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여는 산악사진가 안승일씨

  
"한반도에서 보는 백두산은 중국 산이에요. 중국 땅을 밟고 주봉(主峯)인 장군봉을 찍어야 진짜 백두산 사진이죠. 통일 돼도 나는 중국에서 백두산을 볼 겁니다."

산악사진가 안승일(68)씨는 괴짜다. 20년 동안 백두산에 살다시피 하며 백두산만 수만 컷 찍어왔다. 여기서 추려낸 사진 60점을 지난 20일부터 다음달 18일까지 예정으로 서울 종로구 아라아트센터에서 전시하고 있다. 산악계와 사진계에서 제법 유명한 안씨지만 개인전은 처음이다. 사진작가 혼자 5개층 9개 전시실을 모두 채우는 것 역시 흔한 일이 아니다. 세로 16m, 가로 4.5m에 달하는 초대형 사진도 있다. 그는 전시가 끝나면 처음 산 사진을 찍던 삼각산으로 가 남은 생을 보내겠단다.



 서울 종로구 아라아트센터에서 만난 안승일씨. 백두산에서 사느라 가족과도 멀어진 그는

“머리 깎고 집에 안 오는 스님보다야 머리 기르고 가끔 집에도 오는 내가 더 가정적”이라며 웃었다.

/김지호 객원기자 


1994년 중국 여행 중 처음으로 백두산을 찾은 안씨는 직감적으로 '여기에 터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산을 오르다가 북녘을 보자 전율이 일었어요. 한국인으로서 신기하지 않나요? 민족 정기가 서린 곳이어서인가 봐요." 그 후 아예 그 근처 마을 이도백하(二道白河)에 작은 작업실을 얻었다. 백두산에서 불과 50km 떨어진 곳이다. 지금도 1년 중 8개월 이상을 백두산에 머문다. 중국인들은 그를 '장백산 괴물'이라고 부른다.

산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날렵한 몸매를 상상한다면 오산이다. 안씨의 허리 둘레는 36인치다. 복부 비만에 고지혈증까지 있다. 산 사진을 찍기 위해 천지(天池) 근처에 텐트를 치고 며칠을 꼼짝않고 엎드려 있기 때문이다. 그가 원하는 날씨와 바람, 구름의 상태가 들어맞을 때까지 기다리는 고독한 작업이다.

죽을 뻔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비경(�境)을 따라 정신없이 셔터를 누르다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딛고 있던 땅이 무너져 내리곤 했다. 사방에서 우르르 낙석(落石) 소리가 나면 "우와, 죽을 뻔했네"하며 혼자 웃고 만다. 안씨에게 사진을 배우겠다며 매번 문하생 한두 명이 동행하지만 1년을 넘긴 사람은 아직 없다.

그는 스스로를 "사진가 이전에 산악가이고, 그 이전에 한민족"이라고 말한다. 통일로 가는 빠른 길 역시 백두산에 있다고 믿는다. "누구라도 백두산에 오르면 모두가 단군의 피를 이어받은 형제임을 느낄 수 있어요. 백두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과 북이 한민족임을 알리기 위해 찍는 거죠."

3년 전 안씨는 본지 인터뷰에서 "누군가 나보다 더 좋은 백두산 사진집을 만들면 안 된다"며 "더 이상의 백두산 장면이 나올 수 없을 때까지 찍고 또 찍겠다"고 했다. 이제 그는 "더는 백두산 사진을 찍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너무 자신만만한 것 아니냐고 묻자 말했다. "산 사진 잘 찍는 놈이요? 사진 재주가 아무리 좋다한들 소용 없어요. 혼자 산에서 구덩이 파고 잘 수 있을 만큼 산과 가까우냐, 그게 관건이에요."

 

 

 

이 사진은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사진집 ‘한국전쟁2’ 에 수록된 사진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1951년 3월1일 미국 종군기자에 의해 전주에서 포착된 사진이다.
손자와 함께 피난길에 나선 노부부의 모습을 촬영하였는데, 할아버지는 양식이 든 가마니와 이불을 짊어진 채, 발길을 멈춘 손자를 추스르고 있고, 할머니는 실의에 빠진 모습으로 양동이와 바가지 등의 부엌살림을 갖고 뒤따르고 있다. 아마 군대에 징용되었을 것 같은 자식의 안위도 걱정스럽지만, 어디까지 언제까지 이 고난의 피난살이를 해야 할지 모르는 암울했던 시기의 상흔이 강하게 전달된다.




이 가족들은 달구지라도 있어 장작에다 귀여운 손녀까지 태웠다.

아래사진은 서울 수복 후의 장면인데, 서대문으로 보이는 곳에서 임시 시장이 열리고 있다.

두 사진 모두 임응식선생의 사진으로 1950년과 1951년에 촬영한 사진이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발행한 '한국현대사진 60년'에 수록된 사진이다.







지난 12월부터 경기도 일원의 장터를 찾아 다녔다.
대개 가까운 지역은 하루 촬영하고, 하루는 사진을 정리하는 식이라 힘들지는 않으나,

장이 너무 늦게 서 여러 장을 돌아 볼 수 없는 단점이 있다.

