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마을협동회 김정호(62세)이사장이 지난 6월 10일 새벽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

6월27일 오전10시 30분 ’서울시립승화원‘ 그리다 추모공간‘에서

광진구 김혜연씨 유해와 무연고자 합동장례를 치루었다.

 

백제 서울시립승화원에서 서울성남교회 박종화 목사 집례로 장례예배도 보았다.

 

동자동 사랑방마을에서는 호상 김호태씨를 비롯하여 양정애, 선동수, 오희섭, 전도영, 조인형, 정대철, 김영자, 차재설,

박희봉, 백광헌, 박승민, 김영봉씨 등 이십 여명이 오전8시 무렵, 백제 서울시립승화원으로 출발해 고인을 추모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6월30일 오후 4시무렵 이광수 교주께서 쪽방촌 성지순례 나선다는 연락을 받았다.

하필이면 녹번동 파출부로 나가는 금요일이었다.

 

그날은 월말이라 ‘서울아트가이드’ 얻으러 인사동도 들려야 하고,

맡겨놓은 초상 사진 찾으러 충무로도 가야 해 오후 1시부터 서둘렀다.

안국역에 도착할 무렵 이광수 교수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일이 빨리 끝나, 서울역 11번 출구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큰일 이었다! 시원한 곳에서 잠시 기다리라 했으나 마음은 바빴다.

 지하철을 탔으면 빨랐을 텐데, 마음이 급해 택시를 잡아탔으나 차가 밀려 더 늦었다.

 

간신히 후암동에 도착해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가 작동되지 않았다.

페이스북아나 내비는 안 되지만 거는 전화는 잘 되는 핸드폰인데,

전화가 걸리지 않아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선 자리에서 담배를 세 대나 피우며 우왕좌왕하는판에 이교주가 나타났다.

시원한 곳에서 기다리지 않고, 그때까지 지하철 입구에서 기다렸다고 한다.

 

그 날따라 날씨는 얼마나 더운지 얼굴이 빨갛게 익었더라.

미안해 죽을 지경인데, 시원한 커피집에 안 가고 방으로 가잖다.

어두컴컴하고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계단은 마치 저승가는 계단 같다.

많은 사람이 죽어 내린 계단을 4층까지 올라간 것이다.

급히 방문을 열어 선풍기를 돌렸으나, 더운 바람이 감겼다.

 

삼층 사는 박씨 아지매는 계단을 기어 오른다.

수행하는 것 처럼, 덥고 비좁은 방에서 몸으로 느끼며 쪽방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요즘 한 달에 한 번씩 유튜브 강의 촬영하러 상경하는데,

출발하기 전 페북 메시지로 빨리 간다는 연락을 했다지만,

컴퓨터에서만 페이스북을 볼 수 있으니, 알 리가 없었다.

두서없는 쪽방촌 이야기를 했으나, 더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20분쯤 수행하다 내려왔는데, 시간이 어중간했다.

기어이 맛있는 고기를 사 주겠다며 고깃집을 찾았는데, 대개의 식당이 쉬는 시간이라 문을 닫았다.

돌고 돌아 찾아간 집이 ‘서래갈매기’란 고깃집인데, 처음 가 본 식당이었다.

손님 없는 텅 빈 식당에서 고기를 구워, 지애비도 못 알아본다는 낮술을 마신 것이다.

 

이교주와 여러 차례 술자리를 했지만, 단둘이 앉아 마신 술은 처음이었다.

오래전 최민식 사진상의 문제점을 제기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도 있다.

다들 눈치만 보고 찍소리 못하는 썩은 사진판에 가슴이 뻥 뚫렸다.

 

시건방진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이광수씨나 황정수씨,

그리고 얼마 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안애경씨 같은 분이,

각 분야 열 명만 리드가 되어도 국민의 삶의 질은 물론 가치가 달라질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래서 오래 전 부터 교수가 아니라 교주로 깍듯이 모셨다.

나처럼 한번 물면 안 놓는 성질도 비슷했다.

 

옛날 사진계 이야기가 안주였으나, 다 부질없는 이야기였다.

기록사진을 아카이빙할 민간단체 설립의 절실함도 말했고,

스승 최민식선생에 대한 기록물을 제작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에 관한 논문이 니체와 닮았다는 이야기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

 

딴 약속이 있어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선물로 담배까지 사 주었다.

가게에 담배가 몇 갑 없으면 있는 대로 사지, 기어이 다른 가게를 찾아 한 보루를 샀다.

찾아 준 것만도 황송하지만, 까발겨 두들겨 맞을 논문이 걱정이다.

아무튼, "억수로 고맙습니다.”

