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5월3일까지 낙원동 M갤러리




▲이목일 화백의 그림에세이 <나는 영혼을 팔아 그림을 그린다>(어문학사 刊) 책표지.



화가 이목일의 ‘창달 그리고 영감’전이 지난27일부터 5월3일까지 서울 낙원동 “갤러리 M’에서 열리고 있다.


개막식이 열린 27일 오후5시에는 동료 작가를 비롯한 많은 지인들이 몰려 와 전시장을 가득 메웠다. 작품에 혼을 불어넣는 행위예술가 송마루, 유진규씨의 퍼포먼스도 펼쳐졌다.


‘창달 그리고 영감’이란 제목의 전시작들은 자연의 생명력을 말하지만, 어찌 보면 작가의 현실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다.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혼신을 다한 흔적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화려하면서도, 결코 화려하지 않은 짙은 색의 그림들이 아무도 보지 못한 저승의 풍경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마치 ‘지옥의 묵시록’처럼...


화가 이목일하면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게, 그 카리스마의 야성이다.


다부진 그의 모습도 그렇지만, 그는 야수적인 본성을 감추지 않고 스스로 드러내 놓는다. 야수파의 대표적 작가 마티스처럼 그의 작품에도 원시적 야성이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한 때는 호랑이에 빠져 삼년동안 일 만 여점의 호랑이를 그리며, 야성을 불태우는 것도 보았다.



▲이목일, “氣 백두산천지” 65.1x 90.9cm / Acrylic on canvas 2015




‘원색은 진실이다’라는 그의 좌우명처럼, 그는 색의 실체를 탐미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작품들에 등장하는 산이나 강, 하늘에 뜬 별이나 달, 이 땅에 피어나는 꽃이나 나비들의 형상들이 거친 붓질과 미세한 붓질로 뒤 섞여 표현되고 있었다.



▲이목일,“백두산 천지2” 72.7x 90.9cm / Acrylic on canvas 2015



 최근에는 백두산과 연꽃에 매료되어 영적 에너지를 몰입하고 있다. 때로는 현실적이면서, 때로는 몽환적인 그의 그림들은 마치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듯하다.


기존의 틀을 깨부수어 쉽게 판독하기 힘든 생명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목일,“야성, 그 위대한 본능” 72.7x 90.9cm / Acrylic on canvas 2015



작가 이목일은 이렇게 말했다. “내 그림의 궁극적 목적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 함께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움직이게 하고, 또 원색이 진실이며 진실이 원색이라고 늘 가슴에 새기며 살아왔다. 혼을 팔아 그리는 내 그림은 나의 생존 그 자체다.”


이번 전시와 함께 ‘어문학사’에서 펴낸 그림에세이 ‘나는 영혼을 팔아 그림을 그린다’는 제목처럼 그는 혼신을 다하는 작가다.




▲이목일,“지리산 별빛” 90.9x 60.6cm / Acrylic on canvas 2015



몇 년 전에는 느닷없는 뇌경색으로 쓰러져 왼팔과 다리가 마비된 적도 있었으나, 다시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창작에 대한 욕구 때문이었다. 얼마나 악착같이 그렸던지, 중풍마저 손을 들고 만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영혼을 내다 파는 작가들이 들끓는 세상에, 아슬아슬한 곡예의 삶을 살면서도, 작업에만 혼신을 쏟는 작가들도 더러 있다. 바로 이목일이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이목일, “생명의 잎” 72.7x 90.9cm / Acrylic on canvas 2015



돈이 가치기준을 바꾸는 이 자본주의 세상에, 돈 없으면 가족에게도 버림받는 세상이다. 그 막강한 힘에 대부분 무릎 꿇지만, 일단 작가는 돈 맛에 물들면 끝장이다. 풍요가 나태를 이끌기도 하지만, 작가에게는 삶의 절박성과 아픔이 없다면 결코 그의 영혼을 작품에 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목일은 죽어도 영혼을 팔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가 영혼을 바쳐야 할 곳은 그림뿐이니까.



▲ 작가 이목일



이목일은 경남 함양출신으로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서양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창형 미술학교 판화과와 뉴욕 아트스튜던트리그에서 공부했다. 그동안 개인전 서른여섯 차례와 수많은 그룹전에 참여하는 등 왕성한 창작활동을 해 왔다. 빨래판을 화폭삼아 작품을 그리는 등 많은 일탈과 일화의 족적을 남긴 화제의 작가다.



[서울문화투데이] 조문호기자








화가 이목일의 ‘창달 그리고 영감’전이 지난27일부터 5월3일까지 서울 낙원동 “갤러리 M’에서 열린다.

