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에서 나온 조선 전기 한글 금속활자

인사동에서 조선 전기 금속활자 1600여점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발굴 장소는 서울 종로 피맛골 뒤편, 인사동 79번지다.

그 곳은 공평구역 도시환경 정비사업을 위해 지난해 3월부터 정밀 발굴 조사를 진행 중인 곳이었다.

‘서울 공평구역 제15·16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 중 ‘나 지역’으로 탑골 공원과 종로 YMCA 사이다.

 

옛 한양 중심부로 조선 전기까지 경제 문화중심지인 한성부 중부 견평방에 속한 곳으로 

주변에는 관청인 의금부와 전의감, 궁가인 순화궁, 죽동궁 등이 있었다.

 

가장 눈길 끄는 건 항아리에 담긴 채 발견된 금속활자 1600여점으로 모두 15~16세기 때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한글과 한자, 서체, 크기, 형태 등 최소 5종류 이상의 활자가 섞인 한글 활자 약 600점, 한자 활자 1000여점이다.

서지학 전문가들은 “조선 전기 금속활자가 실물로 출토된 것 자체가 처음”이라고 했다.

 

이 중에는 지금까지 최고의 조선 금속활자로 알려진 '을해자'(세조 1455년)보다

21년 앞선 ‘갑인자’(1434년)로 추정되는 한자 금속활자도 다량 포함되어 있다.

향후 연구를 거쳐 ‘갑인자’로 공인될 경우, 조선 시대 금속활자 중 가장 오래된 실물 자료일 뿐 아니라

1450년대 찍은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최소 16년 앞선 금속활자가 출토되어 세계 인쇄사를 바꿀 중요한 발견으로 주목하고 있다.

 

인사동에서 나온 금속활자 발견 당시 모습

'갑인자'는 갑인년에 세종의 명으로 만든 한자 활자로서 조선시대 금속활자의 꽃으로 불린다.

그리고 '을해자'는 1443년 훈민정음 창제 후 세조가 즉위한 을해년에 주조한 한자 활자지만,

한문 원문을 한글로 번역하기 위해 만든 한글 활자도 있다.

 

 순경음(ㅱ, ㅸ), 이영보래(ㅭ) 등 15세기에 사용된 동국정운(東國正韻)식 표기법을 따른 최고 한글 금속활자. 

그간 가장 오래된 한글 활자로 알려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활자 30여점과 같은 시기로 추정되지만,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동국정운식 표기를 포함하고 있어 의미가 더 크다고 한다.

'동국정운'이란  훈민정음 창제 초창기인 15세기에 중국 한자를 표준음에 가깝게 발음하기 위해 쓰인 한글 자음 (ㅱ, ㆆ, ㆅ)으로

일명 동국정운식 표기 한글이다. 세종이 훈민정음에 반대하는 양반들을 설득하기 위해 본보기로 펴낸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등에도 이들 표기가 나타나는데, 이 표기법의 금속활자가 실물로 확인된 것이다.

 

물시계 부속품인 '주전'으로 추정되는 동제품

금속활자 외에도 물시계 부속 장치인 '주전', 세종 때 만든 천문 시계인 '일성정시의', 중종과 선조 때 만든 총통 류 8점,

동종 1점 등 금속 유물이 무더기로 출토되어, 지난 29일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실물을 공개했다.

이재정 학예연구관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활자는 조선 왕실에서 쓰이다가 일제강점기 이왕직을 거쳐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이관된 것들이지만, 이번 활자들은 다른 유물과 함께 ‘출토’된 최초의 활자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했다.

인사동에서 나온 총통

발굴조사를 맡은 수도문물연구원 관계자는 "건물터 형태가 매우 특이하다"며

"관이 지은 건물은 아닌 듯하고, 평범한 일자형 혹은 ㄱ자형 창고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수습한 유물이 일반 민가에서 소유할 만한 물건은 아니라는 점에서 출토 위치가 상당히 미스터리"라고 덧붙였다.

 

물시계의 중요 부품인 주전. 처음 확인되는 실물이다. 

그리고 "도기 항아리를 기와 조각과 작은 돌로 괸 것을 보면 인위적으로 묻은 정황을 알 수 있다"며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유물 중 화포인 소승자총통이 1588년에 만들어져 가장 늦은 편인데,

1588년 이후 어느 시점에 한꺼번에 묻었다가 잊혀져 다시 활용하지 못한 것 같다"고 추정했다.

"구리는 조선시대에도 비싼 금속이었다"며 "유물을 값나가는 물건으로 인식했는지,

활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같은 크기로 토막나 있었다고 한다.

