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 ieung

이종미/ BELL LEE / 李鐘美 / painting.installation

2023_0706 2023_0716 / 월요일 휴관

 

이종미_37°39.5810'N 126°46.2830' E 작업실_ 캔버스에 먼지, 유화용 오일, 연필_100×100cm_2023

 

이종미 블로그_blog.naver.com/jongmeelee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입장마감_05:30pm / 월요일 휴관

 

 

금호미술관

KUMHO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삼청로 18(사간동 78번지) 1

Tel. +82.(0)2.720.5114

www.kumhomuseum.com

@kumhomuseumofart

 

이응; ''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을 발음 그대로 표기한 것 ieung; It writes as it is that Korean '' ieung sound meaning of yes,(informal) yeah, uh huh) '없다'는 없음을 모른다. 이미지가 물질인 지점은 무엇 아래 있다. 만약 작업들에서 정형성이 보여진다면 그것이 감정에 대한 객관적 진실이길 바란다.

 

이종미_꽃_유화용 오일, 미생물 처리된 음식물찌꺼기, 글라스, 변색 은수저_13.5×7.5×7.5cm_2023
이종미_37°12.9210' N 128°58.4090' E 2023_0614_16:03 태백 바람의 언덕_캔버스에 흙먼지, 유화용 오일_140×270cm_2023
이종미_살다_변형 캔버스(×무한/각 주역 64괘 중 하나)에 먼지,유화용 오일, 안료_가변크기_2023
이종미_풍경-먼지로부터_캔버스에 먼지, 유화용 오일, 수채_60×60cm_2023

표현을 위한 태도는 나로부터 떨어져 있어 갖출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다만 깊은 골, 어둡지만 무겁지 않고 무섭지 않아 미소 짓고 투영되는 듯하나 짚어지지 않는 곳을 마음으로 지시하면서 스스로는 필수불가결한 짓을 하고 있다. 마치 밥 짓는 일처럼, 밥솥과 쌀의 선택 그리고 손맛 같은 기능과 감각의 문제가 생존과 미각의 필요조건과 같다면 나는 '밥 짓는 일'이란 내용의 중대함을 괄호치고 '마치''처럼'을 바라본다. 괄호는 짐짓 자유롭다. 와 무한無限을 포괄한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삶과 죽음을 오간다. 밥 짓는 일은 사라졌으므로 중요해진다. 이종미

 

다 탔으면 오라잇

정명국/ JUNGMYOUNGGUK / 鄭銘國 / painting

2023_0622 2023_0702 / 월요일 휴관

정명국_나랑 경주할래_트래팔지에 흑연 프로타주_338×177cm_2020~3

정명국 인스타그램_@joung_myoungguk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입장마감_05:30pm 

 월요일 휴관

 

후원 / 서울특별시_서울문화재단

협찬 / 파버카스텔

기획 / 정명국

 

금호미술관

KUMHO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삼청로 18(사간동 78번지)

Tel. +82.(0)2.720.5114

www.kumhomuseum.com

@kumhomuseumofart

 

중후한 흑연 광택에서 떠오르는 감정들 3차원 실물을 2차원 화면 위에 허구적으로 옮기는 기교의 연대기를 미술의 역사라고 할 때, 실물의 표면 질감을 고스란히 본뜨는 특이한 재현 기교는 동서양 모두 오랜 기원을 지녔다. 동양 한자문화권에서 탁본으로 불리는 기술은 금속이나 돌에 새겨진 문자나 그림을 베껴내는 일종의 손쉬운 복사법에 가까웠고 역사는 중국 당(618~907)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서양에서 프로타주frottage로 알려진 기법은, 대상 가리지 않고 표면 위에 종이를 대고 연필 등으로 문질러 대상의 외형이 고스란히 떠오르게 하는 조형 방법으로, 현대미술사에서 우연적 효과에 비중을 뒀던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 중 하나로 설명된다. 하지만 프로타주는 동서고금의 모든 유년 세대에겐 부지불식간에 체득되는 시각 유희로 기억된다. 대상을 똑같이 옮길 재간이 없는 거의 모든 아이에게 그저 문지르는 것만으로 대상이 종이 위에 떠오르는 체험은 전에 없는 만족감을 안겼다. 포괄적으로 프로타주의 가능성은 대개 동전이나 나뭇잎처럼 작은 대상에 한정되었고, 그 유희는 유년기에 묶여있기 마련이다.

 

정명국_Gate_종이에 흑연 프로타주_135×112cm_2023
정명국_시간의 흔적_종이에 흑연 프로타주 아크릴채색_200×275cm_2023

대상의 중량이 최소 1톤을 넘는 자동차를 본 뜬 정명국의 프로타주 작업은 2000년 전후부터 시작됐다. 초반에는 바퀴와 휠, A필러가 포함된 앞 도어처럼, 차의 부분을 네모진 종이에 흑연 프로타주로 옮기다가 점차 차의 측면으로 확장해 차의 외형을 볼 만한 규모로 발전했고, 이후 차의 앞면 측면 후면을 각각 나눠 차의 3차원을 2차원으로 부분적으로 나눠 출품하는데 이르렀다. 대상의 표면을 본뜨는 기법이라는 차원에 더해, 정명국이 선택한 자동차가 대개 연식이 오래되어 지금은 단종 되어 과거의 기억을 품은 차종인 점, 그리고 차주와 차 사이의 유대감을 표상하고, 나아가 용도를 상실한 차를 향한 차주의 추모의 감정을 담아온 점에선 데스마스크death mask 전통을 떠올리게 한다. 사망 직후 죽은 이의 얼굴 본을 뜬 데스마스크라는 안면상의 기원은 BC 2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눈을 감고 있는 나폴레옹의 데스마스크처럼 명사들의 데스마스크가 여럿 남아있는 이유다. 데스마스크의 역사가 기원전까지 이르는 것은 인류에게 소멸된 존재를 반영구적으로 현재 시공간에 붙들고픈 바람과 석별의 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석고나 밀랍으로 본을 뜨는 데스마스크의 무채색 단색조는, 흑연으로 본을 뜨는 자동차의 단색조 표면과 정서적인 질감에서 연결된다.

 

정명국_dream_종이에 흑연 프로타주_183×263cm_2010~23
정명국_꽃길로 우리는_종이에 흑연 프로타주_122×185cm_2022~3

데스마스크가 고대의 혹은 짧게 잡아도 전근대의 보존 욕망의 재현이라면, 동일한 욕망은 동시대에서 때로 다른 목적으로 출현한다. 정명국의 초기작 중 차체의 측면 전체를 뜬 거의 첫 작품에 해당할 78 Pony(2006)1974년 현대자동차가 생산한 첫 독자생산 자동차 모델명 포니의 1978년 모델을 프로타주 한 작품이다. 유선형 차체가 일반적인 요즘 자동차 외형의 흐름과는 달리, 1974년 처음 생산되어 1990년 단종 될 때까지 직선형 디자인으로 각인된 자동차다. 여기서 고대 데스마스크의 보존 욕망과는 다른 동시대적 보존 욕망이 소환된다. 현대자동차는 올해 6월 현대 모터스튜디오 서울에서 포니의 시간이란 제목의 전시를 열었는데 전시장에는 과거 포니의 일련 모델들과 함께 1974년 생산된 4도어 패스트백 세단 포니와 함께 197410월 이탈리아 토리노 모터쇼에서 처음 공개했지만 생산으로 이어지진 못한 포니 쿠페 콘셉트카 복원 모델도 함께 전시했다. 현대차그룹에선 1973년 생산된 첫 국산 승용차인 기아 브리사도 내년 쯤 복원한다고 한다. 포니나 브리사는 1970~80년대 한국의 도심 풍경의 한 조각을 차지한다는 상징성을 갖는다. 포니가 대한민국 국가등록문화재에 등재된 이유일 것이다. 유행 지난 옛 모델의 복원을 추진하는 자동차 업계의 보존 욕망은 브랜드의 정통성을 강화할 목적인 점에선 데스마스크와 결이 다르지만, 소멸된 대상을 추억하는 살아남은 사람의 호감을 환기시키는 점에선 다르지 않다. 흑연의 반짝임으로 시선을 끄는 정명국의 단종된 차종의 초상화들도 오늘날 도로에선 종적을 감춘 대상들과 호흡을 같이 했던 특정 세대의 정서와 교감을 만든다. 흑연을 오래 문질러 차체의 본을 뜬 정명국의 프로타주 작업은 중층적인 색채를 지녔다. 광택으로 반짝이는 검정색 혹은 짙은 회색은 차라리 빛바랜 은빛처럼, 세월의 켜를 간직한 반짝거림을 지녔다. 일반 평면 작업과 달리 흑연의 중층적인 색감과, 특정 관객에겐 정서의 덩어리일 재현 대상의 성격에 집중시키고자, 특수 조명도 이번 개인전에 설치된다.

