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명우 페북에서 스크랩]


광복절을 맞은 광화문광장은 태극기부대의 빨갱이 타령으로 74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랐다.



비가 쏟아진 지난15일 오후1시 무렵, 광화문광장으로 나갔다.

사진가 권철의 군국주의의 망령-야스쿠니사진전을 보기 위해서다.


 

인파에 휩싸인 광화문광장은 우산에 걸려 자리 옮기기 조차 쉽지 않았다.

한 쪽에는 민주노총을 비롯한 진보단체들이 주최하는 '8·15 전국 노동자대회가 열렸고,

한 쪽에는 한기총을 비롯한 보수단체들의 태극기 집회로 소란스러웠다.


 

군국주의의 망령-야스쿠니를 규탄하러 제주에서 올라 온 권 철 사진전은 어디로 갔을까?

제국주의를 부활시키려는 일본 놈들의 야욕을 들여다보며 각오를 다질 작정 인데...


 

도둑놈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일본의 망령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왜놈 앞잡이부터 잡아야 한다.

토착왜구를 뿌리 뽑지 않고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



얼굴에 철판 깐 정치모리배 보다 더 무서운 건 독립운동가 집안처럼 위장하여 진보권력에 빌 붙은 위선자들이다.

권 철의 군국주의의 망령-야스쿠니사진전의 메시지가 바로 그들부터 척결하라는 것이다.


[곽명우 페북에서 스크랩]

 

컴퓨터가 없어 페북을 학인 할 수 없으니, 권 철의 전시 진행 상황을 알 수 없었다.

사진전을 열기로 했던 충무공 동상 주변은 태극기부대의 집회로 발 디딜 틈 없었다.

그곳은 사람에 걸려 전시를 제대로 할 수도 없겠지만, 자칫 큰 마찰이 생겨 불상사도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비 때문에 야외전시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 지하도를 돌아다니며 찾기도 했다.

[곽명우 페북에서 스크랩]

 

뒤늦게 알아보니, 이미 전시가 끝났다는 것이다. 정확한 정보도 없이 움직인 게 한심했다.

광화문광장을 돌아다니다 김호근, 최명철, 정영철씨 등 반가운 분을 여럿 만나기도 했다.

빨리 철수한 탓에 전시는 보지 못했지만, 권 철의 군국주의의 망령-야스쿠니사진전은 의미하는바가 컸다.

광장 바닥에 깔린 야스쿠니 사진들은 빗물에 젖고 군중들의 발길에 짓 밟혔을 것이니, 성공적인 전시 퍼포먼스가 아닌가?


 


전시가 열린 그 장소는 태극기 부대의 집회로 아수라장이었다.

빨갱이로 시작해 빨갱이로 끝나는 빨갱이 타령 일색이었다.

옆에는 이승만 얼굴이 새겨진 현수막이 오래된 악몽을 떠 올리게 했다.

죄 없는 국민을 빨갱이로 몰아 얼마나 많은 양민을 학살 했는가? 그가 바로 빨갱이타령의 원조였다.


 

축도한다며 나온 한기총의 개목사는 문재인 대통령을 타도하자고 외쳤고,

연단에는 엄마부대 주옥순 등 꼴통들이 나와 바람 잡았는데, 김문수도 한 소리 했다.

청와대는 전부 빨갱이로 채워졌다. 빨갱이는 물러가라. 문재인은 물러가라며 외쳐댔다.


 

정치권력이 그렇게 좋은 걸까? 멀쩡하게 생긴 꼴에 쪽팔리지 않을까?

이 따위 양아치를 도지사까지 뽑은 도민들이 한심했다.

하기야! 이승만에서 이명박까지 나라 망친 악질 대통령 모두가

색깔론에 속아 국민들이 뽑은 인간 말종들이 아니던가.

긴 세월 동안 빨갱이 타령으로 편 갈라 정권 잡았으니, 어찌 빨갱이의 추억이 새록새록 하지 않겠나?


 

그 꼴을 보고 지하에 계신 순국선열들께서 얼마나 통탄하시겠는가?

아마 광화문 광장을 적신 빗물이 순국선열들의 피눈물인지도 모른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노동자대회에서는 적폐청산을 외치며, 자한당은 해체하라고 주장했다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은 "노동자들이 앞장서서 우리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하자"

"7000만 겨레와 전 세계 앞에 약속한 판문점 선언, 평양공동선언을 실천하는 투쟁에 노동자들이 선봉에 서자"고 말했다.

그리고 "·미 군사연습과 방위비 증액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는 미국의 부당함에 맞서 싸워나가자"

·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의 전면파기를 이루어 내자"고 했다




노동자대회'가 끝난 광화문광장에는 '815 민족통일대회 평화 손잡기' 행사가 연이어 열었다.

참가자들은 "자주 없이 평화 없다. 남북공동선언 이행하자!", "아베정권 규탄한다. 강제동원 사죄하라!"

"친일 적폐 청산하자. 자한당은 해체하라!" 등의 구호를 외쳐댔다.


 

허기진 몸이 비에 젖어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 페북을 확인해 보니, 권 철씨의 전시 사진이 여러 장 올라와 있었다.

비오는 광화문광장 바닥에 작품이 깔려 있었고, 권철씨는 물론 양혜경씨와 곽명우씨 모습도 보였다.


[경향신문 스크랩 / 김정근기자]

 

오후 6시에는 같은 장소에서 약 750개 시민사회단체가 연합한 아베규탄시민행동의

‘815 아베 규탄 범국민 촛불 문화제'도 열렸다고 한다.

촛불을 든 약 10만 명의 시민이 ‘NO 아베’ ‘지소미아 폐기등의 구호를 외치며

일본 제품 불매운동 동참을 호소했다는 소식이 떠 있었다.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져야 할 것은 일본은 절대 변할 수 없는 영원한 적이라는 것이다.

쪽발이들이 다시는 야욕의 이빨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자근자근 밟아버리자.

 

사진, / 조문호



































 

 

 

 

 

 

 

 

 

 


2016년 한해 동안 '갤러리브레송'에서 진행한 '이 땅의 고수를 찿아서..'


2018년 03월 12일 (월) 03:02:24    정영신 기자 press@sctoday.co.kr





지난 2016년부터 매달 두 번씩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국내사진가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한 이광수 교수가 한국현대사진가 열 두 명의 작가론을 묶은 ”카메라는 칼이다“를 펴냈다.


중요한 것은 그동안 제대로 된 국내 사진가론이 전무하였다는 사실이다. 평론가들이 외국사진가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반복해가며 거론하였지만, 정작 국내 사진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작품이란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심장을 열어젖히는 것이다.

사진을 무기로 사진에 대한 신화를 깨었다. 장르도 초월하고 경계도 없애고, 패거리도 없애는 대동의 사진세계에서 멋지게 노는

이 땅의 진정한 고수를 찾는 놀이로 시작되었다"고 저자 이광수 교수는 말하고 있다.


'카메라는 칼이다'저자 이광수교수 Ⓒ정영신


사진을 전공하는 교수와 작가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작가들의 작가론이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는 것에 학자로써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역사가 있기에 우리가 존재하듯 각자 자기의 고유한 역사를 지니며 살아가고 있다. 더구나 평생 우리나라 문화와 생활상을 기록해 온 사진가들의 작가론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 '카메라는 칼이다'의 사진가들과 저자인 이광수교수, 갤러리브레송 김남진관장 Ⓒ정영신


다른나라 사진가론은 줄줄 외면서 우리나라작가들이 이 시대를 어떻게 기록해오고 과거의 진실을 어떻게 발견해 왔는지 인식하지 않았다는 것에 통분했다. 사대주의적 발상이 아니었다면 국내 사진가에 대해 아무도 손대지 않았던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현실에 주목하여 이광수 교수가 제일 먼저 손을 댄 것이 최민식 작가론이다.





