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이 변하고 있다.

가게들이 바뀌고 낭만은 사라졌다.

지루한 거리두기로 거리가 지루하다.

 

그래도 인사동은 인사동이다.

변하는 것은 미워도 인사동은 미워할 수 없다.

 

일주일에 두 번 가던 곳이 한 번가고,

이젠 한 번도 못갈 때가 있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갈 곳이 없어서다.

전시 작품보다 정 나눌 사람이 없다.

 

예술가 만나기도 쉽지 않고 대폿집 풍류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이 죽일 놈의 코로나가 부채질한다.

 

 

몸은 멀어도 마음마저 멀어질 수는 없다.

영원한 추억의 저장고기 때문이다.

 

 

미국 가신 최정자 시인이 생각난다.

얼마나 그리웠으면 ‘서울로 서울로’를 노래했다.

그 시집 나온 지가 어언 20여년이 되었다.

 

몇 년 전만해도 생활비 줄여 만든 돈으로

일 년에 한 번은 빠지지 않고 오셨으나,

힘들어 못 오신지가 사 오년 된 것 같다.

 

한번 갔다 오면 며칠 동안 앓아눕는다더니

이젠 도저히 엄두를 내지 못하신단다.

 

인사동이 그리워 틈틈이 블로그나 찾았는데,

영영 인사동과 작별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디 최정자 시인뿐이던가?

강 민시인은 저승에서 '인사동 아리랑' 노래를 부른다.

인사동 사람들이 한 분 한분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래도 아직은 인사동을 그리는 인사동 사람들이 있다.

멀리서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들려 향수 달랜다.

내가 거리풍경을 찍어 올리고 인사동타령을 해대는 이유다.

 

인사동 사진집을 만들려고 출판사 계약서 받은 지가 일 년이 가깝지만,

 아직도 원고를 넘기지 못하고 있다

마침표가 될 사진집이 내 발길을 멈추게 할까 염려되어서다.

 

요즘은 세상이 뒤숭숭해 인사동도 잘 나가지 않는다.

동자동에서 녹번동 가는 길에 잠시들려 안부나 묻는 정도다.

인사동 거리를 기웃거리지만,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다.

 

엊그제도 지나치는 길에 인사동에 잠깐 들렸다.

미친 코로나에다 폭염까지 겹쳐 거리는 한산했다.

 

일주일 만에 본 인사동 거리지만 계속 변하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추억 지우느라 안달하는 것 같았다.

 

전통적 상품을 거래하던 매장들이 옷가게로 바뀌고 있다.

민예품이 놓였던 진열대는 옷과 마스크가 대신했다.

 

코로나가 시작될 때부터 문 닫았던 ‘보물창고’가

더디어 새 주인을 만났는지 실내장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쌈지 건물 벽에는 임금을 기다리다 죽었다는

궁녀 설화가 담긴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마치 누굴 기다리 듯 애잔하다.

 

‘통인화랑’은 ‘미술관 속 그림과 조각전‘이 열렸고,

‘나무화랑’은 인사동활성화를 위한 신진작가 공모전이 열렸다.

 

전시장마다 작품은 걸렸지만, 반가운 사람이 없다.

인사동을 사랑했던 인사동 사람들은 다 어디 갔을까?

몽유병 환자 같은 늙은이만 거리를 떠돈다.

 

인사동의 봄은 요원한 것인가?

아! 그 때 그 사람이 그립다.

 

사진, 글 / 조문호

 

정영신사진


살아 생선 강민선생께서 주도하신 인사동 오찬 모임이 오랜만에 다시 열렸다.
선생께서 돌아가시고 부터 서서히 잊혀져갔는데,
강민선생은 차지하고라도 김승환, 방동규선생 등 다른 분마저 뵐 수 없었다.
언젠가 자리 한 번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서정란씨로부터 메시지가 온 것이다.



조문호샘 올해 가기 전에 송년회 한 번 해요. 강민 선생님과 친분 있는 분들이랑요

그래서 "얼씨구나" 만들어진 자리가 지난 30일 정오에 뭉친 나주곰탕오찬모임이다.

인사동 툇마루일층의 나주곰탕은 강민선생 단골이기도 했지만,

탕 속에 고기가 푸짐해 술안주로 안성마춤인 밥집이다.


 


약속장소는 손님이 꽉 차, 다들 그 옆에 있는 찻집에 앉았는데,

방동규, 김승환 선생님을 비롯하여 박희연, 서정란, 이명옥,

이은정, 전태수씨 등 여러 분들이 자리 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보면 반갑고, 앉으면 빨고 싶은 분들이 아니던가?

강민선생님이 계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다.


 

그런데, 이게 왠 말인가?

서정란씨 이야기가 오늘 점심은 돌아가신 강민선생님이 산다는 것이다.

모임이 정해지고 생각지도 않은 전화를 받았는데, 강민선생 아드님이었다고 한다.

아버님께서 자주 만났던 분들께 인사동에서 밥 한 끼 대접하겠다"는 것이다.

이심전심이었다.

이건 분명 강민선생님께서 저승에서 아들에게 지령내린 것이다.


 

창밖을 내다보니, 기국서씨가 '나주곰탕'으로 급하게 들어가고 있었다.

가서 찻집으로 데려 왔는데, 차라도 한 잔 하며 여유롭게 즐기라는 계시였다.

다들 연말이라 모이는 곳이 많은 모양인데, 뒤늦게 이행자시인도 나타났다. 

뚜꺼비 같은 소설가 김승환선생은 인증 샷만 찍고 도망치셨다.




 나주곰탕’에서 자리 비었다는 전갈에 다들 밥집으로 옮겼다.

