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사진가 최인기씨로 부터 전화를 받았다.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와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는 제안이었다.

최인기씨는 미투와 관련된 사건으로 불편한 관계라

식사보다 인사동에서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했다.

 

모처럼 ‘유목민’에 나갔더니, 다들 먼저 와 있었다.

내가 올린 꼴 페미 까는 글 보고 청탁한 원고를 취소한 터라

어색한 관계를 풀어야 했는데, 바쁜 이규상씨까지 나오게 해 송구스러웠다.

 

그리고 최인기씨는 미워할 수 없는 사이다.

좋아하는 후배이기도 하지만, 사진판에 잘 못된 현실과 싸우는 그만한 전사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올린 내용은 일부 급진적 페미니즘이 여성의 성 평등 운동에

오히려 장애가 되고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요즘 상대를 매장시키려는 가짜 미투가 기승을 부려

선의의 피해자마저 의혹의 눈길을 받는 세상이 되어바렸다.

특히 정치판에서 많이 악용되는 현실인데,

진보 정치인들의 무분별한 공략에 많은 국민들이 등 돌리고 있다.

더 이상 착한 사람이 목숨을 잃는 일은 없어야 한다.

무엇이던 과하면 탈이 생기기 마련이다.

 

물론 최인기씨를 꼴 페미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청탁한 원고를 취소하는 전화를 하기도 쉽지 않지만,

그 동안의 관계를 생각하면 쉽게 할 수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주변 누군가의 문제 제기에 어쩔 수 없이 전화했을 것으로 여긴다.

 

그냥 덮고 넘어 갈수도 있었지만 페미니즘 문제라 

 꼴 페미의 문제점을 다시 한 번 부각시키고 싶었다.

아마 내 글을 본 지인이 ‘눈빛출판사’에 연락한 것 같은데,

이규상대표가 화해의 자리를 주선한 것이다.

 

그 날 최인기씨는 죄송하다며, 여러 차례 사과했다.

그러나 페미니즘에 관한 자신의 의견은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내가 민망할 정도의 사과라 더 이상 묻지도 말하기도 싫었다.

내가 상관할 문제는 아니지만, 노령진수산시장 투쟁 사진집 서문은

최인기씨를 잘 아는 이규상대표가 쓰면 어떠냐고 했더니,

이번 책은 서문 없이 사진집을 내겠다 했다.

 

아무튼, 좋은 일은 아니지만 즐거운 술자리가 되었다.

그날 이규상 대표가 반가운 선물도 주었다.

정영신씨의 ‘어머니의 땅’ 가제본된 사진집 한 권을 내놓아 눈이 번쩍 띄었다.

그동안 ‘길 위의 인문학’ 공모에 정영신씨 원고가 선정된 것은 알았지만

사진집을 만든다는 것은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그런데, ‘유목민’ 안 쪽 테이블에서 반가운 사람이 있었다.

미술평론가 유근오씨와 도예가 변승훈씨가 나를 보더니 옮겨왔다.

변승훈씨는 백기완선생 문상 다녀 왔다는데, 이미 취해 말이 거칠었다.

이규상씨와 유근오씨는 서로 명함을 건네받으며, 원고 청탁도 하더라.

구체적으로 모르나, 문제만 일으키는 내 뒷조사 해달라는 말인지,

나에 대한 글을 청탁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좋은 필자와 좋은 편집자가 만났으니, 좋은 일인 건 틀림없을 게다.

미술평론가 유근오씨도 한 때 미투문제에 걸려 곤욕을 치룬 적도 있었다.

의혹이 풀려 다시 강단에 서게 되었지만, 자칫하면 생사람 잡는 무기로 악용된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파장 무렵에는 발렌티노 김이 나타났다.

서울특별시 환경미화원 복장으로 나타났는데, 요즘 청소하는 모양이다.

얼마 전 공채 시험 면접에서 "서울을 자기 머리처럼

빤짝 빤짝 빛나게 하겠다"는 말에 배꼽을 잡은 적도 있었다.

