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2019년 ‘한국민예총’ 정기대의원 총회가 열렸다.
난, 대의원이 아니지만, 정영신씨로 부터 총회기록을 도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정기총회의 동영상을 찍기 위해 삼각대를 갖다달라는 것이다.
내분에 휩싸인 ‘한국민예총“을 걱정하던 차에, 잘 되었다싶었다.
그 날 청계장장에서 골목 줄다리기가 있었으나, 총회장에 눌러 앉았다.

 

전임 사무총장과 그를 지지하는 대의원들은 대부분 나오지 않았다.
박불똥이사장을 비롯하여 유순웅, 이철수, 고승하, 장순향, 강정효, 안종복, 김영호, 박경렬, 이성호,

제정화, 손병휘, 하지숙, 황경하, 이대우, 양기환, 김윤기, 박세라. 장경호씨 등 50여명이 참석했는데,

인천, 광주, 강원지역 대의원들이 빠졌으나, 정족수는 충분히 채웠다.

 

양기환 사무총장의 사회로 박불똥 이사장이 회의를 진행했다.

 

회의록을 살펴보니 115쪽이나 되는 방대한 자료인데,

대부분이 전임 사무총장과의 내분에 따른 경과보고로 채워져 있었다.
그 내용을 일일이 설명하다 보니, 대의원의 반발도 따랐다.
대략은 알고 있는 사안이라,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두 차례나 휴식시간을 가져가며 진행되었지만, 중요한 사업계획이 빠져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의원의 항의도 따랐다.

 

강성원부이사장의 사의가 받아지며, 장순향씨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고,
일부사안은 이사회에 위임되기도 했다. 시간이 지체되어 대의원이 하나 둘 빠져나갔다.

 

총회를 끝내고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보니, 다들 가고 없었다

 

내가 바란 것은 잘잘못에 대한 과정보다 화합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

인사동 ‘풍류사랑’으로 가자며 택시를 잡았지만, 빠져버렸다.

 

이제, 원로들이 나서서 좀 중재해 주었으면 좋겠다.
나라도 두 쪽, 정치도 두 쪽, 예술단체도 두 쪽, 민예총도 두 쪽,
이제 나누어지는, 두 쪽은 진절머리 난다.


사진, 글 / 조문호

 

 

 

 

 

 

 

 

 

 

 

 







동자동에서 일하는데, 정영신씨가 차 끌고 오라는 전화를 했다. 

총알같이 달려갔더니, 민예총사무실에서 인수 인계하던 서인형, 최석태씨도 함께 내려왔다.

일 마무리하며 뒤풀이로 술집을 가는 모양인데, 가다 가다 녹번동까지 갔다.

차 버려두고, 술 한 잔 하자는 배려였는데, 덕분에 양 갈비 집에서 한 잔했다.



    

 

매번 지나치던 집이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인데, 정성스레 구워 준 양고기와 중국술 연태주가 찰떡궁합이었다.

과분한 술상에 기분 좋게 취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공모전 사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사업기획의 베테랑인 서인형씨와 추진력 있는 미술평론가 최석태씨, 민예총사진단체 구성을 위해 고민하는

정영신씨가 모인 자리라 대략의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동안 사진 활동을 해 오는 동안 제일 진절머리를 낸 것이 사진공모전이었다.

공모전이란 상을 주기위한 것이 아니라 인재를 발굴하는 데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대개의 공모전들이 주객이 전도되어 왔.

그 상을 놓고 벌이는 주최 측이나 심사위원들이 벌이는 구역질나는 형태를 생각하니, 말도 꺼내고 싶지 않았다.

취기도 올랐지만, 사라지는 게 덕일 듯싶어 먼저 일어났다




    

그런데, 다음 날 생각하니, 공모전의 악몽을 다시 끄집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난 과오를 발판으로 새로운 신인 등용문을 만들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나의 경험담부터 하나하나 짚어가며 방법을 찾아보자.



 


내가 처음 사진을 시작할 무렵인 70년대에도 사진공모전이 대세였다.

주로 '사협'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인데, 협회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에서 점수를 축척해야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사진 한 장으로 작가의 능력을 판단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사진이란 우연성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협회에 가입해야 작가로 인정받는 줄 알았으니, 공모전에 매달린 것이다.

공모전이란 심사위원들의 눈에 들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작업에는 해악이 될 뿐이다.

연출이던 조작이던 튀는 이미지만 만들어 내면 백발백중이다.



국전에서 분리되어 개최된 첫 '한사전(1981년)에서 대상을 수상한 이은주씨의 '환회'


 

그 땐 전국 지부에서 공모전이 있었으니, 점수 채우기는 쉬웠다.

그러나, 준회원은 최초 입선에서 2년이 경과되어야 했고, 정회원은 4년이 경과되어야 가능했다.

세월만 지나면 자동적으로 입회 할 수 있었으나, 문제는 공모전이란 것이 중독성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상 따먹는 재미인 셈인데, 자신의 작업은 뒷전이고, 심사위원들 비위 맞추는 사진에 골몰할 수밖에 없다.


