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목판화 발굴 프로젝트 2-

이인철 1984-1994: 거리에서

이인철/ LEEINCHEOL / 李仁澈 / printing

2023_1018 2023_1030

이인철 _ 신혼의 이씨 _ 목판채색 _52×40cm_199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

Tel.+82.(0)2.722.7760

 

이인철의 1980년대 목판화 - 거리에서 보낸 한 철 1. 알만한 사람은 알듯 이인철은 부산수산대학 출신이다. 그림판에 넘치는 그 흔하고 뻔한 미대 출신이 아니다. 그런데도 대학을 졸업하고 무작정 상경해서 화가가 되었다. 서울에서 처음 만난 일군의 화가들이 민중미술 운동의 중심이 되는 작가들이었다. 서울미술공동체라는 미술운동 단체 멤버들이었고, 이인철도 창립회원으로 가입해서 함께 활동을 시작한다. 1984년경이다. 이어서 1985년 전국단위 문화운동 단체인 민족미술협회가 창립되면서 이인철도 자연스레 민미협 회원이 된다. 이는 시위하는 바가 크다. 미술계와 별 인연이 없는 사람이 현실 비판적인 미술운동에 자연스럽게 몸을 담근다는 거, 그의 기질 혹은 사유에 사회나 역사에 대해 곧추선 의식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는 근 4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인철 작업을 관통하는 주제 의식의 뼈대이기도 하다. 역사적 사실, 동시대 현실, 그리고 미래에의 전망을 통시적으로 통찰하면서도 동시에 당대 현실에 미술로 개입하고 실천하는 행동 말이다. 1980년대의 저항 이후 지금까지 제도권 화단의 아웃사이더로 표류하면서도 이인철은 초지일관 현실과의 접점을 찾는 내용의 작업을 지속해왔다. 상업성과는 거리가 먼 괴롭고도 지난한 과정이었다. 80년에는 목판화로 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컴퓨터그래픽으로 스스로를 더 고립시키며 작업해 왔다. 물론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제도권 화단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했다. 리얼리스트로서 미학적 이념을 현실에 정착시키려는 작가 의식은 현실과의 불화를 동반할 수밖에 없는 범, 그 지난하고도 외로운 과정이 자신의 미학적 입장을 작업에 정착시키는 것이기에. 이번 전시와 이 도록은 그런 이인철의 활동 중에서 초기인 1980년대 부터 90년대 초반까지의 목(고무)판화 작업으로 구성된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수도 있는 기간이다. 그의 서울미술공동체민족미술협회회원 시절의 주요 장르다. 당시 목판화는 민중미술의 핵심으로 대 사회적 메시지와 복수미술로서의 가능성에 크게 고무된 장르였다. 1985년부터 시작된 이인철의 목(고무)판화는 1990년대 초반까지 대략 10여년간 진행되었다. 이 시기 이인철은 한국 판화사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킬만한 독자적 양식과 기법의 작업을 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부터의 디지털 작업으로의 전환은 이인철의 판화작업을 이후 좀처럼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시간은 30여 년이 흐르고 이인철의 판화작업들도 우리들의 뇌리에서 상당 부분 잊혀졌다. 아쉬운 일이다. 그래서 본 나무아트 프로그램인 한국현대목판화 발굴 프로젝트의 두 번째 작가로 이인철의 목판화를 조망해보고자 한다.

 

이인철 _ 거부의 몸짓  2_ 판화에 채색 _45×57cm_1985

2. 19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진행된 이인철의 목판화와 리놀륨(Linoleum)판화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철저하게 사진적 몽타주를 극사실로 재현한 판각법과, 외곽선에 의한 형태로 인물의 성격을 드러낸 바람 부는 날, 1985」「짤라 버릴까부다, 1986」「마누라 나도, 1987」「갈증, 1988」「어떤 수인, 1988등과 같은 일련의 형식이 있다. 이런 위트·풍자·해학 등으로 군부독재 시기를 비틀며 비판한 내용의 선각 작업이 대략 1985~1988년경 먼저 시도된 형식이고, 동시대를 응시하면서 불의한 권력에 의한 모순을 정면으로 담아낸 증언이자 기록의 정밀한 판각법이 86~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는 경향이다. 이 글에서는 이인철 특유의 양식이자 대표작으로 여겨지는 정교한 형식의 판화를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겠다. 먼저 눈에 띄는 건 역시 과도기적 특징의 작업이면서도 반5·반미·반제를 선명한 콘트라스트 형식으로 도상화한 거부의 몸짓, 1985」「스포츠 공화국의 상과 하, 1986」「자유의 여신상, 1986」「안녕히 가세요, 1987」「반전 반핵, 1989등과 같은 작품이다. 작가가 의도한 메시지와 80년대 민중미술에서 두드러지는 대하서사적 시각 문법이 선명하다.

 

이인철 _ 역사의 기록 _ 판화 _51×33cm_1989

이어서 좀 더 정교해진 칼맛으로 형상화한 동시대 현실 풍경. 80~90년대 거리에서 마주치는 현상들에 대한 일상적 서사성이 두드러지는 작품들이 이어진다. 머물지 못하는 사람들, 1985」「불꽃으로 다시 살아나, 1989」「죽음의 변주곡, 1989」「역사의 기록, 1989」「젊은 날의 초상-1, 1991」「체포, 1991」「죽음, 죽음, 죽음, 1991」「젊은 날의 초상-2, 1992등과 같은 동시대 민중의 삶의 모습이나, 시위현장과 거기서 산화한 젊은이들에 대한 진중한 슬픔의 묘사가 눈에 띈다.

 

이인철_젊은날의 초상-1_판화_61×125cm_1991

특히 이인철의 판화 중 가장 큰 대작인 젊은 날의 초상-1」「젊은 날의 초상-2는 한국 리얼리즘 목판화의 백미라고 여겨진다. 시위 현장에서 백골단과 젊은 육체를 부딪치며 전투를 벌이는 청년들과, 이어서 그 청년 중 누군가의 상여가 거리를 행진하는 장면이다. 운구하는 대학생들의 슬프고도 엄숙한 표정에서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의 반독재 투쟁 풍경이 전형화되어 드러난다. 많은 대학생과 노동자들의 격렬한 전투와 더불어 고문·분신·투신 정국에서 젊은 꽃송이들의 스러짐은, 결국 그들이 싸웠던 거리에 숭고하고도 장엄한 비극적 장면을 살아남은 우리에게 남겼다. 불의에 '저항'하다가 그 힘에 굴복하지 않은 '죽음'은 장엄하다. 박종철이 그랬고, 이한열도 그랬다. 뿐인가 숱한 민주열사와 노동자들의 외침과 죽음 또한 그랬다. 이인철이 거리에서 취재한 이 두 점의 작품이 어떤 최루성 장치 없이 사실만을 건조하게 제시하면서도 우리에게 먹먹한 가슴의 통증을 남기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인철_젊은날의 초상-2_판화_64×100cm_1991

이인철은 바로 이 두 장면을 통해서 1980~1990년대 초반의 시대성을 정교하게 반영해냈다. 단단하고 빈틈없이 정밀한 형태감. 목판의 나뭇결과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칼의 운행(등장인물의 얼굴과 의복 부분)은 마치 한지 위에 얹힌 세필의 먹 필선이나 동판화 에칭의 그것처럼 빈틈없이 정갈하다. 동시에 단단한 형태감과 유연한 칼의 운행은 밀도 높은 화면을 견인해냈다. 목판화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서사적 내용과 기술과 숙련성이 두루 엮여서 수준 높은 미적 전형성을 확보한 리얼리즘의 수작이라 하겠다.

