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삶보다 찍고자 하는 대상의 삶속으로 들어가 ...20일까지 갤러리 브레송 

 

 

조문호의 ‘사람이다’ 전이 오는 20일까지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02-2269-2613)에서 열리고 있다.

 

 브레송 기획전 ‘사진인을 찾아서’ 열두 번째 마지막 작가로 열린 조문호의 ‘사람이다’기획전은 ‘장르도 초월하고, 경계도 허물고, 패거리도 없고 갑과 을의 관계도 없는 대동의 사진 세계에서 이 땅의 숨겨진 고수를 찾는 놀이’였다.

 

 

 
▲ 사진가 조문호

1년 동안 김남진(갤러리 브레송) 관장의 기획아래 사진비평가 이광수 부산외국어대학 교수가 작가론을 쓰고, 결과물을 눈빛출판사에서 펴내는 의미 있는 프로젝트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지난 1월, 고정남의 ‘불친절한 사진?’를 시작으로 최영진의 ‘있는 그대로 그렇게, 그 모태를 재현하다’, 이영욱의 ‘사진으로 사진에 대한 신화를 깨다’, 김보섭의 ‘인물과 오브제로 기록하는 감성적 민족지, 이재갑의 '아픈 역사를 이면과 기억으로 엮는 서사시’, 제주도에서 국화빵 CEO로 나선 권철의 ‘독대(獨對), 문진우의 ’당신이 보지 못했던 부산의 모든 것, 신동필의 ‘부르지 못한 노래’, 이수철의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레퀴엠, 강정효의 ’제주의 풍경, 민속 그리고 역사‘, 김문호의 ’사진 문법‘ 에 대한 도전, 마지막으로 조문호의 ’사람이다‘로 대미를 장식했다.

 

‘사진인을 찾아서’는 사진에 대한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준 전시란 생각이 든다. 20년 전에 사진 유학파들이 만든 ‘한국사진 수평전’이 한국에 등장해, 만드는 사진이 한 때 유행했었다. 사진이 사진논리에 묻혀가는 것을 경계하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많은 사진인들이 서양의 사조에 골몰하고 있을 때, 우리사진은 제대로 숨도 못 쉬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진인을 찿아서’ 프로젝트는 한국 사진사를 다시 쓰는 의미 있는 기획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열린 조문호의 사진 세계를 조명하는 사진들은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의 초창기 사진에서부터, ‘87 민주항쟁’, ‘전농동 588번지’, ‘인사동 사람들’, ‘장터 사람들’과 현재 찍고 있는 ‘동자동 사람들’ 에 이르기까지 한 주제에 10여점씩 묶어 선보이고 있다.

 

 

두메산골 사람들

 산이나 불교상징 이미지 등 생업과 관련된 사진들도 있었으나, 대부분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으로 일관되었다. 그 사진들은 지나치며 찍은 것이 아니라 찍고자 하는 대상과 함께 살며 찍은 사진이다. 한 때는 인사동 예술가들을 찍기 위해 인사동의 허름한 건물 옥탑 방을 얻어 살았고, 성노동자들을 찍기 위해 윤락가로 들어갔으며, 두메산골 사람들을 찍으려 정선 굴암리로 이주하기도 했다. 그는 ‘그들의 삶을 체험하지 않고는 제대로 찍을 수 없다’고 말했다.

좋은 사진은 사진가와 대상의 교감에서 나온다는 말처럼, 순간적 찰나보다 사진가와 대상의 교감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 그들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전농동 588번지

한 때는 ‘동강’ 탐사에 참여하다 동강 주변에 사는 산골 사람들을 찍기도 했다. 당시는 동강 댐 논란으로 동강의 자연생태가 사회적 이슈였으나, 그보다는 그 곳에서 평생 살아 온 두메산골 사람들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87민주항쟁 사진들도 그 현장에 있는 사람에 집중되어 있다. 방독면을 쓴 청소부아저씨, 최루가스를 못 견뎌 종이로 코를 막은 수녀님, 십자가를 들고 눈물을 흘리는 박종철 열사 어머니 모습 등 슬프면서도 재미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87 민주항쟁

  그의 사진들은 대부분 카메라를 쳐다 본 입상들이다. 눈은 마음의 거울이라는 말처럼 눈동자에서 사람의 마음을 읽고자 했던 것이다. 애잔한 슬픔과 그리움을 머금은 사진의 바탕에는 사람에 대한 존중감이 짙게 깔려있다. 그는 사람을 존중하고 사람을 섬기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사진가다. 또한 사진의 생명력은 널리 공유되고 소통되는데 쓰여야 한다고 믿는 실용주의자이기도 했다.

 

인사동 사람들

  그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널리 하는 내러티브 만들기 같은 것을 그리 중요하게 신경 쓰지 않는다. 원경도 잡고, 중경도 잡고 근경도 잡으면서 중간 중간에 이야기를 연결시켜주는 오브제 같은 것도 집어넣는 것이 대개들 하는 방식인데 그는 그런 방식에 별로 집중하지 않는다.  조문호 작가론을 쓴 사진비평가 이광수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가 인물 사진(portrait)을 주로 찍는 것은 사진 찍는 일을 실존적으로 행위 하는 결과다.  -중략-

 

 

노숙인

오로지 꽂히는 것은 인물뿐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극(劇)이 아니고 사실(事實)이기 때문이다. 농부가 도리깨질을 하고 있으면 그냥 그 도리깨질 하는 그 자리를 찍어 보여주면 될 일이다. 화전민이 밭을 태우면 그냥 그 불 탄 밭에서 그를 찍을 뿐이다. 방도 부엌도 마루도 모두 있는 그대로다.

   
▲ 2013 장터 사람들

  그곳에서 일하며 사는 사람들 모습만 보여주면 되지, 굳이 사진가가 어떤 이야기를 일부러 만들 필요가 없다. 더 보태거나 뺄 필요도 없고, 순서를 짤 필요도 없다. 기록자로서 그들의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사실적으로 기록하고자 해서이기도 하고, 사진가의 존재보다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의 그들 개개를 존중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존중하며 찍어 온 대상들은 하나같이 권력과 재력에 밀려 난 서민들이다. 자신의 몸을 파는 성노동자, 첩첩산골에 사는 농민들, 이 장 저 장 떠돌아다니는 장돌뱅이, 인사동의 가난한 예술가들, 동자동 빈민들 등 모두가 사회적 약자뿐이다.