그 심각한 폐해를 깨달은 것은 80년대 초반이었다.

그러던 중 81년도 무렵, 동아일보 신문을 보고 무릎을 친 적이 있었다.



제2회 '한사전'(1983년) 대상 수상작인 고) 양은환씨의 '나들이'

몽타쥬에 의해 만든 작품으로 연출냄새가 나는데다 화면 배분도 엉성하다.


 

신문에 동아미술제공모 수상작이 게재되었는데, 대상에 차용부씨의 기지촌의 이후가 발표되어 있었다.

이 또한 공모전이긴 하지만, 방법이 달랐다.

일단 새로운 형상성이란 기치를 내걸었고, 이년 전에 공모할 주제를 미리 공고한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 구미를 당기는 것은 한 장의 사진이 아니라 연작사진으로 출품하는데다

85년도 공모작의 주제가 직업인으로 발표되어 있었다.

당시는 사창가인 전농동 작업을 준비하며 주위를 맴돌아 다닐 때인데, 그 작업에 추진력이 붙게 된 것이다.

운이 좋아 다섯 장의 사진으로 조를 맞춘 홍등가라는 사진을 출품했는데,

85년 동아미술제 대상으로 뽑힌 것이다.



1985년 '동아미술제' 대상 수상작인 조문호의 '홍등가'와 '동아미술상'을 수상한 김희룡씨의 '풍어제'



빈 집에 소 들어온다는 속담처럼, 상금에다 작품 매입대금까지 들어왔으니 횡재한 것이다.

청량리 588에 입주할 돈이 생겼으니, 도랑치고 게 잡은 셈이었다.

상금이란 바로 이처럼 사진가의 작업경비로 사용되어져야 한다.

그런데, '동아미술제'도 운영위원이나 심사위원에 의해 취지가 흔들맇 수밖에 없으니,

세월 따라 변질되다 결국 없어지고 말더라.



제9회 한사전(1990년) 대상 수상작인 최주억씨의 '북소리'

 


그 뒤 이름도 거룩한 한국사진작가협회에 편집장으로 일할 기회가 생겼다.

호구지책으로 똥 판에 들어갔지만, 이 기회에 사협이란 회보지라도 제대로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런데, 사협이란 조직의 일원으로 일하다 보니,

그 곳에서 진행되는 공모전의 전모를 파악할 수밖에 없는데, 웃기는 짜장면이었다.

짜고 치는 고스톱으로, 돈 놓고 돈 먹는 장삿속이었다.



한 때 박근혜가 이사장이었던 '정수문화재단'에서 주최한 제11회 '대한민국 정수사진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이종두씨의 '저산 팔읍 길쌈놀이'다

이 사진이 대통령상이라는데, 누가 뽑았는지 한심한 생각이 든다.


 

그 뒤 87년도 무렵 민주항쟁개인전을 하려니, 이사장이란 자가 전시를 말려,

기회다 싶어 사직서를 냈는데, 지금 생각해도 잘 했다 싶다.

아니나 다를까 한 참 후에는 국전 급에 해당되는 한사전공모전의 실태가 세상에 까발려 진 것이다.

심사위원들이 심사 전에 여관방에 모여 입을 맞추는 추태가 들통 난 것이다.

결국 농간을 부렸던 사무국장이 구속되며 사진인들 얼굴에 똥칠 시켰다.


만 명이 넘는 거대 단체로 성장한 원인도 바로 사진공모전이 효자노릇을 했으나, 사람은 많으나 사진이 없다

그 것을 본보기로 좋은 공모전을 만드는데, 참고할 일은 되겠다고 생각되었다.



 


그 뒤 아들 조햇님이가 부산경성대 사진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자식 등록금을 마련 할 수 없어 전전긍긍 할 수밖에 없었는데, 마침 삼성항공' 카메라 사업부에서 콜이 온 것이다.

삼성카메라클럽이란 전국적인 단체를 만드는데, 사무국장직과 삼성포토패밀리라는 계간지 편집장을 맡아 달라는 것이다.

얼씨구나!’하며 계약직으로 들어가 자식이 졸업할 4년 동안 일한 것이다.



95년 제1회 한국사진대전 연작부문에 우수작으로 선정된 이강수씨의 "서울' (20매 중 4매)


 

삼성카메라클럽에서 공모전을 만들어 신인을 발굴할 수 있는 창구를 만들게 되었다.

물론 아마추어들의 모임이라 그들의 입맛에 맞는 단사진 공모 부문도 있었지만,

연작사진부문을 추가한1한국사진대전을  95년도에 공모한 것이다.

지금은 작고하신 홍순태선생과 육명심, 한정식선생께서 운영과 심사를 하셨는데,

심사결과 연작부문의 ‘95한국사진가상우수작으로 송미경, 이강수, 장석주씨 세 사람이 뽑힌 것이다.

다 젊은 신예작가로 개성이 뚜렷했다.




