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 End, natural rhythm-Time of rhythmical flow

심연, 자연율-결이 흐르는 시간

김정남/ KIMJEONGNAM / 金政南 / painting

2023_0920 2023_0925

김정남_natural rhythm 027032_알루미늄에 스크래치_73×117cm_2023

 

김정남 인스타그램_@rhythm_tan_Jeongnam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주말,공휴일_11:00am~06:00pm

 

후원 / 강원특별자치도_강원문화재단

 

아트가가 갤러리

ART GAGA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41

(인사동 183-4번지) 1

Tel. 070.7758.3025

www.gagagallery.com

@artgaga_gallery

 

김정남의 작업-하얀 산맥과 풍경이 된 파토스 심연, 자연율, 결이 흐르는 시간(Deep End, natural rhythm, Time of rhythmical flow). 작가 김정남이 근작에 붙인 주제다. 아니면 그저, 결이 흐르는 시간이라고도 했다. 자연율에서 시작해 여기까지 왔다. 자연율의 개념을 해석하고 재해석하는, 심화하고 확장하는, 그렇게 자연율의 개념을 변주하는 과정에서 덧붙여진 주제일 것이다. 처음엔 모호했던 개념이 점차 확신을 얻으면서 뚜렷한 실체를 얻게 된 주제일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지금까지 작업을 지지해왔던 주제들을 아우르고 종합하는 주제라고 해도 좋다. 다시,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을 견인하는 인문학적 배경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김정남_natural rhythm 508032_알루미늄에 스크래치_81×131cm_2023
김정남_natural rhythm 614032_알루미늄에 스크래치_61×91cm_2023
김정남_natural rhythm 204022_알루미늄에 스크래치_60.5×91cm_2022

존재에는 결이 있다. 자연에도 결이 있다. 나무에도 결이 있고(나이테) 바람에도 결이 있다(바람결). 물에도 결이 있고(물결) 빛에도 결이 있다(빛살). 호흡에도 결이 있고(숨결) 몸에도 결이 있다(지문). 소리에도 결이 있고 피부에도 결이 있다. 소리나 피부가 거칠다거나 부드럽다고 할 때가 그렇다. 그러므로 결은 존재의 질감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결이 있는가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결도 있다. 이를테면 마음결 같은. 그렇다면, 결은 무엇인가. 몸에 아로새겨진 존재의 증명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존재가 겪었을 삶의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시간의 흔적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은 에너지의 물적 형상일지도 모른다. 존재는 움직인다. 존재와 존재가 움직이면 충돌이 일어난다. 그렇게 충돌이 일어나는 곳에 에너지가 발생한다. 그렇게 바람과 바람이, 공기와 공기가, 존재와 존재가 움직이면서 부닥칠 때 에너지가 발생하고, 그 에너지가 결을 만든다. 거시적(혹은 미시적)으로 말하자면, 음의 기운과 양의 기운이 움직이면서 부닥칠 때 에너지가 발생하고, 그 에너지가 존재를 생성시킨다. 그러므로 결은 어쩌면 존재에 아로새겨진 지문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풍경에도 지문이 있고, 상처에도 지문이 있다.

 

김정남_natural rhythm 524032_알루미늄에 스크래치_50×73cm_2022
김정남_natural rhythm 617022_알루미늄에 스크래치_50×73cm_2022

결은 흐른다. 존재가 움직이기 때문이다. 존재가 이행 중이기 때문이다. 결이 흐를 때 마구 흐르지는 않는다. 흐르다가 맺히고 맺히는 듯 흐르는 강약이 있고, 주기가 있고, 패턴이 있다. 그게 뭔가. 율이다. 리듬이다. 리듬이 자연에 탑재되면 자연율이 된다. 자연이 숨겨놓고 있는 리듬 그러므로 음률이라고 해야 할까. 자연이 품고 있는 소리 그러므로 음악이라고 해야 할까. 자연이 은연중 실현(그러므로 암시)하고 있는 공감각이라고 해야 할까. 자연의 호흡, 자연의 숨결, 자연의 기운, 자연의 섭리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풍경에는 결이 있고, 율이 있다. 주름이 있고, 리듬이 있다. 산을 쳐다보면(시선), 산도 쳐다본다(응시). 그렇게 내가 산을 쳐다볼 때, 나에게서 산 쪽으로 산에서 내 쪽으로 건너가고 건너오는 것이 있다. 교감이고 공감이다. 감정이입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는 산과의 교감이 있고, 자연과의 공감이 있다. 그 교감이, 그 공감이 산맥을 따라 흐르는 결로, 율로, 주름으로, 리듬으로 정착되었다. 어쩌면 작가가 산맥에서 캐낸, 그러므로 산맥을 자기식으로 단순화한, 산맥의, 자연의, 풍경의 골격이라고 해도 좋다(그리고 알다시피 그 골격을 도상으로 옮겨놓은 것에서 등고선이 유래했다). 자연도 존재도 결을, 율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산맥을 유비적으로 해석한, 그러므로 존재의 본질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산맥의 골격을 캐내면서 존재의 본질을 같이 발굴했다고 해야 할까.

 

김정남_natural rhythm 417032_포맥스에 아크릴채색_41×61.5cm_2022
김정남_natural rhythm_부분

그렇게 작가는 산을 그린다. 그러므로 풍경을 그리고 자연을 그린다. 엄밀하게는 산을 새긴다. 새긴다? 알루미늄 판각이다. 알루미늄판에 끝이 뾰족한 도구를 이용해 이미지 그러므로 산맥을 새김질한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알루미늄판을 대개는 남색에서 검은색에 이르는 짙은 색으로 칠한다. 이처럼 배경 화면을 어둡게 칠하는 것은 그 위에 새김질할, 새김질을 통해 드러나게 될 하얀 산맥과의 대비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외에 또 다른, 의미심장한 의미를 어둡고 짙은 배경 화면은 내포하고 있는데, 바로 심연을 상징한다. 작가가 심연이란 말을 옮겨놓은 영문의 의미가 흥미롭다. Deep End. 깊이의 끝이란 말이다. 그 끝을 미처 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이란 의미일까. 그 끝에 미처 가 닿을 수 없는 깊이란 의미일까. 아마도 심연은 미처 헤아릴 수도, 미처 가 닿을 수도 없는 깊이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밑도 끝도 없는 심연으로부터 작가는 산맥을 건져 올리고, 산맥의 골격을 건져 올리고, 존재의 본질을 건져 올린다. 어쩌면 의식보다 깊은, 무의식보다 아득한 존재의 원형을 발굴한다. 존재에 아로새겨진 원형적 기억을 캐낸다.

 

김정남_natural rhythm 32803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5×91cm_2023
김정남_natural rhythm 628032_포맥스에 아크릴채색_53×53cm_2023
김정남_natural rhythm 91803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5×91cm_2023

그러면 작가는 그 원형을, 그 원형적 기억을 어떻게 캐내고 발굴하는가. 니들을 장착한 소형 드릴을 도구로 발굴하는데, 온 신경이 곧추선 초긴장 상태에서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과정이다. 실제로 산맥이 발굴되는 과정인 만큼 작가의 작업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해도 좋다. 한 땀 한 땀 수놓듯 이미지를 새김질하는데, 여차하면 곁길로 빠질 수도, 산맥이 흐트러질 수도 있는 일이어서 드릴에 가해지는 힘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하고 호흡을 가다듬어야 한다. 그래서 실제 작업을 보면 선 위로 니들이 지나간 자리가 여실한데, 호흡이 머물다간 자리 아니면 호흡이 순간적으로 멈춘 자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흐르면서 맺히는, 맺힌 듯 흐르는 촘촘한 주름이 자리를 잡고, 그 주름들이 모여 산세를 일구고, 마침내 산맥이 그 실체를 얻는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하얀 산맥 앞에, 산맥의 골격 앞에 서게 만든다. 때로 작은 심연 같은 옹달샘을, 그리고 더러 개인사에서 유래한, 때로 역사적인 서사를 자기 속에 숨겨놓고 있는 풍경 앞에 서게 만든다. 심연에서 건져 올린 존재의 원형, 그러므로 원형적인 기억 앞에 서게 만든다. 풍경의 지문 앞에 서게 만들고, 존재의 지문 앞에 서게 만든다.

 

김정남_natural rhythm 138032_포맥스에 아크릴채색_53×53cm_2023
김정남_natural rhythm_부분

그리고 작가는 근작에서 종전 작업과는 사뭇 다른 작업을 예시해주고 있다. 기왕의 판각 작업과는 별도로 꽤 오랫동안 형식실험 해왔던 페인팅 작업을 근작에서 본격적으로 시도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림을 보면 어둑한 화면 위로 무분별한 붓질이 가로지르는 것이 한눈에도 추상표현주의 회화를 떠올리게 한다. 몸이 부르는 대로 감각이 이끄는 대로 그린 그림이란 점에서 몸 그림으로 정의해도 좋을 것이다. 배경 화면과 붓질이 유기적인 전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 마치 배경 화면이 밀어 올린 붓질들의 춤을 보는 것 같고, 그 깊이의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심연에서 건져 올린 파토스가 자기실현을 얻은 것도 같다. 자기에 오롯이 집중해야 하는 판각 작업이 에토스가 그린 그림이라면, 자기를 방기한 채 직관에 내 맞긴 그림이 파토스가 그린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 그처럼 무분별한 붓질이 어둑한 배경 화면과 대비되면서 얼핏 산세가 보이고 풍경이 보인다. 심연으로부터 건져 올린 풍경이라고 해야 할까. 풍경이 된 파토스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는 하얀 산맥과 풍경이 된 파토스를 그리고 있었다. ■ 고충환

 
 

 

거기 있다 There They Are

김여운/ KIMYEOWOON / 여운 / painting.installation

2023_0719 2023_0724

김여운 _Angelina_ 리넨에 유채 ,  나무액자 _135×166×4cm_2023

 

김여운 홈페이지_www.yeowoonkim.com

인스타그램_@kimyeowoon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갤러리 도스

Gallery DOS

서울 종로구 삼청로737

Tel. +82.(0)2.737.4678

www.gallerydos.com  

 

김여운의 회화-이름 모를 들풀의, 혹은, 이름도 없는 것들의 윤리학 전시장에 들어서면 크고 작은 텅 빈 캔버스가 걸려있다. 하얀 캔버스에 하얀 사각형을 그린 절대주의 회화인가(말레비치). 아니면 회화가 가능한 필요충분조건을 평면이라는 최소한의 조건으로 환원한 미니멀리즘인가(클레멘테 그린버그). 그도 저도 아니면 텅 빈 캔버스를 보고 당혹해할 사람들이라는 상황 논리를 겨냥한 개념미술인가. 미술사에서 보고 들은 적은 있지만, 실제 전시를 통해 확인해본 적은 없는 만큼 텅 빈 캔버스가 꽤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김여운 _Angelina_ 리넨에 유채 ,  나무액자 _135×166×4cm_2023_ 부분

환원주의 혹은 금욕주의와 결합한 후기 미니멀리즘이라고 불러도 좋겠군, 하고 돌아서려는데 얼핏 화면 속에 알 수 없는 얼룩이 보인다. 사실은 캔버스 천을 찢고 그 틈새로 고개를 내민 싹이 그려져 있었다. 실제로 전시장에 돋보기를 비치해놓기도 했지만,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사실적이고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떡잎에 난 보송보송한 털이며, 캔버스가 찢어진 가장자리의 올 하나하나가 오롯한 것이, 그리고 여기에 그림자마저 생생한 것이 영락없는 실물 같았다. 작가가 오며 가며 본 이름 모를 들풀이라고 했고, 실물 크기 그대로라고 했다.