 

이인철_김씨_판화_50×32cm_1991

이런 서사성과는 달리 서정성을 담지한 리얼리스틱한 일군의 작품들도 중요하다. 오월 광주의 회한을 격렬한 감정과 회한으로 표현해낸 죽음의 변주곡, 1989」「마침내 망월동에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다, 1991, 노동자와 도시 서민의 아픔과 슬픔의 소외된 일상성을 포착한 우리들의 일상, 1987」「산성비가 내린다, 1989」「보이지 않는 손, 1990」「김씨, 1991」「동트는 새벽에, 1990」「신혼의 이씨, 1992」「가족, 1992」「거리풍경, 1991」「술집 풍경, 1992」「아침, 1992등의 다소 건조한 서민들의 계급적 서정으로 연결된다. 모두 이웃들의 모습을 연민으로 바라본 시선이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감정적 입장(주관적 표현성)을 절제하면서 대상과의 일정한 거리두기의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려는 의도가 도드라진 작업들이다. 그중에서도 풍경인 마침내 망월동에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다와 인물인 김씨, 1991」「신혼의 이씨, 1992가 주목된다. 전자는 작가의 내적인 분노와 슬픔이 격렬한 표현적 풍경으로 상징화된 점이, 후자는 노동자의 실존적 고민이 은밀하고 고요하게 배어나오고 있다는 점에서 상호 대비되면서도 동시에 돋보인다. 그런데 냉정하고도 차갑게 대상과 일정한 거리두기를 유지하는 관찰자 시점에서 극사실적인 기법을 구사하는 이인철의 형식에서, 이렇듯 작품을 보는 이의 감정을 자극하는 서정성이 도드라지는 점이 놀랍다. 서사적인 장면이든 서정적인 화면이든 가리지 않고 이인철의 화면에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는 뜻이다. 그 이유가 뭘까. 1980년대라는 시대를 함께 겪은 정서 때문일까. 아니면 그와 나의 세계에 대한 개별적 인식이나 감성이 어떤 공통의 분모를 가져서일까. 단언하기 어렵지만 유추해본다면, 그것은 아마도 생래적으로 폭력적 현상에 대한 거부라는 본능의 바탕에, 저항에의 의지와 현실 인식이 더해서였을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당시 민중미술이나 비판적 형상성을 추구하던 작가들 상당수가 그랬다. 아니, 19876월 혁명에 임하던 시민 거의 모두의 태도가 그랬다. 그런 각자의 뜨거운 경험과 겹치는 이인철의 도상에서, 인간적 감정을 함께 공유하게 되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이인철의 이런 서정적 형상성은, 그림의 단순한 소재를 넘어서서 타자와 공유 가능한 정서적 지점을 포착해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홀로 격리된 골방이 아닌 시민과 동지들이 "거리에서" 함께 보고 겪었던 지점, 현장을 즉물적으로 겪었던 체험을 이인철 특유의 목판화 형식으로 진술함으로 확보하게 되는 전형성으로 말이다. 이는 이인철의 목판화가 90년대 이후 그의 디지털 회화와 조형적 문법이나 양식이 아닌 태도로서 구별되는 이유이기도 하다(물론 이 말은 그의 디지털 회화와 비교하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이인철의 디지털 회화는 또 그 나름대로 독립적 장르적 특성과 장점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오해 없으시길...).

 

이인철_마침내 망월동에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다._판화_57×43cm_1991

3. 리놀륨(Linoleum)은 정교한 칼의 운행이 유효한 재료다. 목판에 비하자면 상대적으로 편한 판(Plate)의 유연한 질료감 때문이다. 이인철은 그런 고무판의 속성을 잘 활용했다. 그러나 이인철은 단단하고 다소 거친 목판화에서도 그 정교한 호흡을 놓치지 않았다. 이인철 판화의 독자적 형식을 산출한 이 재료와 칼의 구사 기법은, 공학자나 건축설계자의 그것처럼, 혹은 한땀 한땀 뜨는 수예처럼 한칼 한칼의 운행이 꼼꼼하고 정밀하게 계산된 결과다. 기계적으로 보일 만큼 절제를 동반한 형태감과, 칼의 구사와, 제판 기법은 이인철의 체질적 특성과 맞는 것이기도 하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과 그것을 판면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개인적이고 주관적 표현성보다는, 마주한 현상을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인 대상성으로 분석하고 서술하려는 리얼리스트의 판각법에 잘 어울리는 장르란 뜻이다. 또 시각적인 맛과 효과를 유도하는 이인철의 계산된 칼질의 매력(꼼꼼한 장인성)에 바탕한 것이라, 이는 기존 민중미술의 거칠고도 속도감 있는 기법이나 언술들과는 다른 매력을 동반한다. 그리고 이런 특징들은 이인철이 90년대 중반 판화와 결별하고 극한적인 장인성과 디테일을 요하는 3D 회화로 그의 미디어를 이주하는 체질적 원인도 된다. 리놀륨과 목판화는 기본적으로 밑그림-판각-프린팅이라는 과정으로 구성된다. 밑그림에서는 작품의 내용·화면구성·언어 등이 결정되고, 판각에서는 작가의 체질·표현법·어법 등이 드러난다. 그리고 프린팅에서는 잉킹과 찍기라는 균질한 복수성의 기계적 프로세스가 반복된다. 한마디로 회화적 감성과 몸을 통한 노동, 그리고 규칙적이고도 정교한 장인성이 필요한 장르라는 의미다. 이인철의 작업은 이 셋 모두 담기에 적합한 양식과 주제를 띈 조형적 특성을 가졌다. 당연히 자신의 판화 감수성과 심미적 체중이 판 위에 실렸기에 이인철 특유의 맛이 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돌아보면, 이인철의 판화는 1980년대 민중미술 목판화의 다소 단순한 형식적 흐름에서 이탈해서 독자적인 표현법의 한 지점을 점유했다고 여겨진다. 이는 민중미술 목판화사에서 귀한 실례다. 당시 민중미술 진영에서 판화가로서 이인철은 나름의 이런 독자성을 확보했던 상태라, 그의 이 반전에 가까운 디지털로의 궤도 변경은 신선한 충격으로 동료 작가들에게 회자 되곤 했다. 그만큼 이인철 판화의 정밀한 칼맛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많은 이들에게 이미 인정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인철은 과감하게 그 장르에 이별을 고하고, 90년대 중반 민중 미술계에서는 전인미답이었던 첨단 3D 디지털 회화(이자 디지털 판화)의 생소한 장르로 이주한 것이었다. 새로운 장르로의 선택과 전회는 물론 작가로선 긍정적인 도전이다. 그러나 한편 그 길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위험한 장정이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물과 식량, 지도나 나침반조차 없이 길 없는 픽셀의 사막에 무모하게 진입한 것이니까. 그게 30여 년 전이다. 당시 첨단이었던 3D 프로그램들은 이제 보편적인 일상적 기술이 되었고, 또 많은 사람이 구사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이인철의 3D 회화작업이 자신만의 정체성과 독자성을 유지하며 지속되고 있는 것은 분명 긍정적이다. 이인철이 미디어 자체에 탐닉하는 스타일리스트가 아니라, 끊임없이 동시대 현실의 모순을 포착하고 저항하는 내용을 작품으로 구현하고 발언하는 '작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서로 다른 장르, 즉 물리적·물질적 판화와 비물질적인 디지털이지만 이를 관통하는 이인철식 세계관과 리얼리즘의 구현이라서 그렇기도 하고. 그러나, 상대적으로, 목판화계에선 이런 이인철의 공백이 아쉽다. 80년대 왕성했던 민중미술과 비판적 형상미술 목판화의 미술운동으로서의 신명과 전투성은 90년대 초반 문민정부 시기 이후 점차 화단 변방으로 사라지고, 바뀐 사회 문화적 환경으로 인해 여러 목판화 작가들도 생계를 위해 지방이나 시골로 거처를 옮기면서 사실상 목판화는 그 시대적 소명을 다한 것처럼 보이는 시기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이인철의 장르 변경도 다른 작가들의 이주와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다만 타 작가들은 지역에 은거했더라도 조각도를 갈며 은인자중 계속 목판화를 지속했음에 비해, 이인철은 디지털회화로 장르를 바꾼 점만 달랐을 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이인철의 목판화 공백을 아쉬워하는 것이다. 90년대 초중반 만개한 목판화 기량이 절정일 때, 그리하여 그 이후를 더 기대하던 터에 갑자기 조각도를 놓고 총잡이 '셰인'처럼 떠난 칼잽이 목판화가 이인철이 말이다. 비록 그는 디지털 회화로 자기 길을 표표히 갔을지라도, 남아서 그 뒷모습을 보는 이의 아쉬움은 얼마나 컸을 것인가. 하물며 지속적으로 80년대 이후 목판화의 진행을 비평적으로 주목하는 나 같은 사람은 한국현대목판화에서 사라진 리얼리즘의 정수를 아쉬워하는 것이다. 이인철은 한국현대목판화사에서 정원철과 더불어 가장 정교한 목판화 판각법을 구사한 작가다. 그래서 짧은 10여 년간 100여 점만의 목판화를 남긴 게 더 아쉽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10년 정도 더 작업해서 작품을 300점 정도라도 남겼다면 1990년대 목판화사는 훨씬 풍부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4. 어떤 시대든 그 시대를 견디는 건 모든 이들이 힘들지만, 그들을 관찰하고 작업으로 옮기는 작가는 더 아프고 괴롭다. 함께 겪은 통증을 작업으로 진술하거나 표현하는 이중고통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인철은 엄혹했던 1980년대에 부조리한 권력과 폭력이 작동했던 사회의, 사람살이에 대한 관찰과 이미지 채집을 멈추지 않고 작업으로 남겼다. 그것은 통증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응시한 결과로, 안락한 머무름이 부재한 '거리'라는 공간에서 타고난 아웃사이더의 더듬이를 가진 채 떠도는 불편한 리얼리스트의 모습이다. 거리에서 사람들의 삶을 보고 표현하는 표류는 쓸 수 있으되 정착는 쓸 수 없는, 그야말로 '작가'로서 감내해내야만 하는 태도로 무장한 모습으로 말이다. 어렵고 힘들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지난 시기 이인철 목판화를 일별하다가 보니, 그에게 위로의 술 한잔 사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리에서... # 이 글은 2021년 부산민주공원에서 열렸던 이인철-지구표류기도록 서문에서, 목판화에 관계된 부분을 발췌 보완한 것임을 밝힙니다. 김진하

 

 

나무아트의 한국현대목판화 발굴 프로젝트 두 번째 작가로 이인철씨가 호출되어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개막되었다.

