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년에 잘 나갔다는 김씨
열다섯에 집나와 오십여 년을 서울역에서 놀았던 세월
주먹질에 7년 받아 법정소란으로 3년 보탠 것은 계급장
그 가오에 백발만 서렸구나.




왕년에 돈 좀 만졌다는 이씨
사람 좋아 흥청망청 다 날리고
집 쫓겨 나 사십여 년을 떠돈 세월
그 가오에 주름만 늘었구나.




빛바랜 왕년의 가오를 안주삼아
죽음 재촉하는 독주를 들이킨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6일의 동자동 새꿈 공원에는 김정호, 유영기, 정재헌, 이재화, 김원호,

이홍렬, 강병국, 강재원, 김용만씨 등 반가운 분들이 나와 한담을 나누었다.

이 날은 빨래줄 전시로 사진을 돌려주기로 약속한 추석이 다가와서인지,

영정사진을 찍어달라는 분이 의외로 많았다.

 


주민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사람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었다.

박성일씨는 몇몇 사람들은 양심을 전당포에 맡긴 사람들이라며 흥분하기도 했다.

그런 이들 때문에 동자동 빈민을 지원해 온 명성도 손을 끊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정민씨는 크게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영정사진을 부탁해 찍어주었는데, 사진은 언제 줄 것이냐는 것이다.

추석에 빨래줄 전시 때 가져가라니, 그 때는 없다고 말했다.

육개월 정도 동자동을 떠날 것인데, 어쩌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이젠 사람이 무섭다며, 갑 질하는 꼴을 더 이상 못 보겠다는 말도 덧 붙였다.

착한 정민씨가 무엇에 저렇게 마음을 다쳤을까?



 


짐작은 가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나 역시 실태를 알고 나니, 회의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누굴 위해, 뭘 위해 개고생을 하는지 한심한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선량한 주민들이 더 많다는데, 위안을 갖고 산다.

 

제일 시급한 것은 빈민들이 주인의식을 갖고 당당하게 나서야 한다.

주민들이 민관단체의 잘 못된 관행이나 갑 질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한다.

이제부터 내가 할 일도 빈민들이 발 벗고 나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힘없다며 포기해버리고, 알고도 모른 척 한다면, 절대 개선할 수 없다.



 


지탄받고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사람은 돈 없고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정작 가진 자들이다.

그 많은 돈을 정당한 노력에 의해 벌었겠느냐? 전두환, 이명박 같은 도둑놈들이 가진 자들의 대부분이다.

요즘 일부 언론에서 빈민들의 인권 운운하며, 빈민들을 가두고 소외시키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몰지각한 사진인들의 가시적인 접근도 문제이긴 하지만, 빈민들은 숨어야 할 사람들이 아니라,

당당하게 나서야 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빈민들이여! 자부심을 갖고 우리들의 권익을 되찾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자.

오는 4일 추석날 펼치는 동자동 새꿈공원의 합동차례도 함께하자.

첫 빨래줄 전시였던 5월 어버이날 이후에 찍은 사진을 다시 빨래 줄에 걸어 당사자에게 돌려주려 한다.

영정사진은 물론 지난 5‘5,18민주묘지 참배에서 찍은 사진과 도끼상소 등

각종 행사에서 찍은 사진들도 있으니, 많은 참여 바란다.

 

사진, / 조문호





















 

 

 








지난 5일 저녁 무렵, 동자동 골목에 두 노인이 나와 계셨다.
이홍렬(78), 김원호(73)씨 였는데, 두 분 다 당뇨로 고생하는 분들이다.
막걸리 한 병을 보약처럼 아끼며, 한 모금 한 모금 천천히 드시며 말을 꺼냈다.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몸을 팔았지만, 배우기 위해서도 몸을 팔았어." 
이홍렬씨는 ‘네가 청량리 사창가를 찍었지만, 이런 것은 모를 것’이란 투의 말씀이셨다.






이 분은 황해도에서 피난 오신 분인데, 자유당 말기의 청년 시절을 아현동 모 여대 부근에서 사셨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양동 등 도심의 음침한 뒷골목을 휘저으며 살아 일반인들이 모르는 것을 많이 보고 살았는데,

그 당시 등록금 마련을 위해 몸을 팔았던 여대생들 이야기를 했다.

돈이 필요한 여대생을 남자들과 연결시켜주는 뚜쟁이들의 벌이도 좋았다고 한다.





