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인사마당 주차장 가는 '인사11'에는 생태탕으로 유명한 부산식당이 있다.

80년도 초반부터 출입했으니, 내가 들린 요식업종 중 가장 오래된 가게가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귀천이나 사동집도 남았지만, 술과 인연이 닿는 집은 부산식당이 유일하다.

 

지금은 사동집주인인 송점순씨만 살아계실 뿐,

부산식당조성민씨나 귀천의 목순옥씨는 세상을 떠나 아들이나 조카가 운영하고 있다.

그렇지만 음식 맛은 그대로 전승되어, ‘부산식당생태탕은 애주가들의 사랑을 받아 온 술안주다.

 

그리고 밥도 언제나 새로 지은 고슬고슬한 밥을 내놓았다.

맛은 있어도 음식이 늦어 손님들의 불만과 독촉도 따랐지만,

아무리 빨리 달라고 난리를 쳐도 눈도 깜빡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작 밥이나 생태탕을 먹게 되면 모든 불만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을 어쩌랴!

 

지금은 인정 많던 부산식당주인장 조성민씨는 가고 없지만,

16년 전 인사동 사람들전시 때 찍은 초상사진만 남아 부산식당트레이드마크처럼 벽에 걸려있다.

 

지난 18일은 건축가 임태종씨로 부터 부산식당에서 만나자는 전갈을 받았다.

오후 다섯 시 무렵, 정동지 따라 갔더니 임태종씨를 비롯하여 인천의 김광원씨도 와 계셨다.

김광원씨는 처음 만났으나, 정영신씨 장터 사진을 소장한 사업가란다.

모든 것이 작품을 꾸준히 소장해 준 임태종씨 덕분이었다.

 

그동안 나의 인사동 사진을 비롯하여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등 여러 점을 컬랙션 했는데,

그 날도 정영신의 장터 사진 두 점을 사겠다고 했다.

사진을 사주는 것만도 고마운데, 밥과 술까지 사주어 황송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런 독지가가 있는 덕에 가난한 예술가가 어렵사리 연명할 수 있는 것이다.

 

좀 있으니, 양산에서 일하는 공윤희씨도 나타났다.

한때 인사동 지킴이로 불린 그는 양산에 살지만, 틈만 있으면 나타나는 몇 안 되는 인사동 물귀신이다.

요즘은 몸이 아파 약 먹는 처지라 술을 마실 수 없으나,

이런 반갑고 고마운 자리에 어찌 술을 마다할 수 있겠는가?

 

부산식당의 오래된 늦장 부림도 여전했다.

밥부터 주었으면 술보다 밥을 먹었을 텐데, 생태찌개를 반쯤 먹어서야 밥이 나왔다.

금방 지어낸 밥이라 맛있기는 하지만, 인내력 없는 사람은 열 받기 십상이다.

 

그 날은 김광원씨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땅값 비싼 인천 송도에서 농사짓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분은 공들인 것만큼 돌려주는 농사의 미덕을 예찬하는 분으로,

주변에 몰려드는 쓰레기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단다.

공터만 보이면 갖다 버리는 못된 인간들의 습성은 어디나 똑 같았다.

 

그는 경찰 간부 출신으로 섬에 들어가 번데기 장사를 했던 이야기에서부터

여태 살아온 이야기를 구구절절 들려주었는데,

진정성있는 처신으로 손님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에 돈을 벌 수 있었다고 한다.

 

이차로 늘 마중으로 옮겼으나, 더 이상 술을 마실 수 없어 먼저 일어나야 했다.

인사동의 술자리는 늘 아쉽기만 하다.

 

사진, / 조문호

 

 

 

지난 15일 정영신씨와 함께 세상을 떠난 창원 김의권씨의 장례식장에서 황성건, 변형주씨를 만나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눈 후 인근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튿날 발인을 지켜본 후 양산장에 가기 위해서다.

 

울산에서 온 황성건씨와 동행했는데, 양산장에는 공윤희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정동지는 장터 촬영을 왔는지, 장보러 왔는지 모를 정도로 농산물을 바리바리 사들고 왔다. 온 김에 오세필씨도 만나보기 위해 남창에 있는 동광기와를 찾아간 것이다.

