긋다

우종택展 / WOOJONGTAEK / 禹鍾澤 / painting

2014_0827 ▶ 2014_0902

 

우종택_시원(始原)의_기억_한지에 혼합재료_120×70cm_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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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인사동 10길 22(경운동 64-17번지)

Tel. +82.2.733.1045~6

www.grimson.co.kr

 

우종택의 작업-자연의 뼈, 사물의 골 ● 우종택의 근작은 전작과 통한다. 전작에서의 주제와 형식논리를 심화 발전시킨 것인데, 특히 주제 면에서 그렇다. 그렇다면 전작과 근작을 관통하는 주제는 무엇인가. 바로 시원의 기억이 그것이다. 기억을 더듬어 시원을 밝히는 것이다. 밝히는 것이다? 시원을 누가 밝힐 수 있는가. 시원을 밝힘의 대상이며 지식의 대상으로 가정하는 순간, 바로 자가당착에 빠진다. 존재에게 일어난 일(존재론적인 일)을, 그것도 존재보다 더 이전으로 소급되는 아득한 일을 지식을 매개로 어떻게 현재 위로 되불러올 수 있는가. ● 그러므로 시원에 관한한 지식이 아닌, 몸의 기억을 매개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시원의 기억이란 주제는 사실은 몸의 기억을 더듬어 시원을 현재 위로 되불러오는 행위랄 수 있겠고, 그렇게 호출된 또 다른 자기(어쩌면 까맣게 잊고 있었을 자기며 진정한 자기일지도 모를)와 만나지는 경험이랄 수 있겠고, 그렇게 존재가 거듭나지는 기획이랄 수 있겠다(진정한 자기와 대면하는데,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몸의 기억은 불완전하다(불완전하지만 정확하다. 아님 정곡을 찌른다). 몸의 기억에 관한한 지금껏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영원히 이성의 언어로 기술된 적이 없기 때문에 불완전 언어를 통해 겨우 기술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불완전언어로 치자면 시를 그 예로 들 수가 있겠고, 알다시피 예술은 불완전언어를 매개로 세계를 기술하는 기술이다. 그러므로 몸의 기억을 더듬어 시원을 되불러오는 작가의 기획은 예술의 본성과도 통한다. 작가의 사사로운 주제의식을 풀어내면서 예술의 됨됨이도 같이 푸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우종택_시원(始原)의_기억_한지에 혼합재료_120×70cm_2014

 

 

우종택_시원(始原)의_기억_한지에 혼합재료_120×70cm_2014
 

기억은 그렇다 치고, 시원은 무엇인가. 존재가 유래한 근원이 그것이다. 존재의 다른 이름인 삶이 유래한 근원이며 죽음이 그것이다. 그 의미론적인 스펙트럼을 확장시켜 보면 의미가 유래한 무의미가, 의식이 유래한 선의식 내지는 무의식이, 말이 유래한 침묵이, 코스모스가 유래한 카오스가, 문명이 유래한 자연이, 논리를 뛰어넘는 비약이, 그리고 원형으로 알려진 것이 그것이다. 존재라면 마땅히 끌리기 마련인 이유 없는 끌림이며 해명할 수 없는 끌림이다. 존재를 온통 사로잡아 삶을 뿌리 채 흔들어놓는, 삶을 갱신하는 천지개벽이다. 여기서 다시, 천지가 개벽하는 일은 과장이 아닌데, 자기의 존재(아님 존재 자체)와 만나지는 극적 순간으로 인해 새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여기서 다만, 감각적 질료로 구조화된 그리고 여기에 지식으로 코팅된 외면이 아닌, 내면을 향해 열리는 것이다. 고립된 자기를 향해 열리는 것이므로 공유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는, 천상천하유아독존 아님 우주를 떠도는 미아와 같은 철저한 고독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뭐, 일어나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그리고 그렇게 정작 삶을 사는 데는 아무런 지장도 없지만). ● 그렇다면 이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서 현상학적 에포케가 도움이 되겠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타자가 가르쳐준 것이다. 나는 타자를 경유해서만 나를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타자는 무엇인가. 바로, 지식이다. 그래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타자가 없다고 가정해보고, 지식을 모른다고 가정해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규정되기 이전의 나, 명명되기 이전의 나에 맞닥트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와 더불어서 맞닥트려지는 것이 원형이고, 비논리고, 자연이고, 카오스고, 침묵이고, 무의식이고, 무의미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음이다. 마치 자궁 속에 웅크리고 있는 태아처럼 죽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침묵과 선의식 속에 잠자고 있는 나와 맞닥트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원의 기억이란 작가의 주제며 기획은 바로 그런, 삶의 원인으로서의 죽음에로, 그리고 그 죽음 뒤편에로 자기를 소급시키는 퇴행적 과정이며 존재론적 반성일 수 있겠다.