그리고 난장의 할머니들도 없는 장돌뱅이들 뿐이라 기록에 더 의미를 두어야 했다.

새해 들어 세 번째 나선 지난 6일 촬영지는 강원도 휴전선으로 코스를 바꾸었다.

고성 거진장에서부터 인제 서화장, 철원 와수장으로 향하는 이동 경로는 최전방이라 군부대와 군인들이 많았는데,

약간의 긴장감 같은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길가에는 눈들이 쌓여 있었으나 꼬불꼬불한 도로를 군인들이

깔끔하게 치워 놓아, 설경을 가로지르는 휴전선 드라이브가 꽤 괜찮았다.

간간히 펼쳐지는 이국적 낯선 풍경에 매료되기도 하고....

오전 여덟시 무렵, 거진장에 도착했으나 너무 일렀다. 겨우 서너 명의 장꾼들이 나와 전을 펴고 있을 뿐, 장옥은 텅 비어있었다.

눈이 오면 미끄러워 할머니들이 나오지 않는 경향도 있지만, 날씨가 추워 장꾼들이 늦게 나온다는 것이다.

마냥 기다릴 수 없어 인접한 거진항으로 발길을 돌렸다.

거진항에는 마침 고기잡이 배가 들어와 여러 가지 잡어들을 내려놓았는데, 게와 도치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생전 먹어 본 적도 보지도 못한 ‘도치’라는 생선은 복보다 좀 크게 생겼는데, 주로 탕으로 끊여먹거나 횟감으로 쓴다고 했다.

도치가 죽으면 먹을 수 없어, 대개 그 지역사람들만 즐겨 먹는 생선이라기에 군침은 돌았으나 참았다.

비릿한 냄새에 갈매기들이 날아들고 있었고, 사람들은 사들인 생선들을 고르고 옮기느라 정신없었다.

추운 겨울 새벽 장에서나 만날 수 있는 꿈틀거림, 생동감을 거진항에서 만난 것이다.

불꽃이 피어오르는 난로 가에는 장정들이 둘러앉아 시시껄렁한 잡담을 날리고 있었고,

한 쪽에서는 생선들을 다듬고 있었는데, 모든 사람과 풍경, 사물까지도 정겨웠다.

행복감이 손에 쥐어지는 그런 시간이었다.

 

 

 

 

 

 

 

 

 

 

 

 

 

 

 

 

[2013년 12월 28일 작성]

차라리 한 폭의 그림이었더라면...

 

죽을 구덩이를 파기 전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옆에 서서 웃고 있는 군인의 가증스런 모습에 더 분노를 느낀다.

 

자신이 판 구덩이에 들어가 억울하게 죽어가는 부역자들

 

 

얼마 전  부역자들의 참혹한 학살 장면들이 담긴 눈빛출판사의 ‘한국전쟁’을 보며 그 끔찍함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물며 짐승이라도 그렇게 죽일 수는 없을텐데, 어쩌면 그렇게 잔인하게 죽일 수 있었는지 전쟁의 잔혹성에 온 몸을 떨어야 했다. 부역자들을 일렬로 기둥에 묶어 총살하는 장면은 더러 접한 적이 있으나 쉽게 사체들을 처리하기 위해 나란히 눕혀 총살하거나 그도 못해 스스로 구덩이를 파게 한 다음, 한 곳에 몰아넣어 총살하는 것은 상상도 못한 장면이었다. 더욱이 부역자란 죄목으로 억울하게 죽어 간 양민들에 대한 어떤 보상이나 명예회복도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현실이 너무 가슴 아프고 슬펐다. 그리고 더 부끄러운 것은 이 책들이 세상에 빛을 본지가 어언 10여년이 되었는데도 여지껏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소설가 박 도씨가 미국립문서기록보관청을  드나들며 발굴한 사진으로 “지울 수 없는 이미지”3권을 출판하였고, 2010년에는 ‘한국전쟁’이란 제호로 개정판을 냈는데도 전혀 몰랐던 것이다. 이 숨어있는 전쟁사진들을 세상에 끌어 낸 박 도선생의 끈질긴 집념이나 눈빛출판사의 노력에 새삼 고마움과 경의를 표한다.

 

 나에게도 한국전쟁하면 희미하지만 잊을 수 없는 가슴 떨리는 일이 있었다. 북한군이 나의 고향인 영산까지 밀고 내려왔을 때의 일이다. 낙동강전투의 최후 보루인 내 고향은 피비린내 나는 전장의 한 복판이 되어 버렸다. 남산에는 유엔군들이 진을 치고 북쪽에 있는 영축산에는 북한군들이 포진하여 서로 포격을 해대니 온 마을이 불바다가 되어 버렸다며칠후 전쟁 포화가 잠잠해 질 즈음 어머니는 나를 업고 총총걸음으로 살던 집을 찾아 나섰다. 유엔군들이 진을 친 남산아래 미나리꽝 뚝 길로 지나갈 무렵이었다. 갑자기 피를 흘리고 쓰러진 군인이 “물, 물, 물!”이라 부르짖으며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움켜잡았고, 옆에 선 군인은 그냥 가라며 총부리로 위협하였다. 곳 곳에 널려있는 시체들과 부상병들의 참혹한 모습은 숱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한데, 혹시 '한국전쟁'사진집에 그 때의 기록도 있을까 하여 살펴보기도 했다. 

