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사진의 대부 김한용(92세)선생께서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지난28일 숙환으로 운명하신 것이다.

1956년 문을 열어 반세기가 넘도록 함께해 온 ‘꿈의 공장’ ‘김한용사진연구소’도 문을 닫았다.
충무로 2가 52-3번지를 주소로 둔 그 꿈의 공장은 우리나라 광고사진의 요람이었다.
“안 놀고, 안 자고, 안 먹고, 안 쓰고, 사진에 투자하자”. “춥다. 덮다. 피곤하다. 바쁘다는 말도 하지말자”.
“남보다 세 배는 더 일하자”라는 억척스러운 각오로 일궈 낸 역사의 자리 아니던가?

70년 전, ‘국제보도연맹’ 기자로 역사적 현장들을 기록하며 시작한 사진과의 일생은 지난했다.
그러나, 한 평생 광고사진을 개척해 낸 선생의 위대한 업적만은  길이 남을 것이다.

28일 늦은 오후 무렵, 사진계 큰 별이 떨어졌다는 갑작스런 부음에 가슴이 미어졌다.
어차피 한 번은 가야할 길이고, 죽음 자체가 축복이라 생각하지만, 슬펐다.
술이 취한 상태였지만, 인사동의 작은 풀꽃 꺾어, 세브란스병원 영안실로 찾아갔다.

영안실은 상주인 사진가 김대수씨와 따님 두 분이 지키고 계셨다.
국화 속에 묻힌 선생의 영정사진에서 평소처럼 호탕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선생께서는 크리스찬이셨지만, 존경의 마음으로 큰 절을 올렸다.

빈소에는 모르는 분들이 더 많았다.
‘사진예술’을 끌어 왔던 사진가 김녕만씨와 그의 아내 윤세영씨가 있었고,
뒤늦게 한정식선생과 사진평론가 이영준, 광고사진가 박상훈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김녕만씨는 특유의 말솜씨로 지난 날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선생님의 작품을 팔아 드렸더니, 큰 소리로 '잠간만!' 하시면서 ‘사진예술’ 평생구독을 신청하셨던 일,
한정식선생께서 밥값을 내려니, '잠간만!' 하시면서 계산을 하셨던 일 등,

젊어 못 베푼 마음을 골고루 나누어 주셨다고 한다.

한정식선생께서는 마지막까지 새로움을 추구하는 열의도 보였다고 한다.
초점이 맞지 않는 사진을 계속 찍기에 왜냐고 여쭈었더니,

초점이 정확해야 하는 광고사진의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란다.
이제, 오랜 세월동안 이루어 온 선생의 업적은 모두 역사가 되고 말았다.

“선생님!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편히 영면 하십시오”

사진, 글 / 조문호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공간을 채우고 장악하는 힘이 있다. 통기타 한 대만으로도 청중을 압도하고 마음속에 뭉친 응어리를 풀어 공감대를 끌어낼 수 있는 것. 우리가 흔히 포크라고 말하는 이 장르의 음악은 사람과 악기가 한 덩어리 되어 인간을 설득하고 보살핀다.


어느 해 늦은 밤 인사동에서

송년회. 나는 뒤늦게 술자리로 향하고 있었다. 저녁이 깊어지자 비는 눈으로 변했다. 젖은 바닥에 엉겨붙은 눈은 땅에 닿자마자 녹아 시커먼 구정물이 되었다. 자정이 멀었는데 사람들은 비틀거렸다. 그 속을 한기를 느끼며 한참 걸었다.

외투에 묻은 눈을 털며 술자리에 합류했을 때 이미 몇몇은 취해 있었다. 술자리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이런 분위기였다면 일을 핑계로 합류하지 않는 게 좋았다. 지나간 시대와 당대의 어두운 주제들이 화제였다. 짧지만 날카로운 대화가 오갔다. 전혀 대화라고 할 수 없었다. 각자 자기가 할 말만 내뱉고 있었다. 듣는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는 술자리에 머리를 대고 졸기 시작했고, 아예 시비조로 상대를 공격하기도 했다. 나는 옆 테이블에 이 소란스러움이 전해지는 게 부끄러웠다. 눈치가 보였다. ‘이제 좀 그만하지’라는 말이 목젖까지 차올랐다. 그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잠에서 일어난 일행 중 하나가 어디서 기타를 들고 와서 노래를 불렀다. 처음에는 ‘도대체 무슨 수작인가’라며 자리를 털고 일어설 뻔했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김민기가 만들고 양희은이 불렀던 노래를 기타 반주에 맞춰 부르기 시작했다. 두 음정쯤 낮은 목소리였다. 노래는 금방 술집을 채웠다. 삿대질이 오갔던 친구들이나, 나를 염려하게 만들었던 옆 테이블에 앉았던 초면의 사람들, 어디선가 등장한 술집 사장까지 모두 함께 부르고 있었다. 지나간 일에 대한 과장벽인지 몰라도 크리스마스 기적 같은 사건이 벌어졌다. 노래는 몇 곡 더 불려졌다. 기타나 노래 솜씨는 형편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이 모두 함께 불렀다. 누구도 합창을 권하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이윽고 불편했던 자리는 사라졌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두들 발그레한 얼굴로 정겨운 이야기꽃을 피웠다. 노래는 그랬다.