 

이 전시는 이인철씨의 80년대 부터 90년대 초반까지의 독자적인 판화작업으로,

사진 몽타주처럼 극사실로 재현한 작품이다.

 

오래전부터 그의 명성은 익히 들은 바 있으나 고작 한두 점을 본 것에 불과한데,

페이스북에 소개된 예고편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유연한 칼의 흐름에 의한 정밀한 형태감에서

작가의 강렬한 저항감을 느껴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시 개막식을 맞은 지난 18일 전시를 보러 가기 위해

찌뿌둥한 몸을 끌고 남대문사우나에 가서 잠시 쉰다는 게, 그만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눈을 떠보니 개막 시간이 지나 부리나케 달려갔는데,

이미 많은 분은 뒤풀이에 가고 작가 이인철을 비롯하여 김진하관장, 최석태, 김도수,

김영진, 박진화, 황준연씨 등 10여 명이 남아 전시를 관람하고 있었다.

 

그의 초창기 작품은 한두 점 보았으나 이렇게 많은 작품을

한꺼번에 대하는 것은 처음이라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마치 ‘87 민주항쟁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아련한 기억을 불러일으켰는데,

군부 시절보다 더 음흉한 검부 시대라 다시 거리로 뛰쳐 나가고 싶었다.

 

산적처럼 생긴 작가의 외모처럼, 그의 칼춤은 능수능란했다.

요즘은 3D 디지털 그림으로 바꾸어 신식 작업을 하는데, 아날로그 시절로 되돌리고 싶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미술평론가 김진하의 상세한 평으로 대신한다.

 

이인철의 1980년대 목판화 - 거리에서 보낸 한 철

.

1. 알만한 사람은 알듯 이인철은 부산수산대학 출신이다. 그림판에 넘치는 그 흔하고 뻔한 미대 출신이 아니다. 그런데도 대학을 졸업하고 무작정 상경해서 화가가 되었다. 서울에서 처음 만난 일군의 화가들이 민중미술 운동의 중심이 되는 작가들이었다. 서울미술공동체라는 미술운동 단체 멤버들이었고, 이인철도 창립회원으로 가입해서 함께 활동을 시작한다. 1984년경이다. 이어서 1985년 전국단위 문화운동 단체인 민족미술협회가 창립되면서 이인철도 자연스레 민미협 회원이 된다. 이는 시위하는 바가 크다. 미술계와 별 인연이 없는 사람이 현실 비판적인 미술운동에 자연스럽게 몸을 담근다는 거, 그의 기질 혹은 사유에 사회나 역사에 대해 곧추선 의식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는 근 4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인철 작업을 관통하는 주제 의식의 뼈대이기도 하다. 역사적 사실, 동시대 현실, 그리고 미래에의 전망을 통시적으로 통찰하면서도 동시에 당대 현실에 미술로 개입하고 실천하는 행동 말이다.

 

1980년대의 저항 이후 지금까지 제도권 화단의 아웃사이더로 표류하면서도 이인철은 초지일관 현실과의 접점을 찾는 내용의 작업을 지속해왔다. 상업성과는 거리가 먼 괴롭고도 지난한 과정이었다. 80년에는 목판화로 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컴퓨터그래픽으로 스스로를 더 고립시키며 작업해 왔다. 물론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제도권 화단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했다. 리얼리스트로서 미학적 이념을 현실에 정착시키려는 작가 의식은 현실과의 불화를 동반할 수밖에 없는 범, 그 지난하고도 외로운 과정이 자신의 미학적 입장을 작업에 정착시키는 것이기에.

이번 전시와 이 도록은 그런 이인철의 활동 중에서 초기인 1980년대 부터 90년대 초반까지의 목(고무)판화 작업으로 구성된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수도 있는 기간이다. 그의 서울미술공동체민족미술협회회원 시절의 주요 장르다. 당시 목판화는 민중미술의 핵심으로 대 사회적 메시지와 복수미술로서의 가능성에 크게 고무된 장르였다. 1985년부터 시작된 이인철의 목(고무)판화는 1990년대 초반까지 대략 10여년간 진행되었다. 이 시기 이인철은 한국 판화사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킬만한 독자적 양식과 기법의 작업을 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부터의 디지털 작업으로의 전환은 이인철의 판화작업을 이후 좀처럼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시간은 30여 년이 흐르고 이인철의 판화작업들도 우리들의 뇌리에서 상당 부분 잊혀졌다. 아쉬운 일이다. 그래서 본 나무아트 프로그램인 <한국현대목판화 발굴 프로젝트>의 두 번째 작가로 이인철의 목판화를 조망해보고자 한다.

 

2. 19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진행된 이인철의 목판화와 리놀륨(Linoleum)판화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철저하게 사진적 몽타주를 극사실로 재현한 판각법과, 외곽선에 의한 형태로 인물의 성격을 드러낸 <바람 부는 날, 1985><짤라 버릴까부다, 1986><마누라 나도, 1987><갈증, 1988><어떤 수인, 1988> 등과 같은 일련의 형식이 있다. 이런 위트·풍자·해학 등으로 군부독재 시기를 비틀며 비판한 내용의 선각 작업이 대략 1985~1988년경 먼저 시도된 형식이고, 동시대를 응시하면서 불의한 권력에 의한 모순을 정면으로 담아낸 증언이자 기록의 정밀한 판각법이 86~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는 경향이다. 이 글에서는 이인철 특유의 양식이자 대표작으로 여겨지는 정교한 형식의 판화를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겠다.

 

먼저 눈에 띄는 건 역시 과도기적 특징의 작업이면서도 반5·반미·반제를 선명한 콘트라스트 형식으로 도상화한 <거부의 몸짓, 1985><스포츠 공화국의 상과 하, 1986><자유의 여신상, 1986><안녕히 가세요, 1987><반전 반핵, 1989> 등과 같은 작품이다. 작가가 의도한 메시지와 80년대 민중미술에서 두드러지는 대하서사적 시각 문법이 선명하다.

이어서 좀 더 정교해진 칼맛으로 형상화한 동시대 현실 풍경. 80~90년대 거리에서 마주치는 현상들에 대한 일상적 서사성이 두드러지는 작품들이 이어진다. <머물지 못하는 사람들, 1985><불꽃으로 다시 살아나, 1989><죽음의 변주곡, 1989><역사의 기록, 1989><젊은 날의 초상-1, 1991><체포, 1991><죽음, 죽음, 죽음, 1991><젊은 날의 초상-2, 1992>등과 같은 동시대 민중의 삶의 모습이나, 시위현장과 거기서 산화한 젊은이들에 대한 진중한 슬픔의 묘사가 눈에 띈다.

