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정 동지 더러 인사동서 밥 한 끼 사겠다며 불러냈다.

며칠 전 ‘인사동 맛 집 순례’란 글을 올렸는데,

‘메밀란’도 괜찮다는 신단수선생의 댓글이 올라와서다.

 

그 집은 예전에 ‘산타페’에서 이태리식 식당으로 바뀌기도 했으나

‘메밀란’으로 바뀐 후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맛을 봐야 알 것 같아 정 동지에게 생색을 낸 것이다.

 

코로나로 대개의 식당이 한가하지만, 그 곳은 손님이 제법 있었다.

자리 잡아 메밀 콩국수 두 그릇을 시켜놓고 보니 옛 추억이 새록새록 했다.

오래 전 ‘산타페’ 술집일 때는 ‘인사동 밤안개’로 통하는 여 운의 단골집이었다.

 

오래 전 '산타페' 앞에서 포즈를 취한 여운화백

인사동에서 만나기만 하면 이곳으로 끌고 왔는데, 아예 양주병을 맡겨두고 술을 마셨다.

백수인 내 처지를 알아 주인에게 이 친구가 오면 맡겨둔 술을 언제든지 내 주라며 호의를 베풀었는데,

소탈하고 인정 많은 친구였지만 이제 만날 수가 없게 되었다.

저승에서 기다릴 그를 생각하고 있으니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밑반찬이 정갈하고 그중 겉절이가 맛있었다.

걸쭉한 콩국의 구수한 맛이 진국인데다 쫄깃한 메밀 맛이 더해 최상급의 콩국수였다.

주머니 사정으로 시키지는 못했지만, 제주흑돼지보쌈, 복 튀김, 메밀전 등 침 넘어가는 음식도 많았다.

 

정 동지는 쓴 김에 제대로 쏘라고 부추겼지만,

“이 여자가 기초수급자 등 쳐 먹을려 한다”며 어름장을 놓았다.

메밀콩국수 한 그릇에 만이천원이라 좀 부담스럽지만, 음식 맛이나 식당 분위기가 꽤 괜찮았다.

다음에 물주 나타나면 제주흑돼지보쌈에다 소주 한 잔 해야지.

 

인사동 나가시는 걸음에 ‘메밀란’에 들려 콩국수로 올 여름을 보내세요.

 

사진, 글 / 조문호

 

술친구에게 발목 잡혀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주말을 녹번동에서 보내고 동자동으로 복귀할 무렵,

인사동에서 ‘유목민’을 운영하는 전활철씨로 부터 연락이 왔다.

요즘 들어 사람들 만나지 않으려고 핸드폰을 꺼두었더니

정영신씨 편으로 쓰리 쿠숀을 친 것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온 다는 전활철씨가 나타나지 않았다.

몇 시간이 지나서야 배낭을 짊어지고 나타났는데, 손님이 없어 이틀 동안 가게 문을 닫았단다.

어디를 쏘다니다 왔는지 술안주로 사 온 육회는 이미 상해 버렸다.

정영신씨가 임기응변으로 마련한 야채 안주로 술자리가 만들어졌다.

 

요즘 화가 장모씨가 돈이 생겨 사람들 불러모아 흥청망청 술값 낸다는 말도 듣고,

옛 친구였다는 대선주자 윤모씨의 인간적인 면모도 들었다.

'유목민'과 관련된 책을 만들 준비를 한다는 등 이런 저런 이야기 듣다보니,

가랑비에 옷 젖듯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창밖이 서서히 어두워질 무렵, 정영신씨 핸드폰으로 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바로 조해인 시인이었다.

“형 전화가 꺼져 무슨 일 생겼냐?”지만, 그 날이 칠순 되는 생일이란다.

연락이 안 되어 여지 것 김수길씨와 마시다 헤어졌단다.

이미 취한 목소리지만, 고희 맞는 이 좋은 날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는가?

올려면 빨리나 올 것이지 양과점에서 케익 사오느라 한 참 걸렸다.

 

생일 케익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롤 케익을 사온 것이다.

그 때까지 안주가 신통찮아 손가락만 빨았는데, 이게 왠 떡이냐?

담콤한 안주가 깔아주니 독한 대마불사주가 술술 들어갔다.

 

나야 칠순 지난지가 오래지만, 고희연을 이렇게 초라하게 보내서야 되겠는가?

코로나 시국만 아니라면 인사동에서 잔치라도 한 바탕 벌어야할텐데...