 

김여운_Anna_리넨에 유채, 나무액자_56×83×3cm_2023

그러나, 저 큰 캔버스에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작은 들풀 하나를 그렸다니. 정말 비효율적이군, 이라고 했지만 정작 작가는 그 말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작가는 회화적 관습을 문제시하고 있었다. 이미지 과잉의 시대에, 의미 포화 상태의 현대미술에 대해 꼭 필요한 말과 이미지로 한정하고 싶었다고 했다. 스펙터클 한 시대에 던지는 검소한(혹은 같은 의미지만 검약한) 말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한정에는 윤리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김여운 _Anna_ 리넨에 유채 ,  나무액자 _56×83×3cm_2023_ 부분

여기에 작가는 적정 거리 혹은 심적 거리를 문제시한다. 그림을 더 잘 보기 위해서 요구되는 거리를 의미하며, 그림을 넘어서 삶의 태도와 같은 상황 논리에 확대 적용되는 개념이다. 작가는 그 거리, 그 개념을 수정하는데, 작가의 그림에 무엇이 있는지 보기 위해선 그림에 바짝 다가가야 한다. 주의 깊게 보아야 하고, 세심하게 보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못 본 채, 아니면, 아예 아무것도 못 본 채 지나치기 쉽다.

김여운 _Sophie_ 리넨에 유채 ,  나무액자 _31×38×3cm_2023

무슨 말인가. 앞서, 이름 모를 들풀이라고 했다. 이름도 없는 것들이라고 해도 좋을, 사실은 지천이지만 없는 거나 매한가지인 존재들이다. 이 미물들이 봄이면 언 땅을 깨고 고개를 내민다. 보도블록 사이로 뿌리를 내리고, 시멘트 바닥을 뚫는다. 창틀에 쌓인 먼지에서도 자라고, 마침내 캔버스 천을 찢고 나온다. 혹자는 이처럼 새싹이 언 땅을 깨고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고도 했지만, 실제로 소리가 들린다기보다는 심적으로 공감하는 소리를 듣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김여운 _Sophie_ 리넨에 유채 ,  나무액자 _31×38×3cm_2023_ 부분

문제는 존재에 대한 공감이다. 존재의 살림살이를 보기 위해선, 존재가 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선 존재에 대한 공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정작 현실에서 그 존재는 이름도 모르고, 이름도 없다. 조르조 아감벤은 법으로부터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인간을 호모 사케르, 그러므로 발가벗은 생명이라고 했다.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이름 모를 들풀들, 그러므로 이름도 없는 존재들에 대한 유비적 표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어쩌면 우리 미물들 그러므로 타자들이 사는 치열한 삶의 소리를 보고 듣기 위해선 주의 깊고 세심해야 한다. 겨우 보이고, 바짝 다가가서야 비로소 보이는 작가의 그림의 숨은 뜻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는 다시, 타자의 삶에 대해 깊고 세심한 주의를 요청해오고 있다는 점에서, 윤리적인 측면이 있다.

 

김여운_Antony and Cleopatra_리넨에 유채, 나무액자_76×64×3cm_2023

그런데 정작, 이처럼 이름 모를 들풀들, 그러므로 어쩌면 이름도 없는 존재들 하나하나에 작가는 이름을 불러주고 있었다. 안젤리나, 하나, 소피, 안나, 에바, 루이스, 미아, 버지니아, 리사와 같은. 그리고 관객들도 작가처럼 저마다 풀들에게 이름을 불러주라고 요청한다. 연대를 요청해오는 관객참여형 프로젝트다. 내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는 김춘수의 시를 떠올리게 된다. 처음부터 이름도 없는 것들은 없다. 처음부터 무의미한 것들은 없다. 처음부터 미물(타자)들은 없다. 다만 이름을 불러주는, 의미를 발견하는, 타자를 인정하는 누군가가(혹은 행위가) 없었을 뿐. 그러므로 이름 모를 풀들에게 이름을 불러주는 이 프로젝트에는 타자()의 초대가 있고, 자기_타자의 맞아들임이 있다(에마뉘엘 레비나스).

 

김여운 _Virginia_ 리넨에 유채 ,  나무액자 _31×38×3cm_2023

그리고 여기에 집주인이 있고, 세 들어 사는 사람이 있었다. 집주인은 여하한 경우에도 집에 못을 박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세 사는 사람이 이사 가고 난 뒤에 벽에 박힌 못을 발견했다. 아마도 집주인마저 눈치채지 못할, 쉽게 찾기는 힘든, 후미진 곳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서도 삶의 방법은 찾아지고 있었고, 치열한 삶은 계속되고 있었다. 내가 미처 모르는 사이에, 어쩌면 나의 인식(보다는 관심)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도 치열한 삶을 살고 있었던 이름 모를 들풀처럼.

 

김여운 _Virginia_ 리넨에 유채 ,  나무액자 _31×38×3cm_2023_ 부분

그러므로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못 그림(정확하게는 벽에 못을 박은 그림)은 제도가 그어놓은 금을 넘어서 삶의 방책을 찾아내고야 마는, 여하한 경우에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당위처럼 읽히고, 금기와 위반의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그렇게 작가는 이름 모를(그러므로 어쩌면 이름도 없는) 들풀 같은 존재들의 치열한 삶의 순간에 주목하게 만들고, 후미진 구석에서도 계속되는 삶의 현실에 눈뜨게 만든다.

 

김여운 _Aria_ 리넨에 유채 ,  나무액자 _30×25×3cm_2023
김여운 _Aria_ 리넨에 유채 ,  나무액자 _30×25×3cm_2023_ 부분

그리고 여기에 세 개의 기둥이 서로 기대어 서 있는 입체 설치작업이 있다. 세 개의 기둥이 마치 한 몸인 양 하나로 묶여 있는데, 하얗게 도색 된 표면에는 LifeVariable(변수)과 같은 영문자가 기록돼 있다. 아마도 삶의 지침을 적어놓은 것일 터이다. 삶의 표상 혹은 푯대라고 해야 할까. 혼자서는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 서로 기대어야 하고, 협동해야 하고, 연대해야 한다. 그 과정에 예기치 못한 변수가 매개될 수 있다. 삶이 꼭 그럴 것이다. 김지하는 삶을 기우뚱한 균형, 그러므로 유격에 비유했는데, 아마도 변수의 또 다른 표현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김여운_Three_Poles_나무막대기에 젯소, 아크릴채색, 황마끈_165×8cm×3_2023

작가는 인간다움이 본인의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라고 했다. 여기서 작가가 추구하는 인간다움이란 인간중심주의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제도에 반하는 인간, 제도의 잣대가 아닌 자기의 잣대로 서는 인간, 그러므로 자율적인 인간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업은 자율적인 인간 간 연대와 협동을 의미할 것이다. 형태는 다르지만, 두벌의 옷이 마치 한 몸인 양 하나로 들러 붙어있는 작업을 매개로 협동을 주제화한 요셉 보이스의 작업을 떠올리게 된다. 계몽(교육)을 매개로 사람들의 의식에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요셉 보이스의 사회조각에 대한 공감과 유대를 떠올리게 만든다.

 

발터 벤야민은 예술가를 망가진 세계를 수선하는 사람에 비유했다. 안젤름 키퍼는 세계를 불태워 내년 농사를 기약하는 화전민에 비유했다. 작가 역시 어쩌면 이런 수선공과 화전민에서 예술의 당위를 얻고, 예술을 위한 실천 논리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이름 모를, 그러므로 어쩌면 이름도 없는 들풀 같은 존재들에, 후미진 구석에서 계속되는 치열한 삶의 순간들에, 그리고 자율적인 인간 간 연대에 주목한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것들, 나의 인식(보다는 관심)이 미치지 못하는 것들, 그러므로 진즉에 거기에 있었던 존재들에 눈뜨게 만든다. 작가는 근작의 주제를 거기 있다, 라고 명명한다. 아마도 진즉에 거기에 있었던 존재를, 거기에서의 치열한 삶의 현실을 증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고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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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길

박시현展 / Sarah Park / 朴是炫 / painting 

2023_0214 ▶ 2023_0227

박시현_Confession_아크릴채색, 유채_117×90cm_202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

27일_12:00pm~04: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안국동 7-1번지)

Tel. +82.(0)2.738.2745

www.gallerydam.com@gallerydam_seoul

 

갤러리 담에서는 2월에 박시현 작가의 『길 위의 길』 전시를 기획하였다. 부산에서 대학 졸업 후에 떠난 여행에서 중국 상해에서 결혼과 함께 출산 육아를 하면서 23년간 살면서 중국 작가들과 교류하게 된다. 중국에서 수묵화를 따로 배우면서 본인이 해 온 유화 작업과 함께 수묵 작업, 어릴 적 어머니의 바느질이 떠올라 시작된 콜라주 작업들이 함께 작업에 녹아진 작업들이 선보인다. ● 전시 제목에서도 시사하듯이 우리에게 있어 지금의 삶 속에서 끊임없는 선택 속에서 가는 길 위에 또다른 길들이 계속 이어진다. 작가는 지금 오이도 근처의 작업실에서 바다와 야산을 산책하면서 일과를 시작하고 마무리한다. ● 박시현의 작업은 바다의 물의 가로층과 건물과 풀에서 언뜻 보이는 세로층모습으로 추상과 비구상 사이에서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 때로는 유년기의 어머니의 바느질에서 본 기억들이 콜라주로 화면 속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작가는 동아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후 이번 11번째 개인전에서는 신작 18여점이 선보일 예정이다. ■ 갤러리 담

 

