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공동체 ‘동자동사랑방’의 2023년 제14차 정기총회가 

지난 15일 오후2시부터 동자동 ‘성민교회’에서 열렸다. 

 

2008년 결성된 ‘동자동사랑방’은 지난 15년 동안 주민에 의한 주민을 위한 다양한 복지사업을 펼쳐, 

삭막한 세상에 한 가닥 희망을 안겨주는 없어서는 안 될 마을공동체다. 

 

동자동 주민들은 대부분 가족과 연락이 끊기다 보니, 서로 도와 병원에 함께 가기도 하고, 노숙인들의 쪽방촌 안착을 돕기도 한다.

중요 활동으로는 밥상공동체인 ‘식도락’을 운영하며, 한가위나 어버이날에는 마을 잔치를 벌여 주민들을 위안한다.

이밖에도 비좁은 방에 선반을 달아주거나 정기적으로 마을 청소도 하고, 주민들에게 법률상담을 주선하기도 한다. 

그리고 쪽방에서 돌아가신 어르신을 위해 마을 장례를 치러주기도 한다. 가난하고 외롭게 살다간 망자를 기리며, 

살아 남은자의 권리를 위해 반 빈곤 연대활동을 펼치는 등 평등한 세상을 지향하는 주민모임이다.

 

다만 참여하는 주민이 일부에 불과해 안타까움을 더해 주는데,

이것은 희망을 잃은 주민과 희망을 가진 주민으로 나누어진 동자동의 뼈아픈 현실이기도 하다.

온 종일 방에서 외부와의 소통을 단절한 채, 죽을 날만 기다리는 주민들이 많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사랑방이라도 들락거리며 활동하는 분들은 건강에 좋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여러 사람과 소통하므로 외로움의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정기총회도 참석 회원보다 위임회원이 더 많은 것은 시간이 없어서라기보다 매사에 의욕을 잃어가는 것이라 더 안타깝다.

 

정기총회에는 윤동주 공동대표의 인사에 이어

박승민간사의 22년 정기총회 결과보고와 활동보고 및 재정보고가 이어졌다.

 

이어 김호규 감사의 2022년 감사보고가 상세하게 보고되었다.

예산집행이나 영수증수취와 보관이 완벽하게 처리되었음을 밝혔고,

더 많은 주민들의 참여를 통해 사랑방의 미래를 함께 꿈꾸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표선출 안은 양정애, 윤용주 공동대표가 연임되었고,

2023년 예산안은 수입 지출 공히 65,500,000원으로 상정 가결되었으며,

선동수간사장의 총회기록보고에 이어 이원영씨 등 외부인사 소개와 인사도 이어졌다.

 

눈에 띄는 사업계획으로는 그동안 코로나 때문에 치루지 못한 마을장례를 재개하여 주민들의

조문을 받을 수 있게 하거나, 공공주택사업 추진을 위한 대외활동에 더 힘을 모을 것을 다짐했다.

 

‘동자동 사랑방’의 발전과 주민들의 밝은 앞날을 위해 힘찬 박수를 보낸다.

 

사진, 글 / 조문호

 

 

Naked as a Jaybird 부유하는 파편들

조성현展 / JOESUNGHYUN / 趙星現 / photography 

2023_0414 ▶ 2023_0506 / 일,월요일 휴관

 

조성현_부유하는 파편들 #16_90×75cm_2023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월요일 휴관

 

KP 갤러리

Korea Photographers Gallery

서울 용산구 소월로2나길 12(후암동 435-1번지) B1

Tel. +82.(0)2.706.6751

www.kpgallery.co.kr@kpgalleryseoul

 

"사진은 아름답지만 보는 이의 감정을 속이고 때로는 진짜로, 때로는 가짜로 혼동을 주며 허망하고도 아름다운 상상을 하게 만든다. 순수하거나 아니거나, 그 속에 들어있는 자신을 느끼고 세상을 향한 모습을 상상한다." (작가의 일기 중에서)

 

조성현_부유하는 파편들 #17_50×37.5cm_2023

KP 갤러리에서 4월 14일부터 5월 6일까지 조성현 작가의 개인전 『Naked as a Jaybird / 부유하는 파편들』 전시가 개최된다. 낯선 공간을 내면의 시선으로 바라봤던 조성현작가의 과거 작업과 달리 이번에 새롭게 소개되는 사진들은 작가의 내면에 침착되어 있던 고유한 감정들을 주변의 사물들을 통해 드러내는 작업이다.

 

조성현_부유하는 파편들 #07_120×80cm_2023

내면의 복잡한 감정들과 생각의 덩어리들, 조성현은 규정할 수 없지만 자신 속에 존재하는 '날 것'과도 같은 그의 마음을 '순수'라 정의하고 '사랑', '미움', '분노', '연민', '자유'와 같이 그와 연결된 각각의 감정과 울림을 사진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작품 속 하얗게 빛나는 몸과 인간의 신체를 연상하는 형상들, 완성된 형태를 갖추지 못한 일련의 덩어리들과 흩뿌려진 가루들을 통해 존재함을 이야기한다.