이광수 교수는 끊임없는 동어반복적인 시간이 응축된 사진 속에 숨겨진 의미를 하나하나 찾아내었고, 그의 예리한 집도에 의해 작가들의 심중에 묻힌 비장의 언어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그는 부산외국어대학교에서 인도사를 연구하는 교수이자 사진비평가로. 사진으로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10여년 넘게 사진비평에 혼신을 쏟아왔다.



▲ 강정효작가의 '유해발굴'



이광수 교수는 “작품이 왜 좋은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떤 맥락에서 나오는 건지 어떤 사회적, 문화적 효과를 내고 있는지 평가를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작가를 대상으로 한 논문을 하나도 찾아내지 못해 작가론을 쓰기시작 했다”고 말했다.



▲ 권철 작가의 '가부키초'


또한 인맥이나 학력등을 배재한 채 50대 이상으로 30년 가까이 고독하게 자기작업만을 고집하는 사진가를 찾아내는 일은 '갤러리브레송' 김남진관장이 맡았다. 그야말로 이 땅에 숨겨진 ‘사진’ 고수를 찾아 소개하는데 꼬박 1년이 걸린 셈이다. '


김남진 관장은 사진가를 찾아내고, 이광수교수는 매달 50매에 달하는 글을 써서 오마이뉴스에 연재하면서 갤러리 브래송기획전 ‘사진인을 찾아서’를 진행한 것이다.



▲ 김문호 작가의 '온더로드'


비평가의 책무는 작품 속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 해석하는 것이다. 허나 우리 사진계에 이렇다 할 작가론 한권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광수교수의 ‘카메라는 칼이다’는 의미가 있는 책으로 사진보는 것을 넘어, 사진을 읽게 함으로써 책에 나온 사진가의 진면목을 독자스스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 김보섭 작가의 '청관'


3부로 구성된 책속으로 들어가 보자. 제1부는 ‘시대와 시간을 기록하다’에 권철, 신동필, 최영진, 강정효작가, 제2부는 ‘사람과 역사를 바라보다’에 조문호, 김보섭, 문진우, 김문호, 이재갑, 이영욱작가, 마지막 제3부에는 존재와 예술을 그리는 파인 아트작가로 고정남과 이수철작가를 논했다.



▲ 문진우 작가의 '내 마음속의 다큐 한 장'


‘독대’의 권철사진가는 “도꼬다이.... ‘홀로’의 의미가 강해 사진가 권철을 일컫는 말로 이보다 더 정확한 것은 없다”고 쓰고, 이어 신동필작가를 논하면서 “신동필의 역사는 민족의 역사다. 그는 투사로서 민족, 자주, 반미, 통일의 도도한 물결을 거스리지도, 시비 걸지도 않고 대의를 따라 함께 걸었다”고 평하고, 최영진작가론은 “그대로 그렇게 그 모태를 재현하고 있다며, 죽어 말라 버린 물고기 한 마리 이미지가 쉬 사라지지 않는다. 노자가 말하고 최영진이 따르는 자연의 미와 추에 대해 생각한다” 고 했다.



▲ 신동필작가의 '또 다른 가족'


풍경, 민속 그리고 역사를 담은 강정효는 “유채꽃 노란 물결에 배어 있는 농민들의 땀을 읽어 주십사 하는 목소리를 낸다. 강정효는 제주의 모든 것을 담되, 그 안에 사람이 우선되는 세상에 대한 염원을 담았다”고 했다.



▲ 이수철작가의 '화몽중경'


인본을 이야기하는 조문호작가는 “사람을 존중하고 사람을 섬기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사진가라며 조문호에게 이말보다 더 잘 묘사할 수 있는 말을 나는 찾지 못했다”고 해석했다. 오브제로 기록하는 감성적 민족지를 보여준 김보섭 작가는 “그는 사라져 가는 세계를 당당하고 아름답게 본다. 그 위에서 그가 만든 포토제닉한 이미지는 감성으로서 독자들이 과거를 스스로 재구성할 수 있는 여지를 더 크게 열어 젖힌다”고 쓰고 있다.



▲ 이영욱작가의 '자유공원'


카메라불사 카메라 40년의 문진우 작가는 “사진의 작품성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바로 오래됨에 있다며 찍어놓고 보면 시간이 흐르고, 그 사이에 오래됨이 생긴다. 누구든, 그 오래된 사진에 끌리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 기준이 무엇인지 나만 혼자 바보가 되네’의 김문호 작가는 “세계와 역사에 대한 고민이 많고, 사유가 깊은 다큐사진가일수록 그 재현 방식의 이동 폭 이 넓다. 김문호 작가가 그 대표적인 사진가다”고 작가론을 펼쳤다.



▲ 이재갑작가의 '무대 뒤의 차가운 풍경'


“아픈 역사를 이면과 기억으로 엮는 서사시”의 이재갑작가는 “기록할 수 없는 그렇다고 토해낼 수도 없는 트라우마를 잊기 위해 기억해야 하는 것, 이 기억에 대한 담론을 사진으로 작업한다”고 평했다.


사진으로 사진에 대한 신화를 깨다의 이영욱 작가는 “이영욱 사진은 기록에 대해 시비를 거는 메타기록이다. 경험에 대한 기록이 아니고, 해석에 의한 기록이 아닌, 세계본질에 대한 기록이다”고 쓰고 있다.



▲ 최영진작가의 '서해안'


‘끊임없는 기억의 흐름에 정해진 것은 없다’의 고정남작가는 “답도 없고, 옳고 그른 것도 없고, 가치와 의미로 된 규정도 없고, 모두가 있는 작은 곳곳의 자리에서 나 자신만의 세상을 누벼보는 것이다. 사진은 찍는 이의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보고 나누는 이의 것이기도 하다”고 썼다.


마지막으로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레퀴엠’의 이수철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때로는 합성을 통해, 때로는 덧칠을 통해, 때로는 타 매체와의 협업을 통해 그는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레퀴엠을 바친다”고 논했다.


▲ 조문호작가의 '동자동 노숙인'



카메라는 칼이다’의 저자 이광수교수는 “기계가 만들어내는 사진의 역사가 180년 가까이 지난 지금, 하늘 아래 새로운 사진이라는 게 과연 존재하겠는가? 사진이 어떤 용도로 쓰일지라도 모든 경우에 통용되는 가치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오래됨’이라고 했다.


이 땅에서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면 숨어있는 현대사진가 12명의 작가론을 해석하고 비평한 이광수교수의 ‘카메라는 칼이다’ 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ㆍ사진상 부정 심사 등 권력놀음에 빠진 사진계 보란 듯…
ㆍ12인의 작가론 담은 책 출간

 

일본 최대 환락가인 신주쿠의 가부키초를 기록한 ‘가부키초’. 알렙 제공 ⓒ권철



이광수(부산외국어대 인도학부 교수)는 2015년 갤러리 브레송 관장 김남진에게 의뢰를 받는다. “사진을 한 지 30년 가까이 되는 50대 이상의 사진가로 장르를 불문하고, 아무런 연줄도 없이 홀로 고독하게 작업하지만 수준이 높은 사진가를 찾아내자”는 것이다. 김남진은 자신은 갤러리 공간을 내어줄 테니, 이광수에게는 작가론을 쓰라고 했다. 이광수는 2016년 1월부터 매달 200자 원고지 50장짜리 작가론을 써 ‘사진인을 찾아서’라는 제목을 달아 내보냈다. 그 결과물을 <카메라는 칼이다>(알렙)에 실었다.