 

정명국_깊은 얼굴_종이에 흑연 프로타주_99×54cm_2019
정명국_바르게 살자_종이에 흑연 프로타주_51×96cm_2019

소멸된 대상을 보존해온 정명국의 지난 전시 이력을 살피던 중, 2009년 개인전 전경 사진을 봤다. '문화일보 갤러리'라고 2000년대 중반께 주요 미술가들의 전시를 기획한 문화일보 산하의 갤러리였다. 그가 개인전을 연 2009년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그의 포트폴리오에 수록된 개인전 전경 사진은 원목마루로 바닥을 마감한, 내겐 너무 익숙한 십 수 년 전 어느 전시 공간을 환기시켰다. 독백처럼 이런 생각이 무심히 지나간다. '이 전시장도 단종된 자동차처럼 부지불식간에 소멸 했구나.' 생의 소멸에 대해 10~40대 나이에 진지하게 성찰할 계기란 어지간하면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다가 가족의 일원이나 주변 인물의 부고를 접하거나, 느리지만 선명하게 삶의 종점을 향하는 지인을 가까이서 관찰하면 비로소 생의 소멸, 나아가 자신의 소멸에 관해 심사숙고하는 시간이 는다. 소멸에 대한 환기가 반복되면, 지난 시절 비중을 뒀던 자기 성취, 명성, 금전 욕구의 무상함을 몸 전체로 깨닫는 변화가 생기기도 한다.

 

정명국_각진인생_종이에 흑연 프로타주, 은박_90×176cm_2012~23

흔히 바니타스 정물화로 정의되는 16~17세기 사이 네덜란드에서 전성기를 누린 그림은 화려한 꽃과 과실과 금은보화로 장식된 탁자 위를 다룬 정물화로, 그림에 묘사된 온갖 욕망의 사물과 영화로움이 지닌 뜻은 죽음 앞에 무상함이라고 미술사에서 전한다. 바니타스 정물화하면 조건반사적으로 삶의 무상함과 등식화해서 떠올리지만, 다채로운 채색으로 묘사된 화려한 정물화 앞에서 인생무상을 직감으로 떠올리기란 실제론 어려운 게 사실이다. 삶의 유한성과 욕망의 무상함은 세월의 켜가 쌓였을 때 비로소 내면에서 떠오르는 개념이이어서일 게다.

 

정명국_휘익 마이카_종이에 흑연 프로타주_184×271cm_2022~3

흑연 고유의 중후한 광택으로 빛나는 검정색 혹은 은색 차량은 해당 차의 주인에겐 가족의 유대감과 연민의 정을 일으키는 데스마스크와 같은 것일 테고, 그 차를 동시대에 접했던 불특정 관객에겐 자신의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시절을 환기하는 모티프와 같은 것일 테고, 또 다른 이에겐 생의 소멸을 다시 환기시키는 촉매와 같은 것일 테다. 반이정

 

 

 

사유공간 Speculation Space

원문자展 / WONMOONJA / 元文子 / painting 

2023_0223 ▶ 2023_0305 / 월요일 휴관

 

원문자_사유공간_한지에 채색_148×148cm_2021

주최 / 이화여자대학교 동양화전공 동창회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입장마감_05:30pm / 월요일 휴관

 

금호미술관

KUMHO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삼청로 18(사간동 78번지) 2층

Tel. +82.(0)2.720.5114

www.kumhomuseum.com

 

실험의 역정과 환원의 논리-원문자의 세계 ● 원문자는 한국(동양) 화가들 가운데서도 유독 실험성이 돋보이는 경우다. 그의 실험의 경지는 한국화이면서 동시에 한국화가 아닌 영역으로 나아간다. 흔히 한국(동양) 화가들 가운데 자신의 작품을 한국화가 아닌 회화라고 부르기를 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한국화라는 카테고리에서 벗어나 보편으로서의 회화의 영역에 이르렀다는 주장이다. 이 같은 주장의 내면에는 일반적인 장르로서의 관념화된 한국화라는 콤플렉스를 벗어나려는 욕구가 내장되어 있음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 같은 주장의 내면에는 그간 한국화가 직면해온 상황의 질곡이 유독 깊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떠올려야만 이해가 된다. 전통적인 회화- 우리 고유한 회화 양식이면서 그것을 애써 기피하려는 태도는 자기모순을 드러내는 일이다. 자신의 뿌리를 외면하는 일이다. 한국화에 가해졌던 그 모든 모순을 대담하게 직면하면서 한국화의 존재를 다시금 세워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이 없기 때문이다.

 

원문자_사유공간_한지에 채색_130.5×194cm_2020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원문자의 실험을 한국화이면서 동시에 한국화가 아닌 영역으로 이르는 것이라고 한 것도 이와 결부된다. 말하자면 그의 실험은 한국화를 기피하는 데서가 아니라 한국화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한국화이면서 동시에 한국화가 아닌 영역으로 나아가는 정당성이다. 이는 한국화라는 특정한 관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만, 또한 한국화란 어떤 것인가란 원형과 정신에 대한 물음을 동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실험의 출발이 무엇을 그릴 것인가에서 왜 그리느냐는 실존의 입장에서란 사실에서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실존의 세계에 들어간 만큼 그의 실험은 치열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원문자_사유공간_한지에 채색_130.5×194cm_2019

그의 실험의 편력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한지의 발견과 원용을 먼저 지적할 수 있다. 한지의 발견과 원용이란 어떻게 보면 한국화 고유의 질료의 발견이자 원용이 아닌가 하는 물음이 나올 수 있다. 한국화 고유의 질료를 다시금 발견하고 원용한다는 자체가 모순이지 않는가란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자신 속에 있던 것을 자신이 다시금 발견한다는 것이 되니까 모순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쩌면 자기 속에 있는 것을 자기가 발견한다는 것은 밖에서의 발견보다도 더욱 내밀하고도 놀라운 것이지 않을 수 없다. 들라크루아가 자신은 밖에서 영향을 받기보다는 자기 내면에서 영향을 받는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한국화 고유의 질료에 대한 발견은 또 다른 회화로서의 가능성을 담보한 것이어서 발견의 의미는 더욱 두드러진다.

 

원문자_사유공간_한지에 채색_130.5×162cm_2017

한국화의 매체는 지, 필, 묵이라 말해진다. 이는 서양화와 같은 단순한 바탕과 붓과 안료의 의미를 벗어나 그 자체가 일체화된 문화적 현상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만큼 신체화된 존재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지의 발견이란 단순한 지지체로서의 바탕인 화선지의 영역에 갇힌 것이 아닌 한국에서 생산된 재래적 방법의 종이 일체를 말한다. 한지의 발견과 원용이란 따라서 한지가 지닌 질료 즉 물성으로서의 존재의 발견이 된다. 원문자의 한지의 실험도 여기에 바탕한 것이다. 한지의 물성을 적극적으로 조형화의 단계로 끌어올린 것은 몇몇 서양화가들에서도 시도된 바 있다. 그런데도 원문자의 실험이 한결 돋보인 것은 한국화 영역에서 가장 먼저 시도되었기 때문이다. 자기 속에서 자기를 발견했다는 차원에서 그의 시도가 더욱 의미를 더해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 그의 한지의 실험은 일종의 원형 탐구라 할 만큼 종이의 제작과정을 되돌아간 것이기도 하였다. 한지의 질감을 더욱 푸근한 정감의 세계로 진전시키는가 하면 종이의 원료인 닥을 다시 물에 해체하여 그것을 부조의 형식으로 떠내는 요철의 구조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면모를 보였다. 반입체적인 부조의 형성은 평면이자 동시에 입체성을 띤 것으로 회화이자 동시에 조각이라 할 수 있는 혼융의 조형물이기도 하다. 이 같은 실험은 종이를 애초의 질료로 환원하면서 종이의 물성이 지지체로서의 존재를 재확인한 것이기도 하였지만 한지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닌 한지일 뿐이라는 실존으로서의 차원을 현전시킨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원문자_사유공간_한지에 채색_148×148cm_2019

그의 실험의 전개는 근래에 오면서 또 하나의 경지를 펼쳐 보이고 있다. 새로운 매체로서의 사진 방법의 원용이 그것이다. 「새로운 시각의 사유 공간」으로 명명된 이 실험은 일종의 디지털 미술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방법 자체를 강조해 「포토 아트」라고도 불린다. 이 새로운 실험은 지금까지의 실험의 양상과는 또 다른 탐구의 영역임이 분명하다. 무엇보다 지금까지의 수묵 위주나 종이의 물성의 탐구영역과는 그 맥락을 달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화사한 색채의 구현과 기계적인 방법이란 새로운 감각의 탐구가 현저하면서도 한편으론 오랫동안 자신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또 다른 감성의 확인이라는 점에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송희경은 이를 두고 「사진을 뛰어넘은 회화」「작가의 손을 거친 창조된 원문자의 고유의 회화」로 규정하기도 한다. 기계적인 방법의 원용이면서 전혀 그런 생소한 기술적 면모를 드러내지 않은 작가 고유의 감성이 무르익어감을 발견하면서 한편으론 그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던 화사한 색채의 세계가 되살아나고 있지 않나 보인다. 이 역시 자신 속에서 발견된 조형의 한 원천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원문자_사유공간_한지에 채색_148×148cm_2020

그의 근작은 새로운 실험의 영역을 보인다기보다는 어쩌면 그의 지금까지의 조형의 역정을 종합적으로 가다듬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 만큼 대범하면서도 자유로운 사유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고 하겠다. 때로는 날카로운 선획과 이에 대비되는 물결치는 곡면의 형성은 화면 자체를 더욱 탄력적으로 이끌어가는 동력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화면의 스케일이 더욱 넓어진 면모를 확인한다. 빛과 어둠, 유기적인 것과 무기적인 것, 기하학적인 형태와 생명적인 형태의 공존이 자아내는 극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화면은 더없이 푸근한 정감을 주는 것도 허심한 화면의 확대에서 연유된다고 본다. 부분보다 전체가 앞서는 것은 그만큼 시야가 넓어지고 있다는 증좌이기도 하다. 달관의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할까. ● 부단한 실험을 통해 자신을 거듭나게 하는 방법의 치열성에도 불구하고 화면엔 한없이 가라앉는 깊이의 여운이 지배되는 것은 그 모든 실험에서 일어나는 독소를 극복하고 언제나 자신으로 되돌아왔다는 증거로서 말이다.

