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자동 황춘화씨

제목의 노래를 누가 불렀는지 모르지만, 여자란 말만 들어도 가슴 설렌다,

그놈의 미투 바람에 요물 같아 거리 둔 지 오래되었지만...

 

동자동 쪽방촌에는 여자가 별로 많지 않다.

내가 사는 4층에는 유일하게 할멈하고 같이 사는 정선덕씨가 있다.

할멈이 병원에 입원하여 하루도 빠지지 않고 병원을 들락거리더니,

아직 완쾌되지 않았는데도 병원비가 없어 퇴원시켰다고 한다.

 

  늙으면 허리 아픈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4층이라 감옥이 따로 없다.

외출하려면 정씨가 업고 가야 되지만, 퇴원하자 마자 머리 염색부터 해 준다.

쪽방 촌에서는 보기 힘든 정겨운 모습이다.

 

  얼마 전에는 3층에도 아줌마 한 분이 입주했다.

그런데, 쪽방 복도에 물걸레질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방도 남정네 방 보다 훨씬 정리가 잘 되었더라.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 왔는지 모르겠으나, 얼굴에는 그늘이 짙었다.

 

'새꿈공원'에는 허리가 아파, 지지대를 끌고 다니며 청소하는 할멈도 있다.

황옥선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이분이 청소하는 걸 종종 본다.

그걸 보면서도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리는 인간들이 많다.

버리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는 것이다.

 

공원 입구에는 한동안 보이지 않던 경학이가 자리 깔고 앉았다.

오랜 노숙생활에서 졸업하여 쪽방에 들어온 지가 한참 되었다.

고시 합격하기보다 어렵다는 수급자가 된 후로는 영 만나기 힘들었는데,

모처럼 노숙하는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구질구질한 꼴은 보았으나, 면도까지 한 말끔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

이제 장가가도 되겠네라고 했더니,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른다.

모기만한 소리로 여자가 있어야지요?’ 하는 걸 보니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무슨 놈의 팔자가 그리 기구해 오십이 넘도록 여자 한 번 안아보지 못했을까?

 

  돈은 없어도 되지만 여자는 없으면 안 되는데, 돈이 없으니 여자가 있을 리 없다.

돈과 여자는 가깝고도 먼 당신이다.

 

사진, / 조문호

 

지난 6월30일 오후 4시무렵 이광수 교주께서 쪽방촌 성지순례 나선다는 연락을 받았다.

하필이면 녹번동 파출부로 나가는 금요일이었다.

 

그날은 월말이라 ‘서울아트가이드’ 얻으러 인사동도 들려야 하고,

맡겨놓은 초상 사진 찾으러 충무로도 가야 해 오후 1시부터 서둘렀다.

안국역에 도착할 무렵 이광수 교수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일이 빨리 끝나, 서울역 11번 출구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큰일 이었다! 시원한 곳에서 잠시 기다리라 했으나 마음은 바빴다.

 지하철을 탔으면 빨랐을 텐데, 마음이 급해 택시를 잡아탔으나 차가 밀려 더 늦었다.

 

간신히 후암동에 도착해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가 작동되지 않았다.

페이스북아나 내비는 안 되지만 거는 전화는 잘 되는 핸드폰인데,

전화가 걸리지 않아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선 자리에서 담배를 세 대나 피우며 우왕좌왕하는판에 이교주가 나타났다.

시원한 곳에서 기다리지 않고, 그때까지 지하철 입구에서 기다렸다고 한다.

 

그 날따라 날씨는 얼마나 더운지 얼굴이 빨갛게 익었더라.

미안해 죽을 지경인데, 시원한 커피집에 안 가고 방으로 가잖다.

어두컴컴하고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계단은 마치 저승가는 계단 같다.

많은 사람이 죽어 내린 계단을 4층까지 올라간 것이다.

급히 방문을 열어 선풍기를 돌렸으나, 더운 바람이 감겼다.

 

삼층 사는 박씨 아지매는 계단을 기어 오른다.

수행하는 것 처럼, 덥고 비좁은 방에서 몸으로 느끼며 쪽방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요즘 한 달에 한 번씩 유튜브 강의 촬영하러 상경하는데,

출발하기 전 페북 메시지로 빨리 간다는 연락을 했다지만,

컴퓨터에서만 페이스북을 볼 수 있으니, 알 리가 없었다.

