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명절이 가까워오면 대목장을 보러 곳곳의 장터를 찾아다닌다.

지난 28일은 경기도 광주에 있는 경안시장을 찾아갔다.

 

광주 경안시장은 오일장과 상설시장이 함께 서는 장으로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오래된 전통시장이다.

강원도와 충청도,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으로 시장이 크게 번성 했다고 한다.

 

그러나 강화도조약 이후 개항과 함께 외국 물건들이 들어오고,

철도의 부설과 새로운 도로가 생겨나며 오래된 지리적 이점은 잃었으나,

1914년 광주 지역의 중심이 남한산성에서 경안리로 옮겨지며

경안시장이 광주 지역의 중심 시장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경안시장은 경안천 천변에 있는 광주종합버스터미널에서 서쪽 방향에 있는데,

코로나에 주눅 들어 한산한 시골장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몰려 나왔다.

농산물을 비롯하여 수산물, 축산물, 의류, 잡화 등 거래품목은 여느 장터와 똑 같았다.

 

설날을 며칠 남긴 터라 인근에 있는 용인 천주교 성당묘지도 들리기로 했다.

미리 예정된 성묘가 아니라 시장 온 걸음에 들리다보니 미처 음식을 준비하지 못했다.

생전에 어머니가 좋아하신 음식을 장에서 사 가지고 찾아 나선 것이다.

 

용인 천주교 성당묘지는 찾아 온 성묘객이 없어 한적했다.

 

그 곳에는 정영신씨의 어머니 고 김덕순씨와

언니 고 정정숙씨 유골함이 아래위로 나란히 모셔져 있다.

챙겨간 국화와 음식을 영전에 놓고 모두의 안녕을 빌었다.

 

사진, 글 / 조문호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가족 만나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다.

살아 계실 때는 부모님을 매개로 더러 만나기도 하지만, 돌아가시고 나면 점차 소통이 줄어들다

집안에 큰일이나 생겨야 만나는 정 떨어지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직계만 살아가는 소가족제가 된지 오래다.





지난 11일은 정영신씨 어머니의 49제였다.

돌아가신 지가 엊그제 같은데, 날자는 빨리도 다가왔다.

오후2시 무렵, 유해를 안장한 용인천주교 공원묘원으로 가족이 모여 들었다.

정광원, 정정자, 정영신, 정주영, 정성태, 심지윤, 김중호, 김소현, 박옥순, 권민숙씨등

십 여명의 상주와 조카들이 나타났는데, 장례식 이후 처음 만났다.





49제란 불교의식에서 비롯된 것인데, 카톨릭 신자인 어머니 제를 49제로 치루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았다.

49제는 세상을 떠난 7일마다 일곱 번의 제를 올려, 그 동안 죽은 이가 불법을 깨 닫아

다음 세상에서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비는 불교 제례의식이다.





어떠한 종교이던 간에 형식이나 의식에 연연하지 않은 채 고인을 기리며,

가족들이 만나는 시간을 자주 갖는 것이야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난, 기독교와 카톨릭, 불교 등 여러 종교를 거쳐 보았는데,

옷의 색깔만 다를 뿐이지, 추구하는 것은 똑 같다고 생각해 왔다.

신이란 사람 위에 존재하는 지존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존재일 뿐이다.





제사 전날 밤, 정영신씨와 조카 심지윤씨가 제사 음식 장만하는 것을 지켜보며,

사랑도 세상 처럼 평등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께서 오빠와 언니는 두고, 왜 정영신씨만 사랑하냐는 것이다.

백수가 되도록 모셔 간병해 왔는데, 마무리 까지 사랑을 독점하게 하였다.

잘 사는 자식보다 찢어지게 가난한 자식을 더 사랑하는 것이 부모마음이겠지만...





중요한 사실 하나는 돈이 사랑을 눈 멀게 한다는 것이다.

돈과 사랑은 정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반비례라는 것을...





이제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났으니, 정영신씨 오빠와 언니 만나기는 하늘의 별따기일 것이다. 

죽기 전에 몇 번이나 더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부모 끈 떨어지면, 가족도 남이나 마찬가지다.





마지막으로 어머니 혼을 떠나보내는 소지 올리는 걸 지켜보며, 마음 속으로 빌었다.

“부디 극락왕생하시어, 그 곳에서는 절대 편애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25일 새벽녘, 정영신씨 어머니 김덕순(99)씨가 백수를 몇일 남겨두고, 편안하게 눈을 감았습니다.





5년 전, '청구성심병원'에서 더 이상 가망이 없다며 산소호흡을 중단하려 했지만,

정영신씨가 반대하며 직접 간호하기 시작했는데,‘지성이면 감천’이라 듯 기적적으로 삶을 연장할 수 있었습니다.