 

인사동에서 나온 일성정시의

전문가들은 유물 매장 상황을 봤을 때 누군가가 금속품을 모아 고의로 묻었고,

나중에 녹여서 다른 물건으로 만드는 '재활용'을 염두에 뒀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

 

일성정시의 및 동종 출토 모습 

문화재청 관계자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누군가가 유물을 모아 폐기했을 수도 있다"며

"금속 유물을 무더기로 묻은 이유는 추가 연구를 통해 밝혀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 : 조문호, 사진 : 문화재청 

 

인사동 금속유물 출토지

 

 

“막걸리가 하나님의 은총이고 밥”이라던 천상병시인

 

서울 인사동 낙원상가 주변과 동묘 주변은 백발이 성성한 사람들이 주름지고 굳은살 박힌 손으로 ‘장’과 ‘’멍을 외치며 싸우는 인생의 장기판이다. 
40년대의 노년들이 6.25와 월남전을 이야기하며 젊은 시절 숨겨놓은 안주를 꺼내 마지막 몸을 술에 절이며 자신들의 생명을 태우고 있다.
그 모습은 같은 수업 시간을 보낸 어린 시절의 학생들이 오랜 노트를 꺼내 자신의 글을 보여주는 풍경과 다를 바 없다.

그곳에 가면 천상병 시인의 막걸리가 생각난다.

막걸리/천상병

남들은 막걸리를 술이라지만 
내게는 밥이나 마찬가지다.
막걸리를 마시면
배가 불러지니 말이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다.
옥수수로 만드는 막걸리는 영양분이 많다.
그러니 어찌 술이랴.
나는 막걸리를 조금씩만 마시니
취한다는걸 잘 모른다.
그저 배만 든든하고
기분만 좋아진다.

천상병 시인의 시처럼 그는 낮에도 마시고 저녁에도 마신다.

그는 막걸리가 하나님의 은총이라듯 매일 마시다 1993년 63세로 하늘 소풍을 떠났다.
인사동에서 '귀천(歸天)'이라는 찻집을 운영했던 부인 목순옥 여사를 남기고 말이다.

목여사도 천상병시인 따라 2010년 귀천했다. 


천상병시인 같은 백발의 노인들에게 인사동과 동묘와 종로의 하늘은 천국이고 안식처다.
노인들만 사는 나라에는 시간이 거북이 걸음처럼 느리게 간다.

그곳은 마치 인생의 황혼 역처럼, 다들 떠날 열차를 기다리며 시간의 끝자락을 잡고 있다.

 

그렇게 인사동과 파고다 공원, 동묘에는 노인들의 나라가 만들어진다.
하나 둘 소풍을 떠나는 마지막 낙원에서 느리게 가는 황혼의 풍경을 다시 본다.

내가 황혼에 들면 이곳에 있을까? 

글 / 주홍수 (애니메이션 감독) 

 

 

주홍수 약력 


1992년 세영 애니메이션 총괄 제작 프로듀서
KBS 옛날 옛적에, 은비까비, 일본 합작 ‘나디아' 제작 프로듀서
1994~미국 할리우드 게임 JOY CINE 총감독
경민대 만화예술과 출강.일요시사 정치삽화 ’탱자가라사대‘ 연재
1998~ (주)프레임엔터테인먼트 슈퍼패밀리 원작, 각본, 감독
2001~2004 KBS TV시리즈 날아라 슈퍼보드 스토리보드, 감독
2004~㈜ 선우엔터테인먼트 스페이즈 힙합 덕 총감독
2005~2010 한국 KBS,중국CCTV '도야지봉' 원작 및 총감독. 상하이미디어그룹(SMEG). 상하이 술영화제작소 총감독.
2010 하문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 해외심사위원
중국 SMG 방송 TV 시리즈, ’토끼방’ 기획, 데모제작, 총감독
2014~한국MBC,중국CCTV ‘판다랑’ 원작, 각본, 총감독
웹툰협회 고문/음원협동조합 이사


모처럼 부암동 작업실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는 안애경씨 연락이 왔다.

지난 금요일 오후 무렵 정동지를 앞세워 부암동을 방문했는데, 공간의 대변신을 만난 것이다.

 

습기가 차 비어있는 반 지하 공간을 빌려 철거 공사 할 때 보았는데,

그 때가 엊그제 같건만 벌써 3년의 세월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세월은 말없이 저만큼 가버렸는데, 난 그동안 뭘 했단 말인가?

 

뜯어낸 벽돌 부스러기를 재활용하기 위해 산더미 처럼 쌓아놓았는데,

그 사이 멋진 생활공간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핀란드를 오갈 때마다 코로나 격리되는 시간에 조금씩 작업을 했다는데,

작업이라기보다 놀이처럼 즐긴 것 같았다.

 

벽에 붙은 갖가지 타일도 을지로 타일가게에 버려진 자재를 주워 모아 재활용한 것이었다.

그는 예술가며 실천하는 환경운동가다. 자기가 사용할 컵은 광주리에 담아 다닐 정도로...