 

   
▲ 2016 동자동 사람들

일부러 사회적 약자들을 찾은 것은 아니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더 순수하고 인정이 많았다고 한다. 이제 칠순의 나이에 동자동 쪽방 촌으로 들어가 빈민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는데, 사람에 대한 그의 집념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자신의 삶보다 찍고자하는 대상의 삶이 더 우선인 것 같다.

  “나의 사진은 고고한 예술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회의 한 기록으로 충실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족하면 그만이다. 이 약자들의 작은 기록도 보석처럼 빛나는 세월이 분명 올 것이다“고 그는 말했다.

 

 

 

[스크랩] 서울문화투데이 2016년 12월12일 / 정영신기자

 

 

[브레인 미디어 / 스크랩]

 

브레송 기획전 : 사진인을 찿아서 12 / 조문호


사진작가 조문호는 사진보다 사람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그 자신이 사진가로서 자격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고 말한다. 게다가 그는 주로 아는 사람을 찍어왔다. 이런 작업이 사회 전체를 조망하기보다 개인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겠다고 그는 생각한다.

 

 

 

▲ 조문호, 인사동사람들(천상병),1983.

 

하지만 그에게는 그 사람을 모르면 제대로 찍을 수 없다는 오래된 고정관념이 뿌리박혀 있다. 그는 찍고자 하는 대상과 함께 눌러 붙어 살며 찍어왔다. 그들을 알려면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서울 인사동 예술가들을 찍을 때 조문호 작가는 인사동의 허름한 건물 옥탑방을 얻어 살았다. 

 

▲ 조문호, 청량리588, 1985.

 

 

성노동자들을 찍을 때는 윤락가로 들어갔으며, 두메산골 사람들을 찍으려 정선 귤암리로 이주하기도 했다. 이렇게 얻은 조문호의 사진은 어떤 것일까? 사진비평가 이광수 부산외대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조문호 사진이 다른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사진과 가장 다른 점은 무엇일까? 아마 이구동성으로, ‘따뜻하다라고 하지 않을까? 청량리 588은 그 따뜻함이 가장 잘 드러난, 사진가 조문호의 첫 작품이자 최고의 작품이다. 청량리 588은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인 1983년부터 1988년까지 그곳에서 아예 눌러 붙어 살면서 작업한 서울시 전농동 홍등가에 대한 기록이다. 몸 파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인데도, 사진을 찬찬히 보고 있노라면 느낌이 아련해진다. 언젠가 만난 적 있었던 듯 한, 그 아련한 우리들의 과거 그 시절에 내 친구였고 내 누이였던 그 사람들이 떠오른다. 이내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 청량리 588 안에서 사진가 조문호는 그 여인들의 몸 파는 행위를 보지 않았고 그 시공간 속에 살던 사람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진가가 따뜻해서가 아니고 그에게 사진을 찍히는 그 대상들이 따뜻한 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따뜻해진 것은 사진가가 그들을 사람으로 대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따뜻한 사진은 사람과 사람 사이가 얼마나 메워지느냐에 달려 있다. 그것은 돈으로도 힘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의 마음을 사는 것, 그것밖에 없다. 그래서 사진가 조문호의 사진에는 겉모습이 찍히는 것이 아니고, 속마음이 찍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독자들은 그 마음을 보고서 감동을 받는 것이다.” 


 

▲ 조문호, 두메산골사람들, 2000.

 

 

조문호 작가는 올 추석 무렵 홈리스들이 사는 서울 동자동 쪽방촌으로 들어갔다. 그가 찍는 사람들은 모두가 권력과 재력에 밀려 난 서민들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일부러 사회적 약자들만 찾은 것은 아니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더 순수하고 인정이 많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돈이 사람을 망치는 것을 일찍부터 보아왔기 때문이다.”

 

이런 생활을 그는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스스로 택한 작업을 한 번도 힘들다거나 후회한 적은 없다. 평소 일로 생각하지 않고 놀이로 여겼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힘들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일하기 싫어지기 때문이다.”

 

▲ 조문호, 동자동 사람들, 2016.

 

하지만 그 또한 가장이기에 가족에게는 미안함이 남는다.

 

그들의 삶을 체험하지 않고는 제대로 찍을 수 없다는 오랜 고집을 따랐지만, 한 가정을 지켜가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그는 자신의 사진이 고고한 예술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회의 한 기록으로 충실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족하고 즐기면 그만이다. 단지 그 가치 판단은 먼 후대에 맡길 뿐이다. 이 약자들의 작은 기록이 보석처럼 빛나는 세월이 분명 올 것이라는 한 가닥 기대가 카메라를 놓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문호 작가의 사진 세계를 보여주는 전시회가 열린다.

 

 20161월부터 12월까지 열 두 차례에 걸쳐 전시된 사진인 찾아서브레송 기획전 마지막 작가로 선정된 조문호의 '人本' 사진이 “‘사람이다조문호 이라는 제목으로 10()부터 20()까지 서울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린다 이 사진전은 조문호 작가의 전 작품을 골고루 보여주어 그의 사진 세계를 조명한다.

 

이 기획전은 장르도 초월하고, 경계도 허물고, 패거리도 없고 갑과 을의 관계도 없는 대동의 사진 세계에서 이 땅의 숨겨진 고수를 찾는 놀이이다.”

 

■ 전시개요

브레송 기획전 : 사진인을 찿아서 12 / 조문호

전시제목 : “사람이다조문호

전시일시 : 20161210()- 1220()

전시장소 : 갤러리 브레송 (충무로) 02-2269-2613

개막일시 : 20161210() 오후5


 

[브레인 미디어] 글. 정유철 기자 npns@naver.com   사진. 조문호

 

 

 

 

 


‘On the Road’


사진가 김문호씨의 ‘성시점경(盛市點景)’전이 지난 21일 오후6시 30분 ‘갤러리 브레송’에서 개막되었다.

개막식에는 사진가 김문호씨를 비롯하여 비평가 이광수교수, 김남진 관장, 눈빛출판사 이규상대표, 사진가 엄상빈,

강제욱, 이한구, 남 준, 곽명우, 윤길중, 정영신, 김 원, 한금선, 박병문, 이석필, 이주영, 아리미, 김자손씨 등 많은

사진가들이 모여 들었고, 미술평론가 곽대원씨와 행위예술가 타이거백의 모습도 보였다.

우리나라에 사진가들이 많지만, 김문호씨 처럼 깊이 생각하며 작업하는 다큐 사진가는 그리 흔치않다.

