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시한 이후 인사동에 최고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휴일 맞은 봄나들이 객으로 다들 마스크를 착용하여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인사동은 예술가들의 정신적 고향이나 다름없으나,

전시는 물론 모임까지 줄어들어 예술인들의 발길도 뜸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전시 보러 간 일 외는 사람만나 술 마신 기억조차 가물거린다.

 

지난 토요일, ‘말하고 싶다’ 지방전에 보낼 전시 액자를 갖고 나갔다.

‘인사아트프라자’ 입구에 있는 박재동화백 작업실에 갖다놓으라는

전시기획자 박 건씨의 메시지를 받아서다.

 

박재동화백의 인사동 작업실은 예술인들 사랑방이나 마찬가지다.

작년 9월 ‘인사아트프라자’ 제안으로 갤러리 입구에 차렸는데,

초상화를 그리는 작업공간이지만, 종종 예술가들 만나는 공간을 겸한다.

 

그 날은 액자가 있어 ‘인사아트프라자’ 가까운 골목까지 차를 끌고 갔다.

비상등을 켜놓고 바삐 가져갔는데, 박재동 화백을 찾아 온 반가운 분이 계셨다.

촛불정국 때 광화문미술행동 일원으로 자주 만났는데, 사정상 성함을 거명할 수 없다.

앉았던 자리를 내주며 앉으라지만, 오래 머물 형편이 아니었다.

차 한 잔 나누지 못한 채 기념사진만 찍고 와야 했다.

 

인사동에 나왔으면 사람들 만나 술이라도 한 잔 했으면 좋으련만

무엇에 쫓기 듯 바쁘게 사는데, 죽을 때가 가까워 진 걸까?

아무래도 일 년 넘게 몰아 부친 코로나가 만들어 낸 더러운 병인 것 같다.

 

하루속히 코로나가 끝나 인사동도 나도 정상을 되찾았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3월1일 정오 무렵, 옛 태화관 터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다고 했으나

날씨관계로 행사가 취소되었는지 아무도 없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인사동 거리는 몇몇 사람만 종종걸음 칠 뿐 한산했다.

 

허탕치고 돌아가는 길에 안국역 대기의자에 앉아

그 날의 함성을 떠 올리며 순국열사를 추념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안국역은 2018년 독립운동 테마 역으로 지정되어

여러 형태의 독립운동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대기의자 기둥에도 무명 독립운동가의 이름과 사연을 빽빽이 새겨 놓았는데,

그 중 한 기둥에는 사방이 여성 독립 운동가들로 채워져 있다.

학생과 의병은 물론 연약한 기녀들까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싸운 것이다.

 

아직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위해

자리를 남겨 두었다는 빈 칸들이 더 가슴을 아프게 한다.

독립유공자 혜택은커녕 이름도 남기지 못한 열사를 찾아 그 자리를 메워야 한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가난에 찌들어 어렵사리 연명하건만,

일제에 빌붙어 민족의 피를 빨아먹은 친일세력들은 자손 대대로 잘 산다.

그 것만도 분통이 터져 죽을 지경인데,

친일 집안이 독립운동가로 날조되는 현실에 치를 떨 수밖에 없다.

어찌 선열들 앞에 고개를 들 수 있겠는가?

 

마치 인사동에 내리는 빗방울이 선열들의 피눈물 같았다.

이제 위선의 가면을 벗겨내야 한다.

 

글 / 조문호

 

김진하씨는 못하는 게 없는 팔방미인이다.

 

인사동에서 ‘나무화랑’을 운영하는 전시기획자로,

미술평론가이고 출판편집자기도 하다.

그리고 개인적인 작업은 목판화로 아는데,

사진을 한지가 10년이 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지난 달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열린 ‘말하고 싶다’전시장을 지킨 일이 있었는데,

담배 피우러 옥상에 올라가다 계단에 쌓인 인쇄물 더미에서 김진하씨의 전시 자료를 본 것이다.