하기야, 그 당시는 어려운 고학생들이 많았던 시절이라, 여대생들 일자리 얻기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지난한 매춘의 역사를 아무도 탓할 수 없겠으나, 아마 인간이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본다.

이젠 역전 부근에 밀집된 사창가는 사라졌지만, 도처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일들이라, 별의 별 일이 다 있을 것이다,

크게 보면 돈보고 결혼하는 자체도 몸 파는 것에 다름 아니겠는가?





이 날은 ‘식도락’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한 시간 후에 세월호 리본을 만들기로 되어 있었다.
허구한 날 자는데도 졸음이 와, 한 시간만 잘 생각이었는데 일어나보니 오후3시였다.

하는 수 없어 컴퓨터를 열어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나 기웃거렸는데, 저녁거리가 없었다.

아침 겸 점심은 밥을 먹고, 저녁은 빵으로 때우는데, 지난 토요일 늦잠으로 빵 배급을 못 받은 것이다.

서울역에 있는 마트에서 일주일 분량의 빵을 사러 일어서려는데, 시나리오작가 최건모씨로 부터 전화가 왔다.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는 전화였으나, 술 생각이 간절했던 터라 반갑게 맞았다.






동자동 ‘태향반점’에서 탕수육을 안주로 소주 한 잔 했다.
이 친구는 가끔 만나지만, 내 블로그를 샅샅이 보아 동자동 근황을 잘 알고 있었다.

힘이 미치는 한 도와주려 무던히도 애쓰는 고마운 친구다.

하는 일은 시나리오 작가지만,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어 사회기록과 관련되어 내가 모델이 되기도 했다.





노총각으로 힘겹게 살지만, 제 하고 싶은 일 열심히 하는 것 보니 참 보기 좋았다.

어쩌면 내가 동자동으로 들어오게 된 계기도 그가 만들어 준 것이나 다름없다.

그가 찍은 처참한 동자동 기록을 본 후 마음을 굳혔기 때문이다.






모처럼 만나 ‘인사동은 왜 나가지 않느냐?’, ‘여기서 언제까지 작업할 것이냐?’는 등 여러 가지 물어보았으나,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에 더 집중하기 위해 못갈 뿐이고, 여기가 마지막 자리 같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소주 한 병으로는 좀 아쉬웠지만, 담배를 피울 수가 없어 일어나야 했다.





남은 탕수육을 내일 먹으려고 싸 달랬는데, 방으로 가져 갈 겨를이 없었다.
커피 한 잔 마시려 매점으로 갔는데, 매점 앞에 이홍렬, 김원호씨가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는 김규수씨가 있었다. 안주를 펼쳐놓으니, 최건모씨가 막걸리를 사왔다.





덕분에 이홍렬씨의 몸 팔아 공부한 여대생들 이야기도 들었고, 김원호씨 사는 이야기도 들었다.

김원호씨는 젊은 시절 사고를 자주 쳐 교도소를 들락거려, 교회전도사가 사람 만들려고 그에게 시집왔다고 한다.

요즘은 서울근교의 기도소에서 사시는데, 한 달에 한 번씩 들린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김규수씨가 만나면 밤일도 하냐고 물었는데,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셨다.

그 몸으로 어려울 것 같았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거시기는 몇 센티냐? 어떻게 하느냐?‘등 원초적인 질문의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이 날은 처음부터 몸 파는 이야기가 나와서인지, 몸이 비비 꼬이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다.

다들 독거로 외롭게 사니, 그리울 수밖에...






김규수씨는 힘든 일하다 다쳤다며, 큼직한 파스를 붙여 놓은 허리를 보여주었는데,

아마 밤일을 과격하게 치루어 다친 영광의 상처가 아닌지, 그렇다면 상대가 누군지도 궁금했다.

자기의 거시기는 가늘고 길어 여자 배꼽으로 나온 다는 우스게 소리도 했다.

지금은 마티아라는 세례명으로 착하게 살며 ‘식도락’의 설거지도 돕지만,

이자도 한 때는 교도소를 제집처럼 들락거린 별이 일곱 개나 되는 장군이다.






김용만, 홍홍임, 박희봉씨 등 여러 명이 애로영화의 액스트라 처럼 등장하였다가는 사라졌지만,

스토리가 음란비디오보다 훨씬 진해, 방으로 도망쳐야 했다.
“주여~ 더 이상 휴지에 말라죽는 자손들이 없도록 하소서”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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