‘사진인을 찾아서’라는 프로젝트는 2015년 제2회 최민식상 심사 부정 사건과도 이어진다. 이광수는 부정 심사 의혹을 앞장서 제기한 인물이다. 이광수는 “작품이라는 것을 만들어 출품하고, 그것을 심사하고, 상을 주고받고 하는 따위란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임을 넘어 예술을 해치고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일이다. 그것은 다만 권력을 만드는 일일 뿐, 예술의 속성과 하등 관계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꼭 그것을 전쟁 치르듯 생산해 내야 하고, 평가받아야 하고, 라벨을 붙여야 하고, 등급을 매겨야 하는가”라고도 했다.

 

노숙자103-1_1’ 알렙 제공 ⓒ조문호

 

 

이광수가 보기에 한국 사진계는 “한 줌도 안되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남을 재단하고, 군림하고 나눠 주고 나눠 먹는 꼴”을 보이는 곳이다. ‘사진인을 찾아서’는 사진계에 대한 문제 제기에 그치지 않고 대안을 제시하려는 취지였다. 라벨과 등급을 뛰어넘으려는 이 프로젝트는 “장르도 초월하고 경계도 허물고, 패거리도 없애고, 갑과 을의 관계도 없는 대동의 사진 세계에서 멋지게 놀고 있는 이 땅의 고수를 찾는 놀이”라고 이광수는 말한다.

이런 취지와 정의에 따라 뽑은 사진작가는 12명이다. 이광수는 기록성을 중시하는 작가로 권철·신동필·최영진·강정효를, 예술성을 중시하는 작가로 고정남·이수철을 꼽는다. 그 사이, 즉 기록하되 예술적 표현력을 상당히 고려하는 작가로 조문호·김보섭·문진우·이재갑·이영욱을 들었다.

 
 


권철은 프로젝트 취지에 걸맞은 작가다. 일본 도쿄 최대 환락가인 신주쿠의 가부키초를 18년 동안 기록한 <가부키초>로 명성을 얻은 그는 느닷없이 귀국한 뒤 제주에 정착했다. “세상을 겪고, 기록하고, 전시하고, 행위하는” 사진가다. 권철은 트럭으로 풀빵 장사를 한다. 거리가 전시장이다. 이호테우 해변과 해녀를 담은 ‘이호테우’전을 해녀 탈의장에서 열었다. 일본에서 촬영한 야스쿠니 사진들은 길거리 전시를 한 후 모두 불태웠다.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한 항거다. 이광수는 “그는 이제 있는 사건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있는 사건을 이미지화한 후 그것을 퍼포먼스를 통해 새로운 사건으로 만들어 가는 사진가”라고 말한다.

두메산골 사람, 노숙인, 성매매 종사자 등 여러 인물 사진을 찍은 조문호는 “오로지 사진과 대상과 소통하는 행위 자체에 만족”하는 작가이고, 그의 작업은 “사람에 대한 존중 차원에서의 실존적 행위”라고 평한다. 이수철은 “사실의 재현이든, 허구의 표현이든 예술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떻게 하여 전할 것인가”를 잣대로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다.

이광수는 ‘카메라는 칼이다’라는 제목을 붙였다. 칼은 조폭의 칼이기도, 조각가의 칼이기도 하다. 칼은 실재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이광수는 카메라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어떤 사진가는 세상을 바꾸고 싶은 꿈을 품기도 하고, 어떤 사진가는 예술의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정진한다.”

한국 최초의 사진 작가론을 표방하는 책은 사진가가 자신의 칼을 어떤 예술 철학으로, 어떻게 쓰는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경향신문 2018.3.5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 조문호 사진가



사진에는 다양한 장르가 있지만, 다큐멘터리가 사진의 꽃이다.

그러나 사회여건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씨를 말리고 있다.

최근 들어 충무로 ‘브레송갤러리’에서 연 이어 볼만한 다큐멘터리 사진전들이 열리고 있다.

권철의 ‘독대’나 양승우의 ‘청춘길일’ 등 둘 다 일본에서 활동하거나 몇 년 전 일본에서 귀국한 사진가들이다.

특히 조폭들의 삶을 다룬 양승우의 ‘청춘길일’은 우리 사회에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지만,

작가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권철은 제주에서 풀빵장사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고, 양승우는 길거리에서 노숙하며 ‘조직폭력’의 세상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뒤늦게 사진학과 후배였던 아내를 맞으며 노숙자 신세는 면했다지만 살림살이는 여전히 말이 아니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지만 한국에선 일용직 자리마저 쉽지 않아 일본에 눌러 있다고 했다.

건축현장 노가다로 일하며 사진작업을 잇는 그의 생활은 눈물겹다.

이번 전시 뒤풀이에서 눈물을 훔친, 그 아내의 모습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그들만 어려운 것이 아니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다큐사진가 대부분이 비참하게 살아간다.

다큐멘터리사진을 전공했지만, 사회에 나오면 다들 몇 년을 버텨내지 못한다.

사회는 다른 직업을 갖고 틈틈이 찍는 아마추어 사진가를 원하고 있다.

사실을 매개로 하는 다큐작업을 그렇게 띄엄띄엄 찍어 어떻게 제대로 기록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내로라하는 대부분의 다큐사진가들은 대학교 문전이나 기웃거리며, 보따리 장사로 연명한다.

그런 기회마저 얻지 못한 사진가들은 행여 사진으로 돈 생길 일이라도 생기면 서로 차지하려 아귀다툼이다.

반평생 다큐멘터리 사진을 해 온 나도 예외는 아니다. 숱한 빚을 안고 살지만, 그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가끔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는지, 회의감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런데, 몇 개월 전 반가운 소식이 들어왔다.

내년이 ‘87민주항행’ 30주년이라 역사박물관에서 내 사진을 사겠다는 것이다.

듣기로는 민주항쟁을 기록한 세 명의 사진을 구입한다고 했다.

그 쪽에서 원하는 오십여 장의 이미지를 보내고는 꿈에 부풀었다.

쓰러져 가는 정선집도 수리하고, 잘 하면 신용불량자 신세도 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에서다.

그런데 뒤늦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전해졌다.

마지막 결재라인에서 ‘87민주항쟁’ 자체가 보류됐다는 것이다.

이유가 뭔지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행여 권력의 눈치를 살피는 정치적 이유는 아닌지...


사실, 이것이 정부에서 기록 사진가들에게 해 주는 유일한 혜택이기도 하지만,

역사박물관에 소장 되는 것이 다큐멘터리사진가들로서는 한 가닥 희망이고 보람이었다,

그 구멍이 바늘구멍보다 작아 복권에 당첨되는 확률에 다를 바 없지만...

이것이 우리나라 다큐멘터리사진가들의 현실이다.

비록 다큐멘터리사진만 그런 게 아니라 예술인 전반에 대한 빈곤의 문제지만,

작업실에 앉아 할 수 있는 문학 같은 일과 현장을 누비고 다녀야 하는 다큐사진과는

경제적 비용 발생에서 큰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오랜 세월 지속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역사박물관의 사진 소장 율을 대폭 확대하고,

가난한 예술가들을 위한 창작지원 시스템이 피부에 와 닿을 수 있도록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일반인들도 다큐멘터리사진에 관심을 좀 가져주었으면 좋겠다.