95년 제1회 한국사진대전 연작부문에 우수작으로 선정된 장석주씨의 "명진원 사람들' (20매 중 4매)


 

이강수씨는 서울을 주제로 도시의 그늘진 풍경을 보여주었고,

장석주씨의 명진원 사람들은 나환자촌의 삶을 기록한 작품이었다.

그런데, 제일 눈에 뜨이는 것은 송미경씨의 가리봉의 아이들이었다.

젊은 여성작가였는데, 공단 여공들의 매춘을 다룬 소재로 충격적이었다.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최우수작에 선정되었으나, 삼성 측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 당시 담당 전무가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다며 입상을 취소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95년 제1회 한국사진대전 연작부문의 수상자들


 

예사 일이 아니었다.

사무국장직을 그만두고 문제 삼던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심사위원장이었던 한정식선생께 전화드려 부탁한 것이다.

결국 상은 주지만, 전시는 안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고,

원하는 사람만 입상작을 볼 수 있도록, 전시장에 입상작 사진과 면장갑을 준비한 것이다.,




1996년 제2회 한국사진대전 연작부문의 최우수작 조임환씨의 '이농지대'(20매중 3매)


 

그 다음해인 96년 제2회 한국사진대전 연작사진 부문의 수상자는

최우수상에 조임환씨의 이농시대가 뽑혔고,

우수상에는 성남훈씨의 사라예보-전쟁이후와 신 옥씨의 초충도가 결정된 것이다.

첫 해에는 완전한 신인들의 출현이었지만, 두 번째는 어느 정도 알려진 작가의 출현이 달라진 점이나

성공적인 공모전으로 생각할 수 있다.




1996년 제2회 한국사진대전 연작부문의 우수작 성남훈씨의 '사라예보-전쟁이후'(20매중 3매)


 

그러나 다른 입상작은 작품집에 남아 있으나 문제의 작품인 송미경씨의 가리봉의 아이들은 자료도 남기지 못한 것이다.

송미경씨의 그 이후 활동조차 알 수 없어 더 안타까웠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 작가를 수소문해, 그 때 사진들을 재조명하고 사진사에 남기는 것도 숙제로 생각한다.



1996년 제2회 한국사진대전 연작부문의 우수작 신옥씨의 '초충도'(20매중 3매)


 

그러나 한국사진대전도 그 것으로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삼성항공사장이 바뀌며 강남 삼성동에 있던 삼성포토스페이스를 없앤다는 것이다.



'한국현대사진가회' 첫 회장이신 고,홍순태선생과 김한용선생의 현판식 장면



반 협박에 가까운 비장의 카드를 꺼내 얻어낸 것이 충무로 세기양행2층에 마련한

한국현대사진가회사무실 임대보증금과 운영비 일부 보조였다.



돌아가신 후 '최민식사진상'으로 구설수에 오른  최민식선생의 생전 모습

 


그 이후에는 공모전에 관련될 일이 없었는데, 뒤늦게 최민식사진상의 문제점이 드러난 것이다.

동강사진상이 작업 성취도에 따라 작가를 선정하는 상이라면,

최민식 사진상은 주최 측의 시상 목적대로 사람을 대상으로 작업한 다큐사진가를 뽑는다고 했으나,

그 또한 성취도 위주의 동강사진상이나 마찬가지였다.



2회 최민식사진상 부정심사 의혹을 일으킨 최광호씨의 '천제'



형식만 포토폴리오를 제출하는 공모 형식이었지, 끼리 끼리 노 잔치였다.

첫해는 이갑철씨가 받아 그냥 넘어갔으나, 두 번째는 최광호씨가 받아 결국 사단이 난 것이다.

부산의 이광수교수 문제 재기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는데, 결국 그 공모전도 두 번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공모전은 절대 운영위원의 개인적인 이익이나 사심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만 재확인시켜 준 셈이다.



2회 최민식사진상 부정심사 의혹 문제를 매듭지으려는 자리가 온빛사진가회의 주선으로 영상미디어센터에서

열렸다  석재현씨의 사회아래, 이 문제의 핵심이었던 이상일 당시 운영위원장과 정주하 심사위원장,

그리고 이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나선 이광수 사진비평가와 눈빛출판사이규상대표가 패널로 자리했다,

    

 

오랜 세월 우리나라 사진상들이 잘못된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해,

사진인들에게 많은 빈축을 사왔기에, 공모 형식의 사진상이 더 조심스러운 것이다.

 

솔직히 이야기하겠다.

이젠 중견작가들을 위한 포상식의 작가주의 사진상은 그만두자. 첫번 째로 '동강사진상'부터 바뀌어야 한다.

뒷자리로 물러 난 사진가보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활동하는 유능한 신진들을 발굴하는데

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최민식사진상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는 유명 사진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가난한 최광호씨를 지지했다”고 말하는 이상일 운영위원장


 

많은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어 고민해야겠지만, 개인적인 제안을 하나 하겠다.

기존의 공모 형식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개인 전시회를 평가해 상을 주자는 것이다.