박시현_Confess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2×116cm_2022

"예술은 정신의 모험이다." (수잔손택) ● 작업을 하다 보면 무의식이 의식을 지배할 때를 많이 느낀다. 나 자신을 알아가기에도 평생이 걸릴 것 같다. 하물며 타인을 어찌 그래 쉽게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은 누구라도 오만과 편견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작업 안에서만이라도 자유롭고 싶다. 언제나 여행자이고 초원을 달리고 싶어질 때 자연스레 드로잉을 한다. 무의식의 바다에서 물결은 춤추고 흔적을 남긴다. 그리는 것이 아니라 감성을 표출하는 것이다. 나는 침잔하려고 달음박질을 한다. 작업이 삶이고 삶은 예술이다. 한결만 같아지기 위해서 부단한 선긋기가 필요한 것 같다. 곡선이 직선이 되고 직선 안에서 곡선을 발견하기 위해서 모험을 계속해야 할 것 같다. 감성은 이성보다 위험하고 무한 대로다. 인간은 감성을 가진 존재로 이지적으로 행동하려 한다. 더 넓은 감성의 바다에서 푯대를 향해서 가다 보면 섬을 발견하거나 나만의 조형언어와 색채가 어우러진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겠지. 조석으로 산책 할 때 만난 햇살, 나무 그림자, 저녁 노을에 아득한 수평선, 바람이 그려놓은 물결무늬, 낯선 발자국이 모든 것이 작업의 자료이다. 모든 산책은 마법이 일어나는 시간이고, 기다림이다. 기다림은 축복이다. ● 봄을 기다리며 겨울의 한가운데서. (2023. 1월) ■ 박시현

 

박시현_Confession_캔버스에 유채_150×150cm_2022

박시현의 회화: 존재의 깊이를 짓는, 그리고 감각의 춤을 추는  "호흡을 가다듬고 시공을 넘나들며 우주를 한 바퀴 돌아 시간 여행을 한다. 길게 바느질한 선들은 시간의 병렬 같은 것. 도대체 시간은 무엇인지. 과거는 기억들이 압축되어 다시는 떨어지지 않고 저 깊은 바닥에 침전한 채로 모습을 드러낸다. 선과 색상으로 경계 지어진 영역은 이승과 저승과의 경계이다...바다의 수평선, 구불구불한 시골길,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흐르는 하천, 때로 하늘을 향해 치솟은 높고 낮은 건축물을 차용한다(그러므로 그린다)...작업은 끊임없이 나다움을 찾아 나서는 여행이다. 나다움이 살아있을 때 가장 자연스러운 춤을 추게 될 것 같다...(내 그림은) 삶에 대한 고백이다." (작가 노트)

 

박시현_Confess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메쉬_80×80cm_2022

니체는 예술가의 내면에 두 개의 충동이 산다고 했다. 아폴론적 충동과 디오니소스적 충동. 자기 내면에 질서의 성소를 축조하려는 충동과 우연하고 무분별한 건강한 생명력이 자기실현을 얻는 충동. 그렇게 성향에 따라서 질서 의식이 강조되는 작가가 있고, 무분별한 생명력의 분출이 힘을 얻는 작가가 있다. 에토스가 강한 작가가 있고, 파토스가 지배적인 작가가 있다. 회화적 경향성으로 치자면 각 기하학적 추상과 추상표현주의로도 유형화할 수 있겠다. ● 중요한 것은 이 두 충동이 하나의 인격 속에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코스모스와 카오스가 길항하고 부침하는, 이율배반적인, 정신분열증적인 인간 실존의 보편 조건에 대한 레토릭 혹은 알레고리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그 두 충동이 하나의 인격 속에 동거하면서 공존하는 작가가 있다. 두 예술적 충동이, 두 개의 회화적 경향성이 똑같이 자기실현을 얻는 작가가 있다. ● 박시현이 그렇고, 그의 그림이 그렇다. 한쪽에 기하학적 추상이 있다면, 다른 한쪽에 추상표현주의가 있다. 한쪽에 본질(아니면 본성?)을 파고드는 회화적 경향성이 있다면, 다른 한쪽에 감각적인, 무분별한 생명력이 자기실현을 얻는 회화적 경향성이 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기하 추상과 추상표현, 질서와 무분별한 생명력, 본질과 감각적인 표현 사이의 스펙트럼을 오가며 그 경계를 넘나드는 회화적 경향성을 예시해주고 있다. 그렇게 이율배반이 자기실현을 얻는 작가의 그림은 비록 작가 개인의 사사로운 예술혼에 연유한 것이지만, 동시에 마찬가지로 이율배반적인(그러므로 부조리한?) 인간 실존의 보편 조건에 대한 논평(논증?)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 여기에 이율배반을 파고드는 것에, 부조리에 맞서는 것에, 그리고 모순율을 돌파하는 것에 예술의 존재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덧붙이고 싶다. 이율배반, 부조리, 그리고 모순율은 말하자면 창작 주체가 자기를 투자해도 좋을 도구, 예술혼의 도구라고 해도 좋다. 그리고 작가의 그림이 그 표상 그러므로 예술의, 그리고 동시에 삶의 표상이 되고 있다고 해도 좋고, 최소한 그 표상을 위한 실천 논리를 예시해주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박시현_Confession_캔버스에 유채_50×65cm_2022

먼저 기하학적 추상의 회화적 경향성(다른 그림에서 정형 비정형의 색면 구성으로 확대 재생산되기도 하는)을 보자. 보통 기하 추상이라고 하면 하드에지를 떠올리기 쉬우나, 사실을 말하자면 작가의 그림은 그 경향성과는 거리가 있다. 보통은 수평선을, 그리고 수직선을, 때로 사선을 반복 중첩 시킨다거나, 여기에 더러 수평과 수직선을 교차하는 화면을 보여주고 있는 작가의 그림에서 기하 추상의 최소 단위원소에 해당하는 선을 반복적으로 긋는 행위(선 긋기)가 아니라면, 기하학적 추상의 회화적 경향성과의 유사성에 대해서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 ● 형식주의와 환원주의에 천착한 모더니즘 패러다임과도, 그리고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지지하는 소위 차가운 추상회화의 경향성과도 사뭇 혹은 많이 다르다. 모더니즘 고유의 문법(반복적인 선 긋기)을 취하면서도 동시에 비정형의 개성적인 붓질(스트로크)에 연유한 회화적인 분위기를 다시 소환하고 있다거나, 그리고 여기에 중첩된 선 이면에 투명한 깊이를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탈 혹은 비 모더니즘적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모더니즘에 대한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태도며 입장을 예시해주고 있다고 해야 할까. ●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반복적인 선 긋기는 말하자면 회화의 형식요소에 대한 환원주의적 태도로서보다는 자기표현(그러므로 작가적 아이덴티티)을 위해 찾아낸 사사로운 형식이고 방법이었다. 개성적인 붓질이 그렇고, 회화적인 분위기가 그렇고, 투명한 깊이가 그렇다. 그렇다면 작가에게 선 긋기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시간 헤아리기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 그러므로 삶의 순간순간을 몸으로 더듬어 감각하고 표현하는(그러므로 살아내는), 어쩌면 가장 원초적인 회화적 행위(그러므로 삶을 회화로 환치한 행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몸으로 더듬어 삶을 감각 하면서 기억을 불러오고, 회한을 불러오고, 원초적 자기를 불러오는 행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 그 행위는 다분히 반복적이고 우연적일 것이다. 망아, 그러므로 자기를 잊는(그리고 잃는), 다시 그러므로 반쯤은 이미 무의식적일 것이다. 칼 융은 개인적인 기억을 넘어서는 아득한 기억을 집단무의식이라고 했고, 그 집단무의식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그러므로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원형이란 어쩌면 자기가 유래한 곳 그러므로 유년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시절에 대한, 상실한 고향에 대한, 존재의 근원에 대한 회귀 의식(아니면 회향 의식?)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 작가는 이상향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아마도 그 이상향을 의미할 것이다. 작가에게 이상향은 말하자면 도래할 미래보다는, 이미 상실한 과거를 의미할 것이고, 그리움과 회한으로 남은 시절 감정을 의미할 것이다. 작가는 본질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데, 아마도 화면의 이면에 투명한 깊이를 만드는 행위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므로 때로 무의식보다 깊은 자기 내면으로부터 상실된 자기, 아득한 자기, 어쩌면 억압된 자기 그러므로 자기_타자를 발굴하고 캐내는, 그리고 그렇게 스스로 되새김질하는 자기반성적인 행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 그러므로 이 일련의 회화적 경향성에 대해서는 자기 내부로부터 발굴된 풍경 그러므로 내면 풍경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삶을 더듬어 삶의 질감을 감각하는 행위, 시간을 더듬어 삶의 시간의 헤아리는 행위가 그 내면 풍경을 매개하는데, 때로 반복적으로 선을 긋는 행위와 함께 화면에 한 땀 한 땀 수놓는(엄밀하게는 이어붙이는) 바느질이 대신 매개하기도 한다. 시간을 선(지속)으로 더듬어 감각 했다면, 이번에는 점(순간)으로 더듬어 감각 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반복적인 선 긋기와 바느질은 삶이라는 시간을 더듬어 헤아리는 원초적 행위를 의미한다. 그리고 수직선과 수평선이 교차하는 그림이 관계를 표상한다. 삶이란 인연과 인연이 교차 되는 관계를 만드는 일이고, 그렇게 관계가 직조되는 직물 그러므로 관계의 망을 짜는 일일 수 있다. 그렇게 작가는 각 선과 점으로 나타난 시간을 매개로 자기 삶에 깃든 관계의 망을 짜고 인연을 맞아들인다. 기억을 소환하고, 회한을 보듬는다. 그리고 어쩌면 이미 상실한 이상향을 그렸다.

 