 

남창에 있는 기와 골 사무실은 열려 있으나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사무실에는 나무로 만든 다양한 모골(기와모형 틀)이 진열되어 있었다. 작업장에는 귀면기와와 용두 같은 미완의 기와들이 어지럽게 놓여있었는데, 마치 귀신 나올 듯 으스스 했다.

 

문 닫힌 기와공장에는 반구대 암각화를 형상화한 전돌이 전면을 장식하고 있었는데, 두꺼비굴이라 불리는 재래식 기왓굴과 달랐다. 노장들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 전래의 기왓 가마는 쌍굴이었고 원주에서 발견된 경우는 산언덕을 깎고 굴을 뚫었다. 부여근교에서 발굴된 백제 와요는 강둑에 굴을 파고 바닥에 구들장까지 놓았다고 한다.

 

담장처럼 쌓아 둔 기와더미를 보니, 사양길에 접어든 기와의 암울한 현실을 읽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각 지방마다 특색 있는 기와를 만들어 왔으나 콘크리트로 지은 슬라브집이 대세를 이루는데다 양기와와 슬레이트 등 새로운 지붕재료의 보급으로, 명맥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가상한 일이다. 지금은 전통기와의 수요가 점차 줄어 둘어 이곳 울산 남창과 전라도 장흥군 안양면에서만 만들어진다고 한다.

 

오세필씨가 운영하는 동광기와는 선조인 오호영옹이 1900년대부터 시작하여 4대째 이어지는 긴 역사를 가졌다. 3대째인 부친 오성환씨가 동광기와라는 이름으로 확장시켰고, 4대째인 오세필씨가 이어받으며 문화재관리국 등록1호가 되었다고 한다.

 

오세필씨는 황금기와를 개발하여 구인사 '대조사전'에 올리기도 했다. 구인사가 돈도 많으면서 콘크리트 절만 만든다는 비판을 받자 제대로 된 대조사전을 건립한 것이다. 신흥수대목장이 도편수가 되고 오세필 제와장이 기와를 맡는 등 전통건축의 장인들을 불러 모아 지어졌는데, 안쪽은 한 층이지만 겉으로는 3층이라 법주사 팔상전의 구조와 비슷하다. 그 '대조사전'은 1992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2000년에 완공되었는데, 오세필씨의 금빛 기와는 도금이나 단청이 아니라 유약을 발라 구운 기와라 시간이 지나도 빛이 바래지 않는다고 한다.

 


기와는 암기와와 숫기와로 구분되는데, 아래에서 받쳐주는 넓적한 기와가 암기와고, 위에서 덮어 지붕의 골을 만드는 둥근 기와가 숫기와다. 또한 암막새와 수막새, 귀면기와(도깨비 얼굴을 새긴 기와), 치미(전통 건물의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얹는 기와), 용두(용머리를 표현한 기와), 망와(지붕의 마루 끝에 세우는 기와) 등 부속장식 기와도 다채롭게 만들어져 사용되었다.

 


전통 기와는 흙과 물로 만들기 때문에 습기가 많은 우기와 한랭한 계절을 피해 봄과 가을에 제작된다. 첫 작업은 질 좋은 원토를 채취하는 것이다. 검은 흙, 누런 흙, 붉은 흙 등 세 종류의 흙이 고루 배합돼야 좋은 기와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기와를 만드는 공정은 찰진 진흙으로 된 점토를 물과 반죽하여 흙 사이에 기포가 생기지 않도록 밟고 짓이기는 작업을 반복하며 나무로 만든 모골(模骨)이란 틀에 넣는다. 모골의 외부에 마포나 무명천을 깔고 반죽한 진흙을 다져 점토판 위에다 씌워 방망이 같은 판으로 두들긴다.

 

그런 다음 와도(瓦刀)2등분하거나 또는 3, 4등분하여 자른 다음 장방형으로 재단한 진흙을 한 조각씩 떼어 와통 둘레에 붙인다. 와통은 진흙을 성형하는 데 쓰이는 원통형의 나무통이다. 성형 작업 중에도 진흙 판을 계속 두드리는데, 이는 흙 사이에 기공이 생기면 나중에 굽는 과정에서 기와가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양이 잡힌 뒤에는 대나무칼 등으로 선을 긋고 건조 과정을 거친 뒤 각각의 낱 기와로 분리해 다시 말린다.