 

조성현_부유하는 파편들 #05_90×75cm_2023

솔직하게 써내려간 작가의 일기장처럼 그의 작업에서 깊숙하게 숨겨져 있던 감정들이 표면으로 떠올라 부유한다. 하나로 뭉쳐질 수 없는, 그러나 떼어놓을 수도 없는 '날 것'의 감정들. 자신의 내면을 깊이 응시하며 찾아낸 그만의 시각들. KP 갤러리는 『Naked as a Jaybird / 부유하는 파편들』 전시를 통해 우리 안에 존재하는 순수함과 스스로를 확인하고 지키고자 했던 노력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 KP 갤러리

 

조성현_부유하는 파편들 #08_50×37.5cm_2023

전작 'I Saw You'로 낯선 공간을 응시하던 조성현의 신작 '부유하는 파편들'은 객체를 바라보던 시선을 자신의 내면으로 옮겨온다. 무엇을 말해야할지 모르면서도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많은 생각들, 그 생각의 덩어리들과 시선을 그는 자신의 언어로 옮겨온다. 하얗게 빛나는 몸, 주무르는 대로 뭉쳐지는 하얀 클레이, 용암처럼 흘러내리는 액체 덩어리. 완성된 형태를 갖추지 못한 일련의 덩어리들. 그리고 떨어지는 가루들. 조성현이 말하는 순수는 '날 것'에 가깝다. 마치 언어를 갖추기 전의 아이들의 옹알이처럼. 아직 내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르겠다는 작가의 고백은 순수 이전의 무언가를 떠올리게 한다. 순수라는 언어가 생기기 이전의, 발화 언어 이전의 무엇. 그러나 모두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

 

조성현_부유하는 파편들 #13_90×75cm_2023

후설은 "그 자신의 의미에 대한 순수한 표현을 가져오는 것이 문제되는 것은 바로 이런 말없는 경험(expérience muette)"이라고 말한다. 후설의 주장을 이어받아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을 통해 철학의 근본 목표가 말없는 경험의 고유한 의미를 표현하는데 있다고 말한다. 조성현의 사진들은 언어적 사유를 넘어 자신의 감정과 경험을 시각적 사유로 빚어낸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작가의 고백은 순수 이전의 날것을 시각적으로 경험하게 한다. 메를로-퐁티의 논의를 빌면, 우리들의 '세계-내-존재(etre-au-monde)' 위에 토대하고 있는 지각은 그 자체로는 인식을 주지 못한다. 지각(知覺), 감각기관을 통하여 대상을 인식하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세계-내-존재'로부터의 물러섬이 필요하다.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한 단계 물러서는 행위가 선행되어야 한다.

 

조성현_부유하는 파편들 #11_90×75cm_2023

조성현의 작업들은 물러섬의 행위를 보여준다.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꾸밈이나 거짓이 없이, 본인이 느끼는 것을 그대로 시각화한다. 작가의 말대로 '순수'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느끼는 그대로의 감정들 – 사랑, 미움, 분노, 연민, 자유를 물질적 요소들을 통해 사진 이미지로 구현해낸다. 매순간의 감정의 경험은 개별적 이미지로 전환되고 전환된 이미지들은 작가의 시간으로 구현된다.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균형을 잃어버리다가 다시 감정에 휩쓸리는, 날 것의 작가 그 자신의 모습으로. 솔직하게 써내려간 작가의 일기장에서 잃어버린 날 것의 감정이 떠오른다. 깊숙하게 숨겨져 있던 감정들이 표면으로 떠올라 부유한다. 하나로 뭉쳐질 수 없는, 그러나 떼어놓을 수도 없는 날 것의 감정들. 자신의 내면을 깊이 응시하며 찾아낸 그만의 시각이다.

 

조성현_부유하는 파편들 #13_90×75cm_2023

철저하게 자신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드러내는 작가의 노력은 '말해질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 사각의 프레임에 놓인다. 그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철저하게 작아진 '나'라는 존재일수도, 혹은 아무도 모르게 숨겨놓은 '나'라는 존재일 수도. 작가의 말대로, 순수하거나 아니거나, 우리는 이미 부정할 수 없는, 이 세상에 놓인 존재들이다. '부유하는 파편들'은 조성현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이자, 관객들이 순수 이전의 무언가를 발견하는 방법이기도 할 것이다. ■ 레나

 

Vol.20230414d | 조성현展 / JOESUNGHYUN / 趙星現 / photography

 

비가 내린 지난 11일은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욱신거려 꼼짝하기도 싫었다.

무슨 도 닦는 것도 아니고, 밥 먹으러 간 시간 외에는 온종일 앉았다 눕기만 반복했으니 몸이 편할 리가 없다.

 

이튿날 아침 목욕탕에 가서 몸 좀 풀려고 내려오니, 이 층 입구에 김반장이 와 있었다.

안쪽을 들여다보니 고씨 영감 방에 사람이 왔는데, 소방대원이 고씨 영감을 들어 올리는 중이었다.

 

소변 팩을 다리에 달고, 의식이 없어 몸을 가누지 못했다.

병원에서 퇴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돌봐 줄 사람이 없어 그런 것 같았다.