두서없는 쪽방촌 이야기를 했으나, 더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20분쯤 수행하다 내려왔는데, 시간이 어중간했다.

기어이 맛있는 고기를 사 주겠다며 고깃집을 찾았는데, 대개의 식당이 쉬는 시간이라 문을 닫았다.

돌고 돌아 찾아간 집이 ‘서래갈매기’란 고깃집인데, 처음 가 본 식당이었다.

손님 없는 텅 빈 식당에서 고기를 구워, 지애비도 못 알아본다는 낮술을 마신 것이다.

 

이교주와 여러 차례 술자리를 했지만, 단둘이 앉아 마신 술은 처음이었다.

오래전 최민식 사진상의 문제점을 제기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도 있다.

다들 눈치만 보고 찍소리 못하는 썩은 사진판에 가슴이 뻥 뚫렸다.

 

시건방진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이광수씨나 황정수씨,

그리고 얼마 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안애경씨 같은 분이,

각 분야 열 명만 리드가 되어도 국민의 삶의 질은 물론 가치가 달라질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래서 오래 전 부터 교수가 아니라 교주로 깍듯이 모셨다.

나처럼 한번 물면 안 놓는 성질도 비슷했다.

 

옛날 사진계 이야기가 안주였으나, 다 부질없는 이야기였다.

기록사진을 아카이빙할 민간단체 설립의 절실함도 말했고,

스승 최민식선생에 대한 기록물을 제작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에 관한 논문이 니체와 닮았다는 이야기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

 

딴 약속이 있어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선물로 담배까지 사 주었다.

가게에 담배가 몇 갑 없으면 있는 대로 사지, 기어이 다른 가게를 찾아 한 보루를 샀다.

찾아 준 것만도 황송하지만, 까발겨 두들겨 맞을 논문이 걱정이다.

아무튼, "억수로 고맙습니다.”

 

교주가 떠난 후 발동이 걸려 ‘새꿈공원’으로 담배 자랑하러 가다 이병호씨를 만났다.

그 양반은 담배보다 술이 더 절실하지만, 담배 밖에 줄 수 없었다.

알콜중독자에게 돈을 주는 것은 죽으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준기씨가 날 나무란다.

“형님은 사진값도 안 받으면서, 돈은 왜 쓰냐?”는 것이다.

내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길래, 꺼내 보니 만 원짜리 두 장이 있었다.

“문디 코구멍에 마늘을 빼먹지! 니 돈 묵고 내가 편하겠나?”

소주 한병 콜라 한 병 사고 남은 돈을 돌려주니, 씰데 없는 소리란다.

“날 우째 보고 그라요. 내가 준걸 다시 받것소. 사나 가오가 있지”

그래, 요즘 가오 있는 놈이 드물어 보호종으로 정한다는 소문은 들었다

 

" 보호종 개 목걸이 쟁취를 위해 “투쟁!”

 

사진,글 / 조문호

 

 

 

요즘은 초상사진 찍다 별 일을 다 겪는다.

노숙하거나 쪽방에 살면 누구던지 찍는 것이 아니라

찍을 대상의 기준을 정해두었으니, 마땅한 대상을 찾기가 쉽지 않다.

 

가난하게 살아도 당당하게 사는 사람이 흔치 않은데다,

술 마시지 않은 온전한 정신 상태에서 본인이 요청해 오기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다.

더구나 일체의 연출이나 보정 없이 있는 그대로를 노출하는 사진이라 잘 나서지 않았다.

 

대개의 사람들이 사진 찍히기를 싫어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다.

'모든 것을 지우고 싶은데 사진은 남겨 무엇 하냐?'는 것이다.

그리고 쪽방주민들은 대부분 영정사진을 만들어 놓은데다,

노숙인은 사진 둘 곳이 없어 찍어 줘도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접근방법을 달리하여 찍어달라고 할 때까지 기다리며, 스스로를 광고했다.

그동안 언론사 인터뷰 요청까지 거절해가며 동등한 위치임을 자랑삼았으나, 쪽팔려도 약력을 까 발렸다.

기존 영정사진과 달리 한 장의 초상사진으로 영원히 남기겠다는 각오로 임했다.

아무리 사람을 찍어 왔지만, 짐승보다 못한 인간은 찍지 않는다며, 어깨 힘도 주었다.

 

어차피 전시가 끝나면 사진은 본인에게 돌려줄 것 이지만,

이중으로 돈 들여 사진 찍는대로 인화해 준 것이 소문이 난 것 같았다.

