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는 노숙인 천씨가 어렵사리 뱉어 낸 첫 말이

‘세상을 원망하랴! 마누라를 원망하랴’다.

가족은 어디 사냐? 는 물음에 내 뱉은 뜬금없는 말이다.

 

이 친구는 다른 노숙인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고

혼자 넋 나간 듯 역전에 앉아 항상 묵묵부답이었다.

 

어디서 발목까지 다쳐 깁스 한 사연을 물었더니,

그때서야 처음으로 말문을 연 것이다.

힘이 없어 발을 헛디뎌 부러졌단다.

 

그는 잔재주 못 부리고 적극적이지도 못해

직장과 가정을 잃은 지가 십 여년이 훌쩍 넘었단다.

믿었던 가족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응어리져

사람 자체가 싫고, 말하기도 싫단다.

 

예전에는 부모 잘 못 만나 물려받은 것 없고 배우지 못한,

 타고 난 노숙인들이 많았으나

요즘은 돈 벌지 못해 집에서 쫓겨난 사람이 많다.

 

노숙인이 많이 생겨 난 때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한국전쟁으로 생겨난 노숙인 세대는 대부분 사라졌지만,

대개 아이엠에프 사태에 밀려 난 세대다. 

 

지금은 또 다르다.

돈 못 벌어 가정불화로 쫓겨난 사람이 더 많은 것이다.

돈 못 면 아내는 물론 자식에게도 버림받는 세상이다.

 

영악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는 비정한 세상이라

팔자소관으로 돌리기에도 억울한 삶이다.

 

고통스러운 하루하루의 삶은 차지하고라도

꿈마저 잃어버린 그들이 살아가는 목적은 무엇일까?

 

죽을 자신이 없어, 죽지 못해 산단다.

하기야! 죽을 용기로 나선다면 못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버림받은 자들의 가슴 아픈 사연이다.

 

사진, 글 / 조문호

 

한 때 서울역전을 떠돌던 부랑자가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작년 동지 날 보고 처음이니 일 년 가까이 된 것 같았다.

내복도 안 입은 행색을 보니 정신이 온전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기야!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만 해도 용타 싶다.

 

한 보름 가까이 장돌뱅이 정영신씨 '장에 가자‘ 따라다니느라 바빴다.

덕분에 술도 제밥 얻어 마셨고 반가운 분도 많이 만났다.

코로나가 번진 일 년 동안 만난 사람에 버금갈 정도다.

그렇게 많이 만나도 별탈 없는 걸 보니, 아직 죽을 때는 아닌 것 같다.

 

동지 덕에 먹고 자는 문제도 쉽게 해결되었다.

낮 시간은 충무로와 동자동을 오갔지만, 밤에는 녹번동에서 개겼다.

 

다시 복귀했으나, 환경이 바뀌어 그런지 잠이 오지 않았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 쪽창을 여니, 시베리아 벌판같은 찬바람이 몰아쳤다.

나야 문만 닫으면 얼어 죽을 염려는 없지만, 노숙자들은 어떻게 버틸까?

아무리 생각해도 얼어 죽는 사람도 생길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정오 무렵에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역전으로 갔다.

허급지급 허기를 메우는 자도 있고,

여기 저기 웅크려 잠들었거나, 드러누운 사람도 있었다.

간밤의 추위에 잠이라도 제대로 잘 수 있었겠는가?

 

노숙왕 김지은씨 한데 물었다. “간밤에 얼어 죽은 사람 없냐?‘고...

“사람이 그래 쉽게 죽나? 어젯밤은 맛배기에 불과한데...‘

 

몇 일 사이 김지은씨를 비롯한 몇 몇 부랑자의 움막이 모두 철거되고 없었다.

하필 추운 날 골라 철거하는 것은 죽으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모진 목숨,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사는지 모르겠다.

죄가 있다면 배우지 못해 사기를 제대로 칠 줄 모르는 죄뿐인데...

 

나도 어디가서 뭘 좀 먹어야 했다.

마침 엊그제 쪽방상담소에서 배급 탄 식권 두 장이 있었다.

한 장은 ‘한강오리탕’집 만원짜리 식권이고, 한 장은 ‘청국장’집 팔천원짜리 였다.

둘 다 13일까지 사용할 수 있어 비상식량으로 꼬불쳐 둔 것이다.

 

그러나 동자동 ‘청국장’ 집에 들어가다 문전박대 당했다.