독거노인의 운명이라 어쩔 수 없지만, 살아서 뵐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동자동에서는 사람이 죽거나 실려 나가는 것은 종종 본다.

그런 불상사가 잦은 것은 폐쇄적인 공간도 한 몫 하는 것 같다.

대개 나가기 싫고, 온종일 앉았다 눕기만 반복하니 무슨 기력이 있겠는가?

그나마 쪽방 상담소에서 나누어 준 식권 날짜 지날까 하루에 한 번씩 밥 먹으러 나가는 게 유일한 외출이다.

 

지난해 서울의 무연고 사망자로 조사된 천여 명 중에 절반이 결혼을 못한 비혼이라고 한다.

아무런 간섭받지 않고 책임질 일은 없겠으나, 외로운 병보다 더 무서운 병은 없다.

건강관리는 물론 이야기 나눌 사람까지 있는 교도소를 선호한다는 이야기가 현실화되고 있다.  

 

녹번동에서 주말을 보내다 나오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때가 가끔 있다.

마치 초등학교 시절에 학교 가기 싫은 것처럼...

실소를 흘리며 오지만, 마치 저승 대기소 가는 심정이다.

늙어서는 두 내외가 오손도손 사는 것 보다 더 큰 축복은 없다.

 

사진, / 조문호

 

 

 

낯선 도심 풍경을 사냥한 '도시 산책'전을 보러 갔다.

주인공이 누군지도 모른 채, 정 동지에 끌려 간 사진전에는

박순규, 이완순, 이한규씨 등 세 분이 참여하고 있었다.

 

갤러리 브레송에는 전시작가 외에도 김남진관장, 곽명우, 박설미, 김창주씨 등

아는 사진가들이 여러 명 있었는데, 전시작가 중 아는 분은 박순규씨 뿐이었다.

대전 사는 박순규씨는 마음씨 고운 아낙인 줄만 알았는데, 사진을 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다들 산책을 하다 건물에 비치거나 겹쳐진 도심 풍경들을 찍었는데,

어쩌면 세 사람이 작정이나 한 것처럼, 찍은 사진들이 대개 비슷했다.

사람마다 감성도 다르지만 도시를 걷는 감상도 다를 텐데, 다들 문명 비판적 시각이었다.

산책하다 만난 자연도 있을 것이고, 사람도 있을 텐데 말이다.

 

, 산책이라는 말만 들어도 질색하는 사람이다.

다리가 아파 조금만 걸어도 그다음 날 자리에 드러눕는 체질이다.

그러나 덜덜거리는 고물차를 휠체어처럼 끌고 어디든 찾아다닌다.

예전엔 사랑 없인 못 살았으나, 지금은 차 없으면 못사는 로봇이 된 지 오래다.

 

폐품이 되어버린 내 눈에 들어오는 도시 풍경도 변질되어 괴기하게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누구나 다 그렇지만, 특히 사진가들은 철저히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외눈박이인 것은 어쩔 수 없다.

 

운전하다 보이는 도심 풍경도, 걸어가다 보이는 거리풍경도 모두 절망적인 것들만 눈에 들어온다.

전신주 위에 이리저리 뻗어나간 전선 뭉치나, 산더미처럼 쌓인 쓰레기 같은 부정적인 것에 더 눈길이 간다.

 

문명 비판적인 생각이 작용한 건지, 아니면 부정적인 심성이 작용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사진가의 잠재된 의식에 의해 현실을 보는 사실은 틀림없다.

 

그러나 전시된 사진은 마치 누구의 지령에 따른 것처럼 천편일률적이었다.

 

화려한 도시에 가려진 인간의 고독과 상실감을 말하고 있으나, 시각적 미감에 중점을 두었다.

 

욕심 같아서는 산책하다 만난 사람에서 느끼는 온기나 자연에 따른 안온한 느낌의 각기 다른 시선이었더라면,

도시에 대한 나의 부정적인 고정관념에 약이 될 수도 있을텐데 말이다.

 

전시작들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작가 마다의 개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인위적인 사진이나 일률적인 시각보다 작가의 마음이 담긴 진정성 있는 접근이,

좋은 사진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닌가 생각한다.

 

봄비가 보슬보슬 내려 술 생각이 간절한 저녁이었다.

차 때문에 소주 한 잔으로 달래는 뒤풀이지만, 반가운 분들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리는 도시 산책사진전은 오는 15알까지 열린다.

 

사진, / 조문호

 

 

세월이 지난 오래된 사진은 아득한 기억의 저장고다.

반세기가 지난 삶의 기록들은 손에 잡힐 듯 말 듯, 볼수록 정겨움이 더하는 우리의 역사다.

 

어제는 잠이 오지 않아 쪽방 침대 밑에 쌓인 책을 정리했다. 7년 가까이 집어넣기만 하고 나오지는 않았으니, 빈틈 없이 꽉 차 버린 것이다. 버릴 책과 옮길 책을 분류하다 2017년 청계천박물관 기획전에서 가져 온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의 다시 보는 청계천도록을 찾은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의 삶을 취재하러 왔던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께서 찍은 청계천의 오래된 모습이었다. 그리고 노무라 모토유키 선교사가 찍은 청계천 등 두 분의 사진만 청계천의 중요한 사료로 남았다. 국내 사진가들은 집 구경 하듯 지나치며 찍은 사진들은 간혹 있으나, 청계천 빈민들의 삶에 아무도 관심두지 않았다.