 


최종 단계는 가마 작업이다. 말린 기와를 화기가 고루 통하도록 가마에 차곡차곡 쌓은 뒤 사흘간 불길을 조절하며 섭씨 1000도가 넘는 고온에서 구워낸다. 은은한 검은색이나 은회색이 되면 제대로 구워진 것이다. 이렇게 한 장의 기와가 탄생하기까지 40일 가까이 흙과 물, 그리고 불 속에서 서른 가지가 넘는 까다로운 공정을 거쳐야 한다.

 

전통 기와는 기계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자연스러운 곡선미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수분 흡수율과 통기성도 이른바 공장 기와가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옛 기와를 두고 흔히 살아 숨쉰다고 표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전에는 시골 여행하다 보면 곧잘 눈에 띄던 것이 흙으로 두둑하게 쌓은 두꺼비굴이 있었는데, 요즘에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워낙 영세한 시골의 기와공장 인데다 인력 의존도가 높은데 비해 값이 싼 제품이라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곳저곳 살펴보며 전통기와의 우월성과 창의성에 감복하고 있으니, 제와장 오세필씨가 나타났다. 손님 접대를 위해 횟집에 회 사러 간 것 같았다. 오세필, 정영신, 황성건, 공윤희씨 등 다섯 명이 회를 싸들고 오세필씨 형님이 운영하는 고깃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식당은 여러 차례 가보았지만, 소고기 육질이 좋아 입에 찰싹 달라붙었다. 소고기에다 생선회가 어울리지 않는 궁합이지만, 회를 좋아하는 정동지를 위한 특별한 배려였다.

 

그리고 식당 벽에도 오세필씨의 기와 골에서 구워낸 전돌이 장식하고 있었다. 장식적 효용성만 아니라 전돌이 고기냄새를 흡수하는 이점도 있다고 한다. 아무튼, 오세필씨 덕에 맛있게 잘 먹었다.

 

식당에서 나와 보지 못했던 와당 전시장을 둘러보았는데, 마치 기와 박물관에 온 것 같았다. 백제기와에서부터 신라기와에 이르기까지 연대별로 전시되어 있었는데, 입이 쩍 벌어졌다. 심지어는 오래된 기왓장 조각까지 바리바리 모아 두었다. 나라마다 기와의 특징이 뚜렷했다. 고구려의 기와는 힘차고 날카로운 모습을 보였고, 백제의 기와는 간소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다. 백제기와의 보드라운 촉감에서 특유의 조형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또 통일신라 때의 섬세한 문양은 무르익은 미의식의 화음이 느껴졌다. 신라의 기와는 처음에는 소박했으나 차츰 화려해지고 무늬가 다양하게 나타났다.

 

제와장 오세필씨의 설명으로는 우리 기와가 삼국시대에 꽃을 피웠다고 한다. 고구려와 백제가 각기 수준 높은 조와 기술을 가지고 있었는데, 통일신라에는 독자적인 기와를 구워내어 완성의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심지어 녹유 기와와 전돌이 그러하려니와 무늬에 있어서도 다양하고 정교하다. 그런데 고려이후의 무늬와 종류는 한계점에 달했음을 보게 된다. 청자로 구운 기와까지 나왔음에도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12세기로 한 고비를 그었다. 얼굴 무늬 수막새는 자연스러운 미소를 간직한, 신라의 대표적 기와 유물로 꼽힌다. 그리고 강진에서 구워진 모란당초 무늬의 청자기와는 얼마나 기발한 착상인가.

 

옛 유물에 나타난 기와의 종류는 무려 20여종에 달했다. 평와로서 암기와와 숫기와는 물론, 숫기와로서 미구기와와 토수기와가 더 있었다. 막새는 평기와에 낙수의 드림새를 붙인 것이고 망새 (망와)는 용마루나 내림마루 끝에 다는 바래기를 말한다. 옛것에는 귓기와, 곱새기와, 기왓골수새 등 갖가지 기와가 있었다고 한다. 치미, 용두, 잡상, 토수 같은 것은 궁궐이나 큰 사찰용이라 흔치 않았다.