여유가 있는 분은 사진 한 점이라도 소장해 주고, 사는 게 그렇고 그런 분들은 사진집이라도 한 권씩 구입해주자.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하는 다큐사진 시리즈는 한 권에 12,000원이라 별 부담도 없지만,

유익한 사진들이 실려 있어 구입 가치가 높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진실을 알고 싶어 한다. 비록 그 진실이 고통을 안겨줄지라도....

그리고 밝혀진 진실은 바로 우리의 역사가 된다.

그래서 가려진 세상의 위장막을 걷어내는 다큐멘터리사진이 중요한 것이다.

다큐 사진가가 살아남아야 세상이 밝아진다.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 20일~30일까지

'사진인을 찾아서' 여섯 번 째 사진가 ‘권철 론’이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 20일 오후6시30분에 개막된 사진전에서 이광수교수의 작가론과 사진가 권철의 결연한 작업 이야기를 들으니, 가라앉은 분노가 또 다시 치밀어 올랐다. 한 동안 정치와 사회적으로 만연한 부조리와 사진판 비리에 목소리를 높여 왔던 것도 권철 같은 고통 받는 다큐멘터리사진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권철,뎃짱1



최민식 사진상이 끼리끼리 해 처먹는 것도 모르고, 작년에 권철씨가 들러리를 선적도 있었다. 사진을 모르는 어린애가 보아도 수상작보다는 권철의 사진이 뛰어나다는 것은 다 안다. 그리고 사진도 사진이지만, 권철은 어렵게 작업을 이어가는 의지의 사진가가 아니던가?

'브레송'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사진인을 찾아서’란 이 기획전은, 사진은 좋지만, 속칭 진골 성골에 가려있는 진정한 사진가를 찾아 내어 작가의 전 작품을 보여주는 전시라, 한 가지 주제로  보여주는 일반 전시와는 기본적으로  다르다. 그리고 보아왔던 회고전 형식의 원로전과도 다른 것은 이건 종료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이다. 생각이나 형식들이 변해가는, 작가들의 주제와 접근방식, 그리고 진전하는 과정들을  한 눈에서 본다는 것은 한 작가를 이해하는데 안성마춤인 것이다.


이번에 초대된 다큐사진가 권철은 못 말리는 '독고다이'다. 이십대 중반에 사진 공부하러 일본 들어가 환락가 신주쿠 가부기초를 촬영했다. 보통 깡다구가 아닌 것이다. 자칫하면 야쿠자 한테 맞아 죽는다. 18년 동안 기록한 그 사진으로 고단샤 출판문화상 사진상도 수상했다. 그렇다고 주먹들의 세계만 보여주는 소재주의에 빠진 사람도 아니다.



▲권철,가부키초2


그는 모두가 외면하는 한센병회복자의 삶은 담은 ‘텟짱’으로 데뷔한 인간미 넘치는 사진가다. '텟짱' 이야기도 마찬가지지만 대부분의 작업들이 진실을 찾아내서 밝히고 그것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이었다.


‘텟짱’은 소외에 대한 이야기다. 일본에서 소외당하고 멸시당하는 '조선인'의 모습을 일본 한센병회복자 요양원에서 찾았는데, 주인공은 요양소에 살았던 시인이자 한센병 회복자인 텟짱이었다. 권철은 텟짱이 사망하기 까지, 14년 동안 그의 삶을 사진으로 담아 온 것이다.


중요한 것은 권철이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 헌신적인 정신으로 무장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결정적인 사진 한 두 장만 찍으면 사는 데 지장 없는, 안정된 기자 자리를 사진을 위해 박차고 나온 사람이다.



▲권철,야스쿠니, 국국주의의 망령1


2008년 중국 쓰촨성 대지진을 취재하다 무너진 건물에 끼여 양 다리를 절단하는 소녀의 모습을 보고 한계를 느낀 것이다. 사람에게 닥친 고난이 자신의 밥벌이라는데, 어찌 회의감이 들지 않았겠는가?


저널리즘의 사진기자는 뉴스를 찾아가지만 다큐멘터리 사진가는 스스로 뉴스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래서 권철은 조직이나 배경보다 세상과 독대하며 찍어 왔다. 그러면서도 외양이나 현상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사회, 그리고 구조와 본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동안 한국과 일본의 근대사가 만들어내는 풍경을 자신의 주제로 삼았는데, 가부키초, 야스쿠니, 오오쿠보 코리안타운, 우토로 등 모두가 일제 식민 경험과 연결된 사건들이다.




권철-야스쿠니,군국주의의 망령3


그 이후, 그의 자식이 태어난 지 100일째 되는 날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터졌다, 가족을 위해 안정된 생활권을 모두 버리고, 무작정 한국으로 귀국하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한국 사진계의 현실을 주위에서 알려주었으나, 그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은 제주 거리에서 풀빵 장사를 하며 어려운 작업을 어어 가고 있는 것이다.



▲권철, 야스쿠니,군국주의의망령4



제주에 정착하며 시작한 ‘이호테우’작업은 중국 자본 침탈의 역사를, 한 해녀를 통해 풀어 간 것이다, 바다를 배경으로 한 평생을 살아 온 해녀 할망의 집념과 쓸쓸함이 사진에 묻어있다.


그리고 신자유경제 물결로 인해 서서히 중국인들이 점령해가는 제주의 모습을, 바다 멀리 중국인 관광객들을 가득 실은 어마어마한 크루즈선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권철은 작년 여름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기도 했다.일본 군국주의의 망령을 사진으로 고발하기 위해 제주시 제주목관아 안에서 사진전을 열겠다고 요청하자 제주시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허가 해줬다.



▲권철,야스쿠니,군국주의의 망령2


그런데 광복회 회원 몇 명이 나타나 일장기가 드러난 사진을 '감히' 광복 70주년에 걸려 하느냐고 제주시에 항의하자, 제주시는 그 항의를 받아들여 사진전을 일방적으로 취소해버린 것이다. 일장기가 있으면 친일이라는 그 단순 무지한 문맹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어찌해야 좋은가?,


그래서 야스쿠니 사진들을 이호테우 해변 길거리에서 전시 한 후, 모두 불태워버렸다.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한 항거였지만, 잘못된 사회구조에 대한 항거의 뜻도 담겨있다. 그는 있는 사건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있는 사건을 이미지화 한 후, 그 것을 퍼포먼스를 통해 새로운 사건으로 만들어가는 사진가다.




▲권철,이호테우1



그는 야스쿠니 사진을 불 태웠던 이호테우 매립장에서부터 시작하여 제주 전 지역을 순회 전시한다. 다큐멘터리 사진가에서 행동하는 사진가로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권철이 세상을 독대한다는 것은 곧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망각해버린 역사에 대해서만도 아니다.


자기들끼리 나눠 먹고, 예술이라 이름 붙여 노닥거리는 한국 사진판에 대해서도 저항하고 있다. 

권철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국한 걸 뒤늦게 후회하고 있다.

 



▲권철, 이호테우2



그 가장 큰 이유는 사진판 자체가, 일그러진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그가 20년간 살아온 일본은 많은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나쁘고, 무식한 나라가 아니다. 일부 정치인들이 제국주의적 근성을 버리지 못해 판을 깨고 욕을 먹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에 대해 배려할 줄 알고, 돈이 없거나 힘없는 사람들을 그렇게 무시하지 않는다. 실력이 있으면 그만큼의 대접을 해 준다.


그렇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았다. 약육강식의 정글이고, 철면피의 세계다. 비단 정치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진판은 더욱 심하다. 권력 있는 기득권자는 자기 패 끼리 판을 짜고, 어중간한 사진가는 그 주변을 서성거리며 온갖 추파를 보낸다.