박시현_Confession_캔버스에 유채_80×80cm_2022

그렇게 비정형의 기하학적 패턴이 강한 일련의 그림들이 때로 무의식보다 깊은 내면 풍경을 그린 것이고, 작가의 표현으로 치자면 본질적인 국면이 강한 그림들(자기 내면을 투명하게 반영한 그림들 그러므로 어쩌면 자기 내면에 질서로 축조된 성소를 그린 그림들)이라면, 여기에 감각의 표층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한 또 다른 그림들이 있다. 추상표현주의적인 그림이고 액션페인팅 그러므로 소위 몸그림으로 정의할 만한 그림들이다. 몸이 부르는 대로 그린 그림이고, 감각이 이끄는 대로 그린 그림들이다. 반 무의식적인 그림이고, 자동기술적인 그림이고, 자유 연상기법에 연동된 그림이고,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견인되는 그림이고, 풀어 헤쳐진 의식 그러므로 반쯤 방기 된 의식으로 그린 그림들이다. ● 자기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내향적이고 관조적이고 명상적인 그림과는 비교되는, 그렇게 자기 내면에 투명한 깊이를 만들어 질서의 성소를 짓는 그림과는 비교되는, 건강한 생명력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분출이 여실한 그림들이다. 의식이 그린 절제된 그림과는 비교되는, 작가보다 앞질러 무의식이 그린, 그렇게 그렸다기보다는 그려진 그림들이다. 작가보다 앞질러 무의식이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때로 작가 자신에게 마저 낯선 자기_타자가 그린 그림이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회화란 매 순간 재현 불가능한 일회적인 사건이라고 했다. 그리고 질 들뢰즈는 작가의 매개로 인해 비로소 감각으로 등재된, 그러므로 작가의 매개가 없었더라면 처음부터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을(그리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라고 했다. ● 그렇게 선이 춤을 추는, 드로잉이 여실한, 분방한 색채 감정이 들뜬 기분(리듬감? 바이오리듬?)을 자아내는 작가의 또 다른 그림들이 미증유의 감각 지평을 탐색한다. 미증유라고 했다. 그러므로 어쩌면 아직은(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여전히) 미답인 자기_타자를 탐색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그리기는 살기와 동격이 된다. 작가에게 그리기란 말하자면 삶의 질감을 더듬어 찾는(시간을 거슬러 추억하는? 원형적 자기를 찾아가는?) 행위이며 과정이다. 바로 삶의 질감 그러므로 생활감정과 생활철학이 질료적인 형식을 얻어 체화되는 과정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 생활 오브제가 들어온다. 의도적이고 체계적이고 계획적이라기 보다는 임시방편의, 임시변통의, 손에 잡히는 대로, 눈에 밟히는 대로 작가에게 포획된, 그렇게 붙잡혀 그림이 된 오브제들이다. 작가가 드로잉이라고 부르는 일련의 종이 작업이 그렇다. ● 타블로 작업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종이 작업에서 콜라주의 경향성이 뚜렷하다.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편집과 재구성이 뚜렷한데, 현대미술의 브리콜라주와 브리콜레르의 경향성과 통하고, 후기구조주의의 탈맥락과 재맥락의 경향성과도 통한다. 맥락이 달라지면(일상에서 그림으로, 레디메이드에서 오브제로, 기능에서 정서적 환기로) 의미 또한 달라진다. 그렇게 의미는 맥락을 옮겨 다니면서 자기를 항상적으로 비결정적인 상태, 가역적인 상태, 유보적인 상태, 열린 상태로 유지할 수 있다. 예술의 존재 의미는 뻣뻣하게 죽은 의미를 해체해 처음 의미, 원래 의미를 되찾는 것에 있고, 그런 예술의 존재 의미와도 통한다. ● 한편으로 콜라주로 나타난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편집과 재구성의 경향성은 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으로 나타난 후기구조주의의 주체와도 통한다. 그 주체 감정이 한편으로 불안하고 불안정하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미증유의 지평으로, 미답의 영토를 향해 무작정 열려 있다. 그렇게 콜라주에 바탕을 둔 작가의 종이 작업이 임의적이고, 잠정적이고, 비결정적이고, 움직이는(스스로도 움직이고, 사람들의 마음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박시현_Confess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80×60cm_2022

작업은 끊임없이 나다움을 찾아 나서는 여행이다. 나다움이 살아있을 때 가장 자연스러운 춤을 추게 될 것 같다. 나에게 그림은 삶에 대한 고백이다, 라고 작가는 고백한다. 그 고백이 하이데거의 존재다움을 상기시킨다. 삶이란 어쩌면 존재가 존재다움을 상실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존재다움이란 바로 이런, 위급상황에 대한 처방으로서 나온 말일지도 모른다. 때로 예술은 존재가 존재다움을 회복하는 길이며 방법일 수 있다. 그러므로 작가의 고백이, 그리고 그 고백을 실천한 작가의 작업이 존재론적이다. ■ 고충환

 

Vol.20230214a | 박시현展 / Sarah Park / 朴是炫 / painting

 

달빛에 물들다

 

최인호展 / CHOIINHO / 崔仁浩 / painting 

2022_0315 ▶ 2022_0327

 

최인호_달빛에 물들다_패널에 아크릴채색, 재_71×52cm_2020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27

일_12:00pm~02: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안국동 7-1번지)

Tel. +82.(0)2.738.2745

www.gallerydam.com

 

 

최인호의 회화  삶은 혹, 꿈을 꾸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에 골방이 있다. 쪽창으로 흘러드는 빛과 반쯤 지워진 모서리가 이곳이 실내임을 말해주는 방이다. 쪽창이 환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낮일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빈방에 다만 둥근 테로 장식한 거울이 하나 걸려 있다. 방 안은 아마도 창으로 흘러들어왔을 부드러운 빛의 질감으로 은근한 것 같기도 하고, 연문지 해문지 알 수 없는 공기로 희뿌연 것도 같다. 그리고 벽과 바닥이 접한 모서리 부분에 한쪽 팔을 머리에 괴고 한 남자가 모로 누워있다. 뒤척이는 것도 같고 선잠을 설치는 것도 같은 남자는, 잠을 자는가. 꿈을 꾸는가. 잠결에 꿈을 꾸는 것인가. 꿈속에서 잠든 것인가. ● 은근한, 희뿌연 공기가 잠과 꿈의 경계를 지우는 것도 같고, 현실과 비현실의 지경을 넘나드는 것도 같다. 여기에 이곳이 다름 아닌 방임을 말해주는 반쯤 지워진 모서리는 경계를 견고하게 하기보다는 해체를 위해 있는 것도 같다. 그는 무슨 꿈을 꾸는가. 혹 삶이라는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거울 속에 얼핏 한 사람이 서 있는 것도 같다. 흐릿한, 애매한, 마치 흔적과도 같고 그림자와도 같은 그는 누구인가. 이방인? 유령? 분신? 보르헤스는 거울 속에 타자들이 산다고 했다. 자기_타자다. 그렇게 거울 속 희뿌연 사람이 방에 모로 누워 잠든, 혹 삶이라는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를, 다른 한 사람을 보지 않으면서 보고 있다. 그렇게 삶은 혹, 꿈을 꾸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억일지도 모르고, 추억일지도 모르고, 존재의 희미한 그림자를 더듬는 것인지도 모른다.

 

최인호_활절 달걀_패널에 아크릴채색, 재_45×53cm_2018
최인호_달빛에 물들다_패널에 아크릴채색, 재_104×85cm_2022

그리고 사람들이 있다. 얼굴 없는 사람들이 있고, 얼굴이 뭉개진 사람들이 있고, 얼굴이 어둠에 파묻힌 사람들이 있고, 무표정한 사람들이 있고, 흙 같고 질감 덩어리 같은 사람들이 있고, 마치 흔적과도 같은 사람들이 있다. 물 속이나 물 위에 부유하는 사람들이 있고, 바람 속에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고, 흙 위에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유령처럼 길 위에 서성이는 사람들이 있다. ● 개와 함께 산책하는 사람이 있고, 아마도 웃음 속에 울음을 감춘 사람이 있고, 얼굴을 가면처럼 쓰고 있는 사람이 있고, 곰팡이와 함께 해체되는 사람이 있고, 비처럼 흘러내리는 사람이 있고, 벽이나 땅속으로 스며드는 사람이 있고, 종잇장 같은 사람이 있다. 등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고, 긴 그림자를 밟으며 걸어가는 사람이 있고, 뱃전에 선 사람이 있고, 샤워를 하면서 우는지 웃는지 모를 사람이 있다. 목도리를 한 남자가 있고, 꽃을 든 남자가 있고, 멍하게 창밖을 보는 남자가 있고, 머리에 관을 쓰고 있는 남자(어린 왕자)가 있고, 낮술에 취한 남자가 있고, 불안처럼 빨간 기우뚱한 벽에 기대선 남자가 있다. ● 이 사람들은 다 누구인가. 아마도 기억과 회상으로 불러낸, 그렇게 작가의 일부가 되고 자기를 분유하는, 작가의 분신들일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는 심지어 현실을 그릴 때조차 과거처럼 보이고, 흔적처럼 보인다. 상처가 아문 자리처럼 보이고, 정서로 승화된 외상처럼 보인다. 연민의 집인 사진 앨범 속 빛바랜, 색 바랜, 낡은 사진처럼 보인다. 그렇게 작가는 혹 그때의 그리고 지금의 자기를 호출하는 한편, 자기 분신 그러므로 자기를 분유하고 있는 타자들(자기_타자)과 대면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최인호_아침식사_종이에 아크릴채색, 재_60×72cm_2017
최인호_새벽길_종이에 아크릴채색, 재_62×91cm_2020

그림을 보면, 왠지 자기와 닮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림을 그린 사람을 알 것도 같은 그림이 있고, 그렇지 않은 그림이 있다. 그 사람을 보는 것 같은 그림이 있고, 그렇지 않은 그림이 있다. 그림과 사람이 일치하는 그림이 있고, 그림과 사람이 동떨어진 그림이 있다. 회화의 자율성과 예술의 형식논리에 천착한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견인된 추상미술이 아니라면, 대개 어떤 식으로든 약간씩은 그림과 사람이 닮기 마련인데, 그중에서도 유독, 많이 그런 사람이 있다. ● 최인호가 그렇고, 그가 그림 그림이 그렇다. 쓸쓸한 것 같기도 하고, 우울한 것 같기도 하고, 세상에 저 홀로 내던져진 것 같기도 하고, 칠흑 같은 우주를 저 홀로 떠도는 미아 같기도 하고,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하고, 대기 속으로 사라지고 말 희박한 존재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존재의 흔적 그러므로 존재가 잠시 머물다 간 빈자리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눈을 돌려 다시 보면 사라지고 말 신기루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현실에서조차 과거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득하고 아련하고 아린 기억을 더듬는 것 같기도 하고,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어둠 속을 헤집는 것 같기도 하고, 밑도 끝도 없는 심연의 나락으로 추락하는 것 같기도 하고, 도돌이표처럼 매번 자기에게로 되돌아오는 것도 같다. ● 그림 속 자기가 그렇고, 타인이 그렇고, 개가 그렇고, 고양이가 그렇다. 골방이 그렇고, 쪽창이 그렇고, 때 묻은 거울이 그렇고, 아마도 반어적으로 머리에 쓰고 있을 관이 그렇다. 구름이 그렇고, 노을이 그렇고, 총총한 별이 그렇고, 교회 첨탑이 그렇고, 풍경이 그렇다. 세상천지가 자기를 증언하는 무대가 되고, 그렇게 사물마저 자기를 발설하기 위해 소환되고 육화된 풍경(사물 인격체?)이라고 해야 할까. 세상 자체가 자기를 분유 그러므로 나누어 가지는 자신의 분신이고 화신이라고 해야 할까. ● 아마도 그림 밖 작가도 유독, 많이 그럴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해도, 최소한 작가가 자신에 오롯이 집중하는 순간 그러므로 그림을 그릴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친숙한, 낯익은, 낯 설은, 생경한, 이율배반적인, 편안한, 불안한, 마치 유령과도 같은 존재의 방문을 받는, 그러므로 자기_타자를 맞아들이는 치열한 순간이 있을 것이고, 그 치열한 순간을 그림으로 옮겨 그렸을 것이다.

