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봉 스님 기일이라는 전활철씨 연락을 받았다.

 

만봉스님 자제분인 이인섭선생께서 생일과 기일이 되면 매번 지인들을 불러 모아 오찬을 베푸는 시간을 마련하는데,

직접 재워두었다가 구워주는 소갈비 맛 하나는 정말 일품이다.

 

가끔 기다려지는 이유도 그 맛을 잊지 못해서다. 솔직하게 말해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이 많은 것이다.

 

코로나 사태이후 한 번도 가지 못해 이번엔 만사를 제쳐두고 봉원사로 달려간 것이다.

 

입구에 걸린 고색창연한 ‘만봉불화전시관’이란 현판이 반겼는데, 안쪽에는 이인섭선생을 비롯하여 전활철, 김명성, 안영희, 안완규씨등 뵌 지가 오래되어 성함도 기억나지 않는 몇몇 분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손님들이 선물로 위스키나 와인을 가져왔는데, 스님 기일에 양주와 갈비 파티가 어울리지 않지만, 인사동 주객 이인섭선생의 오랜 전통이니 널리 양해하시길...

 

다른 분들이야 가끔 인사동에서 만나지만, 만봉스님 제자였던 안영희씨는 너무 오랜 만 이었다.

예쁜 모습은 여전하지만, 곱게 나이던 주름을 보니 흐르는 세월은 어쩔 수 없었다.

 

차를 끌고 와 술은 마실 수 없었지만 다른 분들도 이른 낮이라 그런지 좋은 술이 남아돌았다.

 

이인섭선생 기력도 예전 같지 않아, 전활철, 김명성씨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 보러 간다는 전활철씨를 영천시장에 내려주고 ‘예술의 전당’에 갔다. 판화전시 보러 간다는 김명성씨 따라 나섰지만, 나 역시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지난 번 갔을 때는 일정에 쫓겨 꼼꼼히 살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시가 끝나는 날이라 철수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달리 관객이 제법 있었다.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좋은 전시였다. 판화의 진면목을 골고루 볼 수 있는 이만한 기획전을 어디서 보겠는가? 미술품 컬렉터이기도 한 김명성씨는 김억씨 작품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돌아오는 길에 이태원에서 실내장식 중인 뮤지션 김상현씨를 만나러 갔다.

이제 ‘뮤아트’ 신사동 시대를 끝내고 다시 이태원으로 복귀한 셈이다.

 

공사 중인 현장을 둘러보았는데, 약50여 평 되는 공간에 공사자재들이 쌓여 있었다,

신사동 ‘뮤아트’보다 더 멋진 공연장이 될 것 같았다.

 

‘이태원 이모네' 집으로 자리를 옮겨 한 잔 했는데, 벽에 붙어 있는 글귀가 재미있었다.

 

생각에 따라 묘한 뉘앙스를 풍겼다.

 

주 화제는 독립운동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요즘 김명성씨가 이승만에 의해 독립유공자 서훈도 받지 못한 독립 운동가들의 자료들을 추적하고 있다는데, 대표적인 항일단체였던 ‘조선의혈단’에서 활동한 독립 운동가들의 서찰을 많이 찾아냈다고 한다. 얼마나 독립운동사에 빠져 몰입하는지, 좋아했던 여자 잊은 지도 오래되었다고 한다.

 

정선 집에 불난 이야기도 나왔는데, 변호사를 선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했다. 시일이 오래 걸리지만,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소송을 위한 비용은 화가 박건씨가 페이스북에 올려 들어 온 후원금 천만 원으로 우선 추진한다는 말에 김명성씨와 김상현씨도 보태겠다며 주머니를 털어주었다.

 

옆집의 뻔뻔하고 얄팍한 속내도 얄밉지만, 나에게 제일 중요한 필름 원본이 보험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잘못된 손해배상 규정에 맞서기 위해서다. 내일은 변호사를 만나기로 했으나 마음은 편치않다.  

 

사진, 글 / 조문호

 

화가 최울가가 서울서 전시를 한다기에, 정 동지를 앞 세워 평창동 ‘가나아트’로 갔다.

 

월요일의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전시장엔 아무도 없었는데,

1, 2, 3관으로 이어지는 넓은 전시장에 회화는 물론 조각과 드로잉까지

60여점이 제 자리를 지키 듯 경쾌한 놀이마당을 펼치고 있었다.

 

제목으로 내건 ‘화이트, 블랙, 레드+’ 시리즈는 물론 최근에 시작했다는 스티커 입체화도 있었다.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깔끔하면서도 모던한 느낌을 주었다.

세삼 그의 천진무구한 즉흥적 자유로움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여느 작품처럼 무거워 보이거나 난해하지 않고 재미있었다.

그의 말처럼,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재미와 즐거움이었다.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꽃이나 어항, 물고기나 새, 그리고 상형문자 같은

기이하고도 자유분방한 이미지의 나열이 산만하지 않고 절제돼 보이는 까닭이 뭘까?

그건 바로 인간이 언어로 소통하기 전부터 남긴 벽화 이미지, 즉 원초적 미의식의 발로라 여겨진다.

 

왜 최울가가 국내뿐 아니라 해외화단에서 한국의 대표작가 중 한사람으로서 주목받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5년 전, 최울가 작업실에서...

 

난, 최울가를 40여 년 지켜보았다.

유목민처럼 세계를 떠돌며 작업하는 터라 자주 볼 수는 없지만, 만나면 술도 받아주고 용돈까지 챙겨주는 아우 같은 벗이다.

 

오래전 부산 남포동에 국악을 들려주는 ‘한마당’이란 술집을 차린 적이 있었는데,

우리 집 단골손님으로 드나들며 그와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물론 그 때는 가난한 무명화가였다.

 

그 무렵 자주 드나들던 화가 중 지금은 고인이 된 이존수와 박광호도 있었는데,

세 사람 모두 인사동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다는 점도 우연치고는 남다르다.