소주 한 잔하며 탕 그릇에서 건져 놓은 수육을 보니, 돌아가신 강민선생님이 생각났다.

술 안주로 건져놓은 수육을 매번 슬며시 내 접시로 옮겼는데, 마치 죽은 울 엄마 같았다.

불의에는 칼날처럼 매서웠던 강민선생님의 그 자상한 모습이 떠오르니, 어찌 눈물이 나지 않겠는가.


 

눈물이 탕 그릇에 떨어지는 거야 괜찮으나, 누가 볼까 쪽팔려 미치겠더라.

밥이 코로 들어가는 지, 술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요량도 못한 채 취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밀정원으로 차 마시러 갔다.

, 까발리는 걸 좋아하는데, 다들 비밀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비밀정원에 가 있으니, 다른 곳에서 한 탕 뛰고 온 김명성씨가 나타났.

기국서씨는 술이 부족했던지, 보드카처럼 생긴 독주 한 병을 사 왔다.

난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두 잔만 마셨는데, 그 술을 혼자 홀짝 홀짝 다 마셨다.


 

오늘은 빠질라고 작정하고 왔어요’라고 했던 귀엣말이 생각났다.

기상천외의 퍼포먼스가 일어날 것 같은,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자리에서 일어 나 남녀가 약속이나 한 듯 갈라졌다.

방배추선생께서 기국서, 김명성씨등 꼬봉들을 거느리고 유목민을 습격한 것이다

가보니 송일봉씨가 입구에서 뭔가를 정탐하는 것 같았고,

안쪽에는 시인 정동용, 기타리스트 김광석, 발렌티노김도 보였다.


 

여기 저기 다니며 사진 찍을 일도 많은데, 방배추선생 구라 듣느라 퍼져버린 것이다.

방동규선생이 누구더냐?

백기완, 황석영씨와 더불어 조선의 삼대구라로 꼽히는 분이 아니던가.

방배추선생은조선의 주먹등 최고로 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흔을 바라보는 연세에 노동판에 일하러 가고, 체육관에 다니며 체력 관리하는 분이다.

, 한마디로 선생님을 義人이라고 생각한다. 옳지 못한 것은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다.

태극기부대나 가셔야 할 분이 촛불집회마다 쫒아 다니신다.

얼마 전 김정헌씨 작품 보러 간 영종미술관에서 그림 보며 내려오다 굴러 떨어져

엠블란스에 실려 갔다는 소식도 뒤늦게 들었다.


 

그 날 하신 말씀도 놀랄 노자다.

여지 것 청년으로 생각했는데, 갑자기 노인이 된 것 같다는 말씀이셨다.

오죽하면 선생님이 살아온 그 소설 같은 실화를 기국서씨 더러 극화하라는 이야기까지 나왔을까?

그 날 이야기만도 밤 샐 것 같아 말머리를 돌려야겠다.


 

기국서씨는 귀가 어두워 여기 저기 귀 기울이는 꼴을 보더니, 날 더러 탐색가라 했다.

내 귀에는 색을 탐하는 자로 들렸는데, 제 버릇 개 못 준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두 번째 툇마루에서 열릴 인사모시간이 늦어버렸다.

정동용씨 더러 있으라 해놓고 사진 한 장 찍지 못한 채 달려갔는데,

가서 된장비빔밥에 술말아 또 한 잔 걸친 것이다.

반가운 분들과 노닥거리니, 시간은 잘도 갔다.


 

작별 인사하기가 무섭게 유목민으로 달려가니, 이미 술꾼이 바뀌었더라.

방동규선생을 비롯한 잔당은 물론 정동용, 발렌티노김, 김광석씨도 다 사라져버렸다.

새로 등장한 이인섭선생을 비롯하여 사진하는 이정환, 성유나씨가 있었다.

금주 한지가 두 달이 넘었다는 이정환씨는 소주잔에 음료수를 따라 마셨다.

그 술 좋아하는 사람이 미치고 팔짝 뛸 일이 아니겠는가?

정말 살아남기 힘든 것이다.


 

그나저나 긴장이 풀려 그런지, 술이 슬슬 올랐다.

쪽방 계단 오를 일이 겁나 줄행랑쳤는데, 인사동 밤거리는 축축했다.

어떤 미친 할매라도 납치되고 싶었다.



쇼윈도를 올려다보니, 처녀귀신이 잡아먹을 듯 내려다보았다.

네 이놈! 아직 정신 못 차리고 탐색하냐?

강민선생께 일러바쳐, 저승 오면 곤장이 백대다

 

사진, / 조문호
















정영신사진






































인사동이 인사동 아닌 것 같다.



거리는 젊은 사람들이 오가고,
관광객들이 사진들을 찍는 일상적인 풍경이지만
뭔가 구멍 뚫린 듯 허전하다.




인사동, 인사동, 노래 부른 강민선생이 떠나서 일까?
인사동 터줏대감이 사라진 허전함 같았다.
날씨까지 비가 왔다 갔다 지랄 같았다.




인사동의 거리도 낯설고 사람들도 낯설다.
옛 시인이 한탄한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가 아니라
“산천도 인걸도 모두 간 데 없네”가 되고 말았다.




세월 따라 인사동은 또 바뀔 것이고,
거리를 메우는 사람도 쉼없이 바뀔 것이다.
그게 필연이나 하나는 지켜야 한다.




인사동 정신과 풍류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 아리랑'을 노래한 원로시인 강민선생께서 지난 22일 오전 6시 55분 먼 길을 떠나셨다.
이제 천국에 잘 도착하여 사랑하는 이국자선생님도 만나고,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 신봉승, 심우성선생 등 먼저 가신 친구들 만나
인사동 이야기들 하시느라 바쁠 것이다.