일단 수순을 밟은 작가가 민예총에 등록하여 개인전을 열면

여러 명의 미술평론가들과 전문가들이 비밀리에 전시를 돌아 본 후,

일 년 동안의 개인전을 모아 총평가하여 우수한 신인을 발굴하자는 것이다.

수상자에 대한 수상작 전시는 물론 전시를 둘러 본 평론가들 모두가 작품을 평론하는 등

제대로 된 작품집까지 만들어 문제작가로 부각시키자는 것이다.



제1회 한국사진대전 시상식과 전시개막식 장면


 

그 세부적인 운영은 서인형씨와 미술평론가인 최석태씨를 비롯한

운영위원회를 구성하여 마련하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 날 술자리에서 드리지 못한 의견을 이 글로 대신함을 양해 바란다.

아무튼,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란다.

 

사진, / 조문호




제2회 한국사진대전 시상식과 전시개막식 장면
































 

 





새 해를 맞아 제일 먼저 생각나는 말이 시원섭섭하다는 말이다.
오랜 세월 병석에서 고생한 정영신씨 모친께서 지난 년 말 임종하셨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영신씨가 병원비 마련하려 여러 일을 해 왔으나, 이제 한 숨 돌린 것이다.






먼저 정영신씨의 ‘민예총’사무국 상근 직부터 내 놓고, 비상근 봉사직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4년간 돈 한 푼 받지 않고 일해 준 ‘서울문화투데이’도 새해부터 손을 떼었다. 
미진했던 사진 작업에 매달리기 위해서다.






지난 15일 오후 5시 무렵, 계동에 있는 '한국민예총'사무국에 들렸다.

업무 인계하러 갔던 정영신씨가 짐이 있다기에 차를 끌고 간 것이다.
사무실에는 서인형 국장이 새 사무처장으로 임명된 김윤기씨에게 업무를 인수인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영신씨는 '민예총'기금마련전 할 무렵부터 사의 뜻을 밝혔지만, 서인형국장은 왜 그만두는가?

조직 내부 일이라 언급할 수 없으나, 이사장이 큰 실수 한 것 같았다.






저녁 먹고 가자는 정영신씨 말에 끌려 '민예총‘ 사무실 맞은편에 있는 ’田多‘식당에 갔다.
처음 가본 식당인데, 어머니와 두 딸이 운영하는 가게였다.

모녀가 정답게 일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그나저나 차를 끌고 갔으니,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나 혼자 ‘오늘의 도시락’을 시키고, 서인형, 김윤기, 정영신씨는 모듬전을 시켜 막걸리를 마셨다.
마침, ‘민예총’ 기금마련전을 기획한 최석태씨와 연락 된 것 같았다.

좀 있으니, 최석태씨와 여수에서 활동하는 최병수씨가 함께 왔더라.





이한열열사 대형걸개 그림으로 알려진 최병수는 온 몸을 민중미술에 던진 작가다. 

그는 작가이기 이전에 안 해 본 일이 없는 잡기에 능한 사람이다.

노동판의 잡부에서 선반공, 용접공, 보일러공, 목수 등의 갖가지 직업으로 기능을 닦았는데,

그 장인적인 기질을 무기로 그림, 판화, 조각, 설치미술 등 다양한 예술 영역으로 확장시켜,

사회 실천적 창작활동에 두각을 드러내었다. 





반가운 분을 보니 술 생각이 더 간절했지만, 보고도 못 먹는 장떡이었다.
긴 시간 동안 막걸리 반잔으로 입만 축이려니 죽을 맛이었다.






많은 이야기들이 나왔는데, 그 중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가 있었다.
오래 전 최병수씨 아내가 중병에 걸렸을 때, 귀똥 찬 묘약으로 완쾌한 적이 있단다.
신학철선생 부인 강고은씨가 힘겹게 투병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최병수씨가 그 약을 권했는데,
서서히 효험이 나타난다니,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으나, 최병수씨가 단골집에서 한 잔만 더 하자며 손을 끌었다.
차마 거절 못해 따라 나섰는데, 소주 한 잔으로 버티야하는 지루한 시간이 다시 시작되었다.





최석태씨가 오래전 중앙일보 미술잡지 기자로 일할 때, 최병수씨를 취재한 이야기도 나왔다.

그 때 헤드라인에 쓴 말이 관료작가라 했다는데, 김윤기씨가 부연설명을 했다.

신촌 그림사건으로 경찰서에서 조서 받을 때 본인은 화가가 아니라고 말했으나,
경찰관이 화가라고 못을 박아 졸지에 관에서 만들어 준 화가가 되었다는 뜻이란다.






화제가 비아그라로 옮겨갔다.

서인형씨 말에 의하면, 요즘 한약방이 안 되는 이유가 비아그라 때문이라 했다.
전에는 집사람들이 남편 양기 돋우기 위해 보약을 지어 먹였으나,
요즘은 비아그라‘ 때문에 보약 먹일 필요가 없어졌단다.
웃어 넘기기에는 좀 거시기한 이야기였다.





몸은 술자리에 있었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앞으로 놀 일 궁리하느라 바빴다.