 

다들 나름의 치열한 예술혼을 불태웠지만,

한 사람은 대학로 빨래집게 전시로 유명세를 타 돈은 벌었지만 돈이 사람을 망쳤고,

고집스러운 한 사람은 돈이 없어 고생하다 안타깝게 이승을 떴다.

그러나 최울가는 돈에 집착하지 않아 살아남았는지 모른다.

 

공교롭게도 세 작가의 작품을 모두 소장하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이번 정선 집 화재로 모두 태워버렸다.

 

오래 전 박광호도 자신의 그림을 모두 태운 적이 있지만,

최울가도 10여 년 전 뉴욕 그라피티의 자유분방함과 현대예술가 데미안 허스트의 실험적인 설치미술에 충격 받아 이전에 그려놓은 작품 200점을 미련 없이 불태워버리고 재충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애착가진 그림들은 왜 불과 연관이 있을까?

 

30년 전 최울가가 선물했던 불 탄 작품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비 오는 날 개울가에 한 아이가 쪼그려 앉아 우산을 받쳐 들고 있었는데, 그 아래 개구리 한 마리가 있었다.

비 맞는 개구리를 걱정하는 여린 동심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당시 최울가 작품은 대부분 시적인 천진난만함이 깔려 있었다,

 

이제 유일하게 남은 작품마저 소실되었으니, 어찌 아깝지 않겠는가?

돈이 없어 생명줄과 마찬가지인 카메라를 전당포에 잡혀도

그림들은 팔지 않았는데, 그마저 나에겐 욕심이었단 말이던가?

 

이제 최울가의 사는 방법과 작품세계를 한 번 들여다보자.

 

‘Black & White’ 시리즈로 뉴욕 화단에서 주목 받은 최울가는 국내는 물론 파리, 베를린, 부다페스트 등 세계무대를 누벼왔다.

‘Black & White’ 시리즈에는 일상적 삶과 관련된 요소들로 채워졌다.

관계성 없는 사물들의 무질서한 공존은 작가가 가진 무의식의 세계였다.

 

특징짓는 검은색과 흰색은 그가 생각하는 우주와 빛의 근원에 가장 가까운 색이다.

이  두 가지 색을 사용해 그는 원시적 생명력을 표현한 것이다.

 

최울가는 30년 넘게 유목민처럼 세계를 떠돌았다.

뒤늦게 파리국립장식예술학교와 베르사유미술학교를 나와 2000년 뉴욕으로 건너갔다.

파주 헤이리 작업실에서는 아시아권으로 파리에서는 유럽권, 그리고 뉴욕에서는 북미 지역을 넘나들었다.

 

자리가 잡힐 만하면 익숙해 진 삶의 공간을 떠나 다시 낮선 곳으로 떠나갔다

그래서 그의 이름자 앞에는 유목민이란 말이 항상 따라 다닌다.

아마 그의 몸에 새로운 땅을 찾는 유목민의 피가 흐르나보다.

 

유목민처럼 떠돈 것은 그 낮 선 이질적 공간에 질서를 부여하여 다시 동질적 공간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그 현실적 공간이 작가의 몸을 통해서 회화적 공간으로 다시 재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은 데도,

낮 선 세계, 즉 새로운 장소에 거주하는 경험 자체가 작품에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그리고 삶터의 이동이라는 유목성이 최울가 예술의 한 축이라고 한다면,

중복되는 이미지와 중첩적인 텍스트 사이의 유동성이 최울가 예술의 또 다른 축을 이룬다.

인생이나 예술이나 본질적으로는 움직임 자체가 아니던가?

그 유동성이 특정한 감각적 방식으로 고정되어 하나의 구체적 형태를 가진 이미지로 재현된 것이다.

 

그는 사실적으로 재현하지 않고 원시적이며 초월적인 작품세계를 보여왔다.

원시성을 띤 그의 그림들은 너무 순수해 꿈을 꾸 듯 동화 속 한 장면을 대하는 것 같다.

 

다양한 도형을 바탕으로 한 그림들은 드로잉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드로잉 자체가 구석기시대부터 시작된 원초적인 표현방법이 아니던가. 작가의 고향이었던 울산 반구대 암각화가 연상되기도 했다.

사람이 등장하기도 하고, 동물이나 나무 같은 사물들이 무질서하게 그려 진 그림들은 원시적인 인간 본연의 삶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무시하는 그의 아나키적 화법도 한 몫 했다.

마치 아이들의 낙서와도 같은 그의 작업은 눈에 익숙한 잘 그린 그림과는 사뭇 다르다.

대상의 재현이 목표가 아니라 원초적 미의식에 바탕 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말하려는 것 자체가 자신을 가로막는 장애란 것도 깨달았다고 한다.

작가의 끝없는 자유로움이 새로운 변화를 끌어 낸 것이다.

 

최근 그는 기존의 캔버스에서 벗어나 더욱 다양한 매체와 형태의 작업을 시도한다.

이미지를 입체화한 세라믹조각과 스티커를 활용한 입체그림이 그중 하나다.

그의 신작 ‘Beetle Series’는 입체평면 스티커 작업으로 만들어졌다.

 

이전에도 종종 스티커를 배경에 부착해 화면에 변화를 주곤 했으나,

이번 연작들은 아이들이 스티커를 벽면에 붙이고 노는 것을 연상시킨다.

시계, 꽃병, 사람 머리 같은 시리즈를 구성하는 이미지를 에폭시 스티커로 채워놓았다.

재료든, 형식이든 테두리 안에 갇혀 있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

 

그림에 표기된 상형문자 같은 기호들은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의식에 다름 아니다.

기호로 채워진 그 촘촘한 세계야말로 우리가 바쁘게 살아가는 공간일 것이며,

원시성의 훼손에 대한 물질문명을 비판하는 그만의 놀이 법인 셈이다.

 

그의 그림들은 원초적 자유와 어린 시절의 순수한 감성을 끄집어낸다.

그리고 본연으로 돌아가라고 노래한다.

도식화된 삶을 살아가는 각박한 현대인들에게 깨우침을 준다.

 

최울가 최근모습, 인터넷에서 스크랩

 

최울가의 ‘화이트, 블랙, 레드+’전은 오는 30일까지라 며칠 남지 않았다.