  

▲사진가 권철


[서울문화투데이] 조문호 기자/사진가



권철이 좌절한 이유가 바로 이러한 한국 사진계의 연줄과 인맥이었다. 실력은 뒷전이고, 줄서기를 잘 해야 하는 이 썩어 문드러진 사진판에 어찌 구역질이 나지 않았겠는가?


그렇지만 그의 작업은 중단되지 않는다. 2011년 일본 동일본대지진 피해지와 후쿠시마 원전을 취재한 후 국내 노후 핵발전소를 찍는 중이다. 두 나라의 핵발전소 문제를 끄집어내는 것만으로 메시지 전달은 분명하다. 그의 다음 작업은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제주에서 땅을 침탈하는 중국인들이라고 한다.


비평가 이광수교수는 권철이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면서  문학적으로 약간의 표현 방식을 바꾸었다고 말했다. 개 두 마리가 서성거리는 이미지에서 세상이 망해 인류가 사라진 후의 지구를 암시하고, 새끼줄에 묶인 죽은 굴비의 쭈그러진 모습에서 인간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미래를 말한다는 것이다. 


‘갤러리 브레송’ (02-2269-2613)에서 열리는 이 전시는 6월30일까지 이어진다.






가부키초

가부키초


'갤러리 브레송' 기획전 '사진인을 찾아서' 여섯 번 째 작가로 ‘권철 론’이 전시되고 있다. 6월20일 오후6시30분에 개막된 권철의 사진전은 오래 전부터 기다려 온 전시였다.

개막시간을 맞추려고 기다리는 중에 ‘아라아트’ 김명성 대표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금 '미스터 브레인워시전' 기자회견이 열리는데, 왜 오지 않냐는 것이다. ‘브레송’가는 길에 들릴 생각으로 서둘러 나갔으나, 전시장은 기자들로 만원이었다. 그 많은 기자들이 취재하는데, 나 까지 끼어들 필요가 있나 싶었으나, 인사동에서 열리는 대형전시라 사진만 찍고 충무로의 ‘갤러리 브레송’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하철로 가는 중에 아내로부터 독촉이 왔다. 개막식을 못하고 기다리니, 빨리 오라는 것이다. 사진판의 기록자 곽명우씨가 늦어, 대신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데, 사진도 사진이지만, 시간이 늦어 마음이 바빴다.

전시장에 도착하니 주인공 권 철을 비롯하여 ‘브레송’ 김남진 관장, 사진비평가 이광수교수, ‘눈빛출판사’ 이규상씨, 사진가 김문호, 성남훈, 강제욱, 신동필, 마동욱, 양시영, 이한구, 이일우, 김 원, 정영신, 김지연, 이정용, 이주영, 김진석, 송주원, 나떠구, 홍윤하, 김영호, 박영환, 마기철, 김주혁씨 등 많은 분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나중에는 하재은, 구자호, 곽명우씨도 나타났다.

개막식에서 이광수교수의 작가론과 작가 권철의 힘들게 사는 이야기를 들으니, 가라앉았던 분노가 또 다시 치밀어 올랐다. 한 동안 정치, 사회적으로 만연한 부조리와 사진판 비리에 목소리를 높여 왔던 것도 권철 같은 고통 받는 다큐멘터리사진가 많았기 때문이다.


최민식 사진상이 끼리끼리 해 처먹는 것도 모르고, 작년에 권철씨가 들러리를 선 적도 있었다. 사진을 모르는 어린애가 보아도 수상작보다는 권철의 사진이 뛰어나다는 것은 안다. 그리고 사진도 사진이지만, 권철은 어렵게 작업을 이어가는 의지의 사진가가 아니던가? 




 야스쿠니. 군국주의의 망령


 야스쿠니. 군국주의의 망령


 야스쿠니. 군국주의의 망령


 야스쿠니. 군국주의의 망령



'브레송'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사진인을 찾아서’란 이 기획전은, 사진은 좋지만, 속칭 진골 성골에 가려있는 진정한 사진가를 찾아 내어 작가의 전 작품을 보여주는 전시라, 한 가지 주제로  보여주는 일반 전시와는 기본적으로  다르다. 그리고 보아왔던 회고전 형식의 원로전과도 다른 것은 이건 종료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이다. 생각이나 형식들이 변해가는, 작가들의 주제와 접근방식, 그리고 진전하는 과정들을  한 눈에서 본다는 것은 한 작가를 이해하는데 안성마춤인 것이다.


이번에 초대된 다큐사진가 권철은 못 말리는 독고다이다. 이십대 중반에 사진 공부하러 일본 들어가 환락가 신주쿠 가부기초를 촬영했다. 보통 깡다구가 아닌 것이다. 자칫하면 야쿠자 한데 맞아 죽는다. 18년 동안 기록한 그 사진으로 고단샤 출판문화상 사진상도 수상했다. 그렇다고 주먹들의 세계만 보여주는 소재주의에 빠진 사람도 아니다.


그는 모두가 외면하는 한센병회복자의 삶은 담은 ‘텟짱’으로 데뷔한 인간미 넘치는 사진가다. '텟짱' 이야기도 마찬가지지만 대부분의 작업들이 진실을 찾아내어 밝히고 그것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이었다. ‘텟짱’은 소외에 대한 이야기다. 일본에서 소외당하고 멸시당하는 '조선인'의 모습을 일본 한센병회복자 요양원에서 찾았는데, 주인공은 요양소에 살았던 시인이자 한센병 회복자인 텟짱이었다. 권철은 텟짱이 사망하기 까지, 14년 동안 그의 삶을 사진으로 담아 온 것이다.

중요한 것은 권철이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 헌신적인 정신으로 무장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결정적인 사진 한 두 장만 찍으면 먹고 사는 데 지장 없는, 안정된 기자 자리를 사진을 위해 박차고 나온 사람이다. 2008년 중국 쓰촨성 대지진을 취재하다, 무너진 건물에 끼여 양 다리를 절단하는 소녀의 모습을 보고 한계를 느낀 것이다. 사람에게 닥친 고난이 자신의 밥벌이라는데, 어찌 회의감이 들지 않았겠는가?

 


이호테우

이호테우

이호테우




저널리즘 사진기자는 뉴스를 찾아가지만 다큐멘터리 사진가는 스스로 뉴스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래서 권철은 조직이나 배경보다 세상과 독대하며 세상을 찍어 왔다. 그러면서도 외양이나 현상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사회, 그리고 구조와 본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동안 한국과 일본의 근대사가 만들어내는 풍경을 자신의 주제로 삼았는데, 가부키초, 야스쿠니, 오오쿠보 코리안타운, 우토로 등 모두가 일제 식민 경험과 연결된 사건들이다.

그 이후, 그의 자식이 태어난 지 100일째 되는 날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터졌다, 가족을 위해 안정된 생활권을 모두 버리고, 무작정 한국으로 귀국하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한국 사회와 사진계의 현실을 주위에서 알려주었으나, 그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은 제주 거리에서 풀빵 장사로 연명하며 어려운 작업을 어어 가고 있는 것이다.

제주에 정착하며 시작한 ‘이호테우’작업은 중국 자본 침탈의 역사를 한 해녀를 통해 풀어 간 것이다, 돈이 얽히면서 뺏고 빼앗기는 추악한 인간 세계를 들춰내는 작업이었다. 바다를 배경으로 한 평생을 살아 온 해녀 할망의 집념과 쓸쓸함이 사진에 묻어있다.

