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공간을 채우고 장악하는 힘이 있다. 통기타 한 대만으로도 청중을 압도하고 마음속에 뭉친 응어리를 풀어 공감대를 끌어낼 수 있는 것. 우리가 흔히 포크라고 말하는 이 장르의 음악은 사람과 악기가 한 덩어리 되어 인간을 설득하고 보살핀다.


어느 해 늦은 밤 인사동에서

송년회. 나는 뒤늦게 술자리로 향하고 있었다. 저녁이 깊어지자 비는 눈으로 변했다. 젖은 바닥에 엉겨붙은 눈은 땅에 닿자마자 녹아 시커먼 구정물이 되었다. 자정이 멀었는데 사람들은 비틀거렸다. 그 속을 한기를 느끼며 한참 걸었다.

외투에 묻은 눈을 털며 술자리에 합류했을 때 이미 몇몇은 취해 있었다. 술자리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이런 분위기였다면 일을 핑계로 합류하지 않는 게 좋았다. 지나간 시대와 당대의 어두운 주제들이 화제였다. 짧지만 날카로운 대화가 오갔다. 전혀 대화라고 할 수 없었다. 각자 자기가 할 말만 내뱉고 있었다. 듣는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는 술자리에 머리를 대고 졸기 시작했고, 아예 시비조로 상대를 공격하기도 했다. 나는 옆 테이블에 이 소란스러움이 전해지는 게 부끄러웠다. 눈치가 보였다. ‘이제 좀 그만하지’라는 말이 목젖까지 차올랐다. 그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잠에서 일어난 일행 중 하나가 어디서 기타를 들고 와서 노래를 불렀다. 처음에는 ‘도대체 무슨 수작인가’라며 자리를 털고 일어설 뻔했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김민기가 만들고 양희은이 불렀던 노래를 기타 반주에 맞춰 부르기 시작했다. 두 음정쯤 낮은 목소리였다. 노래는 금방 술집을 채웠다. 삿대질이 오갔던 친구들이나, 나를 염려하게 만들었던 옆 테이블에 앉았던 초면의 사람들, 어디선가 등장한 술집 사장까지 모두 함께 부르고 있었다. 지나간 일에 대한 과장벽인지 몰라도 크리스마스 기적 같은 사건이 벌어졌다. 노래는 몇 곡 더 불려졌다. 기타나 노래 솜씨는 형편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이 모두 함께 불렀다. 누구도 합창을 권하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이윽고 불편했던 자리는 사라졌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두들 발그레한 얼굴로 정겨운 이야기꽃을 피웠다. 노래는 그랬다.


2000년대 중반 대학가 뒷골목에서

골목만 들어서면 10m라고 했지만 구불거리는 변두리 뒷골목은 도무지 목적지를 찾기 힘들었다. 전화를 몇 번 하고 겨우 지하에 있는 카페를 찾았다. 왜 이렇게 길을 설명하지 못하냐고 푸념하며 자리에 앉았다. 내부의 음악 소리는 시끄러웠다. 테이블은 대략 7개, 별로 춥지 않았는데 부탄가스를 사용하는 난로 2개 중 하나가 켜져 있었다. 음반이 잔뜩 진열된 바에는 한 남자가 레코드를 닦아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있었다.

두서없는 이야기를 한참 했다. 누군가는 집을 샀고, 대기업에서 광속으로 승진했다고 했다. 광속으로 승진한 친구는 실력이 전혀 없지만 알고 보니 오너의 집안이다. 뭐 그런 식이었다. 누군가의 눈빛엔 부러움이 묻어났다. 흉보는 것도 한계에 이르자 지나간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가 만난 그때가 제일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IMF가 왔다”고 하자 친구들은 “그랬지” 하며 실없이 웃었다. 그때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겠다던 녀석들은 IMF가 터지자 욕을 해가며 악착같이 살아 있었다. 얼마나 순배가 돌았을까.

시커멓고 젊은 녀석들이 몰려와 지하 카페를 채웠다. 훼방꾼의 등장이었다. 빨갛게 빛나던 난로는 꺼졌다. 대신 청춘의 혈기가 공간을 데웠다. 얼마 후 레코드를 닦던 주인장이 새로운 음반을 턴테이블에 걸고 바늘을 올렸다. 누군가가 신청곡을 적었던 모양이다. 기타 반주와 하모니카 소리가 커다란 스피커에서 아름답게 울렸다.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는 날,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 밖을 나설 때….” 어수선함 속에서 나는 보았다. 단체의 젊은이들 중 모자를 눌러쓴 까까머리를. 함께 온 녀석들은 그의 모자를 벗기고 깎은 지 며칠 되지 않은 까칠한 머리를 쓰다듬고, 기어이 입술을 비비는 모습을. 내일 군대를 가는 모양이다. 잠시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청춘들은 모두 노래를 함께 부르고 있었다. 우리도 나지막이 노래를 중얼거렸다. 1절이 끝나자 2절이 흘러나 왔고 젊은이들의 목소리는 한층 커졌다. 노래와 울음이 섞여 김광석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무엇이 그렇게 서러울까. 김광석을 생각하면 나는 어느 공연에서 직접 보았던 모습보다 그날의 흐느낌이 더 또렷이 기억난다.