무슨 일을 하던 예술가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어렵게 사는 최인기씨 주머니를 털어 마음은 편치 않지만,

나올 때 무거웠던 걸음에 비해 갈 때는 날아갈 것 같았다.

알랑방구 낄 정영신씨 책을 옆구리에 끼고, 간 크게도 택시를 불러세웠다.

 

“기사 양반 요! 녹번동 가입시다. 택시비는 그 집 안주인한데 바드이소”

 

사진, 글 / 조문호

 



도예가 변승훈씨의 '통인화랑' 초대전 '手作禪'展이
지난 3월 18일부터 29일까지 인사동 통인화랑(B1층)에서 열리고 있다.



변승훈씨의 작품 영역은 분청의 생활도자에 국한되지 않고,

회화적, 부조적 도자에 이르기까지 폭 넓다.


 

달 항아리 형태의 분청에서부터 덤벙 기법으로 제작된 그릇,

기하학적 오브제와 목탄 드로잉을 도자 부조로 표현한 벽화에 이르기 까지

그의 창작 영역은 끝이 없다.




이번 전시에는 그동안 해 온 다양한 작업을 골고루 보여준다.

새로운 작품으로는 민중의 삶을 신화로 구워낸 이색적인 도예도 선보였다.

마치 운주사에 흩어진 이름 없는 불상을 닮았는데,

안성 장터에서 몇 십년동안 자리를 지켜온 할머니들의 모습이라고 한다.


 

생활도자에서 벽화도자를 거쳐 이젠 민중 신화에 이르렀는데, 가히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는 도자와 회화의 경계를 무너트리며,

드로잉으로 분청사기의 평면화 작업에 일가를 이루었다.

분당 요한성당과 대화성당 등의 도자벽화에서 보여준 작업이 대표적이다.


 

그는 드로잉 솜씨도 예사롭지 않다.

그릇을 만들면서 순간순간 떠오르는 단상을 목탄으로 드로잉해

이 모든 것들을 흙으로 구워낸다.


 

전시장을 들어서면 삐죽삐죽 솟아나는 나무 형태의 정감어린 작품이 눈에 띈다.

도판을 조각조각 나눠 구운 뒤 조각보 잇듯 이어 붙여 분장을 하거나

유리를 녹여 붙여 자연 색을 냈다.


 

달 항아리 형태를 분청으로 나타낸 작품은 한 겹 한 겹 쌓아올린 분장 속에

마치 먹이 화선지에 퍼진 것 같은 무늬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보는 이로 하여금 고요한 선의 세계를 체득하게 한다.


 

구석구석 자리 잡은 작품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특히 서민적인 느낌을 주는 투박한 질감이 정겹다.

분청이야말로 우리민족의 숨소리를 듣는 듯 친근하다.


 

한국의 원초적 아름다움을 드러낸 분청은 무심하면서도 은근한 자연미를 담고 있다.



 

울퉁불퉁 제 멋대로 생긴 독에서부터 투박한 질감의 그릇 등

하나같이 어머니의 정과 한이 담긴 듯 친근하다.

작가는 분청을 자신의 어머니라고 지칭할 만큼 우리 정서에 깊숙이 빠져있다.



그의 작품에서 삼베 같은 투박한 직조의 결이 느껴지는 것은

홍익대에서 섬유미술을 전공한 그만의 감성이요 감각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분청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변승훈의 手作禪(수작선)오는 29일까지 열린다.

 

사진, / 조문호














 




몇 일 동안 여러 가지 고민에 휩싸여 죽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코로나119'로 사회적 거리두기란 캠페인에 방콕해서 그런 게 아니라

김명성씨로부터 전달받은 돈도 한 몫했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검찰이나 정치꾼들의 비인간적인 꼴에 간도 뒤집히지만,

몇 일 전에는 동자동 쪽방 촌의 유영기씨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왜 나쁜 놈들은 잘 살게 놔두고 착한 사람만 데려가는지 모르겠다. 과연 신이란 게 존재하는 것인가?.