 

오랜기간 신문과 TV는 물론, 사진하는 사람으로서 사진잡지 한 권 사 보지 않으며 살아왔다. 그러니 세상물정도 어둡고, 사진판 돌아가는 것도 잘 모른다. 얼마 전에는 핸드폰마저 내버려 가까운 사람들의 연락마저 불편하게 만들었는데, 아날로그로 산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 달 전 불의의 사고를 당해 가족에게조차 연락할 수 없었던 일이 생긴 후로 아내의 강압으로 다시 휴대폰을 개통하게 되었고, ‘눈빛서원전’의 충격으로 사진잡지도 한 권 쯤은 구독할 작정이다.

 

‘사진위주 갤러리 류가헌’에서 있었던 ‘눈빛서원전’은 스스로 우물 안 개구리임을 확인시켜 준 전시였다. ‘한국전쟁’을 위시하여 청계천변 판자촌들을 기록한 ‘노무라 리포트’, ‘일제강점기’, ‘신동삼 컬렉션’, 등 보석 같이 귀중한 사진집들이 수두룩하건만 전혀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전시를 시작한 첫 날은 지방촬영으로 너무 늦게 참석하여 책들을 볼 시간이 없었고, 두 번째 초대한 날은 오랜만에 만난 사우들과 이야기 나누느라 볼 기회를 놓쳤다. 그래서 전시가 끝나기 전 날 다시 들려 전시된 책들을 꼼꼼히 살펴볼 수 있었다.  처음 만난 좋은 사진집들이 너무 많아 무슨 책부터 살지 망설이기도 했으나, 일단은 눈빛의 엄청난 업적에 놀랐다.

 

 전시된 사진집들을 고르고 고르다 눈빛 아카이브에서 몇 권 골라왔는데, 그 사진들을 반복해서 보느라 주말을 온전히 지난 세월을 돌아보는데 소진해야 했다. 하지만 나에게 교훈과 채찍이 되어 준 보람된 시간이었다.

 



-눈빛 도서전에서 구입했던 사진집들-

다음 기회에 구입하고 싶은 책은 '일제강점기', '개화기의 대한제국', '신동삼 컬렉션'등이다.




-미 해외참전용사협회에서 엮은 맥아더.클라크.리지웨이 보고서-

[총768면 / 가격 29.000원]

 

-'한국전쟁1'에 실린 수 많은 사진 중의 한 장-

 

진주 주민들이 북한군이 학살한 가족의 시신을 찾고 있다.

당시 무고한 사람 수 백명이 퇴각하던 공산군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 당했다.

 

 

 

 박도씨가 '미국립문서기록보관청'에서 찾아 내 출판한 '지울 수 없는 이미지'1-3권을 모은 사진집이다.

[총768면 / 가격 29.000원]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도 모른채 억울하게 죽어 간 양민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다.

이 사진들을 발굴한 소설가 박 도씨는 이 책 외에도 '지울 수 없는 이미지','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개화기 대한제국','일제강점기',

등을 눈빛출판사에서 출판하였고, 지금은 '미군정기'를 집필 중이며 앞으로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계속해서 펴 낼 것이라고 한다.

 

부역자들의 시신을 일일이 점검하면서 확인사살하는 헌병들

 

 

-목사이자 사회운동가인 '노무라 모토유키가 68년부터 3년동안 청계천변 움막집들을 기록한 사진집-

[총528면 / 가격 29,000원]

 

이 사진집을 보며 놀란 것은 움막집에서 살아가는 빈민들의 생활상을 한국인도 아닌 일본인이 기록했다는 점이다.

그 무렵의 청계천사진으로 구와바라 시세이, 홍순태 선생께서 기록한 청계3가에서 6가 사이의 판자집들은 보았으나,

답십리 마장동, 사근동, 용답동에 걸쳐 널려 있었던 움막집들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사진가도 아닌 일본인 목사 노무라 모토유키가 73년부터 76년까지 기록해 두어 그 실상을 알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의 사진가들은 그 당시 무엇을 찍고 있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사진가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울 뿐이다.

 

청계천변 개미촌 움막집 소녀가 카메라를 쳐다보며 웃고 있다.

 

개미촌 움막집의 사람들 / 청계천변 제방을 파고 판재를 얼기설기 엮어 지어진

이 움막촌은 판자촌보다 주거환경이 더 열악해 일명 '개미촌'으로 불렀다.

1976년 판자촌 철거와 함께 정비되어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서울 변두리나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

 

 

1967년부터 79년까지, 제3공화국의 유신시절의 보도사진들을 집대성한 사진집이다.

[총500면 / 가격 29,000원]

 

한국사진기자협회에서 매년 발행해 온 보도사진년감이 정선의 우리집 서재에 모두 꽂혀 있지만,  

그 많은 책들을 뒤져 필요한 자료 찾기도 쉽지 않고, 분량이 너무 많아 쉽게 손이 가지 않기에 구입했다. .