 

“숨”이란 제목의 사진전이었는데, 더 놀란 것은 십년이나 지난 팸플릿이었다.

사진인들이 김진하씨 사진 작업은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하기야! 사진과 그림의 경계가 허물어진지가 오래라

그에게는 붓 대신 카메라를 이용한 그림 작업의 연장이기도 했다.

난, 기록사진이 아닌 파인아트에 몰두하는 많은 사진가들을

사진가로 보지 않고 작가로 여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팸플릿 속의 ‘숨’은 사람이 살아가는 가장 원초적 움직임을 형상화했다.

사진을 저속셔터로 찍으려면 숨을 멈출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미세한 움직임에 드러나는 이미지의 흔들림이나 피사체의 중첩이

본래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또 다른 울림을 전해주었다.

 

호흡의 흐름에 따라 생성된 이미지는 작가 스스로의 존재 확인이기도 했다.

하늘이나 산을 찍었지만, 결국은 작가 스스로를 드러낸 것이다.

 

단색조의 무거운 분위기가 주는 미묘한 느낌은

찍을 당시의 작가 심리상태일 수도 있었다.

 

실제풍경에서 작가의 심리풍경으로 바뀌어가며,

작가의 미적 감성이 본색을 드러냈다.

 

김진하관장의 새로운 카메라아이 발견이 어찌 뉴스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어두운 창고에 잠자던 이미지를 찾아내어 다시 불을 지피는 이유다.

 

인쇄물을 스캔 받아 본래의 이미지와는 다소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이미지 농도는 물론 인쇄된 종이의 입자까지 극명하게 드러났으나,

거칠어진 나의 숨으로 여겨 두루 넘어가시길 바란다.

아무튼, 앵콜 전에서 오리지널 프린트를 볼 수 있길 희망한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지금 찍는 사진은 어떻게 변했을까?

요즘 페이스북에서 선보이는 산 사진들이 예사롭지 않았는데,

사진에 드러난 작가의 아우라가 그냥 나온 게 아님을 이제 사 알겠다.

 

내년 초에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김진하씨의 두 번째 사진전이 열린다고 한다.

어떤 사진을 보여 줄지 벌써 기다려진다.

 

3월 18일부터 4월 27일까지 담양 ‘담빛예술창고’에서 열리는

‘말하고 싶다'전에 김진하씨 사진도 선보인다.

 

현재 ’나무아트‘에서 열리고 있는 김진하 소장전에서도

작가의 사진을 예고편으로 보여준다니 많은 관람 바란다.

 

그 사진은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공간의 미를 담아낸 작품이다.

수집해 놓은 소장품에서도 작가의 감성을 읽을 수 있으리라 여긴다.

전시는 월요일은 휴관이고, 정오부터 오후6시까지 열린단다.

 

그리고 김진하씨 말 나온 김에 그가 저지른 일들을 좀 까발려야겠다.

그는 긴 세월 인사동 ‘나무아트’를 어렵사리 운영해 가며

예술이 살아 숨 쉬는 인사동을 만드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인사동에 전시장이야 늘려 있지만,

‘나무아트’에서 기획 초대한 전시에 따를 곳은 아무데도 없다.

그 곳에서 펼쳐보인 민중의 힘이 인사동의 뿌리인지도 모른다.

인사동 문화를 살찌운 그의 공적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얼마 전 박건 작가의 ‘내 맘대로 주는 상’ 열 번째 수상자로

‘갤러리스트상’을 수상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여긴다.

나 역시 박건씨로부터 ‘카메라 시인상’을 받은 적이 있는데,

관청이나 언론사에서 준 그 어느 상보다 값지게 여겨, 트로피를 신주단지처럼 모신다.

 

그 뿐이던가?