 

원문자의 세계를 일별해보는 과정에서 다시금 확인되는 것은 그의 조형의 바탕이 대단히 균형 잡힌 양상으로 전개되어 왔다는 점이다. 평면적인 요소와 구조적인 요소가 그것이다. 평면이면서 동시에 구조인 세계, 또는 평면적이면서 언제나 구조를 지향하려는 충동과 구조적이면서 언제나 평면을 지향하려는 욕구가 교차하고 있어 변화와 지속이 잇따라 일어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게 한다. 억제된 표현의 환원 의식과 자기를 대담하게 벗어나려는 일탈의 자각과도 일치되는 점이다. 어쩌면 이 같은 균형감각이야말로 그의 사유 공간을 더욱 깊은 내면으로 이끌어가는 동력이 아닌가 생각된다. ■ 오광수

 

Vol.20230223c | 원문자展 / WONMOONJA / 元文子 / painting

DYNAMIC SYMPATHY 다이나믹한 공감

양혜숙展 / YANGHYESOOK / 梁惠淑 / painting 

2022_1103 ▶ 2022_1113 / 월요일 휴관

양혜숙_DYNAMIC SYMPATHY 4_한지 토분 안료_91×117cm_202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입장마감_05:30pm / 월요일 휴관

 

 

금호미술관

KUMHO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삼청로 18(사간동 78번지) 1층

Tel. +82.(0)2.720.5114

www.kumhomuseum.com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의 풍경, 내가 살며 호흡하는 주변의 모든 대상이 나의 작품의 소재가 된다. 평범한 소재들이 평범함을 넘어서, 모호함으로 드러나는 순간을 포착한다. 그들(평범하고 일상적인 대상들)은 때로는 비밀스럽고 수수께끼 같거나, 익명성의 껍질을 벗어내고 내러티브를 발산하는 대상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들은 보는 이의 감정에 따라, 아름답거나 불안감을 야기하기도 하며, 논리로 설명하기 힘든 현실의 여러 상황과 대상들 사이의 묘한 관계로 인식되기도 한다.

 

양혜숙_DYNAMIC SYMPATHY 8_한지 토분 안료_97×130cm_2022
양혜숙_DYNAMIC SYMPATHY 9_한지 토분 안료_162×130cm_2022
양혜숙_DYNAMIC SYMPATHY 6_한지 토분 안료_117×91cm_2022

이번에 진행하는 전시는, 해변가 주변으로 끊임없이 지어지는 고층 아파트와 상가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풀숲과 공사 잔해들, 널부러진 파이프들 사이로 삐죽삐죽 솟아오르는 들꽃들, 그리고 그들이 뿜어내는 묘한 생명력, 가끔씩 보이는 야생 동물들의 불안함과 그 안에서 여전히 건재하는 생명의 존재감 등 복합적이고 역동적인 감정을 재현하고자 한다. ● 작품의 제작에 사용되는 주 재료는 한지에 토분과 안료, 목탄 등이다. 미색의 순수한 한지에 토분을 쌓아 올려 만들어지는 재질감과 따뜻한 색감이 안정감을 주고, 내가 즐기는 목탄을 이용한 드로잉은 거칠은 생명력을 표현하는데 효과적이다. ● 나는 화려한 풍경Gorgeous Landscape이라는 타이틀로 십수년 동안 작업해 오고 전시 활동을 펼쳐 왔다. 나의 풍경들은 사실 화려하거나 대단하지 않다. 그다지 멋스럽지 않은 초라하기까지 한 흔한 평범한 풍경들이었다. 하지만 내면에 깊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한 풍경들은 나에게 의미가 되고 멋진 소재가 되어주었다. 나는 나의 작업에 있어서 그것의 전달과 예술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 것 같다. 그런데 지금에서 느껴지는 것은 예술은 논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예술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잠시 쉬어가며 과거와 현재의 자신과 대면하게 하는 것이며, 찰나의 따듯함을 발견하게 해 주는 게 아닌가 싶다.

 

양혜숙_DYNAMIC SYMPATHY 2_한지 토분 안료_117×91cm_2022
양혜숙_DYNAMIC SYMPATHY 3_한지 토분 안료_117×91cm_2022
양혜숙_DYNAMIC SYMPATHY 1_한지 토분 안료_117×91cm_2022

다섯 개의 기둥 ● 나는 이렇게 불안한 밤 호숫가를 걷는다. "내가 왜 이러고 있을까" "내가 왜 이러고 있을까" "나는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까" 차가운 바람에 볼이 시려올 때, 아주 작은 소리에도 맥박이 빨라지는 그 순간에, 나는 다섯 개의 기둥들에 사로잡혔다. 달빛에 반사되어 정체 모를 묘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는 그것들을 보며, 점점 그들에게 빠져 들었다. ● 나는 내가 왜 그저그런 풍경들에 매료되는지 그리고 안정감을 느끼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풀어야 하는데 풀기 어려운 숙제 같았다. 그날도 나는 기묘한 멋짐을 드러내는 다섯 개의 기둥들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아름답다고 느꼈다. 그리고 내가 보였다. 그런 묘한 매력을 뿜어내는 풍경들이 매우 나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또 다른 나를 만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약하면서도 강해져야하는, 그리고 어쩔줄 몰라하는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YANG 2022) ■ 양혜숙

 

양혜숙_DYNAMIC SYMPATHY 6_한지 토분 안료_91×117cm_2022
양혜숙_DYNAMIC SYMPATHY 5_한지 토분 안료_91×117cm_2022

DYNAMIC SYMPATHY ● I take the subject matter of my work from all existing scenes and things that are breathing with me in my surroundings. I capture a moment in which common subject matter appears ambiguous, moving beyond its ordinary impression. They (common everyday objects) turn into objects that are at times secret and cryptic, and evoke narratives, breaking away from anonymity. They give rise to some feelings of beauty or anxiety depending on the viewer's emotions. These are also perceived as a weird relation between objects and situations that are indefinable by logic. ● My works on show at this exhibition feature groves and debris seen between high rise apartment and shopping district buildings along the shores and wildflowers shooting up from disorderly scattered pipes. This exhibition is intended to be a representation of complex, dynamic emotions such as the life force those objects emit, a feeling of insecurity wild animals have, and a sense of their presence. ● The primary materials of my work are hanji (handmade Korean paper), soil powder, pigments, charcoal, and others. The material property brought about by heaping up soil powder on a cream-colored piece of hanji and warm colors give the viewers a sense of stability. A charcoal drawing I enjoy is effective in expressing a rough life force. ● I have worked and exhibited my pieces under the theme of Gorgeous Landscape. My landscapes are neither showy nor great. They are common, ordinary scenes that appear not so stylish and even humble and insignificant. And yet, those landscapes that seem to embrace a profound story are of great significance to me. I have thought a lot about my work's artistry and its conveyance. What I feel now is that art depends on no logic. I think art has its appreciators face themselves of the past and the present and discover some warmth, taking a rest for a while.