이십여 년 전에 ‘사진집단 사실’ 동인으로 함께 할 때부터 그의 사진 작업에 대한 진지함은 알고 있었지만,

작년에 열었던 ‘wasteland’전에서 결정적인 감명을 받은 것이다,

그의 사진들을 보면 문명비판에 대한 시각이 압도적이다,
그가 발표했던 ‘On the Road’의 사유는 대상에 대한 그의 고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의 변혁에 눈 돌릴 때, 그는 자신의 일상을 성찰한 것이다.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현대문명의 비정함을 텅 빈 도로와 자동차 그리고 지하철을 기다리는 직장인들의 모습으로,

현대 문명에 물들어가는 도시인들의 일상을 들추어 낸 것이었다.

한 때 찍었던 초상 사진들이 인간에 대한 애정의 눈길이었다면 ‘온더 로드’는 인간이 만든 문명에 대한 사유로 넓혀졌고,

그 다음에 보여 준 ‘Shadow’에서 제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객관적 사실을 주관적 사실로 바꾼 대표적인 사진가다.

지금까지 이어져 온 사진가 김문호씨의 관심적 대상은 무엇을 찍느냐가 아니고, 사실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로 점철된다.

그가 다큐멘터리 사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이미지를 만드는 결정적 순간이나 미학적 형상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기는 정신이다.

사회와 역사에 대한 고민이나 사유가 그만큼 깊은 사진가를 여지 것 별로 보지 못했다,

그런 우리나라 대표적 사진가가 변방으로 밀려다니다, 이제 사 조명 받는 우리나라 사진판의 현실이 너무 한심스럽다.

어쩌면 더러운 사진판에 휩쓸리지 않았기에 그가 온전히 살아남은 게 아닌가 생각된다,

나의 부족한 식견으로는 아무리 나발 불어도 사족에 불과해,

정확하게 김문호씨의 사진을 읽어 낸 사진비평가 이광수교수의 평으로 못 다한 이야기를 대체한다,

“인간이 소외된 도시 풍경, 인간이 사라져버린 현대 문명, 그 위에서 사진은 더 이상 객관성을 담보하는 다큐멘터리로 존재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진가 김문호의 인간과 문명에 대한 사진 담론이다. 2015년 전시한 <wasteland>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는 이미지로 말하는 인간에 대한 담론. 인간을 정면으로 응시하지도, 그것을 이미지로도 담을 수도 없게 되어버린 세상. 그런 문명사적 맥락에서 사진가 김문호는 사진이 사실에 대한 사유 재현을 위한 매체로서 매우 적확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진가 김문호는 이번에는 도시의 기호화 된 상징에 주목한다. 미완성작 <인더시티>는 특별한 내러티브로 구성되지 않을 것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그렇지만 또 다시 사실과 사유의 고민을 이끌어낼 수 있는 표상의 이미지를 담아내는 중이다. 사각형, 오각형, 육각형의 건물들이 서서 만들어내는 풍경, 그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이미 우리에게는 사실로 기호화 되어 존재한다. 아파트는 거대한 산 앞에 자리하여 너무나 떳떳하게 자연의 풍경을 바꾸어버리면서 그것이 자연의 위치에 서버렸다. 광고판에 그려진 이미지는 비실재지만, 그것보다 더 실재인 것은 없다. 모든 것이 다 획일화 되어 버린 판타지의 세계, 사진가 김문호는 이 시대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천착해야 할 과제를 여기에 두는 중이다."


30일까지 이어지는, 이 전시는 사진인이라면 꼭 한 번 보아야 할 전시다.

장애인 가족사진 2005


'wasteland' 팽목항2015


'wasteland' 매향리2015


'shadow'2013-2015

'인더시티'2013-2016


그런데, 김문호씨 전시에 들려 큰 낭패를 당했다.


김남진 관장과의 오래 전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 죄로 ‘브레송’ 가기를 꺼려했지만,

김문호씨는 워낙 좋아하는 사진가라 들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날 발목 잡힌 것이다.

‘사진가를 찿아서’란 브레송 기획전 마지막 주자로 정했다며 여러 사람 앞에서 공표해 버린 것이다.


여지 것 사양해 온 것은 쟁쟁한 젊은 사진가들도 많은데, 늙은이가 끼어 더는 것도 그렇지만, 마음 편히 사진전을 열 형편이 아니었다.

더구나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보름정도 남겨두고 결정한 것은 무리였다. 

전시비용도 비용이지만, 전 작품을 보여 주는 게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있는 사진으로 전시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옛날 필름을 스캔 받아 수정할 일이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죄 없는 정영신씨가 모든 어려움을 뒤집어쓰게 되었는데,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동자동에 할 일도 많은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낭패를 당하는지 모르겠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 날 구멍이 있다’ 듯이, 한 번 최선을 다해 보는 수밖에 없다.
오는 12월 10일이 마지막 매 맞는 날이니, 부디 오셔서 힘껏 두들겨 주십시요,

사진, 글 / 조문호























































오는 30일까지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려...




▲문진우, '비정도시'사진집.(눈빛출판사, 12,000원)

부산의 다큐사진가 문진우가 상경하여, 30여 년 전에 찍은 사진들을 펼쳐놓았다.


지난 22일,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개막된 문진우의 ;비정의 도시‘가 바로 그 것이다.

다소 신파적인 ’비정의 도시‘라는 말을 들으니, 바로 80년대 이전으로 필름이 돌아간다.


그가 찍은 남포동 사진들은 그 당시의 수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게 했다.

내가 운영했던 남포동 '한마당'에서  최민식 선생을 만나 사진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부산매일‘사진부장으로 있던 장정수 소개로 문진우를 몇 차례 만난 적은 있지만,

사진에 미쳐 서울로 도망치며, 이내 그를 잊어버렸다.


작년 무렵, 폐북에서 문진우를 기억하게 되었으나, 그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갤러리 브레송'에서는 35년 만의 만남이었는데, 사진들이 너무 좋았다.

이런 사진이 3-40년 동안 잠자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한정식선생의 말씀처럼 “사진은 된장이나 와인처럼 숙성되어야 제 맛이 난다”는 게 실감났다. 그가 다시 보였다.