박근혜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며 조직된 ‘광화문미술행동’의 기획자로

매주 ‘바람찬 전시장’을 장식하며 광장에 휘오리 바람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이젠 김진하씨 사진이 사진판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킬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사진, 글 / 조문호

 

신사동에서 ‘뮤아트’를 운영하는 김상현씨가 청담동에 ‘Salon de Mu/art 청담’을 열었다.

지난 26일 오후 7시 무렵 청담동 '뮤아트'를 찾아갔는데,

거리두기로 많은 분을 초청할 수 없는 사정이라 가면서도 마음은 편치않았다.

 

지하철 분당선 압구정 로데오역에 내려 4번 출구 부근의 '옴므빌딩'6층이었다.

 

들어서니, 흥겨운 재즈음악이 살롱을 흥청였다.

띄엄띄엄 앉은 좌석에 반가운 분도 더러 보였다,

 

김상현씨를 비롯하여 김명성, 하양수, 이상원씨 등 반가운 분을 여럿 만났다.

 

메인공간을 장식한 신사동 '뮤아트' 실내사진에서 공통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난, 뮤지션 김상현씨를 볼 때마다 그의 음악에 대한 집념과 열정에 탄복한다.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삶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니, 음악 자체가 그에게 삶의 원천이다.

재능 있는 가수를 발굴하여 가르치고 아껴주는 후배사랑 또한 가슴 뭉클하다.

 

수십 년 동안 ‘뮤아트’를 끌어 온 아집과 자존심도 대단하지만,

오뚜기 처럼 버텨 온 삶의 여정에 절로 고개 숙여진다.

 

얼마 전에는 암 투병으로 생사의 기로에 선 적도 있었으나,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듯이 그는 다시 일어섰다.

 

주변 지인의 전시나 문화행사에는 어김없이 무거운 장비를 챙겨들고

축하 연주를 기꺼이 해 주는 그의 예술 사랑이 암담한 현실에 한 줄기 빛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날 연주회는 하양수씨가 부른 ‘달링’이 예전과 달리 마음 속 깊이 다가왔다.

그리고 일본 첼리스트 카마코양의 ‘아베마리아’ 연주에 가슴이 시리더라.

그토록 애절한 연주를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그녀의 무릎 위에 놓인 첼로 아래 원피스에는 수많은 벚꽃이 수 놓여 있었다.

여지 것 반일정서에 일본을 싫어했으나, 예술의 힘은 모든 걸 녹일 수 있었다.

 

음악에 취하고 술에 취해 신사동 ‘뮤아트’로 자리를 옮겼으나, 도착하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잤는지 눈을 떠보니, 새벽 두시였다.

 

옆에는 김상현씨를 비롯하여 김명성, 하양수, 카마코양 등 여러 명이 있었다.

김명성씨와 택시에 실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화두 하나가 있었다.

 

바로 “돈이 예술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정신을 망치는 돈이지만, 멀리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풀리지 않는 숙제다.

 

사진, 글 / 조문호

 

예전에는 인사동에서 술 마실 기회가 많았지만,

요즘은 은평 지역에서 마실 기회가 더 많아졌다.

그 곳에 정영신씨를 비롯하여 조해인, 김수길, 김명성, 서인형씨등

가까운 분들이 많이 살아 종종 술자리가 만들어진다.

예술인 ‘스마트협동조합’이 녹번동에 있는 것도 한 몫 하는 셈이다.

 

지난 25일 오후 김명성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녹번동 있으면 ‘마포나루’로 오라는데, 나의 움직임을 훤히 읽고 있는 것 같았다.

서울역에서 녹번동으로 이동 중에 전화를 받아 술집부터 먼저 들렸는데,

김명성씨를 비롯하여 조해인, 김수길, 백승호씨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마포나루’는 서부경찰서 뒤편에 있는 조그만 횟집인데,

가격이 저렴한데다 주인의 넉넉한 인심까지 한 몫해 김명성씨 단골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가격이 싸다 해도 가난한 사람들이 찾기에는 부담스럽기 마련인데,

원님 덕이 아니라 김명성씨 덕에 매번 나팔 부는 집이다.