13년 동안의 중요한 기록들만 집대성하여 한 권으로 묶은 이 책은 살아가는데 반면교사가 될만한 중요한 사진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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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 파동의 소용돌이가 학원으로 번져 동국대학생들이 거리로 뛰쳐 나왔다.

500여명이 교문 밖으로 나오다 기동경찰대의 제지와 헬리곱터의 권유로 일단 해산됐으나

일부는 장충단공원 쪽으로 빠져 투석전을 벌이다 완전포위되어 포로아닌 포로가 되었다. [이창성기자]

 

겨울마다 찾아오는 연탄전쟁은 서민들의 생활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눈이 오는 추운 날 서민들이 리어카로 연탄을 실어 나르고 있다.

 

 

 

 



정선아리랑시장 문화관광형사업단(단장:하재은)에서는 시장협동조합 직원들을 대상으로 시장 블로그 관리운영 및 사진기술교육을 실시하였다. 지난 11월11일부터 시장협동조합과 사업단사무실에서 수차례에 걸쳐 실시된 블로그 관리 및 사진지도는 사진가 정영신씨와 조문호씨가 맡았고, 하재은단장을 비롯하여 김승렬과장, 변혜진과장, 임미순과장, 최양자대리 등 여러 명이 참여하여 그 기능들을 익혔다.

정선아리랑시장 문화관광형사업단의 사업 마지막 해인 2014년은 대부분의 업무를 정선아리랑시장 협동조합에 위임하여 자립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사진교육은 단기간에 해결될 일이 아니기에, 틈틈이 지도하여 정선아리랑시장을 지속적으로 기록해 나갈 수 있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를 한명이라도 양성할 계획이다. 문제는 직장업무와 별개로 사진자체에 대한 관심과 애착을 가진 분이 있을지가 문제다. 새로운 도전으로 또 다른 삶의 가치를 찾고자 하는 직원 분을 기다린다. 

 

 

 

 

 

 

 

 

 

 

 

 

 

 

 

 

 

 

 

 

 

 

 

 

 

 

 

 

 

 

 

 

 

 

 

 

 

 

 

 

 

 

 

 

 

 

 

 

 

 

 

 

 

 

 

 

 

 

 

 

 

 

 

 





눈빛출판사 창립25주년 감사의 밤 행사가 지난 12월 17일 오후5시 ‘눈빛서원전’이 열리고 있는 ‘사진위주갤러리 류가헌’에서 있었다.
그 자리에는 눈빛 이규상 대표와 안미숙 편집장을 비롯하여 이병훈, 박 도, 진용원, 사진가 김한용, 윤주영, 조명동, 오상조, 전민조, 엄상빈, 김문호, 김보섭, 조문호, 김지연, 이수길, 곽명우, 정영신, 원덕희, 성윤미,백남이 씨 등 각지에서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어려운 길을 헤쳐 나온 눈빛의 노고에 힘찬 박수를 보냈다.

 

 

 

 

 

 

 

 

 

 

 

 

 

 

 

 

 

 

 

 

 

 

 

 

 

 

 

 

 

 

 

 

 



창립25주년 맞은 사진전문 눈빛출판사, 이규상대표의 남다른 철학

 

 


'빼도 박도'

2005년 7월, 김대홍 시민기자가 나의 신간에 대한 서평을 쓰다가 배경 자료를 더 알고자 포털 사이트에 '박도'라고 친 모양이다. 그랬더니 관련어로 '애호박도', '1박도'… 등 나와 전혀 관련이 없는 낱말이 나오는데 그중 압권은 '빼도 박도'였다는 기사를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 뒤로 이따금 나도 포털 사이트에 내 이름을 넣고 검색해 보았다. 그러자 점차 나와 관련 깊은 낱말들이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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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의동 류가헌 대문
ⓒ 류가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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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기사를 쓰고자 한 포털 사이트(Daum)에서 '박도'를 쳐 보았다. 박도 소설가, 눈빛출판사,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오마이뉴스>, 한국전쟁 … 등의 관련어가 나왔다.

언저리 사람들은 나에게 눈빛출판사와 어떤 관계냐고, 학연 지연 혈연 등 세속적인 인연을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10년 새 나는 눈빛출판사에서 꼭 12권의 책을 냈고, 지금도 집필 중에 있으며, 앞으로 몇 권 더 낼지는 서로 모른 채 내 건강에 허용하는 한 계속 내기로 묵계가 있다. 하지만 세속적인 인연은 전혀 없다.