 

특히 이인철의 판화 중 가장 큰 대작인 <젊은 날의 초상-1><젊은 날의 초상-2>는 한국 리얼리즘 목판화의 백미라고 여겨진다. 시위 현장에서 백골단과 젊은 육체를 부딪치며 전투를 벌이는 청년들과, 이어서 그 청년 중 누군가의 상여가 거리를 행진하는 장면이다. 운구하는 대학생들의 슬프고도 엄숙한 표정에서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의 반독재 투쟁 풍경이 전형화되어 드러난다. 많은 대학생과 노동자들의 격렬한 전투와 더불어 고문·분신·투신 정국에서 젊은 꽃송이들의 스러짐은, 결국 그들이 싸웠던 거리에 숭고하고도 장엄한 비극적 장면을 살아남은 우리에게 남겼다. 불의에 저항하다가 그 힘에 굴복하지 않은 죽음은 장엄하다. 박종철이 그랬고, 이한열도 그랬다. 뿐인가 숱한 민주열사와 노동자들의 외침과 죽음 또한 그랬다. 이인철이 거리에서 취재한 이 두 점의 작품이 어떤 최루성 장치 없이 사실만을 건조하게 제시하면서도 우리에게 먹먹한 가슴의 통증을 남기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인철은 바로 이 두 장면을 통해서 1980~1990년대 초반의 시대성을 정교하게 반영해냈다. 단단하고 빈틈없이 정밀한 형태감. 목판의 나뭇결과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칼의 운행(등장인물의 얼굴과 의복 부분)은 마치 한지 위에 얹힌 세필의 먹 필선이나 동판화 에칭의 그것처럼 빈틈없이 정갈하다. 동시에 단단한 형태감과 유연한 칼의 운행은 밀도 높은 화면을 견인해냈다. 목판화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서사적 내용과 기술과 숙련성이 두루 엮여서 수준 높은 미적 전형성을 확보한 리얼리즘의 수작이라 하겠다.

이런 서사성과는 달리 서정성을 담지한 리얼리스틱한 일군의 작품들도 중요하다. 오월 광주의 회한을 격렬한 감정과 회한으로 표현해낸 <죽음의 변주곡, 1989><마침내 망월동에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다, 1991>, 노동자와 도시 서민의 아픔과 슬픔의 소외된 일상성을 포착한 <우리들의 일상, 1987><산성비가 내린다, 1989><보이지 않는 손, 1990><김씨, 1991><동트는 새벽에, 1990><신혼의 이씨, 1992><가족, 1992><거리풍경, 1991><술집 풍경, 1992><아침, 1992> 등의 다소 건조한 서민들의 계급적 서정으로 연결된다. 모두 이웃들의 모습을 연민으로 바라본 시선이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감정적 입장(주관적 표현성)을 절제하면서 대상과의 일정한 거리두기의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려는 의도가 도드라진 작업들이다. 그중에서도 풍경인 <마침내 망월동에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다>와 인물인 <김씨, 1991><신혼의 이씨, 1992>가 주목된다. 전자는 작가의 내적인 분노와 슬픔이 격렬한 표현적 풍경으로 상징화된 점이, 후자는 노동자의 실존적 고민이 은밀하고 고요하게 배어나오고 있다는 점에서 상호 대비되면서도 동시에 돋보인다.

 

그런데 냉정하고도 차갑게 대상과 일정한 거리두기를 유지하는 관찰자 시점에서 극사실적인 기법을 구사하는 이인철의 형식에서, 이렇듯 작품을 보는 이의 감정을 자극하는 서정성이 도드라지는 점이 놀랍다. 서사적인 장면이든 서정적인 화면이든 가리지 않고 이인철의 화면에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는 뜻이다. 그 이유가 뭘까. 1980년대라는 시대를 함께 겪은 정서 때문일까. 아니면 그와 나의 세계에 대한 개별적 인식이나 감성이 어떤 공통의 분모를 가져서일까.

단언하기 어렵지만 유추해본다면, 그것은 아마도 생래적으로 폭력적 현상에 대한 거부라는 본능의 바탕에, 저항에의 의지와 현실 인식이 더해서였을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당시 민중미술이나 비판적 형상성을 추구하던 작가들 상당수가 그랬다. 아니, 19876월 혁명에 임하던 시민 거의 모두의 태도가 그랬다. 그런 각자의 뜨거운 경험과 겹치는 이인철의 도상에서, 인간적 감정을 함께 공유하게 되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이인철의 이런 서정적 형상성은, 그림의 단순한 소재를 넘어서서 타자와 공유 가능한 정서적 지점을 포착해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홀로 격리된 골방이 아닌 시민과 동지들이 거리에서함께 보고 겪었던 지점, 현장을 즉물적으로 겪었던 체험을 이인철 특유의 목판화 형식으로 진술함으로 확보하게 되는 전형성으로 말이다. 이는 이인철의 목판화가 90년대 이후 그의 디지털 회화와 조형적 문법이나 양식이 아닌 태도로서 구별되는 이유이기도 하다(물론 이 말은 그의 디지털 회화와 비교하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이인철의 디지털 회화는 또 그 나름대로 독립적 장르적 특성과 장점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오해 없으시길).

 

3. 리놀륨(Linoleum)은 정교한 칼의 운행이 유효한 재료다. 목판에 비하자면 상대적으로 편한 판(Plate)의 유연한 질료감 때문이다. 이인철은 그런 고무판의 속성을 잘 활용했다. 그러나 이인철은 단단하고 다소 거친 목판화에서도 그 정교한 호흡을 놓치지 않았다. 이인철 판화의 독자적 형식을 산출한 이 재료와 칼의 구사 기법은, 공학자나 건축설계자의 그것처럼, 혹은 한땀 한땀 뜨는 수예처럼 한칼 한칼의 운행이 꼼꼼하고 정밀하게 계산된 결과다. 기계적으로 보일 만큼 절제를 동반한 형태감과, 칼의 구사와, 제판 기법은 이인철의 체질적 특성과 맞는 것이기도 하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과 그것을 판면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개인적이고 주관적 표현성보다는, 마주한 현상을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인 대상성으로 분석하고 서술하려는 리얼리스트의 판각법에 잘 어울리는 장르란 뜻이다. 또 시각적인 맛과 효과를 유도하는 이인철의 계산된 칼질의 매력(꼼꼼한 장인성)에 바탕한 것이라, 이는 기존 민중미술의 거칠고도 속도감 있는 기법이나 언술들과는 다른 매력을 동반한다. 그리고 이런 특징들은 이인철이 90년대 중반 판화와 결별하고 극한적인 장인성과 디테일을 요하는 3D 회화로 그의 미디어를 이주하는 체질적 원인도 된다.

리놀륨과 목판화는 기본적으로 밑그림-판각-프린팅이라는 과정으로 구성된다. 밑그림에서는 작품의 내용·화면구성·언어 등이 결정되고, 판각에서는 작가의 체질·표현법·어법 등이 드러난다. 그리고 프린팅에서는 잉킹과 찍기라는 균질한 복수성의 기계적 프로세스가 반복된다. 한마디로 회화적 감성과 몸을 통한 노동, 그리고 규칙적이고도 정교한 장인성이 필요한 장르라는 의미다. 이인철의 작업은 이 셋 모두 담기에 적합한 양식과 주제를 띈 조형적 특성을 가졌다. 당연히 자신의 판화 감수성과 심미적 체중이 판 위에 실렸기에 이인철 특유의 맛이 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돌아보면, 이인철의 판화는 1980년대 민중미술 목판화의 다소 단순한 형식적 흐름에서 이탈해서 독자적인 표현법의 한 지점을 점유했다고 여겨진다. 이는 민중미술 목판화사에서 귀한 실례다.

 

당시 민중미술 진영에서 판화가로서 이인철은 나름의 이런 독자성을 확보했던 상태라, 그의 이 반전에 가까운디지털로의 궤도 변경은 신선한 충격으로 동료 작가들에게 회자 되곤 했다. 그만큼 이인철 판화의 정밀한 칼맛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많은 이들에게 이미 인정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인철은 과감하게 그 장르에 이별을 고하고, 90년대 중반 민중 미술계에서는 전인미답이었던 첨단 3D 디지털 회화(이자 디지털 판화)의 생소한 장르로 이주한 것이었다.

새로운 장르로의 선택과 전회는 물론 작가로선 긍정적인 도전이다. 그러나 한편 그 길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위험한 장정이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물과 식량, 지도나 나침반조차 없이 길 없는 픽셀의 사막에 무모하게 진입한 것이니까. 그게 30여 년 전이다. 당시 첨단이었던 3D 프로그램들은 이제 보편적인 일상적 기술이 되었고, 또 많은 사람이 구사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이인철의 3D 회화작업이 자신만의 정체성과 독자성을 유지하며 지속되고 있는 것은 분명 긍정적이다. 이인철이 미디어 자체에 탐닉하는 스타일리스트가 아니라, 끊임없이 동시대 현실의 모순을 포착하고 저항하는 내용을 작품으로 구현하고 발언하는 작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서로 다른 장르, 즉 물리적·물질적 판화와 비물질적인 디지털이지만 이를 관통하는 이인철식 세계관과 리얼리즘의 구현이라서 그렇기도 하고.