 

고희란 두보 ‘곡강시’의 “人生七十古來稀”에서 나온 말인데,

옛날에는 70살 살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싯귀 중에 '且看欲盡花經眼 莫厭傷多酒入脣"이란 말도 있다.

"지는 꽃 보고 어른거림 잠깐 사이니, 서글픔 많다 말고 술이나 마시자"

덤으로 사는 인생, 어찌 빨지 않을소냐?

쌍팔년도 케케묵은 사연을 안주삼아 “부어라 마시어라” 잘도 들어갔다.

축배에 축배를 거듭하고, 술이 술을 마셔 다들 제정신이 아니었다.

 

전활철씨는 아랫집 문은 왜 두드렸는지, 난 왜 차안에 들어가 잠들었는지 모르겠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동자동 가려고 차를 탔으나 차마 시동을 걸지 못한 것 같았다.

차에 앉아 술 깰 때까지 기다리다 잠든 것 같은데. 내려보니 술 취한 늙은이들은 오간데 없었다.

마침 지하철이 끊기지 않아 지하철 타고 서울역까지 갈 수 있었다.

쪽방까지는 어떻게 올라왔는지, 선풍기도 틀지 않고 잠들어있었다.

 

눈을 뜬 시간이 새벽 네 시 무렵인데, 더워서 땀 범벅이 된 몸이야 차지하고,

속이 쓰려 죽을 지경이었다. 거짓말 좀 보태 냉수를 한 말은 족히 마셨을 것이다.

정신 차려 엊저녁 기억을 되돌리려 카메라를 열어보니 귀가 막혔다.

그 날은 정동지가 내 카메라로 찍었는데, 가기 싫어 비좁은 문 앞에 버티고 누운 모습까지 있었다.

치매 환자가 제 나이를 잊은 듯 했다.

 

죄 없는 김용만씨의 ‘술이 원수다.’노래나 불렀다.

“술술 술이 원수다.

다음 날 아침에 술병이 났네.

때늦은 후회들 소용이 있나.

맞다 맞다 맞았다. 술이 원수다.“

 

사진: 정영신 / 글: 조문호

 

▲ 인사동 쌈지길 앞을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느낄 수 있는 상징적인 거리인 인사동의 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은 가운데 외국인 관광객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700m 거리에 예술가들의 자취·혼 가득

“여덟 사람이 앉아 있다/두 사람은 시인이고/두 사람은 화가다/한 사람은 조각가고/한 사람은 무용가/저쪽 구석에 앉은 두 사람은 작가라는데 /무슨 작가인지 알 바가 아니다/시인은 기타를 치고/화가는 손뼉을 치고”

이생진(1929~) 시인의 시집 ‘인사동’(우리글·2006년)에 수록된 ‘시인과 화가1’이다. 2000년 겨울부터 2005년 겨울까지 쓴 65편의 시에 인사동의 민낯을 담았다. 인사동 곳곳에는 예술혼이 잠겨 있다. 예술가의 자취가 묻어 있다. 이들이 보고 듣고 즐긴 것들이 서울미래유산이 돼 보석처럼 점점이 박혀 있다.

 

▲ 서울의 중심점 표지석

고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씨가 인사동에서 운영한 카페 ‘귀천’은 서울미래유산이다. “귀천에 목 여사는 없고/걸레스님만 걸려 있다/천 시인은 목 여사와 나란히 앉은 사진틀에서/생진아, 너 아직 스무 살이제이 한다/내가 쉰한 살 때 하던 소리다/지금은/내가 먼저 하늘에 왔데이 하고 웃는다/천 시인은 나보다 한 살 아래인데/먼저 하늘에 왔다고 자랑한다” 목씨 사후 조카 목영선씨가 2호점을 내 명맥을 잇고 있다.

오래된 서점 통문관도 서울미래유산이다. 이생진 시인의 시에 등장한다. “통문관 앞을 지나는데/노란 은행잎 속에서 이겸노 옹이 바스락거린다/그의 생애가 인사동이다” 인사동의 중앙통인 인사동길에 있는 통문관은 1934년에 문을 열었다. 출입문은 대개 닫혀 있다. 창에 붙은 서화 틈새로 기웃거려 보지만 천장까지 쌓은 책 때문에 안을 들여다보기 어렵다. 통문관 주인 이종운씨는 이겸노씨의 손자다. ‘월인석보’, ‘청구영언’ 같은 보물급 전적을 비롯해 수많은 고서를 발굴·수집한 할아버지에게서 천자문을 배웠다. 수많은 자료 중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기관지로 발행한 항일투쟁지 ‘상해독립신문’ 창간호 등 170부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할아버지께서 여든여덟 살이 되셨을 때 ‘통문관책방비화’라는 책을 냈는데 나도 그 나이쯤 책을 내고 싶다”고 말했다.