2000년대 중반 대학가 뒷골목에서

골목만 들어서면 10m라고 했지만 구불거리는 변두리 뒷골목은 도무지 목적지를 찾기 힘들었다. 전화를 몇 번 하고 겨우 지하에 있는 카페를 찾았다. 왜 이렇게 길을 설명하지 못하냐고 푸념하며 자리에 앉았다. 내부의 음악 소리는 시끄러웠다. 테이블은 대략 7개, 별로 춥지 않았는데 부탄가스를 사용하는 난로 2개 중 하나가 켜져 있었다. 음반이 잔뜩 진열된 바에는 한 남자가 레코드를 닦아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있었다.

두서없는 이야기를 한참 했다. 누군가는 집을 샀고, 대기업에서 광속으로 승진했다고 했다. 광속으로 승진한 친구는 실력이 전혀 없지만 알고 보니 오너의 집안이다. 뭐 그런 식이었다. 누군가의 눈빛엔 부러움이 묻어났다. 흉보는 것도 한계에 이르자 지나간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가 만난 그때가 제일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IMF가 왔다”고 하자 친구들은 “그랬지” 하며 실없이 웃었다. 그때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겠다던 녀석들은 IMF가 터지자 욕을 해가며 악착같이 살아 있었다. 얼마나 순배가 돌았을까.

시커멓고 젊은 녀석들이 몰려와 지하 카페를 채웠다. 훼방꾼의 등장이었다. 빨갛게 빛나던 난로는 꺼졌다. 대신 청춘의 혈기가 공간을 데웠다. 얼마 후 레코드를 닦던 주인장이 새로운 음반을 턴테이블에 걸고 바늘을 올렸다. 누군가가 신청곡을 적었던 모양이다. 기타 반주와 하모니카 소리가 커다란 스피커에서 아름답게 울렸다.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는 날,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 밖을 나설 때….” 어수선함 속에서 나는 보았다. 단체의 젊은이들 중 모자를 눌러쓴 까까머리를. 함께 온 녀석들은 그의 모자를 벗기고 깎은 지 며칠 되지 않은 까칠한 머리를 쓰다듬고, 기어이 입술을 비비는 모습을. 내일 군대를 가는 모양이다. 잠시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청춘들은 모두 노래를 함께 부르고 있었다. 우리도 나지막이 노래를 중얼거렸다. 1절이 끝나자 2절이 흘러나 왔고 젊은이들의 목소리는 한층 커졌다. 노래와 울음이 섞여 김광석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무엇이 그렇게 서러울까. 김광석을 생각하면 나는 어느 공연에서 직접 보았던 모습보다 그날의 흐느낌이 더 또렷이 기억난다.

그때 그렇게 군대에 갔던 젊은이는 제대를 하고 서른 즈음이 되어 직장에 다닐 것이다. 요새는 ‘서른 즈음에’를 부를까. 가수 김광석은 한창때 세상을 떴다. 젊은 뮤지션의 죽음이 각인시킨 슬픈 기억은 1970년대 전성기를 구가했던 포크송의 영광을 다시 재현했다. 그 노래들이 우리 가슴속에 얼마나 선명한 자국을 새겼는지 그의 음성이 깨닫게 해주었다. 변화가 있다면 시대의 아픔을 이야기했던 노랫말이 이제 개인의 삶을 진솔하게 토로하는 정도다. 어린 시절 음악 하는 형들 사이에서 가만히 그들의 이야기와 노래를 들은 기억이 난다. 형들이 했던 이야기는 대체로 믿기 힘든 무용담 같은 것이어서 지금 생각해보면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형들이 불렀던 노래들은 또렷이 기억 나고 참 좋았다. 바로 포크송이다. 어쩌면 노래를 저렇게 잘 부를까. 나는 한없이 형들을 부러워했다.