 

두 분의 사진을 대할 때마다 부끄러웠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그분들이 대신했는데, 그 무렵의 우리나라 사진가들은 대부분 아름다운 살롱사진에 빠져 기록의 중요성을 방기한 것이다. 아름답고 예쁜 것은 다시 찍을 수 있지만, 역사의 순간은 다시 찍을 수 없는 것이다. 

 

한때 ’국립중앙박물관‘의 용산 이전을 앞두고 열린 마지막 특별전 ’가까운 옛날의 자화상‘에도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의 청계천 사진이 걸린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에 사진이 들어 온 지 숱한 세월이 흘렀으나 여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사진전이 열린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우리의 역사보다 더 소중한 작품은 없다는 말이다.

 

구와바라 시세이 / 조문호사진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은 1964년 일본의 화보 잡지인 太陽 특파원 자격으로 한국에 왔다고 한다. 선생이 한국 현실에 가장 광범위하고 깊숙하게 관여한 시점이 1965년이었는데, 한국을 찍은 사진 중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청계천 사진도 이 무렵에 집중적으로 촬영된 것이다.

 

사진의 본질은 기록이라는 신념을 평생 구현한 보도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은 일본의 중금속 공해 사건을 다룬 미나마타 병을 앓는 사람들을 찍어 세계적으로 알려졌으나, 그에게 사진가로서 결실을 맺은 것은 한국에 대한 기록이라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청계천 사진 외에도 기지촌 주변의 양공주에서부터 우리가 방치한 한국 사회의 이면사를 깊숙이 기록했는데, 사십여 년에 걸쳐 십 만장이 넘는 방대한 사진을 남겼다.

 

이 사진들은 본 지는 오래되었지만, 빈민들의 리얼한 삶이 담긴 현장이라 보면 볼수록 가슴 뭉클해지는 소중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사진이 찍힌 65년이라면 진학을 앞두고 서울에서 방황하던 시절이 아니던가?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으나, 어느 날 청계천 밤길을 걷다 좁은 골목에서 혼이 난 기억이 생생하다. 갑자기 나타난 낯선 아낙에게 떠밀려 들어간 곳이 사창가였는데, 뺏긴 가방을 찾기 위해 시달린 순간순간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하수구의 악취가 진동하는 청계천의 첫 대면은 생각만 해도 아찔한데, 그 당시의 청계천 풍경을 이토록 생생하게 기록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공포의 대상이었던 청계천도 평범한 서민들이 사는 달동네에 다름 아니었다. 사진에 담긴 장면에는 아침에 일어나 이를 닦거나, 빨래를 너는 모습, 때로는 연탄재나 오물을 버리는 평범한 일상이 담겼다. 보면 볼수록 정겨운 장면인데, 마치 무대 세트장 같다.

 

당시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께서 투숙한 곳이 남대문로 그랜드호텔이었다고 한다. 남대문에서 광화문을 향하는 곳에 있던 그 호텔은 청계천까지 걸어서 약 600미터 정도의 거리다. 명동이나 수하동을 거쳐 청계 2가 방향으로 걸었다는데, 낮에는 사람이 없어 이른 아침에 집중적으로 촬영했다고 한다.

 

지저분한 청계천도 아이들에게는 둘도 없는 놀이터 였는데, 사진에는 복개천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지만, 주민들의 이주는 물론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반세기 전 청계천 변 사람들의 꾸밈없는 일상이 담긴 이 사진들은 한국전쟁으로 월남한 피난민들의 삶의 현장이자, 급변해 온 서울의 한 도시공간이다. 다시 한번 청계천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보석 같은 사진들이다.

 

역사는 반복된다지만, 다큐멘터리 사진에 있어서 그와 같은 비유는 무의미하다. 지나간 버린 하나의 사실과 현장은 두 번 다시 재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구와바라 시세이-

 

/ 조문호

 

구와바라 시세이 / 조문호사진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동강댐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은 90년대 후반 무렵이었다.

한국환경사진가회에서 자연 탐사에 나섰는데, 강가에는 환경단체의 출입을 금한다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고, 주민들의 반감이 만만찮았다. 동강 주민들의 현실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일방적 여론 형성에 더 분노한 것 같았다. 동강댐을 건설하라는 주민들의 항변에 앞서, 사람이 살아야 자연도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들과 함께했다그러나 주민들이 외지인에게 보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특히 동강 댐을 반대하는 환경단체는 접근도 할 수 없었다. 사진 찍는 일보다 그들의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인사동 예술가들의 모임인 창예헌과 손잡고 귤암분교에서 동강 변 주민들을 위한 굿 마당을 열었다.