(평창동 가나아트 / 02-720-1020)

 

사진, 글 / 조문호

 

전시를 보고나서 담배 생각이 나 옥상으로 올라가다 깜짝 놀랐다.

누구 작품인지 모르지만, 소녀가 거꾸로 서서 쩍 벌린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미투 강박관념에 나도 모르게 줄행랑쳤다

아이구!  숨차...

 

 

 

며칠 전 조준영시인으로 부터 인사동서 만나자는 전화가 걸려왔다.

 

 

 

예전에는 정기적인 인사동 모임이 있었으나, 코로나 광풍에 밀려 사라진터라 반가운 기별이 아닐 수 없었다.

 

 

 

조준영씨를 만난 지가 일 년을 훌쩍 넘겼으나 인원수 제한에 걸려  다른 분은 연락도 못했다.

아마 정선 집에 불난 소문을 듣고 무리하게 자리 만든 것 같았다.

 

 

 

정영신씨와 함께 약속보다 일찍 나가 마루아트에서 열리는 노무현 추모전 사람 사는 세상’부터 보러갔다.

 

 

 

전시장에서 박재동 화백과 유준 화백을 만나기도 했다.

 

 

 

99명의 작가들이 내놓은 작품들이 넓은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는데, 세삼 울컥하게 만든 작품은 노무현대통령 전속 사진가로 일한 장철영씨 사진이었다소탈한 바보 대통령의 진솔한 모습에 어찌 옛날 생각이 나지 않겠는가?

 

 

 

오랜만에 나온 인사동 거리는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문 닫았던 몇몇 가게들이 옷 가게나 악세서리 가게로 다시 문을 열었는데, 전통 노리개를 팔던 아원공방자리는 화려한 색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인사동 길가의 신축건물 일층에 더 스타갤러리가 문을 열었더라.

일 년만 숨어 지내다 오면 인사동의 모든 게 다 바뀔 것 같았다.

 

 

 

약속시간이 되어 툇마루로 갔더니, 김 발렌티노가 반갑게 맞았다.

요즘 청소부로 돈 번다며 밥 한 그릇 사겠다고 우겼으나 약속이 있어 사양했다.

 

 

 

'툇마루에서 조준영씨를 만나 된장 비빔밥에 막걸리 한 잔 했다.

요즘 술만 마시면 힘들어 아껴 마실 수 밖에 없었는데, 입은 땡기고 머리는 말리니 어느 장단에 춤 출지 모르겠더라.

 

 

 

다들 지난한 나날들 하소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조준영씨가 화재 후원금을 건네주었다.

함께 공유할 예술창고를 만들려면, 돈보다 많은 사람들의 동참이 필요해 고맙게 받아 들였다.

 

 

 

대기손님들이 일어나기만 기다리고 있어 오래 버틸 재간이 없었다.

 

 

 

툇마루에서 나와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유목민도 손님이 많았다.

그런데, 이게 누군가? 소식 끊겨 죽은 줄만 알았던 장춘씨가 나타난 것이다.

 

 

 

정말, 안보면 보고 싶고 보면 징그러운 여인이다.

'죽어도 고.”라는 작심으로 마시기 시작했는데, 소주가 입에 짝짝 달라붙었다.

 

 

 

오랜만에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는데, 그녀의 언어 법은 귀신들이 나누는 말투라 다소 난해하다.

 

 

 

우린 한 쪽 귀로 듣고 한 쪽으로 흘리니 문제될 게 없으나, 옆 좌석에 던지는 실 없는 소리에 신경 쓰였다

다행스럽게 귀신 말귀를 알아챘는지, 맞장구를 쳐 주어 분위기가 무러익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홀짝 홀짝 마신 술에 취해 버렸다.

그렇지만, 이 얼마만이더냐? 마음대로 이야기하며 기분 좋게 마신 적이...

 

 

 

같은 방향이라 녹번동으로 함께 갔는데, 장춘씨가 떠난 생각이 나지않는 걸 보니, 아마 먼저 뻗은 것 같았.

벌 받아 그 다음 날은 하루 종일 누워 낑낑거렸으나 후회되지는 않았다.

 

 

 

 우리가 놀면 날마다 노나?

"사랑이 좋으냐? 친구가 좋으냐?

막걸 리가 좋으냐? 색시가 좋으냐?

사랑도 좋고 친구도 좋지만 막걸리 따라주는 색시가 좋더라.

앵헤야~ 엥헤야~ 앵헤야~ 앵헤야~“

 

사진, / 조문호

 

 

1980년대 ‘바람맞이’ 춤으로 민주화의 열망과 시대의 아픔까지 온몸으로 껴안았던 이 시대의 춤꾼 이애주(74세)서울대 명예교수가 지난 10일 오후 5시20분께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한영숙(1920~1989) 승무의 적통을 이어받아 1974년 첫 번째 발표회인 이애주 춤판을 연 이래 국내는 물론 세계 각지에서 우리 전통춤의 가치를 더 높였다.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로 지정됐으며, 같은 해부터 모교인 서울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그동안 한국전통춤회 예술감독, 한영숙춤보존회 회장을 지냈으며 2019년 경기도문화의전당(경기아트센터) 이사장으로 임명됐다.

 

 

 

2003년 만해대상(예술부문), 2013년 옥조근정훈장 대통령상, 2017년 제7회 박헌봉 국악상, 2019년 제1회 대한민국 전통춤 4대명무 한영숙상 등을 수상했다.