그리고 신 자유경제 물결로 인해 서서히 중국인들이 점령해가는 제주의 모습을, 바다 멀리 중국인 관광객들을 가득 실은 어마어마한 크루즈선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권철은 작년 여름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기도 했다. 일본 군국주의의 망령을 사진으로 고발하기 위해 제주시 제주목관아 안에서 사진전을 열겠다고 요청하자 제주시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허가 해줬다. 그런데 광복회 회원 몇 명이 나타나 일장기가 드러난 사진을  광복 70주년에 걸려 하느냐고 항의하자, 제주시는 그 항의를 받아들여 사진전을 일방적으로 취소해버린 것이다. 일장기가 있으면 친일이라는 그 단순 무지한 문맹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어찌해야 좋은가?,

그래서 야스쿠니 사진들을 이호테우 해변 길거리에서 전시 한 후, 모두 불태워버렸다.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한 항거였지만, 잘못된 사회구조에 대한 항거의 뜻도 담겨있다. 그는 있는 사건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있는 사건을 이미지화 한 후 그것을 퍼포먼스를 통해 새로운 사건으로 만들어가는 사진가다.


그는 야스쿠니 사진을 불 태웠던 곳 이호테우 매립장에서부터 시작하여 제주 전 지역을 순회 전시한다. 다큐멘터리 사진가에서 행동하는 사진가로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권철이 세상을 독대한다는 것은 곧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망각해버린 역사에 대해서만도 아니다. 자기들끼리 나눠 먹고, 예술이라 이름붙여 노닥거리는 한국 사진판에 대해서도 저항하고 있다. 




텟짱

텟짱



권철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국한 걸 뒤늦게 후회하고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사진판 자체가, 일그러진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그가 20년간 살아온 일본은 많은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나쁘고, 무식한 나라가 아니다. 일부 정치인들이 제국주의적 근성을 버리지 못해 판을 깨고 욕을 먹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에 대해 배려할 줄 알고, 돈이 없거나 힘 없는 사람들을 그렇게 무시하지 않는다. 실력이 있으면 그만큼의 대접을 해 준다.


그렇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았다. 약육강식의 정글이고, 철면피의 세계다. 비단 정치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진판은 더욱 심하다. 권력 있는 기득권자는 자기 패 끼리 판을 짜고, 어중간한 사진가는 그 주변을 서성거리며 온갖 추파를 보낸다. 권철이 좌절한 이유가 바로 이러한 한국 사진계의 연줄과 인맥이었다. 실력은 뒷전이고, 줄서기를 잘 해야 하는 이 썩어 문드러진 사진판에 어찌 구역질이 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의 작업은 중단되지 않는다. 2011년 일본 동일본대지진 피해지와 후쿠시마 원전을 취재한 후 국내 노후 핵발전소도 찍는 중이다. 두 나라의 핵발전소 문제를 끄집어내는 것만으로 메시지 전달은 분명하다. 그의 다음 작업은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제주에서 땅을 침탈하는 중국인들이라고 한다.

비평가 이광수교수는 권철이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면서  문학적으로 약간의 표현 방식을 바꾸었다고 말했다. 개 두 마리가 서성거리는 이미지에서 세상이 망해 인류가 사라진 후의 지구를 암시하고, 새끼줄에 묶인 죽은 굴비의 쭈그러진 모습에서 인간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미래를 말한다는 것이다. 


갤러리 브레송’ (02-2269-2613)에서 열리는 이 전시는 630일까지 이어진다.

 


글 : 조문호 / 아래사진 : 정영신, 조문호




-권 철 사진전 개막식과 뒤풀이 사진이다-





























































































































 

 

다큐사진가 권 철씨가 제주바람을 몰고 인사동에 나타났다.

제주에서 끝낸 이호테우 사진 보따리를 인사동 ‘토포하우스’에 푼 것이다.

지난 8일 오후6시경 첫 팡파레를 울렸는데, 아주 가축적인 분위기였다.

 

권 철씨를 처음 만난 것은 작년 '눈빛출판사'의 출판보고회였다.

20여 년 동안 일본에서 활동하다 왜 갑자기 귀국했을까? 궁금했다.

고단샤 출판문화상까지 받아가며 사진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는데 말이다.

아마 척박한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사진에 바람몰이 할 전사를 자처한 모양이었다.

 

그는 귀국과 함께 쉴 틈도 없이 제주도 이호테우 해변에 초점을 맞추었다.

거대한 중국자본에 잠식되어가는 제주 이호테우를 향한 100일간의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그 땅에서 평생 살아 온 해녀 할망들에 대한 어프로치도 적중했다.

 

전시장입구에는 제주 이호동장의 축하화환 하나가 자랑스럽게 버티고 있었는데,

대통령의 화환보다 더 돋보였다. 작업하는 동안 얼마나 그 곳에 헌신하며

인간적인 관계를 맺어왔는지 그 화환 하나가 다 말해주고 있었다.

 

다큐멘터리사진이란 그런 것이다. 늘 약자 편에서 그들과 함께 해야 하니 말이다.

그는 해녀들의 일상적인 삶은 물론 물밑까지 따라다니며 동고동락을 같이 했다.

해녀들은 바다에서 소라를 땄지만, 권철은 돈 안 되는 보석을 캔 것이다.

 

전시장에 들어 선 첫 느낌은 뭔가 꿈틀거림이었다. 마치 낙지가 꿈틀거리듯...

사진이 너무 좋았다. 나는 바다 내음 물씬 풍기는 이호테우해변 사진을 보며

우리 민초들의 한을 보았고, 그들의 삶의 역사를 본 것이다.

 

사진도 사진이지만, 사람이 진국인 것 같아  더 좋았다.

그날 참석한 분들과 어울려 이차, 삼차까지 마시고, 노래도 불렀다.

‘인천에 성냥공장, 성냥 만드는 아가씨!’ 그 거룩한 노동가를....

 

그런데 또 하나 조가 맞는 것은 둘 다 개털신세라는 점이다.

존경하는 최민식선생 상금 좀 얻을려고, 나는 작년에 그는 올해 출품해

다행스럽게 미끄러진 것이다. 둘 다 작업비 좀 마련하려 헛 지랄을 떨었다.

진작 만났다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귀띔이라도 해줄 수 있었을 텐데....

 

그날 모인 용사로는 권철을 비롯하여 엄상빈, 이규상, 김남진, 정영신, 김지연, 이은숙, 

장 숙, 강인구, 마기철씨와 제주에서 올라 온 풍각쟁이 정신지와 첼리스트 윤지윤이다.

그 두 소녀가 만드는 흥에 모두들 뿅 갔다. 정말 잘 놀더라.

 

전시는 오는 14일까지 이어진다.

바쁘면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눈빛사진가선13 '이호테우' 권철사진집을 구해 봐도 된다,

사진집 한 권에 12,000원이니, 그저나 마찬가지다.