정영신씨는 장터에서 잘 놀겠지만, 나도 동자동에서 재미있게 놀아야 할 것 아닌가.

이제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둘만 먼저 일어나, 녹번동에서 축배를 들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6일은 ‘민예총’기금마련전이 끝나는 날이라, 오후3시부터 인사동에 나갔다.
전시장 나오는 분들과 시무식을 겸하여 술 한 잔 할 생각으로 벼르고 벼른 날이었다.






카메라를 꺼내 거리 스케치를 하는데, 누가 허리를 쿡 찔렀다.
돌아보니, 까딱이였다.






반갑기도, 징그럽기도 하지만, 이 친구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사는 이야기를 듣고싶어 식당에 끌고 가려는데, 손사래 친다.
30여년을 인사동에서 만났지만, 이름까지 가르쳐 주지 않았으니,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다시 한 번 끌어당기니, 한사코 뿌리쳤다.






“어허! 와 안하던 짓을 하노.
니 꼬라지나 내 꼬라지보고, 받아 줄 집이 어딧노? 씰대 없는 짓 하지 말고 돈이나 내라”
“다른 사람은 통행료 안 받고, 와 내한테만 받노?”라고 받아 쳤더니,
오늘은 통행료가 아니라 복채란다.






이 친구는 아는 사람만 손 벌리지, 모르는 사람은 절대 구걸하지 않는다.
요즘의 인사동에서 아는 사람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길거다.
그래도 잊지 않고 인사동을 찾아주니, 고마웠다.
까딱이가 살아있다는 존재감만으로도 아직 인사동은 죽지 않았다.
비상금만 남겨두고, 주머니를 털었다.






추운 날이라 거리를 오가는 사람이 모두 이불을 감고 다니는 것 같았다.
전시장이 훤히 보이는 ‘이즈’나 ‘인사아트’만 사람이 바글거리지,
괜찮은 전시가 열리는 ‘회수갤러리’를 비롯한 여타 갤러리는 파리만 날렸다.
전시 정보도 없지만, 날씨도 추운데다 눈에 보여 그냥 들어가 보는 거다.






거리 가판대에 나와 있는 상품들도 조잡하기 그지없었다.
외국관광객이 좋아하는지 모르지만, 모자 디자인도 천편일률적인데다,
적어놓은 글자들도 웃기는 짜장면이었다.
대장, 대박, 사장, 회장, 왕 등 얼굴 간지러운 글만 잔뜩 적혀 있었다.
인사동 수준이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가?





“민족예술, 다시 날아오르다”는 전시가 열리는 ‘관훈갤러리'로 갔다.
서인형, 이재일, 정영신씨가 탁자 주위로 둘러앉았고,
최석태씨는 관람객에게 열심히 작품설명을 하고 있었다. 
약을 잘 팔았는지, 최병수씨 작품을 두 점이나 팔았단다.






뒤 따라 온 공윤희씨는 술자리를 궁리하였고, 술 마시자는 유진오씨 전화도 있었다.
'민예총' 서인형국장의 동창 홍미숙씨가 오셔서 전시작을 돌아본 후,
고맙게도 ‘민예총’CMS 한 구좌를 적어주셨다.


조각가 이원석씨를 비롯하여 작품을 철수할 분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보름 동안의 전시결산은 절반의 성공이었다.
기획자 최석태씨의 말에 의하면 팔리지 않은 작품은 작가들에게 먼저 돌려드리지만,
관심 있는 컬렉터들을 상대로 두고두고 판매할 것이라고 했다.
지방 보낼 작품들만 포장해 차에 싣는데도, 시간이 제법 걸렸다.






나머지는 화요일에 마무리할 작정으로 청국장 집에 저녁 먹으러 갔더니,
장경호씨가 먼저 자리잡고 있었다..
배가고파 허급지급 밥부터 먹어버려, 술 들어 갈 자리가 없었다.
최석태씨가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귀가 어두워 절반도 못 알아들었다.






이것저것 할 일이 많아, 혼자 생각에 빠져 있었다.
보름 전부터 시작된 전시에다 집안 초상까지 나, 내 일에 너무 소홀한 것 같았다.
다음 주부터 동자동 사람들과 어울려, 신나는 2019년을 만들어 갈 작정이다.

화이팅!



사진, 글 / 조문호















































'한국민예총' 기금마련전이 지난 19일부터 오는 1월6일까지

인사동 '관훈갤러리'에서 많은 분들의 관심 속에 열리고 있다.



신학철작



미술평론가 최석태씨가 기획한  '민족예술, 다시 날아오르다'展은 민중미술의 기라성같은 작가들이 대거 참여한 전시다..


이미 세상을 떠난 문영태, 김영수, 박생광, 김구한선생을 비롯하여 신학철, 임옥상, 황재형, 김정헌, 박재동, 김진열, 강요배, 이철수,

이태호, 민정기, 안창홍, 김영진, 김재홍, 주재환, 손장섭, 심정수, 송 창, 박불똥, 이종구, 박흥순, 변승훈, 김천일, 김현철, 나규환, 노원희,

두시영,  강연균, 모노리,  성낙중,  안경진, 양형규, 여태명, 이영선, 이명복, 이원석, 이종희,  장경호, 정비파, 조문호, 최병수씨 등 

화가 외에도 조각가, 도예가, 사진가 등 여러 분야의 작가 44명이 참여하였다.