 

▲ 구하산방
▲ 통인화랑

●조선의 근대가 태동한 문화·정치 일번지

인사동에서 가장 오래된 필방 구하산방은 ‘첩첩산중 신선들의 집’이라는 뜻이다. 역시 서울미래유산이다. 1913년에 문을 열어 3대째 이어 온 필방에는 종이, 먹, 붓, 물감 등 2000종이 넘는 서화 재료가 가득하다. 필방에는 그림을 공부하는 학생에서부터 전국의 화가들이 몰린다. 홍수희 대표는 “우리 집 모르면 작가가 아니지”라고 말한다. 본래 일본 상인이 개업한 가게였으나 우당 홍기대 선생이 1935년에 점원으로 들어가 광복 이후에 인수했다. 3대인 홍수희 대표는 2대 홍문희씨의 동생이다.

서울미래유산 수도약국은 광복 직후인 1946년 8월 15일 임명용씨가 개업했다. 약국에서 심부름하다 약종상 면허를 취득했으니 적수공권으로 자수성가한 약업계 1세대다. 세간에 “수도약국에는 없는 약이 없다”라는 말이 나돌았다. 지금은 모두 추억이 됐지만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약을 사기 위해 장사진을 이룬 적도 있었다. 약국을 가업으로 이어받은 약사는 셋째 아들 임준석씨다.

종로구 인사동 194 하나로빌딩 1층에는 서울미래유산 서울중심점 표지석이 말없이 서 있다. 1896년 한양의 중심 지점을 나타내기 위해 고종이 세웠다. 101년 전 3·1운동의 주역인 민족대표 33인은 태화빌딩과 하나로빌딩 사이 주차장 자리인 태화관 별유천지 6호실에서 독립선언을 했다. 서울이 10배 이상 확장되면서 옛 서울의 남쪽 경계였던 남산이 서울의 중심부가 됐다. 흘러간 옛 중심점이다.

이 밖에 인사동 일대의 서울미래유산은 조선중앙일보 옛 사옥, 보신각 지하철 수준점, 낙원악기상가, 허리우드극장, 이문설렁탕, 낙원떡집, 유진식당, 빈대떡전문 열차집 등이 있다. 인사동은 서울의 근대가 태동한 곳이다. 서울의 첫 대학로였고, 서울의 첫 정치 일번지였으며, 서울의 예술과 음식문화가 잉태된 곳이다. 서울의 미래유산 집결지대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

 

▲ 수도약국
▲ 카페 귀천
▲ 통문관

●일제강점기 몰락한 왕족 고미술품 팔아

인사동은 서울에서 가장 고풍스런 거리이자 미술품과 골동품의 향기가 진동하는 공간이다. 서울에서 가장 한국적인 거리여서 외국인 친구나 오랜만에 고국을 찾은 교포나 외국인 관광객에게 한국을 알릴 수 있는 장소이다. 서울의 명소이자 예술가들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골동품과 도자기, 고서 등 한국의 전통 상품이 거래되는 상징적인 동네이면서도 ‘중국산 짝퉁’이 소비되는 자본주의의 경연장이기도 하다.

인사동길은 종로구 인사동 63번지에서 관훈동 136번지로 이어진다. 삼청동~관훈동~인사동~청계천 광통교까지 흐르는 개천을 복개하면서 생긴 신작로다. 북쪽으로는 관훈동, 동쪽으로는 낙원동, 남쪽으로는 종로2가 적선동 그리고 서쪽으로는 공평동과 접하는 700여m의 길이다. 일반적으로 인사동이라고 하면 골동품, 화랑, 표구, 필방, 전통 공예품, 전통찻집, 전통음식점 등이 모여 있는 인사동 인접 지역을 통칭한다.

 

▲ '이문설농탕
▲ 낙원떡집
▲ 낙원악기상가

안국역이나 종로3가역에서 들어오는 두 갈래 통로로 이뤄진 인사동의 몸통 인사동길은 모두 11개의 실핏줄 같은 골목을 통해 이웃 동네와 연결돼 있다. 인사동의 역사는 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계사 바로 옆 터에는 화가를 양성하고 선발하던 도화서가 있었다. 도화서에는 전국의 화원 지망생이 몰려들었고 지필묵을 파는 가게들이 생겼다.