 

우종택_시원(始原)의_기억_한지에 혼합재료_120×70cm_2014

 

우종택_시원(始原)의_기억_한지에 혼합재료_235×163cm_2014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평면과 설치를 통 털어 작가의 근작 그 어디에도 정작 죽음은 보이지가 않는다. 그렇다면 기억을 더듬어 시원을 역추적 한다는, 그리고 이때의 시원은 존재의 원형이며 삶의 원인으로서의 죽음, 그러므로 궁극적으론 삶을 갱신하는 계기로서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작가의 기획은 어떻게 된 일인가. 차차 밝혀지겠지만 그 기획은 상대적으로 암시적인 형식을 취한다. ● 상대적으로? 같은 주제를 다룬 전작에선 근작에 비해 죽음의 메타포가 또렷한 편이었다. 망자에 동행하는 꼭두인형이 그랬고, 죽은 나무에 꽃이 피는 환생의 의미가 그랬고, 항아리를 매개로 무한 순환하는 존재가 그랬다(여기서 항아리는 태항아리와 옹관묘로 나타난 독무덤 사이를,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한 순환한다). 이처럼 죽음의 서사가 두드러져 보이는 전작에서 죽음이 메타포의 형식을 띤다면, 상대적으로 죽음의 서사가 잠수타고 있는 근작에서 죽음은 알레고리의 형식을 취한다고, 그리고 이때의 알레고리는 정작 죽음 자체보다는 삶 그러므로 존재의 비의를 밝히는데 그 초점이 맞춰진 경우라고 볼 수가 있겠다. 말이 나온 김에 말하자면, 전작과 근작에서의 죽음은 각각 치렁치렁한 색동천을 매달고 있는 신목에서와 같은 컬러풀하고 알록달록한 색깔로 치장한 경우와 칙칙한 무채색을 덧입은 경우로, 외향적인 경우와 내면화의 경향이 강화된 경우로, 한바탕 굿거리장단과 살풀이를 통한 승화와 자기반성적인 경향이 강조된 경우로 차별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죽음의 의미가 달라지기라도 한 것일까.

 

우종택_시원(始原)의_기억_한지에 혼합재료_163×235cm_2014
 

메타포든 알레고리든 죽음의 의미는 잠시 접어두고, 그림 자체를 보고 설치 자체를 보자. 칠흑 같은 먹색과 설핏 흰 기미를 머금은 회색 사이의 색채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는, 질질 흘리고 쳐 바른 분방한 붓놀림이 역력해 보이는, 다만 화면 위로 붓질이 가로지르면서 남긴 무분별한 흔적과 비정형의 얼룩만이 무성한 작가의 그림은 한눈에도 추상표현주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추상표현주의 그림과 다른 점이 있다면 흔히 그렇듯 컬러풀한 대신 철저하게 무채색으로 채색돼 활달하고 분방한 에너지와 함께 무겁게 가라앉는 느낌과 인상이 이율배반적이고 자연스럽게 결합되고 있는 점이다. 분출하면서 자기를 실현하는 에너지의 운동성과 내면을 파고드는 운동성이, 원심력과 구심력이 하나의 화면 속에 공존하면서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킨다고나 할까. ● 그렇다면 이처럼 그림을 극적 긴장감으로 몰아가고 있는 분방한 붓질은 무엇인가. 서양화의 논법으로 치자면 드로잉이 되겠고, 한국화의 문법으로 따지자면 준이며 필, 획이며 선에 해당하겠다. 다시, 서양화의 논법으로 치자면 추상표현주의와 드로잉의 결합이 되겠고, 한국화의 논법으로 따지자면 자연이며 존재로부터 찾아낸 선, 존재를 환원하고 축약한 획,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정적이고 고정된 실체로서보다는 항상적으로 이행하고 순환하고 변화하는 존재의 운동성을 포착하고 포획한 필을 그린 그림으로 볼 수가 있겠다.

 

우종택_시원(始原)의_기억_한지에 혼합재료_120×70cm_2014

 

우종택_시원(始原)의 기억_한지에 혼합재료_120×70cm_2014
 

다시, 그렇다면 이처럼 하나의 선속에 존재를 거두어들이는 필이며 준이며 획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 개별존재의 됨됨이를 따라 그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개별존재의 원인에 해당할 그 무엇을 감으로 그린 것이고 몸으로 그린 것이다. 무슨 말인가. 아리스토델레스는 자연과 자연성을 구분했고, 하이데거는 존재자와 존재 혹은 존재 자체를 차별했다. 각각 감각적 질료와 형태를 그 밑바닥에 면면히 흐르는 원인과, 개별 존재자와 그 원인에 해당할 에너지를, 형태를 덧입은 양과 그 자체로는 비가시적인 음을, 그리고 작가의 경우를 대입해보자면 삶과 그 원인에 해당할 죽음을 각각 구별하고 차별한 경우로 보면 되겠다. 주제도 그렇거니와 분출하면서 침잠하는 이율배반적인 무채색과 붓질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선속에 존재를 거두어들여 그린 그림이고, 자연에서 찾아낸 존재의 뼈며 사물의 골을 그린 그림이고, 존재에 면면히 흐르는 기의 흐름이며 에너지의 방출을 그린 그림이고, 존재의 순간포착이 아닌 항상적으로 이행중인 존재의 운동성을 그린 그림이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삶의 원인으로서의 죽음의 생명력을 그린 그림이다. 죽음이 삶의 원인이라면, 죽음은 동시에 삶을 살게 하는 에너지이어야 마땅하고, 그 마땅한 존재의 원리며 이유를 그린 그림이다.