 

얼마 전 오산에 어린이 놀이 공간 '나무처럼'을 완성했다는 소식에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예상은 했지만 상상 밖이었다.

만든 사람 스스로 어린이가 되어 자기가 즐길 공간을 만든 것 같았다.

한 가지 이해 되지 않았던 것은, 관급공사에서 예술감독이 할 수 있는 한계를 알기 때문이다.

 

하기야! 필란드 있는 작가를 오산시장이 직접 만나 부탁한 일인지라 재량권이야 주었겠지만,

잘 못된 관습과 관행을 바꾸는 일이 쉽지만은 않은 것이다.

 

그렇지만 안감독은 모든 걸 하나하나 설득하여 바꾸어 놓았다.

장애물에 불과한 현장소장이란 직책 자체를 없애 버리고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이다.

담당공무원부터 설득시켜 기존의 가치를 재정립하게 만들었다.

하청에 하청이 따라 붙으며 부풀려지는 견적구조도, 인부들이 자재를 아끼지 않는 관습도 모조리 바꾼 것이다.

그리고 그가 필요한 재활용 자재가 관급공사 자재를 조달하는 조달청에 있겠는가?

 

놀이공간을 완성한 것으로 끝내지 않고 그곳을 운영할 직원들의 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안전과 질서만 강조하는 기존의 보육시스템으로는 어린이들의 창의적 활동에 장애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이거 해라 저거 해보라 시키지 말고 그냥 노는 걸 지켜보라"는 말을 학부모들은 알아 듣지만,

단체로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교사들의 관습은 바꿀 수가 없었다고 한다.

시종일관 안전과 질서만 앵무새처럼 외우며 어린이를 길들이기에 혈안이란다.

 

커피 한 잔 나누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인근 주민들에게도 미운털이 박힌 것 같았다.

보육타운 마당에 차를 들이지 못하게 한 것 때문인지 사사건건 시비란다.

얼마 전에는 놀이마당 뒤에 잡초가 많다는 민원을 제기해 청소과에서 나와 풀을 베어버린 적도 있었단다.

그들에게 화초로 구분되지 않은 것은 모두 잡초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정선 만지산 화재현장에 집 지을 일도 물어왔다.

아직까지 옆집과 합의가 되지 않아 당분간 보류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더니, 바로 결론을 내렸다.

화해하여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 어쩌면 그 또한 소유욕일 수도 있겠다.

'동강사람들 자료관 만드는 일이나 멋진 예술창고 만들어 예술가들 불러 모으려는 생각 자체가...

 

다소 불편해도 도움 준 분들이 호젓한 시간을 즐기며 충전할 수 있는 공간이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작지만 예술과 인생을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오붓한 공간.

 

생활에서 찾아 만들어가는 안감독 디자인이 인생 디자인으로 승화하는 지점이다.

그동안 게 거품 물었던 '사람이 먼저'라는 말이 헛소리였단 말인가?

인간관계 하나 조율할 줄 모르면서 무슨 사람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는가?

 

마침 건물주인 아주머니가 지나치다 모처럼의 인기척에 들어오셨는데, 환하게 웃는 모습에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졌다.

집을 빌려 준 사람이나 빌린 사람이나 마음만 맞으면 한 식구나 마찬가지였다.

 

 

안애경씨 따라 전망 좋은 식당에 들어가 콩국수를 먹었는데, 소금도 넣지 않고 허겁지급 먹어버렸다.

요즘 사람들은 소금을 싫어해 싱겁게 먹어야 하는 줄만 알았는데, 옆에 준비해 둔 소금도 몰랐다.

늙어면 어린애가 된다는 말이 딱 맞다. 

 

사진, / 조문호

 

최소리의 ‘두드림으로 그린 소리-겁’이란 색다른 전시가 지난 2일 인사동 ‘KOTE 갤러리’에서 개막되었다.

 

그 날은 전시가 시작되는 수요일이라 그런지 길거리에 아는 작가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사진가 남 준씨와 화가 조신호씨도 만났다.

 

먼저 ‘인사아트프라자’의 박재동화백 작업실을 찾았더니, 1층에서 2층 입구로 작업실을 옮겼더라. 매번 갈 때마다 원고마감 시간에 쫒기셨는데, 이젠 개방되지 않은 곳이라 작업에 집중하기가 훨씬 나을 성싶었다.

 

그날 인사동 거리에는 처음 보는 악사가 가야금으로 흥타령을 연주하고 있었다. 색다른 분위기에 귀가 솔깃했으나, 지나치는 이들의 발길은 붙잡지 못했다. 확성기가 없어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버스킹을 해도 구색을 제대로 갖춰야 한다는 말이다.