지척에 이청운씨 화실도 있으나, 함께 못함이  마음에 걸린다.

 

갈 때마다 회에다 멍게, 전복, 생선구이 등 갖가지 해산물이 코스요리처럼 나왔다,

해산물을 골고루 맛볼 수 있어, 오죽하면 거지 영양 보충하는 날로 여길까?

이 날은 모인 사람이 다섯 명이라 두 군데 나누어 술 상을 차려 놓았다.

 

김수길씨는 다음 주에 ‘마루아트’에서 개인전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고,

김명성씨는 김상현씨의 두번째 ‘뮤아트’가 이틑 날 개업한다는 소식도 주었다.

그 날의 화제는 김명성씨 소장품전인 ‘백범 김구 쓰다’전과 관련된 독립운동에 얽힌 이야기였다.

사회적위치가 높은 사람들의 부친 친일이력인데, 문제는 독립운동가로 조작한단다.

고증자료를 근거로 철저하게 진위를 밝혀야 한다.

 

그 날은 소주 한 병 남짓 마셨는데, 숨이 차 더 이상 마실 수가 없었다.

김명성씨와 먼저 일어났는데, 조해인씨는 시동이 걸렸는지 일어 날 생각을 않았다.

난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면 더 이상 마시지 않지만, 조해인씨는 달랐다.

몸도 챙겨야 할 나이지만, 안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술로 끝장을 본다.

 

그런데, 또 다른 사진들이 나를 기다렸다.

얼마 전 만해도 매일 같이 소식 주워 날라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올렸으나,

이젠 다른 일도 있지만, 몸이 받쳐주지 않아 일을 줄이기로 했다.

가급적 전시장 출입을 자제하고, 포스팅도 중요한 일이 아니면 안 한다.

 

그전 같았으면 주변 분들을 만날 때마다 사진을 찍어 올렸지만,

이젠 꼭 필요한 사진만 찍고, 찍어도 올리지 않을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은평에서 만난 분들 사진을 함께 엮어 소개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양산에 가 있는 공윤희씨가 전화를 했다.

역촌동 ‘양갈비에 꼬치다’에서 기다린다며 빨리 오라는 것이다.

고깃집 이름은 흥미롭지만, 그 곳은 잘 가지 않는 술집이다.

가보니, 공윤희씨 뿐 아니라 조해인씨와 김수길씨도 있었다.

 

그 날은 폭설을 예고한 날이라 온종일 서울역 주변에서 맴돌았다.

백설이 휘날리는 서울역 전경사진이 한 장 필요했는데,

날씨가 포근해 그런지 간간이 내린 눈도 금세 녹아버렸다.

술 마시러 오라는 공윤희씨 전화에 사진 찍기를 포기하고 달려갔는데,

술을 마시다 보니 진짜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다.

 

또 다시 황급히 서울역으로 달려갔으나, 도착할 무렵 눈이 그쳐버렸다.

운이 없는 건지 찍지 말라는 건지, 마치 숨바꼭질하는 것 같았다.

부득이 눈 내리는 서울역이 아니라 눈 내린 전경으로 만족해야 했다.

 

남은 사진은 녹번동 정영신씨 집을 방문한 최석태씨와 서인형씨 사진이었다.

 때늦은 사진이지만, 그 날은 대취해 그런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또 언젠가는 연신내 청구병원 앞을 지나가는데 뒤에서 누가 불러 세웠다.

돌아보니 화가 박불똥씨 였는데, 장경호씨 집에 들렸다 돌아가는 길이라 했다.

 

세월이 지나면 이 사진 또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사람은 사라져도 사진은 어딘가 남아 떠돌테니까...

 

사진, 글 / 조문호

 

 

무명가수로 인사동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던 신현수씨가

돌아 가셨다는 부음을 두 달 가까이나 지나서야 전해 들었다.