 

교주가 떠난 후 발동이 걸려 ‘새꿈공원’으로 담배 자랑하러 가다 이병호씨를 만났다.

그 양반은 담배보다 술이 더 절실하지만, 담배 밖에 줄 수 없었다.

알콜중독자에게 돈을 주는 것은 죽으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준기씨가 날 나무란다.

“형님은 사진값도 안 받으면서, 돈은 왜 쓰냐?”는 것이다.

내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길래, 꺼내 보니 만 원짜리 두 장이 있었다.

“문디 코구멍에 마늘을 빼먹지! 니 돈 묵고 내가 편하겠나?”

소주 한병 콜라 한 병 사고 남은 돈을 돌려주니, 씰데 없는 소리란다.

“날 우째 보고 그라요. 내가 준걸 다시 받것소. 사나 가오가 있지”

그래, 요즘 가오 있는 놈이 드물어 보호종으로 정한다는 소문은 들었다

 

" 보호종 개 목걸이 쟁취를 위해 “투쟁!”

 

사진,글 / 조문호

 

 

 

개뿔도 없는 거지가 이렇게 호사를 누려도 되는지 모르겠다.

지난 달부터 일주일에 사흘(월,화,수)은 동자동서 사진 찍느라 바쁘고,

이틀(목,금)은 녹번동에 파출부로 나가고, 나머지 이틀(토,일)은 농장에 농사지으러 다닌다.

나보다 더 바쁜 사람 있으면 어디 한번 나와봐라.

 

지난 주말은 아산 농장 가기 전에 들릴 곳이 있었다.

가는 길에 강남 ‘연우갤러리’에서 열리는 오현경씨 “Rain”도 봐야 하고,

용인 ‘갤러리 위’에서 열리는 이익태씨 “Everyone Pierrot”도 봐야 했다.

거리가 멀어 미뤄 둔 전시를 하나 하나 돌아보며 아산시 인주면에 간 것이다.

 

오후 3시 무렵 도착했는데, 이번엔 반기는 식구가 많았다.

김창복, 김선우 동지를 비롯하여 양이현과 막네 김평까지 와 있었다.

평이는 2년 전 아산에서 열린 ‘미얀마 민주시민을 위한 미술행동전’ 개막식에서 보고 처음 만났는데,

얼마나 자랐는지 엄마보다 더 컸다.

 

이현이는 햇살이의 새 이름인데, 예쁜 아가씨가 엄청 부지런하고 일을 잘 하더라.

 

지난주에 부루벨리를 따 왔으나, 다시 주렁주렁 열렸다.

이현이와 평이까지 합세해 부루벨리를 땄는데, 시간이 너무 빨리 갔다.

 

잔뜩 딴 부루벨리를 모두 가져가라는데, 지난 번처럼 배달할 일이 걱정되었다.

 

고민 끝에 나누어 먹을 방법을 찾아냈다.

냉동실에 저장해 두었다가 다음 달에 열릴 정동지의 '장항선 따라가는 장터사진전'때 내놓을 작정이다.

 

선우가 차려 낸 진수성찬으로 배를 불린 후, ‘백암길미술관’에 여장을 풀었다.

미술관에서의 잠자리는 마치 신혼여행 온 기분이다.

 

이튿 날은 잡초를 뽑다보니, 텃밭에 심은 청경채를 벌레가 다 갉아 먹었더라.

농약을 사용치 않아 어쩔 수 없는 현상이지만, 손으로 벌레를 잡는 수 밖에 없었다.

 

간식으로 먹기 위해 감자를 캐러 갔는데, 자색감자가 포도송이처럼 탐스럽게 달렸다.

그런데, 이현이가 감자밭에서 맹꽁이 한 마리를 발견한 것이다.

 

맹꽁이는 10년 전부터 멸종위기 2급으로 지정된 보호종이 아닌가?

건설 현장에서 맹꽁이 한 마리 나오면 1억 원 날아간다는 말도 있다는데, 이곳에 맹꽁이가 엄청 많다고 한다.

 

비오면 맹꽁이들이 “맹꽁맹꽁” 합창하고, 여름밤엔 반딧불이 산채를 수놓는 보기 드문 청정지역이었다.

이십여 년 동안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유기농을 고집한 김창복씨의 노력과 집념 덕분이다.

 

그리고 포장도로에서 산채까지 가는 팔백 미터가 비포장도로였다.

처음엔 다소 불편하게 느껴졌으나, 이 또한 이곳만의 매력이었다.

요즘 흙길 걸을 수 있는 곳이 어디 있는가? 입구에 주차장만 준비된다면 산책코스로 손색이 없었다.