 

 

 

평생 독신으로 지낸 고인은 지난해 10월 말기암 진단을 받은 뒤 투병 생활을 해왔다고 한다. 유족으로는 동생 이애경(한국무용가)씨와 제부 임진택(창작판소리 명창)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301호실이고, 13일 오전7시에 추모문화제가 열린다. 오전8시부터 대학로와 과천에서 노제를 지낸 후 오후3시경 장지인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사진은 1980년대 김종철, 이한열 열사 장례에서부터 2013아라아트개관과 함께 열린 오윤 유작전 춤판에 이르기까지 각종 행사나 전시 뒤풀이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지난 날을 되돌아보며 고인을 추모하시길 바랍니다

 

 

1988 인사동 거리축제에서 널 뛰기를 하고 있다. 뒷편이 '쌈지'로 바뀐 '영빈가든'

지난 4월3일 ‘푸른사상’ 맹문재씨 사무실에서 방동규선생을 모시고

돌아가신 백기완선생 이야기를 듣는 자리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인사동 이야기가 잠간 언급되었는데

 내용인 즉, 인사동 매력이 사라져 별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좌로부터 맹문재, 조문호, 방동규선생

그동안 인사동은 끝났다는 소리를 많은 사람들이 했지만, 사실상 인사동 풍류가 사라진지 오래다.

그 이야기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은, 나에 대한 충고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왜 인사동에 집착하는지에 대한 스스로의 질문이었다.

 

2009 눈오는 날의 인사동거리

아무리 생각해도 인사동은 잊을 수 없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환경이 달라졌다고 고향이 고향 아닐 수도 없지만,

마지막까지 변해가는 인사동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기록에 좋고 나쁜 것이 있겠는가?

 

1982 실비집에서 나오는 박종수시인과 천상병시인

내가 인사동과 인연을 가진 것은 부산에서 올라 온 81년 무렵이었다.

아무 의지할 곳 없는 낯선 타향에서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곳이 인사동이었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서...

인사동에는 미국에서 ‘서울로 서울로’를 노래 부른 최정자 시인,

적음이란 법명을 가진 땡초시인 최영해, '실종' 소설로 실종된 소설가 구중관,

인사동에 재산 다 털어넣은 김명성, 인사동 마당발 노광래,

소설 폐업한다며 ‘작가폐업’ 술집 낸 배평모, 술값 내 주는 물주 사진기자 김종구,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한 화가 이청운, 별을 그리다 별이 된 화가 강용대,

히말라야 기 받아 잘 나가는 화가 강찬모, 노동자 시인 김신용,

바람개비 작가로 알려진 설치미술가 김언경, 사마귀 그림으로 알려진 전강호,

막사발로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도예가 김용문, 시와 도자가 하나인 신동여,

아직까지 대위로 불리는 공윤희, 홍대미대 나와 술 장사하는 전활철

목련이 뚝뚝 떨어지는 노래로 애간장을 녹였던 임춘원 시인,

‘갈까보다’ 판소리로 휘어 잡은 ‘레테’ 주인 이점숙 등 많은 사람을 만났다.

 

2006, 호젓한 아침 무렵의 거리풍경

인사동 지척에 있는 피맛골에 박종수 시인이 운영한 '시인통신'이 있었는데,

시인 조해인, 화가 이목일, 연극배우 이명희, 언론인 이두엽 등

많은 예술가들이 피맛골과 인사동을 넘나들었다.

 

1985, 초창기 맴버들 ,좌로 이윤섭,노광래,박광호,최울가, 고 김종구(앞), 공윤희, 김신용,황외성

그런데, 부산에서 잘 알던 화가 이존수, 최울가, 박광호를 비롯하여

마산에서 상경한 디제이 출신 박한웅 등 여러 사람을 우연히 인사동에서 만난 것이다.

이처럼, 인사동에 애착을 갖는 것도 인사동이란 장소에 앞서 사람에 대한 정이다.

 

1984, 인사동거리축제에서, 화가 강용대 모습도 보인다

88년 무렵, 인사동 사거리의 허름한 옥탑 방을 얻어 ‘카메라워크’ 작업실로 사용한 적이 있다.

그러나 작업실이 종종 술집이 되어 노는 것과 일이 구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충무로로 옮기고 부터 여기 저기 떠돌았는데, 한참 후 그 옥탑방을 다시 찾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놀랍게도 방 곳곳에 손 때 묻은 나의 흔적들이 있었다.

끼익끼익 소리 내며 돌아가는 환풍기와 쓰레기에 섞여 나온 빛바랜 간판이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 유적 같은 파편들이 인사동 사람들을 더 그립게 만든 것이다.

벗들을 다시 찾아 나서며 찍은 입상사진으로 전시도 했다.

그 이후 정영신씨와 사진출력실 ‘아트온’을 차렸으나 돈 벌이가 되지 않았다.

 

2015, 심우성,이명희,강민,정영신씨, 돌아가신 심우성, 강민 선생은 유달리 인사동을 사랑하셨다.

필자 외에도 인사동 주변에 사무실이나 작업실을 두고 왕래한 분이 여럿 있었다.

70년대 후반에 문을 연 김상옥시인의 ‘아자방’을 비롯하여 민속학자 심우성, 김동수, 

사진가 한정식, 김영수, 정인숙, 안영상, 언론인 임재경, 화가 이존수,

 서지학자 김영복, 시인 송상욱, 서예가 이상명, 천연염색인 이명선 등이다

 

1999 '아트온' 사무실에서, 좌로부터 전활철, 김의권, 변형주, 김언경

80년대 초반에는 문학 유목민들도 인사동으로 대거 옮겨왔다.

명동에서 관철동으로 옮겨 ‘한국기원’에서 지내던 문인들이 인사동으로 건너 온 것이다.

늘 봇짐을 메고 다녔던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을 비롯하여

‘귀천’에 죽치며 막걸리 집을 드나들었던 천상병시인,

영국산 파이프를 물고, 술보다는 커피 향을 즐기던 박이엽 방송작가,

시인 신경림, 황명걸, 문학평론가 구중서선생 등 일개 소대는 족히 되었을 거다.

그 이후에는 행위예술가 무세중, 무나미씨를 비롯하여

거지행색으로 인사동을 누비던 중광스님과 원광스님 등 괴짜 스님들도 등장했다.

 

2006 고) 원광스님

천상병 시인 부인 목순옥씨가 차린 ‘귀천’과 장문정씨의 ‘수희재’,

최정해씨의 ‘초당’ 같은 찻집이 만남의 장소였다.

술집으로는 실비집이나 고갈비 양푼집 등 이름도 없는 대폿집이 단골이었다.