인사동에 처음 고미술품 시장이 형성된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이때부터 인사동은 ‘한국 전통 문화재 유출의 현장’이 됐다. 몰락한 왕족과 양반들이 고미술품을 일본인에게 내다 판 시기다. 해방 이후에는 일본인 대신 미군과 유럽인들로 고객이 바뀌었다. 1970~80년대부터 인사동에 화랑·표구사 등의 상가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화랑이 들어섰다. 필방이 속속 진을 쳤다.

“인사동에 와서도 인사동을 찾지 못하는 것은/동서남북에 서 있어도/동서남북이 보이지 않기 때문/그렇게 찾기 어려운 인사동이/동은 낙원동으로 빠지고/서는 공평동으로/남은 종로2가에서/북은 관훈동으로 사라지니/인사동이 인사동에 있을 리가 없다…”

이생진 시인은 시집 ‘인사동’에 인사동의 역사와 상처를 기록하고자 했다. 그리고 “시혼이 상혼에게 혼을 빼앗긴 지 오래되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미 14년 전의 일이다.

[서울신문 / 스크랩] 글 :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 사진 : 김학영 연구위원

한가한 주말을 보내던 지난 25일, 인사동 마당발 노광래씨가 처들어 왔다.

냉면이나 한 그릇 하자는 전화에 나갔다가 송추 전강호씨 화실까지 실려 간 것이다.

 

가는 길에 냉면 사리와 술 안주까지 사들고 갔다.

여러 지인들도 호출한 모양인데, 다 사정이 있는 모양이다.

요즘 같은 코로나 비상시국에 많이 모여 좋을 것 없다.

 

전강호씨 송추 작업실은 천혜의 자연경관을 끼고 있어, 가는 길이 피서객 차량으로 아수라장이었다.

나들이를 제한하는 거리두기도 푹푹 찌는 무더위에는 공염불에 불과했다.

 

오랜만에 만난 전강호, 이종순 내외가 반갑게 맞았는데, 이 얼마만이던가?

코로나가 시작된 후 첫 만남이고, 송추 작업실에 들린 적은 3년이 더 되었다.

 

연못이 조성된 정원에 술자리를 마련했는데, 자연 속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덥지 않았다.

이제 연꽃이 피기 시작한 연못에는 팔뚝만한 술 안주가 우글거렸다.

 

노광래씨가 술자리를 만든 것은 오는 9월경 민병산선생 33주기를 맞아

인사동에 관한 책을 출판할 생각인데, 사진을 좀 제공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나 역시 인사동 책 낼 출판사 약속으로 코가 석자지만,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일은 개인의 일이 아니라 인사동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많은 정보와 자료를 수집해 알찬 책을 만들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 날 술자리에서 오래된 인사동 추억담이 숱하게 쏟아져 나왔는데,

미리 녹음기를 준비하지 못한 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다.

 

좋은 추억담도 많았지만 한 때 인사동에 사무실을 둔 모 시인의 추잡한 비행까지 나왔다.

그 자가 요즘 뜨거운 감자로 떠 오른 ‘예술원’ 회장을 하지 않았던가?

미성년자를 건드린 그 일이 다시 불거지면 사회매장은 물론 바로 구속감이다.

 

사실 예술원은 전면적인 개혁을 하거나 아니면 없애야 할 조직이었다.

철옹성 같은 벽으로 쉽게 들어갈 수도 없지만, 의식 있는 작가는 오라 해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작가가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지낸바 있는 이시영시인이다.

 

1954년 "반공 문예 조직의 국가적 공적에 대한 물질적 보상이자 권리 주장”이라는 설립 성격도 웃기지만,

아무것도 하는 일 없는 회원들에게 매달 180만원의 정액 수당과 각종 회의 수당을 지급하고 있다.

그런데 예술원 문학 분과 회원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회원이 대학교수 출신이라 연금을 받는데,

이중으로 국고를 낭비할 필요가 있는가?. 차라리 그 예산으로 젊은 예술가들을 지원해야 한다.

 

프랑스와 미국, 독일 예술원의 경우는 회원들에게 지급되는 정액 수당이 없으며, 미국은 오히려 회원들이 연회비를 낸다고 한다.

다들 예술원 회원 자신들보다는 젊은 예술가를 지원하는 데 사업 방향이 맞춰져 있다고 한다.

‘대한민국예술원’은 하는 일도 없지만, 국민들도 뭐 하는 곳인지 잘 모르는 분이 더 많다.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알고 있으나, 다들 마음 상할 필요 없어 입 다물고 묵인해 왔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문학, 미술, 음악분과와

연극·영화·무용을 합친 4개 분과로 구성되어있는데, 사진 분과만 빠졌다는 점이다.

