놀랄 지인이 슬쩍 가져가는 것이 아닌가.

얼마나 그 책이 갖고 싶었으면 그랬을까 싶어, 확인한 둘다 안 본 것으로 하고 영원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래도 한 권은 있어야 할 것 같아 청계천 중고서적상을 뒤져 책 구하느라 한 나절을 뺑뺑이 돈 적도 있다.




그러나 그 책이 남아 있더라도 보완할 내용이 더 많았다.

인사동 사람들이라고 내세운 115명의 예술가들도 덜 인사동 다운 사람이 많은데다, 꼭 들어가야 할 사람이 많이 빠졌다.

사진가 한정식선생의 발문에다 시인 강 민, 민 영, 신경림, 황명걸, 서정춘, 김신용, 소설가 배평모, 박인식, 민속학자 심우성씨등

37명의 문인들이 쓴 인사동 추억담에다 필자가 쓴 인사동 에피소드 열 토막까지 게재했으나,

대개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씨 세분 이야기거나 '귀천'이나 '실비집'에서 있었던 중복되는 내용이 많은데다,

정작 사료로 필요한 골동품 거래 이야기나 인사동의 중요한 증언들이 빠져 있었다.



1부는 흑백으로, 2부는 컬러로 나누어 편집할 계획이다.

천상병, 박재삼, 심우성, 이계익, 목순옥, 이호철, 김동수, 최영해, 강용대, 김종구, 김용태, 여 운, 김영수씨 등

그동안 돌아가신 분들의 사진과 오래된 인사동 사진만 흑백으로 게재하고,

10년동안 기록한 사람들과 인사동 거리풍경은 컬러로 바꾸어 제대로 된 인사동 자료집을 올해 중에 마무리할 작정이다.

관련있는 분들의 많은 자문과 도움을 바랍니다.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인사동은 이제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하나의 성지로 남게 되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수요일은 강민선생을 비롯한 인사동 터줏대감을 모시고, 
식사 대접하자는 기별을 장봉숙선생께서 보내왔다.
페북에서야 강 민선생을 간간히 뵙지만, 뵌 지가 한 달이 넘었다.





인사동 나주곰탕으로 갔더니, 문학평론가 구중서선생과 소설가 김승환선생,

사진가 정영신씨가 입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들 강 민선생을 기다렸으나, 선생께서는 이미 와 계셨다.

제일 멀리 계시는 분이 언제나 먼저 오신다.



 


자리 잡고 앉으니, 장봉숙선생께서도 오셨다.

매번 내가 꼴지로 나왔지만, 모처럼 꼴지 신세를 면한 것이다.



  정영신사진


강민선생은 귀가 어두운데다, 내가 하는 말까지 어눌해 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

방동규선생께서 보이지 않아 근황을 여쭈었는데, 구중서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연락하니, 일이 있어 못 나온다"고 했다며,배추가 없으면 재미가 없다"고 아쉬워하셨다.



 


그런데, 장봉숙선생께서 선물 하나를 내놓으셨다.

얼마 전 중국여행 때 사왔다는 이과두주였는데, 병을 보니 보통 술은 아닌 것 같았다.

강 민선생 드리려 사온 술이겠지만, 맛이라도 좀 봐야 하지 않겠나?

눈치 봐 가며 슬슬 포장을 풀었더니, 식당주인이 말했다.

오늘만 강민선생님 때문에 봐주지만, 다음엔 절대 안 됩니다.”



 


52도나 되는 독주를 낮술에 쥐약인 내가 견딜 수 있을지 걱정스러우나, 어찌 귀한 술을 마다하겠는가?

맛만 본다며 조금 받아 마셨으나, 술 맛이 슬슬 당기기 시작했다.

홀짝홀짝 마시다, 나중엔 장선생과 정영신씨가 남긴 술까지 다 마셔버렸다.



 


방동규선생이 안 계시니, 구중서선생께서 이런저런 말씀을 많이 하셨다.