요즘은 나의 뜻에 동조하는 사람이 하나 둘 늘고 있다.

아무리 모델로서 그럴싸해도 자격을 갖추지 않으면 찍지 않았다.

 

그리고 이 일은 지속적으로 해야 할 일이라 서둘 일은 아니었다.

량이 아니라 질이 중요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작품성보다 당사자의 정신력이 더 중요하다.

 

며칠 전에는 음악이 좋아 통기타 하나 챙겨들고 떠돌다

쪽방에 입주한 위수범씨를 우연히 만났는데,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사진보다 자신의 삶에 자긍심을 갖는 일이 우선이라 길바닥에 퍼져 앉아 이야기부터 나누었다.

 

거지처럼 사는 것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며,

돈 번 사람보다 돈을 벌지 못했기 때문에 더 잘 살았다는 위안에 그만 울고 말았다.

울음을 멈춘 후 사진을 찍었으나 슬픈 표정 즉 감정이 노출되어 실패했다.

사진은 나중에 다시 찍으면 되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잘 살았다는 자긍심을 갖는 게 초상사진 찍는 목적이기 때문이다.

초상사진은 당당하게 스스로를 내 세울 수 있어야한다.

 

그 다음 날은 김상진씨를 만나 찍었으나, 그 역시 눈물이 고였다.

돈 때문에 가족을 잃었지만, 잘못 산 인생은 아니라는 것이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돈벌레 보다 얼마나 인간적이냐?

 

사진이야 다시 찍으면 되고, 그것도 아니라면 만족할 때까지 찍으면 된다.

돈 벌기 위해 하는 일이라면 할 수 없겠지만, 이렇게 사는 것이 좋다.

일이 아니라 나의 놀이며 내가 가야 할 길이다.

 

사진, 글 / 조문호

 

현충일을 맞아 돌아본 동자동 쪽방촌의 살풍경이다.

곳곳에 술 취한 사람이 마치 총 맞은 병사처럼 쓰러져있었다.

먹은 것이 없어 그런지, 조금만 마셔도 몸을 가누지 못한다.

자신의 명을 술로 재촉하고 있으나, 아무도 탓하는 이가 없다.

 

이러한 알콜 중독자는 서울역보다 동자동이 더 많다.

한때는 노숙인들과 어울려 술 마시며 이야기도 들었으나,

그들의 중독 증세에 부채질하는 것 같아, 피해 다닌 지 오래다.

 

구멍가게에 담배 사러 갔다가, 우연히 유정희씨를 만났다.

이분은 오랜 노숙 생활 끝에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어 쪽방에 입주했다.

유씨를 비롯하여 초상사진 찍기로 약속한 분이 여럿 있으나,

만날 때마다 술을 마셔 찍지 못했는데. 모처럼 정신이 또렷했다.

 

그 자리에서 초상사진부터 찍었는데, 만난 현장성에 의미를 두나,

 햇빛 때문에 건물 입구 그늘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햇빛을 비롯한 일체의 변화요인을 초상에 개입시키지 않으려는 원칙이다.

찍기 전에 항상 강조하는 것은 당당한 자긍심을 가지는 것이다.

사진은 일주일 뒤에 주기로 약속하고, 내키지 않으면 다시 찍기로 했다.

 

골목을 빠져나오니, 싸이렌 소리가 울려퍼졌다.

발걸음을 멈추어 나라를 위해 목숨 잃은 분들을 위해 묵념을 올렸다.

현충일이라 중령으로 퇴역한 이병호씨를 만나 군대 이야기나 듣고 싶었다.

 

그가 자주 머무는 공원 앞 담벼락으로 갔더니, 최정훈씨와 둘이 앉아 있었다.

그 역시 만날 때마다 술을 마셨으나, 그날따라 사진 찍기 위해 기다리는 것 같았다.

사실은 술 살 돈이 없어 물주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앉은 자리에서 자부심부터 인식시킨 후 찍었더니, 정훈이도 찍어라며 눈을 깜빡였다.

정훈씨는 잘 모르는 데다, 초상사진 찍는 목적에 공감하는지도 모르겠고,

더구나 스스로 원하지 않아, 안 찍는다고 손을 내저었다. 

 

처음에는 빨리 추진하고 싶은 욕심에 무리수를 두었지만, 하등의 서둘 이유가 없었다.