 

그러나, 상대적으로, 목판화계에선 이런 이인철의 공백이 아쉽다. 80년대 왕성했던 민중미술과 비판적 형상미술 목판화의 미술운동으로서의 신명과 전투성은 90년대 초반 문민정부 시기 이후 점차 화단 변방으로 사라지고, 바뀐 사회 문화적 환경으로 인해 여러 목판화 작가들도 생계를 위해 지방이나 시골로 거처를 옮기면서 사실상 목판화는 그 시대적 소명을 다한 것처럼 보이는 시기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이인철의 장르 변경도 다른 작가들의 이주와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다만 타 작가들은 지역에 은거했더라도 조각도를 갈며 은인자중 계속 목판화를 지속했음에 비해, 이인철은 디지털회화로 장르를 바꾼 점만 달랐을 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이인철의 목판화 공백을 아쉬워하는 것이다.

90년대 초중반 만개한 목판화 기량이 절정일 때, 그리하여 그 이후를 더 기대하던 터에 갑자기 조각도를 놓고 총잡이 셰인처럼 떠난 칼잽이 목판화가 이인철이 말이다. 비록 그는 디지털 회화로 자기 길을 표표히 갔을지라도, 남아서 그 뒷모습을 보는 이의 아쉬움은 얼마나 컸을 것인가. 하물며 지속적으로 80년대 이후 목판화의 진행을 비평적으로 주목하는 나 같은 사람은 한국현대목판화에서 사라진 리얼리즘의 정수를 아쉬워하는 것이다. 이인철은 한국현대목판화사에서 정원철과 더불어 가장 정교한 목판화 판각법을 구사한 작가다. 그래서 짧은 10여 년간 100여 점만의 목판화를 남긴 게 더 아쉽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10년 정도 더 작업해서 작품을 300점 정도라도 남겼다면 1990년대 목판화사는 훨씬 풍부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4. 어떤 시대든 그 시대를 견디는 건 모든 이들이 힘들지만, 그들을 관찰하고 작업으로 옮기는 작가는 더 아프고 괴롭다. 함께 겪은 통증을 작업으로 진술하거나 표현하는 이중고통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인철은 엄혹했던 1980년대에 부조리한 권력과 폭력이 작동했던 사회의, 사람살이에 대한 관찰과 이미지 채집을 멈추지 않고 작업으로 남겼다. 그것은 통증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응시한 결과로, 안락한 머무름이 부재한 거리라는 공간에서 타고난 아웃사이더의 더듬이를 가진 채 떠도는 불편한 리얼리스트의 모습이다. 거리에서 사람들의 삶을 보고 표현하는 표류는 쓸 수 있으되 정착는 쓸 수 없는, 그야말로 작가로서 감내해내야만 하는 태도로 무장한 모습으로 말이다. 어렵고 힘들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지난 시기 이인철 목판화를 일별하다가 보니, 그에게 위로의 술 한잔 사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리에서

.

김진하(미술평론가)

 

뒤풀이 장소인 낭만으로 갔더니, 김정헌씨를 비롯하여 김재홍, 류연복, 장경호,

박불똥, 이태호, 이재민, 정세학, 양상용, 이현정, 전용일, 칡뫼김구, 김이하,

안원규, 조신호, 임경일, 성기준, 박은태씨 등 많은 분이 모여 있었다.

 

그런데 길거리 게릴라전을 펼치고 다니는 스트리트 아티스트 이태호씨가

작업 도구를 챙겨와 낭만벽에다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새기기 시작했다.

 

한때는 김수영시인 흉상을 거리에 새겼으나 요즘은 홍범도 장군을 새기는데,

새길 때마다 지나치는 행인들이 시비를 건단다.

 

이곳에서는 너도나도 반기며 서명까지 하는데,

예술가들은 작품을 알아보나 일반인들 눈에는 낙서로 보이는 모양이다.

한때는 벌금을 3백만원이나 문 적도 있단다.

 

그날은 김진하관장이 모자를 들고 다니며 뒤풀이 비용을 걷었으나,

마신 술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을 것이다.

 

술도 취했지만, 파장이라 먼저 일어나야 했다.

 

지하철 타러 가다 유목민에 잠시 들렸는데,

주인장 대신 주홍수씨와 허준씨가 반겼는데, 안쪽에는 황예숙 일행이 있었다.

 

이런 반가운 분들의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 들린 것이다.

 

이인철의 칼춤 거리에서30일까지니, 인사동 가는 걸음에 꼭 보시기 바란다.

 

사진, / 조문호

 

'plan B'를 위하여

나무아트 기금마련

2023_1011 2023_1016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김보중_김상구_김억_김재홍_김정헌_김주호

김준권_김진열_류연복_박진화_손기환_송창

신학철_안창홍_윤여걸_이동환_이인철_이태호

이흥덕_장경호_정복수_주재환_최경선_최병민

 

후원 / 예술하라_네오룩

 

관람시간 / 12:00pm~06:00pm

 

57th 갤러리

57th GALLERY

서울 종로구 율곡로317

(송현동 57번지) 2

Tel. +82.(0)2.733.2657

www.57gallery.co.kr

@57gallery_official

 

나무아트... 1. 지난 35여년간 '삶의 미술''비판적 형상성'을 지향하며, 이념대립 너머 개별 미술가들의 실존 현장성 미술을 중시해온 나무아트.

 

김보중_나무에 오르다_종이에 아크릴채색_40×30cm_2020
김억 _ 제주용연 _ 한지에 목판 _99×31cm_2023
김재홍_거인의 잠-202105-1_아크릴채색_130.3×97cm_2021
김정헌_풀,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91cm_2021
김준권_자작나무숲의 가을2_유성목판_32×50cm_2018
류연복 _ 겨울삼선암 _ 소멸다색판화 _60×30cm
박진화 _ 초상 _ 연작
손기환 _Wow !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_50×50cm_2023

2. 현존하는 대한민국 유일의 포괄적 공공 이익에 복무하고 있는 나무아트.

 

신학철 _ Ⅰ -4  한국현대사 _2013
이동환 _ 뒷다리에 힘 팍주고 … _ 유성목판 _25×20cm_2023
이인철 _ 사과 - 탄
이흥덕 _ 소녀 _ 캔버스에 유채 _33.5×33.5cm_2023
장경호 _ 묵시 - 순천
최경선 _ 비오톱의 저녁 _ 캔버스에 유채 _60.5×72.7cm_2017
송창 _ 섬강풍경 _ 캔버스에 유채 _31×41cm_2004

3. 공간의 역사와 성격을 스스로 아카이빙 하며 한국 동시대 미술사의 뿌리이자 줄기가 되고 있는 공간. 그 미술 공간의 디렉터, 비평가, 미술사가로 현장에서의 노동을 동시에 해내고 있는 고투에 찬 미술지식 노동자 김진하. 노역의 퀄리티를 갖춘 채 동요하지 않는 정신. 해방 이후 이런 전시공간과 전문가는 일찌기 없었다고 여겨집니다. '나무아트'라는 토대를 바탕으로 더욱 더 한국 당대 미술에 기여할 수 있기 바라며, 이 행사에 저도 마음을 보탭니다. 강성원

 

씨앗페

씨드머니 조성을 위한 아티스트 페스티벌展

Seed money for Artist Festival

2023_0321 ▶ 2023_0402

이인철 / 김씨 / 한지에 목판화 / 1991

 

참여작가

김계환_김수길_김억_김영미_김영진_김우성

김이하_김재홍_김정헌_김준권_김진하

김현철_라인석_류연복_박생광_박성남

박성완_박야일_박은태_박항률_박향미

박흥순_배동신_백경중_백승기_서공임

서성환_손은영_신학철_연규혜_윤여걸

이수철_이익태_이인철_이채린_이태호

이택희_이홍원_이흥렬_장경호_정영신

조문호_조이락_주재환_최병수_최애경

최윤정_최은경_칡뫼김구_허진_홍선웅

 

인디프레스_서울

INDIPRESS_SEOUL

서울 종로구 효자로 31(통의동 7-25번지)

Tel. 070.7686.1125

 

주최 / 노회찬재단 / 유정주(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 북서울신용협동조합 / 사단법인 풀빵 / 서울민예총 /서울시협동조합협의회 / (주)오디오가이 / 인디프레스 갤러리 / 예술의숲 사회적협동조합 / 전태일재단 /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 / 한국사회가치연대기금 / 한국스마트협동조합 / / 주관 / 한국스마트협동조합 / / 후원 / 김태완(인천사랑병원 이사장)

 

예술인이 겪는 고리대금 현실을 알리고 저금리 예술인 상호부조대출 상품을 만들기 위한 "씨앗페"가

'인디프레스' 갤러리에서 3월 21일에서 4월 2일까지 열립니다.