 

이곳에 갈 때만은 핸드폰도 버리고 아날로그의 삶으로 돌아간다.

 

올해 열 두 살인 평이는 유치원은 물론 초등학교도 보내지 않았다.

오로지 가정교육에 의지한 채, 스스로 지식을 깨우쳤으나 모르는 것이 없었다.

획일적이고 일방적인 과도한 지식 습득이 인간성을 상실시키는 교육의 문제점을 간파한

부모 덕분에 공부에 쫓기지 않고 자유롭게 자란 것이다.

 

단 한 가지 문제점은 주변에 친구가 없어 걱정이다.

얼마나 사람이 그리웠으면, 우리가 가는 주말을 손꼽아 기다린단다.

다음에는 바비큐 해 먹자는 평이의 마지막 인사가 마음에 걸린다.

 

사진, 글 / 조문호

요즘은 초상사진 찍다 별 일을 다 겪는다.

노숙하거나 쪽방에 살면 누구던지 찍는 것이 아니라

찍을 대상의 기준을 정해두었으니, 마땅한 대상을 찾기가 쉽지 않다.

 

가난하게 살아도 당당하게 사는 사람이 흔치 않은데다,

술 마시지 않은 온전한 정신 상태에서 본인이 요청해 오기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다.

더구나 일체의 연출이나 보정 없이 있는 그대로를 노출하는 사진이라 잘 나서지 않았다.

 

대개의 사람들이 사진 찍히기를 싫어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다.

'모든 것을 지우고 싶은데 사진은 남겨 무엇 하냐?'는 것이다.

그리고 쪽방주민들은 대부분 영정사진을 만들어 놓은데다,

노숙인은 사진 둘 곳이 없어 찍어 줘도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접근방법을 달리하여 찍어달라고 할 때까지 기다리며, 스스로를 광고했다.

그동안 언론사 인터뷰 요청까지 거절해가며 동등한 위치임을 자랑삼았으나, 쪽팔려도 약력을 까 발렸다.

기존 영정사진과 달리 한 장의 초상사진으로 영원히 남기겠다는 각오로 임했다.

아무리 사람을 찍어 왔지만, 짐승보다 못한 인간은 찍지 않는다며, 어깨 힘도 주었다.

 

어차피 전시가 끝나면 사진은 본인에게 돌려줄 것 이지만,

이중으로 돈 들여 사진 찍는대로 인화해 준 것이 소문이 난 것 같았다.

요즘은 나의 뜻에 동조하는 사람이 하나 둘 늘고 있다.

아무리 모델로서 그럴싸해도 자격을 갖추지 않으면 찍지 않았다.

 

그리고 이 일은 지속적으로 해야 할 일이라 서둘 일은 아니었다.

량이 아니라 질이 중요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작품성보다 당사자의 정신력이 더 중요하다.

 

며칠 전에는 음악이 좋아 통기타 하나 챙겨들고 떠돌다

쪽방에 입주한 위수범씨를 우연히 만났는데,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사진보다 자신의 삶에 자긍심을 갖는 일이 우선이라 길바닥에 퍼져 앉아 이야기부터 나누었다.

 

거지처럼 사는 것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며,

돈 번 사람보다 돈을 벌지 못했기 때문에 더 잘 살았다는 위안에 그만 울고 말았다.

울음을 멈춘 후 사진을 찍었으나 슬픈 표정 즉 감정이 노출되어 실패했다.

사진은 나중에 다시 찍으면 되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잘 살았다는 자긍심을 갖는 게 초상사진 찍는 목적이기 때문이다.

초상사진은 당당하게 스스로를 내 세울 수 있어야한다.

 

그 다음 날은 김상진씨를 만나 찍었으나, 그 역시 눈물이 고였다.

돈 때문에 가족을 잃었지만, 잘못 산 인생은 아니라는 것이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돈벌레 보다 얼마나 인간적이냐?

 

사진이야 다시 찍으면 되고, 그것도 아니라면 만족할 때까지 찍으면 된다.

돈 벌기 위해 하는 일이라면 할 수 없겠지만, 이렇게 사는 것이 좋다.

일이 아니라 나의 놀이며 내가 가야 할 길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정전 7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 “나를 울린 한국전쟁 한 장면” 사진전이

지난 21일부터 26일까지 인사동 ‘갤러리 인덱스’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된 한국전쟁 특별전은 20여 년 전 소설가 박도 선생께서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을 여러 차례 방문해 발굴해 낸 사진이다.

 

어둠 속에서 잠자던 사진을 찾아와 여러 권의 사진집을 펴내

우리가 몰랐거나 잊었던 6.25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그 사진은 한국전쟁에 참여한 미국 종군사진가에 의해 기록된 사진이지만,

소설가 박도씨가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칠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사료들이다.