 

어차피 한 번은 가야할 길 조금 먼저 돌아가신 것 보다 더 슬픈 것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쪽방에 기거하다 무연고로 돌아가셨다는 거다.

 

국립병원에 이송되어 연고자 없는 행려병자로 처리되었다는 것이다.

그 역시 동자동 쪽방촌에서 이름 없이 사라지는 무연고자와 다를바 없었다.

 

신현수씨는 한때 연예협회 분과 사무국장을 지낸 연유로 신국장이라 불렀다.

김삿갓 노래를 불렀다는 연유인지 야유회에 삿갓을 쓰고 나타난 기억도 있다.

 

항상 김명성씨 술자리와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지켜보며

혼자 술잔을 기울이던 모습도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인사동에 행사만 있으면 나타나 궂은일을 맡아했고

특히 ‘아라아트’ 김명성씨가 나타난 자리에는 수행원처럼 잔 심부름을 했다.

그러면서도 술자리가 파할 무렵에는 기타 치며 노래했다.

 

한 번은 술이 취해 그의 노래를 유심히 들어보았는데,

노래의 억양이나 리듬에 세상에 대한 저주나

비아냥 같은 것이 섞여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 가지 달갑지 않았던 것은 나이가 한 참 아래인 후배에게

“회장님 회장님”하며 너무 굽신 그렸다는 점이다.

 

나보다 나이가 두 살이나 더 많은 해방둥이인데,

얼마나 눈에 그슬렸으면 비굴해 보이기까지 했을까?

 

그러나 그의 마음이나 속사정도 모르면서 왜 그리 쉽게 속단했는지 모르겠다.

살아 생 전 존경의 마음으로 술 한 잔 권하지 못한 게 한이 된다.

 

인사동에 신국장의 발길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인사동 ‘아라아트’가 막 내릴 즈음이었으니,

그때부터 마음의 병이던 육신의 병이던 앓지 않았나 싶다.

 

인사동에서 ‘유목민;을 운영하는 전활철씨 이야기로는

부음을 듣기 한 달 전 새벽 무렵에 그를 보았다고 했다.

인사동매점에서 소주 한 병 들고 나오는 것이 마지막이었단다.

 

마지막 화장하는 날에야 알게 된 유재만씨와 김명성씨의 동생이자

역술인인 신단수선생이 가서 유골을 강물에 뿌리고 왔단다.

 

신현수 형! 이승에서 못다한 노래 저승에서라도 마음껏 불러 즐겁게 지내세요.

그곳에 존경했던 선생님들이 얼마나 많겠어요,

 

부디 극락왕생 하시길 간절히 빕니다.

가시는 걸음에 형이 남긴 파편들을 모아 올립니다.

 

사진, 글 / 조문호

 

백기완 선생께서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랫말처럼 홀연히 떠나셨다.

다 같이 잘사는 '노나메기 세상'을 꿈꾸었으나, 먼 길을 앞서 떠나셨다.

 

사회장으로 진행된 백기완 선생 '영결식은 19일 오전 8시 서울대병원 발인식을 시작으로 엄수되었다.

대학로 '통일연구소' 앞에서 노제를 지내고 종로를 거쳐 서울광장까지 거리행진을 했다.

오전 11시 30분 무렵 서울광장에서 영결식을 갖고, 하관식은 오후 3시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먼 길 떠나시는 선생을 배웅하기 위해 새벽부터 설쳤으나,

순간적인 실수로 차 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안달을 했다.

문제는 거리두기로 승용차를 끌고 간 게 탈이였다.

창경궁 앞에서 서울대병원까지 가는데, 한 시간이 더 걸렸다.

결국 발인식도 보지 못하고, 멀리서 이동하는 운구행렬만 지켜보아야 했다.

 

운구행렬이 대학로 소나무 길로 접어들며 차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노제가 끝날 때까지 다시 꼼짝할 수 없었다.