 


▲문진우, 1985 부산 남포동


그 당시 사진판의 선배들이란 트리밍자 들고 다니며 후배들 사진을 이리 저리 짜르는 게 일 이었다. 거기에 걸렸다면 문진우의 사진도 이리저리 잘려나가 반병신 되었을 게다. 스승을 두지 않고, 꼴리는 대로 찍었기에 지금의 문진우가 있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기본에서는 벗어났지만, 사진의 전달 메시지는 강하다. 기록성에 자신의 감성을 더한 이미지라 울림이 컬 수밖에 없었다.



▲문진우, 1985 부산 해운대


80년대 초반, 부산에 있었던 문진우씨와 나는 알게 모르게 최민식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접근방법은 서로 달랐지만 휴머니즘을 향한 정신 하나는 확실하게 이어받았다. 난, 그 당시 시 건방이 들어 인간성 상실을 낡거나 날카로운 기계에서 찾았지만, 그는 인간을 등장시켜 다큐멘터리 사진의 수필을 쓴 것이다. 그가 선택한 접근법이 옳았다. 인간 자체가 사진 최고의 가치기준 아니던가?



▲문진우, 1984 부산 충무동


지금도 다를 바 없지만, 사진만 찍어서는 살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사진 찍는 직업들을 선호했는데, 그 당시 신문사 사진기자는 사진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는 사진기자로서 일하며 자신의 작업을 할 수 있었고, 난 여기 저기 사진잡지에 밥 빌어먹으며, 아마추어 사진판의 비리나 지켜보며 눈을 더럽혀 왔다. 그나저나 여태껏 부산의 문진우 사진을 몰랐다는 게, 더 부끄럽다. 한동안 내 사진의 주인이었던 산골사람들과 지내며 사진판을 떠나 있었기 때문이다.



▲문진우, 1985 부산 남포동


그를 생각하니, 또 열 받는다. 어떻게 이런 사진가가 학맥이나 인맥으로 범벅된 속칭 성골 진골에 가려 구석방 신세지고 있었단 말인가? 말 많은 부산의 최민식사진상 후보는 물론 ‘부산참견록’이라는 프로젝트조차 한 번 해보지 못했을까?



▲문진우, 1987 부산 기장


하기야! 끼리끼리 노는 바닥에 그야말로 개밥에 도토리 격이었을 게다. 평생 부산을 향해 카메라를 겨누어 왔지만, 그의 줄은 짧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다. 철저하게 밀려난 변방의 사진가였다. 뒤늦게 들은 이야기지만 문진우 사진을 영혼이 없단다. “영혼 좋아하시네,” 욕 나올라 한다.



▲문진우, 1985 부산 남포동


인간에 대한 애정을 냉소로 토해내는 초창기 ‘불감시대’ 사진들은 서울에서 활동하는 사진가 김문호의 ‘온더 로드’를 많이 닮았다. 두 사진가가 드러내고자 한 도시인의 상실감은 구체적 사실보다 전체적인 해석이었는데, 그 방법의 하나로 이질감을 끌어들이고 있다.


신축빌딩 앞에 가면 쓴 사나이를 등장시켜 건물이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하고, 쭈그려 앉은 노인들 앞에 멈춘 승용차로 인간존재를 위협하는 현대문명을 비판했다.



▲문진우, 1992 부산 범일동


부산에서 활동하는 사진가가 부산을 찍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는 일편단심 부산을 찍어왔다. 소재주의고 뭐고 그런 생각은 할 필요도 없이 바다가 좋으면 바다를 찍었고, 부산의 슬픈 역사와 인간 소외를 담으려 산복도로에 메달리기도 했다. 사진은 자기 마음 가는 대로 당면한 상황에 따라 찍었던 것이다.


바다를 찍기 위해 해운대로 이사하는 열정도 보통은 아니지만, 궂은 날씨 따라 달라지는 바다의 암울한 풍경을 줄곧 나게 찍어왔다. 그 사진으로 1997년 ‘바다, 하늘 그리고 오브제’란 전시를 했다.



▲문진우, 2010 부산 산복도로


산의 배를 갈라 길 내고, 동네 만들었다는 산복도로는 그에게 소외된 도시 사람들의 상징 처로 자리 잡았다. 허리 굽은 노인밖에 없는 볼품없는 동네였지만, 그만의 어법으로 ‘산복도로에서 부산을 보다’(2013)란 전시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돈 받고 찍은 사진이긴 하지만, 1950년 부산에 들어 선 미군부대 ‘하야리야’의 폐쇄된 모습을 찍어 ‘하야리아, 사진 속에 잠들다’(2011)란 사진전도 했다.



▲문진우 2010, 부산 하야리아



지금은 낙동강 철새도래지였던 명지 뉴타운이 들어서는 과정들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모든 기록들도 80년대에 찍은 ‘불감시대’처럼 시간이 흘러 숙성되면 그 가치가 빛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진가 문진우

사진비평가 이광수 교수는 그의 사진을 두고 “사진이 어떤 용도로 쓰일지라도, 그것의 속성이 기록에 가깝든 예술에 가깝든 순수 다큐멘트이든 관계없이 모든 경우에 통용되는 가치 하나만 골라라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오래됨’이라 했다. (중략)


그의 사진은 구도가 정형화되어 있지 않아 죽어있지 않고, 그 안에 세계의 해석까지 들어 있다면, 그 다큐멘터리 사진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 전시는 30일까지 이어지고, 눈빛출판사의 사진가선28호로 문진우‘비정의 도시’(12,000원)사진집도 출간되었다,


(갤러리 브레송 / 02-2269-2613)


[서울문화투데이 / 조문호기자/사진가]










1985 부산 남포동



부산의 다큐사진가 문진우가 상경하여, 30여 년 전에 찍은 사진들을 펼쳐놓았다.
지난 22일,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개막된 문진우의 ;비정도시‘가 바로 그 것이다.
다소 신파적인 ’비정의 도시‘라는 말을 들으니, 바로 80년대 이전으로 필름이 돌아간다.

그가 찍은 남포동 사진들은 그 당시의 수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게 했다.. 

내가 운영했던 남포동의 '한마당'에서  최민식 선생을 만나 사진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부산매일‘사진부장으로 있던 장정수 소개로 문진우를 몇 차례 만난적은 있지만, 

사진에 미쳐 서울로 도망치며, 이내 그를 잊어버렸다.




1991 부산 남포동



작년 무렵, 폐북에서 문진우를 기억하게 되었으나, 그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갤러리 브레송'에서는 35년 만의 만남이었는데, 사진들이 너무 좋았다.