원로작가지원사업으로 시작된 ‘버려진 사람들의 초상전’은 그동안 찍은 사진으로도 충분히 치를 수 있으며,

이 일은 살고 있는 동안 꾸준히 해야할 내가 짊어 질 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상사진은 상대를 제대로 알고 찍어야 한다.

 

커피를 뽑아 와 이야기를 듣고 싶었으나, 딱 한 잔 만 하자는 권유를 차마 물리칠 수 없었다.

소주 두 병과 꽈베기 한 봉지를 사 왔더니, 잠자던 녀석도 일어나고,

보이지 않던 녀석까지 나타나, 술이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하는 수 없어 만원을 꺼내 주었더니, 아예 소주 됫병을 사왔더라.

결국, 그들에게 약은 주지 못할망정 독을 주고 말았다.

 

그날은 이병호씨 군대 이야기보다 더 놀라운 최정훈씨 군대 이야기를 들었다.

이북에 넘어가 죽다 살아났다는 그는, 젊은 시절 이태원에서 두 사람이나 죽인 끔찍한 살인을 저질렀단다.

마침 군대 장교로 근무하던 아버지가 나서서 교도소 대신 북파공작을 수행하는

UDU로 들어가게 만들었는데, 인생의 쓴맛은 그때 다 보았다고 한다.

 

보급품을 주지 않아 뱀은 물론 표창으로 온갖 산짐승을 다 잡아먹고 살았는데,

제일 맛없는 고기가 고라니라며 고라니 고자도 듣기 싫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북파되어 옆구리와 허벅지에 맞은 총탄 자국까지 보여주었다.

 

군번 없는 군인으로 살아, 죽어도 이름조차 남지 않았겠지만,

죽는 것 보다 못한 짐승 같은 나날을 보내는 현실이 더 슬펐다.

 

다들 먹은 것이 없으니, 술도 많이 마시지 못했다.

목사님이 갖다준 빵 봉지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교회 단체 ‘이에수스 핸즈’에서 얻어 온

물김치 한 술 뜬것이 전부라, 한 사람 한 사람 드러눕기 시작했다.

 

동자동에서 오랫동안 노숙을 한 지경학, 유정희, 김상진 등 여러명이 수급자가 되어 쪽방에 들어갔지만,

쪽방보다 밖이 더 좋은지 허구한 날 길거리에 나 앉았거나, 노상에 쓰러져 자는 것을 더 자주 본다.

 

다들 술로 명을 재촉하고 있으나, 손 쓸 방법이 없다.

비참하게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편할지 모르겠으나, 산 목숨이다.

정부에서 알콜 중독자 치료에 적극적으로 나서주기를 촉구한다.

 

사진, 글 / 조문호

 

날이 갈수록 빈민들의 삶은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2020년만 해도 1,083명이던 동자동 주민이 2022년 말까지 886명으로 대폭 줄어 들었다.

건물주들의 압력에 내몰리는 사람도 있지만, 일 년에 평균 오십 여 명씩 목숨을 잃는 것이다.

 

2년 전 정부의 동자동 공공개발 발표에 마음이 들떠 죽기 전에 잠시나마 집 같은 집에서 한 번 살아 보겠다며

꿈에 부풀었으나, 아직까지 지구지정도 하지 않은 채 방치한 사이 빈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희망에서 절망감으로 변해가며, 점차 분노로 들끓기 시작했다.

 

사람답게 살아보겠다고 술을 끊었던 사람도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지병을 가진 사람은 병이 더 깊어져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 상태로 몇 년 만 더 간다면 화병으로 다 죽어 나갈 것만 같다.

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걸 바라는 걸까?

 

며칠 전에도 쪽방촌에서 또 한사람 죽어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는 시신을 두고 경찰이 들락거리더니, 구급차에 실려나갔다.

그 건물은 지난겨울 수도관이 터져 온 계단이 빙판으로 변해 신문지면을 장식했던 건물인데,

마치 귀신 나올 것 같은 건물에서 진짜 귀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문제는 주변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로 외부와 전혀 소통하지 않았다고 한다.

올해 86세라니 살만큼 사셨지만, 죽어서도 저승으로 바로 떠나지 못한 채,

행여 가족이 나타날까 한 달 동안 냉동실에서 기다려야 한다.

아무도 슬퍼하는 이 없고, 남긴 것 하나 없이 바람처럼 떠나 버렸다.

 

요즘 들어 부쩍 술이 취해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동자동 주민들을 종종 본다.