Five Poles ● At this uneasy night I walk along the lake shore. Why am I doing like this? Why am I doing like this? How far am I going to do like this? When my cheeks get cold by a cold wind, In the moment my pulse quickens By a really small sound, I was captivated by five poles. Seeing those emitting an unidentified, weird energy, Lit by the moonlight, I gradually Fall into them. ● I had no idea as to Why I am captivated by such ordinary landscapes and feel a sense of stability. That was like an insoluble assignment. That day also I was captured by five poles That look weirdly fabulous. And I felt beautiful. And I could see myself. I thought Such strangely attractive scenes Looked like me. It seemed like I would watch me Who is weak, But should be strong, and is at a loss (YANG 2022) ■ YANG HYESOOK

 

Vol.20221103c | 양혜숙展 / YANGHYESOOK / 梁惠淑 / painting

표면의 이면 Inverted Surfaces

한성필展/ HANSUNGPIL / 韓盛弼 / photography 

 

2022_0805 ▶ 2022_1023 / 월요일 휴관

 

한성필_Weight of Time 1_2014

 

초대일시 / 2022_0805_금요일_05:00pm

관람료 / 성인 5,000원 / 학생(중학생~대학원생) 4,000원우대 (만 65세 이상,어린이,장애인,국가유공자 포함) 3,000원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입장마감_05:30pm / 월요일 휴관

 

 

금호미술관

KUMHO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삼청로 18(사간동 78번지) 2,3층

Tel. +82.(0)2.720.5114

www.kumhomuseum.com

 

금호미술관은 2022년 8월 5일부터 10월 23일까지 사진작가 한성필의 초대전 『표면의 이면 Inverted Surfaces』을 개최한다. 한성필은 재현과 환영에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 문명과 지구 환경에 이르는 폭넓은 주제를 작업에서 다룬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가 그동안 세계 각국을 다니며 촬영한 세 개의 연작과 영상 작업을 한 자리에서 선보인다. ● 세계의 여러 도시에서 건축물 복원 현장 앞에 설치된 이미지가 프린트 된 임시 가림막을 촬영하여 가상과 실제의 경계를 드러내면서 '우리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지는 「Façade」 연작, 극지방인 북극해와 캐나다 로키 산맥 등의 모습을 촬영하여 대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자아내는 동시에 과잉 개발로 인해 빙하가 빠르게 녹아 내리는 기후 문제를 보여주는 「Polar Heir」 연작, 그리고 프랑스 소도시의 전원 풍경 한 가운데 원자력 발전소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를 포착한 「Ground Cloud」 연작을 전시한다. 그의 작업은 눈 앞에 놓인 화면의 스펙터클과 장엄함의 이면에 존재하는 확장된 사유의 장으로 우리를 이끈다.

 

한성필_표면의 이면展_금호미술관 2층_2022
한성필_표면의 이면展_금호미술관 2층_2022

건물 외벽을 일컫는 '파사드(façade)'는 유럽에서 역사적 건축물이나 문화재 복원을 위한 공사현장의 차단막을 가리키기도 하며, 이는 공공미술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오래 전, 영국 런던에서 복원 공사 중이던 세인트 폴 대성당 앞에 성당의 기초 디자인이 그려진 대형 가림막이 세워져 있는 모습을 본 작가는 그간 고민하던 이미지의 재현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발견하였다. 이를 계기로 세계 곳곳을 다니며 파사드와 건물의 벽화인 '트롱프뢰유(Trompe-l'oeil)'를 카메라에 담았다. ● 언뜻 사진 속 가림막의 이미지는 실제 건물의 모습처럼 보이며, 자연광과 가로등의 빛이 섞여 만들어내는 신비로운 새벽의 하늘색은 그림 같은 장면을 연출한다. 작가를 대표하는 작업 중 하나인 「Façade」 연작은 낮과 밤, 현실과 판타지, 사진과 회화 등 상반되는 두 요소가 한 화면에 혼재해 나타나면서 개념과 개념 사이의 경계를 묘하게 흐리고,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한다.

 

한성필_표면의 이면展_금호미술관 3층_2022
한성필_표면의 이면展_금호미술관 3층_2022

「Ground Cloud」 연작은 작가가 2005년 프랑스 소도시의 고성 지대에서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할 당시 처음 촬영하였다. 사진들은 마치 구름이 피어 오르는 전원 마을을 담은 듯 하지만, 센 강과 루아르 강 인근 원자력 발전소에서 강물을 냉각하면서 발생한 수증기를 포착한 것이다. ● 목가적인 대지의 모습과 발전소에서 내뿜는 수증기가 만들어 낸 생경한 풍경은 대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환경 문제에 대한 고찰을 동시에 이끌어낸다. 작가는 에너지 개발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나 찬반 논쟁을 벗어나 대립되는 것들의 낯선 공존을 차분히 드러내면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문명과 자연의 상태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활동 초기부터 작가가 관심 가져 온 지구 환경과 자원 개발에 대한 주제는 다른 작업들에서도 지속적으로 다루고 있다.

 

한성필_표면의 이면展_금호미술관 3층_2022
한성필_표면의 이면展_금호미술관 3층_2022
한성필_표면의 이면展_금호미술관 3층_2022

작가가 최근까지 관심을 가지고 촬영한 극지방의 모습을 담은 「Polar Heir」 연작은 자연과 문명, 지구환경, 자원 개발과 같은 폭넓은 주제를 다룬다. 수년 간의 리서치를 진행한 후 카메라 장비를 들고 극지방을 여행한 작가는 빠르게 녹아 내리는 빙하와 과거 산업 지역 등을 기록하였다.

 

전시 공간을 압도하는 대형 사진 작업들은 태고의 모습을 지닌 자연의 초월적인 모습인 동시에 수 세기 동안 이루어진 자원 개발의 역사와 자연 개척의 흔적을 여실히 보여준다. 작가는 대자연의 숭고함과 그 이면에 존재하는 환경 문제의 현실을 한 장면에 포착함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심을 느끼는 한편 인류가 지구환경에 미친 영향을 사유하도록 한다. ■ 금호미술관

 

Vol.20220805i | 한성필展/ HANSUNGPIL / 韓盛弼 / photography

새로운 구조를 향하여

위영일展 / WEEYOUNGIL / 魏榮一 / painting 

 

2022_0714 ▶ 2022_0724 / 월요일 휴관

 

위영일_Neutral structure 6_캔버스에 수성페인트, 아크릴채색, 유채, 스프레이, 펜_112.1×145.5cm_2021

 

초대일시 / 2022_0714_목요일_05:00pm

후원 / 서울특별시_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입장마감_05:30pm / 월요일 휴관

 

 

금호미술관

KUMHO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삼청로 18(사간동 78번지) 3층

Tel. +82.(0)2.720.5114

www.kumhomuseum.com

 

익숙함에서 벗어나기 ● 각종 기계가 작동하며 내는 굉음을 뚫고 영등포에 철공소가 즐비한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다보면 2층에 위영일 작가의 작업실이 있다. 지금까지 해온 수많은 작품들이 한쪽 방에 보관되어있고, 다른 방에는 작업대와 컴퓨터, 여러 종류의 재료들이 비교적 잘 정리되어 놓여져 있다. 벽면의 위쪽에는 작은 액자 하나가 걸려 있는데, 「아트페어 수칙」이라는 위영일의 2007년 작품이다. 평범한 글씨체로 마치 상장처럼 덤덤하게 적혀있는 문구는 다음과 같다. 1. 1초 안에 사로잡을 시각성, 2. 생각보다는 시각적 효과, 3. 운반과 보관이 용이한 형태, 4. 명성이 없다면 노동력, 5. 이미 유명하다면 비슷한 패턴으로 반복 재생산하라고 말이다. 이 작품은 예술적 신념이나 작가적 태도를 포기하고 미술시장에서의 성공만을 바라보게 만드는 세태에 대한 비판이며, 더 나아가서는 스스로를 향한 다짐처럼 읽힌다. 마지막 수칙으로 그가 언급한 '비슷한 패턴의 반복/재생산'은 위영일에게 있어서는 가장 피하고 싶은 작가로서의 길처럼 보였다. 20여 년의 작품 활동 궤적을 살펴보면 그가 끊임없이 하나의 주제나 키워드 안에 포섭되는 것을 피하고자 절실하게 노력해왔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위영일_Neutral structure 3_변형캔버스에 수성페인트, 아크릴채색, 스프레이, 펜_104×104cm_2021
위영일_Neutral structure 4_변형캔버스에 수성페인트, 아크릴채색, 스프레이, 펜_104×104cm_2021

아직 일한 경력이 길지 않은 기획자/연구자로서 나는 세부 연구주제를 떠올렸을 때 연결하여 생각나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크다. 특정한 상황에 있는 누군가에게는 반복 재생산이 매우 중요한 목표이자 당면 과제일 수 있다. 그러니까 옳다 그르다의 문제라기보다는 이 역시도 다름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다시 말해, 누군가에게는 똑같이 보인다 하여도 비슷한 주제이지만 그 안에서도 계속 새로운 연구 주제를 발굴하고 그 과정에서 탐구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면 가치 있는 일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위영일은 하나의 주제에 계속 머무르거나 반복/재생산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 선택을 했다. 이러한 데에는 자신의 인지도를 높인 특정 스타일에 회의를 느끼며 그것에서부터 탈주하고자하는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다고 그의 박사논문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만화, 디자인 할 것 없이 여러 가지 일을 해 온 그는 말 그대로 다재다능하며, 무엇보다 솔직하며, 뛰어난 실행, 추진능력을 가졌다. 그만큼 그의 이전 작품들은 다채로운 시도들로 가득하다. 2000년대 초반 팝아트 스타일로 슈퍼히어로 여럿을 모아 만든 '짬뽕맨' 작업으로 사람들의 욕망에 관한 이야기를 비교적 직설적으로 했던 위영일은 2010년대에는 '알레아토릭 페인팅 프로젝트'를 통해 페인팅 매뉴얼을 만들고 주사위를 던져 나온 결과 값대로 회화 작품을 완성하는 중성적 시도를 하기도 했으며, 이번 개인전 『새로운 구조를 향하여』에서는 회화의 형식, 보는 방식을 중점적으로 탐구한다.