 

정영신씨는 이곳에서 구웠다는 달항아리 한 점과 오래된 숫기와 한 점을 선물 받았다. 숫기와에 핀 세월의 꽃은 어느 조각품도 따를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나저나, 문화재청에서 전통기와를 전승하고 보존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 같다.

전통기와를 배우려는 사람도 없거니와 타산이 맞지 않아 더 이상 만들 수가 없다는 말에 귀가 막혔다

역사를 중시 않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

 

사진, / 조문호

 

선물받은 달항아리와 숫기와를 집이 좁아 어디 둘까 걱정했는데, 다 제자리가 있네.

 

장애학생돕기 자선전인 함께 맞는 비가 지난 921, 오후4인사동 마루아트센터3층 그랜드관에서 개막되었다.

 

화가, 조각가, 만화가, 사진가, 도예가등 40여 명의 예술가가 참여하는 함비전

비장애인이 어려운 장애아의 눈이 되고 귀가 되어, 우산을 같이 쓰며 함께 비를 맞는 아름다운 행사다.

 

이날 개막식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두렵기까지 했다.

 

주홍수, 유준, 박성남, 강레아, 조풍류, 정영신, 조명환, 조신호, 임동은, 김수길, 박복신,

김발렌티노, 이한복, 공윤희, 전활철 씨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누군지도 모르겠더라.

 

운영위원과 출품작가를 비롯하여 관람객까지 더해 넓은 전시장을 가득 메웠다.

발 디딜 틈이 없어 작품감상에 지장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함비전에 대한 일반인의 지대한 관심은 장애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청신호가 아니던가?

 

이 자선전은 많은 분의 참여를 이끌기 위해 작품가격도 기존 가격보다 대폭 낮추어 판매한다.

 

유명 작가의 작품을 저렴하게 소장할 좋은 기회다.

많은 분의 동참을 부탁드린다.

 

부디 첫 함비전이 오색 단풍처럼 아름답게 물들어, 그 소중한 마음을 모아 좋은 결실로 이어지길 바란다.

이 전시는 27일까지 계속된다.

 

공윤희, 정영신, 김수길씨와 전시장을 먼저 빠져나와

인사아트센터4층 부산갤러리에서 열리는 여성현대미술작가회원전에 갔다.

 

참여작가인 양계선씨를 축하해주기 위해서였다.

 

인사동 늘마중에서 막걸리로 목을 축인 후

식사를 예약해 두었다는 베이징 코아로 자리를 옮겼다.

 

베이징 코아는 예전에도 그랬지만,

주 메뉴인 오리구이보다 마지막에 나온 짜장면이 압권이었다.

오리고기 맛을 몰라 그런지 모르지만, 잘 삶은 삼겹살보다 못했다.

 

촌놈에게는 비싼 중국요리보다 오로지 짜장면이다.

양파 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먹어 치웠다.

오리고기 가격이 만만치 않으나, 짜장면 먹으러 다시 가고 싶다.

 

사진, / 조문호

 

 

아침에 일어나니 개도 걸리지 않는다는 여름감기에 걸려있었다.

변덕스러운 날씨 탓인지, 엎친 데 덮친 격이다.

허리협착증에 감기까지 더해 녹번동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월말이라 서울아트가이드’ 9월호를 얻기 위해 인사동을 경유했다.

전시장 찾는 일은 자제하기로 다짐했지만, ‘나무화랑’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브레멘 예술대학 디자인 학부 졸업작품을 선보이는 유철균의 사진전이 궁금해서다.

전시작가를 비롯하여 판화가 류연복씨와 김진하 관장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작가와는 첫 대면이었으나 외모는 물론 섬세한 끼까지 아버지를 닮았더라.

 

전시 중인 유철균의 친밀전은 비대면 시대를 맞은 젊은이들의 일상을 포착했다.

비대면 시대에서 친밀하다는 것은 어떤 관계냐는 질문을 던지며,

주변 공동체의 내밀한 일상을 그만의 어법으로 보여주었다.

 

거리두기의 시대적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인간관계가 아니던가?

사회가 놓친 예민한 문제를 유철균이 끄집어낸 것이다.

 

거창하지도 극적이지도 않은 나른한 일상의 단면을 담담하게 포착해 낸 시각이 신선했다.