의술보다 정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고통스러운 삶은 말할 것도 없고, 딸의 경제적, 육체적인 어려움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되돌아 보건데, 혈연의 정보다 삶의 이기가 앞서는 현실에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어머니를 떠나보낸 슬픔이야 이루 말할 수 없겠으나, 호상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이제 그토록 가고 싶어 하신 천국에 가셨으니, 주님의 은총이 함께할 것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장례식장 : 한남동 ‘순천향병원 장례식장 3층 7호실
발인 : 12월 27일 오전 6시











지난 28일은 장모님께서 아흔 일곱 번째 생신을 맞는 날이었다.
폐암말기에다 고관절이 무너져 누워만 계셔야 하는 몸이지만,

백 미터 정도의 가까운 병원에 모셔두고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아내의 효심을 갸륵하게 여겼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잘 버텨 내신다.

오랜 세월 함께했던 ‘연세노블병원’에서 '노블요양원'으로 옮긴 지는 몇 일 밖에 되지 않았다.

마치 고려장에 끌려가듯, 죽어도 가지 않겠다며 버티셨지만, 더 이상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노블요양원'의 시설이 좋다는 말은 오래 전부터 들어 왔으나, 마치 호텔 룸 같았다.

2인실 방안에 화장실은 물론 갖가지 가전제품이 다 마련되어 있었다.

돌보는 요양사 또한 친절하고 부지런해 전혀 불편함이 없으나 장모님께서는 늘 부루퉁해 계신다.
“아무리 좋아도 집보다 못해야~”라는 말에 차라리 저와 자리를 바꾸었으면 좋겠다는 농담까지 했다.

장모님의 적적함을 달래려, 생신날을 하루 앞둔 지난 일요일, 처가 식구들을 모아 파티를 마련했다.

아래층의 넓은 휴게실을 빌려 멋진 생일파티를 벌이려던 계획에 그만 차질이 생겨버렸다.

담당직원이 없어 에어콘을 가동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도저히 더위를 못 참아 바람이 통하는 옥상으로 자리를 옮겨야했는데,

등산 갔다 온 처제 내외는 아예 바닥에 돋자리를 깔아 버렸다.

한꺼번에 자식들과 손주들을 보게 된 장모님이 좋아하셨지만, 오래 앉아 계실 수가 없었다.

좀 있다 병실로 옮겼지만, 얼마나 힘들었는지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애주가 동서 이기남씨의 발동으로 요양원옥상에다 술판을 벌여 놓았으나

준비한 술이 모자라 가까운 우리 집으로 옮겨야 했다.

방안 구석구석 숨겨 둔 술병을 다 끄집어내는 통에 나도 맛이 가 버렸다.

젊은 처가 식구들 면전이지만, 체통이고 지랄이고 다 벗어 던져 버린 것이다.

꼰대 소리 듣기 싫어서가 아니라, 제 버릇 개 주지 못하는 걸 어쩌겠는가?

술 마시다 다시 요양원에 들려 생일 케익 자르는 것으로 생신잔치는 끝냈다.

그런데 동서내외는 술이 취하면 꼭 노래방에 끌고 가는 버릇이 있다.

난, 기계에 끌려 가며 노래 부르는 것 자체를 싫어해 가급적 피하는 편이지만,

멀리 서 온 조카들 분위기 맞추려 따라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 역시 무반주로 요상한 노래를 불렀지만, 처제 내외도 정신없었다.

소리를 너무 질러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와는 반대로 젊은 조카들은 차분하게 노래를 잘 했다.

그 날 함께했던 처제 정주영, 이기남씨 내외를 비롯해 심지윤, 김중오, 정호원, 유진숙,

정성태, 김소연, 김현아, 김희중, 김유원 등 모두들 와 주어 고마웠고, 즐거웠어요.
다들 바쁘지만, 틈틈이 할머니 뵈러 오세요.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강행군하던 장터순례를 일단 멈출 수밖에 없었다,
보름 전 장모(김덕순 95세)님의 등뼈가 부러지는 사고가 생겨
순천향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다행히 수술경과가 좋아 간병인을 두고 계속 작업은 진행해왔는데,
종합검진 결과 또 청천벽력 같은 진단결과가 떨어졌다.
폐에 3cm크기의 종양이 발견되어 폐암으로 판명되었고,
이미 손댈 수 없는 지경까지 진행 되었단다.

넋을 잃은 아내는 하루라도 더 가까이 모시고 싶은 생각에 부랴부랴 집으로 모셨다.
작년에도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 입원한 적이 있는데,
신체의 기능들이 정지되어 살아날 수 없으니 산소 호흡기를
거두자는 의사의 말도 듣지 않았다.
아내 혼자 끼니마다 음식 해 나르며 지극정성으로 간호해
다시 살려냈으니, 이번에도 또 한 번의 기적을 바랄 수밖에 없다.

작업을 마무리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나 단칸방에서 장모님을 간병하는
불편함이야 감수할 수밖에 없지만, 문제는 잠 못 이루는 장모님의 고통에
간병하는 아내의 몸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에게 맡기고 잠이라도 좀 잤으면 했으나 막무가내다.
이제 겨우 삼일밖에 지나지 않았으나 아내는 벌써 탈진상태를 보이고 있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할 뿐이다.

“신이시여! 제발 저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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