개막식이 열린 27일 오후5시에는 작가를 비롯하여 정순근, 한소라, 이인섭, 김의권, 김상현, 편근희, 임경숙,

노광래, 이수영, 김가중, 이상영, 정복수, 송일봉, 이명희, 김은영, 전강호, 이길원, 금보성, 김선이, 문 옥 ,

오 준, 하형우, 문성식씨 등의 지인 외에도 고향 함양에서도 많은 분들이 찾아 와 전시를 축하했다.

개막 행사로는 마임이스트 유진규씨와 작가 송마루씨의 퍼포먼스가 열려 참석자들의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창달 그리고 영감’이란 제목의 전시작들은 자연의 생명력을 말하지만, 어찌 보면 작가의 삶의 현실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다.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혼신을 다한 흔적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화려하면서도, 결코 화려하지 않은 짙은 색의 그림들이 아무도 보지 못한 저승의 풍경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화가 이목일하면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게, 그 카리스마의 야성이다.
다부진 그의 모습도 그렇지만, 그는 야성적 본성을 감추지 않고 스스로 드러내 놓는다.
야수파의 대표적 작가 마티스처럼 그의 작품에도 원시적 야성이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한 때는 호랑이에 빠져 삼년동안 일 만 여점의 호랑이를 그리며, 야성을 불태우는 것도 보았다.

‘원색은 진실이다’라는 그의 좌우명처럼, 그는 색의 실체를 탐미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작품들에는 산이나 강, 하늘에 뜬 별이나 달, 이 땅에 피어나는 꽃이나 나비들의 형상들이 거친 붓질과

미세한 붓질로 뒤 섞여 표현되었다. 최근에는 백두산과 연꽃에 매료되어 영적 에너지를 몰입하고 있단다.

때로는 현실적이면서, 때로는 몽환적인 그의 그림들은 마치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듯하다,

기존의 틀을 깨부수는 쉽게 판독하기 힘든 생명의 메시지였지만, 내가 보는 관점은 마치 지옥의 묵시록 같았다.

작가 이목일은 이렇게 말했다.
“내 그림의 궁극적 목적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 함께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움직이게 하고, 또 원색이 진실이며 진실이 원색이라고 늘 가슴에 새기며 살아왔다.

영혼을 팔아 그리는 내 그림은 나의 생존 그 자체다.”

이번 전시와 함께 ‘어문학사’에서 펴낸 그림에세이 ‘나는 영혼을 팔아 그림을 그린다’는 제목처럼

그는 혼신을 다하는 작가다. 몇 년 전에는 느닷없는 뇌경색으로 쓰러져 왼팔과 다리가 마비된 적도 있었으나,

다시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창작에 대한 욕구 때문이었다.

얼마나 악착같이 그렸던지, 중풍마저 손을 들고 만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영혼을 내다 파는 작가들이 들끓는 세상에, 아슬아슬한 곡예의 삶을 살면서도,

작업에 혼신을 쏟는 작가들도 더러 있다.  바로 이목일이 그런 작가의 한 사람이다.

돈이 가치기준을 바꾸는 세상에, 돈 없으면 가족에게도 버림받는 세상이다.

그 막강한 힘에 대부분 의 작가들이 무릎 꿇지만, 일단 작가는 돈 맛에 물들면 끝장이다.

풍요가 나태를 이끌기도 하지만, 작가에게는 삶의 절박성과 아픔이 없다면 결코 그 영혼을 작품에 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목일은 죽어도 영혼을 팔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가 영혼을 바쳐야 할 곳은 그림뿐이니까.

이목일은 경남 함양출신으로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서양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창형 미술학교 판화과와

뉴욕 아트스튜던트리그에서 공부했다. 그동안 개인전 서른여섯 차례와 수많은 그룹전에 참여하는 등

왕성한 창작활동을 해 왔다. 빨래판을 화폭삼아 작품을 그리는 등 많은 일탈과 일화의 족적을 남긴 화제의 작가다.

서울에서 40여년 가까이 살았으나 지금은 고향인 함양 예술마을 관장으로 내려가 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7일 열린 이목일의 전시 핑계로 창원의 김의권씨가 일찍부터 올라왔다.
그 것도 하루 전에 모습을 드러내었는데, 그 행색이 가관이었다.
노인네처럼, 지팡이를 짚었는데, 관절에 이상이 생겨 그렇단다.
하기야 환갑을 훨씬 넘겼으니, 이젠 노인 측에 낄 만도 하다.
그런데, 난 그걸 인정 못하는 착각 속에 사니 문제다.
무슨 청춘인줄 여기지만, 가끔 뒤 돌아보며 절감하기도 한다.