 선생님!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은 틀린 말이지 예?

 그 곳은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가 있는 차별의 세상도 아니고요.

설사 차별이 있다 해도 집사님 빽으로 지옥에 내치지는 않겠지요.

머지않아 선생님 좋아하시는 복분자술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선생님 가신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눈물이 말랐네요.

고마웠다는 인사도. 먼저 떠나 섭섭하다는 원망도,

모두 바람에 날아 가 버렸습니다.


선생님! 사람 사는 게 바람처럼 이렇게 가벼운 것입니까?

요즘 부쩍 눈물이 자주 흐르는 걸 보니, 나도 늙었나봅니다.

후회가 더 많은 세월이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이 계시지 않는 인사동은 불 꺼진 등불입니다.

누가 선생님처럼 가슴 아파하며 골목골목을 찿겠습니까?

외로운 친구들과 사랑하는 제자들 불러내어 곰탕 건대기 건져놓고

소주 잔 부딪히는 그런 시간을 어찌 만나겠습니까?

또, 김승환선생과 방동규선생은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선생님께서 인사동을 방황하던, 골목골목의 가게들이 생각납니다.

단골로 드나드셨던 나주곰탕을 비롯하여 귀천’, ‘인사동 사람들’, '여자만'

포도나무집’, ‘유목민어디를 가도 선생님을 뵐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막막합니다.



선생님의 시에 대한 지조를 사랑했고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을 사랑했습니다.

  

 


선생님은 가셨지만, 선생님의 노래 인사동 아리랑은 영원할 것입니다.

주인 바뀐 황량한 인사동 골목 어디에선가 선생님의 시가 흘러나올 것이다.

선생님의 슬픈 인사동 노래가...


 

그동안 미친 망둥이처럼 날 뛰는 나를 보며 마음은 또 얼마나 졸였겠습니까?

부디 용서하십시오.

돈에 눈이 멀어 인간이기를 포기한 더러운 세상, 어찌 미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미안하고 미안합니다.


 

선생님을 잊을 수 없는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칩니다.

전시 사진 들고 동오리 찾았을 때 일입니다.

그 날 선생님 내외분의 행복한 모습은 잊혀지지가 않네요.

밥이라도 먹고 가라며 기어이 끌어 앉혔는데,

이국자 선생님께서 끓어주신 된장국은 콧등이 시리도록 맛있었습니다.

문 앞마당에 흐드러지게 핀 목련은 왜 그리 슬퍼 보이는지,

어쩌면 행복이란 것 자체가 슬픈 것일까요


 

 

그리고 천상병선생 20주기 맞았을 때 일입니다.

인사동 봄 소풍 잔치 때도 오직 선생님만 걱정에 걱정을 하셨습니다.

여기 저기 구걸하여 만들어 준 그 돈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말씀은 없지만, 그 따뜻한 마음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돌아 가실 때마다 선생님 뒷모습이 얼마나 슬퍼 보이는지,

아마 선생님은 속울음을 삼키고 계셨을 것입니다.


 

이제 모든 것 잊으시고 편안하게 잠드십시오.


 

못난 조문호가 큰 절 올립니다.


 

 강민 선생의 장례식은 지난22일부터 24일까지 분당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렸다.

국제 PEN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 한국작가회의에서 주관한 문인장으로 열렸는데,

824일 오전 930분 분당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추모식도 열었다.

8241030분에 발인하여 용인, ‘양주 장충동산에 안장되었다.




 

지난 23일 오후 4시경 정영신씨와 분당 장례식장을 찾았다.

입구에서 담배 피우던 김명성씨와 김상현, 김상윤, 전태수씨를 만났는데.

장례식장에는 정승재, 조준영, 서정란, 김가배, 이도연, 김이하, 정복수, 전활철, 노광래,

서정춘씨가 있었고 뒤늦게 구중서선생님도 오셨다.




- 강민 시인이 병상에서 남긴 마지막 시-  


<이승의 간이역>

내 떠나야 할
인생의 간이역은
화려하면서도 소박한
꽃밭이다





































 


1933년 서울에서 태어 난 강민 시인은 1962자유문학으로 등단해 시집 물은 하나 되어 흐르네’,

 ‘기다림에도 색깔이 있나보다’, ‘미로(迷路)에서’, ‘외포리의 갈매기와 공동시화집 , 파도, 세월’,

시선집 백두에 머리를 두고를 펴냈다 공동 산문집 우리는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도 있다.

전쟁과 분단, 독재로 이어진 현대사를 몸소 체험하며 삶의 애환과 고통스러운 저항의 노래를 불렀다.

시 동인지 현실과 드라마 동인 네오 드라마에도 참여했다.

고인은 학원을 비롯해 주부생활편집국장, 금성출판사 상무이사 등 출판계에 몸담았고

많은 문인과 교류해 걸어 다니는 한국 문단사로 불렸다.

윤동주문학상, 동국문학인상, 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4,3 퍼포먼스 군중 앞에서, 광화문광장



선생님!
이제 눈물도 말랐습니다.
잘 가셔서 사모님께 안부 전해 주이소.
고통의 시간이 너무 길어 가슴 아팠습니다.


거리에 사람은 많지만 사람냄새가 안 납니다. 유령의 도시입니까?



언젠가 한 번은 가야할 길,

뒤돌아 보지 않는 어연함이 가슴 아픕니다. 

그리운 사람 만나려 모든 고통 참아낸 인내가 존경스럽습니다.



시대의 협객 방배추선생과 인사동 씨궁창 여관 골목에서...


광화문광장에서 4,3의 원혼들과 대면한

강민 선생님의 사진 한 장이 생각났습니다.
짙은 그림자가 깔린 사진들을 보니, 다시 눈물이 납니다. 