 

최소리 전시가 열린 ‘KOTE 갤러리’의 넓은 전시장은 평면작품에서 부터 동영상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었다. 안쪽에서는 개막식이 열렸는데, 손님도 많았지만 일단 작품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최소리는 유명 록밴드 ‘백두산’에서 드럼 연주자로 활동한 적도 있는데, 그동안 십여 장의 음반을 냈고, 광저우 아시안게임 폐막식, G20 정상회담 등 여러 굵직한 행사에서 그만의 공연을 선보이거나 연출 또는 총감독을 맡아 유명세를 탔다. 자기가 개발한 소리금이란 악기로 독자적인 두드림의 미학을 개척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쪽 청력을 잃어가며 연주 대신 두드려서 그림을 만드는 새로운 작업에 도전한 것이다. 두드리는 것만큼은 어느 누구도 따를 자 없는 신들린 사람이 틀림없다. 신들렸다는 말이 미쳤다는 말과 상통하는데, 작가가 한 곳에 미친다는 것 보다 더 좋은 말이 어디 있겠는가?

 

2019년부터 지리산 청학동에 들어가 그곳에서 다양한 실험을 해왔다고 한다. 음악적 영감이 떠오르면 붓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북채로 알미늄 판이나 종이, 캔버스 등 닥치는 대로 두드리고, 채색하고, 빛을 입혀가며 그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해 낸 것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지리산에서 자연과 교감하며 제작한 ‘24절기’ ‘청학동 노을’ 등 120여점의 작품을 내놓았다.

 

미술평론가 김종근씨는 "그가 음악에 드럼을 치듯이 리듬에 맞춰 철판을 향해 내리치는 모든 행위들은 예술의 표현형식을 완전히 해체한 전위적인 형태의 새로운 창작 행위이며, 마치 플럭서스 운동처럼 다이내믹한 요소를 철판 위에 각인시키는 행위는 전통적 미학에서의 조형미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미술까지 한 번에 제시한 것처럼 독자적이다"라고 극찬했다.

 

그러나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전시된 많은 작품들이 음의 파장이나 작가의 체취가 느껴지는 작품이 몇 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험적이고 도전적이고 독보적인 그의 작업은 높이 사지만, 소리의 파장을 평면에 나타내는 것이 컴퓨터에서야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실제 두드려 그림으로 재현해 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온 몸과 정신력을 아끼지 않는 최소리의 집념과 끈기로 보아 언젠가는 이 세상에 하나뿐인 자기만의 경지를 이루어낼 것으로 믿는다. 소리의 파장을 재현해 내는데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폭풍 같은 화음으로 큰 울림을 주는 날이....

 

전시장에는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전시를 축하했다. 알듯 말듯 한 분들이 반갑게 인사를 했으나 다들 마스크에 가려 정확히 알아 볼 수 없어 눈인사만 나누었다. 한 쪽에는 마스크를 목에 걸친 인사동 광대 박완호씨 모습도 보였다.

 

이 전시는 오는 30일까지 이어진다.

 

 

사진, 글 / 조문호

 

 

요즘 술 마실 일이 잦다.

연이은 전시 오프닝에다 지인들과의 술자리가 줄 줄이다.

문제는 술이 땅기는데다 술을 마셔도 별 이상이 없는 게 탈이었다.

 

지난 토요일엔 조해인선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연이어 삼일동안 술독에 빠진 터라 망설여졌으나, 안 갈 수 없었다.

며칠 전에도 전화가 왔으나 일 때문에 못 받았기 때문이다.

다음날 새벽에 전라도 촬영 가기로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래! 술은 마시지 말고 얼굴만 보자”며 나간 게 탈이었다.

 

약속한 응암동 ‘푸른 언덕’으로 갔더니 길가 테라스에 자리 잡았는데. 술안주로 족발까지 시켜놓았더라,

좀 있으니 김수길씨도 불려 나왔는데, 그의 안색 역시 술에 쩔은 상이었다.

술 마시지 않을 작정에 콜라를 시켰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술이다.

콜라에 타서 한 잔만 마신다는 게 발동이 걸려버린 것이다.

소콜이 달아 그런지 술술 잘도 넘어 갔다.

 

조해인씨가 풀기 시작한 불교와 명상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보니

갑자기 20여 년 전 조해인씨가 선물한 돌부처가 생각났다.

정선 집 책장 위에 올려놓고 가끔 기도를 올렸는데,

이번 화재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돌은 불에 타지 않을 텐데 왜 부처가 보이지 않았을까?

언젠가는 새까맣게 그을린 모습으로 나타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죽고 사는 문제야 부처도 모를 텐데, 내가 어찌 알겠는가?

홀짝 홀짝 마신 술이 두꺼비를 여섯 병이나 까 버렸다.

술이 취하면 자빠져 자면 그만이겠으나, 내일 전라도 갈 일이 난감했다.

 

낮술에 젖어 허우적거리며 녹번동으로 들어갔는데,

김수길씨가 찔러 준 후원금을 전달하고는 그대로 뻗어 버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일어나보니, 여섯시가 가까웠다.