이런 사진이 3-40년 동안 잠자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한정식선생의 말씀처럼 “사진은 된장이나 와인처럼 숙성되어야 제 맛이 난다”는 게 실감났다.

그가 다시 보였다.


1985 부산 해운대


그 당시 사진판의 선배들이란 트리밍자 들고 다니며 후배들 사진을 이리 저리 짜르는 게 일 이었다.

그기에 걸렸다면 문진우의 사진도 이리저리 잘려나가 반병신 되었을 게다.

스승을 두지 않고, 꼴리는 대로 찍었기에 지금의 문진우가 있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기본에서는 벗어났지만, 사진의 전달 메시지는 강하다.

기록성에 자신의 감성을 더한 이미지라 울림이 컬 수밖에 없었다.



1987 부산 기장



80년대 초반, 부산에 있었던 문진우씨와 나는 알게 모르게 최민식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접근방법은 서로 달랐지만 휴머니즘을 향한 정신 하나는 확실하게 이어받았다.

난, 그 당시 시건방이 들어 인간성상실을 낡거나 날카로운 기계에서 찾았지만,

그는 인간을 등장시켜 다큐멘터리 사진의 수필을 쓴 것이다. 그가 선택한 접근법이 옳았다.

인간 자체가 사진 최고의 가치기준 아니던가?



1984 부산 자갈치시장



지금도 다를 바 없지만, 사진만 찍어서는 살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사진 찍는 직업들을 선호했는데, 그 당시 신문사 사진기자는 사진인 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는 사진기자로서 일하며 자신의 작업을 할 수 있었고, 난 여기 저기 사진잡지에 밥 빌어먹으며,

아마추어 사진판의 비리나 지켜보며 눈을 더럽혀 왔다.

그나저나 여지 것 부산의 문진우 사진을 몰랐다는 게, 더 부끄럽다.

한동안 내 사진의 주인이었던 산골사람들과 지내며 사진판을 떠나 있었기 때문이다.



1985 부산 남포동



그를 생각하니, 또 열 받는다. 어떻게 이런 사진가가 학맥이나 인맥으로 범벅된 속칭 성골 진골에 가려

구석방 신세지고 있었단 말인가? 말 많은 부산의 최민식사진상 후보는 물론 ‘부산참견록’이라는 프로젝트조차

한 번 해보지 못했을까? 하기야! 끼리끼리 노는 바닥에 그야말로 개밥에 도토리 격이었을 게다.


평생 부산을 향해 카메라를 겨누어 왔지만, 그의 줄은 짧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다.

철저하게 밀려난 변방의 사진가였다.

뒤늦게 들은 이야기지만 문진우 사진을 영혼이 없단다. “영혼 좋아하시네,” 욕 나올라 한다.



1984 부산 충무동



인간에 대한 애정을 냉소로 토해내는 초창기 ‘불감시대’ 사진들은

서울에서 활동하는 사진가 김문호의 ‘온더 로드’를 많이 닮았다.

두 사진가가 드러내고자 한 도시인의 상실감은 구체적 사실보다 전체적인 해석이었는데,

그 방법의 하나로 이질감을 끌어들이고 있다.


신축빌딩 앞에 가면 쓴 사나이를 등장시켜 건물이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하고,

쭈그려 앉은 노인들 앞에 멈춘 승용차로 인간존재를 위협하는 현대문명을 비판했다.



1992 부산 범일동



부산에서 활동하는 사진가가 부산을 찍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는 일편단심 부산을 찍어왔다.

소재주의고 뭐고 그런 생각은 할 필요도 없이 바다가 좋으면 바다를 찍었고,

부산의 슬픈 역사와 인간 소외를 담으려 산복도로에 메달리기도 했다.

사진은 자기 마음 가는 대로 당면한 상황에 따라 찍었던 것이다.

 


1993 부산 해운대



바다를 찍기 위해 해운대로 이사하는 열정도 보통은 아니지만,

궂은 날씨 따라 달라지는 바다의 암울한 풍경을 줄곧 찍어왔다.

그 사진으로 1997년 ‘바다, 하늘 그리고 오브제’란 전시를 했다.


산의 배를 갈라 길 내고, 동네 만들었다는 산복도로는 그에게 소외된 도시 사람들의 상징처로 자리 잡았다.

허리 굽은 노인밖에 없는 볼품없는 동네였지만,

그만의 어법으로 ‘산복도로에서 부산을 보다’(2013)란 전시를 만들어냈다.



2010 부산 산복도로


2010 부산 하야리아



그리고 돈 받고 찍은 사진이긴 하지만, 1950년 부산에 들어 선 미군부대 ‘하야리야’의 폐쇄된 모습을 찍어

‘하야리아, 사진 속에 잠들다’(2011)란 사진전도 했다.

 

지금은 낙동강 철새도래지였던 명지 뉴타운이 들어서는 과정들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모든 기록들도 80년대에 찍은 ‘불감시대’처럼 시간이 흘러 숙성되면 그 가치가 빛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15 부산 명지 뉴타운



사진비평가 이광수교수는 그의 사진을 두고 “사진이 어떤 용도로 쓰일지라도,

그것의 속성이 기록에 가깝든 예술에 가깝든 순수 다큐멘트이든 관계없이

모든 경우에 통용되는 가치 하나만 골라라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오래됨’이라 했다. (중략)

그의 사진은 구도가 정형화되어 있지 않아 죽어있지 않고, 그 안에 세계의 해석까지 들어 있다면,

그 다큐멘터리 사진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 전시는 30일까지 이어지고, 눈빛출판사의 사진가선28호로 문진우‘비정도시’(12,000원)사진집도 출간되었다, 

(갤러리 브레송 / 02-2269-2613)


사진가 문진우씨



아래사진은 전시 오프닝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가 문진우를 비롯하여 ‘갤러리 브레송’ 김남진관장, ‘눈빛출판사’ 이규상대표, 사진비평가 이광수교수, 사진가 엄상빈, 김문호, 김영호, 김봉규, 고정남, 마동욱, 고 헌, 곽명우, 신인식씨, 그리고 최철민, 박태진, 신은정, 정지윤씨 등 부산에서 온 사진가들도 많았으나, 대부분 성함을 모르는 분이었다.


사진, 글 / 조문호


















▲ 조문호 사진가



사진에는 다양한 장르가 있지만, 다큐멘터리가 사진의 꽃이다.

그러나 사회여건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씨를 말리고 있다.