얼마나 분했습니까? 그 날 광화문 광장을 메운 4,3 원혼의 외침에...
 
온통 인사동 사랑에 서러워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인사동은 바로 그리움의 고향입니다.



선생님 시집 나와 '나주곰탕'에서 밥 먹었지 예! 좌로부터 김상현.김명성,강민, 방동규, 조준영씨


‘인사동 연가’ 시사전을 하자는 말도,
때로는 선생님 호출에 나서지 못한 죄송함도 밀렸다.


동시에 작별인사를 하니 사내보다 여인이 먼저네. 그거야 당연하제, 여인천하가 아니가?

이제 인사동은 희미한 등불마저 꺼져버린
불 꺼진 항구나 마찬가지다.


신경림시인 뒤에 연극연출가 기국서씨도 있네요. 야! 인사동 거물 총 출동이야~


인사동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으나,
선생님처럼 온 몸으로 사랑하신 분은 없다.


인사동 찻집 '귀천' 앞에서

‘인사동 아리랑’을 노래한 강민선생님의 시 구절이 떠오른다.


아이구! 한 분 이름이 기억 안 나네. 옆에는 김가배시인과 이행자시인 인데..."죽어면 늙어야지" 인사동 '포도나무집' 앞에서..
 
“어딘가 전화라도 걸까

 눈시울만 시큰할 뿐

 휴대전화를 만지는 손가락은 뻣뻣이 움직이지 않는다”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만난 모습이 너무 슬퍼보입니다.

선생님, 기어이 손가락이 뻣뻣해 전화 못 하셨습니까?


인사동 '툇마루'에서 황명걸, 구중서선생과 된장 비벼 막걸리 한 전 하셨습니다.

부디 가셔서 정의로운 세상 되도록 힘 좀 써 주시고,

사모님 만나 알콩 달콩 재미있게 사십시요.

따라가면 이국자선생님이 보글보글 끓여주신 옛날 된장국 맛도 볼 수 있겠네요.

안부 전해주이소.


연극배우 이명희씨 머리 위에 귀신 붙은 것 한번 보세요. 심우성선생께서 눈독들이시네..


선생님 앨범에 담긴 몇 장을 추려내어 강민 선생님을 추억합니다.


김승환선생 뒤에 방배추 선생님이 뻬꼼 내다 보네요. 술맛 나는 꼽꼽한 날, 분위기 좋습니다.


행자 누부야~ 우짜꼬?

강민 선생의 시 ‘인사동 아리랑2’ 황혼 편이다.


'외포리 갈매기' 시집출판연에서 찍은 사진이네요. 뒷 모습으로 보이는 분은 구중서선생님과 민영 시인입니다.


“붐비는 인파 속에도

내가 찾는 이는 없다

오늘도 인사동 걷기는 허전하다

추억처럼 불빛이 켜지고 있다

열이 오르며 목이 마르다

잃어버린 불모의 사랑이 허공을 맴 돈다

어딘가 전화라도 걸까

눈시울만 시큰할 뿐

휴대전화를 만지는 손가락은 뻣뻣이 움직이지 않는다

종로 쪽 멀리 남산이 다가오고

차츰 어둠의 장막도 깔린다.

나 이제 또 어디론가 돌아가야 하리

그이의 아지트였던 찻집<보리수>도 없어졌다

진공의 거리어디선가 그리운 이들 목소리 들리는 것 같다

돌아가리돌아가리그런데 이 끝없는 외로움은 무엇인가

풀리지 않는 눈물의 의미와 그리움은 무엇인가

기다리고 있을 밤의 공동(空洞)이 두렵다“


인사동 벽치기골목에 있는 유담커피집에서 두 귀신선생께서 여인네들 데려갈라 꼬시네요.


'토포하우스'에서 정승재교수 전시할 때 사진입니다.


저승 선배인 신봉승선생님 만나 술 한잔 하시겠네 예


'인사동사람들' 마담과 참 잘 어울립니다. 수줍어 얼굴이 붉히네요.

뽀뽀 한 번 해 주었습니까?


김승환선생님과 강민선생을 바라보는 여인내 눈길이 아릇하도다. 송상욱 선생은 돌부처인가?


아! 이때만 해도 청춘이셨는데... 그 많은 여인네들 눈도 삐었지..


뮤지션 김상현씨와 조준영 시인이 어울려 건배를 하네요. 뭔가 의기투합해 사고 칠 것 같지 않습니꺼?


아이구! 저 칠떡이는 왜 나와 어물전 망신 시키나? 사진은 정영신씨가 찍었다.


역전의 용사들이 처들어간다. 좌로부터 조준영, 강민, 심우성선생



선생님! 사는 게 별거 아니지요?  

선생님의 사랑은 뜨거웠습니다.

사람이던, 인사동이던, 시던...

사랑합니다. 선생님

조문호 합장






인사동 아리랑 1

비 / 강 민


인사동을 걷는다


스산한 경인년 여름, 비는 멎지 않았다
찻집<귀천>의 주인 목순옥 여사도 떠났다
그녀는 거기 하늘나라에서
그리운 천상병 시인 만나
이 세상 소풍 끝내고 아름다웠다고 말하였을까

세월의 이끼 낀 인사동을 걷는다

흐르는 세월처럼
눈물처럼
비는 멎지 않는다


-『백두에 머리를 두고』창비, 2019


2010년 경인년 여름, 비가 출출히 내리는 날 인사동을 걷는다.
인사동 나오면 늘 들르던 곳이 찻집<귀천>이다.
천상병 시인 부인이 경영하던 조그마한 찻집은 문학인들, 예술인들이 드나들던 사랑방이다.
시인은 약속 없이 귀천에 와도 허름한 옷차림에 허름한 바랑 짊어진 민병산 선생, 4·19의 시인이며 그의 절친한 친구 신동문,

삐딱한 헌팅모, 멋진 홈스팡 영국풍 신사 차림의 방송작가 박이엽을 만나곤 했다.
술 한 잔 마시면서 웃고 울던 그들도 세월의 더께를 이기지 못해 저세상으로 하나씩 둘씩 떠났다.