실비대학이라 불린 '실비집'은 항상 빈털털이 예술가들이 우글거렸다.

그 이후 ‘하가’나 '레떼', '춘원', '누님칼국수‘ 등이 생겨났고,

전시 뒤풀이 장소였던 ’부산식당‘에서 많은 작가들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 무렵에 알게 된 작가로는 김용태, 여 운, 문영태, 신학철, 박불똥, 황재형, 박성남,

최민화, 장익화, 류연복, 미술평론가 곽대원, 최석태, 조각가 박상희, 연극연출가 기국서,

음악인 김상현, 시인 서정춘, 소설가 박인식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2014, 좌로부터 구중서,강민,방동규,추은희,김승환,기국서,신경림,정두리,박정희,장소임,심우성선생

84년 정동용 시인이 운영한 ‘시인학교’를 시작으로

이생진 시인의 ‘순풍에 돛을 달고’, 김여옥 시인의 ‘시인’, 

몇 년 전 문을 연 이춘우 시인의 ‘시가연’이 생기는 등

문인들의 아지트도 이어졌다.

 

1989 '춘원'에서 열린 문은옥시인 시집 출판기념회, 박중식시인이 삼페인을 들고 있다

인사동은 예술단체들이 모여 있었다는 점도 또 하나 특징이다.

남인사마당 맞은편의 포도대장 터에는 초창기 ’예총회관‘이 있었고,

80년대 중반에는 ‘민미협’이 창립되며 김용태, 문영태, 유홍준씨가 주동이 된

‘그림마당 민’이 생겨나는 등 민중미술의 본거지가 된 것이다.

 

1985 안국동 아랍미술관 ‘한국미술 20대의 힘 전’에서 / 박용수사진

88년에는 조성국, 고 은, 김윤수선생이 공동의장을 맡고

신경림선생이 사무총장, 김용태가 실질적인 업무를 맡은

‘민예총’이 창립되며 건국빌딩에 사무실을 냈다.

그리고 99년에는 홍순태선생이 회장이고 필자가 사무국장을 맡은

‘민사협’이 창립되어 북인사마당 입구 제과점 2층에 둥지 틀었다.

 

2011 '푸른별 이야기'에서 좌로부터 배평모, 전강호내외, 장경호, 최일순, 전활철, 김용문

이렇게 형성된 인사동 풍류는 문인과 화가만이 아니라 사진가, 연극인, 언론인까지 모여 들였다.

한학자 노촌 이구영선생을 비롯하여 김영복, 임계재, 김문호 등 여러 명이

‘이문학회’를 만들어 정기적으로 낙원동에서 모이기도 했다,

'통인가게' 관우가 주동이 된 '인사모'를 비롯한 인사동을 사랑하는 모임도 여럿 생겼다.

 

2013 '인사모' 회원들, 왼쪽부터 강윤구, 박일환, '김완규, 민건식 

심우성, 채현국, 민 영, 김동수, 신봉승, 이계익, 이호철, 조준영, 장경호, 윤양섭, 배성일 등

많은 예술가들이 그 무렵 생겨 난 노인자 ‘뜨락’이나 ‘소설’,

이해림의 ‘평화만들기’  이미례 영화감독의 ‘여자만’, 송점순의 ‘사동집’,

유재만의 ‘아리랑가든’, 박중식 시인의 ‘툇마루’같은 술집이나 밥집을 드나들었다.

전유성의 ‘학교종이 땡땡땡’과 사진가 김수길의 '구름에 달 가듯이', 시인 강고운의 '무다헌'도 있었다.

 

2007 '무다헌'에서 노래하는 이계익선생, 좌측은 송상욱시인

2012년에는 전활철의 ‘유목민’과 최일순의 ‘푸른별 이야기“도 생겨났다.

인사동 술집 곳곳에는 많은 예술가들이 북적이며 개똥철학을 풀어댔다.

그러나 술판의 끝자락은 언제나 소란했다.

‘평화 만들기’에 평화가 없던 그때가 인사동의 전성기였다.

 

2010  '봄날은 간다'사진전에서 아코디온을 켜는 이계익 전장관, 좌측은 연극배우 이명희,민영시인

이제 인사동의 마지막 풍류주막으로 꼽을 수 있는 곳은

김용태 미망인 박영애가 운영하는 ‘풍류사랑’과 전활철의 ’유목민‘ 뿐이다.

 

1987 실비집 골목에서, 좌로부터 박한웅, 조해인시인

세월을 되돌려 옛 사료들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궁중화가들의 작업실인 도화서도 인사동에 있었다고 한다,

연암 박지원과 율곡선생도 인사동에 살았고,

400년 된 회화나무와 명성황후의 조카 민익두 대감의 옛 저택인 ‘민가다헌’,

박영효 대감댁이었던 ‘경인미술관’ 한옥도 인사동 유적이다.

그리고 작년에는 ‘통인화랑’, ‘통문관’, ‘동헌필방’, ‘농협종로지점’,

‘이문설농탕’ 등이 서울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953 인사동거리 / 임인식사진

19세기말 개화바람이 불면서 인사동 일대는 교회, 요릿집, 병원 등이 들어서며 신식 동네로 변해갔다.

태화관 터, 천도교 수운회관, 숭동교회, 해정병원 등이 다 그 때 생긴 것이다.

 

2018, 이겸노옹에 이어 지금은 손자인 이종운씨가 운영하는 '통문관'

1924년 김정환 옹의 ‘통인가게’가 생기면서 고미술 관련 상가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1934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책방, 산기 이겸노옹이 운영한 ‘통문관’도 들어섰다.

가장 오래되었으나 살아 남았던 '통인가게'나 '통문관'이 같은 통할 통자를 쓰는 것도 흥미롭다.

 

2020 '통인가게' 김완규선생

한국전쟁 이후에는 고가구나 고미술품 등 골동이 인사동으로 쏟아져 들어오며,

1960년대까지 고서점, 고미술상, 필방, 표구점 거리가 되었다.

'구하산방'과 수도약국도 그 때 생겨난 것이다.