최근 들어 충무로 ‘브레송갤러리’에서 연 이어 볼만한 다큐멘터리 사진전들이 열리고 있다.

권철의 ‘독대’나 양승우의 ‘청춘길일’ 등 둘 다 일본에서 활동하거나 몇 년 전 일본에서 귀국한 사진가들이다.

특히 조폭들의 삶을 다룬 양승우의 ‘청춘길일’은 우리 사회에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지만,

작가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권철은 제주에서 풀빵장사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고, 양승우는 길거리에서 노숙하며 ‘조직폭력’의 세상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뒤늦게 사진학과 후배였던 아내를 맞으며 노숙자 신세는 면했다지만 살림살이는 여전히 말이 아니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지만 한국에선 일용직 자리마저 쉽지 않아 일본에 눌러 있다고 했다.

건축현장 노가다로 일하며 사진작업을 잇는 그의 생활은 눈물겹다.

이번 전시 뒤풀이에서 눈물을 훔친, 그 아내의 모습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그들만 어려운 것이 아니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다큐사진가 대부분이 비참하게 살아간다.

다큐멘터리사진을 전공했지만, 사회에 나오면 다들 몇 년을 버텨내지 못한다.

사회는 다른 직업을 갖고 틈틈이 찍는 아마추어 사진가를 원하고 있다.

사실을 매개로 하는 다큐작업을 그렇게 띄엄띄엄 찍어 어떻게 제대로 기록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내로라하는 대부분의 다큐사진가들은 대학교 문전이나 기웃거리며, 보따리 장사로 연명한다.

그런 기회마저 얻지 못한 사진가들은 행여 사진으로 돈 생길 일이라도 생기면 서로 차지하려 아귀다툼이다.

반평생 다큐멘터리 사진을 해 온 나도 예외는 아니다. 숱한 빚을 안고 살지만, 그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가끔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는지, 회의감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런데, 몇 개월 전 반가운 소식이 들어왔다.

내년이 ‘87민주항행’ 30주년이라 역사박물관에서 내 사진을 사겠다는 것이다.

듣기로는 민주항쟁을 기록한 세 명의 사진을 구입한다고 했다.

그 쪽에서 원하는 오십여 장의 이미지를 보내고는 꿈에 부풀었다.

쓰러져 가는 정선집도 수리하고, 잘 하면 신용불량자 신세도 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에서다.

그런데 뒤늦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전해졌다.

마지막 결재라인에서 ‘87민주항쟁’ 자체가 보류됐다는 것이다.

이유가 뭔지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행여 권력의 눈치를 살피는 정치적 이유는 아닌지...


사실, 이것이 정부에서 기록 사진가들에게 해 주는 유일한 혜택이기도 하지만,

역사박물관에 소장 되는 것이 다큐멘터리사진가들로서는 한 가닥 희망이고 보람이었다,

그 구멍이 바늘구멍보다 작아 복권에 당첨되는 확률에 다를 바 없지만...

이것이 우리나라 다큐멘터리사진가들의 현실이다.

비록 다큐멘터리사진만 그런 게 아니라 예술인 전반에 대한 빈곤의 문제지만,

작업실에 앉아 할 수 있는 문학 같은 일과 현장을 누비고 다녀야 하는 다큐사진과는

경제적 비용 발생에서 큰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오랜 세월 지속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역사박물관의 사진 소장 율을 대폭 확대하고,

가난한 예술가들을 위한 창작지원 시스템이 피부에 와 닿을 수 있도록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일반인들도 다큐멘터리사진에 관심을 좀 가져주었으면 좋겠다.

여유가 있는 분은 사진 한 점이라도 소장해 주고, 사는 게 그렇고 그런 분들은 사진집이라도 한 권씩 구입해주자.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하는 다큐사진 시리즈는 한 권에 12,000원이라 별 부담도 없지만,

유익한 사진들이 실려 있어 구입 가치가 높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진실을 알고 싶어 한다. 비록 그 진실이 고통을 안겨줄지라도....

그리고 밝혀진 진실은 바로 우리의 역사가 된다.

그래서 가려진 세상의 위장막을 걷어내는 다큐멘터리사진이 중요한 것이다.

다큐 사진가가 살아남아야 세상이 밝아진다.





덥지근한 장마철에 눈이 번쩍 뜨이는 사진전이 열렸다.
오는 20일까지 충무로 갤러리브레송에서 열리는 양승우의 청춘길일이다.
일본을 비롯한 외국에서는 숱한 전시를 하였건만, 고국에서는 처음 있는 전시다.





개막식에 참석하지 못해, 아내가 쉬는 날을 택해  함께 전시장을 찾았다.

여기 저기 볼일이 많아 차를 끌고 나왔는데, 정차 중에 브레이크가 밀려 경미한 접촉사고가 난 것이다.

간신히 처리하고 전시장에 들렸더니, 양승우씨 내외를 비롯하여 김남진 관장도 있었다.



몇 일전, 인터넷에 올라 온 사진들을 보아 기대는 했으나, 전시를 보고 깜짝 놀란 것이다.

전시장 가득 돈 냄새와 여자냄새, 마약 같은 찐득한 냄새들이 진동했는데,

인간의 존재 의미를 되묻는 듯, 내면에 숨어있는 원초적 욕망을 꿈틀거리게 했다.

오랜만에 사진다운 사진을 보았다.





시를 보고 말한 미술학자 이태호 교수의 말이 적확했다.
고급스런 하위문화가 넘쳐나는 세상에 저질스런 고급문화를 본다.

양승우의 사진을 보면 그동안 우리 다큐가 세상의 한쪽 구석에서 참으로 소심하고

착하게만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반성하게 된다.고 말했다.

전시장에서 본 작가의 첫인상은 폭력배처럼 우락부락한 것이 아니라, 내성적이고 온순한 사람이었다.

또 겸손했다. 단지 그의 눈빛에서 강한 의지력을 읽었을 뿐이다.






조직 폭력배로 삶을 살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친구가 사진 찍는 동기부여를 했다고 한다.

대개의 다큐멘터리사진가들이 내세우는 사회에 감춰진 이면을 기록하려는 사명감에 앞서,

사진가로서 죽은 친구 사진이 한 장도 없음을 후회하며 살아남은 친구들을 찍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얼마나 솔직한 말인가? 사실, 잘 모르는 사람보다 가까운 사람을 찍는 게 스스로에게 더 필요하지만,

대부분의 사진가들은 명분 있는 사회적 약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양승우 사진에 등장하는 조직폭력배들도 돈 없는 죄와 못 배운 죄를 짊어 진

사회적 약자에 다름 아니며, 똑 같은 인간일 뿐이다.