 

우종택_시원(始原)의 기억_한지에 혼합재료_235×380cm_2014
 

작가의 그림은 개별존재의 원인을 감으로 그린 것이고 몸으로 그린 것이라고 했다. 무슨 의미인가. 추상표현주의는 다르게는 액션페인팅이라고도 한다. 액션페인팅? 이는 분명, 몸 그림이란 의미가 아닌가. 다시, 몸 그림은 무슨 의미인가. 의식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는 말이다. 의식으로 그린 그림이 캔버스와 나, 대상과 나 사이에 일정한 거리두기(다르게는 미적거리 내지는 심적 거리로도 명명되는)를 견지한 것임에 반해, 몸이 그린 그림에선 이런 거리두기가 없다. 다이렉트로 캔버스에 육박해 들어가고, 대상에 육박해 들어간다. 작가의 경우에 그렇게 육박해 들어가는 대상은 자연이고 사물이며, 존재이고 죽음이다. 대상과의 어떠한 최소한의 거리도 없으므로 의식이 간여할 사이가 없고 틈새가 없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면서 정작 뭘 그리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그리는지도 모른다. 다만, 몸이 알뿐(몸의 기억은 불완전하지만 정확하고 정곡을 찌른다는 말을 상기할 일이다). ● 그렇다면 이렇듯 무지한 그림에는 무슨 논리를 뛰어넘는 비약이라도, 아님 의미심장한 의미라도 있는 것일까. 내가 그리면서 뭘 그리고 어떻게 그리는지 모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주와 객이 허물어지고 대상과 내가 합체된다는 것이다. 거리가 없어서도 그렇고, 의식이 없어서도 그렇고, 내가 이미 대상의 일부여서도 그렇다. 존재는 이미 자연의 일부이며, 삶은 진즉에 죽음의 한 부분이었다. 다시, 무슨 의미인가. 존재의 토포스(존재론적 위상학)를 무지와 무아의 차원으로 옮겨놓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무지와 무아의 상태며 내가 지워진 상태에서 작가는 다만 자연이 부르는 죽음의 무도를 추고 있었고, 그러므로 삶의 무도를 온몸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여기서 무지와 무아의 상태에서 그리고, 온몸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말에 기죽을 일은 아니라고 본다. 감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말을 풀어 본 것에 지나지 않을뿐더러, 작가의 그림은 실제로 그 차원이며 경지를 열어 보이고 있는 것일 뿐. 그러므로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퍼포먼스에는 무당이 있고, 무속이 있고, 무법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자연의 뼈를 발라내고 있었고, 사물의 골을 추출해내고 있었다.

 

우종택_묻다_2014
 

작가는 칠흑 같이 검은 먹을 얻기 위해 일종의 연금술을 부린다. 먹과 숯가루를 송진 덩어리와 함께 끓여내 점착성이 강한, 부분적으로 까슬까슬한 숯 알갱이가 손끝에 감촉돼오는, 반복해서 덧칠하면 번쩍번쩍한 금속성의 표면질감이 감지되는 새까만 먹색을 얻는다. 종이에 스며든 먹색과 표면에서 번쩍거리는 광물성의 질감이 어우러지고, 여기에 젯소를 혼합한 회흑색의 붓질이 중첩되면서 마치 어둠 자체로부터 존재가 생성되는 것 같은, 잠재된 존재가 용트림하는 것 같은 극적 순간을 보는 것 같다. 이런 평면과 함께, 작가는 전시장에다 아름드리 나무둥치들을 여기저기 흩어놓았다. 그리고 그 나무둥치들에 새까만 먹색을 칠했다. 전에는 알록달록한 색깔들을 흩뿌려 죽은 나뭇가지에서 꽃을 피웠었다. 마치 성수를 뿌리듯 피를 흩뿌려 재생의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이처럼 전작에서 죽은 나뭇가지를 되살려냈다면, 그리고 그렇게 재생의 의미를 강조했었다면, 근작에선 죽음 자체를 드러낸다. 꽃을 피워 재생되기 이전의 상태며 삶 이전의 상태에 직면케 한다. 말이 죽고, 언어가 죽고, 의미가 죽은, 다만 잠재하면서 생성하는 존재의 운동성만이 가득한 친근하면서도 낯 설은 차원에로 이끈다. 인식으로 치자면 낯설고(죽음은 인식론적 대상이 아니다), 몸이 기억하는 것으로 치자면 친근한 이율배반적인 경지에로 이끈다. 그렇게 새까만 먹색으로부터 죽음이 보이고, 심연이 보이고, 우주가 보이는가. ● 다시, 죽음은 삶의 원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죽음은 삶을 살게 하는 에너지이어야 마땅하다. 그렇게 작가는 죽음이 잠재하고 있는 기운을, 사실은 삶이 내뿜는 에너지를 전시장에 온통 부려놓고 있었다. ■ 고충환

 

 

Vol.20140827b | 우종택展 / WOOJONGTAEK / 禹鍾澤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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