고) 문영태작



민중미술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민예총기금마련전에는

신학철씨의 목판화 한국현대사-유월항쟁도’를 비롯한 시대를 증언하는 민중미술을 두루 만날 수 있다.

잘 알려진 주재환, 손장섭, 임옥상, 김정헌, 강요배, 이철수, 박재동, 박불똥씨의 작품은 물론.

민정기씨의 작품에서는 신화를 형상화 한 새로움이 있고, 이명복씨 작품은 풍경에서도 날카로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태호씨가 그린 김수영시인의 초상화는 그 표정이 얼마나 슬프게 묘사되었는지,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거칠고 격렬한 김진열씨의 작업은 투박한 삶의 존엄성을 보여주었고,

세월호에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한을 머리카락으로 표현한 황재형씨의 작품도 가슴 아팠다.

그리고 다양한 인물을 소재로 변화하는 시대상을 통찰력있게 드러낸 안창홍씨 작품도 예사롭지 않았다.



김진열작



이미 세상을 떠난 문영태씨의 유작도 만날 수 있었는데, 다시 조명해야 할 시대적 역작임이 틀림없었다.

사진가 김영수씨의 무덤 지키고 앉은 노인의 모습은 마치 김영수의 자화상을 보는 느낌이더라.





그동안 자선전 성격의 기획전이 숱하게 열렸지만, 이 처럼 의미있는 전시는 흔치 않았다.

말이 기금마련 자선전이지, 상업화랑에서 열리는 기획전이나 다를 바 없다.

화랑 대신 '민예총'이란 이름이 걸렸지만, 작가와 주최 측이 상생할 수 있는 좋은 전시였다.





황재형작



이 전시를 중요하게 여기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한국민예총'의 재건에 있다는 것이다.

작가들의 구심점이 되어 줄 '민예총'이 다시 일어서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예술가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단체가 힘이 없으니, 작가들이 어찌 힘들지 않겠나?





이제 '민예총'을 다시 일으키는데, 하나같이 힘을 모아야 한다.

분열을 조장하는 나쁜 세력의 이간질에 동조할 것이 아니라, 다 같이 화합의 마당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

어쩌면 '한국민예총' 개혁을 위해 칼을 뽑아 든 박불똥 이사장이 마지막 희망인지 모른다. 

원칙주의자인 그만이 해 낼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박재동작



그러기 위해서는, 작은 액수라도 분담하여 예술가들의 결집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작은 물방울이 내를 이루듯, 우리 힘으로 민예총을 다시 일으켜 세우자.



임옥상작



전시장 입구에는 신학철씨의 '유월항쟁도'가 담긴 포스터와 민예총 CMS가입 신청서가 준비되어 있다.

그동안의 불신을 모두 털어내고, 조금씩 힘을 보태어 화합할 수있는 계기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전시 개막식 날은 전시작품 보랴, 반가운 사람 만나랴, 전시된 작품을 찍을 겨를이 없었다. 

이틀 후 전시장을 다시 찾았더니, 번잡했던 개막식 날 본 느낌과는 사뭇 울림이 달랐다.



김정헌작



그리고 전시장에서 반가운 분들도 여럿 만났다.

멀리서 전시 보러 올라 온 김영부씨를 비롯하여 이광군교수, 김도연시인, 성기준씨 가족도 만났다..

기획자 최석태씨와 함께 간 '부산식당'에서는, 촛불집회 때 광화문에 철공소 차렸던, 최병수작가도 만났다.




. 


인사동 '관훈갤러리'에서 1월6일까지 열리는 '민족예술, 다시 날아오르다'전은

오전 10시 30분에 문을 열어 오후6시 30분에 닫는다.

그리고 매주 월요일과 1월1일은 휴관이다.

 

여러분들의 많은 관람과 성원을 바란다.



사진촬영과 글 / 조문호



고 김영수작


이태호작


장경호작

고 김구한작


이원석작



송 창작



민정기작


주재환작


박불똥작



이종희작


안창홍작


조문호작


강요배작


이철수작

변승훈작

이명복작

안경진 작


김영진작

김재홍작

김천일작

정비파작

두시영작

모리스작

박홍순작

성낙중작


손장섭작

김현철작

여태명작

심정수작

강연균작

노원희작

양형규작

이종희작

이종구작

나규한작

고 박생광작 연필스케치

최병수작











‘한국민예총’의 재기를 위한 ‘민족예술, 다시 날아오르다’기금 마련전이 인사동 ‘관훈갤러리’ 전관에서 개막되었다.

미술평론가 최석태씨가 기획한 이 전시에는 신학철화백을 비롯한 민중작가 40여명이 참여한 대규모 전시다.