 

아래에 소개한 작품외에도 볼 만한 작품이 많은데다, 전시기간 내내 다양한 공연이 펼쳐집니다.

봄바람 맞으며 님도 보고 뽕도 딸 좋은 기회이오니, 많은 분들의 관심과 성원을 바랍니다.

 

 공연 프로그램-

3월 22일 (수): with앙상블(해설이 있는 음악회) 

3월 23일 (목) 

삐에로, 남성듀오 라떼, 봄비, 노블, 

꿀밤나무, 함지, 이산, 라포마, 밴드Hub

3월 24일 (금): 전시 오프닝

오프닝 퍼포먼스: 이익태 작가, 윤장현 무용가, 권바라 무용가

3월 25일 (토)  여유와 설빈, 파르베, 길가는밴드 장현호, 

곽푸른하늘, 박준, 쾅프로그램, 소리꾼 박가빈, 

천용성, 단편선, 초륜, 신정하, 허클베리핀

3월 26일 (일) 

호와호, 단아모와 친구들, 고효경, 강호중, 윤선애, 

자이, 싱어송라이터 맑은, 권나무, Jinu Konda, 서수진 Trio, 

출장작곡가 김동산, 바디뮤직 코리아 피날레 퍼포먼스

3월 27일 (월) 

유동혁, 이서영, 사토유키에, 성상식

3월 28일 (화) 

주로키, 손현숙, 김가영, 박첼너

 

작품 구매로 예술인들의 대출기금 마련을 도와주실 분은 한국스마트협동조합(02-764-3114)으로 연락바랍니다.  

 

이익태 / 그대에게 꽃을 / 한지에 아크릴 / 50X50cm / 2021
장경호 / '절벽' 부분도 / 캔버스에 유채 / 1988
박흥순 / 몽골의길 / 캔버스의 오일 / 53X72.7cm / 2016
윤여걸 / 강건너 저편1 / 목판에 채색 / 23.5X23.5cm / 2020
이흥덕 / 무제 / 캔버스에 유채 / 23X23cm / 2016
라인석 / 휘어진 세계로 부터 캠밸수프머시룸1 / pigment print on matta paper / 50X40cm / 2021
이수철 ;/ 포르코 당신은 어디 있나요 / 70X46.6cm / pigment print on paper / 2011
최병수 / 장산곶매, 1990, 판화, 98 x 68cm
류연복 / 귀면암-봄 / 30x60cm / 한지에 목판화 / 2007
김정헌 / 캔버스에 유채 /
김진하 / 귀가1-4 / 40x50cmx4 / pigment print on paper /2016
이태호 / 푸른 김수영 / 27x37cm / 한지에 목판화 / 2020
이홍원 /구름과 달과 아이들, 2022, 한지에 아크릴, 50 x 40cm
민정기 / 선암사목련, 2023, 캔버스에 유채, 53.0X45.5cm
박성남/ Kenosis 귀로, 2023, Mised media, 20*50cm
박은태 / 다리 / 45x33cm / 캔버스에 아크릴 / 2020
주재환
칡뫼김구;/ 늦은 퇴근 / 72.7x 60.6cm / 한지에 먹 채색 / 2022
김이하 / 늪 / 36.8x24.3cm / pigment print on paper / 2022
이흥렬 / 지도 내향리 느티나무 / 92x62cm / pigment print on paper / 2022
이채린 / 소스 2023-2 / 42.0x59.4cm /캔버스에 유화 / 2023
손은영 / 밤의 집 / 50x70cm / pigment print on paper /2021
김영진 / 대화동 / 65x50cm / 캔버스에 유화 / 2012
김수길 / 길 그리고 바람 / 45,0x53,0cm / pigment print on paper / 2018
정영신 / 전남, 강진 / 75x47.8cm / pigment print on paper / 1988
김우성 / 신원불명 / 90.9x72.7cm / 캔버스에 유채 / 2021
김제홍 / 거인의 잠-장막 / 53x45.5cm / acrylic / 2021
백승기 / 숲의 정령 / 62x72cm / 캔버스에 아크릴 / 2020
손기환 / 산수 / 34x50cm / 목판화 릴리프 / 2014
김준권 / 엉겅퀴 / 36x55cm / 실크스크린 / 2020
신학철 / 쇠뿔이 / 116.5 X 90.5cm / 캔버스에 유채 / 2018
김억 / 폭포 / 18x62cm / 목판화 릴리프 /1996
홍선웅 / 역사의 길 / 20x25cm / 한지에 목판화 / 1989
김영미 / couple / 50x40cm / oil on pallet / 2022
김현철 / 청령포 / 33x53cm / 아사천에 수묵채색 / 2016
박성완 / 광주고 / 53x45cm / 캔버스에 유화 / 2021
박야일 / 색 / 60.6x72.7cm / 천 위에 유채 / 2021
서공임 / 어떤 시선에서는 빛이 나오고 / 50x70cm / 한지에 수간분채 / 2016
최애경 / 무제 / 63x46cm / 한지에 수채 / 2022
서상환 / 기원 / 30x47cm / 한지에 목판화 / 1994
조이락 / 꽃이피다-1757 / 35x47.5cm / 비단에 석채 / 2018
최윤정 / pop kids 80 / 18x26cm / 캔버스에 오일 / 2014
최은경 / 바람이 마침내 물을 건너네 / 72.7x60.6cm / 캔버스에 오일 / 2022
조문호 / 범종 연화당좌 / 80x77cm / pigment print on paper / 1990

 

이명복作, 사라진 꿈, 153 x 208cm,장지에 아크릴, 2023

‘나무아트’ 기획전 ‘무장지대’ 2부가 지난 17일 개막되었다.

 

2월 6일 부터 16일 까지 열린 1부에서는 강재구(사진),김진하(사진), 송창(설치), 이태호(입체), 임종업(대성동마을 스냅+르뽀), 정기현(영상, 설치) 작가가 참여했다.

 

김진하_망각의 한 방법-소원에 대하여_사진몽타_61&times;182cm_2023
강재구_private#1~3_젤라틴 실버 프린트_각 70&times;55cm_2002
송창_大兄-바라보기_스팽글, 필름출력_설치, 232&times;546cm_2020
이태호_분단풍경_여러가지 재료_100&times;85&times;168cm_2021
임종업_대성동-DMZ의 숨겨진 마을_르뽀_도서출판 소통_2021
정기현_topos_도라전망대 설치전경_2021

지난 17일 부터 오는 26일까지 열리는 2부에서는 이명복(회화), 류연복(목판화), 손기환(회화), 이동환(회화+입체),  이인철(디지털 회화) 김억(목판화) 작가가 참여한다.

 

류연복_꽃 한송이_소멸다색목판화_97&times;72cm_2018
손기환_DMZ풍경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20&times;200cm_2015~21
이동환_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같은 풍경_장지에 목탄, 먹, 안료_60;134cm_2023

지난 15일 전시장에 들렸으나 아쉽게도 문이 잠겨 1부를 놓쳐버렸고, 2부는 정영신 동지와 함께 개막시간에 맞추어 찾아 간 것이다,

 

이인철_파주2_디지털 회화_2023
김억_DMZ-백령도에서 고성까지_목판화_2020

김진하관장을 비롯하여 제주의 이명복씨와 김 억, 류연복, 손기환, 이인철씨 등 참여 작가를 두루 만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이승미, 김 구, 장경호, 김은태, 강욱천, 성기준, 정기현씨 등 여러 명이 전시를 관람한 후 '산골물'에서 조촐한 뒤풀이를 가졌다.

 

손기환작

아래는 전시를 기획한 김진하관장의 ‘무장지대’ 서문이다.

 

"1953년 유엔사와 북한의 휴전 협정에 의해 한반도 허리를 가로지르는 군사 분계선과, 그 선을 기준으로 남북 2km의 남방한계선/북방한계선에 의한 비무장지대(DMZ)가 설정되었다.

 

비무장지대. 말 그대로 무장이 해제되어야만 하는 곳. 그러나 현재 동서 256Km, 남북 4Km인 이곳엔 수백 만 개의 지뢰가 설치되어 있을 거라고 전해진다. 게다가 북한 G.P는 북방한계선 남쪽 1.6Km, 남한의 G.P는 남방한계선 북쪽 1.2Km까지 진입된 곳도 있다. 그러니까 양 G.P간 실 거리는 기껏 1Km의 거리. 모두 중화기로 무장한 긴장된 상태다.