사진에 드러난 찐득한 모습 뒤에 인간적인 애잔함도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양승우의 사진이 껄끄럽거나, 그 사진 속의 사람을 손가락질 할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밖으로 들어내지 않아 그렇지, 어느 정도의 양면성은 다 있다.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고, 섹스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앞서 언급했지만, 충무로 역 앞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다, 차가 밀려 앞 차를 받은 일이 있었다.

경미한 충격이지만 내려 보니, 차에 아무 이상도 없었다. 그러나 당연한 듯 인사사고로 접수하라는 것이다.

영업용 기사야 힘들게 일하는 것 보다 병원에서 지내며 일당을 받아 낼 욕심인지 모르지만,

뒷자리에 앉은 보험회사원까지 병원에 가겠다는 것이다.

더 황당한 것은 예전에는 목이라도 움켜지며 아픈 척이라도 했지만, 지금은 아주 당연하다는 식이다.
이런 지저분한 세상에, 의리 하나로 뭉쳐 사는 그들을 누가 욕할 수 있겠는가?






양승우는 2006년 도쿄공예대학 미디어아트 박사전기과정을 수료하기까지 10여 년 동안 청소를 비롯하여

온갖 잡일에 전전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했다. 그 사이 가부키초의 야쿠자를 시작으로 고토부키초의

일용직 노동자, 노숙자 곤타씨 등 서너 개의 테마를 동시에 찍었다.


20여 년 동안 열 번 이상의 사진전과 네 권의 사진집을 냈고, 열 번 이상의 사진상도 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일본 도쿄의 젠 포토 갤러리와 프랑스 파리의 인 비트윈 아트 갤러리소속작가지만,

여전히 일용직 노무자로 일하고 있다. 이것이 다큐멘터리사진의 비참한 현실이다.






언급한 이력이나 유명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진들이 주변을 오가며 찍은 것이 아니라

그 조직폭력배의 일원으로 찍었다는 것이다.

함께 즐기며 찍지 않고는 이렇게 강력한 소구력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칫하면 교도소는 물론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 각오로 온 몸을 바쳐 즐기는 사진가가 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겠는가?

전시된 사진들은 옛 친구들과 놀던 2003년부터 2006년 까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찍은

우리나라 조폭집단의 실상이지만, 일본의 야꾸사들을 찍은 사진집도 펴낸 적이 있었다.

한국에선 조직폭력배 친구들이 많아 쉽게 접근할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일본은 달랐다.

찍으려는 작가의 진정성을 알아보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가 찍은 사진들은 피사체와 작가의 경계가 없다

주변의 누군가에 카메라를 쥐어 주고는 자신이 사진화면 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혹자는 그게 어떻게 양승우의 사진이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가 셔터를 눌렀나 보다 함께 교감하는 작가의 의도가 더 중요한 것이다.






사진가가 찍어 온 야쿠샤, 노숙자, 동성애자 사진들은 자기 이야기를 하듯 친밀하다.

어디가 진실이고 허구인지가 궁금할 정도로 기록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자신이 당하는 현실 속의 분노와 욕망의 찌꺼기까지 과감하게 드러내 보여 주었다.
밑바닥 인생의 솔직하고 과감한 접근들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강한 충격을 안겨 준다.
우리사회의 숨겨진 일면을 담아낸 이 자전적 기록들은 누가 뭐래도 역사로 길이 남을 것이다.

이토록 훌륭한 사진가이건만, 살아가는 현실은 비참하다. 한국에 들어 와 살고 싶지만,

한국에는 일거리 얻기가 힘들어, 그나마 아르바이트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일본에서 산단다.

그 것도 몇 년 동안 길거리에 노숙하며 살았는데, 사진과 재학 때 후배였던 지금의 아내가 결혼을 서둘렀다고 한다.

 


 


전시 개막식에서 했다는 그의 말에서 고집스런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오늘 여기 오신 여성분들이 볼 때는 제 사진이 좀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사진이냐? 라고 하시는 분이 계시면 싸울 수 밖 에 없습니다.

예술이란 답도 없고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해나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앞으로 계속 해 나갈 것입니다.





전시와 함께 눈빛출판사의 눈빛사진가선 27양승우사진집 청춘길일이 나왔다,
가격은 12,000원이다.


글 / 조문호








좌로부터 필자 조문호, 양승우 부부, 뒷줄 김남진 브레송관장과 장터사진가 정영신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 20일~30일까지

'사진인을 찾아서' 여섯 번 째 사진가 ‘권철 론’이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 20일 오후6시30분에 개막된 사진전에서 이광수교수의 작가론과 사진가 권철의 결연한 작업 이야기를 들으니, 가라앉은 분노가 또 다시 치밀어 올랐다. 한 동안 정치와 사회적으로 만연한 부조리와 사진판 비리에 목소리를 높여 왔던 것도 권철 같은 고통 받는 다큐멘터리사진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권철,뎃짱1



최민식 사진상이 끼리끼리 해 처먹는 것도 모르고, 작년에 권철씨가 들러리를 선적도 있었다. 사진을 모르는 어린애가 보아도 수상작보다는 권철의 사진이 뛰어나다는 것은 다 안다. 그리고 사진도 사진이지만, 권철은 어렵게 작업을 이어가는 의지의 사진가가 아니던가?

'브레송'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사진인을 찾아서’란 이 기획전은, 사진은 좋지만, 속칭 진골 성골에 가려있는 진정한 사진가를 찾아 내어 작가의 전 작품을 보여주는 전시라, 한 가지 주제로  보여주는 일반 전시와는 기본적으로  다르다. 그리고 보아왔던 회고전 형식의 원로전과도 다른 것은 이건 종료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이다. 생각이나 형식들이 변해가는, 작가들의 주제와 접근방식, 그리고 진전하는 과정들을  한 눈에서 본다는 것은 한 작가를 이해하는데 안성마춤인 것이다.


이번에 초대된 다큐사진가 권철은 못 말리는 '독고다이'다. 이십대 중반에 사진 공부하러 일본 들어가 환락가 신주쿠 가부기초를 촬영했다. 보통 깡다구가 아닌 것이다. 자칫하면 야쿠자 한테 맞아 죽는다. 18년 동안 기록한 그 사진으로 고단샤 출판문화상 사진상도 수상했다. 그렇다고 주먹들의 세계만 보여주는 소재주의에 빠진 사람도 아니다.