 

1988 수도약국 앞에서 휘호대회를 구경하는 사람들

일제강점기에 형성되었던 골동품 상점들은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 초까지 성시를 이루었는데,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먹고 살기 힘들어 많은 골동품이 인사동으로 몰려들었다.

미군장교 출신 막 뮐러가 골동품을 몇 트럭이나 사들여 번 돈으로 천리포수목원도 만들었고, 

골동상들도 때 돈을 벌었다.  문제는 소중한 유적들을 일본에 팔아 넘겼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기사건도 성행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가짜 고서화사건, 금당 살인사건이다.

 

1988 북인사마당 장승터에서 고사를 지내고 있다

인사동이 갤러리 타운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다.

박명자씨의 ‘현대화랑’이 관훈동에 문을 연 것을 기점으로 1974년 '문헌화랑',

1976년 '경미화랑' 등의 상업 화랑들이 속속 모여들어 미술문화의 거리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한국화 작가를 발굴하여 전시하는 박주환씨가 1976년 '동산방'을 열었고,

1977년에는 김창실씨가 '선화랑'을 열었다.

1983년 이호재씨의 ‘가나화랑’과 공창호씨의 ‘공창화랑’, ‘관훈갤러리’, ‘학고재’,

‘경인미술관’ 등이 개관하므로 인사동은 명실상부한 화랑가로 자리를 굳힌 것이다.

 

김명성씨가 2012년 개관한 '아라아트' 전경

한 참후에는 화가 최대식씨가 운영한 갤러리 21‘과

미술평론가 김진하씨가 운영한 ’나무화랑‘을 비롯한 많은 화랑이 생겨났다.

’나무화랑‘은 ’그림마당 민‘에 이은 민중미술 터전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통인가게‘를 이어받은 관우선생의 ’통인옥션갤러리‘도 역량 있는 작가를 꾸준히 초대하며,

정기적으로 판소리마당을 여는 등 인사동 문화를 일으키는데 일조하고 있다.

 

1959년 인사동 사진갤러리 '신한화랑' 개관식에 참석한 사진계인사,

왼쪽 4번째가 이경모선생, 다섯번째가 임인식선생, 일곱번째는 이해선선생, 열번째가 성두경선생

 

상업화랑이 생겨나기 이전인 1959년에는 종군사진기자 임인식선생이

관훈동에 사진전문화랑인 '신한화랑'을 차린 적도 있었다.

80년대 중반에는 신희순이 운영한 ‘꽃나라’ 라는 흑백현상소가 생겨나며

김대현, 양은환, 유성준, 정영신, 윤 옥, 김종신, 정용선, 이혜순, 고영준, 하상일, 변홍섭 등

많은 사진인들이 인사동을 더나드는 계기가 되었다.

 

2018, 인사동 "꽃나라'에 출입하던 사진인들을 오랜만에 인사동에서 만났다. / 정영신사진

2000년대 이후에는 ‘김영섭화랑’과 이순심이 운영한 ‘나우’와 룩스’가 생겼으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최건수가 운영하는 ‘인덱스’가 유일한 사진화랑으로 남았다.

 

2012 룩스갤러리에서 열린 김영수추모전 개막식, 정범태선생과 곽명우씨가 보인다

99년 창립된 ‘민사협’은 사무실 보증금이 없어

회원인 정원일에게 500만원을 빌렸으나, 아직 갚지 못했다.

회장과 사무국장은 로봇에 불과하고 모든 걸 김영수가 좌지우지해,

다들 탈퇴하거나 한 걸음 물러나게 된 것이다.

오죽하면 대구지부에서 연명으로 탄원 하는 등 분란도 속출했다.

사무국장은 일찍부터 정인숙이 물려 받았다.

 

1986 고)김영수씨, 인사동 작업실에서

그래도 김대중 정권 들어서며 ‘광복60년 시대와 사람들’,

‘한국현대사진60년’ 등 ‘사협’에서는 엄두도 못낼 굵직한 일을 해냈다.

그러나 김영수가 세상을 떠나자 '민사협'도 막을 내리고 말았다.

젊은 사진가들이 다시 결집했으면 좋겠다.

 

2006 인사동 거리풍경

1980년 정일학원 자리에 민정당사가 들어서며 밤이 되면 식당골목 주변에

검은 세단이 들락거렸으나, 정치인들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이처럼 인사동에 정치인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예술인들이 모여들며

샛길 안쪽에 ‘선천집’, ‘사천집’, ‘이모집’, 등의 한옥 음식점들이 많이 들어섰다.

 

2006 많은 인파가 몰리는 주말의 인사동거리

그런데 1987년 ‘인사동 상인회’가 결성되었고,

그 이듬해 ‘전통문화의 거리’로 지정되면서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인사동에 관이 개입하여 축제를 벌이자 구경꾼은 몰렸지만

인사동만의 풍류는 서서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일요일에는 차 없는 거리가 시행하자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기존의 고서점, 화랑, 민예품 가게를 밀어내고,

화장품 가게나 중국산 싸구려 기념품 가게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1997 '인사전동문화보존회'에서 발행한 '인사동이야기' 목차

1997년 ‘인사동 상인회’가 ‘인사전통문화보존회’로 바뀌었다.

이호재가 보존회 회장을 맡으면서 ‘인사동이야기’란 회보를 제작하기도 했다.

2011년부터는 인사동에 차 없는 거리가 실시되며 관광객 거리로 변모했다.

 

1988 인사동 거리축제에서 할아버지와 어린이가 함께 놀고있다

상권이 바뀌면서 1999년에는 '영빈가든' 자리 약 450평에 고층상가가 세워질 계획에

길가 있던 동서표구, 아원공방 등 열두 가게가 쫓겨 날 처지가 되었다.

이를 구제하기 위해 인사동 사람들과 문화예술인들이

인사동 ‘작은 가게 살리기 운동’을 펼쳐 이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 부지를 인수한 '쌈지'가 열두 가게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공예품 전문 쇼핑몰로 만든 것이 지금의 쌈지길 건물이다.