며칠 전 손전화 문자로 눈빛출판사 창립 25주년 감사의 밤 초대장을 받았다. 그날(12월 17일)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는 내가 행사장 길을 찾지 못할까 전화로 구구히 설명했다. 하지만, 서울 북촌 서촌 지역은 바둑판 눈금처럼 내 기억에 훤하다. 고교 3년 동안 <경향신문>·<조선일보>·<동아일보> 신문뭉치를 들고 골목골목 뛰어다녔기 때문이다. 류가헌 그곳은 통의동 옛 백송나무가 있었던 자리 부근일 거라는 예감은 그대로 적중해 고불고불한 골목 속의 행사장이건만 누구에게 묻거나 헤매지 않고 단걸음에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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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서원 도서전시장 어귀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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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갤러리 류가헌

조선 한옥을 사진 갤러리로 개조한 그 착상과 안목에 감탄하며 전시된 작품집을 감상하는데 솔직히 내가 펴낸 책이 10권이나 눈에 띄어 흐뭇했다(두 권은 절판). 곧 이어 윤주영 사진가가 오셨기에 무척 반가웠다. 나는 그 분을 오래 전부터 흠모하고 있다. 그 까닭은 이 시대 공직자의 모범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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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영 사진작가와 함께(오른쪽부터 이규상 눈빛 대표, 윤주영 작가, 안미숙 눈빛편집장, 필자)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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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교수, 신문사 편집국장, 칠레 대사, 문화공보부 장관, 국회의원 등 공직을 역임한 뒤 곧장 사진가로 인생 이모작을 출발해 숱한 개인전과 16권의 사진집 출간 등 예술가로 열정적인 삶을 사시기 때문이다.

남미 오지에서 만난 인디오 원주민을 앵글에 담기 시작하여 인도와 네팔,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사할린 등지를 수차례 방문한 뒤 휴머니즘과 역사의식에 바탕으로 사람들의 진솔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오신 분이다.

이 분은 고위공직자의 비리나 추태와는 거리가 먼 깨끔한 삶을 사시기에 내가 특별히 존경하는 분이시다.

또 그분은 국내 곳곳의 탄광촌, 농어촌, 장애아 및 입양아 등 낮은 곳이나 그늘진 곳에 카메라 포커스를 맞춰 온 휴먼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다. 나는 몇해 전 눈빛출판사에서 인사를 나눈 구면이라 반갑게 악수를 하고 앞으로 서로 만나기 힘들 것 같은 예감에 증명사진을 한 컷 남겼다. 곧 이어 나의 고교 동창인 이병훈 한국영상자료원장이 친구도 보고 사진도 보고자 찾아와서 반갑게 포옹했다.

한국의 다큐멘터리 사진가들

이날 밤 류가헌 좁은 마당을 가득 메운 이들은 대한민국에서 저마다 둘째라면 서러워 할 다큐 사진가들이었다. 올해 아흔으로 1950년대부터 충무로에서 최은희·김지미·김진규·김승호 등 당대 톱스타와 정치인들을 주로 촬영한 김한용 선생을 비롯하여 조명동, 전민조, 엄상빈, 조문호, 진용원, 이수길, 곽명우, 오상조, 김보섭, 김문호, 원덕희 그리고 여성 사진가 정영신씨와 두 김지연 작가 등이 속속 도착했다.

전국방방곡곡에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오셔서 눈빛출판사 창립 25주년 돌잔치에 축하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아울러 그동안 척박했던 대한민국의 사진출판의 어려운 길을 헤쳐 온 그 노고에 힘찬 박수를 보냈다.

그러자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는 이경모, 김기찬, 최민식, 신복진, 이형록 선생 등 고인이 되신 작가들의 존함을 먼저 거명하며 그 어르신들의 명복을 빌었다. 독서 환경이 조악한 대한민국 출판계에서 일반 출판도 매우 어렵다. 그런데도 25년을 오로지 사진 전문 출판사로 험한 길을 한 눈 팔지 않고 굿굿하게 걸어온 것은 근현대사의 역사현장을 사진으로 남긴다는 것은 소명의식 때문이었으리라.

한 예로 눈빛출판사에서 펴낸 이경모의 <격동기의 현장>을 통해 8·15 광복과 여수·순천사건, 그리고 6·25 전쟁 현장을 엿볼 수 있다. 이밖에도 출판사 창사 첫 작품집 <북녘사람들>을 비롯하여 월남파병 및 기지촌 등을 카메라에 담은 일본인 사진가 구와바리 시세이의 <촬영금지>, 경의선을 주제로 한 다큐 사진집 <분단풍경>, 전민조의 <서울스케치>, 김기찬의 <골목안 풍경>, 최민식의 <휴먼> 시리즈 등 명품 사진집을 펴냈다.

이번 창사 25주년으로 발간한 임재천의 <한국의 재발견>, 정태원의 <서울발 종합사진>, 그리고 한국사진기자협회의 <한국의 보도사진>에 이르기까지 1988년 창립 이래 사진집, 사진이론서, 사진기술서를 중심으로 500여 종 출판하였다고 한다. 사진 전문 눈빛출판사는 대한민국 출판문화에 작은 거인으로 그 이바지한 바가 매우 크다.