 

위영일_Neutral structure 15_변형스테인리스판에 수성페인트, 스프레이_67×120cm_2022
위영일_Neutral structure 2_캔버스에 수성페인트, 아크릴채색, 유채, 스프레이, 펜_97×145.5cm_2020

전시 제목 『새로운 구조를 향하여』는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더 새로운 라오쿤을 향하여'를 떠올리게 한다. 그린버그는 사회로부터 분리되어 미술을 위한 미술로 나아가야한 미술이 가진 가치를 지켜낼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 궁극이 순수미술, 추상미술이라고 말한다. 회화에서의 형식주의, 순수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예술의 키치화, 혹은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예술의 정치적 이용과 같은 총체적 위기 속에서의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탈재현을 지향하면서 작가들은 아무것도 그리지 않게 되었으며, 형식만이 드러난 회화는 관객이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되면서 모순적으로 교조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위영일은 그린버그 식의 형식주의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회화 영역에서의 새로움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데, 이것이 전시와 작품을 통해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위영일_Neutral structure 7_변형캔버스에 수성페인트, 아크릴채색, 유채, 스프레이, 펜_120×60cm_2021

화면 안에서: 중성적 구조, 중성색 ● 위영일은 회화를 구성하는 것은 사각의 틀과 2차원의 표면이라는 명제를 일정 부분은 받아들이고, 일정 부분은 순응을 거부한다. 2차원의 표면이라는 점은 받아들여 화면 위에 형과 색을 구성하지만, '사각'의 틀이라는 점은 둥근-사각형이라고 부르는 변형 프레임을 활용해 벗어나고자했다. 위영일의 「Neutral Structure」 시리즈는 기하도형이나 수직, 수평의 붓질을 피하고자 한 작품이다. 기하구조나 그리드 구조는 보는 이에게도, 또 그리는 이에게도 안정감을 준다. 그러나 위영일은 이러한 '편안한' 방식을 거부하기 위해 '중성적 구조'를 만들어냈다. 결과적으로 올가미나 밧줄이 던져진 상태처럼 유동적인 형태를 구축하게 되는데, 이는 시각적으로도 구조적으로도 무언가 불안정하고 조화롭지 않게 느껴진다. 이러한 인상을 더욱 적극적으로 강화하는 것이 바로 색이다. 그는 색 구성에서도 시각적으로 익숙하고 아름다운 조합을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한다. 위영일은 일러스트레이터 프로그램에서 면적의 비율과, 색의 조합을 무수히 많이 시도하며 익숙하고 편안한 감각에서 탈주하기 위해 시도한다. 그의 이러한 노동을 기반으로 한 결정은 감각에만 의지하는 나이브한 태도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위영일_Neutral structure 8_패널에 수성페인트, 아크릴채색, 스프레이, 펜_70×70cm_2021

화면 밖에서: 회화-조각-설치 ● 「Neutral Structure」 시리즈가 화면 안에서 익숙한 것들을 선택하지 않는 방식으로 새로운 구조를 탐구했다면, 「New Point」는 화면 밖에서의 시도들로 확장된다. 쉽게 설명해서, 「New Point」 시리즈는 여러 개의 각기 다른 크기의 캔버스들로 이루어진 회화-조각-설치이다. 각기 다른 높이와 형태, 면적으로 이루어진 이 부분들은 전시장의 벽면에서 구성되어 걸릴 때에만 작품이 완성의 상태에 이른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바라보는 평면의 넓은 면은 흰색으로 모두 비워져 있는 대신, 캔버스의 측면이라고 여기는 면들은 색면 처리 하거나 다양한 패턴을 채워넣는다. 관객은 편안하게 정면을 바라보지 않는 대신, 작품 주위를 이리저리 맴돌며 여러 각도에서 캔버스의 측면을 바라보게 된다. 2차원의 평면이 아닌, 3차원의 오브제라는 점에서 조각적이라고 여겨지며, 여러 점의 캔버스가 공간 안에서 어떻게 놓이느냐에 따라 최종 작품의 형태가 가변적이라는 점에서 설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의 화면 안에서 완결성을 띠지 않는 대신, 개별 캔버스들은 전체의 부분으로 기능하며 벽에 걸린다.

위영일_Neutral structure 9_변형캔버스에 수성페인트, 아크릴채색, 스프레이, 펜_105×105cm_2021

'새로움'이라는 것이 과연 남아있기는 한지 의구심과 회의로 가득하지만, 이러한 난제를 놓아버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고민하는 태도와 열정이 고무적으로 느껴진다. 회화에 대한 지독한 애정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시도들이 아닐까 생각된다. 위영일은 회화작품이 갖는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조건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는 대신, 동시대 환경에 맞게 변형시킴으로써 회화를 새로운 관점으로 보도록 한다.

 

위영일_Neutral structure 5_변형캔버스에 수성페인트, 아크릴채색, 스프레이, 펜_117×101cm_2021

 

더 이상 덧붙일 이야기가 없을 것처럼 단단하고 또 완전하게 느껴지는 역사의 무게 앞에서 가능한 시도들을 계속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이어가는 것. 이것이야 말로 작가가 작품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나가는 이유이자 목적일 것이다. (2022.7.11.) ■ 최정윤

 

Vol.20220714f | 위영일展 / WEEYOUNGIL / 魏榮一 / painting

 

水墨, 쓰고 그리다

 

강미선展 / KANGMISUN / 姜美先 / painting 

2021_1119 ▶ 2022_0206 / 월요일 휴관

 

강미선_금강경(金剛經)-지혜의 숲_ 한지에 수묵_350×2200cm_2021 / 금호미술관 3층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료 / 5,000원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입장마감_05:30pm / 월요일 휴관

 

 

금호미술관

KUMHO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삼청로 18(사간동 78번지)

Tel. +82.(0)2.720.5114

www.kumhomuseum.com

 

쓰고 그리다. - 강미선의 추성부(秋聲賦) ● 이번 금호미술관의 초대전은 강미선의 31번째 개인전이다. 1985년 첫 개인전 이후 그는 한국과 중국을 무대로 꾸준히 작업을 발표해 왔다. 이 작가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물론, 이미 강미선이라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잘 알고 있는 관람객도 모두 3층의 「금강경-지혜의 숲」(2021)을 시작으로 전시를 감상하길 바란다.

 

강미선_금강경(金剛經)-지혜의 숲_한지에 수묵_350×2200cm_2021 / 금호미술관 3층
강미선_금강경(金剛經)-지혜의 숲_부분 / 금호미술관 3층

쓰다. ● 3층에는 그가 처음으로 발표하는 글씨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2000년부터 시작된 오랜 중국에서의 경험을 통해 그는 한국의 서예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강미선이 본 중국의 서법은 표현에 있어서 매우 자유로운 것이었다. 이를 통해 기존의 한국서예에서 벗어난 자신의 글씨를 쓸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 그의 '쓰기' 작업의 대표작은 『금강경』이다. 그의 글씨는 누구의 서체도 흉내 내지 않고, 멋도 부리지 않고, 어떠한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그가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정성스럽게 닥종이를 두드리고 겹겹이 붙여서 종이 바탕을 만들고, 그 위에 글씨를 썼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듯 글씨를 지우기도 하고 덧입히기도 하며 각 글자마다 배경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전시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화강암 바위에 오래전 새겨진 글씨처럼 보이는 각각의 담담함을 지닌 5149개의 글자다. ● 한 글자를 쓰기 위한 수고로움은 마치 일보일배(一步一拜)에 정진하는 수행자나, 사경(寫經)에 임하는 승려의 극진한 공력과 같다. 그러나 이 작품은 금은니(金銀泥)로 장식한 고려시대의 화려한 사경과는 다르다. 담담하게 씌어진 5149자가 모여서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아우라는 보는 사람을 경건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마치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만들어가는 대중의 묵묵한 행보 앞에 숙연해지는 것과 같다. ● 금강경에 대해 "평범함 속의 진실이며, 평범함 속의 초월"이라고 표현한 남회근(南懷瑾, 1918~2012)의 말을 강미선은 이 작품으로 펼쳐 보이고 있다. 서예의 제법으로부터 벗어나 종이 바탕과 먹의 물성에 자신을 맡기고 잘 쓰고자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써내려간 행위는 일체의 생각과 법에 머물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는 금강경을 필사하는데 어울리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작업을 대하는 이러한 자세는 이어지는 다른 작업들에도 일관되게 적용된다.