 

2018 인사동 쌈지 앞 거리풍경

인사동 한복판에 대형 관광호텔과 곳곳에 상가건물이 지어져,

국적불명의 관광지화는 가속화 될 것이다.

이제 문화특구로 내세울만한 예스러움이나 인사동 풍류는 오간데 없다.

특색 없는 유락지로 전락한 중국 베이징의 ‘유리창’을 빼 닮았다.

인사동 터줏대감들은 인사동이 완전 망했다고 한탄하지만,

세월 따라 바뀔 수밖에 없는 세대교체다.

 

2013 '아라아트'에서 열린 천상병 20주기 추모행사장에서

그 무렵 인사동을 사랑하는 예술인들이 인사동을 살리기 위해 규합하기 시작했다.

2009년 3월 김명성을 비롯한 150여명의 예술인들이 뭉쳤다.

‘아리랑가든’에서 발기인 총회를 가진 후 몇 년에 걸쳐 여러차례의 문화행사를 벌였다.

 

 2013 '아라아트'에서 열린 천상병 20주기 추모행사

그리고 천상병 시인 20주기가 되는 2013년 4월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인사동 소풍, 천상’이라는 시와 노래, 회고담이 어우러지는 추모행사를 열었다.

‘눈빛출판사’ 이규상은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사진집을 출판해 기념했다.

 

2012, '아라아트' 개관식에서

가난한 예술인들이라 처음부터 대부분의 경비를 이사장인 김명성이 부담했다.

그러나 그가 건평 1,000평이 넘는 대형갤러리 ‘아라아트’를

인사동에 세워 자금난에 시달리자 ‘창예헌’ 활동도 침체하기 시작했다.

결국 부도나 중국자본에 넘어감에 따라 '창예헌’ 활동도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2007년 ‘공화랑’에서 개최한 ‘인사동, 그 기억의 풍경’ 사진전과

2010년 ‘북스갤러리’에서 개최한 ‘인사동, 봄날은 간다’ 사진전이 내가 남긴 인사동 자료다.

 

2007 ‘공화랑’에서 열린 ‘인사동, 그 기억의 풍경’ 사진전 퍼포먼스

이제 이 글을 계기로 그동안 기록한 인사동 사진들을 정리하는 일만 남았다.

유일한 인사동 사진집으로 펴냈던 ‘인사동 이야기’는 절판되어

저자도 없는 귀한 책이 되고 말았다.

 

2010 북스갤러리 '인사동, 봄날은 간다' 전시 개막식에서

낭만과 풍류가 흐르던 옛 인사동은 질퍽하면서도 따뜻한 정으로 영글었다.

모두들 주머니는 비었으나 밤새 외상술 마셔가며 예술을 이야기하고 인생을 노래했다.

이제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거나 어디론가 사라져

그 흐릿해 가는 추억을 안주삼는 예술가들만 인사동을 떠돌 뿐이다.

그마저 일 년 넘게 끌어 온 코로나 여파로 만나기 어려워졌다.

 

2013 여자만 연회에서, 송상욱시인과 김신용시인

유일하게 희망적인 것은 '인사아트프라자' 박복신 대표가 인사동 문예부흥에 공 들이고,

박재동화백이 갤러리 입구에 작업실을 마련해 인사동 지킴이로 나섰다는 점이다;

 

2019 '통인가게' 판소리 마당에서 배일동명창이 열창하고 있다

그렇게 그렇게 나의 전시 제목처럼 인사동, 봄날은 갔다.

내 마음을 대변하는 두 원로 시인의 시로 긴 글을 마무리한다.

 

2007 쌈지에서 노래부르는 장사익씨

인사동 / 고 은

 

인사동에 가면 오랜 친구가 있더라

얼마 만인가

성만 불러도

이름만 불러도 반갑더라.

 

오로지 빈손을 잡고

그냥 좋기만 하더라

인사동에 오면

그런 날들 가슴에 묻어

고향 같은 골목들

그냥 좋기만 하더라.

 

서로 나눌 지난날이 있더라

밤 이슥히 손 흔들어

헤어질 친구가 있더라”

 

(2016 좌로부터 조준영, (고)강민 시인과 민속학자 심우성선생)

인사동 아리랑 / 강 민

 

붐비는 인파 속에도

내가 찾는 이는 없다.

 

오늘도 내 인사동 걷기는 여전히 허전하다

추억처럼 불빛이 켜지고 있다.

 

어딘가 전화라도 걸까

눈시울이 시큰할 뿐

휴대전화를 만지는 손가락은 뻣뻣이 움직이지 않는다

 

진공(眞空)의 거리

어디선가 그리운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사진, 글 / 조문호

 

(2005년 '인사아트프라자' 앞에서 노래하는 고) 이남이씨)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지난 5일, 정영신씨와 함께 인사동에 전시 보러 갔다.

보아야 할 전시가 한 두 곳이 아닌지라, 고스톱으로 치면 일타삼피 격이다.

 

제일 먼저 들린 곳은 미얀마 민주시민을 위한 미술행동전이 열리는 ‘나무아트’였다.

서둘러 나온 것도 미술행동 서울 전 끝나는 날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생명평화 미술행동’이 추진한 미술행동전은 미얀마 민주화 항쟁을 지지하는

홍성담, 박건, 주홍, 박재동, 김진하씨 등 42명의 작가가 참여한다.

목숨 걸고 싸우는 미얀마 국민들과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41년 전의 광주를 떠 올리게 하는 참상에 온몸이 떨리지만,

타국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가슴 조릴 수밖에 없다.

그들을 지지하는 연대가 미얀마군부독재정권을 종식시키는 기폭제가 됐으면 한다.

4월15일부터 29일까지는 ‘안성맞춤아트홀’에서 전시된다.

 

두 번째는 김수길씨의 ‘보이지 않는 도시’전이 열리는 마루 '아지트갤러리'로 갔다.

전시 작가인 김수길씨를 비롯하여 유진오, 박윤호씨를 만날 수 있었다.

 

전시장에는 세월의 흔적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시간 지우기란 철학적 제목이 사뭇 역설적으로 다가왔다.