 

우리는 긴 세월 동안 몇 되지 않는 국내 종군 기자들의 사진이나

정부에서 공개한 사진으로 전쟁을 바라보며 기억해야 했다.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눈 아픔에 앞서, 정부에서 내 세운건 오로지 승전과 반공이었다.

 

6.25를 이념의 편향에서 벗어나 사실 그대로 바라보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빨갱이란 말을 노골적으로 내뱉는 현실에서 어쩌면 두려운 일일 수 밖에 없었다.

정전 70주년을 맞이했건만, 아직도 국민의 인식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번에 마련된 6.25 특별전은 그동안 펴낸 사진집에서 골라낸 사진들이다.

나이 어린 북한 소년병이 미군에게 조사받는 장면에서부터

부역자로 몰려 죽임을 당한 비참한 장면 등 그날의 아픔을 되새기게 하는 장면들이다.

 

소설가 박도 선생은 발굴한 사진으로 사진집만 펴낸 것이 아니라, 소설 ‘전쟁과 사랑’도 펴낸 바 있다.

그 소설은 “사랑의 정동이 감동적으로 그려진 차원 높은 전쟁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전쟁과 사랑 / 박도 장편소설 / 387면 / 눈빛출판사

지난 6월 21일 오후 5시에 개막된 한국전쟁 특별전에 박도 선생의 개막기념 강연이 있었다.

 

눈빛출판사 이규상대표를 비롯하여 안미숙관장, 미술평론가 최석태, 사진가 정영신, 곽명우,

장병국, 박기서, 김성식, 이성호, 박정호씨 등 20여 명이 자리했다.

 

사진을 발굴해 온 과정에서부터 한 장의 사진에 영감받아 쓰게 된 소설

‘전쟁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한 시간 가까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그 귀중한 사진전 개막식에 사진가가 세 사람밖에 참석치 않았다.

사진 만드는 사진작가는 차고 넘쳐도, 기록하는 사진가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말이다.

사진가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의 기억에서도 ‘한국전쟁’이 서서히 잊혀져 가는 현실이 더 슬펐다.

 

전쟁을 겪은 그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돌아가셨다 치더라도,

그 후손이 동족상잔의 아픔을 잊거나 관심에서 멀어져 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사실, 그 자리에 참석한 분도 박도 선생이나 몇몇만 한국전쟁 직전 세대지, 대부분 전후세대였다.

 

나 역시 네 살 적 일이라 그 기억은 미미하지만,

육이오를 떠올리면 희미하지만 잊을 수 없는 가슴 떨리는 일이 있다.

 

북한군들이 고향인 경상남도 영산까지 밀고 내려왔을 때의 일이다.

낙동강 전투의 최후 보루인 내 고향은 피비린내 나는 전장의 한복판이었다.

남산에는 유엔군이 진을 치고 북쪽 영축산에는 북한군들이 포진하여 혈전을 벌였다.

마을 사람들은 전장을 피해 뿔뿔이 흩어졌다.

 

한국전쟁2 / 768면 / 박도 엮음 / 가격29,000원 /눈빛출판사

전쟁 포화가 잠잠해질 즈음 나를 들쳐업은 어머니가 살던 집을 찾아 나섰다.

남산 아래 미나리꽝 뚝 길로 지나갈 무렵이었다.

피를 흘리고 쓰러진 군인이 물을 달라며 갑자기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움켜잡았고,

옆에 있던 군인은 그냥 가라며 총부리로 위협했다.

 

한국전쟁1 / 768면 / 미해외참전용사협회 엮음 / 가격 29.000원 / 눈빛출판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두려움에 떨던 어머니의 받쳐 업은 두 손이 내 몸을 꽉 조였다.

간신히 군인의 손을 뿌리치긴 했지만, 혹시 뒤에서 총을 쏠까 등에 업힌 나를 가슴에 안고 뛰었는데,

어머니의 온몸은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 글: 김원일외 3명, 사진편집: 박도 / 가격18,000원 / 눈빛출판사

그때 느낀 어머니의 거친 숨결과 전율감은 숱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생생한데,

이것이 내 기억에 남은 유일한 한국전쟁의 잔상이다.

 

정전 70주년 육이오 맞아, 인사동에 사진전 보러가자.

여의치 않다면 책이라도 구해보자.

누가 말했는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주말은 정동지와 함께 아산시 인주면에 있는 김선우 산채에 갔다.

봄에 텃밭을 일궈 주어 야채를 심었으나 자주 갈 형편이 못되어,

한번 가면 잡초 뽑느라 카메라 꺼낼 틈조차 없었다.