 

유철균의 문제의식은 비정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을 돌아보게 한다.

96일까지 열리는 유철균의 친밀전을 꼭 한번 관람하시기 바란다.

 

녹번동에 갔더니, 눈빛출판사에서 보낸 두 권의 사진집이 도착해 있었다.

안장헌의 소소한 일상과 임지훈의 예멘사진 시집이었다.

 

문화재전문 사진가인 안장헌의 소소한 일상

고려대 호영회에서 활동했던 60년대 후반에 찍은 진귀한 사진이었다.

반세기가 넘도록 잠자던 작품이 이제야 돌아온 것이다.

 

그 때 그 시절, 우리가 살았던 아련한 추억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기록의 중요함을 일깨워 준 소중한 사진집으로 소장가치가 높다.

사진집 출판을 기념하는 사진전은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9일까지 열린다.

 

임지훈의 예멘 사진 시집은 뜨거운 햇살 아래 살아가는 예멘 사람들의 일상이 담겨 있었다.

사진 설명 대신 쓴 시들은 시공간을 초월해 모든 세상과 연결되어 있었다.

사진과 시는 대상을 즉관적으로 잡아낸다는 동질성이 있으나, 사진 시집을 펴낸 작가는 처음이었다.

 

사진 한 장은 시 한 편이고, 시 한 편은 사진 한 장이었다.

이미지와 심상은 사진에도 있고 시에도 있었다.

 

감기약을 챙겨 먹고 자리에 누우려니, 정동지가 손님 온다며 손을 내 저었다.

저질러 놓은 일에만 정진하기로 명세 했건만,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녹번동 온 줄은 어떻게 알았는지. 인사동 물귀신들이 처들어 온 것이다.

술과 민어회를 사 들고 위문 공연왔다는데, 어찌 마다하겠는가?

전활철, 공윤희씨에 이어 김수길씨 까지 찾아와 술자리가 어울렸다.

 

술이 약인가? 술이 들어가니 아픈 몸이 슬슬 풀렸다

담근 지 팔 년 된 상황버섯주 까지 꺼내 마셨다.

인사동 골동상들이 벌인, 웃지 못할 사연을 술안주 삼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죽고 사는 문제는 다음 문제다.

 

사진, / 조문호

 

 

 

지긋지긋한 더위가 한풀 꺾여, 이제야 한 숨 돌릴 것 같다.

쪽방에서의 여름나기는 고행의 연속이었다.

수행자처럼 버텨내지만, 허리 협착증까지 도져 죽는 게 편하겠더라.

 

일기처럼 쓰던 주변 잡기에서부터 전시리뷰에 이르기 까지 모든 일을 중단했다.

주제넘은 이야기로 욕 먹는 일도 지겨웠지만, 죽기 전에 마무리해야 할 일이 많았.

사진 정리가 되지 않아 사진 한 장 찾으려면 온종일을 허덕여야 한다.

 

얼마 전에는 돌아가신 한정식선생과 찍은 기념사진 한 장 보내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원본 찾느라 몇시간을 헤매다 결국 포기하고 말았는데, 늦게 사진을 정리하려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오래된 필름 찾아 스캔 받는 일은 손도 대지 못했다. 

 

여름 내내 전시장 방문은 물론, 사람 만나는 일까지 피해 가며

컴퓨터와 씨름하였으나 도무지 일의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오죽하면 정선 집 불났을 때, 남은 짐까지 모두 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겠는가?

죽고 나면 아무 소용없는 일에 매달리는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이 사진들은 한 달 전에 인사동에서 찍은 사진이다.

 

지난 7월 27일, 양산의 공윤희씨가 온다는 연락을 받아 모처럼 정동지를 만나 인사동에 나갔다. 

쌈지 담벼락에는 궁녀가 임금 기다리다 죽었다는 설화의 꽃, 능소화가 피었더라.

 

약속했던 ‘풍류사랑 낭만에는 공윤희씨 외에 김수길씨도 왔더라.

용태씨 미망인 박영애여사는 민어에다 홍어, 돼지 수육까지, 그득하게 상을 차려주었다.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만나 이야기 나누기 보다 음식 먹느라 정신없었다.

사실, 귀가 어두워 소통이 안 되니 술이 약인 것이다.