사진 뿐 아니라 아동문학이나 희곡 분야 회원도 없고, 남성 회원이 압도적으로 많다.

 

오래전 일이지만, 지금은 작고하신 원로사진가 임응식선생 생활이 어려워

이명동선생을 비롯한 원로작가 몇몇 분이 나서서 선생을 입회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 있다.

지금 생각하면 세금이나 축내는 경노단체에 안 들어 가신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얼마나 패거리 의식이 심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며칠 전 소설가 이기호 교수가 예술원을 비판하는 단편 소설을 발표하며

'대한민국예술원'의 전면 개혁을 요구하는 국민청원을 올려 화제가 되고 있다.

이 문제는 당사자들이 스스로 탈퇴하는 것이 덜 쪽 팔릴 문제다.

 예술가들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결단을 부탁드린다.

 

사진: 전강호,조문호 / 글: 조문호

 

 

'대한민국 예술원을 폐지하라'

 

한겨레 [시론]

이순원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이기호 작가가 대한민국예술원을 비판하는 소설 ‘예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발표했다. 대한민국예술원은 예술의 창작·진흥에 공로가 큰 원로 예술가를 문학·미술·음악·연극 분야별로 선정해 우대하고 예술창작활동을 지원하는 기관이다. 긍정적인 역할보다 자신들의 잇속을 채우는 집단 이기주의적인 모습으로 오히려 젊은 예술가들의 창작 의욕을 꺾는 일들이나 하기에 뜻있는 사람들은 일찍이 폐지를 말해왔다.

 

문학회원의 경우 원로 문인으로 귀감이 되기는커녕 부끄럽고 추하게 자신의 ‘생사당’을 짓듯 살아서 자기 이름의 문학관을 짓는 모습들과 후배 예술인을 위한 창작 지원 활동보다는 자신들만의 특권 확보에 더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여왔다.

 

우리는 춘천에 있는 김유정문학촌이나 안동의 이육사문학관이나 문학관은 작가 사후에 후대의 사람들이 그의 작품과 문학정신을 선양하고 기리어 짓는 것으로 알아왔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어 자기 문학관을 국가 예산까지 끌어들여 짓는 모습을 보고, 또 어떤 이는 문학관을 짓는 것에 더해 지역 시민의 재산인 공적 재산 수백점을 탈취해 가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저런 자들이 예술원의 회원이 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대한민국예술원의 한해 예산은 32억6500만원으로 예술원의 문학 분과 회원 26명이 받는 수당만도 4억6800만원이다. 여기에 비해 2021년 아르코청년예술가지원 사업으로 문학 부문 청년예술가에게 지원된 예산은 7명 선발 4000만원에 불과했다. 예술원 회원이 되면 자신들이 받는 연금 외에 월 180만원, 연간 2160만원의 수당을 받는다. 대부분 다른 고액의 연금을 받는 이들이 감액 없이 받을 수 있는 금액이다. 이런 특권적 지원이야말로 창작 지원이 절실한 청년예술가에게 돌아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오죽하면 이기호 작가가 “나라 예산으로 명예를 세우지 마십시오. 제 또래의 부장급 과장급 작가들도 밥벌이가 따로 있으면 지원금 같은 거 신청 안 합니다”라고 말하겠는가. 누구보다 지원이 절실한 전업작가들도 남보다 조금 더 알려지면 자기보다 어려운 동료 후배 작가들을 생각해 지원 신청을 자제한다. 그러나 예술원은 이제까지 오히려 자신들의 이득과 탐욕을 키워왔다.

 

과거 2005~2006년 ‘우수예술인발굴지원’ 하던 것을 폐지하고, 2006년부터 2021년까지 자신들의 잇속을 채우기 위해 예술원 회원만의 예술활동 지원을 시행해왔다. 그나마 외부 작가에게 주는 ‘대한민국예술원상’도 올해 문학 부문은 예술원 회원의 동생에게 1억원을 주었다. 이쯤 되면 특권이 아니라 나라 세금에 대한 범죄 수준이 아닌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기호 작가가 공개한 글에 이시영 시인이 댓글로 이들이 ‘수당 180만원을 200만원으로 인상하고, 행사 시 국가 의전서열 제일 앞에 예술원 회원을 배치하고, 해외여행 시 공항 귀빈실 이용 및 1등석 등을 요구하고 있다. 후진 예술가들의 가난과 고투 등은 눈 밖이며 오로지 예술 원로로서의 자기 보신이 제일 사업이며 청와대가 예술가들을 초청해 밥을 안 먹는 것도 항의하고 있다’고 했다. 정말 어느 정도까지 추해질지 끝이 없다.

