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에서 밤늦게 술 마시고 집에 가다보면 즐거운 일도 종종 만난다.
돈 냄새에 인사동이 싫어도, 옛 친구들 만 날 수도 있고, 아직은 인사동 낭만이 남아있다.

인사동 밤안개 여운이도, 민족 머슴 용태도, 양아치 영수도 다 가버렸지만,
그래도 술집 풍류는 남아 있더라. 여운이가 자주 간 섬에는 ‘유목민’이 남았고,
용태 남은 자리는 ‘풍류사랑’이 있는데, 영수 자리만 오간데 없네...

다 부질없는 세상, 혼자 취해 밤 늦은 인사동 거리를 허우적거리며 나오니,
외국인 넷이 연주를 하는데, 무슨 곡인지도 모르면서 신바람 나 엉덩이를 내 둘렀다.
왠 외국여자도 덩달아 엉덩이를 흔들며 파랑새 한 장을 돈통에 집어넣었다.

이제 인사동을 즐기는 주인공이 바뀌었으니, 그 들이 인사동사람들이다.
밤늦게 가끔 인사동에서 연주하는 것으로 보아 여행객은 아닌 것 같았다.
직업으로 하는지, 노는 게 좋아 하는 지는 모르지만, 열심히 연주하였다.

인사동의 밤은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과 함께 저물어 가고 있었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의 단골집이었던'산타페', 마치 술집 주인처럼 서 있다.

 

 

 

 

경기도미술관장으로 있는 최효준, 서양화가 전인경씨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파주 헤이리의 유미옥씨 전시 오프닝에서 노래방으로 진출했다. 왼쪽은 김명성씨

 

 

 파주 공원묘지에 여운의 시신을 옮겨 안장하고 있다.

 

 

 

'인사동 밤안개'가 그립다,

 

가슴 따뜻했던 서양화가 여 운의 유작전이 열린다는 신문기사를 보았다.
세월 참 빠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 년이 되었던가 보다.
그를 추억하며 술이라도 한 잔 나누고 싶었으나, 모두들 미망인 보기싫어 참석하지 않겠단다.

전시회 오라는 연락도 없었지만 여 운 그리워 들린 전시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설마했는데, 모두 약속 한 것처럼 아무도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아는 분이라고는 백낙청, 유홍준, 이해찬, 이도윤씨 정도였으나 그마저 빠져 나가기 시작했고,
단상에는 황석영씨가 나와 고인의 술버릇을 이야기하며 여운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여 운과는 인사동에서 만나 술은 마셨지만, 자택에 간 적이 없어 미망인을 잘 몰랐다.

주변의 이런 저런 좋지않은 얘기들이 들렸으나, 여 운이 악처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렇게 친구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친구가 집에서 잘 하기란 기대할 수 없었던 터다.
대개 남자가 착하면 여자는 독해지기 마련인데, 오죽하면 오여사가 “병상에서 비로소 지아비로 돌아왔다”고 말했을까?

그러나 일년 전 여운이 세상을 떠나던 날, 장례식장에 입고 나온 미망인의 옷을 보고 의아한 적은 있었다.

갈색 외투와 무늬 있는 목도리를 걸치고 나왔는데, 상주의 복장치고는 좀 낯설었다.

여운을 만난지는 10여년 밖에 되지않았다. 인사동에서 김용태씨 소개로 처음 알게되었는데,

동년배인데다 소탈한 그의 모습에 호감이 갔다. 서로 인사동을 떠돌아 다녔으나 인연이 늦게 맺어졌던 것이다. 

 뒤부터 만나기만 하면 술을 샀는데, ‘산타페’에서는 아예 양주병을 맡겨두고 술을 마셨다.

그는 정이 너무 많은 친구였다. 벌이도 없는 내 처지가 안스러운지 만나기만 하면 걱정했다.

“사돈 남말 하네”라며 웃고 넘겼지만, 때로는 그의 마음 씀씀이에 코끝이 찡할 때도 있었다.

몇 년 전 대학로에서 그를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사람’이란 주제의 사진기획전 협의를 위해 '사진협회'에 들려 오다, 그를 만난 것이다.

복잡한 내부사정을 듣고는 '문예진흥원'으로 나를 데리고 간 것이다.

당시 김정헌씨가 이사장으로 있을 때라 기획안이 좋으니 한 번 부탁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일은 절차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말을 꺼내지 못하게 했다.

나보다 더 안타까워하던 그 때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그렇게 가슴 따뜻하고 마음여렸던 친구가 이제 세상을 떠나고 없는 것이다.
친구를 좋아했던 여운이었기에 넋이라도 전시장을 찾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인사동의 그 많은 친구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망자에 대한 배려보다는 살아있는 자들의 이기주의적 처신들이 너무 안타깝고 슬펐다.
행사장을 기록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지만 마지못해 찍은 사진마저 촛점이 흐려 있었다.

전시장에 차려 놓은 술이라도 한 잔 권해야 하건만, 그마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세상을 원망하랴 내 아내를 원망하랴”라는 노랫말로 여운의 넋을 다독였다.