퍼포먼스를 벌일 무세중 선생 일행은 행사 이틀 전에 오셨는데, 저녁나절 동네 주민들과의 술자리에서 걱정했던 일이 벌어졌다. 동강 댐 이야기를 꺼내 언쟁이 벌어졌는데, 혹 떼려다 붙인 격이 되어버렸다. 내가 주민 편들어 사태는 진정되었으나, 후폭풍은 거세었다. 그 이튿날 행사 준비는커녕 방에서 꼼짝도 않으시는 것이다. 잘못했다고 빌고 또 빌어, 서울에서 출발한 일행들이 도착하기 직전에야 일어나 퍼포먼스를 준비하셨으니, 정말 피 말리는 시간이었다.

 

잇따라 버스 두 대에 나누어 탄 인사동 주류 예술가 70여 명이 동강에 도착했고, 정선 용탄리에서부터 영월 삼옥리에 이르는 동강 변 주민들도 속속 행사장인 구귤암분교에 도착했다. 조용한 강변 마을에 갑자기 너무 많은 차가 모여들어 길이 막히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원창 정선군수와 원로시인 민영 선생의 인사로 시작된 동강 변 주민들을 위한 굿 마당은 동강변 주민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의미 있는 만남이었다. 강가에서 벌인 무세중 선생의 깃발 퍼포먼스가 볼 만 했는데, 손님 안내하느라 구경은 커녕 사진 한 장 찍지 못했다. 마침 사진가 하형우씨가 찍어 보내주었으나, 정선집 불날 때 그 자료까지 모두 태워버렸다. 주민들과 예술인이 어우러진 멋진 한 마당이었는데, 얼마나 바빴으면 그날 나온 조해인 시인의 어라연 뱃사공시집과 나의 동강백성들포토에세이는 저자도 보지 못한 채 나누어 주었다. 그날 굿 마당 행사 비용을 창예헌이사장이었던 김명성씨가 부담해 주어 가능했다.

 

아무튼, 당시로서는 동강댐 백지화에 따른 보상이 빨리 이루어져야 했다. ‘고래 싸움에 세우 등 터진다는 말처럼 정부와 여론의 긴 싸움으로 동강 주민들만 희생양이 된 것이다. 온통 동강 이야기로 시끌벅적했으나 아무도 동강 원주민들의 이야기는 들어주지 않았다.

 

1990년 동강 주민 160여명이 홍수로 사망하자 노태우 대통령 지시로 발단되었다. 동강댐 논란이 언론에 뜨기 시작하자, 고요한 정적만 흐르던 동강은 어두운 먹구름이 일기 시작했다. 발 빠른 레저업자들의 사라질 비경이라는 부추김에 주말은 온통 사람과 차량으로 뒤 덥혔고, 비오리와 어름치가 사라진 강변에는 쓰레기와 오물이 난무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오랜 세월 강과 더불어 살아왔던 순박한 원주민들의 삶이 만신창이가 된 것이다.

 

수몰 지역으로 내정되면서 집을 짓거나 고치지도 못하는 것은 물론, 길 닦는 일에서부터 영농지원금에 이르기까지 주민들이 살아갈 최소한의 지원도 중단되었다. 거기에 더해 수자원공사를 등에 업은 장사꾼과 투기꾼들이 개입하여 순박한 사람들을 유혹하며 문제가 불거졌다. 평생 소외된 환경에서 살아왔던 산골사람들에게 작지 않은 보상의 유혹은 욕심 이전의 생각을 갖게 했고, 들뜬 마음은 일손을 놓게 만들었다. 묘목상들의 농간으로 농사지을 땅에 가꾸지도 못할 유실수를 빚내어 심었다. 농산물이 줄어 가난한 살림은 더욱 쪼들렸고, 눈덩이처럼 불어난 이자는 그들의 삶을 절박하게 만들었다.

 

그들도 처음엔 댐 건설을 반대했다. 10년 넘게 끌어 온 지루한 댐건설 논란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시행되지 않으면 연대보증에 의한 채무로 모두 도산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동강을 살리자는 강한 여론에도 불구하고 댐을 건설하라는 항변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누군 농약 마셔 자살하고 누군 강에 빠져 자살하는 등 사람이 줄줄이 죽어가는데, 자연 탐사가 무슨 말인가? 우리의 후손이 영원히 뿌리를 뻗고 살아야 할 땅을 지키려면 그 땅에서 태어나 살고, 그 땅으로 돌아갈 백성부터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동강을 잘 알고 제 몸처럼 다스렸던 그들이 살아야 동강도 온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 자연환경을 기록하는 다른 회원과 달리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록했다. 자연환경을 지키는 것에 반할지라도 주민 편에 설 수밖에 없다. 당시 귤암리 만지산 농가를 캠프로 사용하며 주민들과 머리 맞대어 보상받을 방안을 협력했다.

 

2000년의 해를 넘기는 추운 겨울, 동강지역 주민 400여 명이 데모하러 서울 간다기에 따라 붙었다. 빚에 쪼들려 자살하는 주민이 줄을 잇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지금은 태국에 사는 고영준씨가 사무국장으로 충무로 사무실에 상근할 때인데, 그 사무실을 거점으로 움직였다. 충무로 지하철역과 혜화역에서 가진 동강백성들사진전에서 행인들에게 실상을 알리는 리프렛을 나누어 주는 등 전 회원이 발벗고 나섰다.