 

“그라고 이거는 당신한테만 살짝 이바구하는 비밀인데,

사진판의 마당발 곽명우하고 제주 풍각쟁이 정신지가 연애 중인데, 곧 떡국 묵게 될 것 같더라“

 

 

 사진,글 / 조문호

 

 

 

도쿄 최대의 환락가 ‘가부키쵸’의 20년을 밤낮으로 기록한 한국인 사진작가가 있다. 그 화려한 공간을 메꾸어 온 시간은 물론, 소외된 자들의 체온까지 고스란히 담아낸 사진집 <‘가부키쵸’, 고단샤>는 일본 최고의 권위있는 출판상 중 하나인 고단샤의 ‘고단샤 출판문화상 사진상’을 수상했으며, 2013년 그가 내놓은 포토에세이 <텟짱, 한센병에 감사한 시인, 사이류사>는 2014년 도쿄 북페어 지금 꼭 읽어야 할 책 30권에 선정되기도 했다. TV출연은 물론, 그의 사진이 실리지 않은 일본의 시사지가 없을 정도다. 보도 사진가,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활동하며 ‘한국인 사진가로서 최초’라는 수식어가 들어가는 다양한 공적을 남겨온 사진작가 권철(1967년생). 그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자신을 아껴 마지않는 일본을 떠나, 대한민국의 관문이라 그가 표현한 제주에서 일 년의 경유 생활(?)을 마치고, 이제 막 서울 한복판에 새 둥지를 틀었다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권철 씨의 향방이 궁금하다.    

 

 

동문시장 정신지


 
사진가 보고 왜 스나이퍼라 부르지?

일본인들은 그를 저격수 사진가라 부른다. 해병대 저격수 출신이라는 배경도 그렇거니와, 쉽게 타협하지 않고 한번 시작한 일은 ‘제대로’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의 성격에 제법 어울리는 별명이다. 경상도 남자 천성을 타고나, 말수도 없고 무뚝뚝하다 못해 차가워 보이기까지 하는 그이지만, 권철의 사진에서는 체온이 느껴진다. 무시무시한 일본 가부키쵸 야쿠자의 사진에서도, 지진으로 모든 것이 폐허가 된 마을의 풍경에서도, 한센병 회복자인 텟짱의 일그러진 얼굴에서도, 보여지는 것은 욕망과 절망을 뛰어넘은 살아있음에의 ‘감사함’이다.  

 

권철과텟짱 <텟짱등에 업힌 작가>


 
어쩌다 사진을 시작했나?

원래는 토목공학과 출신이다. 하지만 대학 다니며 배운 것은, 다리를 놓고 도로를 만드는 사람들이 돈을 벌면 벌수록 우리가 사는 세상이 부실해진다는 부조리가 전부였다. 주위의 바람대로 대학을 나와 한국에서 취직했다면 나 역시 세상을 부수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장사꾼이 되어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런 일에 가담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1994년 일본으로 건너가 사진 학교에 들어갔다. 일본에 가자마자 한국에서는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같은 해 일본에서는 한신대지진도 있었다. 나의 스승 히구치 켄지(1937, 일본 피폭노동자 탐사보도 사진작가)는 평생 끈질기게 원전에 관한 사진을 찍고 있는 분인데 그를 비롯한 좋은 스승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위)가부키쵸 호스트 그룹(아래)가부키쵸 야쿠자


        

가부키쵸 사진 중에서도 야쿠자 사진이 유명하다. 도대체 그런 장면들을 어떻게 담아냈는지?

1996년부터 찍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에는 무서워서 찍을 엄두도 안 났다. 주머니에 칼을 차고 양손에 철봉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 장도 못 찍고 들어오면 억울해서 잠이 안 왔다. 한 대 맞더라도 내일은 꼭 촬영하리라 다짐하며, 짝사랑에 빠진 청년처럼 매일 밤을 설치다가 결국은 성공했다. 물론 위협도 당하고, 잡혀서 야쿠자 사무실에도 끌려간 적도 있다.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카펫 위에 ‘오야붕(두목)’이 앉아 있었는데, 거기서 맞기도 많이 맞았다. 그런데 아무리 겁을 줘도 내가 또 찾아가고 몇 마디 대화 끝에 나의 신분이 ‘사진을 배우는 유학생’이라는 걸 알고는 ‘끈질긴 놈’ 하며 웃어넘기더라.



‘가부키쵸’라는 공간이 가지는 특성을 끌어내기 위한 작가만의 노하우가 있었나?

가부키쵸는 일본의 심장부다. 정치, 경제, 문화, 모든 것이 권력과 욕망의 지배 하에서 돌아가는 곳이다. 야스쿠니신사도, 일본 최대 규모의 재일조선인 밀집지역도 모두 다 한동네에 있다. 365일 야쿠자와 경찰이 충돌하고, 화려한 기모노를 입은 여성들과 노숙자 꼬마들이 공존하던 그 골목 한쪽에 내 20년의 삶도 있었다. 처음에는 흑백사진 작업을 주로 했었지만 결국 모든 작업을 컬러로 마무리했다. 모든 것이 흑백논리에 의해 돌아가는 곳이라, 아무래도 흑백보다는 컬러가 나을 법 싶었다. 그러면서 가부키쵸라는 공간에 온도를 불 어넣게 된 것 같다. 가로 36mm 세로가 24mm인 카메라의 작은 파인더에 공간이 가진 시간성을 넣는 것 또한 어려운 작업. 그건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었다. 내 책상 위에는 늘 세 개의 달력이 있다. 작년, 재작년의 오늘 이 순간, 이 장소에서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며 작업을 한다. 공간이 가지는 역사성은 그렇게 발품을 팔며 꾸준히 작업해야 사진에 표현되는 것 같다.   

 

쓰촨성 대지진 엄마와 아기

 

        

보도사진가와 다큐멘터리사진가의 차이점은 뭔가?

보도 사진가는 ‘사실’을, 다큐 사진가는 사실을 치고 들어가 그 안에 내재하는 ‘진실’을 찍는 것이 일이다. 보도 사진은 사건이 남과 동시에 콘셉트가 정해지지만, 다큐는 그렇지 않다. 진실은 쉽게 보이지 않으니까.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 다큐 사진가의 역할이고 사명이다. 한 순간이 한 장에 담겨야 하는 사진이라는 매체에 진실을 담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나는 한때 남들이 흔히 말하는 잘 나가는 프리랜서 보도 사진가였다. 전 세계를 누비며 찍은 보도 사진을 팔며 도쿄 한복판의 호화로운 아파트에서 최고의 장비를 모자랄 것 없이 다 갖추고 살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버는 것도 쓰는 것도 한 순간, 배가 부르면 부른 대로 욕심이 생기는 것이 인간이고 나 역시 그 경험을 했다. 하지만 2008년의 어느 날, 내 삶에 커다란 트라우마가 찾아왔다. 그 일을 계기로 보도사진가의 길은 접었다. “나는 무엇을, 어떻게, 왜 찍는가?”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에 오랫동안 괴로워하며 사진을 찍을 수도 쳐다볼 수도 없었던 시간이었다.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의 운명을 바꾼 2008년, 무슨 일이 있었나?