 

 

 

 

 

 

 

 

 

 

 

 

 

 

 

 

 

 

여운 화백 1주기 유작전
1주일에 5일 인사동 머물며
문화계의 허브 역할 했던
정 많은 화가 유작 모아 개인전

아버지 떠난 지리산 작품 외
목탄 드로잉 등 50여점 전시
“지아비 위한 아내의 씻김굿”

 

 

 


그는 지리산으로 갔을 거다. 웅대함은 아비요, 넉넉함은 어미인 그 품으로. 지리산은 그리움이었고 마치지 못한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일주일이면 닷새밤을 인사동에서 머물어 ‘인사동 밤안개’로 불리며 문화계 허브 역할을 했던 여운 화백의 1주기 유작전 ‘민족혼, 여운을 남기다’가 19일부터 25일까지 서울 종로구 관훈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다. 1970년대 추상표현주의적인 작품에서부터 민중미술을 거쳐 목탄드로잉에 이르기까지 50여점을 2개 층에 걸쳐 펼친다. 지난해 1월 66세를 일기로 타계하기 전, 이리저리 궁리하려다 못한 제8회 개인전을 겸했다.
사람들은 대개 그를 두고 ‘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하룻저녁에 인사동 일대에 서너 군데 약속을 잡아놓고 장소를 옮겨가며 술을 마셨다고 한다. 수십년을 그리하여 으레 그러려니 된 터라 그에 얽힌 일화를 뚜렷이 기억하는 이가 많지 않다. 화가, 문인, 정치인, 종교인 등 두루두루 마당발이어서 내 사람이거니 챙기는 사람도 적다. 기억은 여운의 몫이고 챙기는 것 역시 그의 몫이었다. 1979년 오의정과 꾸린 수유리 신혼집은 시인, 묵객으로 북적였다. 배부른 새댁은 멋 모르고 국수를 삶아내고, 슈퍼에서 병술을 사서 날랐다. 수유리에서 ‘현실과 발언’이 태동하던 무렵이다. 광주항쟁 직후에는 황석영, 윤한봉 등 고달픈 이들이 그의 집에서 몸을 숨겼다. 한양여대 교수 월급은 주변인들 옥바라지와 주머니 가벼운 이들을 위한 술값으로 나갔다. 중국 노신대학 교환교수로 가서는 거기서 받은 월급을 모두 기부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여운은 퇴색한 부친의 사진을 늘 지갑에 넣고 다녔다고 한다. 부친 여창렬은 일본 와세다 대학을 나와 해방 뒤 여운형의 건준에 참여하고 좌우합작운동에 간여했다. 한국전쟁 중에 지리산 자락에서 행방불명되었다. 아비에 대한 기억이 없는 여운은 해남여고 교장을 지낸 모친한테서 소문처럼 들었을 터다. 어쩌다 남북회담이 열리면 혹시 아비의 소식을 들을까 하여 북한대표 숙소 언저리를 헤맸다고 한다.



 

그의 타계 1주기를 맞아 유고전이 19일부터 열린다. 아래 작은 사진은 ‘지리산’ 연작 중 한 작품. 오의정씨 제공
 


그의 화력은 가족사에서 확대된 슬픈 민족사와 일치한다.
1947년 전남 장성에서 난 그는 홍익대와 같은 대학원 서양학과를 졸업했다. 1970년 모더니즘 계열의 작품 ‘창’으로 1970년 한국미술대상전에서 우수상을 차지했다. 그해 김환기가 초대작가로 대상을 받았다. 창 연작은 유리창을 화폭 삼아 신문지 조각들을 콜라주한 모더니즘 계열의 작품이다. 일부 작품에서는 120년전 갑오농민전쟁을 이끈 전봉준 등 역사적 주제가 눈에 띈다. 1960년대 말 그는 친구 이두식을 통해 황석영을 만나고, 고은 신경림 백낙청 이문구 김지하 현기영 최민 유홍준 리영희 백기완 등 민족예술가들과 교류했다. 1985년 김윤수 신학철 오윤 김용태 주재환 민정기 등과 함께 민족미술협회를 창립해 2004년부너 4년간 회장을 지내며 민중미술 계통 그림을 그렸다. ‘동학’, ‘단절시대’, ‘별들의 전쟁’, ‘세상굿’ 등 민화풍 그림, ‘실향민’, ‘거리에서’, ‘먼 산 빈 산’, ‘곰나루 터’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 무렵 그는 장지를 즐겨 이용했다. 2006년 연 개인전 ‘검은 소묘’에서 목탄으로 그린 풍경화를 선보이는데, 말년에 선택한 목탄이 작가의 몸짓을 날로 드러내는 미디어인 점은 그가 소재로 삼은 철원, 대추리, 북한산, 지리산 등이 역사적인 장소인 점과 연계된다. 분단, 통일 등을 직접 말하기보다 말없음으로 말하는 초심으로 옮아갔다고 할까. 어쩌면 누르고 눌러온 속엣말을 펼칠 그만의 수단을 비로소 얻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코올에 쩔은 그의 몸은 1994년 간경화를 진단받은 이래 가파르게 기울었다. 그림만 그리고 싶다는 바람은 2012년 정년퇴임 하면서 이뤄졌지만, 새로 사들인 캔버스를 다 쓰지 못한 채 타계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붓을 들고 마주 앉았던 그림은 아비가 사라진 지리산이었다.
그의 아내 오의정씨는 “여운은 병상에서 비로소 지아비로 돌아왔다”면서 “이번 전시는 죽은 지아비를 위한 아내의 씻김굿”이라고 말했다.


한겨레신문 /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서양화가 여 운선생께서 지난25일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 같이 고인의 명복을 빌어 줍시다.

 

                                                                   빈소 :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 13호

                                                                   발인 : 28일 오전10시

                                                                   장지 :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320-11

                                                                            약현성당묘역

                                                                  

                                                                  여 운 : 한양여자대학교 교수/ 민족미술인협회 회장

 

                                                                  2013.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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