 

이인철작

일촉즉발 상태인 이곳이 어찌 비무장지대라고 할 수 있겠는가. 더불어 『비무장지대』라는 네이밍에 근거하자면, 폭 4Km의 이 공간을 제외한 북과 남쪽 국토 전체는 역설적으로 『무장지대』란 뜻이 아닌가.

 

지난 70년 간 우리는 분단 현장 남측 『무장지대』에서 분단 정치, 분단 문화, 여타 분단 이데올로기에 의한 온갖 부조리한 현실을 온 몸으로 겪으며 살아왔다. 국토 어디를 가더라도 만날 수 있는 벙커, 참호, 철조망, 그리고 우리들 일상에 존재하는 군사 시설들... 뿐인가, 과거 교련을 위시한 반공과 군사 교육, 관제 행사 동원, 여타 학술과 문화 예술과 대중문화에까지 드리웠던 검열과 블랙리스트의 기억까지 소환된다.

 

김억 작

그 레드 컴플렉스의 작동은 최근에도 남북 관계를 더 경색 시키고, 한발 더 나가 전쟁 위기까지 부추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 사회적 의제에서 한반도 분단 극복과 무장지대 탈출을 위한 지성적 담론과 사회 문화 운동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이동환작

이런 현실에서, 평소 사회 역사적 주제로 작업을 하던 작가들이 정체된 분단 논의에 파문을 일으키려 함께 이 전시에 참여했다. 이 작가들이 직접 체험한 『무장지대』에 대한 예술적 발언이, 지금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는 분단 논의에 던져 지는 짱돌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 김진하

 

오는 2월 26일까지 열리는 '무장지대'전을 많은 관람바랍니다.

 

류연복작

.

무장지대 武裝地帶

MILITARIZED ZONE in KOREA展 

2023_0206 ▶ 2023_0226 / 월요일 휴관

1부 / 2023_0206 ▶ 2023_0216

2부 / 2023_0217 ▶ 2023_0226

 

참여작가

1부 / 강재구_김진하_송창_이태호_임종업_정기현

2부 / 김억_류연복_손기환_이동환_이명복_이인철

 

관람시간 / 11:00am~05:00pm / 월요일 휴관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82.(0)2.722.7760

 

1953년 유엔사와 북한의 휴전 협정에 의해 한반도 허리를 가로지르는 군사 분계선과, 그 선을 기준으로 남북 2km의 남방한계선/북방한계선에 의한 비무장지대(DMZ)가 설정되었다. ● 비무장지대. 말 그대로 무장이 해제되어야만 하는 곳. 그러나 현재 동서 256Km, 남북 4Km인 이곳엔 수백 만 개의 지뢰가 설치되어 있을 거라고 전해진다. 게다가 북한 G.P는 북방한계선 남쪽 1.6Km, 남한의 G.P는 남방한계선 북쪽 1.2Km까지 진입된 곳도 있다. 그러니까 양 G.P간 실 거리는 기껏 1Km의 거리. 모두 중화기로 무장한 긴장된 상태다. 일촉즉발 상태인 이곳이 어찌 비무장지대라고 할 수 있겠는가. 더불어 『비무장지대』라는 네이밍에 근거하자면, 폭 4Km의 이 공간을 제외한 북과 남쪽 국토 전체는 역설적으로 『무장지대』란 뜻이 아닌가.

 

강재구_private#1~3_젤라틴 실버 프린트_각 70&times;55cm_2002
김진하_망각의 한 방법-소원에 대하여_사진몽타_61&times;182cm_2023
송창_大兄-바라보기_스팽글, 필름출력_설치, 232&times;546cm_2020
이태호_분단풍경_여러가지 재료_100&times;85&times;168cm_2021
임종업_대성동-DMZ의 숨겨진 마을_르뽀_도서출판 소통_2021
정기현_topos_도라전망대 설치전경_2021
김억_DMZ-백령도에서 고성까지_목판화_2020
손기환_DMZ풍경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20&times;200cm_2015~21
이명복_사라진 꿈_장지에 아크릴채색_153&times;208cm_2023
이동환_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같은 풍경_장지에 목탄, 먹, 안료_60&times;134cm_2023
이인철_파주2_디지털 회화_2023
류연복_꽃 한송이_소멸다색목판화_97&times;72cm_2018

지난 70년 간 우리는 분단 현장 남측 『무장지대』에서 분단 정치, 분단 문화, 여타 분단 이데올로기에 의한 온갖 부조리한 현실을 온 몸으로 겪으며 살아왔다. 국토 어디를 가더라도 만날 수 있는 벙커, 참호, 철조망, 그리고 우리들 일상에 존재하는 군사 시설들... 뿐인가, 과거 교련을 위시한 반공과 군사 교육, 관제 행사 동원, 여타 학술과 문화 예술과 대중문화에까지 드리웠던 검열과 블랙리스트의 기억까지 소환된다. ● 그 레드 컴플렉스의 작동은 최근에도 남북 관계를 더 경색 시키고, 한발 더 나가 전쟁 위기까지 부추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 사회적 의제에서 한반도 분단 극복과 무장지대 탈출을 위한 지성적 담론과 사회 문화 운동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 이런 현실에서, 평소 사회 역사적 주제로 작업을 하던 작가들이 정체된 분단 논의에 파문을 일으키려 함께 이 전시에 참여했다. 이 작가들이 직접 체험한 『무장지대』에 대한 예술적 발언이, 지금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는 분단 논의에 던져 지는 짱돌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 김진하

 

Vol.20230205b | 무장지대 武裝地帶 MILITARIZED ZONE in KOREA展

 

‘인사아트센터’ 지하전시장에서 김수영시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거대한 뿌리’전이 지난 22일 개막되어,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성탄절에서야 짬을 낼 수 있었으나 전시장엔 아무도 없었다.

 

조용한 전시장에서 꼼꼼하게 작품들을 살펴볼 수 있었는데,

이태호, 김정헌, 김진하, 강경구, 임옥상, 박재동, 신학철, 노원희,

박 건, 민정기, 박영균, 손기환, 이명복, 이인철, 이흥덕, 정정엽 작가 등

기라성 같은 민중미술가들과 가수 정태춘 등 30여명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출품 작가마다 서사와 주제에 따른 표현이 다양했고,

김수영을 그린 초상화의 표정도 다채로웠다.

 

전시작을 돌아보며 김수영 시인의 시가 떠오르거나

생전의 모습이 생각나는 등 오로지 김수영시인만을 추억하는 시간이 되었다.

 

이 전시는 27일 까지라 보려면 서둘러야 한다.

 

사진, 글 / 조문호

 

 

 

'말하고 싶다' 온라인 전시 동영상 버전입니다.

아래 유튜브 주소를 클릭하면 됩니다

 

youtu.be/d88MiuZ3hoY

 

 

말하고싶다 2020 온라인 전시회를 오픈합니다.

 

-전시 서문-

 

모든 그림은 말을 한다. 나 예쁘죠? 나 아름답죠? 나 새롭죠? 나 놀랍죠? 같이 생각해 보지 않을 래요?......

그러나 다른 말도 있다. 세상에 대한 이야기, 역사에 대한 이야기. 새로운 발견. 현실에 대한 아픔과 분노....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한 편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세상도 아니다.

 

예술의 전당 개관전 때 일이다 당시 안기부가 이러 이러한 작품을 빼라고 검열을 한데 대항해

당시 윤범모 관장이 사표를 던진 적이 있다.

지금은 안기부가 하던 검열을 일부 언론이 하고 있고 야당이 거들고 있다.

 

사회의 적폐에 대한 지적과 비판을 정치적이라고 몰아가는 자체가 지극히 정치적인 태도이다.

우리는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불합리한 검열로 포기할 수 없다.

비록 하루지만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박재동-

 

참여작가

고경일, 박건, 박영균, 박재동, 성완경, 아트만두, 이윤엽,

이인철, 이하, 조문호, 주홍, 하일지, 홍성담, 레오다브

 

<말하고싶다> 온라인전을 하기까지

 

예술의전당 대관지원사업에 응모하면 어떨까?
성완경, 박재동, 박불똥이 이를 수락하고 함께할 작가를 찾았다. 대체로 들판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모였다. 사진, 만화, 판화, 벽화, 회화, 입체.. 분야도 다채롭다. 예술의전당과 같은 온실과 잘 어울리지 않지만 각자 명분을 찾아 감과 촉각을 세웠다. 말은 안해도 추석선물 같은 만남으로, 빈 집 '스쾃'하자는 심보로, 성완경에 대한 오마주.. 같은 심정이 아니었을까..