 

동강 주민들은 명동성당 입구에 진을 치고 농성에 들어갔으나 갑자기 날씨가 추워 걱정이었다. 하는 수 없어 밤에는 노인들을 충무로의 한국환경사진가회강당으로 모셨다. 그 강당은 본래 삼성카메라클럽에서 밀려 나온 현대사진가회에서 사진 강의실로 사용했는데, 마침 환경사진가회도 그 사무실을 같이 쓰고 있었다강당에 있던 탁자를 치워 노인들만 주무시게 하고, 사무실에서는 시민들에게 뿌릴 전단지와 보도자료를 만들어 각 신문사 사회부에 돌렸다. 그에 앞서 김대중 대통령께 동강의 현실을 적은 편지와 함께 동강 백성들포토에세이 한 권을 보내 드렸다.

 

다행히 '문화일보'를 비롯한 여러 신문에 기사가 실려, 사람이 죽어가는 동강 주민들의 실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고맙게도 다음 날 청와대에서 마을 대표를 찾는 호출이 온 것이다. 이영석 대책위원장을 비롯한 마을 대표가 청와대에 들어가면서 모든 일은 해결되었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께서 동강댐 백지화를 선언하며 그 기나긴 동강댐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용단에 동강도 살고 주민도 살았으니, 어찌 그 고마움을 잊을 수 있겠는가?

 

보상책으로 농가 부채 감면과 더불어 가구마다 집 짓는데 4천만원을 무상 지원했고, 축사나 비닐하우스 등 농가에 필요한 시설도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국적 불명의 집들이 동강 변 곳곳에 들어서기 시작했고, 산꼭대기에 세워진 송신탑으로 집집마다 티브이 방송도 들어왔다. 흑백 티브이도 보지 않던 시절에 티브이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두메산골도 그런 두메산골이 없었다는 말이다.

 

'한국환경사진가회'에서는 동강환경사진집을 펴냈고, 개인적으로는 동강백성들포토에세이와 두메산골 사람들사진집을 펴냈다. 모든 일은 끝났으나 정든 동강을 떠날 수 없어 하릴없이 구름에 휩싸인 산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평생 주제였던 사람과 달리 사진은 팔렸으나, 쪽 팔렸다. 사기는 치기 쉽지만, 지우기는 쉽지 않았다.

 

동강 작업의 주체였던 한국환경사진가회939월에 발족하였다. 나를 비롯해 고영준, 이석필, 이수영, 한상근, 정원일, 이희배, 배병수씨등 중견 사진가 몇 명이 뜻을 모아 만들었다. 수질이나 대기오염 등 자연훼손을 기록하는 환경 분야는 물론, 사람이나 야생화, 동굴, 조류, 곤충, 어류 등 22명의 각 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활동한 단체다, 10여 년에 걸쳐 우포늪’, ‘동강’, ‘서울환경등의 사진집도 발간했으나, 2005년부터 이희배씨가 회장을 맡으며 본래의 취지와 달리 조직 규모에 집중하는 단체가 되어버렸다, 그 후 대부분의 창립 맴버들이 탈퇴하여 지금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남의 일이 되어버렸다.

 

그 이후 동자동에 살며 간간이 만지산을 찾았는데, 세상은 그냥 내 버려두지 않았다. 3년 전 옆집의 화재가 옮겨붙어 20여 년 동안 기록한 동강 자료를 모두 태워버린 것이다.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한 욕심이 화를 자초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세상사 모든 게 새옹지마라지만, 어찌 그 사연들을 쉽게 잊을 수 있겠는가?

마침, 지인으로 부터 동강댐과 김대중대통령과의 관련 자료가 없느냐는 메시지를 받아  블로그를 뒤져 보았으나 토막 이야기 뿐이었다. 그래서 여기 저기 기억을 들추어 뒷북을 치는 것이다.

 

그러나 동강 변에 살며 한가지 깨우친 것은 있다. 돈이 얼마나 무서운 요물인지, 그때 새삼 절감했다. 그렇게 순박한 산골사람들이 돈에 병들어 가는 과정을 똑똑이 지켜봤기 때문이다. 사람 탓 할 게 아니라 모든 게 돈이 원수다.

 

사진, / 조문호

 

 

쪽방촌에도 어김없이 봄은 왔다.

 

봄의 화사함도 가난의 그림자는 지울 수 없었다. 

 

목련 아래는 끼니 때우러 나온 사람이 줄을 섰고.

바닥에 자리 깐 노숙인은 꽃비 맞으며 누워있다.

 

불공평한 세상도 봄은 공평하게 나누어주었다.

 

그날이 4월분 식권 나누어 주는 날이라 '서울역쪽방상담소' 앞에도 사람이 몰렸다.

'아름다운 동행' 식권 사업에 힘 실려 사우나 무료목욕권까지 붙여주었다.

 

고맙기 그지없는 일이나, 다른 지역 독거 노인은 받지 못하니 이 또한 불공평이 아닌가?

빈민과 상인은 물론 농민까지 덕 보는 식권 나눔을 전국으로 확대하라.

 

임백수씨를 만나 며칠 전에 찍은 초상 사진을 꺼내 주었더니, 반색을 했다.