담배 한 갑, 막걸리 두 병만 있으면 행복하다는 천상병 시인도 이미 하늘나라로 갔고,
시인 부인인 목순옥 여사도 25년 인사동 지킴이를 내려놓고 이 세상 소풍을 끝냈다.
이제 인사동에 와도 갈 곳이 없다.
흐르는 세월처럼, 비처럼, 눈물이 멎지 않는다.(박미산)






인사동 아리랑 7

유목민 이야기 / 강민

 

날이 저문다

해가 저문다

골목길의 모습이

기우는 낙일(落日)에 젖어 낯설다

갑자기 붐비는 인파, 시끄러운 소음이 멎고

홀로 그 길을 가고 있다

이 황무지, 사막의 유목민들은 모두 어디 갔나

갈증을 풀던 그늘, 오아시스는 또 어디 갔나

문득 거기 찻집 <귀천>이 보인다

혀 짧은 소리로 부르던 천상병,

그의 부인 목순옥,

허름한 옷차림에 허름한 바랑 짊어진 민병산 선생,

4.19의 뛰어난 시인이며 그의 절친한 친구 신동문,

삐딱한 헌팅모, 멋진 홈스팡 영국풍 신사 차림의

방송작가 박이엽,

그이들이 거기 앉아 있다

움직임이 없다

슬프다

정물화된 골목을 벗어나

큰길로 나서는데

쭈그러진 모자에 카메라를 든 유목민 한 사람을 만났다

그 옆에 개량한복의 예쁜 사진작가가 웃고 있다

이 삭막한 인사동의 길잡이 부부

막힌 가슴이 뚫린다

소음이 들리고

정물화된 풍경이 움직인다

다시 한 세월은 가고

나는 또 그리운 이들을 찾아 이 거리를 헤맬 것이다

 

-『외포리의 갈매기, 푸른사상, 2014.

 

인사동은 참 매력적인 공간이다. 위로 북촌 한옥마을을 두고, 아래로 종각(보신각)과 탑골공원을 두고 있다. 좌우 위쪽으로부터 경복궁과 창덕궁이 그 아래에 광화문과 종묘가 나란히 있고 인사동은 그 안쪽에 있으니 서울 문화의 중심이라 할 만하다. 안국역에서 종각역이나 종로3가역 쪽으로 가는 길을 중심으로 골목마다 화랑, 고서점, 미술상, 공예점, 찻집, 술집 등이 어우러져 있었으나 쌈지길 등 세련된 현대 건축물이 등장하면서 옛 정취도 조금씩 잃어가고 있다. 특히, 고서점이나 책방은 거의 사라지고 통문관 정도만 남아있다.

시인이 찾은 유목민에 먼저 자리 잡은 사람들은, 평소 시인과 술잔을 기울이며 잘 어울렸던 문인들이었을 것이다. 거리의 철학자로 불리는 민병산은 귀천과 유목민 등을 오가며 자신의 붓글씨를 무료로 나누어주기도 했다. 4.19를 노래했던 <! 신화같이 다비데군들>을 썼던 신동문 시인은 붓을 꺾은 뒤에는 시골에 은거하며 무료 침술을 해준 걸로 유명하다. 박이엽 방송작가는 나의 서양 미술 순례(서경식) 등을 번역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이들은 움직임이 없다. 젊은 날, 시대의 울분을 나누고 예술을 말하던, 사막의 오아시스 같던 인사동이지만 언젠가부터 그곳을 메우던 사람들은 술잔을 놓고 하나 둘 떠나고 없으니 술집 상호처럼 머물지 않는 유목의 인생을 실감하게 한다.

이제 시인도 인사동이 낯설고 허전하다. 우연히 만난 사진작가 부부를 통해 아직 인연의 끈이 다하지 않음을 알고 반가운 마음이 든다. 아마도 시인과 친분이 있고, 인사동 이야기를 사진으로 남기고 있는 조문호, 정영신 다큐 사진가일지 모르겠다.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시인에게 인사동은 현재의 연을 쌓는 공간으로 기능하기보다는 점점 추억의 공간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시인학교가 인사동을 떠났고, 귀천은 남았으되 귀천의 주인과 사람들이 떠났듯이 유목민의 이야기도 언제까지 쓰일지 알 수 없다.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둠으로써 한때의 삶과 인사(人事)에 대해서 떠올리게 하는 것은 시인에게도 독자에게도 아주 귀한 작업으로 여겨진다. (이동훈)




            


강민 선생을 추억할 수 있는 사진들을 찾아보니 너무 많았습니다.

그 중 200여장을 무작위로 추려내다보니, 날자와 장소를 미처 메모하지 못했네요.

언젠가 시간나면 그 당시의 이야기까지 곁들여 추억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사진은 조문호가 찍었는데, 조문호가 나온 사진은 정영신씨가 찍었습니다.




 






























































































































































































강 민선생 캐리커쳐는 시인이며 화가에다, 무용평론까지 하신

고 김영태선생의 예술가 초상 시리즈 9집에서 스크랩했습니다










   




 



                      


어저께 인사동 터줏대감 강민 선생의 운명이 임박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니 방에 틀어박혀 있을 수 없었다.