 

최인호_기다리는 사람_패널에 아크릴채색, 재_45×53cm_2015
최인호_달빛에 물들다_패널에 아크릴채색, 재_107×90cm_2022

그렇게 옮겨 그린 작가의 그림이 어눌하고 어설프다. 그래서 오히려 더 정겹고 살갑다. 그림 속 사람들은 묘사가 무색할 만큼 대충 그린 것 같고 그리다 만 것 같다. 되는대로 조물조물 빗어 만든 흙덩어리를 보는 것도 같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정겹고 살갑게 다가온다. 정겹다는 것은 마음으로 와닿는다는 것이고, 살갑다는 것은 몸으로 와닿는다는 말이다. 마음으로 그린 그림이고 몸으로 그린 그림이다. 그래서 작가의 그림은 그림을 읽기 위해 애써 노력할 필요가 없다. 저절로 와 닿아서 불현듯 공감을 일으키고 부지불식간에 정감을 파고들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있을, 혹 그새 전설처럼 아득해졌을지도 모를 저마다의 자기_타자를 추억처럼 되불러오고 있기 때문이다. ● 그렇게 그림으로 불러낸 사람들이 조금은 슬퍼 보이고 외로워 보이고 쓸쓸해 보인다. 저만의 방, 저만의 바다, 저만의 배, 저만의 창, 저만의 거울, 저만의 햇볕, 저만의 풍경 속에서 그가 세상 밖을 조심스레 내다본다. 그가 보는 세상은 예각으로 기우뚱한 벽에 기대고 선 사람처럼 불안정하고, 일엽편주에 몸을 실은 사람처럼 정처 없고, 몸 안쪽을 감싼 채 웅크리고 있는 사람처럼 막막하다. 적어도 외관상 보기에, 그는 표정이 없다. 붓질이 표정이고 색감이 표정이다. 몸짓이 표정이고 질감이 표정이다. 작가는 이처럼 몇 안 되는 색깔과 어눌한 묘사만으로 희한하게 온몸으로 표정을 밀어 올리는 그림을 그려놓고 있었다. ●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가 여럿 있지만, 그중 결정적인 경우가 연민이라고 생각한다. 존재에 대한 공감이다. 이런 공감이며 연민이 없으면 예술도 없다. 작가의 그림이 이런 존재론적 연민으로 물씬하고 뭉클하다. 덜 그린 듯 어눌한 듯 보는 이의 심금을 파고드는 그림이 감정적 유격(작게 흔들리다가 점차 크게 흔들어놓는)으로 인해 오히려 완전하다고 해야 할까.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를 작가적 텍스트와 독자적 텍스트로 구분한다. 그저 수동적 읽기를 수행하는 텍스트가 독자적 텍스트라고 한다면, 읽으면서 동시에 자꾸 쓰게 만드는, 독자이면서 동시에 작가를 요구해오는, 능동적 읽기를 요구해오는 텍스트 그러므로 열린 텍스트를 작가적 텍스트로 규정한다. 작가의 그림이 그렇다. 어눌한 붓질과 몇 안 되는 색감으로 이루어진 작가의 그림은 그러나 오히려 함축적이고 암시적이다.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미 결정된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하이데거의 세계 내 존재)의 자의식으로, 세상이 낯설고 자신마저 낯선 실존적 징후와 증상(자기소외와 부조리의식)으로, 그럼에도 자기를, 자기_타자를, 타자를, 세계를 감싸 안는 존재론적 연민으로 공감을 얻고 보편성을 얻는다. ■ 고충환

 

최인호_해질녘_패널에 아크릴채색, 재_Φ 80cm_2022

어떤 날은 맑았고 어떤 날은 흐렸다. 내 마음대로 예외없이 그랬다. ● 대부분 흐린 날이 좋았다. 그런 날은 내가 살아있는 것 같고 '전기에 감전된 듯' 일상을 뛰어 넘을 수 있었다. ● 이번 전시는 이런 날에 만들어진 작업들이며 제목을 『달빛에 물들다』로 정한다. (2022. 2. 12 가평, 제령리 작업장에서) ■ 최인호

 

 

Vol.20220310d | 최인호展 / CHOIINHO / 崔仁浩 / painting

관계의 경계

김은진展 / KIMEUNJIN/ 金恩瞋 / painting 

 

2021_0616 ▶ 2021_0622

 

김은진_가려진 숲_한지에 채색_80.3×130.3cm_202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인사동10길 22(경운동 64-17번지)

Tel. +82.(0)2.733.1045

www.grimson.co.kr

 

 

김은진의 회화-오묘하고 미묘한 숲  "자연을 통해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본다. 인간과 인간 간 관계의 오묘하고 미묘한 경계 지점은 어디일까. 인간과 인간이 서로 부딪히며 어울려 사는 관계 속에서 상대방에 대해 내가 알 수 있는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그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이처럼 구체적이지 않은 관계의 경계 지점에 대한 고민을 자연 이미지를 통해 표현해본다." (김은진) ● 숲에서 보면 하늘과 맞닿아있는 능선을 경계로 하나의 풍경이 둘로 나뉜다. 하늘을 배경으로 밝게 빛나는 부분과 능선 아래쪽의 어둑한 부분으로. 배경으로 하늘이 올려다보이는 부분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이, 나뭇잎에 난반사되는 빛의 희롱이 보일 만큼 섬세하다면, 능선 아래쪽에서 나뭇잎은 어둠의 일부로 스며든다. 그리고 그 속에 하늘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최소한의 밝은 기운을 품고 있는 어둑한 숲을 배경으로 시커먼 나무들만 보인다(가려진 숲). 그리고 무채색으로 그려져 관념적으로 보이는 곧추선, 어쩌면 앙상한 나무 몇 그루가 보인다(그들의 관계). 그리고 눈꽃으로 하얗게 빛나는 나무가(눈꽃), 하늘에 난반사된 빛 조각으로 수런거리는 숲이(시선), 마치 칠흑 같은 밤이 밀어 올린 듯 자기 본연의 빛으로 발광하는, 스스로 발광하는 숲이(어울림) 보인다.

 

 

김은진_그들의 관계_한지에 채색_145.5×97cm_2021

 

그렇게 작가가 보기에 숲은 가려져 보인다. 숲은 뭘 가리는가. 그러므로 뭘 숨기는가. 아니면 뭘 자기 속에 품는가. 나뭇잎의 섬세한 떨림을 가리고, 바람을 숨기고, 빛의 희미한 기미를 품는다. 그것들이 서로 어우러져 숲을 일구는 것이지만, 그 관계를 측량할 수도, 그 경계를 가름할 수도 없다. 숲을 볼 때(시선), 숲도 나를 본다(응시). 그렇게 나를 볼 때, 숲은 사물 인격체가 된다. 어쩌면 나에게서 건너간, 내가 부여해준, 그러므로 내가 투사된, 다시 그러므로 전적으로 나에게 일어난 일일지도 모르지만, 나를 보는 숲은 타자가 된다. 타자가 된 숲? 타자로서의 숲? 그렇게 숲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처럼도 보이고, 나를 밀어내는 것처럼도 보인다. 친근하게도 보이고, 낯설게도 보인다. 과연 나는 그 관계를, 그 경계를, 그 이유를, 그 차이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 보통 자연은 치유와 위로의 대상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그게 전부인가. 그것은 어쩌면 인간 중심의 일방적인 생각일지도 모른다. 자연은 인간을 다만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고 했다. 인간을 비하하는 얘기가 아니라, 인간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얘기다. 인간과 상관이 없는 자연? 그것은 어쩌면 자연의 본성을 인정하는 일이며, 자연 본연의 자리로 되돌려놓는 일이다. 자연은 치유와 위로의 대상인 만큼이나, 낯선 타자이기도 한 것이다. 좀 과장해 말하자면 현대인은 자연을 상실했다. 이제 자연은 다만 풍문으로나 떠돌 뿐이다. 그렇게 현대인이 상실한 자연은 사실은 자연의 본성 그러므로 타자성을 상실한 것이다. 결국 상실된 자연의 타자성을 인정하고 복구하는 일이 과제로 남는다. 인식의 문제다. 발터 벤야민은 예술이 망가진 세상을 수선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 자체 망실된 자연의 인식을 바로잡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김은진_나무 달 사이_한지에 채색_162.2×112.1cm_2019

 

그렇게 작가는 시종 나무를 그리고 숲을 그렸다. 꽤 오랫동안 나무를 그리고 숲을 그렸지만 그리면 그릴수록 오히려 그만큼 더 실체를 붙잡을 수가 없다. 비유로 치자면 숲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오히려 숲의 실체에서 더 멀어지는 것만 같다. 숲속으로 너무 깊이 들어간 나머지 숲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해야 할까. 숲의 실체? 아마도 바람과 대기, 햇빛과 대기가 머금은 습윤한 기운, 헐벗었거나 물이 오른 나무와 나뭇잎, 낙엽이 썩어서 만들어진 흙과 하늘, 순간의 기분과 감정, 바이오리듬 그러므로 생체리듬과 특정의 관점이 그리고 여기에 시종 움직이면서 변화하는 운동성과 실제 혹은 내면에서 공명하는 소리가 어우러진 상호작용의 결과물인 유기적인 화합물 비슷한 것이 될 것이다. ● 그렇다면 작가는 숲을 그리면서 아마도 숲의 모든 것, 숲 자체, 그러므로 어쩌면 숲에서 결정적이랄 수 있는 그 상호작용을 붙잡는 데 실패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사실은 오히려 정반대다. 대개 한가지 소재에 집중한다는 것은 최소한 그것에 관한 한 익숙해지고 길들여진다는 것이다. 무엇을 생략하고 무엇을 강조할 것인지 정하고 가린다는 것이다. 아마도 작가에게는 그 과정이 없다. 익숙해진다는 것, 길들여진다는 것, 생략한다는 것, 강조한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실재를 왜곡하는 것이고 어쩔 수 없이 실재와는 다른 무엇, 다만 실재와 상당하게 비슷해 보이는 무엇, 다시 그러므로 어쩌면 이미 숲이 아닌 무엇을 그려놓고야 만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는 일이다.

 

 

김은진_눈 꽃_삼베에 채색_100×100cm_2021

 

숲에 어떻게 익숙해지는가. 숲 그리기에 어떻게 길들여질 수가 있는가. 실재는 결코 붙잡을 수도 가닿을 수도 없는 일이다. 다만 파고들 수 있을 뿐. 그러므로 숲은, 실재는 꼭 그렇게 파고든 만큼만 자기를 내어줄 뿐이다. 그러니 더 많이 파고들 수밖에. 더 깊게 천착할 수밖에. 그러므로 어쩌면 더 자주 헤맬 수밖에. 매번 새롭고 순간순간 다른 실재를 그리는(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재현마저 넘어선), 그리고 그 실재에 가닿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파고드는 것, 파고들면서 자발적으로 헤매는 것, 그것도 매번 그렇게 하는 것 말고는 없다. 그런 연후에라야 관성적인 그리기에서 벗어날 수 있고, 관념적이고 관습적인 그리기를 넘어설 수 있다. 매번 변하고 순간순간 다른 것을 비로소 그릴 수 있는 일이다. ● 꽤 오랫동안 나무와 숲 그리기에 집중해온 그동안 작가의 그리기를 보면 적어도 이러한 헤매면서 그리기에 성공하고 있는 것 같고, 이로부터 점차 작가만의 그러므로 어쩌면 숲 고유의 아우라가 점차 그 속살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종래에는 내가 숲이 되고 숲이 내가 되는, 나와 숲 사이에 우주적 살로 채워져 있어서 자신과 숲을 주와 객으로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비로소 이를지도 모를 일이다.