전라도 여산장터로 차를 몰았지만, 제 정신이 아니었다.

죄 많은 나야 가도 그만이겠지만, 옆에 탄 정동지가 무슨 죄냐?

 

죄 없는 껌만 입이 아프도록 씹고, 차만 세우면 자기 바빴다.

그러나 신의 가호가 있었는지, 무사히 마치고 잘 돌아왔다.

모진 목숨 명줄 하나는 정말 찔기다.

 

사진, 글 / 조문호

 

한국 리얼리즘 역사 풍경화의 대가로 꼽혀온 원로화가 손장섭선생께서 지난 1일 오전 향년 81세로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빈소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백병원 장례식장 3호실로 장례는 3일 오전 7시30분부터 민족미술인협회장으로 치렀다.

유족으로 부인 이영자씨와 아들 병권씨, 딸 수현·수진씨가 있다.

 

고인은 1980년 출범한 국내 최초의 현실비판 모임 ‘현실과 발언’의 창립 동인이자

1985년 결성된 민미협 초대 회장으로 1980년대 진보적 미술 운동을 이끌었던 주역이다.

 

전남 완도군 고금면 출신으로 유년시절 바다에 둘러싸인 고향에서 유년을 지내다

1960년 서라벌고에 진학한 직후 4월 혁명을 체험하며 ‘역사 속에서 자각한 인간’이란 평생의 화두를 품고 사실주의 화가의 길을 걸어왔다.

 

선생의 그림들은 한국 현대미술사에 리얼리즘 풍경회화의 획을 그었다고 평가한다.

1990년대 이후에는 민중의 역사가 녹아든 이 땅 곳곳의 산야와 바다, 신목들을 그린 풍경 연작들을 탄생시켰다.

“자연은 역사가 배어있는 현장”이라는 지론으로 각지의 자연과 사적지를 끊임없이 답사 탐구한 한국 풍경회화의 거인이었다.

 

수상으로는 민족미술상(1991)과 금호미술상·이중섭미술상(1998)을 수상했다.

 

아래는 선생의 생전 모습과 유작 일부이오니, 지난 날을 추억하며 명복을 빌어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지난 2일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김재홍씨의 ‘거인의 잠’이 개막되는 날이라 서둘러 인사동 '나무화랑'으로 갔다.

 

여지 것 전시 개막식을 비롯한 사람 많이 모이는 곳을 피해 온 금기를 깰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내공이 만만찮은 재홍씨의 작품도 보고 싶었지만,

오랜만에 역전의 화가들을 만나 회포를 풀고 싶었다.

 

안국역에서 내려 지하도로 올라가니 화가 김 구씨와 류연복씨는 벌써 내려오고 있었다.

“전시장에 들렸다 일산 손장섭선생 상가에 간다”고 했다.

나 역시 문상도 가야지만 전시장부터 들렸다. 매번 꾸물대다 늦게 오는데, 전시장 문 닫을까 서둘러 올라갔다.

 

전시장에 들어서니 아직 많은 분들이 계셨다.

전시작가 김재홍씨를 비롯하여 김진하관장, 김정헌, 박불똥 조경연 부부, 이태호, 이재민, 박세라씨 등 여러 명이 작품을 돌아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전시리뷰를 보아 대략의 내용은 알았지만, 작품 앞에서니 마치 스스로를 바라보는 듯한 먹먹한 느낌이 일었다.

상처투성이의 노쇠한 몸이 품은 의미야 해석에 따라 다양하겠지만, 희멀건 잿빛 형상들이 피폐한 자본주의에 병든 인간들의 내일을 예언한

죽음의 묵시록처럼 다가왔다. 거인의 잠이 거인의 죽음으로 비친 것이다.

 

작가는 선문답처럼 ‘거인의 잠’이란 제목만 붙여놓고 일체의 말이 없었지만, 인체의 부분으로 상처 난 땅을 형상화한 상징적 이미지였다.

긴 세월 동안 이어져 온 폭력과 굴곡의 세월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묵언의 땅인 것이다.

 

김재홍씨가 3년 전에 보여 주었던 인간 탐욕의 폭력성을 고발한 “살”전 과는 또 다른 울림이었다.

그는 인간을 향한 폭 넓은 주제를 택하지만, 핵심을 상징화해내는 탁월한 작가적 역량을 가졌다.

그래서 또 다음 전시가 기다려지는 이유다. 이 전시는 오는 15일까지다.

 

더 중요한 것은 작품도 작품이지만 사람이 너무 좋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을 알게 된 것은 20년도 더 지났지만, 처음 대면한 것은 10여 년 전이다.

자라섬에서 열린 자연설치미술전에서 김언경씨 소개로 알게 되었는데, 첫 인상이 착한 시골선생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화단에서는 사람 좋기로 소문난 작가였다.