 

회원은 예술원 회원이거나 예술원이 지정한 예술단체가 후보를 추천하는데, 예술원 회원 중 출석위원의 3분의 2가 동의하면 회원이 된다. 자격도 임기제에서 종신제로 저희끼리 바꾸었다. 이러다 보니 예술원 회원이 되기 위해 누가 어떤 로비를 펼쳤는지 온갖 추문이 흘러나온다. 존경받는 회원이 왜 없겠는가마는 명단을 보면 어떻게 저런 사람이 예술원 회원이 되었나 싶은 이름이 왜 저렇게 많은지 절로 이해가 된다.

 

어떤 사람들은 개선을 말하지만, 조직 자체가 이기적이고 탐욕적으로 운영되어 개선해봐야 마찬가지다. 무보수 명예직이라 하더라도 그 허울을 차지하기 위해 다시 추한 몰골을 보일 것이 뻔하다. 문학으로 예술을 하는 우리 자신을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저런 단체는 해체와 폐지가 답이다. 그 전에 부끄러움을 알고 스스로들 물러나길 바라나 이제까지의 특권적 모습을 보면 이 또한 무망한 일이다. 정녕 문학을 하는 우리가 부끄럽다.

 

조감도 [사진자료 = 서울시]

국보급 유물이 대량 출토된 인사동 도시정비형 재개발 구역에 국내 최대 규모의 유적 전시관이 들어선다.

전시관이 들어설 장소는 지난 달 훈민정음 창제 당시 금속활자를 비롯한 천문시계, 물시계 등의

유물이 다량 발견된 곳으로 도시정비형 재개발구역인 공평동 제15·16지구(인사동 87번지)다.

옛 건물 터인 조선시대 배수로가 발견된 신축 건물 지하 1층 전체에 조성된다.

 

위치도 [사진자료= 문화재청]

지난 달 발굴한 금속활자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제작된 것으로, 역사와 현대가 공존하는 공간을 만든다는 계획이다.

서울시는 유적 보존으로 손실을 입은 시행자를 고려해 용적률 인센티브를 제공하여

기존 17층으로 허가된 건축을 25층으로 보상하는 대신 지하1층 전체를 전시관으로 만드는 조건이다. 

 

건축계획 [사진자료 = 서울시]

이는 문화재 전면 보존 시 공공이용적률 상향 등 인센티브를 주기로 한 '공평 룰'을 따른 것이라고 한다.

현행법상 건설 공사 도중 매장 문화재를 발견하면 국가에 귀속될 뿐만 아니라

발굴 비용은 시행자가 부담해야 해 문화재 발견은 시행자 측에 달갑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다.

 

전시관 건립지역 및 유적출토현장 [사진자료 = 문화재청]

서울시는 지난 21일 제9차 도시계획위원회를 열고 이런 내용을 담은 공평동 제15·16지구(인사동 87번지) 재개발구역 정비계획을 결정했다.

이 전시관은 총면적 4745㎡로 국내 최대 규모다. 종각역 인근 오피스인 센트로폴리스 지하 1층에 조성된 공평유적전시관의 1.25배 수준이다.

전시관 일부 공간은 지상 1~2층까지 뻗어나가 외부 통로에서도 손쉽게 관람할 수 있도록 설계한다.

 

출토된 유적/ 조선전기한글금속활자 [사진자료 = 문화재청]

인근에서 운영 중인 공평유적전시관은 외부 통로에선 전혀 볼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해 보완한 것이라고 한다.

배수로의 경우 벽 높이를 달리해 15세기 토층부터 원형 그대로 전시한다.

인사동의 또 하나 자랑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생각된다.

 

글 / 조문호

 

 

출토된 유적 / 일성정시의 [사진자료 = 문화재청]
출토된 유적 / 물시계 부속품인 주전으로 추정되는 동제품 [사진자료 = 문화재청]
출토된 유적 / 총통 [사진자료 = 문화재청]
출토된 유적 / 동종 [사진자료 = 문화재청]

인사동이 변하고 있다.

가게들이 바뀌고 낭만은 사라졌다.

지루한 거리두기로 거리가 지루하다.

 

그래도 인사동은 인사동이다.

변하는 것은 미워도 인사동은 미워할 수 없다.