뒤풀이 장소에서 소주잔을 나누며 내가 사진의 '비전문가'가 끼었다고 동석한 사진가에게 사죄했다. 그러자 그분들은 나에게 이전부터 같은 길을 걷는 동지로 여기고 있다면서 NARA(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한국전쟁 사진을 발굴한 나의 행적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한 장의 사진이 혁명의 도화선이 되기도 한다. 전민조 사진가가 엮고 눈빛출판사가 펴낸 <특종 역사를 말하는 사진> 24쪽의 사진이 그렇다. 1960년 4월 11일 오후, 최루탄이 눈에 박힌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이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이를 부산일보 마산 주재 허종 기자가 촬영하여 용감하게 보도했다. 그러자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로 성난 민심에 불을 붙인 격으로 이 사진은 4·19 민주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다.

눈빛과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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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 학생의 사진. 이 사진은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에 따른 분노의 민심에 불을 붙였다(1960. 4.).
ⓒ 허종/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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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2월 4일, 그날 나는 처음으로 미국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에 있는 NARA(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5층 사진자료실에서 <Korean War> 사진파일을 보았다. 그 순간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전율을 느꼈다. 어린 시절 머릿속에 남아 있는 한국전쟁의 실상을 거기서 보았기 때문이다.

이전에 내가 본 반공 일변도의 한국전쟁 사진과는 전혀 달랐다. 중앙청 광장 게양대에 일장기가 내려가자 도열한 미군들의 경례 속에 바로 성조기가 올라갔다. 인민군에 부역 혐의를 받은 바지저고리를 입은 백성들이 삽과 괭이를 들고 '골로 가는' 장면도, 기총소사로 쓰러진 피난민들과 그들의 보따리도 산길 들길에 나뒹굴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고려 때 원나라에 사신으로 간 문익점이 붓두껍에 목화씨를 숨겨온 고사처럼 이들 사진을 한국으로 가져와 전쟁을 체험하지 못한 세대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처음에는 그 방법을 몰라 비싼 돈을 주고 자료실에서 현상 복사했다. 그러다가 곧 자료실에서 스캔은 허용되는 걸 알고 동포 유학생에게 스캐너를 빌려 재미동포 박유종(임시정부 박은식 대통령 손자) 선생의 알뜰한 도움으로 NARA에 소장된 사진 가운데 고르고 골라 약 500점을 수집했다.

이 사진들을 <오마이뉴스>에 <사진으로 본 한국전쟁>이라는 타이틀로 30회 연재했다. 그 뒤 나는 이들 사진을 영구 소장할 수 있는 기록 사진집을 펴내고자 당시 역사비평사 편집장으로 있던 김윤경 고종아우에게 양심적인 사진 출판사를 문의했고 그는 곧장 눈빛출판사를 소개해 줬다. 그래서 이규상 대표를 만나고 그에게 사진파일 모두를 넘겼다.

그는 사진 마니아로 특히 귀중하고 희귀한 우리나라 근현대사 사진 자료를 가장 많이 소장한 사진전문 출판인이다. 그는 한 장의 역사 사진을 구하기 위해 밤잠을 설치며 인터넷 경매에 참여하고 큰 돈도 투척하는 딜러다. 아울러 그는 출판사나 보도기관에게 사진자료를 공급하는 데이터 베이스 구실도 하고 있다. 이는 그가 오로지 사진이라는 한 분야의 우물만 깊이 판 결과일 것이다.

세 번 놀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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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보도사진> 표지. 육군보통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는 윤필용 장군(1973. 4.)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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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2004) 6월 25일 직전 그는 박도 엮음 <지울 수 없는 이미지>라는 사진집을 펴냈다. 그때 나는 세 번 놀랐다. 그 첫 번째는 사진집의 사진이 원판보다 더 선명했다.

NARA에 소장된 사진은 현상한 지 50년이 넘었기에 사진이 오그라들고, 여러 사람이 만졌기에 아무리 장갑을 끼었을지언정 군더기 때가 많이 묻었다. 게다가 나는 스캐너 다루는 일이 처음이라 제대로 복사치 못한 사진도 많았다.

그런데 눈빛출판사에서 어떻게 작업을 했는지 금세 찍은 사진처럼 화면이 깨끔했다. 그 두 번째는 편집이 잘 되었고, 사진집 제목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런 탓인지 곧 여러 신문에서 거의 빠짐없이 대서특필해 주었다.

그 세 번째는 사진집이 나오는 날 소정의 인세를 전액 현찰로 내 손에 쥐어주는데 놀랐다. 솔직히 그 이전까지 나는 책을 10여 권 냈지만, 인세 때문에 속이 상했다.

주경야독으로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원고를 쓰느라 팔에 무리가 가서 오십견을 된통 앓으며 2000매가 넘는 장편소설을 출판사에 넘긴 적이 있다. 하지만 계약금 서푼만 받고 절판될 때까지 끝내 더 이상 인세를 받지 못한 일도 있었다.

또, 중국 대륙을 누비며 쓴 항일유적지 답사기는 여비는커녕 슬라이드 필름 값도 되지 않는 인세를 받았다. 나머지는 하는 수 없이 책으로 받는 갑의 횡포에 벙어리 냉가슴을 앓았다. 게다가 발행부수에 대한 출판사와 저자간의 불신으로 여간 속이 상하지 않았다. 이런 전근대적인 관행에 저자와 작가를 하늘 같이 섬기는 그의 출판인으로서 정직한 자세는 너무도 당연한 일임에도 오히려 신성한 충격이었다.