선생께서 자주 들리시며 친구들을 불러 모았던 인사동 '나주곰탕' 앞에서 한 참을 서성이며 선생을 생각했다.



사실, 인사동 인사동 노래를 부르며 들락거리지만, 공간의 추억보다는 사람의 추억이다.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선생은 오래전에 전설이 되었지만, 김동수, 이계익, 신봉승, 심우성선생께서 차례로 떠나가셨고,

마지막 터줏대감으로 여겼던 강민시인 조차 오늘 내일하고 있으니, 이제 인사동도 막 내려야 하는 것인가?

아직 구중서, 김승환, 민 영, 방동규. 신경림, 황명걸선생 등 인사동을 사랑하는 원로들이 계시지만,

강민선생이 계시지 않으면 뵐 수는 있을까?


 

80년대 중반 '나주곰탕'집 자리는 망각 강이라는 술집 ‘레테’가 있던 자리다.

소설가 배평모씨를 그 곳에서 처음 만나 이틀 동안 쉬지않고 마셨던 곳이기도 하다.

그 술집은 이점숙씨가 운영했는데, 펑퍼짐한 엉덩이를 가진 미색도 죽이지만,

숨이 끊어질듯 애절하게 부르는 춘향가의  ‘갈까보다’라는 소리에 숨이 턱턱 막힌다. 



"갈까보다, 갈까보다. 님 따라서 갈까보다.

천 리라도 따라가고, 만 리라도 갈까보다.

바람도 쉬여 넘고, 구름도 쉬여 넘는..." 

강민 선생님 앞에서 이 소리 한 자락 불러 드렸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사실, 배평모씨는 친구 좋아 날밤 까며 이틀 동안 술을 마셨다지만, 그 여인이 없었다면 어림없었다.

가끔 임춘원 여사가 출몰하여 불러주는 뚝뚝 떨어지는 ‘목련’도 기가 막혔다.

그 때부터 인사동 예술가들 술값 뒷바라지 한 김명성씨는 다 털어먹은 지금까지 술값 대느라 바쁘다.



'레테'가 있던 윗층에는 박중식시인이 운영한 '툇마루'가 생겼지만, 

옆 건물 옥탑방에 내가 사용한 '카메라워크'가 있어 자주 들락거릴 수 밖에 없는 골목이었다. 

강민선생을 '나주곰탕'에서 그리워하며, 망각의 강에서 '갈까보다'를 듣고 싶었다.





그외 인사동을 추억할 만한 장소는 찻집'귀천'과 실비대학으로 불리던 '실비집'이었다.

'귀천'에서 천상병시인에게 저승가는 노자돈을 바치거나, 민병산선생의 서예글씨를 만날 기회가 많았다.

운이 좋은 날에는 '한국일보' 사진기자 김종구를 만나 진토닉까지 얻어 마실 수 있었지만...




그리고 '실비집'은 가난한 인사동 예술가의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인심이 후해 술값이 싸니, 누구든 막걸리 한 병 값만 있으면 갈 수 있고, 외상까지 통한다.
안주를 시키지 않아도 김치나 콩나물을 내주지만, 버스가 끊겨 자는척하는 날에는 이튿날 해장국까지 얻어 먹을수 있었다. 
이북이 고향인 주모 아닌 실비대학 총장님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없다. 



또 한가지 잊을 수 없는 일은 '실비집'에서 가진 결혼식 뒤풀이였다.

대학로에서 혼례식을 끝냈으면 신혼여행이나 갈것이지, 실비집에 자리를 왜 잡았는지 모르겠다. 
그 당시 '87민주항쟁' 개인전을 말리는 이사장이 싫어, '사진협회를 그만두고 박한웅씨를 밀어넣었는데.

그 날 뒤풀이에서 사고를 치고 말았다.  삥땅 뜯는 땡초 적음을 대머리로 들이 받아 앞니를 부러트린 것이다.
뒤 이어 술 취한 내가 옷을 벗고 난리를 피웠으니, 신부를 비롯한 신부 우인들까지 질겁해 도망갔다.




잔치는 완전 개판 되었으나, 그 이튿 날이 더 문제였다.

적음의 치료비를 걱정한 화가 강용대가 부추겨, 출근하는 박한웅을 잡아가게 한 것이다.

새 직장에 나간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잘 못하면 목 잘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배평모씨와 둘이서 적음을 찾아가 고소를 취하하라고 얼마나 사정했는지, 입에서 화근내가 났다.



한참 뒤인 15년 전에 생긴 '작은 뜨락'이란 대폿집도 잊을 수 없는 공간이다.

'작은 뜨락'은 '한지추억'이란 점포로 바뀌었고, '시인통신'자리는 '古 ART'로 바뀌었더라. 

인사동 풍류객의 ‘참새 방앗간’으로 통한 이 곳은, 장사라고는 처음한 노인자씨가 운영한 곳이다.

원래 건물 옆에 버려진 골목을 차양으로 가리고, 건물 벽에 의지해 폭 1미터에 길이 5미터 남짓한 공간을 마련했다.

폭이 좁아 일반 탁자를 놓을 수가 없어 벽에 긴 나무판대기를 붙이고, 바닥에는 엉덩이를 걸칠 만한 간이의자를 놓았다.



이 집에서 먹고 마시기 위해서는 한껏 몸을 웅크린 채, 본의 아니게 면벽을 해야 한다.

그런 술집이 인사동풍류객들의 아지트가 되었는데, 술값은 자율적으로 먹은만큼 바구니에 담고 나갔다.

자리가 없으면 그 옆 건물 이층으로 이사 온 한귀남씨의 '시인통신'에서 죽치기도 했는데,

긴 세월은 아니지만, 한 동안 인사동을 풍미했던 대폿집이 틀림 없었다.