▲권철,가부키초2


그는 모두가 외면하는 한센병회복자의 삶은 담은 ‘텟짱’으로 데뷔한 인간미 넘치는 사진가다. '텟짱' 이야기도 마찬가지지만 대부분의 작업들이 진실을 찾아내서 밝히고 그것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이었다.


‘텟짱’은 소외에 대한 이야기다. 일본에서 소외당하고 멸시당하는 '조선인'의 모습을 일본 한센병회복자 요양원에서 찾았는데, 주인공은 요양소에 살았던 시인이자 한센병 회복자인 텟짱이었다. 권철은 텟짱이 사망하기 까지, 14년 동안 그의 삶을 사진으로 담아 온 것이다.


중요한 것은 권철이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 헌신적인 정신으로 무장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결정적인 사진 한 두 장만 찍으면 사는 데 지장 없는, 안정된 기자 자리를 사진을 위해 박차고 나온 사람이다.



▲권철,야스쿠니, 국국주의의 망령1


2008년 중국 쓰촨성 대지진을 취재하다 무너진 건물에 끼여 양 다리를 절단하는 소녀의 모습을 보고 한계를 느낀 것이다. 사람에게 닥친 고난이 자신의 밥벌이라는데, 어찌 회의감이 들지 않았겠는가?


저널리즘의 사진기자는 뉴스를 찾아가지만 다큐멘터리 사진가는 스스로 뉴스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래서 권철은 조직이나 배경보다 세상과 독대하며 찍어 왔다. 그러면서도 외양이나 현상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사회, 그리고 구조와 본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동안 한국과 일본의 근대사가 만들어내는 풍경을 자신의 주제로 삼았는데, 가부키초, 야스쿠니, 오오쿠보 코리안타운, 우토로 등 모두가 일제 식민 경험과 연결된 사건들이다.




권철-야스쿠니,군국주의의 망령3


그 이후, 그의 자식이 태어난 지 100일째 되는 날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터졌다, 가족을 위해 안정된 생활권을 모두 버리고, 무작정 한국으로 귀국하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한국 사진계의 현실을 주위에서 알려주었으나, 그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은 제주 거리에서 풀빵 장사를 하며 어려운 작업을 어어 가고 있는 것이다.



▲권철, 야스쿠니,군국주의의망령4



제주에 정착하며 시작한 ‘이호테우’작업은 중국 자본 침탈의 역사를, 한 해녀를 통해 풀어 간 것이다, 바다를 배경으로 한 평생을 살아 온 해녀 할망의 집념과 쓸쓸함이 사진에 묻어있다.


그리고 신자유경제 물결로 인해 서서히 중국인들이 점령해가는 제주의 모습을, 바다 멀리 중국인 관광객들을 가득 실은 어마어마한 크루즈선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권철은 작년 여름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기도 했다.일본 군국주의의 망령을 사진으로 고발하기 위해 제주시 제주목관아 안에서 사진전을 열겠다고 요청하자 제주시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허가 해줬다.



▲권철,야스쿠니,군국주의의 망령2


그런데 광복회 회원 몇 명이 나타나 일장기가 드러난 사진을 '감히' 광복 70주년에 걸려 하느냐고 제주시에 항의하자, 제주시는 그 항의를 받아들여 사진전을 일방적으로 취소해버린 것이다. 일장기가 있으면 친일이라는 그 단순 무지한 문맹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어찌해야 좋은가?,


그래서 야스쿠니 사진들을 이호테우 해변 길거리에서 전시 한 후, 모두 불태워버렸다.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한 항거였지만, 잘못된 사회구조에 대한 항거의 뜻도 담겨있다. 그는 있는 사건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있는 사건을 이미지화 한 후, 그 것을 퍼포먼스를 통해 새로운 사건으로 만들어가는 사진가다.




▲권철,이호테우1



그는 야스쿠니 사진을 불 태웠던 이호테우 매립장에서부터 시작하여 제주 전 지역을 순회 전시한다. 다큐멘터리 사진가에서 행동하는 사진가로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권철이 세상을 독대한다는 것은 곧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망각해버린 역사에 대해서만도 아니다.


자기들끼리 나눠 먹고, 예술이라 이름 붙여 노닥거리는 한국 사진판에 대해서도 저항하고 있다. 

권철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국한 걸 뒤늦게 후회하고 있다.

 



▲권철, 이호테우2



그 가장 큰 이유는 사진판 자체가, 일그러진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그가 20년간 살아온 일본은 많은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나쁘고, 무식한 나라가 아니다. 일부 정치인들이 제국주의적 근성을 버리지 못해 판을 깨고 욕을 먹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에 대해 배려할 줄 알고, 돈이 없거나 힘없는 사람들을 그렇게 무시하지 않는다. 실력이 있으면 그만큼의 대접을 해 준다.


그렇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았다. 약육강식의 정글이고, 철면피의 세계다. 비단 정치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진판은 더욱 심하다. 권력 있는 기득권자는 자기 패 끼리 판을 짜고, 어중간한 사진가는 그 주변을 서성거리며 온갖 추파를 보낸다.



  

▲사진가 권철


[서울문화투데이] 조문호 기자/사진가



권철이 좌절한 이유가 바로 이러한 한국 사진계의 연줄과 인맥이었다. 실력은 뒷전이고, 줄서기를 잘 해야 하는 이 썩어 문드러진 사진판에 어찌 구역질이 나지 않았겠는가?


그렇지만 그의 작업은 중단되지 않는다. 2011년 일본 동일본대지진 피해지와 후쿠시마 원전을 취재한 후 국내 노후 핵발전소를 찍는 중이다. 두 나라의 핵발전소 문제를 끄집어내는 것만으로 메시지 전달은 분명하다. 그의 다음 작업은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제주에서 땅을 침탈하는 중국인들이라고 한다.


비평가 이광수교수는 권철이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면서  문학적으로 약간의 표현 방식을 바꾸었다고 말했다. 개 두 마리가 서성거리는 이미지에서 세상이 망해 인류가 사라진 후의 지구를 암시하고, 새끼줄에 묶인 죽은 굴비의 쭈그러진 모습에서 인간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미래를 말한다는 것이다. 


‘갤러리 브레송’ (02-2269-2613)에서 열리는 이 전시는 6월30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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