김두환씨가 시라소니 앞에 무릎 꿇었던 옛 이야기를 꺼내시며,

사실은 전해지는 무용담들이 좀 부풀려진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배추가 맨주먹으로 열일곱 명이나 때려 눞혔다지만,

선생께 고백하기를 자기도 당한 적이 있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두 분이 각별히 친한 사이지만, 오래 전에는 다툰 적도 있다고 했다.

백기완과 구중서가 책 보라고 부추긴 죄로, 이것도 저것도 아닌 꼴로 살게 됐다"며,

술값은 늘 구중서선생께서 내게 하셨단다.





어느 날 인사동 실내악에서 구선생의 핀잔에 방선생께서 술값을 계산하고 먼저 일어난 것이다.

가다보니 술 값을 낼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지, 술값을 돌려 달라고 하셨다는데,

실내악 주인 김희주가 누구인가? 절대 못 돌려준다며 타박만 주었다는 것이다.





방선생께서 다방으로 올라가셨는데, 그곳에 계신 신동문시인께  "구중서와 의절하겠다는 말씀을 하셨단.

그 소리를 들은 신동문선생께서 갑자기 꿇어 앉어라며 호통을 쳤다는 것이다.

천하의 주먹이 손가락만 슬쩍 밀어도 쓰러질 비쩍 마른 시인의 말에 그냥 무릎 꿇고 앉았다는 것이다.

한참 있다 이제 일어나도 되냐고 물었더니, 좀 더 있어라 했단다.

얼마나 순진무구한 모습이냐?



 


그런 저런 이야기를 듣다보니 술이 슬슬 오르기 시작했다.

구중서선생께서 자주 가신다는 관훈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어지러웠다.

술 깨려고 인사동 주변을 돌아다니는 습관이 다시 도졌다.

길에서 까딱이를 몇 달 만에 만났지만, 술 취해 빌빌거리는게 불쌍한지 손도 벌리지 않았다.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목판대학 전시 때문에 그냥 갈 수도 없었다

다른 분들은 어디로 가셨는지 보이지도 않고, 강민선생 따라 기어 오르듯 전시장에 올라갔다.

김진하 관장과 정복수씨가 있었고 뒤 늦게는 김준권씨도 왔었는데, 전시된 작품들이 너무 좋았다.

초빙작가인 김진열, 정복수, 김진하, 문승영씨 작품은 물론, 학생들 작품도 예사롭지 않았다.

특히 이현숙씨 판화에 눈이 꽂혔다.



   

    

 

전시가 124일까지라 다음에 볼 작정으로 내려와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지러워, 강민선생께 인사도 드리지 못했다.

가까운 유목민 들어가 전활철씨께 택시 하나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어렵사리 집에 왔으면, 그냥 자빠져 자지 또 컴퓨터는 왜 켰는지 모르겠다.

누구에게 보고할 일도 없는데 말이다. 

음주운전보다 더 무서운 음주 포스팅을 기어이 하고 만 것이다.



 


그런데 희한한 꼴을 보았다. 갑자기 집채가 쓰러질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너무 불안해 기둥 사이로 돌을 집어넣기도 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소까지 지붕에 올라가 난리를 피우는 것이다.

소가 기와장을 튕기며 지붕 위를 뛰어 다니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더니 날 뛰던 소가 갑자기 땅에 떨어져 즉사한 것이다.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꿈이었다.



  

  

별 이상한 꿈을 다 꾸었다며 일어났더니, 컴퓨터가 켜져 있었다.

마우스를 당겨 보니, 음주 포스팅한 글에 댓글이 줄줄이 달려 있었다.

얼굴이 달아올라 급히 내리기는 했지만, 이미 볼 사람은 다 본 것 같았다.

속은 쓰린데다 망신살까지 뻗쳤으니,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 왜 이리 낮술에 맥을 못 추는지 모르겠다.