 

운구 행렬에 백기완 선생을 형상화한 검은 두루마기 차림의 대형 한지 인형도 등장했다.

꽃상여와 만장, 여러 명의 풍물패를 앞세우고 노제 장소인 '통일문제연구소'와 '학림다방' 앞에 멈춰섰다.

길에다 차를 버려두고 현장에 달려 갈 수밖에 없었는데, 제일 먼저 신학철선생이 눈에 띄었다. 

 

소나무 길 노제는 박래군 상임집행위원장 사회로 시작되었다.

김세균 상임장레위원장은 조사를 통해 “선생님은 평생을 노동자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동지로 삼고” 살았다고 회고하며 고인을 보내는 아쉬움을 달랬다.

뒤이어 박석운 상임장례위원장도 “백기완 선생은 함석헌, 장준하, 문익환, 계훈제로 이어지는

재야의 마지막 어른이셨다”고 회상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이형숙 대표 또한 백기완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며

장애인의 친구와 동지로 살아온 고인을 추억했다.

비정규직 공동투쟁의 김수억 대표는 비정규직 없는 노동해방을 꿈꾼 고인을 애도했다.

 

장례위에는 사회 각계 인사와 562개 단체 및 시민 6천104명이 참여 했다는데,

‘노나메기 세상’이라 새겨진 마스크를 쓴 장례위원 머리에는

선생께서 남긴 글귀 '노동해방'이 적힌 머리띠를 둘렀다.

가슴에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노랫말 '남김없이'라 쓰인 리본을 달았다.

 

노제가 끝나고야 운구행렬을 따라 갈 수 있었는데,

왜 가까운 주차장에 주차할 생각을 못했는지 모르겠다.

거리 행진은 물론 장례식 조차 제대로 찍지 못했는데,

운구행렬을 따르는 조문객의 차량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온 종일 백기완 선생만 생각하며 추모하는 시간이 된 것만은 틀림없다.

시청 가까이 당도해서야 차를 '프레스센터'에 주차할 수 있었다.

일단 갈증과 허기부터 메우기 위해 물과 빵부터 사들고 영결식장 주변을 맴돌았는데,

최명철씨와 딸 보라양, 박재동, 곽대원, 양시영, 김가영씨 등 반가운 분도 여럿 만났다.

 

영결식장은 코로나 방역수칙에 따라 출입자 방명록 작성과 체온 측정을 한 후

99명만 띄엄띄엄 앉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종로와 광화문을 거치는 사이 추모객 수가 점차 불어나

영결식이 거행되는 '서울광장'에 천명 가까이 몰려들었다.

시민들이 광장 주변으로 몰려들어 거리두기가 지켜질 수 없었다.

 

 운구행렬은 11시 20분경 광장에 도착했는데,

김소연씨의 사회로 신학철, 신철영씨의 초 밝히기로 영결식이 시작되었다.

416합창단, 이소선합창단과 평화의나무 합창단 등 연합합창단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시민들과 함께 불렀다.

이어 양기환 대변인의 고 백기완 선생의 약력 보고가 있었다.

 

약력 보고 후 문정현 신부,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 송경동 시인,

김미숙 김용균 재단이사장, 명진 스님 등의 조사가 이어졌다.

백선생의 오랜 동지인 문정현 신부는 “백 선생 옆자리가 내 자리인 줄 알고 살았는데,

이제 내 자리가 없어졌다"며 울먹였다. 그리고 "앞서서 나아갔으니 산 저희들이 따르겠다.

다시 만나 뵐 그 날까지 선생님 자리를 지키겠다"며 다짐했다.

 

'서울광장' 영결식에는 수백 명에 달하는 노동자들도 함께했다.

조사를 맡은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은 "생전에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과 '김진숙 복직'이었다"며 마지막까지 노동자의 삶을

걱정해주신 선생님의 격려에 부끄럽지 않은 '민주노총'이 되겠다"고 말했다.