주변에 이런 이야기를 하면, 이제는 낭만의 노래를 부르는 시절이 없다고 푸념하는 사람이 많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노래란 어느 때고 사라지는 법이 없다. 지금도 변함없이 기타 반주에 맞춰 누군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내 추억처럼 기억날 그 노래를.


글쓴이 김영훈은 〈생각의나무〉, 〈오픈하우스〉 편집주간을 지냈다. 문학과 예술 분야의 책을 기획·출판했으며, 현재 출판사 안나푸르나의 대표다.


국내 포크 명반 5

트윈폴리오

축제의 노래·고별(1970)


트윈폴리오는 국내 남성 포크듀엣의 출발점이다. 한국 포크사에 트윈폴리오의 존재감은 뚜렷하다. 송창식과 윤형주의 감미로운 화음이 폭발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포크송의 대중화에 기폭제 역할을 한 것. 1969년 12월,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트윈폴리오는 느닷없이 팀 해체를 선언했다. 지구레코드는 1970년 1월 번안곡 12곡이 수록된 <튄‧폴리오 리사이틀> 앨범을 발매했다.


양희은 1집

고운 노래 모음(1971)

아침 이슬’의 최초 버전이 수록된 양희은 1집은 한국 포크 클래식 명반이다. 그녀가 다운타운 최고의 여성 노래꾼으로 떠오른 1971년 6월, 김민기가 멜로디 파트를 맡고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이 12줄 스틸기타로 리듬을 맡아 데뷔 앨범 녹음에 들어갔다. 그리고 3개월 후 역사적인 음반이 세상에 나왔다. 당시 청년들에게 이 음반은 필수 소장 아이템이었다.


박인희 솔로 1집

모닥불(1972)

박인희는 인생과 사랑을 고운 멜로디와 시적 감성으로 노래한 대표적인 여성 포크싱어다. 혼성 듀엣 뚜아에무아의 짧은 활동 후 라디오방송 DJ로 활약하던 중 작사가 박건호로부터 ‘모닥불’과 ‘돌밥’의 가사를 받았다. 박건호가 그녀를 위해 작사한 노래들이었다. 그녀가 곡을 붙여 발표한 솔로 1집은 ‘모닥불’을 비롯해 ‘얼굴’ 등 10곡의 수록곡 중 여러 노래가 인기를 모았다.


이장희 3집

그건 너!(1973)

이장희 3집은 1973년 가요 음반 판매 베스트 5를 기록한 히트 음반이다. 1970년대 도시 젊은이의 생활을 솔직하고 정감 어리게 표현한 노래들은 파격적이었다. 특히 대화체의 직설적 어법의 가사를 담은 ‘그건 너’는 당시 젊은 세대의 마음을 대변했다. 발표 초기엔 별 반응이 없었지만 몇 달 후 큰 인기를 모은 이 음반은 대중적으로 가장 각광받은 한국 포크록의 명반이다.


한대수 1집

멀고 먼 길(1974)

1968년 귀국한 한국 모던포크의 창시자 한대수는 치렁치렁한 장발 때문에 공식 무대 활동이 금지되었다. 그러다 귀국 6년 만에 독집 제작 기회를 얻었다. 계약금 50만 원을 받고 발표한 ‘멀고 먼 길’의 오리지널 초반 재킷은 흑백사진 속에 표출된 삐딱한 자화상. 이는 유신시대에 불온해 보였고, 같은 해 10월 허름한 가방을 둘러메고 시골길을 걷는 뒷모습 사진으로 바꿔서 재발매했다.


[조선일보] 자료 제공 <대중가요 LP 가이드북>(안나푸르나)

‘한국 포크의 거장’ 한대수(66)가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한 사진작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유학생은 커녕 대학생조차 흔치 않았던 시절인 60년대, 한대수는 문화의 용광로 미국 뉴욕의 한복판을 돌아다니며 암실에서 필름을 매만지던 유일한 한국인 히피(Hippie)였다. 뉴욕에서 실시간으로 히피 문화를 받아들인 그의 음악은 가죽부츠를 구겨 신고 장발을 풀어헤친 외모만큼이나 당대 한국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후대에 이르러 그의 음악은 시대를 앞서도 너무 앞섰다는 상찬을 받았지만, 당대에 그는 도망치듯 다시 미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음악을 잠시 접은 그는 미국에서 사진작가로 20년의 세월을 보냈다. 사진작가 한대수는 대중이 잘 모르는 그의 또 다른 인생인 셈이다.