낮술은 애비도 몰라본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술 들어간 뱃속이 낮과 밤을 구분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그 꿈이 뜻 하는 건 뭘까?

집안에 우환이 생길 징조는 아닌지, 해몽가라도 한번 찾아 볼일이다.


다시는 낮술과 음주 포스팅을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건만, 그 버릇 개줄까 모르겠다.

 

 

사진. / 조문호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에 대한 경의”, 연남동 공간41’에서 9일부터 25일까지 열린다.

 


 

전인경씨는 만다라(Mandala) 안에서는 인간과 우주가 하나다라는 생각으로 작업을 풀어간다.  수많은 핵으로 형성된 윤회적 표현들은 순환과 회귀로 이어지며, 해와 달의 시간성을 나타내기도 한.


그녀는 캔버스 앞에 앉으면 수행자가 된다. 자신의 일상을 완전히 차단한 채, 마음의 중심을 찾아나서는 내면여행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마 무의식 세계로 빠져 들어가는 명상적 기도인지도 모른다. 보이는 것에서 부터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를 향해 덧칠해 가며 만다라의 원형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는 성신여자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만봉 스님으로 부터 4년 동안 불화를 사사받아, 불화와 단청 학습으로 자신만의 사유 세계를 갖게 되었다. 그동안 일관되게 작업해 온 만다라는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원으로 표현해 놓아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심오했다.



 

 

그런데, 10여 년 동안 일가를 이루어 펼쳐 온 만다라 작업에 변화가 찾아 온 것이다. 이번에 선보인 작품들은 뇌과학자의 신경세포 드로잉과 만다라를 결합한 뉴로 만다라연작이었는데, 부제로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에 대한 경의라 붙여 놓았다.



 

 

뉴로 만다라전은 100년 전 노벨상을 받은 신경과학의 선구자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의 드로잉을 자신의 포스트만다라와 결합하여 새로운 과학예술의 장을 열고자 시도했다. 최초로 신경세포를 관찰하고 기록한 드로잉을 토대로 8점의 오마주 작업을 했으며, 현대 뇌 과학이 밝혀낸 신경세포 이미지를 차용한 작품 4점도 발표했다.



 

 

이번 뉴로 만다라전에는 신작 12점과 함께 6점의 포스트만다라연작을 소개했는데, 5미터가 넘는 대작 슈퍼노바는 탄소의 탄생을 형상화한 것으로 만다라 연작의 전환점을 만든 작품이었다. 함께 선보인 작품들도 만다라의 우주적 세계관과 천문학을 결합한 것으로서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져 과학예술로 진화하는 전인경의 작품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전인경씨의 작업은 세포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했다고 한다. 이후 인간의 본질을 찾아가는 만다라를 통해 우주의 질서 속에 존재하는 인간 생명의 감추어진 구심점을 찾는 여정을 거쳐 온 것이다. 작년에 가진 두 번의 개인전에 이어 올해도 두 번이나 보여줄 정도로 부지런한 작가이기는 하지만 성급한 전시가 아닌가 하는 우려도 따랐다.



 

 

미학의 뇌를 번역한 심희정 미학박사는 전인경의 작업 뉴로만다라는 예술적 상상으로 그려진 신경 체계에 대한 어떤 상이다. 거대한 은하계, 자연 세계의 어떤 단면을 연상시키며, 신경체들이 이루어내는 화면은 우주 기원, 생성과 소멸, 접촉과 변형을 연상시키며 글자 그대로 수많은 차원과 관계를 말한다고 말했다.



 

 

전인경씨는 시냅스는 시냅스작용이 일어나는 것들끼리 강해지고 굵어지며, 신경 세포들이 만들어내는 세계도 관계에서 의해서 일어나고, 우리의 인간사도 만나면 헤어지는 관계에 의해 일어난다. 생로병사의 인간 세계는 신경 세포의 생장과 정지, 연결과 단절은 우주에 있는 별들의 생성과 소멸과 같다고 말했다.