술을 많이 마셨다기 보다 기력이 없어 조금만 마셔도 장소를 가리지 않고 누워버린다.

하기야! 더운 쪽방보다 바깥이 시원한데다 죽어도 빨리 알것이니, 정신 줄을 놓는지도 모르겠다.

 

어제는 30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에 동자동 주민들의 주거권 결의대회가 열렸다.

대통령실이 있는 용산에서 국토부장관 집이 있는 동작구 노들역까지 거리행진이 있다기에

집결지인 ‘새꿈공원’으로 나갔다.

 

“주민협동회” 김정호이사장이 행진 참여자들에게 협조사항을 알리고 있었는데,

공원 한 쪽에 있던 김상진씨가 반가워하며 내 손을 부여잡았다.

 

한 동안 보이지 않던 그 분은 변두리 임대 주택으로 옮겨 간지가 좀 되었다고 했다.

산전수전 다 겪다 동자동에 들어 와 살았으나, 집 같은 집에서 한 번 살아보고 싶어 떠난 것이다.

그가 뱉은 첫마디는 ‘방이 넓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일거리 없고 아는 사람하나 없는 그곳은 외딴 섬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동자동 쪽방 주민들을 내 보내려는 술수에 떠밀렸으나, 사람이 그리워 동자동을 찾은 것이다.

빈민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걱정한다면, 동자동 공공주택을 하루속히 건설하는 방법뿐이다.

 

더 이상 이야기 나눌 시간이 없어 주민들과 함께 기자회견 장소인 용산으로 가야했다.

그러나 대통령실이 있는 용산에서 동작동 국토부장관 집까지 이어지는 거리행진이 걱정스러웠다.

 

난, 오래전 뺑소니차에 치어 다리가 부러진 적이 있는데, 수술을 잘 못하여 많이 걷지를 못한다.

조금만 걸어도 다리가 아파 차를 휠체어처럼 끌고 다녀야 하는데, 먼 거리라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 차라리 길에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힘든 고행의 거리행진을 무사히 끝내기는 했으나, 돌아오자마자 뻗어 버렸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당장 동자동 공공주택사업을 시행하라!“

 

사진, 글 / 조문호

 

[2023.5.17작성]

어버이 날이 되면 쪽방촌 어르신을 위한 잔치가 동자동 '새꿈공원’에서 열린다.

 

해마다 ‘동자동 사랑방’에서 마련하는 잔치지만, 코로나에 발목잡혀 3년 만에 열려 더 반가웠다.

 

동자동 쪽방 촌에 사는 분은 대부분 가족과 연락이 끊겼거나,

있어도 찾아오지 않아 어버이날이 되면 외로움을 더 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텅빈 가슴에 꽃 한송이 달아드리며 술과 음식을 나누니, 이보다 좋은 날이 어디 있겠는가?

 

조화에 불과한 카네이션이지만, 삶에 찌든 어두운 그늘을 지우고 모처럼 활짝 웃는 모습을 보였다.

 

잔치도 자선단체에서 지원한 것이 아니라, 주민들 스스로 음식을 장만한 자리라 더 의미 있다.

 

‘서울역쪽방상담소’의 나눔과 또 다른 것은 줄 세우지 않는데 있다.

주민들에게 음식을 차려줄 뿐 아니라, 이날만은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술도 한 잔 마실 수 있다.

 

머릿 고기에다 각종 부침개, 떡과 소주, 음료수 등을 사랑방 식구들이 부지런히 날랐고,

동네 어르신들은 깔아놓은 자리에서 이웃과 정겹게 술잔을 주고 받았다.

이렇게 화기애애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날도 어버이날과 추석뿐이다.

 

예전에는 잔칫날이 되면 그동안 찍은 사진을 빨랫줄에 걸어 나누어 주기도 했으나,

그마저 마땅찮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 그만 두었는데, 어딜 가나 시기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이후로는 찍힌 분을 언제 만날지 몰라 가방에 넣고 다녀야 하는 불편은 따르지만, 그 또한 내가 짊어져야 할 업이다.

 

잔칫날이 되면 평소 잘 보이지 않는 분도 더러 뵐 수 있는데,

이날은 한 때 동네 사발통문처럼 쏘다니며 도시락을 전해주던 원용희씨를 만났다.

 

얼굴이 반쪽이 되어, 그동안 어디 아팠냐고 물었더니 죽다 살아났단다.