 

이번 나들이는 일박이일의 일정이라 한결 여유로워 사진도 찍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듯, 지천에 늘린 블루베리 따느라 즐거운 비명을 질러야 했다.

블루베리는 유독 정동지가 좋아하는 과일이지만, 가격이 비싸 사먹을 수 없었다,

그 날 블루베리를 처음 먹어보았는데, 새콤달콤한 맛이 귀가 막혔다.

 

혈압과 암을 비롯한 갖가지 성인병 예방과 노화방지에다 피부까지 좋아지는 약이었다.

더구나 눈의 피로를 풀어주어 시야를 맑게 하는 등 몸에 유익한 열매라,

다 같이 달라붙어 블루베리 따느라 다른 곳은 손댈 겨를이 없었다.

 

  따 모은 블루베리가 한 바가지도 아니고, 큰 대야에 가득한데,

손 큰 선우가 그 많은 블루베리를 모두 차에 실어 주어, 정 동지 입이 찢어졌다.

 

그 날 밤은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이 전시된 백암길185미술관에서 묵기로 했다.

그동안 농장에 여러 차례 갔으나 매번 당일치기라 술 한잔 마실 수 없었는데, 오래된 원을 풀 좋은 기회였다.

처음으로 전시장에 여장을 풀고, 그 곳에서 김창복, 김선우씨와 함께 만찬의 시간을 가진 것이다.

 

  금방 따온 상추에다 맛있게 삶아 낸 수육을 싸 먹었는데, 선우 음식솜씨에 또 한 번 놀랐다.

술 마시며 산채의 환경친화적인 활용방안을 논의하기도 했으나,

술이 들어가니 하지 않아도 될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느라 시간 다 보냈다.

'제 버릇 개 주지 못한다'는 정동지 말처럼, 그 주책은 고칠 수가 없다.

 

  그 이튿날은 잡초 뽑는 일에 매달려야 했.

20여 년 동안 그 넓은 땅에 제초제는 물론 농약과 화학비료 한 번 사용하지 않고,

유기농으로 농사지은 김창복씨와 김선우씨의 집념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그들이 흘린 땀을 모은다면 저수지를 만들고도 남았을 것이다.

덕분에 자연과 땅이 온전히 살아 남은 것이다.

 

  김창복씨는 오래 전부터 한살림에서 유기농을 해 온 영농지도자였다.

씨앗도 토종만 사용할 뿐 아니라 농장에는 없는 작물이 없었다.

뒤늦게 알았지만, 농사 뿐 아니라  '이거 큰일났군' 동화를 펴낸 동화작가이기도 했다.

 

  말이 쉬워 유기농이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도 처음 정선 갔을 때는 제초제와 농약을 사용하지 않았으나,

갈 때마다 숲을 이룬 잡초와의 전쟁에, 삼년을 넘기지 못하고 손 들고 말았다.

이십년 동안 제초제를 끼고 살다, 2년 전 살던 집에 불이 나는 통에 그만 둔 것이다.

 

  대신, 아산시 인주면에 있는 선우 산채에 내가 머물 농막을 짓기로 했다,

그 사이 농지법이 바뀌어 농막에서 사람이 잘 수 없게 된데다,

건축규제마저 까다로워, 집 짓는 일은 시작도 못했다.

김창복씨는 산림청 허가를 받아야 되는 산막을 짓기 위해 임야 조성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 과정을 거치려면 올 가을에나 지을 수 있다고 했다.

농막은 6평으로 제한하지만, 산막은 15평까지 된다니 더 잘된 일이었다.

 

다른 곳은 손 댈 엄두도 내지 못하지만, 내가 일구는 텃밭과 집터라도 잡초를 뽑아야 하지 않겠는가?

정동지와 선우는 다른 곳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 체, 아침부터 잡초와 씨름했다.

한 나절에는 너무 더워 숨이 턱턱 막혔으나, 참고 견뎌야 했다.

선우가 그만 두라고 몇 번이나 찾아왔으나 알았다는 말만하고 일어서지 않으니, 정동지를 보내 재촉했.

 

여기만, 여기만. 하다 일어나니 어지러웠다.

선우가 타 준 시원한 얼음커피에 한 숨 돌렸으나, 아무래도 더위 먹은 것 같았다.

읍내에서 양햇살양을 만난 후 맛있는 냉면까지 사 주었으나, 먹는 것까지 귀찮았다.

어지럽고 머리가 아파, 어떻게 서울까지 운전해 왔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자고 일어나니 한결 나아졌으나, 정동지의 극성은 못 말린다.