 

인사동 지킴이로 알려진 공윤희씨는 퇴역한지가 수십년이 되었으나 아직까지 공대위로 불린다.

몇십 년동안 인사동에서 일 하며 살았으나, 장가는 못 간게 아니고 안 갔다.

요즘은 먹고살기 위해 양산에서 학교 일을 돕는다는데, 여름휴가를 받은 것 같았다.

 

휴가를 받았으면 바다나 산으로 갈 것이지, 인사동에는 무슨 미련이 남아 왔는가?

 

이차로 유목민’에 갔더니, 골목에는 장경호씨와 한상진씨가 있었고,

안쪽에는 전활철, 안원규, 유 준, 발렌티노김 등 아는 분이 많았다.

 

만나 반가운 시간은 잠깐이었다.

소통이 되지 않아 술만 빨다 정량 차면 일어나니,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파장 인생의 설움이다.

 

사진, / 조문호

 

 

 

며칠 전 조준영 시인으로 부터 연락이 왔다.

‘"인사동에서 초촐한 망년회라도 한번 해야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방콕에서 해방된 날은 28일이었다.

날 잡은 김에 다 만날 작정으로 녹번동부터 갔다.

 

정동지 일로 충무로 가려는데, 조해인 시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응암동 콩나물국밥'에서 김수길씨와 한 잔 한다는데, 어찌 모른척 할 수 있겠는가?

 

일이 늦게 끝나 바쁘게 찿아 갔더니, 이미 술자리는 파장이었다.

사이클이 맞지 않아 부어 주는 쪽쪽 마시다보니 금방 취해버렸다.

김수길씨는 "'케이비에스'에서 동자동을 소개한 방송을 보았냐?"고 물었다.

쪽방은 물론 정동지 집에도 티브이가 없으니, 세상돌아 가는 걸 잘 모른다.

인사동 약속시간을 30분 남기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인사동은 연말분위기가 실종된지 오래다 

옷 가게들이 점령해 가는 거리 풍경은 낮 설기만 하다.

 

인사동만 나오면 습관적으로 사진을 찍는다.

그 장면에 그 장면이지만, 출근부 도장 찍듯 찍는다.

 

 만나기로 한 장소는 고)김용태씨 미망인 박영애여사가 운영하는 ‘낭만’이었다.

어디쯤 왔느냐의 전화를 받고서야 인사동 순찰을 마쳤는데,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공윤희, 임태종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거리두기 지침에 맞추어 네 사람만 모인 것이다.

 

박영애여사가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잔뜩 차려주었다.

돔 찜에다 돼지수육과 홍어, 그리고 과메기까지 등장했다.

세상에! 얼마나 맛있는지, 술 마시며 안주를 그렇게 많이 먹어본 적이 없다.

 

나온 사람 몇 명 없는 조촐한 '인사동 사람들' 망년회지만, 음식이 너무 푸짐했다.

공윤희씨가 먼곳에서 공수해 온 꼬냑까지 꺼냈다.

난, 일편단심 민들레만 마셨다. 양년이 싫어서가 아니라 지레 겁 먹은 것이다. 

 

최석태씨가 ‘유목민’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전갈에 자리를 옮겼다.

장경호, 김이하, 안완규씨도 있었으나, 술이 취해 더 마실 수가 없었다.

 

새해에는 신나는 일만 주렁 주렁 열리길 바란다.

코로나 끝나는 봄 날, 때거리로 한번 젖어보자.

 

사진, 글 / 조문호

 

..

지난 주말은 정영신 동지의 생일이었다.

인사동 전시를 마무리한터라 어디든 여행이나 가자고 했더니, 작심한 듯 포항 장기장에 가잔다.

 

포항 장기장은 전국장터 목록에 빠져있어 유일하게 가보지 않은 오일장이란다.

문화유적이 많은 장기면의 장터가 빠졌다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 곳에는 장기읍성과 뇌성산성을 비롯하여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서원이 많은 곳이다. 

죽림서원, 삼명서원, 덕림서원, 서산서원이 있고, 

향교와 척화비, 석남사지, 고석사 석불좌상 등 문화재가 많다.

 

모처럼의 장거리 여행이기도 하지만, 일에서 해방되어 날아갈 것 같았다.