영업이익보다 우리 사회에 역사의 자취를 남기려는 한 출판인의 양심, 그것이 오늘의 눈빛출판사를 있게 한 바탕으로 사진작가들은 그것을 알기에 자기 분신 같은 사진작품들을 그에게 서슴없이 맡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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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서원 마당을 가득 메운 한국 다큐사진작가들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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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늘 품고 싶은 명품의 책

한국전쟁 사진집 <지울 수 없는 이미지>는 책값이 3만5000원 고가임에도 곧 매진됐다. 그러자 이 대표는 2쇄를 찍으며 내가 NARA에서 한국전쟁 사진을 다 보지 못했다는 말을 기억하고는 선 인세를 주며 다녀오라고 권했다. 그래서 2005년 11월에 2차 방미한 뒤 2006년 <지울 수 없는 이미지> 제2권과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을 펴냈다.

제2권도 1권 못지않게 잘 나왔지만 NARA의 사진에 김원일, 문순태, 이호철, 전상국 등 쟁쟁한 선배 작가 선생들의 한국전쟁 체험담을 실은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은 비단(사진)에 수(글)를 놓은 격이다. 이 작품집은 지금도 스테디셀러로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내가 NARA의 사진을 다 살펴보지 못한 걸 알고 이 대표는 3차 방미를 권하기에 나는 그 참에 버지니아 주 남단 노퍽의 맥아더기념관까지 달려가서 더 다양한 한국전쟁 사진을 수집해 와 <지울 수 없는 이미지> 제3권과 눈빛아카이브 <한국전쟁·Ⅱ>를 펴냈다.

그는 매번 선인세를 주거나 책이 발간하면 즉각 현찰로 지불했다. 내가 서울로 가지 못할 때는 인세를 온라인으로 보내라고 하면 이 대표는 꼭 강원도 횡성 안흥 산골 내 집까지 부인인 안미숙 편집장과 함께 차를 몰고 와서 현찰을 손에 쥐어주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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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표지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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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자기 차에 책을 한 상자 싣고 산골 내 집으로 왔다.

"내년 10월 26일이 안중근 의사 100주기입니다. 제가 수집한 자료를 보시고 안중근 평전을 부탁합니다."

나는 그래서 평전 대신에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발자취를 그대로 뒤좇으며 뜨거운 마음으로, 하얼빈 역 플랫폼에서는 마음 속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며 쓴 <영웅 안중근>을 펴냈다. 나는 이 책을 출판 즉시 안중근 의사의 무덤에 바쳤다. 대한의 젊은이에게도 감히 추천한다.

그 뒤 어느 날 이 대표는 또 다른 참고도서를 안흥 내 집으로 잔뜩 싣고 와서는 '사진으로 보는 근현대사' 원고를 부탁했다. 그래서 나는 산골 '박도글방' 아궁이에 군불을 땐 뒤 머리를 싸매고 대입 수험생 이상으로 역사 공부를 했다. 그래서 나온 책이 <개화기와 대한제국>이요, <일제강점기>다.

이즈음 나는 <미군정기>를 집필 중인데, 이 책이 출판되면 <대한민국 현대사>를 계속해서 펴낼 생각이다. 하지만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게 인생이라 내 생전에 맑은 정신으로 그 큰일을 다 마칠지 단언할 수는 없다. 아무튼 나는 눈빛 이규상 그를 만남으로 역사공부를 하게 되었고 얼치기 역사학도로 입문했다.

한 우물만 파라

새삼 인생길에 '누구를 만나느냐'가 매우 소중함을 깊이 느끼며 이 아름다운 인연이 지속되기를 기원한다. 나는 요즘 오대산 월정사 적광전에 가면 꼭 5배를 드린다. 원래 3배를 드렸는데 작년부터 눈빛출판사와 나의 글 신(神)을 위해 1배, 그리고 딸 며느리 아들을 위해 1배 더 드린다.

그날(12월 17일) 밤 열차로 내 집으로 돌아온 이튿날 이 대표한테 문자가 도착했다.

"함께 자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그 문자를 받고 곧장 답을 했다.

"앞으로도 계속 한 우물만 파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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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서원 도서전시장 내부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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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 박도기자

작지만 강한 출판사 <15> 눈빛

 

 

사진 전문 출판사 눈빛이 낸 첫 책은 프랑스 영화감독이자 사진가 크리스 마커(2012년 작고)의 <북녘 사람들>이었다. 그때가 1989년 2월. 바로 그 전해 11월에 출판사 등록을 한 눈빛이 올해 25돌을 맞았다. ‘창립 25주년 기념 도서전’(11월26일~12월22일)을 열고 있는 서울 종로구 통의동의 사진전문 한옥 갤러리 ‘류가헌’ 전시장 입구에 이런 내용의 걸개자막이 걸려 있다. “당시만 해도 누드나 자연풍광 위주의 아름다움을 내세운 이른바 살롱사진이 주류였다. 흑백사진 140여점을 통해 분단의 아픔을 보여준 다큐멘터리 <북녘 사람들>은 사진계에 전혀 다른 사진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3일 마포구 상암동 사무실에서 만난 이규상(53) 눈빛 대표는 “5년 만에 2000부가 모두 팔린 <북녘 사람들>이 새로운 사진 독자층을 형성했고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에게도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고 했다. 대중출판물로서 사진집의 유통 가능성 또한 그때 검증됐다. 그 가능성은 25년이 지난 지금 연 매출 3억~4억원 규모의 작지만 나름 탄탄한, 명실상부한 한국 유일의 사진 전문 출판사 눈빛의 건재로 현실화했다.