낙엽처럼 쌓인 기억의 파편들은 작가의 추억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을 지운다는 것은 세월 지우기에 앞서 추억을 지우는 일이다.

 

작가는 그동안 여러 차례 시간지우기 작업을 보여 주었는데,

지워지는 시간의 파편 속에 세월의 아쉬움이 켜켜이 쌓여있었다.

 

그의 카메라는 표현의 도구일 뿐, 사진이라기보다 그림에 가깝다.

이러한 심상 풍경은 여운이 깊지만, 다소 난해할 수도 있다.

숨은 기억을 찾아내는 퍼즐놀이처럼, 보는 이의 독해를 요구한다.

 

작가는 “잊기 위해 지우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기 위해 지운다.”고 말한다.

김수길씨의 도시풍경 ‘보이지 않는 도시’는 16일까지 열린다.

 

다음에는 ‘인사아트프라자’에서 열리는 강찬모화백 초대전을 보러갔다.

전시장 입구에 박재동화백 작업실이 인사동 복덕방처럼 자리 잡고 있다.

 

집중하는 작업에 방해 되겠지만,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눈인사만 나누었으면 좋으련만, 기어이 일어서게 만들고 말았다.

 

박화백이 인사동에 둥지를 틀고부터 항상 마음 든든함을 느껴왔다.

삭막해져가는 인사동에 한 가닥 단비 같은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강찬모 초대전이 열리는 '인사아트프라자'1층에는

히말라야 산맥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강찬모씨는 손님을 만나고 있어 작품부터 살펴보았다.

 

오래전 히말라야에서 받았던 영감이 작품으로 승화되어 신비로운 빛을 쏟아냈다.

자연의 경이에 앞서 한 작가가 올리는 기도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마치 마법처럼 펼쳐진 산세는 자연의 실체와 작가의 시적 언어가 어우러져 

보는 이들로 하여금 명상의 세계로 이끈다.

금분으로 드러낸 석양의 색조 또한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했다.

 

좋은 작품에 어찌 돈이 따르지 않겠는가?

대작은 억대를 호가하는 잘 나가는 작가다.

 

세치 혀로는 도저히 그의 작품을 말할 수 없다.

작업노트에 적힌 마지막 글 외에는 잔소리에 불과하다.

“눈물겹다. 따뜻하다. 행복하다. 신비롭다.”

 

전시는 20일까지 열린다.

 

꼭 보아야 할 전시가 남았으나, 술벗의 기다림이 마음에 걸렸다.

‘유목민'에는 ‘뮤아트’ 김상현씨 노래 소리가 골목을 촉촉이 적셨다.

 

뒤이어 ‘아지트’에 있던 김수길, 유진오, 박윤호씨 까지 합류했으나,

다음 약속이 있어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이튿날, 못 본 전시를 보기위해 다시 인사동에 나왔다.

‘갤러리 밈'에서 열리는 한국 최초의 여성 클라이밍 산악사진가

강레아의 ’소나무 바위에 깃들다‘를 보기 위해서다.

 

전시장을 돌아보니, 사진이 아니라 마치 산수화 같았다.

그가 보는 시각은 일반인들이 볼 수 없는 위치에서 보기에 선경에 다름 아니다.

자일에 메 달려 바라보는 아슬아슬한 쾌감은 작가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보여주는 주제는 암벽에 뿌리 내린 소나무다.

연약하면서도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는 소나무 자태에 반해버렸다.

 

고고함을 뽐내는 눈 덮인 소나무의 아름다운 자태는 쉽게 만날 수 있는 정경이 아니다.

흐리거나 눈 오는 악천후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이라 사진가의 필사적 의지가 필요하다.

입이나 머리로 사진하는 사람이 많은 세태라, 그의 노력이 더 돋보이는 것이다.

 

전시는 5월2일까지 열린다.

 

인사동에 전시 보러 가자

날이면 날마다 열리는 전시들이 아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세월 따라 변하지 않는 것이 있겠냐마는

요즘 인사동 바뀌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코로나 이놈이 부채질이 아니라 에어컨을 틀어댄다.

 

여기 저기 공사 가림막 처 놨지만, 금방 새로운 모습을 드러낸다.

간판 없는 동굴 집은 문 열자마자 휴업에 들어갔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들이 안타깝다.

 

동내 풍경 바뀐 것보다 더한 것은 사람냄새가 안 난다,

복면한 사람들이 인사동 누비는 거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인사동 사람을 만날 수가 없으니, 인사동이 인사동 아닌 것이다.

 

민병산 선생께서 회갑 생신날 돌아가신 이야기도,

천상병시인 노자 돈 보태드리며 술 마신 일도 이제 전설이 되었다.

 

도처 땡초들 객기 부리던 무협전 기억들도,

'실비대학'에서 '유목민'까지의 추태들마저 그립다.

 

갑자기 영수 군화 발에 날아 간 용대가 보고 싶다.

 

 

사진,글/ 조문호

 

일요일은 녹번동에서 개기는 날이다.

만사를 재처 두고 이불 속에 딩구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친구도 싫고 꽃놀이도 싫은 걸 보니 갈 때가 된 것 같다.

 

오후 늦게서야 일어나 먹을 것을 찾는 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조해인 시인이 응암동에서 소주 한 잔 하잖다.

꾀죄죄한 몰골로 나갔는데, 봄바람이 제법 쌀쌀하더라.

 

‘호주방’이란 술집인데, 새로 생긴 술집 같았다.

소주방도 색시방도 아닌 호주방은 또 뭔가?

 

조그만 술집에서 오뎅탕을 안주로 소주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조해인씨는 애늙은이된 박한웅씨 아들 장가 가는 소식을 전해주었고,

김수길씨는 4월9일부터 인사동 ‘마루’에서 개인전을 한다고 했다.

 

그 날의 화두는 젊은시절 놀았던 신촌 방석집 이야기였다.

주머니 탈탈 털렸던 그 때의 끈적한 추억을 건져 올렸다.

빈속에 들이키는 짜리리한 소주 맛에 춘정을 녹였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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