 

강미선_대미필담(우)_한지에 수묵_98×137cm_2021 / 금호미술관 3층
강미선_대미필담(좌)_한지에 수묵_98×137cm_2021 / 금호미술관 3층

그리다. ● 2층에는 일상의 삶을 통해 마음에 담긴 사물들을 들여다보며 작품으로 풀어낸 「觀心」시리즈가 펼쳐진다. 그의 작업은 종이 바탕을 만드는 것보다 더 먼저, 하나의 사물이 작가의 마음에 자리 잡는 과정부터 시작한다. ● 가을이 되어가며 그의 작업실 마당 한구석의 백 년 된 감나무에서 덜 익은 감들이 거센 바람에 우수수 떨어졌다. 감사하게도 감물을 많이 만들 수 있어 「무언가(無言歌)」의 재료로 썼다. 끝내 가지에 붙어서 버틴 감들은 가을과 함께 익어가며 붉은 감이 되어 「관심(觀心)-감」 시리즈의 소재가 되었다. ● 마당의 파초도 남편의 지극 정성으로 겨울마다 실내로 옮기는 수고를 감내하고 고이고이 모셨더니 옆에 어린 파초 하나가 땅을 뚫고 솟아 올라왔다. 파초와의 시간들로 쌓인 마음을 들여다보며 「관심(觀心)-파초」를 제작했다. ● 이렇게 경복궁에서 만난 은행나무도, 부석사의 안양루도, 그의 정원을 쓸던 싸리 빗자루도 모두 그의 마음을 거쳐 투박한 종이 바탕 위에 얹힌다. 한동안 흙판 위에 그리고 구워내는 작업을 하였지만, 그때도 소재는 일상에서 만난 사물들이었다. 1층에는 소품의 작업들을 모아 조선시대 책가도처럼 펼쳐놓은 「서가도」가 전시되어 있다. 이렇게 걸어놓고 보니, 소재가 된 사물들이 조선 책가도에서 많은 의미를 담고 등장했던 기물들처럼 길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도 해석이 되어 흥미롭다. ● 강미선 작가는 1980년대, 20대의 시기에 수묵화 운동을 이끌었던 스승과 선배들의 열정적인 활동을 가까이에서 경험할 수 있었고, 2000년대에는 민화를 가르칠 기회가 있었다. 수묵화 운동을 통해서는 수묵과 종이라는 재료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함께 재료와 표현의 실험에 치중하게 될 때 만나는 한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 민화 수업을 통해서는 삶과 함께하며 길상의 의미를 담아 감상자와 소통했던 전통 회화의 역할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충분히 하나의 작품으로도 볼 수 있는 정성껏 만든 바탕 화면을 완성된 작품으로 여기지 않고 위에 그의 마음에 고요히 담겨있는 이미지들을 얹는다. 그의 작업에서 등장하는 석류나 연(蓮), 매화와 같은 이미지들은 전통 회화에서 길상의 이미지로도 많이 다루었던 소재다.

 

강미선_관심(觀心)-세심(洗心)_한지에 수묵_139×191cm_2021 / 금호미술관 2층

긋다. ● 이번 전시를 통해 강미선의 작업을 새롭게 보게 되는 것은 '획(劃)'의 등장 때문이다. 관람객이 전시장 로비의 입구에서 만나는 한옥 시리즈의 대담한 선들은, 그동안 한옥을 다룰 때 기와지붕의 면을 실루엣처럼 표현했던 그의 작품세계에 변화가 있음을 암시한다. 강미선은 선으로 분출하고 싶은 욕구를 한옥의 기둥과 대들보, 서까래의 선에서 찾았다고 말한다. 이전 작품들에서 보였던 그의 운필은 주로 점을 찍거나, 갈필의 무수한 붓질로 바탕을 만드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무수한 반복이 쌓이며, 획은 드러나지 않았다. 간혹 나뭇가지 표현이나 백묘로 그려진 기물에서 드러나기는 했으나 선이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이 많지는 않았다. 점들의 나열은 머뭇거림이다. 점이 연결되는 것은 방향과 의지를 갖는 움직임의 시작이다. 점의 나열과는 비교되지 않는, 선이라는 형태는 그래서 힘을 갖는다. '긋다'라는 행위가 내용을 갖게 되어 '쓰다'가 되며, 그것들의 시각적 결과물이 '선(線)'이다. 검은 먹선이 화면을 힘차게 가로지르며 기하학적으로 분할하고 있는 이번 한옥 시리즈는 그동안의 머뭇거림에 대한 마침표다. ● 이 한옥 시리즈 작품들이 본격적으로 전시되어 있는 지하 1층은 '획'을 다룬다는 것과 '명상'을 떠올리게 하는 작은 이미지들로 구성된 전시장 3면에 걸친 거대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전시의 시작인 3층과 연결된다. 3층에 전시되었던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신석(神釋)」의 구절도 다시 한번 등장한다. 한옥 시리즈를 지나 전시의 마지막 공간을 가득 채우는 「무언가(無言歌)」는 감물로 그려진 총 1430명의 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그림 앞 기둥에 걸린 '관(觀)', '심(心)' 두 글자와 함께 공간 전체를 명상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종이바탕을 마련하고, 감물작업과 옻칠의 복잡한 공정을 거쳐 제작된 이 작품은 「금강경-지혜의 숲」과는 또 다른 울림을 느끼게 한다.

 

강미선_서가도(書架圖)_ 한지에 수묵, 수묵채색_248×1376cm_2021 / 금호미술관 1층

추성부(秋聲賦) ● 강미선의 전시를 감상하며 '가을'을 떠올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전시장까지 오는 길에서 만난 만추의 풍경과 그의 작품 속 감물의 갈색빛과 국화꽃과 앙상한 가지에 매달린 붉은 감의 이미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시대적 도전에 반응하여 여러 실험과 표현 모색에 뜨거웠던 여름을 지나, 깊이 있는 발색과 숙연해지는 이미지와 경구들을 얻은 그의 작품 여정에서의 가을을 들여다 본 느낌 때문이기도 하다. ● 천 년 전, 추성부(秋聲賦)를 지었던 구양수(歐陽修, 1007~1072)에게 가을은 탄식의 계절이었지만, 천 년 후, 강미선에게 가을은 이번 전시에서 두 번 언급되는 도연명의 시구 "縱浪大化中, 不喜亦不懼"처럼 커다란 변화의 물결을 타고 꾸준히 자신의 지경을 넓혀가며 여기까지 왔지만, 일희일비로 천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담담하고 충만한 시간인 것이다. ■ 왕신연

 

강미선_水墨, 쓰고 그리다_2021 / 금호미술관 B1

수묵의 정서와 한지의 조형 - 강미선의 근작에 대해 ● 80년대를 통하여 전개되었던 수묵화 운동은 전시대에 일어났던 일련의 동양화의 혁신 운동과는 그 유형을 달리한다. 이전의 운동이 전통적인 관념의 세계에서 벗어나 현대적 회화로서의 형식을 회복하는데 경주되었다면 수묵화 운동은 동양화의 정신 회복을 주창하였다는 점에서 보다 근원적인 것을 추구하려는데 그 중심을 두었다는 점에서이다. 이상세계를 추구하려는 동양적 관념의 세계 즉 형식과 내용을 벗어나 수묵이란 질료를 통해 고유한 정체성을 추구하려는 데서 앞선 어떤 혁신적 운동과도 차별화되었다는 것이다. 변혁이란 문맥에서 본다면 수묵화 운동 역시 앞선 혁신적 운동과 일정한 영향 관계를 가늠해볼 수도 있으나 동양화의 고유한 정체성을 추구한다는 열정에서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 80년대란 한 시대를 통해 이처럼 뜨거운 전개 양상을 보여준 운동은 일찍이 없었다. 이 운동은 특정한 그룹에 의한 통상적인 발표의 형식을 벗어나 무집단성을 띠면서 동시에 집중적인 게릴라 형식의 무대를 만들어갔다는 데서도 그 전례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운동은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그 열기가 식어갔다. 그러나 그 여진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 운동에 관계되었던 작가들이 개별단위로 운동의 정신을 이어갔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단에 의한 방법이 개별로 분산되면서 이 운동을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계승해갔다. 강미선의 경우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작가로서의 데뷔와 성장에 있어 수묵화 운동과 관계되고 있음을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 수묵화 운동에서 두드러진 조형적 특징은 필의(筆意)에 의한 자각과 수묵과 바탕으로서의 한지와의 관계에 대한 천착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필의가 내용에 무게를 두고 있다면 한지와의 관계는 형식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수묵화 운동에 참여하였던 작가들을 대별해보면 대체로 이 두 유형으로 나누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물론 이 두 유형을 적절히 융화해가는 경향도 없지 않다. 강미선의 작품상의 특징을 어느 한 카테고리에 가둔다는 것은 모순이라 생각된다. 필의에 대한 방법적 추고도 간과할 수 없으며 수묵과 한지와의 관계 역시 두드러진다는 점에서이다. 그러나 초기에서 최근에 이른 그의 역정에서 보았을 때 필의를 중심으로 하는 내용성에서 보다 수묵과 바탕으로서의 한지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형식적 실험이 앞서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 수묵과 바탕의 한지와의 관계에 대한 조형적 실험은 비단 수묵화 운동에서만 엿보이는 것이 아니다. 70년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단색화의 경향에서도 발견된다. 수묵화 운동과 단색화의 경향이 흥미롭게도 닮은 점이 적지 않다. 이는 일종의 시대적인 정신의 견인 현상이 아닌가 보인다. 결코 이 두 경향은 서로 영향을 주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한 시대 정신의 공유가 불러일으킨 독특한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 단색화 작가들 가운데 한지를 바탕으로 사용하는 작가들이 적지 않다는 것에 대해 그들이 동양화의 형식을 닮으려 한다고 할 수는 없다. 한지가 지닌 정서의 내면을 발견했다는 차원의 문제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근대기에 활동했던 작가이자 미술사가인 윤희순은 "아마 세계에서 우리들만큼 종이와 친숙한 인종은 없을 것이다"라고 그의 「조선미술사 연구」에서 피력하고 있다. 우선 극동(한국, 중국, 일본) 3국만 하더라도 생활공간에 차지하는 종이의 비율만을 보면 단연 한국이 앞서고 있다. 지금은 생활공간의 변화로 약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전통공간에서의 종이의 사용처는 벽지, 창호지, 장판지 등 생활 공간 전체가 종이로 뒤덮여 있는 형국이다. 한국인은 요람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종이에 에워싸여진 공간에서 살다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인에게 있어 종이-한지는 단순한 물질로서 파악되는 것이 아닌 정서의 현전으로 파악해야 하는 이유이다.