종교라는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역할은 하지만, ‘신천지꼴을 보니 사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벌금 내라며 김명성씨가 200만원 상당의 사진을 팔아주었는데, 죽어도 벌금을 내기 싫은 것이다.

그 사건을 담당한 검사는 말할 것도 없고, 판결 내린 판사도 똑 같은 놈이었다.

돈에 눈깔 뒤집혀 자연환경을 망가트리는 개인의 명예가 중요한가? 공익이 중요한가?

그런 개좆같은 판결에 승복하는 자신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차라리 그 돈으로 서울역을 떠도는 부랑자나 쪽방 촌 친구들을 불러 모아 마지막 만찬이라도 벌이고 싶었다.

요즘 식당도 텅텅 비었으니, 도랑치고 게 잡는 격이 아닌가?

그러나 나를 걱정해 주는 이들이 눈에 밟히기도 하지만, 죽는다는 것이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몇 날을 누워 이런 저런 생각만 하다 보니, 일단 주변정리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쪽방에 갇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페친을 정리하는 일 뿐이었다.

그동안 내가 지적한 일의 반감으로 뒤통수치거나, 한 통속이 되어 반응 없는 페친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대부분 오래된 인연이라 차마 친구 끊기를 못했는데, 이참에 100여명을 골라 삭제해버렸다.

그 대신 페친이 넘쳐 받아주지 못했던 잘 모르는 분들을 모두 받아들였다.

분풀이 치고는 치졸했으나, 엉뚱한데 신경 쓰지 않고 내 일에만 전념하겠다는 각오였다.


 

지난 18일은 모처럼 외출할 준비를 했다.

정영신씨께 연락해 인사동 통인화랑에서 열리는 변승훈씨와 강경구씨 전시를 보기로 했다.

개막식은 오후 다섯시였으나 요즘 전염병 때문에 사람 많이 만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오프닝에 날아들 똥파리를 피해 일찍 나선 것이다.


 

인사동도 며칠 전과 달리 사람들이 제법 나왔더라.

달라진 풍경이라면, 때 거리로 몰려다니는 외국관광객이 사라졌다는 것과

수도약국 앞에 마스크 사려고 줄선 행렬이었다.


 

강경구씨 전시가 열리는 통인가게’ 5층부터 올라갔더니, 관우선생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따라주는 와인 한 잔들고 전시작들을 돌아보았는데, 작품이 너무 좋았다.

마치 고뇌하는 오늘의 인간상을 그린 듯한데, 어찌 보면 이글어진 내 모습 같기도 했다.

좋은 작품들을 보니 마음이 편안했다.


 

다음에 볼 전시는 지하에서 열리는 변승훈씨의 도예전 手作禪이었다.

반갑게도 작가 변승훈씨도 있었고 이계선관장도 있었다.

오래 된 작품에서 부터 최근작까지 골고루 전시되었는데, 분청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변승훈씨만의 독창적인 작업이었다.

특히 최근에 제작한 불상 형태의 작품들을 보며 신은 인간자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작품은 불상이 아니라, 안성장터에서 몇 십년 동안 자리를 지킨 할머니들을 모델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예술의 힘은 무서웠다. 온갖 근심 걱정을 다 떠안은 불편한 마음이 눈 녹듯 녹아 내렸다.

전시들이 곳곳에서 열리지만, 별 의미 없는 불편한 전시가 더 많은 현실이라 운도 따라야 한다.




인사동에서 믿을 수 있는 갤러리로는 통인가게전시장과 나무화랑정도로 꼽는다.

통인은 대관에 의지하지 않고, 관우선생과 이관장의 안목으로 초대되는 전시라 일단 보증할 수 있고,

나무화랑역시 미술평론가 김진하씨가 운영하는 화랑이라 실망시키는 전시가 별로 없다.


 

좋은 전시들을 보아 기분이 좋으니, 반가운 연락까지 왔다.

정영신씨가 며느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는데, 아들 내외와 손녀 하랑이가 온다는 것이다.