여건이 다 좋은 것은 아니었다. 열흘 전시기간에 설치, 철수일 빼고, 개천절, 휴관일 빼면 실제 전시할 수 있는 날은 고작 엿 새? 게다가 공간만 무료일 뿐 그 밖에 비용은 모두 작가 부담 아닌가.
특히, 이번 전시에 애정과 열정을 보인 성완경 비평가가 자신의 노트북 속 사진 수십만장을 정비하여 기습사진을 선 보인다. 가짜 미투로 전 인생을 부정 당하는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나 손바닥아트를 부활시키는 박재동도 말하고 싶다. 교보빌딩 외벽 전면에 독립운동가 초상을 보여준 레오다브가 젊은 작가로 합류하고, 독보적이고 강력한 시사캐리커처를 보여주고 있는 아트만두, 저 마다 삶의 현장에서 거침없이 표출 해 온 작가들의 게릴라 전시인 셈이다.

장마 끝에 불은 저수지에서 '번개' 치고, 각자 무지개를 펼치고 싶었을거다. 8월25일 단톡방이 생기고 논의가 활발히 펼쳐졌다. 8월29일 인사동 '낭만'에서 첫모임을 갖고 전시 제목을 논의했다. 참석못한 작가는 카톡으로 참여했다. 여러 제안이 쏟아졌다.

박재동의 <말하고싶다>가 다수의견 전시명으로 뽑혔다.

그런데 난관은 그 전부터 부딪히고 우여곡절과 청룡열차를 탓다. 첫 난관은 신청서류 접수였다. 십 여명의 작가 정보와 포토폴리오를 모아 기획서를 작성하고 예술의전당에 접수하는 문제였다. 다행이 오미진 기획이 합류하면서 가까스로 마감전에 넣고, 다행이 8월25일 전시 지원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전제조건이 따라 붙었다. 감염병방역조치로 미술관운영중단이 계속되는 상황이었고 무산될 수도 있었다.

변수도 터졌다. 전시가 확정되자 아트만두는 전시 홍보를 위해 자신의 연재 시사캐리커처를 활용한 웹포스터를 만들어 페이스북에 내 걸었다. 이어 조국 전 법무장관이 이 웹포스터를 자신의 페북에 연결하여 붙였다. 조국의 페북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조선일보는 웹포스터에 실린 만평이미지 해설기사를 내 보냈다. 짠 일처럼 이 날 국회 문예위에서 김승수 국민의힘 소속의원은 예술의전당을 대상으로 전시의 부당함을 소명하라는 질의를 한다.

적법한 절차에 따라 승인된 전시를 ‘정치적 중립’을 근거로 전시를 못하게 압박하는 꼴이 되었다. 이어 경향신문(박재동 작가에 대한 가짜미투를 강진구 소속기자의 심층기사를 언론사와 다른 관점에서 보도 했다는 이유로 운영진에 의해 징계조치를 당한 바 있다)과 여성신문(박원순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을 위한 표현물-시사캐리커처에 대해서)도 <말하고싶다>전시를 ‘2차가해’로 몰아붙이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런 이유로 예술의전당측은 전시계약자인 박재동 작가에게 협의를 요청해 왔다. 우리의 입장을 정리하는 와중에 예술의전당에서 코로나로 인한 방역지침이 훅 들어왔다. 10월6,7,8일3일만 전시할 수 있다는 지침이 내려왔다. 이를 할 것인지 말 것인 지를 알려줄 것을 요청해 온 것이다. 이것은 하지말라는 말 아닌가. 우리는 이 지침이 국회 문예위의 압박으로 인한 예술의전당 측의 일방적 조치인 지, 정부 방역지침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인지 헷갈렸다.

전례가 떠 올랐다 ‘초창기 예술의 전당 전시에 관해 당시 안기부가 검열을 한데 대항해 관장이 사표를 던진 적이 있다. 지금은 안기부가 하던 검열을 일부 언론과 야당이 거들고 있다. 사회의 적폐에 대한 지적과 비판을 정치적이라고 몰아가는 자체가 지극히 정치적인 태도다. 우리는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불합리한 검열로 포기할 수 없다’ 비록 하루지만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박재동 작가가 서문 초안을 통해 우리의 입장을 밝혔다.

<말하고싶다>10.7하루전을 하기로 했다. 이 결정이 무모하고 섣불렀는 지 이인철, 박불똥 작가가 하차했다. 감염병 예방조치로 전시 기간이 하루로 납작해졌다. 이 마저 같은 조치로 못쓰게 될지 모르고, 그 결정도 하루 앞을 알 수 없는 갑갑한 상황이 이어졌다. 여러 논의 끝에 성완경 작가의 입장이 나왔다.

“<말하고싶다>전의 타이틀과 그 사이 있었던 사태진행의 추이와 이에 대한 항의성, 반박성 테제에 너무 고착되어 우리가 너무 좁은 골목 속으로 우리 자신들을 몰고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많이 우려스럽습니다. 하루라는 악조건하입니다만 그것을 반대로 풀어내는 역발상 또한 긴급해 보입니다. 쉽게 풀어 얘기하면 기존의 자신의 통상적 본격작품을 풀어 내는 일이 긴요하게 요구된다고 봅니다. 물론 하루 전시라는 시공간적 제약과 비용(작품 제작비와 운송, 설치, 철거 등 비용)도 문제입니다. 예술엔 나이가 없다지만 여기 거론된 작가들이 존중받는 이름들이라면 그건 청장년과 노년, 각자의 인생과 예술, 시대의 경험을 자신의 예술 속에 녹여왔기 때문일 겁니다. 한마디로 그것이 예술이고 그래서 주목받고 재미도 있는거죠. 이것부터가 좀 더 진지하게 고려되고 또 우선되어야할 문제라고 봅니다. 하루 전시라도 그 각오가 없으면 전시를 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저 개인의 답은 이미 전시 참여하는 쪽으로 일찍부터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같습니다“

또한 기획업무를 담당하는 실무자의 현실적인 애로도 있었다.

”현재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로 국가기관에서 운영하는 공공 전시장은 모두 휴관 중입니다. 전시장이 재개관하려면 1단계가 되어야 하는데, 이는 1일 확진자 수가 50명 이하로 1주일 이상 지속되어야 하는 전제조건에서 입니다. 주변에 국공립미술관에 근무하는 친구나 전 직장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추석 이후에도 전시장이 재개관하기 어렵다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명절이 있기 때문에 예술의전당에 9/29(화)까지 모든 자료를 드려야합니다. 예술의전당 홈페이지 내용업로드, ARS 전화안내문 작성, 주차권 신청, 현수막 제작, 리플릿 디자인 및 제작, 웹포스터 사이즈별 디자인, 그 외 각종 서류 제출 등 현수막(1개 필수)의 경우 명절 전 9/29(화)까지 인쇄해서 걸어야 하고, 명절이 있기 때문에 리플릿 디자인 후 차주 월요일에 인쇄가 들어가야 전시 전에 나올 수 있습니다. 전시를 준비하며 예산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명절 전에 이러한 비용을 다 지불하고 전시를 못하게 될까 우려가 되어 여기에 적어 봅니다”

그러나 이 마저 뒤엎는 방역지침이 9월25일 언론보도로 알려졌다. 예측과는 달리 추석 전후 공공미술관의 전시가 가능하다는 지침이었다. 예술의전당도 3일 사용일정을 바꿔 당초 전시 승인 열흘을 모두 쓸 수 있다는 통보를 해 왔다. 전시 사용일인 9월29일로부터 4일 앞두고 나온 방역지침이었다. 언론 폭격, 국회문예위원의 압력, 예술의전당과 정부방역지침의 차이..들이 뒤섞여 누구를 탓하기 어려운 황당한 상황이 되고 만것이다. 이 전시는 안하거나 못하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대안으로 온라인 전으로 재빨리 갈아 타기로 했다.

처음에 사정상 함께 하지 못한 노순택, 이윤엽 작가와 도중 하차한 작가도 온라인전에 함께 하게 되었다. 접근성은 다소 떨어질 지 모르지만 격리 시대의 소통, 작가주도로 지속가능한 업데이트,
연대, 계승, 다목적 아카이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성비 좋은 발견이 되길 바란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