새벽 일찍 출발해 정오 무렵에서야 현장에 도착했는데, 텅 빈 장터가 반겼다.

마치 피난 간 마을처럼 사람이라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장터였다.

 

어렵사리 만난 노인에게 “장이 왜 안서냐?”고 물었더니, 

아침에 몇 사람 나왔으나 이내 끝났다는 것이다. 

노인들만 남은 면소재지 장이라 장터의 기능을 잃은 지 오래된 것 같았다.

 

새로 지은 장터 앞에는 장의사가 버티고 있어 을씨년스러웠다. 

한 세기나 지난 것 같은 오래된 고물차가 장터 곳곳에 있었고, 

점포들도 외부는 깔끔하게 정리되었으나,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마치 유령의 마을 같았다. 

아마 문화유적을 찾는 관광객들을 위해 외관정비와 시설 보수는 했으나 

늙은이만 남아 장터 기능은 물론 살기조차 힘들 것 같았다.

 

옛날에는 유배지이기도 했으니, 외딴 곳에 젊은이들이 살고 싶겠는가?

장기장은 찍을 것이 없었으나, 지척에 있는 유적이라도 돌아보기로 했다.

 

장기면 읍내리에 있는 장기읍성은 둘레가 1,440미터고, 

옹성과 치성을 비롯하여 네 개의 우물과 두 개의 연못인 음마지가 있고, 

성 안쪽에는 향교와 동헌터가 남아 있었다.

 

여진족의 해안 침입에 대비하여 쌓은 토성으로 현종 2년에 축성되었는데, 

세종 21년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돌 성으로 개축된 후 군사기지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교의 대가인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이 귀양살이 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송시열을 기리는 죽림서원이 세워져 글 읽는 마을이 되었으나 

오로지 군사기지로서의 역할을 다한 고장이라 할 수 있다.

 

장기향교도 가까이 있었으나 문이 굳게 잠겨있었다. 

담장을 돌며 내부를 살펴볼 수밖에 없었는데,

맞배지붕 겹처마 5칸으로 된 대성전에는 18현의 위패를 봉안해 두었다고 한다.

당우로는 팔작지붕 홑처마에 7칸으로 된 명륜당, 내삼문, 외삼문, 주사 등이 있었다.

 

모두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중건되었다고 한다.

뇌성산성이나 고석사 석불좌상도 찾아 보고 싶었으나,

울산의 기와장인 오세필씨를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이 다가와 갈 시간이 없었다.

 

지방 촬영 때는 일체 지인을 만나지 않지만, 오래 전부터 한 번 오라는 연락에 정동지가 약속해 두었단다.

그래서 일박이일의 촬영일정을 잡은 것이다.

 

약속 장소인 울산 남창까지는 2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였다.

남창마을 입구에 도착하니 오세필씨를 비롯하여 한양현씨와 양산에 있는 공윤희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세필씨 따라 그가 운영하는 기와공장을 거쳐 ‘송화정’으로 갔는데, 그날따라 정기휴일이라고 했다.

형님이 운영하는 곳이라 일할 분을 불러낸 모양인데,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더욱 송구스러운 것은 정동지가 좋아하는 감성돔까지 횟집에서 장만해 왔는데,

너무 과분한 대접이라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 날이 정영신씨의 생일이란 말은 하지 않았으나, 최고의 생일만찬이 아닐 수 없었다.

 

바닷가에서 커피를 마신 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L모텔에 여장을 풀었다.

공윤희씨가 숙소에 공수해 온 술과 안주로 밤늦도록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들 반가웠고 고마웠어요.

 

사진, 글 / 조문호

 

 

예전에는 인사동에서 술 마실 기회가 많았지만,

요즘은 은평 지역에서 마실 기회가 더 많아졌다.

그 곳에 정영신씨를 비롯하여 조해인, 김수길, 김명성, 서인형씨등

가까운 분들이 많이 살아 종종 술자리가 만들어진다.

예술인 ‘스마트협동조합’이 녹번동에 있는 것도 한 몫 하는 셈이다.

 

지난 25일 오후 김명성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녹번동 있으면 ‘마포나루’로 오라는데, 나의 움직임을 훤히 읽고 있는 것 같았다.