 

 

김은진_시선_삼베에 채색_50×50cm_2021

 

상징주의도 그렇지만, 낭만주의에서 풍경은 상징이었다. 폐허의 상징이고, 시간의 상징이고, 향수의 상징이고, 내세의 상징이고, 죽음의 상징이었다. 죽음으로 삶을 넘어서는 상징이 아니라면, 풍경 자체로는 의미가 없었다. 그 상징의 종류에 차이가 있지만, 동양에서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이를테면 무릉도원과 무위자연, 물아일체와 소요유가 그렇다. 모든 그림은 일종의 자기표현의 한 형식일 수 있다. 그러므로 어쩌면 자화상이 변주되고 변형된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 그렇다면 작가에게 숲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그러므로 작가의 어떤 인격을 대리하는가. 작가에게 숲은 가려져 있다. 파고들면 들수록 더 깊이 가려져서 마침내 자기 속에서 길을 잃게 만든다. 그렇게 숲을 일구는 구성 요소들의 관계를 측량할 수도 그 경계를 가름할 수도 없다. 여기서 작가는 자연과 자연과의 관계를 넘어 인간과 인간 간 관계를 본다. 그래서 주제도 관계의 경계다. 관계가 성립하려면 나와 네가 있어야 하고, 주와 객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처럼 나와 너의 관계는 전제고 존재론적 조건인 만큼 피할 수가 없지만 도무지 그 관계를 측량할 수도 그 경계를 가름할 수도 없다. 숲이 양가적인 만큼이나 인간 간 관계도 그럴 것이다. 숲이 자기 속에서 길을 잃게 만드는 것처럼 인간관계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숲이 자기 속살을 내어주어 품듯 인간관계도 속내를 보여줄 것이다. ● 어쩌면 작가가 보기에 인간관계만큼이나 어려운 일도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숲이 자기를 내어주지 않는 만큼이나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관성적인 관계에 자기를 내어주지 않고, 관념적이고 관습적인 관계에 타협하지 않는 일이다. 작가 스스로 인간관계가 오묘하고 미묘하다고 했다. 숲이 꼭 그럴 것이다. ■ 고충환

 

 

Vol.20210616f | 김은진展 / KIMEUNJIN/ 金恩瞋 / painting

행복했던 시간들...

조성휘展 / CHOSUNGHUI / 趙星彙 / painting 

2019_0515 ▶︎ 2019_0521

조성휘_사람의 모습 중에서_145×112cm_1984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조성휘 블로그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9_0515_수요일_05:30pm

기획 / 선생님을 기억하는 동양중학교 제자들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41-1 5층

Tel. +82.(0)2.736.9365

www.insaartcenter.com



실존주의적 자의식을 통해 본 인간, 동물성, 욕망, 그러므로 존재 - 시대적 징후와 증상 ● 졸업을 하고 「표상 83」이라는 그룹을 만들었다. 아무도 그렇게 그리자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런 그림을 배우지도 않았지만 그런 그림을 그렸다. 놀랍게도 모두 인간에 대해, 삶에 대해, 시대에 대해 발언하고 있었다. 풍자하고 있었다. 조성휘는 불상과 탱화를 모티브로 한 「사람의 모습 중에서」 시리즈로 자신을 알려나갔다. 결국은 모두가 자화상인 다양한 부처의 표정이 마치 천불상을 그린 탱화처럼 화면을 가득 채우는 그림이었다. 나도 조성휘를 대표하는 작품들로 기억하고, 조성휘의 작품들 중에서도 귀중한 작품들이라고 생각한다. 민중미술이라는 조직적 운동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지만, 그들과 우리의 생각이 크게 다르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장명규, 조성휘를 추억하며. 2018.12) 



조성휘_사람의 모습 중에서_145×112cm_1984


국내적으로 1980년대는 현실참여를 표방하는 민중미술과 모노크롬과 추상으로 대변되는 제도권미술의 이념대립이 첨예했던 시대다. 이 시기에 민중미술에도 제도권미술에도 속하지 않는 일군의 경향과 작가들이 있었고, 조성휘는 그 작가군에 속했다. 그러면서도 종래에는 어떤 작가군에도 속하지 않는 자기만의 독특한 형식을 열었다. 민중미술과는 다른 것이었지만, 포괄적 의미의 형상 혹은 신형상미술로 범주화할 수 있는 것이었다. 현실참여가 주체와 외계가 직접 대면하고 충돌하는 사회적 장이라고 한다면, 작가의 그림은 외계현상을 자기 내면으로 불러들여 내재화한, 그리고 그렇게 내재화된 현상이 속에서 파열하면서 자기언어를 얻는 실존주의에 가까운 것이었다.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조건에 가까운 것이었다. 억압적인 현실과 분열적인 자기가 긴밀하게 맞물리면서 서로 반영하고 강화하는, 그런 그림이었다. 처음엔 현실인식으로부터 그리고 이후 점차 실존적 조건이라는 보편적이고 주관적이고 존재론적인 층위에로 옮아가고 심화되는, 그런 그림이었다. 인간실존과 삶의 질에 대한 보편적 현실인식에 연동되고 견인된 것이란 점에서 보면 차라리 객관적인, 그런 그림이었다. 




조성휘_사람의 모습 중에서_106×91cm_1989

이를테면 네거티브와 역광 같은 광선 혹은 조명을 심리적이고 내면적인 효과를 불러내고 극화하기 위한 미학적 장치로 사용하는, 그런 그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내면으로부터 발원한 기로 자기 주변에 방벽을 쌓거나 사악한 기운을 떨쳐내는 사람, 더러 무덤(아니면 폐허? 어둠 자체?)에서 걸어 나오거나 관을 깨고 나오는 사람과 같은 시대적 징후를 암시하는 알레고리와도 같은, 그런 그림이었다. 그에게 시대는 때론 중얼거리고, 분노하며, 냉소적이고, 절망에 찬 증상을 온몸으로 앓는 것이었고, 그렇게 앓으면서 내뱉는, 차라리 속으로 삼키면서 웅얼거리는 화술이 우회하면서 아우르는, 그리고 그렇게 심부를 파고드는 알레고리의 화법과도 통하는 것이었다. 그 자체 이미 알레고리인 암흑시대를 인간의 실존적이고 보편적인 삶의 조건을 반영하는 거울로 본, 정치적 현실을 인간실존을 비추는 거울로 본, 그런 그림을 그렸다. 실존적 인간에게 모든 시대는 암흑시대다. 그러므로 암흑 자체는 환경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 자의식에 속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 그림이, 내적으로 응축되고 속에서 파열하는, 그래서 외부적으론 다만 정적으로 보일 뿐인 그림이 「사람의 모습 중에서」라는 주관적인 자의식으로 표출되고 보편적인 주제의식으로 승화된 것이었다



조성휘_사람의 모습 중에서_140×70cm_1990


얼굴과 머리 ● 얼굴을 해체해 그 밑에 숨겨진 머리가 솟아나도록 하거나 다시 찾는...얼굴을 분해하고 지우면서 그 대신 머리가 솟아나게 하는...얼굴 없는 머리...인간의 머리가 동물에 의해 대체되는...인간인지 동물인지 구분할 수 없고 명확히 할 수 없는 영역...인간이 동물이 되는...신체적인 숨결이고 동물적인 것...고통 받는 모든 인간은 고기다. 고기는 인간과 동물의 공통 영역이고 그들 사이를 구분할 수 없는 영역이다. 비구분의 영역인 것. 고통 받는 인간은 동물이고, 고통 받는 동물은 인간이다. 인간과 동물의 객관적인 비결정의 영역...때로 몸 전체가 머리로 대체되는...입은 더 이상 특수한 기관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몸이 빠져나가고 살이 흘러내리는 구멍이다(질 들뢰즈, 감각의 논리) 



조성휘_사람의 모습 중에서_162×130cm_1992



그리고 작가의 그림에 부처와 불화가 들어온다. 만다라와 단청이 차용되고, 조사상과 금강역사가 재해석되면서 작가의 그림은 전기를 맞는다. 대략 1990년대 들어서의 일이다. 그리고 여기에 마치 뭉게구름 같이 몽실몽실한 얼굴들, 근육들, 흐르는 신체, 이행 중인 신체, 비결정적인 신체, 뭉개진 신체가 중첩되고 병치된다. 현실상황 그러므로 어쩜 실존상황과 전통불화가 하나의 화면 속에 오버랩 된다. 그렇게 오버랩 된 화면이 어떤 잠정적인 움직임이며 운동성을 암시한다. 평면적으로 처리된 부분과 묘사부분이 대비되는, 그리고 그 위에 드로잉 같은 선이 흐르는, 그리고 그렇게 구획된 화면이 화면 내에 인위적으로 구축된 어떤 공간을 암시하는, 아마도 내면적이고 심리적인 공간을 암시하는, 심리적인 억압상태를 암시하는 마치 고립된 방과도 같은 추상공간을 떠올리게 만든다. 



조성휘_사람의 모습 중에서_150×150cm_1994



여기서 다시, 실존적 인간에게 모든 방(그리고 어쩜 모든 공간마저도)은 고립을 의미하고 추상적 공간이 된다. 그러므로 고립 자체는 심리적인 것이지만, 그러나 이때의 고립은 동시에 방으로 추상화되고 객관화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추상화된 현실, 그러므로 어쩜 창출된 현실, 자족적인 현실을 통해 현실을 본다. 그 현실, 그 현실인식이 이해할 수 없는 낯선 세계에 내던져진 소외의식(하이데거)을 상기시키고, 스스로에게마저 낯선 자기소외(이방인의식)를 상기시키고, 억압된 것들의 귀환(프로이트)을 상기시키고, 억압적인 현실과 무의식적 현실의 돌발적인 출현, 실재계의 예기치 못한 출현(자크 라캉)을 상기시키고, 인간내면의 또 다른 실재를 인정한 카니발과 그로테스크리얼리즘(미하일 바흐친)을 상기시킨다. ● 그리고 특히 뭉개진 얼굴이 지워진 얼굴 뒤편으로 동물성이 드러나 보이는 프랜시스 베이컨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여기에 베이컨에 대한 질 들뢰즈의 분석, 특히 얼굴과 머리의 비교분석 부분은 마치 미지의 작가를 위해 예비해놓은 것만 같다. 얼굴은 가면이다. 페르소나다. 사회적 신분이며 제도적 인격이, 그리고 요새로 치자면 정치적 권력이 표정으로 그리고 기호로 상영되는 스크린이다. 인간이 제도화되고 사회화되고 문명화되면서 제도에 사회에 문명에 걸맞게 길들여지고 틀 화된 표면이다. 그 표면 밑에 길들여지지도 틀 화되지도 않은 자기가 억압되는데, 그렇게 억압된 자기가 머리다. 그렇게 억압된 탓에 너는 나를 결코 본 적이 없고 볼 수도 없다. 그러므로 알 수도 없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마저도 그렇다. 