 

각설하고, 전시장에서 내려 와 뒤풀이 장소로 정해진 ‘유목민’으로 갔다.

 

술집 골목 초입부터 화가들이 자리 잡아 앉을 틈이 없었다. 코로나 시국의 손님 없는 현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신학철, 이요상선생을 비롯하여 김건희, 김언경, 차기율, 이필두, 최운영, 나종희, 류충렬, 최석태, 우문명, 유근오, 성기준, 김영진,

조신호, 장경호, 김경서, 최완수, 그리고 배우 이재용씨 등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역전의 화가들이 모여 있었다.

 

뒤늦게는 불화가 이인섭선생과 장 춘씨를 비롯하여 사진가 조명환씨도 나타났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분들이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진 찍고 술 마시느라 혼자 바빴다.

홀짝 홀짝 마신 술에 가랑비에 옷 젖듯 취해 버렸다.

호흡기에 문제가 생겨 소리도 나지 않는 목소리로 돼지 목 따듯 노래까지 불렀으니 정말 가관이었을 것이다.

 

이 얼마만의 사건인가? 대취 했지만 기분 좋게 마시어 그런지 몸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다들 떠난 뒤에도 ‘유목민’ 주인장 전활철씨를 비롯하여 박혜영, 장춘씨와 어울려 마셨는데, 집에 돌아오니 자정이 훨씬 지났더라.

 

원님 덕에 나팔 분 최고의 날이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달 알린 바와 같이 정선 작업실이 전소되었습니다. 그 내용을 화가 박 건씨가 알고 도움을 청하는 글을 올린 것이 계기가 되어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습니다. 공개적인 구걸이 부끄럽기 그지없는 일이나, 그 따뜻한 마음을 고맙게 받아들였습니다. 그에 따른 조그만 보답이라도 될까 싶어 부족하나마 저의 사진 한 점씩 보내드리려고 견본 사진 5점을 제시하며 사진번호와 보낼 주소를 보내달라고 전화번호를 알려드렸습니다.

아쉽게도 알린지가 한 달 가까이 되었으나 주소와 사진번호를 보내 주신 분은 네 분밖에 없네요.

혹시 그 안내를 보지 못했거나 뒷수습으로 경황이 없을 것으로 판단해 천천히 연락하려 보류한 분도 계실 것입니다, 더러는 알리기가 편치 않거나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저 역시 사진 보내는 일에만 매달릴 수 없어 한꺼번에 작업하기 위해 기다리다 주소를 알려 주신 분까지 보내드리지 못해 송구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며칠 전 네 분 사진만 먼저 프린트해 보내드렸습니다.

 

나머지는 오는 10일까지 기다렸다 일괄 프린트(규격 42cmx 29,7cm)하여 액자에 넣어 보내 드릴 작정이오니, 사진번호와 주소를 정영신씨 핸드폰(010-2955-8926)으로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혹시 견본사진 외에 마음에 드는 사진이 있다면 가능하오니 알려주십시오.

만약 10일까지 연락 없는 분들은 그 뜻을 존중하여 개인전을 소개하거나 행사사진을 촬영 해 드리는 등 다른 방법으로 도와 드리겠습니다. 이 번 온정의 손길은 두고두고 보답하겠습니다.

정선에 예술창고를 만들어 함께 공유하려는 계획도 아직까지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다소 시일이 지체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보험사로부터 제대로 보상받아 기대에 부응하는 공유공간을 만들게 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도와주신 분을 밝혀 일일이 고마움을 전하는 것이 마땅하나 행여 온정이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분도 계실 것 같아 성함 중 한자를 생략하였으니,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아래는 후원해 주신 분 명단과 전해드릴 사진 견본이오니 참고하셔서 연락 주세요.

-후원금 보내 주신 분 명단- (밑줄 친 분은 사진을 발송하였습니다)

화가 : 이*엽 5만원, 이*민 10만원, 나*희 20만원, 정*엽 10만원, 김*홍 10만원, 류*복 10만원, 강*구 100만원, 두*영 5만원, 정*수 10만원, 안*홍 100만원, 박*동 20만원, 김*구 10만원, 박*태 10만원, 이*구 5만원, 이*정 3만원, 천*석 5만원, 김*열 10만원, 한*진 10만원, 김*하 20만원, 이*열 10만원, 조*옥 10만원, 박*원10만원, 이*철 20만원, 주* 20만원, 최*영 50만원, 사진가 : 최*균 30만원, 박*호 20만원, 노*향20만원, 전*훈50만원, 이*수 10만원, 변*철 10만원, 박*만 200만원, 박*환 5만원, 양*영 20만원, 홍*원 10만원, 최*석 20만원, 김*호 10만원, 김*진 10만원, 마*욱 10만원, 최*화 10만원, 이*갑 10만원, 김*길 10만원, 김*섭 50만원 문학인 : 조*영 30만원, 서*란 20만원, 장*숙 5만원, 김*지 20만원, 이*흠 10만원, 김*성 10만원, 조*인 10만 음악인 : 김*현 10만원, 전*철 10만원 마임, 무예가 : 유*규 10만원, 하*웅 10만원, 사회 활동가 : 박*윤 10만원, 김*부 5만원, 홍*길 10만원 ‘공유공간 마인’ : 김*우 10만원, 김*온 10만원, 양*살 10만원, *민화 5만원, 천*명 10만원, 정선 귤암리 : 노인회 20만원, 해선스님 20만원, 잘 모르는 분 : *범현 10만원, 윤*숙 10만원, *미경 10만원, 힘내세요 3만원, 김강* 5만원,