개막식이 열린 지난 19일에는 민예총 작가들을 비롯한 많은 인사동 사람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전시가 열리기 몇 일전부터 카메라가 고장나 사진을 찍을 수 없었는데,

이 날은 강민시인과 신학철화백, 미술평론가 김진하씨 등 많은 분들을 만났으나, 못 찍어 안절부절 했다.






전시 디스플레이 등 준비 상황도 기록하지 못했다.

뒤늦게 카메라를 빌려 개막식과 다과회, 그리고 뒤풀이에서 많은 분들을 찍었다.

사진이 너무 많지만, 한 번 살펴보기 바란다.

반가운 사람은 물론, 인사동 꼴통들도 많이 나오셨다.





그 날 만난 분들을 기억나는 대로 거명해 보겠다.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빠진 분들께 죄송할 뿐이다.






백기환선생을 비롯하여 손장섭, 김정헌, 유홍준, 성완경, 이애주, 임옥상, 정복수, 김태서, 천호석, 이종구, 김천일, 박종관, 이수호, 이부영, 임진택, 유진규, 장순향, 정태춘, 임정희, 조경숙, 박불똥, 유순웅, 최석태, 정영신, 서인형, 이성호, 손병휘, 박세라, 조경연, 박홍순, 김영진, 김진열, 두시영, 심정수, 이명복, 이태호, 장경호, 최병수, 이광군, 최효준, 손기환, 양상용, 정세학, 나종희, 곽대훈, 김명지, 박 철, 김이하, 김도수, 최명철, 이양재, 손병주, 하태웅, 이재민, 정재안, 김 구, 신상철, 이미례, 이 반, 정영철, 김명성, 조준영, 김수길, 이명희. 공윤희, 민영기, 노광래, 임경일, 강선화, 박윤호, 권양수, 이희종, 박영애, 김보영, 최옥경, 김미진, 손영익, 안만욱, 김덕철, 김도수, 황의범, 이경란, 김다솜, 안광택, 이태환, 성기준, 고재열, 강영민, 유인택, 이승곤, 이성희, 양형규, 임영선, 정필주씨 등이다.






이 전시는 다음 달 6일까지 이어진다.
오전 10시 30분에 문을 열며, 매 월요일과 1월1일은 휴관이다.


사진, 글 / 조문호

















































































































































‘한국민예총’ 드디어 서광이 비친다.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한국민예총)의 창립이 어언 30주년을 맞았다.

한국민예총은 예술인들의 공동실천으로 사회 민주화와 민족통일에 기여하고,

민족문화 창달에 헌신할 목적으로 19881223일 창립한 예술단체다.

현재는 지역별로 분권화한 형태지만, 가닥을 잡아 갈 본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한국민예총30년 동안 민주화와 문예부흥을 위해 크게 기여해 왔으나,

열악한 재정에 허덕이다, 지금은 빚더미에 앉은 어려운 처지에 있다.

오랜 부채를 해결하여 다시 일어서기 위해 역대 이사장단을 비롯하여

신학철, 이철수, 유순웅씨 등 많은 예술가들이 사재를 털어  재기하려 노력해왔으나,

밑 빠진 독에 물 붙는 격이었다.



   



창립 때부터 인간적인 관계를 더 중요시 했는지 모르지만,

많은 회원을 대표하는 단체 운영에 그런 사심이 통용되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사무총장 뜻에 따라 이사장이 추대되는 모순이 오래전부터 암암리에 이루어져 왔다는데 있다,

그러니 자신을 내 세워 준 실세더러 누가 감히 메스를 들이댈 수 있겠는가?





더 이상 사무총장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올 2월부터 화가 박불똥씨가 이사장을 맡으며, 일대 개혁을 단행했다.

사무총장을 해임하여 새 집행부를 구성했으나 당사자가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일부 장부까지 움켜 지고 배 째라 식으로 버티는데,

더 웃기는 것은 일부 지역 민예총을 조종하여 내분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이제 제발 그만하라.

회원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힘을 뭉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법적 조치도 불사해야 한다.

단체를 끌어 가는대는 절대 인간적인 사심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한 선례를 들어 보겠다.

오래전 민예총산하단체인 민족사진가회’(민사협) 창립에 사진가 김영수씨를 도운 적이 있다.

그 단체가 주저앉게 된 원인이, 바로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독재에 의한 것이라는데 있다.

초대 이사장으로 작고하신 홍순태선생을 로봇 이사장으로 앉혔으나,

이사회나 회계절차도 형식일 뿐, 모든 게 한 개인의 뜻대로 움직여졌다.



 


창립시 내가 사무국장 직책을 맡았으나 그것도 이름 뿐이었다.

인사동에 사무실을 내려는데, 보증금이 없어 잘 아는 지인에게 부탁해

홍순태 이사장 명의의 차용서를 써 주고 빌려와 입주한 적도 있다.

그러나 결국 나만 바보가 되었다.

뒤늦게 민예총본부 사무실로 이전했으면 보증금은 돌려줘야 할 것 아닌가?

 


 


가까운 친구라고 덮어주고 변명해 주다보니, 결국 단체 자체가 문을 닫도록 만든 것이다.