그림쟁이들을 자주 만나는 장소는 전시장보다 뒤풀이 장소인 '부산식당'과 '사동집'이었다.



그 날 만난 아는 분으로는 30여년 동안 인사동을 오가며 기름 행상한 권경선씨와 미술판의 방랑자 성기준씨 뿐이었다.

'갤러리 가이아'에서는 사보 클라라 페트라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고,

주인이 바뀌어 수리하는 점포나, 전시가 바뀌어 디스플레이 하는 전시장들이 많았다.



고서 파는 '통문관'은 셔터 내린 날이 더 많고, 그 옆에는 거대한 흉물 하나가 꿈틀대고 있었다.
옛 민정당사 터에 긴 세월동안 눈치 보며 터를 잡아 온 호텔공사가 마무리에 접어들고 있었다.

인사동 거리 쪽에 지어놓은 건물 벽에는 장사할 사람 찾는 임대광고가 붙어 있었다.



이러다 한 세기는 커녕 반세기 전의 인사동 모습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인사동의 오랜 정체성은 오간데 없고, 이름만 있는 껍데기만 남아버렸다.




10년 전 '눈빛출판사'에서 펴낸 '인사동 이야기'사진집에도 소개된바 있지만,
현재의 인사동 명칭은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에 생겼다.

조선시대 한성부의 관인방(寬仁坊)과 대사동(大寺洞)의 가운데 자인 인(仁)과 사(寺)를 따서 불러졌다.

인사동 거리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삼청동 개천에서 시작해 청계천을 따라 형성되었다고 한다.

국가에 공훈이 있는 신하들에게 상을 내리고 공적을 보존하는 일을 맡아보던 조선시대 관아인 충훈부도 이곳에 있었다.

특히 도화원이 이곳에 있어 미술활동의 중심지가 되어 중인들이 주로 모여 살았다.




1910년대의 인사동은 소위 양반들이 몰려사는 북촌의 노른자위였다.

일제말기에서 해방직후까지 4-5개의 점포가 있었는데, 6,25후 혼란했던 사회가 안정돼 가자

일부 벼락부자와 정치인들 사이에서 골동품 붐이 일면서 골동품거리가 번창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을 겪는 동안 먹고 살기위해 집안에 가보처럼 모셔두었던 것을 인사동에 내다 팔기 시작했는데,

골동품을 똥값으로 후려 쳐, 비싸게 되팔아 부자가 된 골동품상도 많았다.

더 안타까운 일은 그렇게 수집된 상당부문의 고미술이나 골동품들이 쪽바리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그 이후 1930년대부터 인사동 길 주변에는 서적이나 고미술 관련 상가가 들어서면서 골동품 거리가 점차 형성됐다.

50년대 한국전쟁 이후에는 낙원상가 아파트 자리에 낙원 시장도 생겼다.

1970년대에는 최초의 상업 화랑인 현대 화랑이 생긴 것을 계기로 화랑들이 모여들면서 미술문화의 거리로 변신했다.

그러나 인사동엔 문화적 특성을 이용한 부동산 투자로 벼락부자가 된 사람도 속출했다.

난, 80년도 초에 인사동에 입성하여 그 이전 이야기는 노인들에게 주워 듣거나 사료에서 확인한 것이다.




1987년 인사동을 문화지구로 지정한 것은 전통문화의 보존이라는 측면에서는 좋은 일이었으나.

부동산 개발이라는 돈이 개입되며 개판이 된 것이다.

문화보다는 관광객들이 몰려들게 하여 주목받는 상권은 되었지만, 우리 전통문화는 흐지부지된 것이다.




지금의 인사동 문화지구는 인사동을 비롯하여 낙원동, 관훈동, 견지동, 경운동, 공평동을 아우르는 말인데,

동쪽으로는 운현궁 앞 삼일로, 서쪽으로 조계사 앞 우정국로, 북쪽으로 종로경찰서 앞 율곡로,

남쪽으로는 남인사마당과 종로가 붙어있다.




인사동이 전통문화의 거리로 지정되어, 한국을 상징하는 공간이자 외국인이 즐겨 찾는 명소는 되었으나, 속빙 강정일 따름이다.

문중을 지키는 종갓집 며느리처럼 명맥을 잇던 골동품 가게들이 치솟는 건물임대료에 쫒겨 대부분 장안동으로 밀려났다.

대신 커피체인점이나 옷가게 등으로 바뀌었고, 남은 것도 국적 없는 잡화상으로 변해 싸구려 관광거리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

2013년 지정된 ‘인사동문화지구 관리 변경 안’의 권장업체였던 공예품 가게는 인형이나 탈 몇 가지 진열해 둔 잡화상으로 변신한 것이다.

더욱 아쉬운 것은 수 많은 갤러리들이 인사동에 몰려 있으나, 작품 관람에는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이제 오래된 인사동 공간의 추억은 물론, 인사동의 풍류를 주도해 온 예술가들도 대부분 돌아가시거나,

살아 있어도 만나 보기 힘들어 인사동 기록을 접을 때가 된 것 같다.



10년 전 '인사동 이야기'사진집을 출판했으나, 오래전 절판되어 지금은 구할 수가 없다.

'인사동 이야기' 사진집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3년전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청량리588'사진전을 열 때 보관하고 있던 '인사동이야기' 한 권을

관객들을 위해 입구에 비치해 두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책이 사라진 것이다.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책이라 아깝기도 했지만, 어떻게 사라졌는지가 궁금해 못견디겠더라.