 

일주일에 두 번 가던 곳이 한 번가고,

이젠 한 번도 못갈 때가 있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갈 곳이 없어서다.

전시 작품보다 정 나눌 사람이 없다.

 

예술가 만나기도 쉽지 않고 대폿집 풍류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이 죽일 놈의 코로나가 부채질한다.

 

 

몸은 멀어도 마음마저 멀어질 수는 없다.

영원한 추억의 저장고기 때문이다.

 

 

미국 가신 최정자 시인이 생각난다.

얼마나 그리웠으면 ‘서울로 서울로’를 노래했다.

그 시집 나온 지가 어언 20여년이 되었다.

 

몇 년 전만해도 생활비 줄여 만든 돈으로

일 년에 한 번은 빠지지 않고 오셨으나,

힘들어 못 오신지가 사 오년 된 것 같다.

 

한번 갔다 오면 며칠 동안 앓아눕는다더니

이젠 도저히 엄두를 내지 못하신단다.

 

인사동이 그리워 틈틈이 블로그나 찾았는데,

영영 인사동과 작별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디 최정자 시인뿐이던가?

강 민시인은 저승에서 '인사동 아리랑' 노래를 부른다.

인사동 사람들이 한 분 한분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래도 아직은 인사동을 그리는 인사동 사람들이 있다.

멀리서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들려 향수 달랜다.

내가 거리풍경을 찍어 올리고 인사동타령을 해대는 이유다.

 

인사동 사진집을 만들려고 출판사 계약서 받은 지가 일 년이 가깝지만,

 아직도 원고를 넘기지 못하고 있다

마침표가 될 사진집이 내 발길을 멈추게 할까 염려되어서다.

 

요즘은 세상이 뒤숭숭해 인사동도 잘 나가지 않는다.

동자동에서 녹번동 가는 길에 잠시들려 안부나 묻는 정도다.

인사동 거리를 기웃거리지만,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다.

 

엊그제도 지나치는 길에 인사동에 잠깐 들렸다.

미친 코로나에다 폭염까지 겹쳐 거리는 한산했다.

 

일주일 만에 본 인사동 거리지만 계속 변하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추억 지우느라 안달하는 것 같았다.

 

전통적 상품을 거래하던 매장들이 옷가게로 바뀌고 있다.

민예품이 놓였던 진열대는 옷과 마스크가 대신했다.

 

코로나가 시작될 때부터 문 닫았던 ‘보물창고’가

더디어 새 주인을 만났는지 실내장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쌈지 건물 벽에는 임금을 기다리다 죽었다는

궁녀 설화가 담긴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마치 누굴 기다리 듯 애잔하다.

 

‘통인화랑’은 ‘미술관 속 그림과 조각전‘이 열렸고,

‘나무화랑’은 인사동활성화를 위한 신진작가 공모전이 열렸다.

 

전시장마다 작품은 걸렸지만, 반가운 사람이 없다.

인사동을 사랑했던 인사동 사람들은 다 어디 갔을까?

몽유병 환자 같은 늙은이만 거리를 떠돈다.

 

인사동의 봄은 요원한 것인가?

아! 그 때 그 사람이 그립다.

 

사진, 글 / 조문호

 

무더운 날씨에 술을 마셔 그런지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리 많이 마시지도 않은 편이지만 도저히 못 견뎌 물을 덮어썼는데,

몸만 식히지 죄 없는 머리는 왜 밀었는지 모르겠다.

 

지난 토요일 술 한 잔하자는 김명성씨 연락을 받았다.

일전에 최옥영씨 대지미술 보러가자며 연락해도 몸이 아파 못 간다더니 이제 좀 살만한 모양이었다.

 

그날은 전화기를 꺼 두어 정영신씨를 통해 연락을 받았으나, 약속된 ‘마포나루’에는 아무도 없었다.

전화기가 없어 무작정 기다렸더니, 조해인시인과 뒤늦게 나타났다.

뭔가 엇갈려 여지 것 엉뚱한 곳에서 기다렸다고 한다.

 

모처럼 소라 멍게 등 해산물을 안주로 한 잔 마셨는데, 그동안 몰랐던 소식을 많이 듣게 되었다.

자기가 무슨 명탐정이라고 허구한 날 방구석에 처박혀

위장한 친일파 찾는다고 독립운동사 뒤져가며 살더니 몸이 못 버텨낸 것 같았다.

오십견에 버금가는 곤욕을 치루며 앓아누웠다고 한다.

 

그동안 별일도 많았더라.