한대수가 다음 달 7~20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리서울갤러리’에서 마광수(63) 연세대 교수, 변우식(43) 팝아티스트와 함께 ‘꿈꾸는 삼총사’라는 타이틀로 전시회를 연다. 한대수가 자신의 사진을 전시하는 것은 지난 2000년 개인 사진전 ‘작은 평화’ 이후 14년 만이다. 지난 17일 오후 서울 신촌의 한 카페에서 한대수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 포크 음악의 전설’ 한대수가 다음 달 7~20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리서울갤러리’에서 마광수 연세대 교수, 변우식 팝아티스트와 함께

‘ 꿈꾸는 삼총사’ 라는 타이틀로 전시회를 연다. 지난 17일 오후 서울 신촌의 한 카페에서 한대수가 전시회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아래는 이번에 전시되는 사진 작품,

헤럴드경제 / 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한대수는 “60년대엔 미국 히피 문화를, 70년대 이후에는 한국의 거리와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왔다”며 “보관 중인 필름이 50만 컷이 넘는데, 가능하면 일흔이 넘기 전에 정리하고 싶다. 이번 전시회는 그 시작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온 나라가 경제 발전에 매달리며 “잘 살아보세”를 외치던 60년대, 한대수는 미국에서 공대와 경영학이 아닌 ‘돈이 되지 않는’ 전공으로 학업을 마친 괴짜였다. 사실 그의 첫 전공은 놀랍게도 수의학과였다.

한대수는 “조부가 수의학을 전공하면 목장을 주겠다고 제안해 뉴햄프셔주립대 수의학과에 진학했지만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다”며 “캠퍼스 근처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중 사진잡지 ‘파퓰러 포토그래피’, 패션잡지 ‘하퍼스’ ‘바자’ 등을 접하고 사진에 매력을 느껴 수의학과를 중퇴하고 1967년 사진 전문학교인 뉴욕 인스티튜트 오브 포토그래피로 진학했다”고 말했다.

한대수의 조부는 학비 지원을 중단했다. 고액의 학비를 감당하기 위해 그는 매일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새벽 1시까지 꼬박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에 매달려야 했지만, 사진에 대한 열정을 꺾지 않았다.

한대수는 “60년대는 음악, 미술 등 전 분야에 걸쳐 문화가 폭발적으로 융성한 르네상스와 같은 시대였고, 사진 역시 예술의 한 분야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며 “지금도 뉴욕에서 유명한 식당인 ‘세렌디피티 3’에서 일하며 비틀스의 존 레논과 오노 요코 부부,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팝스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등 수많은 명사들을 직접 볼 수 있었고, 이 같은 경험은 고스란히 내게 많은 예술적 영감을 줬다”고 회상했다.

한대수의 사진작가 경력은 화려하다. 그는 뉴욕의 ‘컬러 하우스’ ‘크로마 카피’ ‘스피드 그래픽스’ 등의 스튜디오에서 광고사진작가로 근무했다. 한때 그는 코리아헤럴드에서 사진부 기자로 일하며 (주)헤럴드와도 밀접한 인연을 맺은 바 있다. 또한 그는 세계적인 건축사진가 너대니얼 리버만(Nathaniel Lieberman) 스튜디오에서 일하며 베스트셀러 건축사진집 ‘맨해튼 라이트스케이프(Manhattan Lightscape)’에 참여하기도 했다.

한대수는 “예전에는 사진을 배우려면 렌즈와 카메라의 특성, 현상과 인화, 모델을 다루는 방법 등 다양한 것을 익혀야 했지만, 이제는 기술의 발전으로 누구나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는 세상”이라며 “필름회사 코닥은 우리에게 신과 같은 존재였지만 지난 2012년 파산 신청을 했다. 지금 이 나이에 나는 젊은이들을 쫓아갈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사진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마돈나와 엘비스 프레슬리가 아무리 많은 영화에 출연했어도 그들을 배우라고 부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며 “나 역시 뮤지션과 사진작가 둘 다 인정받겠다는 생각은 없다. 그저 열린 마음으로 작품을 느끼고 바라봐줬으면 하는 게 바람”이라고 덧붙였다.

한대수는 이번 사진전에 초심을 담은 15점의 작품을 전시한다. 그중 7점은 필름 카메라로 촬영했다. 한대수는 뉴욕으로 건너가 암실에서 직접 사진을 인화했다. 그는 오랜만에 뉴욕에서 맡는 현상액과 인화액의 냄새가 반가웠다며 사진의 역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역설했다.