2008년 중국 쓰촨성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8만 명의 희생자가 났다. 아비규환 속에서 희생된 사람들과 폐허가 된 마을의 모습을 보도하기 위해 전 세계 사진가들이 쓰촨성에 모였다. 프레스 라인 안쪽에 프레스센터가 있었는데, 그 수많은 사진가들이 노트북을 펼치고 앉아 ‘니 사진이 좋다, 내 사진이 좋다.’ 해가며 죽은 사람들 사진에 핏자국 선명하게 포토샵 작업을 하고 있었다. 라인 바깥쪽 세상에선 생존자들이 슬픔에 절규하고 있는데 말이다. 몰래 프레스 라인을 넘어가 마을에 잠입했다. 그곳에서 3일을 보내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사람들을 찍었다. 지진이 있고 5일 후의 일이었다. 그러고 나서 시내에 있는 아동병원을 향했다. 후문에서 진을 치고 있는데 위급해 보이는 한 아동 환자가 들것에 실려 들어왔다. 몸에 모포를 두르고 있는데 뭔가 이상했다. 두 다리가 없었다. 간신히 목숨만 붙은 채 들것에 실려가던 아이가 빤히 고개를 돌려 자포자기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루쇄)라고 하는 열두 살 여자 아이였다. 무너진 건물에 몸이 끼어 탈출하지 못하던 그녀를 구할 길은 두 다리를 절단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열악한 구조환경 속에서 의사도 아닌 군인들이 톱으로 마취도 없이 꼬마의 다리를 절단했고, 절규하다 쓰러지기를 반복하는 어머니와 딸은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고 기적처럼 재회했다. 병원에 실려온 아이의 어머니는 나에게 딸의 잘려나간 다리를 보여주며 찍으라 했다. 이것을 꼭 찍어서 세상에 보여주라며 오열했다. 눈물 때문에 파인더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는 울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울면서 사진을 찍었던 적이 있었나 싶다. 결국, 그 사진을 데이즈 재팬(DAYS JAPAN)을 비롯한 일본내 사진 주간지들이 대서특필했고, 그들은 내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의 돈을 루쇄의 사진과 바꿔갔다. 하지만 그 후로 나는 보도 사진을 찍지 않았다. 상업 사진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생명을 피사체로 하는 사진을 찍어 팔며 나 홀로 안이하게 살아가기에 세상은 절망으로 가득 차 있다. 다큐 사진 역시 피사체와 작가의 숙명적인 과업과도 같은 것인데, 그 과정에서 사진작가만 상업적으로 득을 본다면 그것은 부조리한 일이 아닌가? 사진에서는 늘 피사체가 갑이 되어야 한다. 피사체를 통해 작가가 박수갈채를 받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나는 판단했다. 

 

왼쪽) <가부키쵸> 눈빛출판사 2014(오른쪽)<텟짱, 한센병에 감사한 시인> 눈빛출판사 2014


 
한국에서도 출판된 <텟짱-한센병에 감사한 시인, 사이류사>은 어떤 책인가?

텟짱(1924-2011 본명 나가미네 도시조, 한센병 회복자이자 시인)을 만난 것은 큰 축복이었다. 1997년 한센병 회복자들이 격리 생활을 하는 라쿠센엔이라는 요양원에서 자작시를 발표하던 그와 처음 대면했다. 일그러진 얼굴에 누가 봐도 거부감을 일으키는 첫인상의 소유자이지만, 오랜 시간 같이 호흡하고 거리감을 좁혀가면서 이렇게 맑고 귀엽고 천재적인 사람이 어떻게 이 산골에서 평생을 처박혀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11년 87세의 나이로 텟짱이 돌아가시기까지 그와 함께했던 기나긴 여정 속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 것(편견과 차별)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고, 텟짱은 내 사진을 통해 세상에 한센병 회복자의 존엄성을 알림과 동시에 우리 모두에게 보이지 않는 것의 아름다움을 가르쳐 주었다. <텟짱, 한센병에 감사한 시인(눈빛출판사)>은, 그들과 세상 사이에 존재했던 벽을 허물기 위해 오랜시간 나와 텟짱이 가슴을 맞대고 공동으로 작업한 책이다. 여태까지 본 피사체의 눈빛 중에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을 꼽으라면 단연 텟짱의 눈빛이다. 텟짱은 한센병의 치료제인 프로민의 과잉 사용으로 한쪽 눈을 잃었고 남은 한쪽도 시력이 없었다. 하지만 방에 누워 있다가 가끔 내 쪽을 보며 “곤짱~, 야키니쿠 이코우카(우리 불고기나 먹으러 갈까)?” 하며 귀엽게 말씀하시던 목소리가, 그 맑은 눈빛이 지금도 아련하다. 생전에 나와 함께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는 텟짱이다. 이제는 하늘나라에 계시지만, 텟짱이 책으로나마 한국 독자들을 만나게 된 것을 큰 기쁨으로 생각한다. 이제 더 이상의 한센병 환자는 없다. 지금 살아계신 분들은 ‘환자’가 아니라 ‘한센병 회복자’라 부르는 것이 맞다. 평생 그분들이 가슴에 안고 살아왔을 슬픔을, 가시기 전에 조금이라도 덜어드리려는 노력이 필요한데 그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일본을 떠난 이유?

내가 만일 아직도 노총각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더라면, 나는 아직도 일본에서 일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뒤늦게 나타나 나를 구제해 준 아내 덕에 결혼해서 첫아들이 태어났는데, 딱 100일 만에 동북 대지진이 일본을 덮쳤다. 곧바로 후쿠시마로 달려가 취재를 했고, 찍어 온 사진을 도쿄 한복판의 공원에 모아 놓아 전시하며 누구보다 빨리 사람들에게 피해의 참상을 알렸다. 하지만 사진가이기 이전에 책임져야 할 갓난아기가 있는 처지가 되고 보니, 일보다는 가족이 먼저였다. 더는 도쿄에 남아있을 수가 없어 한국행을 결심했다. 그러나 한국에 짐을 풀자마자 곧 세월호 참사가 터졌다. 20년 전, 한국을 떠나던 해에 무너진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가 떠올랐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과거의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의식 수준이다.



제주생활은 어땠나? 앞으로의 계획은?

욕망이 지배하는 가부키쵸에서 20년을 보내고 한국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자본이 지배하고 있는 제주가 보였다. 사실은 가족과 함께 쉬고 싶어 찾아온 곳이 제주도였다. 하지만 우연히 만난 해녀 할머님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나는 다시 카메라를 들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제주는 이미 수많은 사람이 사진으로 찍어왔고 앞으로도 찍어가겠지만, 내가 찍어야 했던 제주의 현실은 상상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었다. 평생을 일구어 온 할머님들의 땅과 바다가 중국의 거대 자본의 손에 하나 둘 팔려 나가고 있다. 제 땅과 바다를 아무렇지도 않게 중국인에게 팔면서도 극단적인 무공포증에 사로잡혀있는 듯하다. 빼앗긴 것과 팔아버린 것은 엄연히 다른데, 대책 없이 중국 자본의 물꼬가 터져버린 제주에서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태연했다. 자본과 정책과 의식의 병폐로 말미암아 뒷전으로 밀려나는 해녀들의 마지막 물질(해녀들의 잠수 작업)을 기록하기 위해 함께 물에 들어가 사진을 찍었다. 아마도 빠르면 다가오는 봄과 여름 사이에 제주에서 취재한 내용을 담은 사진집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2015년은 한·일수교 50주년과 동시에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는 특별한 해이다. 10년 이상 작업해온 야스쿠니신사에 관련된 사진집 출판이 예정되어있고, 나머지는 차례차례 해 나갈 예정이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할 일이 너무나 많을 것 같은 서울. 새롭게 펼쳐진 캔버스에 뭘 그려나가게 될지 나 역시도 기대된다.


“내가 좋아서 해왔던 일에 관해 이야기하며 누군가와 앉아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게, 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꺼? 아입니꺼? 하하하.”

인터뷰를 마친 그가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일본인들이 사랑한 사진작가 권철의 마력이 매력으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작은 것에 감사해 하며 늘 낮은 곳에 조용히 포복하고 앉아, 보여지는 것의 뒤편에 숨겨진 진실과 쉽게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그는 진정한 저격수 사진가다. 얼마전 그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내와 전전긍긍하며 찾아낸 서울시의 한 옥탑방에 이제 막 세 식구가 자리를 잡았다는 소식. 군더더기 없는 소박한 시작으로 주어진 매순간에 감사하며 이 시대를 기록하는 진정한 ‘꾼’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를 만나니, 오랜만에 참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가?  
[MK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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