 

 

전시 개막식이 열린 지난 14, 연남동에 있는 갤러리 공간41’를 찾았다.

마침 작가와의 대화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작가 전인경씨를 비롯하여 미술평론가 심희정, 이준기씨, 문학평론가 구중서 선생, 시인 조준영씨, 화가 서길헌씨 등 여러 명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성 구청장과 만봉스님 자제 이인섭선생, 큐레이터 전인미씨 김용국, 김상윤씨가 차례대로

나타나 전시된 작품들을 둘러보았다. 처음 보는 신작들과 함께 눈에 익은 작품도 더러 보였으나,

5미터가 넘는 대작 앞에서는 입이 벌어졌다.

전인경씨의 치열한 작가정신과 노력에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뒤풀이 장소에는 무세중선생을 비롯하여 김명성, 이광군씨등 많은 분들이 먼저 와 있었다

 

사진, / 조문호











































 

 









 

























안국역 6번 출구의 개구멍 같은 샛길,
벽치기 골목은 언제나 취객들로 북적댄다.
담배 피울 수 있는 골목 자리라,
골목이 주막이 되어버렸다.
담배 연기 자욱한 술 자리지만,
아무도 탓하지 않는 정겨운 풍경이다.






지난 29일은 인사동사람들의 옛 모임
‘창예헌’ 사람들이 '경복궁'에서 만찬을 가진 후,
벽치기 골목의 ‘유목민’으로 몰려온 것이다.






김명성씨를 비롯하여 방동규, 최백호, 이성, 김신용, 김혜련,
조준영, 고중록, 김용국, 오세필, 임태종, 허미자, 전인미,
이상훈, 공윤희씨 등 이십 여명이 이동하였는데,
‘유목민’에 계시던 구중서선생을 비롯하여
전활철, 서길헌, 황예숙, 정영철씨도 합류했다.






시간이 늦어 ‘유목민’으로 오신 구중서선생은
김명성씨께 선물할 붓글씨를 써 오셨더라.






유상곡수군현필지(流觴曲水群賢畢至)라고 적었는데,
여러 선비들이 어김없이 왔으니,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
그 잔이 돌아오기 전에 시 짓는 놀이나 하자는 뜻이 아니던가?
술만 취하면 시를 쓰는 김명성시인이 좋아할 내용이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술만 취하면 자기 자랑에 침이 말라 듣는 이를 곤혹스럽게하고,

어떤 이는 본인 앞에서 듣기 민망한 과분한 칭찬을 해댄다. 






자기자랑도 웃기는 짜장면이지만, 넘치는 칭찬도 불편하다.
제발 교만하지 말고, 알랑방귀 뀌지 말고 살자.
작품이 아무리 좋아도, 추하게 보인다.


배운 것 없는 거지보다 못하다.


사진, 글 / 조문호

























모처럼, 인사동 터줏대감들이 총 출동하셨다.
‘엉겅퀴 꽃’의 민영시인과 ‘한국의 아이들‘을 쓴 황명걸시인,
인사동을 노래하는 강민 시인, 문학평론가에서 서화가로 발 넓힌 구중서선생,
조선의 3대 구라 중 한 분으로 꼽히는 방배추(방동규)선생 등
인사동을 주름잡던 터줏대감들이 여럿 나오신 것이다.






암으로 투병중인 신경림시인께서 나오지 못했지만,
원로 다섯 분을 한자리에서 만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다들 양평이나 용인 등 멀리 계시기도 하지만, 이제 연세가 많아 예전 같지 않으시다. 
열 몇살이나 작은 나도 빌빌거리는데, 다들 지팡이에 의지하며 힘들게 사신다.
이젠 작정하여 모시지 않으면, 한자리 모시기 힘들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친구밖에 없다는데, 친구들 끼리 한데 뭉쳐 살수는 없을까?
별로 나눌 말씀이야 없겠지만, 얼굴만 보고 있어도 추억이 줄줄 하니 행복하지 않겠는가?
이제, 인사동 터줏대감을 모시는 경로잔치라도 자주 열었으면 좋겠다.
예전에는 ‘창예헌“이란 모임에서 모셨으나, 그마저 풍비박살 나 자주 뵐 수 없게 되었다.