부리나케 정영신씨 녹번동 집에 갔더니, 더디어 귀여운 공주님이 나타난 것이다.



귀신같이 생긴 내 모습에 울기도 하고, 제 모습을 담은 동영상에 깔깔거리기도 했다.

변화무쌍한 하랑이의 표정과 쉼 없이 휘젓고 다니는 모습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부근에 있는 연안식당으로 옮겨 외식까지 했는데, 밥도 엄청 잘 먹었다.


 

그래, 좋은 일에 위안 받고 살자. 사는 게 별 것 있겠나.

 

사진, / 조문호













 

 



변승훈 '手作禪' 초대전



변승훈은 분청에 매료돼 작업을 해오고 있다.

변승훈은 분청자기에서 스승 윤광조와 다른 업적을 성취했다.

달 항아리 형태의 그릇을 분청으로 나타내 보인다.

한 겹 한 겹 쌓아올린 분장과 그 속에서 마치 먹이 화선지에 떨어져

퍼진 듯한 무늬는 보는 이로 하여금 고요함을 경험하게 한다.

분청을 자신의 어머니라고 지칭할 만큼 그의 작업의 토대엔 분청이 있다.

이번 <手作禪:수작선>展은 그동안 작가가 이루려 했던 분청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전시이다.


전시일정 & 전시장소

2020년 03월 18일(수) – 2020년 03월 29일(일) 통인화랑(B1층)

*Opening Reception : 2020. 03. 18 (수) 5:00 pm






지난 14일은 영문도 모른 채, 안성에 있는 변승훈씨 도예공방에 끌려갔다.
그 날은 여의도 집회 가는 토요일이지만, 정영신씨 명을 어찌 거역할 수 있겠나?
일을 끝내고 여의도 갈 작정으로 일찍 출발했는데,
마포에서 미술평론가 최석태씨를 태우는 걸 보니 좀 불안해졌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변승훈씨 공방이라면 한번 쯤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했다.

그를 알게 된지가 수십 년이 되었건만, 작업실은 커녕 그의 전람회조차 몇 번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달에도 ‘민예사랑’에서 초대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스스로 전시장 금족령 내린 그간의 사정에 또 모른 채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빚진 듯한 오랜 부담을 지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동안 변승훈씨 전시를 두 번 밖에 보지 못했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제일 처음 본 건 80년대 후반 ‘그림마당 민’에서 열린 개인전이었다.

너무 오래되어 기억조차 가물거리지만, 남다른 도예전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두 번째 본 것은 그로부터 몇 십 년이 지난 ‘민예사랑’의 ‘빙빙유람전’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문영태씨 연락으로 갔는데, 변승훈씨가 전시하는 걸 모르고 간 것이다.



30여년 만에 만난 그의 작품은 놀랍게 변신해 있었다.

투박한 질감의 매혹적인 그릇에 마음을 뺏겼으나, 전시 후에 또 잊어버렸다.

변승훈씨 분청작품이 좋다는 이야기는 여러차례 들었지만, 어쩐지 연이 닿지 않았다.

인사동 술자리에서 간혹 만나도 쓸데없는 술주정으로 시간 보냈다.



느닷없이 최석태씨와 변승훈씨 공방을 찾게 될줄이야 꿈엔들 알았겠는가.

가서야 알았지만 작품집 제작에 필요한 사진찍을 일이 있단다.



일단, 작업실 주변에 늘려 있는 그의 도자 작품에 압도되었다.

변승훈씨의 작품 영역은 분청의 생활도자에 국한되지 않고, 회화적, 부조적 도자로 폭 넓었다.

구석구석 자리 잡은 작품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았다.

전통 분청을 기반에 둔 디자인으로 자신만의 새로운 분청세계를 개척했더라.

점심 때라 식당으로 안내되어 밥부터 먹었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그는 청소년기에 방황한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한 때 록그룹을 결성하는 등 음악에 푹 빠져 살았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것을 계기로 홍익대에 진학하여 섬유미술을 공부했다고 한다.