서울역에서 녹번동으로 이동 중에 전화를 받아 술집부터 먼저 들렸는데,

김명성씨를 비롯하여 조해인, 김수길, 백승호씨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마포나루’는 서부경찰서 뒤편에 있는 조그만 횟집인데,

가격이 저렴한데다 주인의 넉넉한 인심까지 한 몫해 김명성씨 단골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가격이 싸다 해도 가난한 사람들이 찾기에는 부담스럽기 마련인데,

원님 덕이 아니라 김명성씨 덕에 매번 나팔 부는 집이다.

지척에 이청운씨 화실도 있으나, 함께 못함이  마음에 걸린다.

 

갈 때마다 회에다 멍게, 전복, 생선구이 등 갖가지 해산물이 코스요리처럼 나왔다,

해산물을 골고루 맛볼 수 있어, 오죽하면 거지 영양 보충하는 날로 여길까?

이 날은 모인 사람이 다섯 명이라 두 군데 나누어 술 상을 차려 놓았다.

 

김수길씨는 다음 주에 ‘마루아트’에서 개인전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고,

김명성씨는 김상현씨의 두번째 ‘뮤아트’가 이틑 날 개업한다는 소식도 주었다.

그 날의 화제는 김명성씨 소장품전인 ‘백범 김구 쓰다’전과 관련된 독립운동에 얽힌 이야기였다.

사회적위치가 높은 사람들의 부친 친일이력인데, 문제는 독립운동가로 조작한단다.

고증자료를 근거로 철저하게 진위를 밝혀야 한다.

 

그 날은 소주 한 병 남짓 마셨는데, 숨이 차 더 이상 마실 수가 없었다.

김명성씨와 먼저 일어났는데, 조해인씨는 시동이 걸렸는지 일어 날 생각을 않았다.

난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면 더 이상 마시지 않지만, 조해인씨는 달랐다.

몸도 챙겨야 할 나이지만, 안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술로 끝장을 본다.

 

그런데, 또 다른 사진들이 나를 기다렸다.

얼마 전 만해도 매일 같이 소식 주워 날라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올렸으나,

이젠 다른 일도 있지만, 몸이 받쳐주지 않아 일을 줄이기로 했다.

가급적 전시장 출입을 자제하고, 포스팅도 중요한 일이 아니면 안 한다.

 

그전 같았으면 주변 분들을 만날 때마다 사진을 찍어 올렸지만,

이젠 꼭 필요한 사진만 찍고, 찍어도 올리지 않을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은평에서 만난 분들 사진을 함께 엮어 소개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양산에 가 있는 공윤희씨가 전화를 했다.

역촌동 ‘양갈비에 꼬치다’에서 기다린다며 빨리 오라는 것이다.

고깃집 이름은 흥미롭지만, 그 곳은 잘 가지 않는 술집이다.

가보니, 공윤희씨 뿐 아니라 조해인씨와 김수길씨도 있었다.

 

그 날은 폭설을 예고한 날이라 온종일 서울역 주변에서 맴돌았다.

백설이 휘날리는 서울역 전경사진이 한 장 필요했는데,

날씨가 포근해 그런지 간간이 내린 눈도 금세 녹아버렸다.

술 마시러 오라는 공윤희씨 전화에 사진 찍기를 포기하고 달려갔는데,

술을 마시다 보니 진짜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다.

 

또 다시 황급히 서울역으로 달려갔으나, 도착할 무렵 눈이 그쳐버렸다.

운이 없는 건지 찍지 말라는 건지, 마치 숨바꼭질하는 것 같았다.

부득이 눈 내리는 서울역이 아니라 눈 내린 전경으로 만족해야 했다.

 

남은 사진은 녹번동 정영신씨 집을 방문한 최석태씨와 서인형씨 사진이었다.

 때늦은 사진이지만, 그 날은 대취해 그런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또 언젠가는 연신내 청구병원 앞을 지나가는데 뒤에서 누가 불러 세웠다.

돌아보니 화가 박불똥씨 였는데, 장경호씨 집에 들렸다 돌아가는 길이라 했다.

 

세월이 지나면 이 사진 또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사람은 사라져도 사진은 어딘가 남아 떠돌테니까...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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