어저께 고향친구들이 올라 온 적이 있었다.
약속장소부터, 노인들의 놀이터인 낙원동의 “먹고갈래 지고갈래”였다.
그 술집은 낮 시간부터 흥청거렸다. 그 다음엔 노래방 가잖다.
평소 노래방을 싫어하지만, 그 것도 낮 시간에 가자니 얼떨떨했다.
그 만큼 일선에서 밀려 난 노인들의 설 자리가 없다는 뜻 일게다.
집에서는 마눌님과 TV에 나오는 드라마나 건강 프로 보며 지낼 게다.

인사동 ‘갤러리M’에서 열린 이목일 전시에서 반가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지난 번, 전시 첫날에 봄나들이 겸한 경노잔치 한 번 열자는 사발통문을 보냈는데, 
두문불출하는 친구들이야 어쩔 수 없으나, 오랜만의 회포였다.
일찍부터 지팡이 노인 모시고, ‘시가연’에서 양촌리 커피도 마셨고,
전시장에 부려놓은 안동소주도 마셨다.

뒤풀이 집인 ‘아리랑’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자리를 잘 못 앉았다.
옆 좌석에 모르는 분들이 앉아 술 마실 분위기가 아니었다,
끼니만 해결하고, 김의권, 김상현씨와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겨야했다.
인사동 거리에서 조심스럽게 걷는 심우성선생을 만나기도 했다.
밥집이나 찻집을 전전하며, 혼자 재미있게 사신다.

'유목민'에 자리 잡았더니 한사람 두 사람 나타나기 시작했다.
뒤풀이집에 있었던, 이명희, 노광래씨를 비롯하여
공윤희, 김운성, 유근오, 노승기, 타이거 박, 허미자,
뒤늦게는 김명성, 박상희, 이상훈, 신현수씨도 나타났다.
늘 상 그렇지만, 그렇게 어울려 한 판 노는 것이다.

오랜만에 ‘뮤아트’ 김상현씨의 노래도 들었다.
다른 노래도 좋았지만, ‘봄날은 간다’와 ‘목포의 눈물’이 더 좋았다.
얼마나 절절하게 부르는지, 슬퍼지더라.
그렇게 노래 불러놓고는 술값까지 계산하고 가버렸다.

이목일씨 뒤풀이에서도 신사임당을 내 놓더니, 아무래도 무리하는 것 같았다.

김의권씨는 ‘백상사우나’ 신세진다기에, 노광래씨 차에 실려 왔다.
아무튼 벗들 덕분에 늦은 시간까지 잘 놀았다.

사진, 글 / 조문호


































































[이목을 자료사진 스크랩]



화가 이목을씨가 인사동서 웃자 판을 벌였다.
인사동을 두 시간이나 떠돌다, 행사장에 갔으나 그 때까지 준비 중이었다.

난, 그의 예전 그림들을 너무 좋아했다.
오래 전, ‘통인옥션’전에서 처음 보았는데, 사물에 마음을 입혀 손에 잡힐 듯 닥아 왔다.
사과는 사과대로, 대추는 대추대로, 스스로의 존재를 뽐내고 있었다.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중학교 때는 한쪽 눈을 실명하는 등 절망의 세월이었지만,

결코 그림에 대한 꿈은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림도 하필이면 극사실주의를 택한 것이다.

초점이 맞지 않는 한쪽 눈으로 10분 그리다가 쉬기를 반복해야 했다.

눈에 부담을 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과일, 고등어, 꽃들을 나무판에 그려 낸, 불굴의 작가였다.


몇 년 전 그가 스마일 그림으로 바꾸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극 세밀화를 그리는 작가가 왠 스마일 그림이냐며 생뚱맞게 여겼으나,
그의 시력이 한계에 달해,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어 찾은 게 웃음이란다.

2009년부터 원인 모를 바이러스로 다른 눈마저 시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화가 이목을은 자기 운명을 반전시킬 첫 번째 카드로 스마일 그림을 택한 것이다.

너무 극과 극을 달리는 작가였다. 예술과 삶의 현실에서 스스로 찾아 낸 현답이었다.

자신을 철저히 버리고 비우는 작가로, 이 땅을 사는 고달픈 청춘들에게

‘꿈’과 ‘웃음’을 선물하기 위해 전도사를 자처한 것이다.

2005년에는 ‘인사아트프라자’에서 이목을씨가 아닌 이목일씨도 퍼포먼스를 한 적이 있다.

그 때는 스마일그림이 아니라 호랑이그림으로 한 판 논 것이다
십 일 년만의 두 화가가 던지는 메시지는 하나였다. 바로 세상과의 소통이었다.