미국유학을 준비하는 도중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1985년부터 도예에 몰입했다고 한다. 

분청에 일가를 이룬 윤광조선생의 문하에 들어가며 자신의 길을 찾은 듯했다.



다시 공방에 돌아와 그의 작품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뒤늦게 듣게 된 많은 이야기와 작품집을 통해 그의 작품세계를 어느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난, 백자나 청자보다 분청을 유달리 좋아한다.

분청하면, 분 바른 여인네가 술 한 잔 마신 듯한 불그레한 얼굴부터 연상되는데,

서민적인 인상을 주는 분청의 투박한 질감이 너무 정겨웠다.

한국의 원초적 아름다움을 드러낸 분청은 무심하면서도 은근한 자연미를 담고있다.

우리네 정서를 꾸밈없이 보여주는 분청이야말로 우리민족의 숨소리를 듣는 듯 친근하다.



공방 입구에 자리 잡은 변승훈씨의 분청 항아리는 기존 형식을 넘어서고 있었다.

제 멋대로 생겼지만, 볼수록 정감 가는 작품이었다.



변승훈씨 작품 디테일에서 삼베같은 투박한 직조의 결을 느끼는 것은

섬유미술을 전공한 그만의 감성이요 감각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변형된 작품들이라 자칫 부자연스러울 수도 있으나 하나같이 자연스러웠다.

사진 찍을 때의 자연스럽다는 말에 앞서 모두 자연을 닮아 있었다.



분청사기로 시작되었으나, 그의 작품세계는 분청자기에 머물지 않았다.

현대적인 형태의 기물제작에서부터 목탄 드로잉을 도자 부조로 표현한 벽화에 이르기 까지 폭 넓었다.

이미 분당 요한성당과 대화성당 등의 도자벽화에서 보여준 작업들은

도자와 회화의 경계를 무너트리며, 분청사기의 평면화 작업에 일가를 이루었다.



작가의 실험적 도전정신도 돋보였다.

지금 작업 중인 작업도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운주사에 흩어져 있는 이름 없는 불상을 닮았다.



그리고 지금의 공방자리는 조상의 묘소가 있는 자리라는데,

그곳에서 몇 백년 전의 분청사기 파편이 쏟아져 나왔다고 했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선조의 대를 잇는 필연의 업인지도 모른다.

그 게 분청에 전념한 계기라는데, 지금 사용하는 흙도 모두 그 터에서 나온 흙이란다.



변승훈씨는 술을 즐기는 애주가지만, 일단 작업에 들어가면 일체 술을 마시지 않는단다.

그 날도 이야기를 나누며 계속 술을 마셨는데, 운전 때문에 나만 못 마시니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체되어 여의도 가는 일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데 말이다.



어머니께서 자기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비롯하여 

누님이 어머니 역할을 대신했다는 이야기 등 집안의 감추어진 이야기까지 들춰냈다.

청바지를 사지 못해 안달하는 것을 눈치 챈 누님이 책갈피 속에 몰래 넣어 둔 5백원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단다.



항시 돌이나 나무의 질감을 어루만져 그런지, 그 질감이 자연스럽게 옮겨 간단다.

작품에 드러난 질감도 그냥 생겨 난 것이 아니었다.




흙에 대한 애착도 남달랐다.

스스로가 흙이라는 그의 말처럼, 아낌없이 작업에 불 태웠다.



술이 떨어져 다시 읍내 술집으로 옮겼는데, 인내심에 한계를 느꼈다.

음주면허라며 호기 부린 때가 엊거제 같은데, 뒤늦게 철든 셈이다.

자정이 가까워서야 일어섰는데, 변승훈씨도 서울가겠다며 따라 붙었다.

공방 문단속도 하지 않고 불도 켜두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돌아오는 내내 두 사내의 취중 잡담을 음악삼아 들어야 했다. 


"아이구~ 내 팔자가 와 이래 댓뿟노?"


사진, 글 / 조문호



















정영신사진

정영신사진
























변승훈(도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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