 

이날 영결식에서 가수 정태춘씨가 백기완 선생을 추모하는 노래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불렀다.

영결식에 함께한 시민들은 백기완선생께서 생전에 좋아한 '민중의 노래'를 함께 합창했다.

 

백기완선생의 딸 백원담씨는 영결식 말미에 진행된 유족 인사에서 "어머니가 오시지 못했다'면서

 어머니가 아버지를 향해 쓴 마지막 편지를 대독했다.

 

백기완 선생님,

봄이 지나가기 전에 '불러보세, 우리의 봄노래'를 함께 부르려 했는데

이제 부를 수가 없으니 다음에 다시 만나면 꼭 같이 불러요.

언제나 기억할 거 같은 우리 남편 만나 나는 행복했어요.

멋진 목도리 휘날리며 바위고개 그 언덕에서 기다리세요.

잘잘(백기완 선생이 생전에 만든 말, 잘있어요 잘가요 줄임말), 우리 신랑 백기완씨"

-아내 김정숙-

 

서울광장에서 영결식이 끝날 무렵 장지로 먼저 출발했는데, 이미 많은 분들이 와 계셨다.

다들 마스크를 쓰고 있어 알아 볼 수 없었으나 박불똥, 장순향, 류연복, 임정희,

강제욱, 김봉규, 곽명우, 손병주, 정영철, 성기준씨 등 일부만 알아 볼수 있었다.

 

뒤늦게 출발한 운구행렬은 오후 3시 20분 무렵에야 장지에 도착했다.

'모란공원'에는 오후 2시부터 자리를 지킨 추모객 100여 명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투쟁하자던 백기완 선생님의 외침을 기억합니다‘ 

적힌 현수막으로 고인을 맞이했다.

운구행렬에는 김세균, 이수호, 임진택, 양기환씨도 보였다.

 

운구 행렬이 전태일 열사의 묘지 옆에 마련된 묘소까지 이동하는 동안

이성호씨의 풍물패가 소리굿으로 백 소장을 잃은 유족과 추모객의 마음을 위로했다.

하관식이 시작되자 유족들은 잠시 '아버님'을 외치며 흐느끼기도 했다.

큰 아들 백일씨는 “아버님의 마지막 유언”이라며

추모객과 노동해방, 해방통일, 노나메기를 세번 외쳤다.

 

신학철 상임장례위원장은 추모사에서 ‘백기완선생께서 앞길을 잘 닦아 놓아

우리가 편하게 갈 수 있게 되었다’며 고인의 죽음을 슬퍼했다.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는 추모사를 통해 “백기완 선생님은 권력과 유혹 앞에서

초심을 버리지 않는 분이셨다.”며 “선생님에게 배운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우직한 진정성이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장례식이 모두 끝나고 나오는 길에 정재안, 박세라, 박불똥, 김윤기씨등

반가운 분을 한꺼번에 여럿 만났다.

급히 언덕을 내려가다 엉덩방아를 찧었는데,

카메라까지 메모리 저장공간이 부족하다며 작동되지 않았다.

사진 그만 찍고 빨리 가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평생 민주화를 위해 싸우며 잘못된 세상을 바로 잡으려 애쓰신

백기완 선생은 이제 이 세상을 떠나 또 하나의 별이 되어버렸다.

선생님! 이제 편히 쉬십시요.

 

사진, 글 / 조문호

 

 

며칠 전 사진가 최인기씨로 부터 전화를 받았다.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와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는 제안이었다.

최인기씨는 미투와 관련된 사건으로 불편한 관계라

식사보다 인사동에서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했다.

 

모처럼 ‘유목민’에 나갔더니, 다들 먼저 와 있었다.

내가 올린 꼴 페미 까는 글 보고 청탁한 원고를 취소한 터라

어색한 관계를 풀어야 했는데, 바쁜 이규상씨까지 나오게 해 송구스러웠다.

 

그리고 최인기씨는 미워할 수 없는 사이다.