한 참 후에 작가 이목을씨가 나타났다.
제자들은 화판에 바탕색을 칠하느라 분주했고, 작가는 물감과 화구들을 챙기고 있었다.
‘MBC 문화사색’ 방송에서도 따라 나와 그를 취재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경영난으로 고전했던 ‘인사아트프라자’가 요즘 다양한 문화행사를 선보인다.

이목을씨의 스마일 퍼포먼스와 초대전도, 그 기획의 일환인 것 같았다.

그러나 눈치 없는 봄비는 그칠 줄 모른 채, 추적추적 내렸다.
관객동원을 위해 비가 멈추기를 기다려, 다른 사진만 잔득 찍어야 했다.
아, 그런데 이를 어쩌지? 그만 카메라 전지가 다 돼 버린 것이다.
간단히 끝 날 거로 생각하고, 보조전지를 챙기지 않는 실수를 저질렀다.

몸은 지치고, 배는 고파, 아쉽지만 퍼포먼스를 못본 채, 돌아와야 했다.
뒤늦게나마, 이목을씨 페북에서 메인 퍼포먼스 사진 두 장을 스크랩해 낸 것이다.
이 못난 컨닝을 굽이 살펴주시길...


사진, 글 / 조문호




[이목을 자료사진 스크랩]



































완주의 왈패 한봉림이가 화두를 보내왔다.

작은 영웅들의 동네 인사동’, 우리 그들을 만난다.”로 글을 쓰란다.

생각해 보니, 인사동을 풍미한 많은 걸물들이 떠오르더라.

 

더러는 저승사자한테 붙들려가기도 했지만,

대개 변두리에 처박혀 구멍 파느라 두문불출하고 지낸다.

인사동만 바람난 줄 알았더니, 그들도 바람났나보다.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 중광스님은 그래 그래 놀다 가셨고,

별만 줄 창 그리던 강용대, 체류냄새 풀풀 풍기며 낄낄거리던 사진기자 김종구,

어디엔들 이 한 몸 머물 곳 없으랴산문집으로 폼 잡던 땡초 최영해,

민중미술 그림판을 좌지우지한 사단장 김용태, 인사동 밤안개 여 운,

성질 더러운 콧수염 사진쟁이 김영수 등 많이도 잡혀갔다.

 

김명성, 노광래, 전활철, 최일순 등 몇몇은 인사동에 남았지만,

소설이 안 팔려 작가폐업술집 낸 배평모는 풍기 갔고,

인사동만 나오면 인사불성 된다는 사기꾼 한봉림은 완주 있고,

품팔이 노동자 시인 김신용은 골병들어 소래있고,

부산의 파아란 바다를 그리워하던 이청운은 병원에 갇혀 산다.

 

막사발처럼 사는 상투꾼 김용문은 터키에 돈 벌러 갔는데,

대처승인지, 시인인지, 사기꾼인지 헷갈리는 신동여는 영주 살고,

임진각에 바람개비 날린 털보 김언경은 단양 살고,

떠돌이 유목민  최울가는 어디 있는지 정처 없고,

술버릇 지랄 같은 장경호는 남양주서 독수공방 기다린다.

 

날씨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게 인생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나.

노세노세 늙어 노세, 죽고 나면 못 노나니...” 이 말 참 명언이다.

이 봄 가기 전에 인사동서 경노잔치 한 판 벌이자.

함양 호랑이 이목일이가 인사동서 잔치한다니, 떡 본 김에 제사지낼까?

다음달 27, 인사동의 갤러리M’이란다. (회비20,000원)

 

제목은 거창하게 작은 영웅들의 동네로 시작해 놓고,

글이 삼천포로 빠져 경노잔치 사발통문이 돼 버렸네.

지정곡은 싫어하는데다, 본디 글쟁이가 아니고 사진쟁이니,

너그러이 양해 바란다.

 

사진,/ 조문호




아래 사진들은 23일의 인사동거리다.






 

고) 홍수진 (시인)

 

김용문 (도예가)

 

김창숙 (탈랜트)

 

장경호(서양화가)

 

박구경 (시인/보건진료소장)

 

황명걸(시인)

 

김정남 (피리 연주가)

 

이유나 (춤꾼)

 

박중식 (시인)

 

김상현 (뮤지션)

 

정기호 (서양화가)

 

강 민 (시인)

 

무세중 (행위예술가)

 

김명성 (시인/사업가)

 

이목일 (서양화가)

 

고) 최영해 (시인)

 

송상욱 (음유시인)

 

강찬모 (서양화가)

 

신명덕 (목공예가)

 

이강용 (서양화가)

 

김덕수 (사물놀이꾼)

 

안재희 (연극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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