합계 1291만원

사진1번 만지산1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요약해 정리해 본다

이번 화재로 40여년 동안 일해 온 자료는 모두 잃었지만, 대신 많은 사람을 얻었다.

아산에서 ‘공유공간 마인’을 운영하는 김선우씨는 자신의 일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을 처리해 주었다. 정선 화재현장에 버려진 쓰레기를 트럭으로 실고 가 물증 찾는 일에 혼신을 쏟아왔고,  그와 함께 서울 변호사 사무실까지 찾아 와 자문해 주며 사회의 모순된 구조 개선에 대해 좋은 말씀을 들려 준 사회운동가 김창복씨, 오랜 시간동안 사건에 대한 전모를 들으며 무료로 자문해 주신 ‘법률사무소 휴먼’의 류하경 변호사님, 일면식도 없는 분에서부터 지인에 이르기까지 온정의 손길을 보내주신 60여명의 후원자를 비롯하여 걱정해 주신 많은 분들의 고마움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마치 폭풍이 휩쓸고 간 후의 따스한 햇살처럼 큰 위안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여생, 도움 준분들에게 보답하며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그래도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정작 도움의 손길을 주어야 하는 지자체에서는 나몰라라 했다. 도처에 토목공사 때 사용하는 컨테이너박스가 널렸는데, 갑자기 집을 잃은 군민이 거처할 임시숙소 하나 빌려주지 못하는가? 고작 대한적십자사에서 보내 온 담요와 비상식량 뿐이었다. 이런 놈의 동내를 위해 몇십 년 동안 마음을 쏟아 부은 것을 생각하니, 분통이 터진다. 다시는 주민 복지라는 말만 꺼내면 똥바가지를 덮어 쒸울 것이다.

그리고 화재현장인 정선 집에 대한 앞으로의 대처 방안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처음 불이 붙었던 옆집도 분명 피해자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같이 살고 싶은 이웃이 아니란 것은 오래전 알았다.

그 집은 미국에서 온 노성수씨가 구입해 살았는데, 2015년 불의의 사고로 갑자기 목숨을 잃은 것이다. 술이 취해 방문의 유리에 동맥이 끊기는 끔찍한 사고를 당한 갑작스런 변에 아내가 무서워 못살겠다며 급히 집을 내놓았는데, 그 집을 산사람이 이번에 불을 낸 윤씨다.

 

사진2번 만지산2

이사 온 뒤로 윤씨의 남편처럼 행세한 한 남자는 재 측량한다며 남의 집 마당에 빨간 막대를 꽂아두는 등 처음부터 불쾌하게 만들었다. 우리 집 마당을 자기 주차장처럼 사용하는데다, 자기 땅 두고 남의 땅에 고추를 심는 건 도대체 무슨 심보일까?

서울서 살러 온 사람들이 지역주민들과 종종 마찰을 일으키는 것도 이러한 개인주의적인 이기심 때문이다. 예전엔 떠돌다 힘들면 마음 편이 쉬려 정선에 갔으나, 이젠 만나기 싫은 사람 때문에 일할 때만 정선가는 꼴이 되어버렸다. 집이 붙어있어 수시로 들락거려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동내 소문도 일조했다. 이상한 소문이 동네에 퍼져 가까이 하지 말라는 동네 사람들의 충고도 뒤따랐다, 그녀가 이사 온지 2년쯤 후 인사동에서 ‘유목민’을 운영하는 전활철씨와 홍천의 양서욱씨가 우리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옆집의 그녀가 찾아와 술자리에 합류하게 되었는데, 급기야 전활철씨 와는 친구사이로, 양서욱씨와는 남매로 둔갑하는 친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녀의 친화력에 고개가 꺼덕여졌다. 사람 사는데 친화력보다 더 좋은 게 없으나, 시골 사람들에게는 사람을 잘 꼬드기는 것으로 인식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야 가끔 가기에 자주 만날 수는 없지만, 그 집을 더나들던  사내들의 뒷소문도 무성했다. 언젠가부터 정선 북실리에 사는 년하의 남자와 동거하기 시작하며 더 이상의 잡음은 들리지 않았다. 한씨는 토목공사 하는 분이라 전기에서부터 레미콘에 이르기까지 못하는 일이 없으니 그에게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창수엄마 이야기에 의하면 한 때는 본처가 경찰을 데리고 현장에 찾아와 한씨가 도망쳐 올라와 숨겨 준 일도 있었다는 것이다.