어느 날 갑자기 에어컨 호스가 터져 온방에 물벼락을 맞았는데, 억대가 넘는 병풍이 젖어 난리를 쳤다는 것이다.

요즘은 표구기술이 좋아 감쪽같이 원상복구는 되었으나 표구 값이 칠백만원이나 나와 겨우 오백만원으로 깎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표구 값을 친동생인 김효성씨가 냈다고 한다.

여지 것 동생한테 도움 받아 본지가 없어 그런지, 그 날은 동생이야기를 많이 했다.

하기야! 요즘 효성씨가 신단수란 필명으로 신문에 운세를 연재하며 정치인 운세로 뜬다는 소문은 들었으나 그 정도인지는 몰랐다.

잘 나가는 상업 출판사와 10만부를 예상하는 출판계약을 맺었는데, 표구 값을 낸 것도 그 계약금 받은 돈이라고 했다.

 

동생은 한 번도 화내는 일이 없다는데, 맞는 말이었다.

자기가 어려울 때도 남 도와주기를 꺼리지 않았는데, 그 복을 이제사 받는 것 같았다.

그보다 더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은 누워 있는동안 엄청난 생각을 해낸 것이다.

아직 공개할 때가 아니라 말은 못하지만 미술시장을 뒤집을 기획안이었다.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김명성씨만의 사업이기도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도 모르게 취해 버렸다.

술집에서 나와 커피 집으로 옮겼으나, 여섯시가 넘어 두 사람 이상은 안 된단다.

커피를 사들고 무더운 햇살아래 마셨는데, 날씨가 장난이 아니었다.

간다는 소리도 않고 도망쳐 나와 더위 먹은 개처럼 헉헉거렸다.

 

집에 오자마자 샤워실에 들어가 물부터 뒤집어썼는데,

무슨 병이 도졌는지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가위로 자른 후 신통찮은 면도기로 밀었는데, 위험천만의 일이었다.

나이가 많아 절에서 받아주지도 않을 텐데 땡초가 되고 싶었을까?

 

간신히 치워놓고 나니 그때서야 집 주인이 나타났다.

무장 해제된 상태에서 사정없이 총을 갈겨 본색을 들키고 말았다.

바람 넣은 볼작을 똑똑 두드리며 선처를 바랬다

나무관세음보살~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며칠 전 이태원에서 이전개업을 준비하는 김상현씨를 찾아갔다.

신사동 ‘뮤아트’ 가게를 비워주고 이태원에 다시 가게를 얻은 것이다.

 

이태원 공사 현장에는 혼자서 가게를 정리 하고 있었는데,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였다.

그러나 코로나가 4단계로 격상되며 개업도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처럼, 지지리도 운이 없었다.

가만히 앉아서 가게 임대료만 물어야 할 판이다.

 

실내장식을 살펴보니 너무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신사동 가게에 붙어있던 사진 한 장 버리지 않고 모두 그대로 옮겼더라.

 

긴 세월 벽에 붙여두었다 떼어내면 망가질 수도 있을 텐데, 하나도 망가진 게 없었다.

그 자료는 30여년을 끌어 온 ‘뮤아트’의 역사나 마찬가지다.

 

바닥 장식도 일품이었다. 마치 바다 위를 걷는 듯 신선감이 일었다.

보여 준 공사현장에서의 공연 동영상은 또 다른 감흥을 불러 일으켰다.

 

김상현씨는 의지의 뮤지션이며 불굴의 사나이다.

이태원에서 신사동으로, 신사동에서 이태원으로 옮겨온

30여 년의 세월이 녹녹치 않았다.

 

영업 장소라기보다 뮤지션들의 공연장으로서 의미가 더 컸다.

손님도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좋아하는 메니아들로 한정된 회원제였으니까...

 

그동안 ‘뮤 아트’를 거쳐 간 가수나 연주자도 헤아릴 수 없지만,

매년 봄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정기페스티벌을 가져왔다.

 

그런데, 비싼 가게 임대료와 운영비는 어떻게 마련하였을까?

말은 안 해도 그 사정은 보나마나다.

그동안 문 닫기 직전에 이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란다.

 

그럴 때마다 의인이 나타나 도움을 주었다니, 아마 천직인 것 같았다.

얼마 전에는 암에 걸려 투병까지 했으나 그마저 털고 일어났다.

 

음악에 미쳐 산 인생이 힘들기는 했으나 행복했을것 같다.

그가 즐겨 부르는 노래처럼, 봄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다.

 

하루속히 코로나가 꺾여 ‘뮤 아트’ 음악이

삶에 지친 이들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주길 축원한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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