그때 그렇게 군대에 갔던 젊은이는 제대를 하고 서른 즈음이 되어 직장에 다닐 것이다. 요새는 ‘서른 즈음에’를 부를까. 가수 김광석은 한창때 세상을 떴다. 젊은 뮤지션의 죽음이 각인시킨 슬픈 기억은 1970년대 전성기를 구가했던 포크송의 영광을 다시 재현했다. 그 노래들이 우리 가슴속에 얼마나 선명한 자국을 새겼는지 그의 음성이 깨닫게 해주었다. 변화가 있다면 시대의 아픔을 이야기했던 노랫말이 이제 개인의 삶을 진솔하게 토로하는 정도다. 어린 시절 음악 하는 형들 사이에서 가만히 그들의 이야기와 노래를 들은 기억이 난다. 형들이 했던 이야기는 대체로 믿기 힘든 무용담 같은 것이어서 지금 생각해보면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형들이 불렀던 노래들은 또렷이 기억 나고 참 좋았다. 바로 포크송이다. 어쩌면 노래를 저렇게 잘 부를까. 나는 한없이 형들을 부러워했다.

주변에 이런 이야기를 하면, 이제는 낭만의 노래를 부르는 시절이 없다고 푸념하는 사람이 많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노래란 어느 때고 사라지는 법이 없다. 지금도 변함없이 기타 반주에 맞춰 누군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내 추억처럼 기억날 그 노래를.


글쓴이 김영훈은 〈생각의나무〉, 〈오픈하우스〉 편집주간을 지냈다. 문학과 예술 분야의 책을 기획·출판했으며, 현재 출판사 안나푸르나의 대표다.


국내 포크 명반 5

트윈폴리오

축제의 노래·고별(1970)


트윈폴리오는 국내 남성 포크듀엣의 출발점이다. 한국 포크사에 트윈폴리오의 존재감은 뚜렷하다. 송창식과 윤형주의 감미로운 화음이 폭발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포크송의 대중화에 기폭제 역할을 한 것. 1969년 12월,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트윈폴리오는 느닷없이 팀 해체를 선언했다. 지구레코드는 1970년 1월 번안곡 12곡이 수록된 <튄‧폴리오 리사이틀> 앨범을 발매했다.


양희은 1집

고운 노래 모음(1971)

아침 이슬’의 최초 버전이 수록된 양희은 1집은 한국 포크 클래식 명반이다. 그녀가 다운타운 최고의 여성 노래꾼으로 떠오른 1971년 6월, 김민기가 멜로디 파트를 맡고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이 12줄 스틸기타로 리듬을 맡아 데뷔 앨범 녹음에 들어갔다. 그리고 3개월 후 역사적인 음반이 세상에 나왔다. 당시 청년들에게 이 음반은 필수 소장 아이템이었다.


박인희 솔로 1집

모닥불(1972)

박인희는 인생과 사랑을 고운 멜로디와 시적 감성으로 노래한 대표적인 여성 포크싱어다. 혼성 듀엣 뚜아에무아의 짧은 활동 후 라디오방송 DJ로 활약하던 중 작사가 박건호로부터 ‘모닥불’과 ‘돌밥’의 가사를 받았다. 박건호가 그녀를 위해 작사한 노래들이었다. 그녀가 곡을 붙여 발표한 솔로 1집은 ‘모닥불’을 비롯해 ‘얼굴’ 등 10곡의 수록곡 중 여러 노래가 인기를 모았다.


이장희 3집

그건 너!(1973)

이장희 3집은 1973년 가요 음반 판매 베스트 5를 기록한 히트 음반이다. 1970년대 도시 젊은이의 생활을 솔직하고 정감 어리게 표현한 노래들은 파격적이었다. 특히 대화체의 직설적 어법의 가사를 담은 ‘그건 너’는 당시 젊은 세대의 마음을 대변했다. 발표 초기엔 별 반응이 없었지만 몇 달 후 큰 인기를 모은 이 음반은 대중적으로 가장 각광받은 한국 포크록의 명반이다.


한대수 1집

멀고 먼 길(1974)

1968년 귀국한 한국 모던포크의 창시자 한대수는 치렁치렁한 장발 때문에 공식 무대 활동이 금지되었다. 그러다 귀국 6년 만에 독집 제작 기회를 얻었다. 계약금 50만 원을 받고 발표한 ‘멀고 먼 길’의 오리지널 초반 재킷은 흑백사진 속에 표출된 삐딱한 자화상. 이는 유신시대에 불온해 보였고, 같은 해 10월 허름한 가방을 둘러메고 시골길을 걷는 뒷모습 사진으로 바꿔서 재발매했다.


[조선일보] 자료 제공 <대중가요 LP 가이드북>(안나푸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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