 

“25돌 기념식은 기념 도서전으로 대신했다. 눈빛이 낸 모든 도서(절판·품절품은 제외)를 이렇게 한자리에서 볼 수 있고 할인판매도 하는 행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신간 사진집 3종도 냈다. 임재천의 <한국의 재발견>, 정태원의 <서울발 사진종합>, 이창성·전민조 등의 한국사진작가협회가 엮은 <한국의 보도사진>이다.” 도서전 반응은 “기대 이상으로 좋다”고 했다. <한국의 재발견>은 출간 열흘 만에 재판을 찍었다.

 

“소비하는 매체가 아니라 우리 삶과 역사에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는 미디어로서의 사진”, “사진을 위한 사진이 아니라 삶과 연계된 사진”을 추구해 온 이 대표의 사진관은 류가헌 벽에 걸린 25점의 사진에 잘 드러나 있다. 그중 하나인, 구와바라 시세이가 1965년 입을 굳게 다문 채 무리지어 한일협정 반대 침묵시위를 벌이는 대학생들 모습을 정면에서 찍은 사진은 저항의 에너지가 응축된 터질 듯한 긴장감과 함께 전율에 가까운 역사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이 대표는 사진으로 우리의 역사를 쓰고 싶어한다. 그것도 권력 중심의 역사가 아닌 이름없는 사람들의 역사를. 하지만 이 대표 자신은 사진가가 아니다. 서울예술대 문창과를 나온 문학도다. “문창과 다닐 때 출강한 이기웅 열화당 대표한테서 편집실기를 배웠다. 그때 열화당에 특채돼 3년간 미술 이론서와 미술연감, 사진문고 시리즈를 만들면서 편집자의 기본기를 익혔다.” 같은 문창과에서 만난 안미숙(51)씨와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사표를 내고 사회과학 출판사 거름이 재정 지원을 하던 눈빛 팀에 합류했다. 1988년 11월 눈빛이 독립하면서 이 대표가 인수했다. 그때 망설이던 이 대표의 결심을 끌어낸 사람이 지금 편집장을 하고 있는 아내 안씨였다. “내가 아니었으면 지금 눈빛도 없을 것”이라며 안씨는 웃었다.

 

눈빛 직원은 이 대표와 안 편집장, 그리고 5년째 근무 중인 편집자 성윤미(29)씨, 세 명이 전부.

 

눈빛의 주종목은 사진집이다. 눈빛의 총 500여종 책 중 가장 비싼 건 정봉채의 <우포늪>으로, 정가 7만원이다. 평균 3만~4만원대. 사진집이 비싼 것은 일반 책의 3배나 되는 인쇄비와 종이값 때문이다.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종당 1쇄는 보통 1000부다. 편차가 있지만 3~4년 정도면 다 팔린다.” 6개월에 매진되기도 한다. 이경모의 <격동기의 현장>은 6000부, 산업화·도시화의 이면을 담은 김기찬의 <골목안 풍경>은 5000부 정도 나갔다. 베스트셀러라 하긴 어렵지만 사진집으로는 대박에 가깝다. <한국의 재발견>은 에스엔에스를 통해 사전판매 예고를 했는데, 200부 정도를 예상했으나 450여권의 예약이 들어왔다. 구와바라나 1970년대 서울 청계천 판자촌을 찍은 <노무라 리포트>를 낸 노무라 모토유키도 꾸준히 나간다. 최민식의 <휴먼 전집>과 이론서인 한정식의 <사진예술 개론>도 꾸준하다.

 

“팔리는 기간이 좀 길긴 해도 깔아 놓은 종수가 많아 큰 걱정 없이 근근이 유지할 수 있다. 적자는 면했다. 나는 다른 재테크 하지 않고 책으로만 재생산을 하고 있다. 독자들이 눈빛을 만들어주었고 또 독자들 덕에 유지되고 있다는 얘기는 빈말이 아니다.”

 

한국 사회의 경박한 상업주의와 배금주의, 문화 경시 풍토에 가슴 아파하는 이 대표는 “유통구조 담합과 후배들을 키워주지 않는 잘나가는 소수 작가들의 유아독존식 행태가 사진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현실에 매우 비판적이다.

 

“10여년 전부터 20세기 한국인의 삶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과 도서를 수집해 왔다. 압축성장으로 잃어버린 것을 다시 복원해 놓고 싶다. 사진은 단순히 예술 장르여선 안 된다. 여러 인문 분야와 연계해서 사진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그것을 하지 않는 건 직무유기다.”

 

[한겨레신문]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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