박정희보다 더 지독한 독재로 좌지우지 했으니, 어느 회원이 남아 있으려 하겠는가?

유령 회원을 이끌고 가내수공업 식으로 끌어가다, 본인이 죽고 나니 결국 문을 닫더라.



 


문제는 박불똥이사장이 정영신씨를 조직국장으로 내 세워 조직을 다시 복원시키려 했으나,

그 불신의 골이 깊어 대개의 사진가들이 머리를 흔든다는데 있다.

이제 민족이란 자도 단체명으로 사용해서는 안 될 지경이 되고 만 것이다.



 


더 이상 조직에 사심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 모두 화합하여 잘 못된 것을 과감히 개혁하여 우리나라 문화의 주체가 되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 개혁에 나선 박불똥 이사장을 믿는다.

원칙주의자인 그만이 해 낼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민사협에 진저리를 내어 오래 동안 방관하고 살았기에, 민예총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차 몰랐다,

마침 사무국장을 맡은 서인형씨와 정영신씨가 쥐꼬리만큼의 보수로 일한다기에 유심히 살펴보게 된 것이다.




 

유순웅 부이사장 도움으로 사무실을 얻어 어렵사리 꾸려가지만 살얼음 판 같았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것이 어렵기야 하지만, 그러나 희망이 보이더라.

이제 단합하여 협력하는 일만 남았다.



 


일반인들에게 받는 CMS도 계속 들어오고 있고, 기금 마련전에도 많은 작가들이 발 벗고 나섰다.

기금마련전도 여지 것 해 왔던 것처럼 무조건 작품을 내 놓는 것이 아니었다.

사무국과 작가와의 계약서에 의해 이루어진다.

출품작가의 뜻에 따라 판매대금 분배와, 끝난 후의 작품반환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출품 작이 어떻게 처리되는지도 몰랐던, 그 전의 주먹구구식 기금마련전이 아니라

작가와 단체가 상생할 수 있는 좋은 기획전이었다.



 


미술평론가 최석태씨가 기획한 민족예술, 다시 날아오르다기금마련전에는

신학철, 황재형, 임옥상, 김정헌, 민정기, 김진열씨 등 내 노라 하는 작가 40여명이 참가하였는데,

이미 작품이 팔려 나간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려왔다.



 


지난 19일 오후5시 인사동 관훈갤러리전관에서 개막된 민족예술, 다시 날아오르다

기금 마련전에는 200여명의 예술가들이 참여하는 대 성황을 이루었다.



    


개막 행사는 유순웅 부이사장의 사회로 이성호 경기민예총이사장의 비나리 공연에서

장순향 한국민족춤협회이사장의 북춤으로 신명을 일으켰다.

박불똥 이사장의 인사와 백기완선생의 축사, 그리고 유홍준씨의 격려사로 이어졌다.



 


이어 마임이스트 유진규씨의 무언극은 마치 민예총의 아픔을 대변하듯 절절했다.

손병휘 서울민예총이사장의 노래에 이어

임진택 명창의 김구선생 탈출기를 담은 창작 판소리가 좌중을 웃기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가수 정태춘씨가 나왔는데, 흐르는 세월은 어쩔 수 없었다.

늙어가는 모습을 오랜만에 만났는데, 목소리는 더 깊어진 것 같았다.



 


그런데, ‘관훈갤러리가 생겨난 이후 최고의 관객이 몰렸다.

3층 공연장에 다 들어 올 수 없어, 입구에서 지켜보는 분들도 많았다.

공연이 끝난 후에는 2층에 마련된 조촐한 다과로 환담을 나누었고,

낭만에 마련된 뒤풀이에서 밤늦도록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판화가 김준권씨 100만원, 박종관 한국문예진흥위원장 100만원, 화가 김정헌씨 50만원 등,

독지가들이 줄을 이어 민예총이 다시 기지개를 켜는 모습에 마음이 흐뭇했다.



 


다음해 16일까지 열리는 민예총기금마련전은 꼭 볼만한 전시다.

유명작가들이 대거 참여한 이번 전시에서 민중미술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신학철씨가 88년에 제작한 목판화 한국현대사-유월항쟁도도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시대를 증언하는 작품으로 민중미술을 이끌어가는 기라성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작품은 구입하지 못하더라도 작은 금액의 CMS 한 구좌라도 적어주길 바란다.

작은 물방울이 내를 이루듯, 작은 힘이 모여 민예총을 다시 일으킬 수 있다.



 

참여 작가는 다음과 같다.

 

작고작가) 박생광 김영수 문영태 김구한

 

강연균 강요배 김영진 김재홍 김정헌 김진열 김천일 김현철 나규환 노원희 두시영 민정기

모노리 박불똥 박재동 박흥순 변승훈 손장섭 송 창 성낙중 신학철 심정수 안경진 안창홍

양형규 여태명 이영선 이명복 이원석 이종구 이종희 이철수 이태호 임옥상 장경호 정비파

조문호 주재환 최병수 황재형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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