잠깐 기다리라 해 놓고는 담배 두 갑을 사온 것이다.

 

주머니에 슬쩍 찔러주는데, 이거 뇌물죄에 걸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담배를 얻은 고마움보다 의기소침한 초상작업에 힘을 실어 주었다.

 

초상사진으로 자존감 지키려는 첫 사람인 셈인데, 나중에 만난 황병윤씨도 좋아했다.

더 좋은 사진 나오도록 다시 찍겠다는 다짐도 했다.

 

봄바람에 희망이 실려온다.

 

사진, / 조문호

 

 
눈 쌓인 언덕에서 아이들이 신나게 놀고 있다. 그 아래 낮고 허술한 집들이 보인다(서울, 1980).

두 사진 모두 이번에 출간된 김기찬 대표사진 선집 골목안 풍경을 통해 처음 공개되는 것으로 유족들이 보관해온 사진 중에서 새로 발굴한 것이다.

 

골목길에서 숨바꼭질을 하는 모습이다(서울, 1973).

김기찬(1938-2005)은 ‘골목 사진가’로 불렸다. 1968년부터 1990년대 말까지 30여년에 걸쳐 중림동, 문래동, 행촌동, 행당동, 도화동 등 서울의 달동네를 다니며 골목 풍경을 찍었다. 서울역 뒤 산동네인 중림동을 특히 사랑했다.

그는 2003년 출간한 마지막 사진집 ‘골목안 풍경 30년’에서 골목을 테마로 선택한 이유를 밝혔다. “1960년대 말. 사진 찍는 것이 좋아서 카메라 한 대만 달랑 메고 서울역과 염천교 사이를 오가며 삶에 지친 사람들을 찍다 흘러든 곳이 중림동 골목이었다… 처음 그 골목에 들어서던 날, 왁자지껄한 골목의 분위기는 내 어린 시절 사직동 골목을 연상시켰고, 나는 곧바로 ‘내 사진의 테마는 골목안 사람들의 애환, 표제는 골목안 풍경, 이것이 내 평생의 테마다’라고 결정해 버렸다.”

김기찬은 생전에 ‘골목안 풍경’이란 제목의 연작 사진집을 6권까지 출간했다. 사후에는 그의 전작을 모아 만든 ‘골목안 풍경 전집’(2011년)이 제작돼 8쇄까지 찍었다. ‘격동기의 현장’ ‘윤미네 집’과 함께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사진집이 되었다.

김기찬의 사진은 이제는 모두 사라져버린 서울의 골목 풍경과 도시 서민들의 생활상에 대한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있다. 또 재개발로 살던 집과 동네를 잃어버린 서울 토박이들에게는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옛 앨범이 되었고, 지금의 아파트 시대가 잃어버린 것들을 돌아보게 하는 질문으로서도 가치를 갖는다.

김기찬의 '골목안 풍경' 사진집 / 눈빛 / 312쪽 / 6만원

이번에 출간된 ‘골목안 풍경’은 김기찬 사후 18년 만에 발간되는 대표사진 선집이다. ‘골목안 풍경’ 1∼6권에서 사진을 고르고, 유족이 보관해온 필름 중에서 새로 골목 사진을 발굴해 100여장을 추가해 총 277장의 사진을 실었다.

이규상 눈빛출판사 대표는 “김기찬의 사진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서민들의 ‘골목일기’라고 할 수 있다”면서 “사진집이 모두 절판된 이후 대중판으로 만든 ‘골목안 풍경 전집’ 외에 변변한 대표사진집 한 권이 없어 늘 아쉽고 송구스러웠다”고 출간 배경을 밝혔다. 새로 공개되는 사진들은 작가의 부재로 정확한 촬영일자와 장소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필름 파일에 적힌 생산일자를 따라 ‘서울, 1967-1970’ 식으로 표기할 수밖에 없었다.

수록된 사진은 모두 흑백이다. 사진의 주인공은 아이들인 경우가 많다. 가난한 풍경 속에서도 아이들은 너무나 환하다. 아이들에게 골목은 놀이터였다. 어른들에게도 골목은 공유공간이자 사랑방이었다.

마지막 5부는 골목의 마지막 풍경을 스산하게 보여준다. 집들은 부서졌고 골목은 사라졌다. 건물 잔해 위에 집 한두 채, 사람 한두 명이 위태롭게 서있다. 그렇게 김기찬의 골목 사진 작업도 끝났다.

“1980년 중반부터 시작한 재개발 사업은 공덕동으로 번지고 공덕동에서 인왕산 밑 행촌동으로 건너뛰었다. 1997년, 결국은 중림동도 그 운명을 다했다. 높다란 아파트가 들어섰고 그곳에 살던 골목안 사람들은 모두 어디론가 흩어져버렸다.”

사진집 출간과 함께 서울 인사동 갤러리 인덱스에서 김기찬 사진전 ‘Again 골목안 풍경 속으로’(4월 3일까지)가 열리고 있다. 엄선한 골목 사진 30점을 선보인다.