 

강미선_무언가(無言歌))_한지에 감물, 옻칠_260×3298cm_2021 / 금호미술관 B1

강미선의 작업은 지지체에 가해지는 일반적인 그리기의 과정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수제 한지이면서 작가는 이를 자신의 공정(工程)으로 또 하나의 작업을 진척시킨다. 공장(工匠)이 기술적으로 만든 한지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작업으로서 평면을 표면으로 바꾸는 작업이다. 평면을 표면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는 것은 단순한 기능적인 쓰임새로서의 평면이 아닌 독특한 표면의 창조를 전제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리기에 앞서 이루어지는 이 과정은 회화 일반의 차원에 못지않은 중요성이 확인되는 일이자 조형적 실현이란 과정에 상응되는 것이다. ● 여러 겹을 발라올린 한지의 표면은 일반적인 종이로서의 수용성의 기능에 머물지 않고 그 자체가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태어난다. 미세한 융기로 덮이는 표면은 일종의 전단계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위에 이루어질 어떤 행위를 수용할 준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표상의 체계가 아닌 수묵과 한지의 만남이란 구조화는 단순한 바탕과 이 위에 가해지는 일정한 행위의 관계라기보다 하나의 실존으로 구현된다는 점에서 그 독자의 조형 전개가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의미로 본다면 이는 일반적 회화로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진행으로 이루어지는 것과 다름없다. ● 완결되지 않고 진행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생명체이다. 단순히 기능적으로 만듦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으로서 말이다. 화면에 나타나는 풍경이나 정물이 일반적인 보는 행위로서 설명을 넘어 서서히 다가오는 어떤 기대감으로 설레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그가 내세운 《水墨, 쓰고 그리다》란 표제는 단순한 서화동원(書畵同源)의 형식의 환원을 기도한 것이 아니다. 바탕(지지체)과 이 위에 가해지는 수묵은 단순한 표상의 체계가 아니다. 바탕과 이 위에 가해지는 수묵은 행위와 물성의 만남이란 극적인 과정을 거처 그 고유의 존재로서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설명을 앞질러 오는 존재감이다. 완결되지 않은 하나의 경향성이라 말할 수 있다. ● 화면은 더없이 내밀하다. 담묵에 의해 시술되는 표면은 부드럽고 아늑한 공간에 들어온 느낌을 준다. 안으로 가라앉으면서 한편으론 은밀히 밖으로 솟아오르는 경향으로 인해 더욱 구조적인 차원을 만든다. 담묵과 더불어 감물이나 옻물로 이루어지는 표면은 일종의 포화상태를 만들면서 표면에 풍부한 표정을 일구어낸다. 이 같은 복합적인 화면조성은 깊이로서의 구조에 상응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잠식된다는 것은 화면의 구조적인 일체화를 높이는 것이기도 하지만 모든 속된 것을 가라앉히는 정신의 순화와도 대응된다. ● 또한 화면을 수묵으로 다독이는 작업은 화면의 숙성을 위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어쩌면 이 숙성의 독특한 방법은 화면에서의 작업이란 한계를 벗어나 정신의 순화 과정에도 비유된다. 동양인들은 단순히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쓴다는 행위에만 머물지 않고 그림과 글씨를 통해 부단히 정신의 경지를 추구하려고 하였다. 그러한 의도가 없다면 그것은 한갓 속된 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 점이야말로 동양의 예술이 갖는 독특한 내면이다. 강미선의 작업은 이를 애초에 의식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가 추구한 방법이 의도하지 않은 상태이면서 자신도 모르게 근원에 가 닿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강미선_무언가(無言歌)_부분 / 금호미술관 B1

그가 다루는 소재는 비근한 일상의 사물들이다. 생활 주변에 산재하는 대상들 예컨대 생활기물로서 접시, 대접, 잔, 병 등의 식기류와 과일, 전통적인 가옥의 구조, 기와지붕, 돌담, 그리고 화초 등 하나같이 특별한 것들이 아니다. 이외에 문인화의 소재나 산수화는 동양화의 기본적인 화제들이다. 다소 특이하다면 최근에 다루기 시작한 불상과 불경(佛經) 등이다. 이 같은 소재의 범주만 본다면 대단히 평범한 것들로 오늘날 일반적인 회화의 소재로서는 결코 선호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특별한 소재, 기이한 소재의 발굴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오늘의 풍토에서 본다면 시대 감각이 뒤처진 것으로 판단하기 쉽다. 그러나 그의 화면을 통해 등장하는 이들 소재는 익히 알려진 것임에도 전혀 다른 존재로서 다가온다. 평범한 것들이 평범하지 않고 새롭게 보인다는 것은 작가의 소재에 대한 각별한 애정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으며 또 한편 그 특유의 구조적인 화면형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독특한 구조의 형성에 투입됨으로써 대상들은 일상적인 관념이나 시각에서 벗어나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 사물들은 조심스럽게 아니 담담하게 자신을 드러내 보인다. 서서히 걷히는 운무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풍경과 같이 기다림을 내장하고 있다. 아니 기다림을 통해 마침내 다가오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 그의 화면을 보면서 문득 청대(靑代)의 화가 대희(戴熙)의 화론에 언급된 "수정월잠(水定月湛)을 떠올린다. 물이 고요하면 달이 잠긴다는 것인데 그가 그리는 대상들이 한결같이 고요한 물속으로 가라앉는 모습이다. 화면 전체로 침투된 담묵의 포화상태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현상이라고나 할까. 물속으로 가라앉으면서 대상은 현실의 소재이면서 현실을 부단히 초극하고 있다. 통상적인 시각의 차원을 벗어나 또 다른 차원을 만들어낸다. ● 동양인들은 하늘에 떠 있는 달보다 물속에 잠겨있는 달을 더 탐닉한다. 고답적인 심미안이라고나 할까. 하늘에 뜬 달은 현실이지만 물속에 잠긴 달은 현실을 벗어나 자신의 심경을 반영해주는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하늘에 뜬 달보다 더욱 고요함을 지닌 물속의 달을 닮으려는 염원으로서 말이다. ● 또 하나 그의 화면이 지니는 특이한 구조는 전체이면서 하나인 세계, 하나이면서 전체인 세계를 지향하는 점이다. 어쩌면 이 점은 그의 화면형성이 보여주는 구조적인 특성에 상응된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작은 화면에 그려진 불상이 수없이 이어지면서 일종의 천불상을 연상시키는데 작은 단위의 화면에 그려진 불상이 반복되면서 거대한 화면을 만든다. 불상은 각기 하나하나 독립적이지만 수없이 반복되면서 전체가 된다. 그것은 하나일 수도 있고 수많은 것일 수도 있다. 불교의 세계에서 말하는 존재의 현전, 즉 하나는 수많은 전체이면서 동시에 언제나 하나로 환원되는 세계로서 말이다. ● 산수의 소재나 화훼의 그림들도 개별로 이루어지면서 병풍 형식이나 책가도와 같은 연결구조로 등장한다. 이는 일종의 연작개념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본다. 하나하나 떼어내어도 무방하고 연결되어 거대한 화폭으로 구성되어도 어색함이 없다. 이 같은 구조는 연작을 한 화면으로 구조화시킨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역시 그가 지향하는 조형의 차원이 개별로서의 완성보다 전체를 향한 경향성의 한 단면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전체 속에서 개별이 의미가 있고 개별을 통한 전체에 이르려는 염원이야말로 그가 바라는 세계 그가 꿈꾸는 세계의 상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단순히 본다는 일반적인 시방식이 아닌 심안으로 보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된다. ■ 오광수

 

Vol.20211123f | 강미선展 / KANGMISUN / 姜美先 / painting

아시안 시티스케이프 Asian Cityscape

 

김경숙展 / KIMKYUNGSOOK / 金敬淑 / photography 

2021_1028 ▶ 2021_1107 / 월요일 휴관

 

김경숙_Asian Cityscape, Macao_디지털 크로모제닉 프린트_150×150cm_2019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80425a | 김경숙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금호미술관

KUMHO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삼청로 18(사간동 78번지)

Tel. +82.(0)2.720.5114

www.kumhomuseum.com

 

 