정선에서 농사지을 때는 두릅이나 옥수수를 따 지인들에게 나누어주는 것도 일이었는데.

이번에는 블루베리를 배달해야 한다며 봉지, 봉지 싸 놓은 것이다.

하기야! 장에 나가 파는 것보다 나누어 먹는 것이 좋지 않은가?

 

그나저나, 아산에서 농사 지어려면 매주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동안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동자동에서 지내고, 금요일부터 주말까지

녹번동 정동지 일을 도왔는데, 아무래도 주말은 인주면 산채에 가야 할 것 같았다.

이중생활에서 삼중생활이 된 셈인데, 개뿔도 없는 주제에 혼자 바쁘게 생겼다.

 

사진,/ 조문호

 

장종운 '젊은 날의 초상' 사진집 표지 / 168면 / 눈빛출판사 / 28,000원

사진가 장종운씨가 소대장 시절 찍은 국내 최초 병영기록 사진집 ‘젊은 날의 초상’이 ‘눈빛출판사’에서 나왔다.

사진전은 지난14일부터 20일까지 인사동 ‘갤러리 인덱스’(02-722-6635)에서 열린다.

 

전시된 사진들은 ROTC 25기로 임관한 장종운씨가 전방부대 박격포 화기 소대장으로 배치받은

1987년부터 전역한 1989년까지 기록한 생생한 병영기록이다.

 

사진가 장종운

군대 사진으로는 이한구, 이규철, 조성기, 강재구 등 여러 명의 사진가가 발표한 바 있지만,

소대장이 부대에 암실을 차려놓고 찍은 사진도 처음이지만, 그중 오래된 또 다른 기록이라데 의미가 있다.

 

전시가 시작된 지난 6월 14일 오후4시 무렵 갔더니, 작가 장종운씨를 비롯하여 '눈빛출판사' 이규상대표,

'인덱스' 안미숙 관장, 사진가 김문호, 정영신, 이 다, 곽명우,씨 등 반가운 분이 많았다.

 

 

작가로부터 당시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이런저런 군대 이야기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사진집에는 전시된 사진 외에도, 또 다른 추억을 떠올리는 사진이 많았다.

 

아래는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의 ‘젊은 날의 초상’사진집 서문에서 발췌했다.

 

인연

이 사진집에 수록된 사진들을 나는 35년 전인 1989년에 본 적이 있다. 장종운 중위가 전역하고 고향으로 내려갈 때인지 아니면 전방에서 잠시 외출을 나온 것인지는 불분명하나 그는 어느 날 우리 출판사를 방문해 이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1989년이면 막 출판사(1988년 창립)를 시작할 무렵이었고, 한두 권 책을 냈을 때였는데 그가 어떻게 우리 출판사를 알고 찾아왔는지 몰라도 고마운 일이었다. 당시는 한국 사회가 민주화를 향해 몸살을 앓고 있었지만 아직 군부독재의 잔재가 남아 있던 시기였다. 우리 출판사의 첫 책 크리스 마커의 북한 사진집 『북녘 사람들』마저도 억울하게 북쪽을 찬양하는 도서로 분류돼 마포경찰서 정보과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사무실을 이전해 짐을 풀고 나면 반갑지 않은 담당 요원이 제일 먼저 방문하곤 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그들의 정보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런 서슬 퍼런 공안정국도 이유였고, 군 관계 사진은 보안이 필수인데 찍힌 지 얼마 안 된 따끈한 사진을 바로 출판하면 촬영자에게도 불이익이 돌아갈 우려가 없지 않았다. 또 창업 초기라 출판사 경영도 녹록지 않아 원고를 반려하고 나중을 기약했다.

 

최근에 작가로부터 당시 사진집을 내고 보도사진계로 진출하고 싶었다는 얘기를 듣고 그에게 사진이 절실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게 그런 힘이 있었는지 몰라도 그때 사진가로의 길을 터주지 못한 것에 대한 일말의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사진가의 길은 가시밭길이고 그때나 지금이나 사진은 돈이 되지 않는 매체이니 사진의 길로 인도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그와 그의 가족을 위해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싶다. 어쨌건 그는 전역 후 고향에 내려가 한평생 보험업계에 투신하여 2023년 4월 정년퇴임을 했다. 비록 그때 사진집을 내지는 못했으나 우리는 종종 전화 통화로 서로의 안부를 묻곤 했다. 그는 우리 출판사에서 나오는 사진집들을 사보며 취미 삼아 사진을 오랫동안 해올 정도로 그의 인생에서 사진이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 않다. 이제 고대하던 사진집을 내게 되었으나 원고를 돌려주며 그때 기약한 ‘나중’이 일제강점기와 맞먹는 35년이나 될 줄은 작가나 나도 몰랐던 일이다. -중략-

 

군에서 공식적으로 사진을 촬영할 수 있는 병사는 정훈병이다. 1970년대-80년대에는 고된 훈련과 근무에서 벗어날 수 있으므로 사진병으로 군 복무를 하기 위하여 사진학원을 다니는 장정들이 많았다. 사진병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전통을 따랐는지 통신병과에 소속되어 있다가 2014년 정훈병과로 바뀌었다고 한다. 사진병은 주로 간부들을 따라다니며 군대내의 공식 행사 및 교육훈련 장면을 찍는다.