이번 모임은 지난달, 영주의 신동여화백 왔을 때 갑작스레 결정된 일이다.
그 날 ‘유목민’ 술자리에서 우연히 구중서 선생을 만난 것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김명성, 조준영시인이 한 번 모시자고 제안한 것이다.
29일로 정한 것은 조준영교수의 수업 없는 날로 택한 것이다.






그것도 양평 계시는 황명걸선생을 모셔오기 위해
조준영시인이 차로 모셔 와서는 끝난 후 다시 모셔 드리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조준영시인은 차 때문에 반가운 자리에서 술 한 잔 못 마시는 징역을 살아야 하지 않는가?
저만한 제자 둔 황명걸 선생은 진짜 복 많은 분이시다. 요즘 그런 제자 없다.






29일 정오 무렵 ‘유목민’에서 오찬회를 갖기로 했으나, 갑자기 ‘툇마루’로 자리가 바뀌어 버렸다.
전활철씨는 시장까지 보아두었는데, 친구 힘들까 바 김명성씨가 바꾼 것 같았다.
그래서 ‘유목민’에서 만나 '툇마루'로 옮겨 간 것이다.
된장비빔밥과 북어찜으로 막걸리를 마셨는데, 전활철씨는 꼬불쳐 둔 중국술 한 병을 내놓았다.






그 날 마주앉은 방동규선생께서 여러 가지 충고 말씀도 주셨다.
“네가 쪽방에 들어가므로 결국 쪽방 하나가 더 늘어난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노숙자 탓도 하셨다.
방선생께서는 돈을 벌기 위해 박킹 끼우는 일을 받아 하신다고 했다.

한 개 끼우는데 3원씩이니 만개를 끼워야 삼 만원 벌지만, 손톱이 달도록 일하신다는 것이다.





맞는 말씀이지만, 노숙자들도 여러 계층이 있다.
질병이나 신체장애로 일 못하는 노숙자도 있지만, 대개가 알콜 중독자들이다.

그러니 늘 술에 취해 있는데, 스스로의 통제력을 잃은 상태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나도 서서히 노숙자에 동화되어 간가는 점이다.
그들을 알기 위해 어울리다보니, 이제 주객이 전도된 듯하다.
그래서 지금은 노숙자들과의 술자리를 가능한 줄여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뜻밖의 중국술에 이게 왠 떡이냐며 두 잔 받아 마셨는데, 슬슬 오르기 시작했다.
오후3시부터 '프레스센터'에서 열리는 김경린시인 학술심포지움 사진 찍어야 하는데, 걱정스러웠다.

술 취해 찍는 취사야 몸에 베였지만, 점잖은 분들 계시는데, 쫄랑대면 남사스럽지 않겠는가?






다들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냉커피 한 잔 얻어 마시고 일어서야 했다.
뒤늦게 페북에 올라 온 사진을 보니, 김상현씨와 전활철씨가 노래를 불러가며
흥겨운 판을 만들었는데, 나만 놀지 못해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다.






이 날 모신 다섯 선생님 외에도 많은 후배들이 나왔다.
처음 말 꺼낸 김명성, 조준영, 김상현. 전활철씨 외에도
박인식씨를 비롯하여 정영신, 장경호, 고중록, 이상훈, 김영국씨가 어떻게 알았는지 줄줄이 찾아왔다.
우짜든, 김명성씨가 잘 풀려야 이런 자리라도 자주 만들어질텐데...


부디, 선생님들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십시요.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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