 

사진3번 만지산3

모두 남의 사생활에 불과한 이야기이지만, 문제는 주변을 너무 불편하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마당을 자기네 주차장으로 사용하며 여러 마리의 개를 풀어놓아 여기 저기 똥을 싸거나 농작물을 짓밟는 등 피해를 주었고, 그물망으로 방목하는 수많은 닭들의 소음도 또 하나의 공해였다. 그리고 친환경을 내세워 수시로 끌어들이는 손님들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어느 날 우리 집 마당에 레미콘 한 차를 부려놓은 사진 한 장을 정영신씨 핸드폰으로 보내왔다. 지난 번 만났을 때, 도로 포장하는 사람 오면 움푹 파진 도로 입구 좀 때워 달라며 부탁한 적이 있다는데, 온 마당을 뒤덮어버린 것이다. 마당을 자기 내 주차장으로 사용하니 레미콘 비용의 반은 자기가 부담하겠다는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시멘트라 쓸어 담을 수도 없어 아무 소리 못하고 20만원을 주었는데, 아마 인부들이 공사장에서 빼돌려 싼 값으로 깔아준 것 같았다. 자연환경이 좋아 사는 나로서는 마당을 차지한 점령군처럼 눈에 거슬리는 흉물에 불과했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한 때 이웃 최종대씨와 지하수 분쟁으로 세상을 시끄럽게 한 적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지하수로 갑 질하는 최종대씨의 잘 못이라 공개적으로 최씨를 나무랄 수밖에 없었으나 긴 세월 이어 온 정이라 윤씨보다 최씨가 더 가까운 사이였다.

그 때부터 서울만 왔다 가면 전기 차단기가 내려져 냉장고에 있는 음식이 다 상해있었다. 한 번도 아니고 매번 그 일이 반복되어 아예 냉장고를 사용하지 않고, 최씨와의 왕래를 끊어버린 것이다. 그 이후부터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았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누구의 짓인지는 뒤늦게 알아챘다.

 

사진4번 두메산골 사람들

그 날 불난 날도 서울에서 손님이 네 사람 찾아와 마당에서 불을 피워 밤늦도록 고기를 구워 술을 마셨다는데, 주민들 말과는 달리 누전으로 둔갑해 버린 것이다. 뒤늦게 듣기로는 얼마 전 윤씨가 불 난 집 터 옆의 조씨네 밭을 사서 농막까지 옮겨 두었는데, 그 위에 있는 밭을 공동 투자하여 사들이기 위해 온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보험 든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다며 죽는 소리를 해 화재현장의 물증확보에 신경도 쓰지 않고 돌아 왔는데, 뒤늦게 보험 든 게 있다는 연락을 해온 것이다. 이미 보름이나 지나 다시 찾아갔을 때는 모든 게 파헤쳐지고 치워버려 물증확보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놓아 치밀하게 대처하지 못한 나의 실책이었다.

또 하나 윤씨의 말을 믿을 수 없는 것은 처음에는 방안의 현금을 칠백만원이나 두어 모두 탔다고 말한 것이다. 한국은행에서 보상 받기 위해 잿더미를 뒤적거려 이백만 원 정도의 흔적을 찾았다고도 했으나, 두 번째 들렸을 때는 돈은 타지 않았다며 말을 뒤집었다.

 

사진5 서울역지하도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가도록 원인을 제공한 그녀를 두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나의 바램이다. 그녀만 보면 울화가 치미니 스스로의 명을 재촉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솔직히 그 곳을 떠나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어머니 무덤도 무덤이지만, 동자동 일이 끝나면 이제 어디 가서 쉬겠는가? 그리고 그녀가 좋아 하도록 판 깔아 주기는 더 더욱 싫었다.

그래서 윤씨와 합의하기 위한 제안으로 지금의 집터를 양보하고 새로 구입해 둔 위 쪽으로 옮겨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으나 거절했다. 

지난 1일 정오 무렵 서초동에 있는 ‘법률사무소 휴먼’의 류하경 변호사를 찾아갔다. 아들 햇님이 안내로 정영신씨를 동반해 갔는데, 그곳에는 아산에서 이 일을 돕고 있는 김선우씨와 사회운동가 김창복씨도 참석하여 그동안의 일에 대한 도움말을 듣고 준비할 앞으로의 대책도 세웠다. 일단은 손해사정사의 보상 금액이 결정되는 것을 보며 소송을 시작하자는 것이다.

도움주신 분들의 뜻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좋은 예술창고를 만들 것을 약속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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