좋아하는 후배이기도 하지만, 사진판에 잘 못된 현실과 싸우는 그만한 전사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올린 내용은 일부 급진적 페미니즘이 여성의 성 평등 운동에

오히려 장애가 되고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요즘 상대를 매장시키려는 가짜 미투가 기승을 부려

선의의 피해자마저 의혹의 눈길을 받는 세상이 되어바렸다.

특히 정치판에서 많이 악용되는 현실인데,

진보 정치인들의 무분별한 공략에 많은 국민들이 등 돌리고 있다.

더 이상 착한 사람이 목숨을 잃는 일은 없어야 한다.

무엇이던 과하면 탈이 생기기 마련이다.

 

물론 최인기씨를 꼴 페미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청탁한 원고를 취소하는 전화를 하기도 쉽지 않지만,

그 동안의 관계를 생각하면 쉽게 할 수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주변 누군가의 문제 제기에 어쩔 수 없이 전화했을 것으로 여긴다.

 

그냥 덮고 넘어 갈수도 있었지만 페미니즘 문제라 

 꼴 페미의 문제점을 다시 한 번 부각시키고 싶었다.

아마 내 글을 본 지인이 ‘눈빛출판사’에 연락한 것 같은데,

이규상대표가 화해의 자리를 주선한 것이다.

 

그 날 최인기씨는 죄송하다며, 여러 차례 사과했다.

그러나 페미니즘에 관한 자신의 의견은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내가 민망할 정도의 사과라 더 이상 묻지도 말하기도 싫었다.

내가 상관할 문제는 아니지만, 노령진수산시장 투쟁 사진집 서문은

최인기씨를 잘 아는 이규상대표가 쓰면 어떠냐고 했더니,

이번 책은 서문 없이 사진집을 내겠다 했다.

 

아무튼, 좋은 일은 아니지만 즐거운 술자리가 되었다.

그날 이규상 대표가 반가운 선물도 주었다.

정영신씨의 ‘어머니의 땅’ 가제본된 사진집 한 권을 내놓아 눈이 번쩍 띄었다.

그동안 ‘길 위의 인문학’ 공모에 정영신씨 원고가 선정된 것은 알았지만

사진집을 만든다는 것은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그런데, ‘유목민’ 안 쪽 테이블에서 반가운 사람이 있었다.

미술평론가 유근오씨와 도예가 변승훈씨가 나를 보더니 옮겨왔다.

변승훈씨는 백기완선생 문상 다녀 왔다는데, 이미 취해 말이 거칠었다.

이규상씨와 유근오씨는 서로 명함을 건네받으며, 원고 청탁도 하더라.

구체적으로 모르나, 문제만 일으키는 내 뒷조사 해달라는 말인지,

나에 대한 글을 청탁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좋은 필자와 좋은 편집자가 만났으니, 좋은 일인 건 틀림없을 게다.

미술평론가 유근오씨도 한 때 미투문제에 걸려 곤욕을 치룬 적도 있었다.

의혹이 풀려 다시 강단에 서게 되었지만, 자칫하면 생사람 잡는 무기로 악용된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파장 무렵에는 발렌티노 김이 나타났다.

서울특별시 환경미화원 복장으로 나타났는데, 요즘 청소하는 모양이다.

얼마 전 공채 시험 면접에서 "서울을 자기 머리처럼

빤짝 빤짝 빛나게 하겠다"는 말에 배꼽을 잡은 적도 있었다.

무슨 일을 하던 예술가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어렵게 사는 최인기씨 주머니를 털어 마음은 편치 않지만,

나올 때 무거웠던 걸음에 비해 갈 때는 날아갈 것 같았다.

알랑방구 낄 정영신씨 책을 옆구리에 끼고, 간 크게도 택시를 불러세웠다.

 

“기사 양반 요! 녹번동 가입시다. 택시비는 그 집 안주인한데 바드이소”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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