 

군에서 홍보용 화보집을 만들거나 보도기관에 배포하는 사진들은 신형 탱크나 자주포 등 현대화한 군 장비와 난관을 뚫고 용맹 무쌍하게 진격하는 부대의 훈련상황 등을 찍은 공식적인 홍보용 사진들이다.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사진이 유산지에 덮혀 맨 앞쪽에 배치하고 이어서 국방부장관, 육군참모총장의 사진이 역시 유산지에 덮혀 머리말이나 격려사와 함께 나온다.

 

사진병은 아니지만 사진 전공자 가운데 군 복무를 하며 사진을 찍은 사진가로는 이규철, 이한구 등이 있다. 이들은 휴가 복귀 중 카메라를 몰래 영내에 반입하여 선임들의 묵인하에 내무 생활을 촬영해 전역 후 전시를 하거나 사진집 (이한구 ‘군용’)을 통해 공개하였다. 1990년대 초에 울산지역 해안초소에서 근무했던 이규철은 신병 군기 잡기, 얼차려 등 내무 생활 중 벌어지는 군대 폭력을 사진을 통해 보여주었고, 이한구는 군용품으로 다뤄지는 병사의 인권 문제를 사진으로 제시했다. 사진 전공자이며 부사관(중사)으로 복무한 특이한 이력의 사진가 조성기는 301특공여단의 교육훈련 과정을 다큐멘트해 1993년 군에서 전시회를 가진 바 있다. 여단장의 허락을 받아 촬영한 공식 사진이지만 고된 교육훈련에 지친 훈련생의 모습과 휴식, 장비 점검 등 훈련의 이면을 기록하였다.

 

장종운 소대장의 사진에는 용감하고 늠름한 병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역시 대대장의 허락하에 카메라를 영내에 반입해 사진을 찍었다지만, 그의 앵글은 군의 공식 사진과는 거리가 멀다. 대학 동아리에서 사진을 익히고 임관 전 전시회를 했듯이 카메라를 다루는 그의 능력은 수준급이었다. 일반인들은 다루기 힘든 마미야 중형카메라를 사용하고 독신 장교 숙소인 BOQ에 필름을 현상 인화할 수 있는 암실을 마련했을 정도로 그는 사진에 빠져 있었다. 초상사진을 찍으며 군용담요를 배경막으로 사용한 것도 이채롭다. 특히 빼당(페치카 당번병), 이발병, 사역병 등 병사들의 사진은 독일의 사진가 아우구스트 잔더(August Sander)가 독일인들을 직종별로 분류해 남긴 사진 기법을 떠올리게 한다.

 

정종운 소대장은 소대원들을 찍되 훈련상황보다는 청춘을 반납하고 혹독한 환경에서 생활하는 병사들의 일상과 내면에 주목했다. 그는 전지적 서술자(Omniscient narrator)로서의 시점을 시종일관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자는 인물의 내면이나 인물 간의 관계를 파악한 뒤 이야기를 서술한다. 그는 소대장실에서 소대원들의 신상 명세서를 보았을 것이고, 또 전임자나 내무반장으로부터 소대원 개개인의 특성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앞의 이규철과 이한구가 내무 생활자로서 직접 보고 목격한 1인칭 시점을 유지하고 있는데반해 장종운 소대장은 간부(장교)라는 3인칭 시점에서 1980년대 후반의 병영생활과 병사들의 모습을 사진기록으로 남겼다.