멀지않은 해방촌으로 이사를 갔다는데, 어버이 잔칫날이라 찾아 왔으나 술은 끊었다고 한다.

 

공원에는 술에 취해 여기저기 드러눕는 사람도 생겨났으나, 아무도 탓하는 이가 없다.

기력이 없으니 조금만 마셔도 쓰러지는 것이다.

 

하기야! 답답한 쪽방에 눕는 것보다 시원한 공원에 드러눕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이날 잔치에는 ‘동자동사랑방’ 윤용주 회장과 김호태씨가 주민들께 인사드리며 어르신들의 건강을 기원했다.

 

잔치가 끝난 뒤, 교회 봉사단체에서 나와 도시락을 나누어 주었으나, 다른 때와 달리 남아 돌았다.

요즘은 도시락 인기가 무료식권에 밀려나 예전같지 않다.

 

뒤 따라 쪽방상담소에서도 마스크와 꽃을 나누어 준다며 줄을 세우기 시작했다.

오는 대로 주면 될 텐데, 시간을 정해놓고 기다리게 하니 줄을 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줄 세워 거지 취급하는 나눔은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아무리 희망 없는 나날을 보내지만, 하루를 살더라도 재미있게 즐기며 살자.

 

대개 기초생활 수급자라 술과 담배만 즐기지 않는다면, 살아가는데는 별 지장이 없다.

문제는 돈을 쓰지 않고 이불밑에 넣어 두다 남 좋은 일 시키는데 있다.

 

돈을 아끼고 저축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것도 가난한 독거노인은 해당되지 않는다.

평생 고생하다 죽을 날도 얼마 남지않았는데, 누굴 위해 저축한단 말인가?

 

문제는 수급비를 받는 대부분의 독거노인들이 돈 쓸 줄도 모르고 놀 줄도 모른다는데 있다.

돈도 쓰 본 사람이 잘 쓰지, 돈이 없어 쓰 보지를 못했으니 돈 쓸 줄을 모른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 삶의 질을 개선하려면 돈 쓰는 방법부터 가르쳐야 할 것 같다.

정말 돈 쓸 곳이 없다면 수급비도 받지 못하는 노숙인에게 적선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죽고 나면 돈도 명예도 아무 소용없는 쓰레기나 마찬가지다.

 

부디 내년에도 건강하게 어버이날을 맞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사진, 글 / 조문호

 

[2023,5,10작성]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세면도구를 챙겨 호젓한 남산 길을 걸어 남대문사우나에 갔다.

서울시에서 나누어 준 무료 목욕권 덕에 톡톡히 호사를 한다.

예전에는 명절에나 찾았던 목욕탕이 아니던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구어 눈을 지긋이 감고 있으니, 찌푸둥한 몸이 풀렸다.

 

목욕탕에서 나와 문화역서울에서 열리는 공예특별전을 보러갔다.

남대문사우나에서 서울역으로 가려면 서울로7017’ 고가가 지름길이다.

서울로7017’은 많은 원형 화분들이 놓인 휴식공간이라 남산 길보다 또 다른 재미가 있다.

 

늘 보던 서울역도 위에서 내려다보면 제법 그럴싸하다.

와이티엔 뉴스에 가끔 등장하는 서울역 전경을 볼 수 있는 곳인데, 다양한 식물이 있어 가끔 찾는다.

 

비록 사는 곳은 쪽방이지만, 이렇게 좋은 환경에 산다는 자랑질이다.

 

서울역 방향으로 내려가 ‘문화역서울’로 들어가려니, 입구에서 “어떻게 왔느냐?“며 막았다.

”전시장에 전시 보러 왔지 뭐 하러 왔겠냐?”고 쏘아붙이며 들어갔다.

 

행색이 노숙인처럼 보인 모양인데, 노숙인은 전시 보면 안 되는가?

사람 차별하는 인간들 보면 간이 뒤집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리는 공예기획전은 다시, 자연에게 보내는 편지’였.

자연에게 보내는 편지를 공간별로 달리 배치해 관람객이 편지의 주체이자 전시의 부분이 될 수 있도록 연출해 놓았더라.

 

7개의 주제 공간과 1개의 공예전으로 구성되었는데, 기성 작가 60명과 학생 29명이 참여한 대규모 기획전이었다.

찍은 사진이 많아 구체적인 리뷰는 천천히 올리기로 하고 이만 줄이겠다.