다중도시 환타지 ● 『아시안 시티스케이프(Asian Cityscape)』라는 제목으로 선보이는 김경숙의 이번 전시는 대한민국 서울을 포함하여 아시아에서 많은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있는 관광 도시를 주제로 하고 있다. 도시는 그 성격상 비상하는 도시와 침체하는 도시 그리고 정체된 도시로 나눌 수 있다. 김경숙의 카메라에 담긴 도시들은 아시아의 도시 중에서도 유구한 역사가 흐르는 동안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고 지금도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는 도시들이다. ● 서울은 조선의 600년 수도로 성곽으로 둘러싸인 구도심과 한강 이남으로 확장된 신 도심이 있다. 「아시안 시티스케이프, 서울」은 중앙에 자하 하디드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위치하며, 하단으로 북촌한옥마을과 구도심의 소규모 건물을 배치하고, 상부에 남산 타워를 중심으로 좌측에 여의도에 있는 리차드 로저스의 파크 원, 아키텤토니카의 IFC 빌딩 그리고 우측으로 라파엘 비뇰리의 탑 클라우드와 다니엘 리베스킨트의 현대산업 사옥이 위치하고 있다. ● 김경숙작가는 그동안 실내건축과 건축 분야를 부단히 왕래하면서 작업을 했고, 이후 사진을 전공하기까지 김경숙 삶의 궤적을 함께 한 오랜 시간의 흔적이 묻어있고 또한 많은 고민의 결과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김경숙의 작품이 도시의 어두운 부분을 강조하거나 도시의 개발 과정에서 소외된 자들을 대변하기 위한 고발적 작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김경숙은 훌륭한 건축가의 손으로 빚어진 작품들을 그만의 고유한 시각으로 촬영하고 그 반대편에서 의연히 서 있는 건축가 이름도 없는 건축물들을 도시의 구성물로 함께 놓음으로써 도시의 공생적 측면을 추구하고 또한 도시의 다중성을 함께 보여주려는 의도라고 생각한다. ■ 이상림

 

김경숙_Asian Cityscape, Bangkok_디지털 크로모제닉 프린트_150×150cm_2020
김경숙_Asian Cityscape, Beijing_디지털 크로모제닉 프린트_150×150cm_2019

 

시티스케이프 ● 김경숙 작가의 작품은 매우 다양한 건물을 한 장에 모아놓은 사진들이다. 각각의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작품마다 특정한 나라의 한 도시가 가진 형식과 외관이 다른 현대 건물과 전통 건축물이 혼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 작가는 선정된 도시에서 가장 높은 빌딩(High-Rise) 1위부터 15위까지를 조사하여 일일이 촬영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의미가 있으며 도시와 국가의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을 촬영한다. 마지막으로 그 도시를 구성하는 서민들의 삶을 보여주는 곳을 촬영한다. 이로써 1차 이미지 채집이 끝난다. 이후 작업실로 돌아와 한 작품당 수일~수십 일에 걸쳐 포토샵으로 이미지들을 일일이 '따는' 작업을 한다. 그리고 작가의 의도에 따라 '따놓은' 이미지를 한 화면에 앉힌다. 대부분의 경우 가장 높은 빌딩(High-Rise)을 화면의 위에 앉히고, 서민의 삶이 보이는 장소는 아래 배치한다. 마지막으로 역사적, 문화적 장소, 건물을 화면의 중심에 놓는다. 이로써 한 도시의 이미지가 완성된다. 하나의 도시를 한 프레임에서 보여준다. 몇 문장으로 과정을 설명하였지만, 11개 나라의 도시를 이동하고 동일한 빛을 기다려 촬영하고, 컴퓨터로 돌아와 복잡한 이미지를 '따내는' 수공업적 작업이 육체적으로 쉽지 않았음을, 작업해 본 사람들은 쉽게 짐작할 것이다.

 

김경숙_Asian Cityscape, Hanoi_디지털 크로모제닉 프린트_150×150cm_2019


김경숙_Asian Cityscape, Hong Kong_디지털 크로모제닉 프린트_150×150cm_2019

김경숙 작가는 이번 시리즈를 통해 '야누스적 도시'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야누스의 얼굴', '야누스적 역할' 등 관용적 표현에서 야누스는 서로 반대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야누스(Janus)는 로마신화에서 문(門)의 수호신. 전의(轉意)하여, 모든 것(연, 월, 일, 4계(季), 기도 등)의 처음과 끝의 신'을 의미한다. 즉, 도시의 양면성과 더불어 각 도시의 모든 것을 한 프레임에 담는 결과를 가져왔다. ● 작가가 힘써 모으고 오랫동안 한 클릭 한 클릭 마우스 작업을 한 작품 내의 도시의 골목길과 화려한 건물을 눈으로 따라다니는 시각적 경험을 하다 보면 어느새 머릿속에는 여행에서 보았던, 혹은 가보지 않았더라도 그 도시 사람의 삶과 목소리와 도시마다 특유의 냄새가 떠오를 것이다. 관람자가 이런 경험을 하기를 바란다. 최선을 다한 작가의 작품이 완성되는 것은 관람자에 의해서이다. ■ 김동욱

 

김경숙_Asian Cityscape, Jakarta_디지털 크로모제닉 프린트_150×150cm_2020
김경숙_Asian Cityscape, Kuala Lumpur_디지털 크로모제닉 프린트_150×150cm_2020

 

도시의 이미지를 하나의 프레임으로 표현한다면 ● 도시의 이미지를 하나의 프레임으로 표현한다면 어떤 모습이 될까? 도시의 모든 역사적, 문화적 특성, 도시를 대표하는 건물, 사람들과 자연을 한 화면에 담아, 하나의 프레임으로 그 도시를 파악할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을 것이다. 이런 생각은 나의 오랜 숙원이었다. 해외 도시를 여행하면서 도시마다 정체성이 있음을 발견하는 것은 큰 행복이었다. ● 한 도시를 대변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거기에는 유명한 고층 건물, 전통 주거지역, 시민들의 생활상, 지역 특성, 전통의상, 고유음식, 상가건축, 식생, 역사적인 장소와 기념물, 문화적 특성을 보존한 곳,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 등이 있을 것이다. 한 도시를 구성하는 이런 다양한 요소 중에서 나는 그 도시만의 특색이 묻어나는 고층 건물, 서민 주거지역, 역사적/문화적 건축물, 식생을 선정하였다

 

김경숙_Asian Cityscape, Seoul_디지털 크로모제닉 프린트_150×150cm_2021

대상 도시를 선정한 기준은 먼저 해외여행객이 많이 찾는 10대 아시아-태평양 국가(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태국, 싱가포르, 마카오, 한국, 일본, 인도네시아, 대만)를 선택하고 거기에 한국인들이 많이 가는 나라(베트남, 몽골)를 더하여 총 12개 국가로 목록을 만든 후 각국의 수도를 채택했다. 실제 촬영은 2019년 3월 1일에 시작하여 2020년 2월 2일까지 10개국을 촬영을 끝냈고, 대만은 팬데믹으로 인하여 촬영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2021년 6월 30일까지 서울 촬영을 계속하여 11개 도시를 각각 한 화면에 압축한 작품을 완성하였다. ● 도시는 사람이 모여 사는 장소이다. 근대 이후로 도시는 과밀화로 인해 공간은 점점 수직화되고 인간성은 황폐해지는 경향이 있다. 근대도시는 그 영역을 주거지역과 상업지역으로 분리하여 출발하였다. 도시의 풍경을 만드는 것은 도심의 초고층건물과 변두리의 저소득층 주거지역이다. 초고층건물은 도시디자인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며 한 도시를 대표하는 아이콘이자 그 지역의 발전상을 나타내는 랜드마크이다. 반면 저소득층 주민들은 서로 품앗이를 하고 가진 것을 베풀며, 유익한 생활정보를 공유하는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다.

 

김경숙_Asian Cityscape, Tokyo_디지털 크로모제닉 프린트_150×150cm_2019
김경숙_Asian Cityscape, Ulan Bator_디지털 크로모제닉 프린트_150×150cm_2019

 

도시의 가치가 점점 높아지는 현재 상황에서 진정 귀한 것은 무엇일까? 사람이 있는 풍경, 사람이 있는 도시야말로 진정 훌륭한 도시다. 그래서 도시를 움직이는 인간들의 활동에 활력이 없어진다면 이에 대한 재생이 필요하다. ● 각 도시만의 특징에 따라 적합한 주거 양식이 있을 것이다. 서로 다른 여러 형태의 삶이 공존하고 그런 공존에 적합한 주거 양식에도 좀 더 관심을 기울였으면 하는 것이 나의 희망이다. 호화로운 고층 건물이든, 소박한 서민형 건물이든 모두가 도시에 중요한 일부이고, 도시인의 삶을 이루는 유기적 요소이다. 내 작품의 상부와 하부 풍경처럼 사람들의 삶과 그를 담는 집이 점점 양극화되는 현상이 조금이라도 줄었으면, 그래서 작품에서 보듯 반대적 요소들이 나름 조화롭고 아름답게 어우러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 김경숙

 

Vol.20211028e | 김경숙展 / KIMKYUNGSOOK / 金敬淑 / photography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