 

군대라는 시공간의 제약에서 벗으나 비교적 자유롭게 촬영한 그의 사진은 대한민국 건군 사상 간부가 찍은 최초의 병사들에 관한 기록이라는데 그 의미와 가치가 있다. 그런데 아무리 객관적 기록이라해도 사진은 촬영자의 주관을 거치게 된다. 징집된 젊은 영혼들이 모여 있는 한 소대를 책임졌던 소대장의 연민과 안타까운 시각이 사진에 묻어난다. 계급을 떠나 카메라를 매개로 병사들의 불안과 상처를 감싸안고 그들과 하나가 되었다. 그도 말한 바 있지만 그것은 병사들이 그를 형이나 친구처럼 따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소대장일지라도 군림하려 들면 병사들은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사진집 ‘젊은 날의 초상’은 지난날 병사들이 처해 있던 환경과 일상 그리고 그들의 내면세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소중한 기록이다. 이러한 기록이 군을 폄훼하거나 평가 절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병영생활의 진실을 보여줌으로써 군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과 개선의 필요성을 새롭게 유도한다. 실사구시와 진실은 망각과 환상만을 불러일으키는 경직된 사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제시할 때 비로소 바로 볼 수 있게 된다.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했지만 젊은 날의 병사들은 현실을 받아들이며 이를 잘 참고 견뎌냈다. 지금은 초로에 접어들었을 이 사진집에 등장하는 소대원이나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에게 장종운 소대장의 사진은 추억 이상의 것을 말해준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고난의 군대였지만 그때는 그래도 청춘이었다. 청춘은 언제나 그립고 아쉬운 법이다.

 

이등병 월급이 3천원에서 60만원대에 이르기까지 정말 오랜 세월이 흘렀다.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앞으로 군의 사정도 점차 나아질 것이다. 35년 전에 이 책이 나왔다면 아마 나는 상처 치유와 위안 그리고 생명 복원력이 있는 세월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 이규상 (출판인)

 

언젠가 한 번은 가야 할 길이지만, 한평생 사람답게 살아보지도 못하고,

혼자 살다 고통스럽게 돌아가셔서 더 가슴 아프다.

 

지난 달에는 동자동 공원 지킴이처럼, 오랜 세월 주변 청소를 하며

사신 황옥선(83세)씨가 세상을 떠나 놀라게 하더니,

며칠 전에는 ‘사랑방마을협동회’ 이사장인 김정호(62세)씨가 황옥선씨 뒤를 이었다.

 

돌아가신 김정호이사장은 빈민의 자립을 위해 싸운 전사였다.

두 분 모두 약방의 감초처럼 동자동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분들인데,

약속이나 한 듯 연이어 세상을 떠나, 삶의 무상함을 실감한다.

 

황옥선씨는 연세라도 많지만, 김정호씨는 앞으로 할 일이 많은 분이라 더 안타깝다.

한 달 전에 동자동 공공주택사업을 촉구하는 '주거권 행진’ 기자회견 전에 만나지 않았던가?

주거권 행진 출발에 앞서 편치 않은 몸으로 새꿈공원까지 나와,

기자회견과 거리 행진을 잘하라며 주민들을 격려했다.

 

황옥선씨가 돌아가신 줄은 알았지만, 김정호씨가 돌아가신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지난 13일 우연히 사랑방 앞을 지나치는데, '謹弔'라는 글이 문 앞에 붙어있었다.

사랑방 사무실에 김정호씨 빈소가 마련되어 깜짝 놀란 것이다.

 

빈소에는 호상인 김호태씨와 선동수 간사장, 정대철이사 등 몇몇 분이 지켰는데, 영문도 모른체 문상했다.

지난 6월 10일 새벽 무렵 폐암으로 돌아가셨으나, 아직 연고자를 못 찾아 장례 날도 못 잡고 있었다.

 

대신 황옥선씨 장례는 연고자를 기다리는 시한인 30일이 지나,

6월 14일 오전 10시 무렵, 벽제 ‘서울시립승화원’에서 화장했다.

 

동자동에서 오전 9시 직전에 출발한 승합차에 선동수간사장을 비롯하여

조인형, 정대철, 박희봉, 김영국, 정재은씨 등 아홉 명이 갔다.

 

 

화장에 앞서 백제 서울시립승화원에 마련된

‘그리다’ 추모 공간에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간단한 장례를 치루었다.

 

공영장례장인 ‘그리다’는 연고 없이 돌아가신 무연고 사망자와

장례를 치루지 못하는 빈민들을 위해 박원순 시장 때 마련했던 고마운 자리다.

 

추모 공간에는 황옥선씨와 노병천씨, 두 분의 위패가 안치되었다.

노병천씨는 영정사진도 없는 데다, 실무자 뿐인 것으로 보아 노숙한 분 같았다.

 

동자동 추모객 중 정재은씨의 안타까움과 슬픔이 가장 절절한 것 같았다.

누구보다 황옥선씨와 쌓은 인연이 깊기 때문이다.

 

차례대로 술잔을 올린 후 먼 길 떠나는 고인을 배웅했다.

살아남은 자는 슬프지만, 세상을 떠난 자는 편할 것 같다.

부디 편히 잠드시길....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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