전시가 끝난 후 갤러리를 관리하던 공윤희씨와 CCTV를 확인해 보았는데, 깜짝 놀랄 지인이 슬쩍 가져가는 것이 아닌가.

얼마나 그 책이 갖고 싶었으면 그랬을까 싶어, 확인한 둘다 안 본 것으로 하고 영원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래도 한 권은 있어야 할 것 같아 청계천 중고서적상을 뒤져 책 구하느라 한 나절을 뺑뺑이 돈 적도 있다.




그러나 그 책이 남아 있더라도 보완할 내용이 더 많았다.

인사동 사람들이라고 내세운 115명의 예술가들도 덜 인사동 다운 사람이 많은데다, 꼭 들어가야 할 사람이 많이 빠졌다.

사진가 한정식선생의 발문에다 시인 강 민, 민 영, 신경림, 황명걸, 서정춘, 김신용, 소설가 배평모, 박인식, 민속학자 심우성씨등

37명의 문인들이 쓴 인사동 추억담에다 필자가 쓴 인사동 에피소드 열 토막까지 게재했으나,

대개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씨 세분 이야기거나 '귀천'이나 '실비집'에서 있었던 중복되는 내용이 많은데다,

정작 사료로 필요한 골동품 거래 이야기나 인사동의 중요한 증언들이 빠져 있었다.



1부는 흑백으로, 2부는 컬러로 나누어 편집할 계획이다.

천상병, 박재삼, 심우성, 이계익, 목순옥, 이호철, 김동수, 최영해, 강용대, 김종구, 김용태, 여 운, 김영수씨 등

그동안 돌아가신 분들의 사진과 오래된 인사동 사진만 흑백으로 게재하고,

10년동안 기록한 사람들과 인사동 거리풍경은 컬러로 바꾸어 제대로 된 인사동 자료집을 올해 중에 마무리할 작정이다.

관련있는 분들의 많은 자문과 도움을 바랍니다.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인사동은 이제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하나의 성지로 남게 되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4일 강민선생님이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에 정영신씨와 '분당 서울대학교병원'으로 문병 갔다.

병원 휴게실에는 달마선생 내외 분과 정승재교수, 서정란씨 등 여러 명의 문인들이 먼저 와 계셨다.

소설가 김승환선생은 먼저 다녀가셨고, 맹문제교수도 오실 것이라고 했다.






어디가 편찮은지 궁금해 “선생님 병명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더니, 상사병이라고 대답하셨다.

다들 웃기에 먼저가신 사모님이 그리워 생긴 우울증 쯤으로 가볍게 여겼는데,

선생님 몰래 전해준 서정란씨의 이야기로는 심각한 상태라고 했다.

암이 곳곳에 전이되어 병원에서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의사선생으로부터 처음 검사결과를 들었을 때는 선생님께서도 당황하셨으나, 모든 걸 내려놓았는지 여유롭게 웃으셨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오래 전 입원하셨을 때, 병의 위중함을 아셨으나 병원비가 없어 치료를 받지 않고 방치해 둔 것이다.

그 끔찍한 고통을 혼자 감수하며 틈틈이 인사동에 나와 주변사람들을 걱정하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다.

무슨 말로 위안 드려야 할지 막막했으나, 내일이면 호스피스병원으로 옮긴다니 눈앞이 더 캄캄했다.






늦게 오실 분을 맞으려면 피곤하실 것 같아 병실 침대에 눕는 것을 보고 돌아왔는데, 이제 인사동도 끝장이란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한 번은 떠나야 할 길이지만, 불 꺼진 인사동을 생각하니 한 숨이 절로 나왔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으나, 선생처럼 온 몸으로 사랑하신 분은 없었다.

터줏대감이며 친구였던 심우성선생도 떠나시고, 이제 선생님까지 떠나신다면 누가 인사동을 지킬 것이란 말인가?






강민 선생의 시 ‘인사동 아리랑2’ 황혼 편을 다시 읽어보자.

“붐비는 인파 속에도
내가 찾는 이는 없다
오늘도 인사동 걷기는 허전하다
추억처럼 불빛이 켜지고 있다
열이 오르며 목이 마르다
잃어버린 불모의 사랑이 허공을 맴 돈다
어딘가 전화라도 걸까
눈시울만 시큰할 뿐
휴대전화를 만지는 손가락은 뻣뻣이 움직이지 않는다
종로 쪽 멀리 남산이 다가오고
차츰 어둠의 장막도 깔린다.
나 이제 또 어디론가 돌아가야 하리
그이의 아지트였던 찻집<보리수>도 없어졌다
진공의 거리
어디선가 그리운 이들 목소리 들리는 것 같다
돌아가리
돌아가리
그런데 이 끝없는 외로움은 무엇인가
풀리지 않는 눈물의 의미와 그리움은 무엇인가
기다리고 있을 밤의 공동(空洞)이 두렵다“





외로움과 그리움이 절절한 선생님의 시에 눈물이 절로 난다.





인사동으로 돌아와 약속한 공윤희씨를 만났다.
시간이 맞지 않아 함께 병문안드리지 못함을 애석해 하며,‘메밀란’으로 갔다.
그 자리는 ‘산타페’가 있던 자리인데, 돌아가신 여운 화백의 아지트가 아니던가?






그리고 맞은 편 잡초만 무성한 ‘목인박물관’은 흑백현상소 ‘꽃나라’가 있던 자리다.
‘꽃나라’를 운영하던 신작가도 여운화백도 다 떠나버린 인사동이 더욱 낯설기만하다.






다행스럽게 찻집 ‘초당’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초당보살 또한 건강이 좋지 않아 늦게 나오고 일찍 들어간다고 했다.
그렇게 한 사람 두 사람 떠나가고, 나 또한 떠나가리라.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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