조성휘_사람의 모습 중에서_50×50cm_1994



그게 뭔가. 동물성이다. 고기로 환원된 고통이고 육화된 고통이다. 고통의 몸이다. 야성이고 야생이다. 본성이고 천성이다. 숨결이고 생기다. 주술이고 신비다. 결핍이고 잉여다. 미처 언어화되지 못한 침묵이고 웅얼거림이다. 차라리 의미 없는, 그러므로 사실은 의미들로 팽배한 침묵의 소리다. 이성의 이름으로 한 번도 호명된 적이 없는, 그러므로 심지어 자기 이름마저도 없는 타자다. 들뢰즈는 다시 찾아진다고 했는데, 그렇게 잃어버린 것들이다. 그렇게 작가는 얼굴을 지워 인간이 동물이 되는, 고기가 되는, 고통이 되는, 인간과 동물이, 고통과 고기가 경계 너머로 넘나들어지는 비구분의 영역, 비결정의 영역을 그렸다. ● 이로써 들뢰즈는 비록 「동물_되기」에 대해 말할 것이지만, 이는 그대로 작가의 그림에서 「부처_되기」로 환원해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는 인간과 동물이, 동물과 부처가, 부처와 인간이 경계 너머로 넘나들어지는 비결정성의 차원을 그렸다. 개념 이전의 실재차원 자체를 그리고, 의미 이전의 생성차원 자체를 그렸다. 여기서 프랜시스 베이컨은 사람들은 항상 이론에 의해 그림을 이해하지, 그림 그 자체로 그림을 평가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이론에 대한 불만과 한계를 지적한 것이지만, 그리고 이 글 또한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이론으로 작가의 그림을 덧칠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여하튼 작가는 이론 이전의 그림 자체를 그렸다. 이론에 의해 추동되고 견인되고 평가되는 그림이 아닌, 그림 자체가 현실이 되고 존재가 되는 그림, 그러므로 어쩜 매번 다른 읽기(흡사 롤랑 바르트의 작가적 텍스트에서와도 같은)를 강요해오는 그림을 그렸다.



조성휘_사랑잔치_145×112cm_2003



발랄한, 불온한, 건강한 에로티시즘 ● 제도적 사회에서 욕망은 억압된다. 출구를 찾을 수가 없다. 그 출구는 제도 밖에 있고 내면에 있다. 속에 있고 안에 있는 것, 은폐돼 있고 숨겨져 있는 것, 그렇게 그림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욕망의 운명이다. 제도에 의해 억압된 탓에 태생적으로 반제도적이고 반사회적이다. 욕망이 에너지가 되고 동력이 되는, 기능이 되고 변혁의 도구가 되는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건 억압된 탓에 실재보다 더 발랄하고 더 불온하고 더 에로틱하다. 억압이 실재를 부풀리고 상상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그렇게 억압된 욕망은 내면에서 화려하게 개화한다. 어쩜 프로이트가 승화라고 부르는 것일 수도 있겠다. 에로스와 타나토스, 삶의 충동과 죽음충동이 하나로 결합된 이율배반적인 그리고 자기모순적인 욕망의 개화라고도 볼 수가 있겠다. 작가는 그렇게 내면의 꽃밭에 만개한 꽃을 그렸다. 욕망을 표상하는 꽃을 그렸고, 욕망하는 꽃(핑크 프로이드의 벽에서 보는 것과 같은)을 그렸다. 2000년대 이후의 일이다. 



조성휘_사랑잔치_2003



작가는 이 일련의 그림들을 「사랑잔치」라고 부른다. 그동안 「사람의 모습 중에서」로 일관했던 주제가 처음으로 바뀌는 것인 만큼 또 다른 전기를 예비하고 있다. 사랑잔치답게 색채사용이 눈에 띠게 다채로워지고 색채감정이 풍부해졌다. 현란한 원색사용과 대비에 거침이 없어서 그런지 그림 자체는 식물을 그린 것이지만 보면 볼수록 살아서 꿈틀거리는 동물성이 엿보인다. 꽃과 동물, 식물과 동물, 에로티시즘과 동물, 욕망과 동물이 경계를 허물고 넘나들어지는, 그렇게 자유자재로 변태되면서 건강한 생명력으로 약동하는 꽃들의 환희를 보는 것 같고(사랑은 기쁘다), 선혈처럼 붉은 상처 위로 피어난 꽃들의 소리 없는 절규가 들리는 것도 같다(사랑은 때로 아프다). 때로 파란 하늘을, 더러 붉은 대지를 배경 삼아 부유하듯 그려진 꽃들은 꽃이면서 꽃이 아니다. 성적 메타포다. 욕망의 메타포다. 상처의 메타포다. 그리고 죽음의 사신이다. 동양의 경우 화무십일홍이 그렇고, 서양의 경우 바니타스 정물화가 그렇다. 그렇게 꿀이라도 바른 듯 번들거리는 입술 사이로 불쑥 내민 혀가 꽃잎을 희롱하고 꽃술을 희롱하고 꽃의 질을 희롱한다. 마치 욕망이 저 갈 길을 잘도 알아서 찾아가는 것 같은 분방한(아님 방자한?) 그림이 「쾌락의 정원」의 또 다른 버전을 보는 것 같다. 



조성휘_사랑잔치_150×150cm



그렇게 작가는 시대적 징후와 증상을 온몸으로 앓는 실존주의적 자의식을 그렸고, 머리 위로 솟아난 동물성(그러므로 어쩜 잃어버린 본성, 그리고 억압된 욕망)을 그렸고, 억압된 욕망의 발랄하고 불온하고 건강한 분출을 그렸다. 그 중에서도 작가의 대표작이랄 만한 불교도상과 실존상황을 결합한 일련의 그림들은 무속과 시대극을 결합한 박생광의 그림(이를테면 명성황후와 같은)에 비교할 만하다. 그렇게 비교되면서 또 다른 지점을 짚어내는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말년의 꽃그림은 꽃그림에 대한 선입견을 바꿔놓을 만큼의 기폭제가 될 수도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 고충환



Vol.20190515c | 조성휘展 / CHOSUNGHUI / 趙星彙 / painting










긋다

우종택展 / WOOJONGTAEK / 禹鍾澤 / painting

2014_0827 ▶ 2014_0902

 

우종택_시원(始原)의_기억_한지에 혼합재료_120×70cm_2014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40630a | 우종택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인사동 10길 22(경운동 64-17번지)

Tel. +82.2.733.1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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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종택의 작업-자연의 뼈, 사물의 골 ● 우종택의 근작은 전작과 통한다. 전작에서의 주제와 형식논리를 심화 발전시킨 것인데, 특히 주제 면에서 그렇다. 그렇다면 전작과 근작을 관통하는 주제는 무엇인가. 바로 시원의 기억이 그것이다. 기억을 더듬어 시원을 밝히는 것이다. 밝히는 것이다? 시원을 누가 밝힐 수 있는가. 시원을 밝힘의 대상이며 지식의 대상으로 가정하는 순간, 바로 자가당착에 빠진다. 존재에게 일어난 일(존재론적인 일)을, 그것도 존재보다 더 이전으로 소급되는 아득한 일을 지식을 매개로 어떻게 현재 위로 되불러올 수 있는가. ● 그러므로 시원에 관한한 지식이 아닌, 몸의 기억을 매개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시원의 기억이란 주제는 사실은 몸의 기억을 더듬어 시원을 현재 위로 되불러오는 행위랄 수 있겠고, 그렇게 호출된 또 다른 자기(어쩌면 까맣게 잊고 있었을 자기며 진정한 자기일지도 모를)와 만나지는 경험이랄 수 있겠고, 그렇게 존재가 거듭나지는 기획이랄 수 있겠다(진정한 자기와 대면하는데,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몸의 기억은 불완전하다(불완전하지만 정확하다. 아님 정곡을 찌른다). 몸의 기억에 관한한 지금껏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영원히 이성의 언어로 기술된 적이 없기 때문에 불완전 언어를 통해 겨우 기술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불완전언어로 치자면 시를 그 예로 들 수가 있겠고, 알다시피 예술은 불완전언어를 매개로 세계를 기술하는 기술이다. 그러므로 몸의 기억을 더듬어 시원을 되불러오는 작가의 기획은 예술의 본성과도 통한다. 작가의 사사로운 주제의식을 풀어내면서 예술의 됨됨이도 같이 푸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우종택_시원(始原)의_기억_한지에 혼합재료_120×70cm_2014

 

 

우종택_시원(始原)의_기억_한지에 혼합재료_120×70cm_2014
 

기억은 그렇다 치고, 시원은 무엇인가. 존재가 유래한 근원이 그것이다. 존재의 다른 이름인 삶이 유래한 근원이며 죽음이 그것이다. 그 의미론적인 스펙트럼을 확장시켜 보면 의미가 유래한 무의미가, 의식이 유래한 선의식 내지는 무의식이, 말이 유래한 침묵이, 코스모스가 유래한 카오스가, 문명이 유래한 자연이, 논리를 뛰어넘는 비약이, 그리고 원형으로 알려진 것이 그것이다. 존재라면 마땅히 끌리기 마련인 이유 없는 끌림이며 해명할 수 없는 끌림이다. 존재를 온통 사로잡아 삶을 뿌리 채 흔들어놓는, 삶을 갱신하는 천지개벽이다. 여기서 다시, 천지가 개벽하는 일은 과장이 아닌데, 자기의 존재(아님 존재 자체)와 만나지는 극적 순간으로 인해 새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여기서 다만, 감각적 질료로 구조화된 그리고 여기에 지식으로 코팅된 외면이 아닌, 내면을 향해 열리는 것이다. 고립된 자기를 향해 열리는 것이므로 공유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는, 천상천하유아독존 아님 우주를 떠도는 미아와 같은 철저한 고독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뭐, 일어나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그리고 그렇게 정작 삶을 사는 데는 아무런 지장도 없지만). ● 그렇다면 이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서 현상학적 에포케가 도움이 되겠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타자가 가르쳐준 것이다. 나는 타자를 경유해서만 나를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타자는 무엇인가. 바로, 지식이다. 그래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타자가 없다고 가정해보고, 지식을 모른다고 가정해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규정되기 이전의 나, 명명되기 이전의 나에 맞닥트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와 더불어서 맞닥트려지는 것이 원형이고, 비논리고, 자연이고, 카오스고, 침묵이고, 무의식이고, 무의미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음이다. 마치 자궁 속에 웅크리고 있는 태아처럼 죽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침묵과 선의식 속에 잠자고 있는 나와 맞닥트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원의 기억이란 작가의 주제며 기획은 바로 그런, 삶의 원인으로서의 죽음에로, 그리고 그 죽음 뒤편에로 자기를 소급시키는 퇴행적 과정이며 존재론적 반성일 수 있겠다.