국민일보 /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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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속 이미지] 기억나니?… 277장 추억이 방울방울


미공개 사진 100여장 포함
1968년~1990년대 풍경 담아

▲ 김기찬 작가가 카메라에 담은 골목의 풍경들. 1989년 8월 서울 아현동. 눈빛 제공

골목 한구석에 모이거나 길 한쪽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있는 아이들의 표정에서 천진난만함이 느껴진다. 아파트 빌딩 숲으로 가득 찬 도시에서 옛 골목은 점점 준다. 구석진 골목은 위험해 보이고 배달 오토바이들이 쌩쌩 달려 골목에서 아이들의 모습을 보기 힘들다.

이 책에는 ‘골목 작가’로 불렸던 김기찬(1938~2005)의 미공개 사진 100여장을 포함해 1968년부터 1990년대 말까지 찍은 골목 풍경 사진 277장이 실려 있다. 누군가에게는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라며 기억을 소환하게 하는 사진들이지만 카메라 프레임 속에 잡힌 어른들의 눈에서는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로 내몰린 도시 주변부 서민의 슬픔이 읽힌다.

 

그래도 책장을 계속 넘길 수 있는 것은 힘겨운 일상을 살아 내는 서민들 모습 너머로 보이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 덕분이다.


책 출간과 함께 서울 종로구 ‘갤러리 인덱스’에서 다음달 3일까지 사진전 ‘Again 골목안 풍경 속으로’가 열린다고 하니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서울신문 / 유용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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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컷] 선행학습이 없던 시절 아이들은

골목 사진가 김기찬의 사진에서 본 아이들의 모습

 

▲ 김기찬 사진가의 골목의 풍경 / .서울 1970-1974. / 사진= 갤러리인덱스 제공

 

꼬마들이 작은 칠판에 간단한 산수 문제를 적어놓고 퀴즈 풀이를 하고 있다. 요즘 초등학생들이 한다는 ‘선행 학습’이란 단어조차 없던 1974년 서울의 어느 골목안 풍경은 작고한 사진가 김기찬의 사진이다. 답을 안다고 손을 번쩍 든 아이들보다 몰라서 쑥쓰러워하는 아이들이 더 많지만 문제를 낸 아이의 표정은 즐겁다.

 

추억이 돋는 1970년대와 80년대 서울의 골목길 풍경들은 1968년부터 30여년 동안 서울의 골목을 찾아다니며 촬영한 김기찬의 사진들이다. 사진가의 ‘Again 골목안 풍경 속으로’ 전시는 다음달 3일까지 서울 인사동의 인덱스갤러리에서 열린다.

 

김기찬 사진가의 골목안 풍경, 서울 1992 / 사진= 갤러리인덱스 제공

부서진 TV 상자 안에서 노는 아이들은 마치 텔레비전에 나온 것처럼 좋아하고, 트럼펫을 연주하는 어른 앞에서 아이는 시끄럽다며 귀를 막는다.

 

김기찬 사진가의 골목안 풍경, / 서울 중림동 1982 / 사진= 갤러리인덱스 제공

등에 업은 동생이 힘들지도 않은지 누나는 잇몸을 드러내며 활짝 웃고, 발목까지 눈이 쌓인 한 겨울날에도 집배원 아저씨는 기다리는 누군가의 편지를 배달하러 어느 곳이라도 찾아갔다.

 
김기찬 사진가의 골목안 풍경, 서울 중림동1976 / 사진= 갤러리인덱스 제공

정겹고 친근한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표정들을 사진가는 어떻게 찍을 수 있었을까?

김기찬은 어느날 회사 선배로부터 ‘사진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데에 있다’는 말을 듣고 작은 카메라를 들고 출퇴근을 시작했다. 집에서 가까운 서울중구 중림동의 골목을 들어섰을 때 자신이 어릴 적 살던 종로구 사직동 골목과 비슷해서 마치 고향에 온 느낌이었다고 했다. 그후 사진가는 틈나는 대로 골목을 찾아 사진을 찍었다.

 
김기찬 사진가의 골목안 풍경, 서울 1970 / 사진= 갤러리인덱스 제공

그도 처음엔 부끄러워서 주민들 앞에 카메라조차 꺼낼 수 없었지만, 매일 카메라를 메고 오는 사진가를 알던 골목에 살던 아이들과 주민들은 사진가의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았고, 김기찬은 그런 어린이들과 주민들의 평범한 모습들을 기록으로 남은 것이다. 김기찬은 언젠가 이 골목들도 사라질 것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김기찬 사진가의 골목안 풍경, 서울 1973-1974 / 사진= 갤러리인덱스 제공

기자는 지난 2015년 겨울 국내 1세대 원로사진가였던 고 김한용 선생을 인터뷰 한적이 있다. 6.25 전쟁때는 종군사진기자였으며, 역대 대통령들과 기업인들을 촬영하고 한국 영화계의 스틸사진과 광고사진계를 개척했던 그는 기자에게 “하루 4시간씩 자면서 남보다 3배는 더 일했던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사진가 김한용도 “나도 수십년 사진을 열심히 찍었지만 김기찬의 사진을 보면 나보다 훨씬 더 많이 노력한 것들이 사진에서 보인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기찬 사진가의 골목안 풍경, 서울 1981 / 사진= 갤러리인덱스 제공

 

조선일보 / 조인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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