한대수는 “사진은 순간이다. 지지고 볶고 찐빵을 만들든 말든 사진은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다”며 “1948년 영도다리, 2014년도 인사동 사진 한 장은 역사를 말해준다. 이는 어느 미술과 조각과 문학이 할 수 없는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사진은 미술을 모방하면 안 된다. 사진은 사진, 미술은 미술”이라며 “순간의 표정에는 그 사회의 분위기가 담겨 있다. 나는 이스탄불의 어린 소녀의 눈물, 모래내 시장의 할머니 손의 주름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한대수는 지난해 핵문제 해결의 중요성을 담은 싱글 ‘누크 미 베이비(Nuke Me Bady)’를 발표하고 최근 김광석 추모 앨범에 참여해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를 부르는 등 음악활동을 재개했다.

한대수는 “이제 주변에 내가 앨범을 만들겠다면 발 벗고 나서줄 실력파 음악인들이 너무 많아 고민이 즐겁다”며 “머지않은 시기에 새로운 정규 앨범으로 돌아올 생각”이라고 전했다.

“다른 장르로 인정받는 게 어렵다는 선입견 깨고 싶다”

국내 포크록의 대부인 한대수씨(66·사진)가 다음달 7~19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리서울 갤러리’에서 소설가 마광수씨(63), 팝아티스트 변우식씨(43)와 함께 ‘꿈꾸는 삼총사’라는 작품전을 선보인다. 10일 오후 서울 신촌의 한 카페에서 만난 한대수씨는 “내가 사진 작품을 전시하는 것은 2000년 개인 사진전 ‘작은 평화’ 이후 14년 만”이라고 말했다.

‘꿈꾸는 삼총사’에서 가수인 한씨는 사진 15점을, 소설가인 마씨는 그림 9점을, 비보이 등의 경력을 지닌 변씨는 팝아트 작품 7~10여점을 각각 전시한다. 각기 달리 꿔온 꿈의 단면을 이번 전시회를 통해 소개하는 방식이다. 한씨는 “7년 전 마 교수의 그림전에 우연히 갔다가 그의 작품세계에 놀랐던 적이 있다”며 “최근 마 교수, 변우식씨와 만나 서로 다른 이상을 보여주는 전시회를 해보자고 해 이번 전시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씨는 고독이 주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사진 작품을 선별해 전시할 예정이다. 아내의 누드 사진 등도 포함돼 있다.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않았을 뿐, 음악을 하면서도 사진 작업을 꾸준히 했습니다. 사진과 음악은 통하는 것이 많거든요. 그림과 음악도 마찬가지고요.”




한대수씨는 이날 인터뷰 자리에도 오래된 카메라를 목에 걸고 있었다. 얼마 전 남대문에서 건진 1948년식 수동 필름 카메라였다. 한씨는 1975년 자신의 2집 노래가 금지곡으로 지정돼 활동이 막히면서 10여년간 미국에서 머물렀는데, 그때도 사진 스튜디오에서 작가로 생업을 이었다고 한다.

한씨는 향후 ‘사진작가’의 면모를 적극 보여줄 계획이다. 사실 한씨는 1967년 미국 뉴욕의 사진 전문학교 ‘인스티튜트 오브 포토그래피’를 나왔다. 1974년 귀국해 코리아헤럴드에서 사진기자를 하기도 했다. 그는 “1960년대부터 찍어 집에 보관해오고 있는 것이 50만장에 이른다”며 “1960년대 미국 히피 문화의 순간을 찍어두었고, 1970년대 이후부터는 한국의 변천을 꼼꼼히 담아왔다”고 소개했다.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불리던 시절의 모습이나, 앳된 스무살의 송창식과 윤형주씨, 시대별 거리와 사람들의 편린 등 남겨둘 만한 가치가 있는 순간도 기록했다.


그는 “지난달 갑작스러운 폐렴으로 병원에 실려가 4일간 입원을 한 적이 있는데, 사람이 죽는 게 간단할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면서 “늦지 않았을 때 간직해온 사진을 정리하고 내보여야 한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앞으로 그는 소장 작품들을 책으로 출간하거나, 특정한 기획전을 통해 소개할 계획이다.

한씨는 “엘비스 프레슬리는 수십여편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사람들은 모두 가수로만 기억하고 있다”며 “서로 다른 장르로 인정받는 것이 어렵다는 그 선입견을 한번 깨보고 싶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 강수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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