“한 시 반 이후에 와요. 점심시간은 안 돼요”

쪽방 촌 거지행색에 앉기도 전에 쫓아 낸 것이다.

그 자리에서 식권을 찢어버렸다.

 

어떠한 이해득실로 식권을 발행했는지 모르지만,

위선의 자선이라면 안 하는 것만 못하다.

 

두 번째는 후암시장 부근에 있는 ‘한강오리탕’으로 갔다.

이집은 지난 여름에 갔더니, 친정아버지처럼 살갑게 챙겨주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 대하는 태도는 똑 같았다.

주인의 곱고 아름다운 천성이 몸에 베어있었다.

 

옆에 있는 ‘경향신문’을 가져다보니, 죽일 놈의 전두환이가 일면에 나왔더라.

밥맛 떨어 질까봐 얼른 넘겼는데, 정말 신문 볼 것 없었다.

 

이어 정갈한 밥상이 나왔는데, 땀을 뻘뻘 흘리며 오리탕을 먹었다.

코에서는 콧물이 눈에서는 눈물이 범벅될 정도로 맛있었다.

 

고맙다! 이게 온정이고 자선이다.

얻어먹는 각설이도 언젠가는 그 빚을 갚는다.

시간 맞추어 가족사진이라도 한 장 멋지게 만들어드려야겠다.

 

부디 ‘한강 오리탕’이 대박 나길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부산 남포동 1979, 5


가난의 문제는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50년대 겨울, 등굣길에서 마주친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노숙인이 길가 집 아궁이에 엎드린 채 얼굴이 새까맣게 불타 죽었는데,

연탄아궁이에 불을 쬐다 질식되어 머리를 불구덩이에 처박은 것이다.

 

70년대 봄, 아기를 안고 잠든 여성 노숙인과도 마주쳤다.

젓이 나오지 않아 울다 치친 아기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다.

빈곤의 문제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심각성을 깨달았다.


서울 동자동 2017, 1

 

하기야! 한국전쟁 이후는 거리에 널린 거지만이 아니라

대개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해 끼니를 해결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빈곤의 문제는 결코 나라가 가난해서 만도 아니었다.

금융위기를 견뎌내지 못해 거리로 내 몰린 사람도 많았지만,

잘 살수록 빈부격차가 커져 절대빈곤자는 더 늘어나고 있다.


서구의 노숙자들은 물질문명을 부정하는 방랑자들이 더 많지만

우리나라는 생활전선에서 쫓겨 난 빈곤자들이 대부분이다.


서울역 2017, 2

 

서울역 주변을 맴도는 노숙인과 잠재적 노숙인에 해당하는

동자동 쪽방 촌 빈민들을 기록하며 지켜본 게 벌써 4년차다.


쪽방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는 독거들의 외로움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거처할 곳 없는 노숙인들의 위태로운 삶이다.


지자체에서 제공한 노숙인 쉼터를 마다하고 거리를 떠도는 것도 문제지만,

질서를 지켜야하는 공동생활을 기피하는 노숙인의 습성은 어쩔 수 없다.


어차피 막바지에 내몰린 처지에 누가 간섭 받으며 살고 싶겠는가?

세상 고통을 유일하게 잊게 해주는 것이 술인데...



서울 동자동 2018. 7

 

정부에서 주는 최소한의 혜택마저 비켜 선 그들은 추운 겨울에도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자야 한다.

갖가지 고통을 잊기 위해 구걸하여 술을 사 마시며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의 평균수명이 81세라지만, 노숙인들의 평균 수명은 48세이고,

한 해에 죽어가는 무 연고자가 300명을 넘는다고 한다.


사회와 가정에서 밀려난 노숙인들의 처절한 삶을 언제까지 두고 볼 것인가?

그들에 대한 외면이나 방관보다 더 슬프게 하는 것은 일반인들이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선이다.


서울역 지하도 2016. 10

 

다들 젊은 놈들이 일은 안 하고 술만 마신다’며 손가락질 하지만,

그들은 신체적으로 장애가 있거나 알콜 중독으로 정상적인 삶을 유지하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폐인이나 마찬가지인 그들에게 누가 일자리를 주겠는가?

다들 부모 잘 못 만나 가난을 물려받았거나, 제대로 배우지 못한 죄다.

 

벼랑에 내 몰린 노숙인들을 구제할 정책마련이 절실하다.

추위나 더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기초생활수급자 규정을 보완하여,

그들도 쪽방에 입주할 수 있도록 해주자.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


 

사진, / 조문호


 서울 도동 201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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