 

전시장을 나오니, 천국에서 지옥으로 내려 온 기분이었다.

길에 쓰러져 잠들거나, 구걸하지 않으면 술 마시는 노숙인이 곳곳에 널렸는데,

술로 사는 사람들이 편히 쉴 곳조차 없으니,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다.

 

쪽방사는 빈민과 노숙인들의 가깝지만 먼 차이를 새삼 절감하며, 동자동 '완도식당'으로 갔다.

하루 한 끼만은 먹고 싶은 음식을 골라 먹을 수 있는 무료식권 조차 노숙인은 받을 수 없으니, 뭔가 잘 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식당에 들어가니, 임백수씨와 젊은 친구 한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밥 먹으러 온 게 아니라 술 안주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임씨가 나더러 하는 말이 아무리 얻어먹는 거지지만, 옷은 잘 입어야 한단다.

구질구질하게 다니면 반기는 곳이 없다는데, 마치 전시장에서 막는 걸 본 것 같았다.

그가 사는 방은 지저분해도 항상 옷은 말끔하게 차려입는 이유를 알겠더라.

 

임씨는 술 끊은 지 몇 개월이 되었으나, 도저히 사람구실을 할 수 없어 다시 마신다고 했다.

핑계에 불과하지만, 술친구와 어울릴 수 없어 외로워 못 살겠더라는 것이다.

당뇨가 심해 죽을 때 죽더라도 사람답게 살다 죽겠단다.

나는 살기 위해 밥을 먹고, 임씨는 죽기 위해 술을 마셨다.

 

허기진 배를 채워 쪽방으로 올라갔더니, 누군가 계단에 피를 토해 놓았다.

머지않아 또 한 사람 떠날 것 같다.

그래! 더러운 세상 오래 살아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는가?

저승이 극락인데...

 

사진, 글 / 조문호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 운영하는 ‘돌다릿골 빨래터’에서 이불세탁을 받지 않은지가 한참되었다.

겨울 내내 찌든 이불을 세탁하려고 줄을 잇는 봄철에 한 달 가까이 이불세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냥 두고 볼 일이 아니다.

세탁기를 수리중 이라 말했다가, 서울시의 예산이 없다는 등 말도 되지 않는 변명만 늘어 놓는데, 이건 직무유기나 다름없다. 

 

지난 3월29일 이불을 가져가 헛걸음 친후, 그 뒤 몇 차례나 찾았으나 똑 같은 대답만 돌아왔다.

영업용 세탁소라면 이렇게 오랫동안 방치할 수 있겠는가?

이젠 부피가 큰 이불은 받지 않겠다는 말로 들리는데, 더 이상 주민들을 무작정 기다리게 하지 말고,

세탁기를 가동하지 못하는 분명한 사유를 밝히고 대책을 강구하라.

 

동자동 쪽방촌의 ‘돌다릿골 빨래터’는 2018년 여름, 서울시에서 KT의 세탁기 후원을 받아 동자동 새꿈공원 맞은편에 설치한 것이다.

당시 서울 시장이었던 박원순씨에 의해 성사된 일로, 빈민들의 오랜 숙원사업을 해결해 주어 주민들로 부터 고마움을 한 몸에 샀다.

 

쪽방에 살려면 빨래가 제일 골칫거리였으나, 덕분에 한시름 놓게 된 것이다.

박원순씨는 옥탑 방에 직접 살아 보는 등 빈민들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 많은 개선을 이루어내었으나,

더러운 세상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비운의 정치인이다.

서울 시장이 누구냐에 따라 빈민들의 삶이 곤두박질 하니,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한 때는 세탁에 의한 소음으로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도 했으나,

지금의 ‘서울역쪽방상담소’건물이 완공됨에 따라 같이 옮겨 운영하는 것이다.

 

비좁은 쪽방은 이불장이 없어 항상 이불을 바닥에 펴놓고 살아 불결하기 짝이 없다.

작은 세탁물이라면 쪽방 화장실에서라도 세탁할 수 있겠으나, 덩치가 큰 이불은 어쩔 도리가 없다.

예전에는 때에 찌들어 시커먼 이불이 행여 얼굴에라도 닿을까 노심초사 했으나, 지금은 죽었으면 죽었지 그렇게는 살지 못한다.

 

서울시와 서울역 쪽방상담소는 하루속히 '돌다릿골 빨래터'를 정상화하라.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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