 

우종택_시원(始原)의_기억_한지에 혼합재료_120×70cm_2014

 

우종택_시원(始原)의_기억_한지에 혼합재료_235×163cm_2014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평면과 설치를 통 털어 작가의 근작 그 어디에도 정작 죽음은 보이지가 않는다. 그렇다면 기억을 더듬어 시원을 역추적 한다는, 그리고 이때의 시원은 존재의 원형이며 삶의 원인으로서의 죽음, 그러므로 궁극적으론 삶을 갱신하는 계기로서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작가의 기획은 어떻게 된 일인가. 차차 밝혀지겠지만 그 기획은 상대적으로 암시적인 형식을 취한다. ● 상대적으로? 같은 주제를 다룬 전작에선 근작에 비해 죽음의 메타포가 또렷한 편이었다. 망자에 동행하는 꼭두인형이 그랬고, 죽은 나무에 꽃이 피는 환생의 의미가 그랬고, 항아리를 매개로 무한 순환하는 존재가 그랬다(여기서 항아리는 태항아리와 옹관묘로 나타난 독무덤 사이를,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한 순환한다). 이처럼 죽음의 서사가 두드러져 보이는 전작에서 죽음이 메타포의 형식을 띤다면, 상대적으로 죽음의 서사가 잠수타고 있는 근작에서 죽음은 알레고리의 형식을 취한다고, 그리고 이때의 알레고리는 정작 죽음 자체보다는 삶 그러므로 존재의 비의를 밝히는데 그 초점이 맞춰진 경우라고 볼 수가 있겠다. 말이 나온 김에 말하자면, 전작과 근작에서의 죽음은 각각 치렁치렁한 색동천을 매달고 있는 신목에서와 같은 컬러풀하고 알록달록한 색깔로 치장한 경우와 칙칙한 무채색을 덧입은 경우로, 외향적인 경우와 내면화의 경향이 강화된 경우로, 한바탕 굿거리장단과 살풀이를 통한 승화와 자기반성적인 경향이 강조된 경우로 차별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죽음의 의미가 달라지기라도 한 것일까.

 

우종택_시원(始原)의_기억_한지에 혼합재료_163×235cm_2014
 

메타포든 알레고리든 죽음의 의미는 잠시 접어두고, 그림 자체를 보고 설치 자체를 보자. 칠흑 같은 먹색과 설핏 흰 기미를 머금은 회색 사이의 색채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는, 질질 흘리고 쳐 바른 분방한 붓놀림이 역력해 보이는, 다만 화면 위로 붓질이 가로지르면서 남긴 무분별한 흔적과 비정형의 얼룩만이 무성한 작가의 그림은 한눈에도 추상표현주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추상표현주의 그림과 다른 점이 있다면 흔히 그렇듯 컬러풀한 대신 철저하게 무채색으로 채색돼 활달하고 분방한 에너지와 함께 무겁게 가라앉는 느낌과 인상이 이율배반적이고 자연스럽게 결합되고 있는 점이다. 분출하면서 자기를 실현하는 에너지의 운동성과 내면을 파고드는 운동성이, 원심력과 구심력이 하나의 화면 속에 공존하면서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킨다고나 할까. ● 그렇다면 이처럼 그림을 극적 긴장감으로 몰아가고 있는 분방한 붓질은 무엇인가. 서양화의 논법으로 치자면 드로잉이 되겠고, 한국화의 문법으로 따지자면 준이며 필, 획이며 선에 해당하겠다. 다시, 서양화의 논법으로 치자면 추상표현주의와 드로잉의 결합이 되겠고, 한국화의 논법으로 따지자면 자연이며 존재로부터 찾아낸 선, 존재를 환원하고 축약한 획,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정적이고 고정된 실체로서보다는 항상적으로 이행하고 순환하고 변화하는 존재의 운동성을 포착하고 포획한 필을 그린 그림으로 볼 수가 있겠다.

 

우종택_시원(始原)의_기억_한지에 혼합재료_120×70cm_2014

 

우종택_시원(始原)의 기억_한지에 혼합재료_120×70cm_2014
 

다시, 그렇다면 이처럼 하나의 선속에 존재를 거두어들이는 필이며 준이며 획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 개별존재의 됨됨이를 따라 그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개별존재의 원인에 해당할 그 무엇을 감으로 그린 것이고 몸으로 그린 것이다. 무슨 말인가. 아리스토델레스는 자연과 자연성을 구분했고, 하이데거는 존재자와 존재 혹은 존재 자체를 차별했다. 각각 감각적 질료와 형태를 그 밑바닥에 면면히 흐르는 원인과, 개별 존재자와 그 원인에 해당할 에너지를, 형태를 덧입은 양과 그 자체로는 비가시적인 음을, 그리고 작가의 경우를 대입해보자면 삶과 그 원인에 해당할 죽음을 각각 구별하고 차별한 경우로 보면 되겠다. 주제도 그렇거니와 분출하면서 침잠하는 이율배반적인 무채색과 붓질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선속에 존재를 거두어들여 그린 그림이고, 자연에서 찾아낸 존재의 뼈며 사물의 골을 그린 그림이고, 존재에 면면히 흐르는 기의 흐름이며 에너지의 방출을 그린 그림이고, 존재의 순간포착이 아닌 항상적으로 이행중인 존재의 운동성을 그린 그림이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삶의 원인으로서의 죽음의 생명력을 그린 그림이다. 죽음이 삶의 원인이라면, 죽음은 동시에 삶을 살게 하는 에너지이어야 마땅하고, 그 마땅한 존재의 원리며 이유를 그린 그림이다.

 

우종택_시원(始原)의 기억_한지에 혼합재료_235×380cm_2014
 

작가의 그림은 개별존재의 원인을 감으로 그린 것이고 몸으로 그린 것이라고 했다. 무슨 의미인가. 추상표현주의는 다르게는 액션페인팅이라고도 한다. 액션페인팅? 이는 분명, 몸 그림이란 의미가 아닌가. 다시, 몸 그림은 무슨 의미인가. 의식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는 말이다. 의식으로 그린 그림이 캔버스와 나, 대상과 나 사이에 일정한 거리두기(다르게는 미적거리 내지는 심적 거리로도 명명되는)를 견지한 것임에 반해, 몸이 그린 그림에선 이런 거리두기가 없다. 다이렉트로 캔버스에 육박해 들어가고, 대상에 육박해 들어간다. 작가의 경우에 그렇게 육박해 들어가는 대상은 자연이고 사물이며, 존재이고 죽음이다. 대상과의 어떠한 최소한의 거리도 없으므로 의식이 간여할 사이가 없고 틈새가 없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면서 정작 뭘 그리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그리는지도 모른다. 다만, 몸이 알뿐(몸의 기억은 불완전하지만 정확하고 정곡을 찌른다는 말을 상기할 일이다). ● 그렇다면 이렇듯 무지한 그림에는 무슨 논리를 뛰어넘는 비약이라도, 아님 의미심장한 의미라도 있는 것일까. 내가 그리면서 뭘 그리고 어떻게 그리는지 모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주와 객이 허물어지고 대상과 내가 합체된다는 것이다. 거리가 없어서도 그렇고, 의식이 없어서도 그렇고, 내가 이미 대상의 일부여서도 그렇다. 존재는 이미 자연의 일부이며, 삶은 진즉에 죽음의 한 부분이었다. 다시, 무슨 의미인가. 존재의 토포스(존재론적 위상학)를 무지와 무아의 차원으로 옮겨놓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무지와 무아의 상태며 내가 지워진 상태에서 작가는 다만 자연이 부르는 죽음의 무도를 추고 있었고, 그러므로 삶의 무도를 온몸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여기서 무지와 무아의 상태에서 그리고, 온몸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말에 기죽을 일은 아니라고 본다. 감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말을 풀어 본 것에 지나지 않을뿐더러, 작가의 그림은 실제로 그 차원이며 경지를 열어 보이고 있는 것일 뿐. 그러므로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퍼포먼스에는 무당이 있고, 무속이 있고, 무법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자연의 뼈를 발라내고 있었고, 사물의 골을 추출해내고 있었다.

 

우종택_묻다_2014
 

작가는 칠흑 같이 검은 먹을 얻기 위해 일종의 연금술을 부린다. 먹과 숯가루를 송진 덩어리와 함께 끓여내 점착성이 강한, 부분적으로 까슬까슬한 숯 알갱이가 손끝에 감촉돼오는, 반복해서 덧칠하면 번쩍번쩍한 금속성의 표면질감이 감지되는 새까만 먹색을 얻는다. 종이에 스며든 먹색과 표면에서 번쩍거리는 광물성의 질감이 어우러지고, 여기에 젯소를 혼합한 회흑색의 붓질이 중첩되면서 마치 어둠 자체로부터 존재가 생성되는 것 같은, 잠재된 존재가 용트림하는 것 같은 극적 순간을 보는 것 같다. 이런 평면과 함께, 작가는 전시장에다 아름드리 나무둥치들을 여기저기 흩어놓았다. 그리고 그 나무둥치들에 새까만 먹색을 칠했다. 전에는 알록달록한 색깔들을 흩뿌려 죽은 나뭇가지에서 꽃을 피웠었다. 마치 성수를 뿌리듯 피를 흩뿌려 재생의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이처럼 전작에서 죽은 나뭇가지를 되살려냈다면, 그리고 그렇게 재생의 의미를 강조했었다면, 근작에선 죽음 자체를 드러낸다. 꽃을 피워 재생되기 이전의 상태며 삶 이전의 상태에 직면케 한다. 말이 죽고, 언어가 죽고, 의미가 죽은, 다만 잠재하면서 생성하는 존재의 운동성만이 가득한 친근하면서도 낯 설은 차원에로 이끈다. 인식으로 치자면 낯설고(죽음은 인식론적 대상이 아니다), 몸이 기억하는 것으로 치자면 친근한 이율배반적인 경지에로 이끈다. 그렇게 새까만 먹색으로부터 죽음이 보이고, 심연이 보이고, 우주가 보이는가. ● 다시, 죽음은 삶의 원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죽음은 삶을 살게 하는 에너지이어야 마땅하다. 그렇게 작가는 죽음이 잠재하고 있는 기운을, 사실은 삶이 내뿜는 에너지를 전시장에 온통 부려놓고 있었다. ■ 고충환

 

 

Vol.20140827b | 우종택展 / WOOJONGTAEK / 禹鍾澤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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