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P KIDS

최윤정展 / CHOIYUNJNG / 崔允禎 / painting 

2023_0418 ▶ 2023_0501

최윤정_pop kids #121_캔버스에 유채_53×53cm_2022

최윤정 홈페이지_www.choiyunjung.kr

 

초대일시 / 2023_0418_화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5:30pm

 

갤러리 H

GALLERY H

서울 종로구 인사동9길 10

Tel. +82.(0)2.735.3367

www.galleryh.onlineblog.naver.com/gallh

 

최윤정의 팝 키즈, 미디어화된 인간종에게 길을 묻다  1. '현대성은 곧 시뮬라크르'라는 들뢰즈나 보드리야르의 현실 담론은 벌써 구닥다리가 되어버렸다. 시뮬라크르는 원본성이 그나마 설정 가능했던 아날로그적 상황에서 도출된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전면적 디지털 시대에 원본성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복제나 복제성 자체가 불가능하다. 모두가 원본이거나 복제본이고, 실재인 동시에 시뮬라크르다. 임의성, 상호성 없는 반복, 혼종과 변종의 무한대의 증식뿐이다. 어떤 것도 다른 어떤 것들에서 독립적이지 않다. 의미들이 뒤섞이고 갈려 나간다. 경계는 닳아 없어졌다. ● 최윤정의 세계가 그렇다. 스타벅스 커피와 맥도널드 햄버거, 마이클 잭슨과 백남준, 미키마우스와 코카콜라를 든 산타클로스 모두 상품경제가 만들어낸 판타지, 지구촌화된 팍스 아메리카나의 유산이다. 목록은 끝이 없다. 최윤정의 인간들은 유전적으로 개량된 인간종이다. 모두가 동일한 유전형질을 지닌 형제거나 자매다. '팝 키즈(pop kids)'로 명명되는 그들 모두는 성장을 멈추었거나 성장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동이거나 극강의 동안(童顏)을 유지하는 어른이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실존의 고유한 지표들, 중력이 작동하는 행성에서 살아온 흔적, 예컨대 피부 착색이나 주름, 흉터, 기미 등의 완전한 부재에 있다. 국적, 인종, 나이와 관련된 정보들의 디지털적 삭제. 야무지게 오므린 입술과 인중 사이에서 이질적인 표정이 만들어진다. 사회적 경험, 대체로 스트레스와 고통을 견디는 과정의 산물인 실존 인간의 표정에선 찾아볼 수 없는 부재의 표정이다. ● 안경: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리는 안경, 최윤정이 설계한 과도함의 게임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템'이다. 핵심적인 미학적 전략이기도 하다. 안경의 과도하게 큰 렌즈는 캔버스 안의 또 하나의 쉐입트 캔버스로 작동한다. 이 캔버스 안의 캔버스, 스크린 안의 스크린은 원래 캔버스(스크린)에는 부재하는 다른 세계를 투영해낸다. 이로 인해 최윤정의 매우 팝(pop)하게 평면적으로 처리된 회화에 연극적 긴장감이 감돈다. 팝 키즈의 결핍된 실체? 욕망하고, 집착하고, 빠져나올 수 없는 해방구의 부재, 중독? 어떻든 두 개의 서사가 굴러간다. 이것은 팝 스타 앤디 워홀이 선글라스를 착용했던 것과는 상반된 맥락이다. 워홀은 백반증으로 탈색되어 창백해 보이는 피부를 가리기 위해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진한 메이크업과 은색 가발과 같은 맥락이었다. 은폐용이었던 셈이다. 반면 최윤정의 팝 키즈의 안경은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는 스크린이다.

 

최윤정_pop kids #122_캔버스에 유채_30×30cm_2023
최윤정_pop kids #120_캔바스에 유채_200×200cm_2022
최윤정_pop kids #125_캔바스에 유채_53×53cm_2023

2. 최윤정의 팝 키즈는 전자 미디어로 세계를 경험하는 디지털 시대의 신인류다. 낯선 무표정과 컬러풀한 헤어 스타일, 그리고 피부는 뾰루지 하나 없이 비현실적이다. 팝 키즈는 인간종(human race)과는 다른 미디어화된 신 인간종(mediaized new human race)이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를 규명하는 결정적인 것은 무엇인가? 두 종 사이에 일어난 사건은 진화(evolution)인가? 미디어화된 인간종은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경험한다. 하지만 그것은 제대로 된 세상이 아니고, 무엇보다 제대로 된 인식이 아니다. 먼저 그것은 제대로 된 세상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 세상에는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괴물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나치즘, 카지노자본주의 같은 사악한 전체주의는 존재했던 적도 없고, 의지했던 것이 거짓으로 드러나는 배신과 좌절의 기억은 '완삭'된 세계다. 언젠가 알베르 카뮈가 통렬하게 고발했던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거짓으로 치닫는 사회"는 구닥다리 고전에나 나오는 드라마로 치부된다. 그렇기에 온갖 편견과 맞서 자기 시대의 병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려 애쓰는 고독한 인간이 등장할 필요도 없는 세상이다. 이 세계에서 합법적 대의(justa causa)는 시럽을 잔뜩 뿌린 케이크 같은 삶이다. 여기서 행복하지 않은 것은 모두 적으로 간주된다. 이 세계에서 여성은 "현모양처, 여전사, 동화 속 공주여야 한다. 착하고, 약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모두 소유한 자"여야 한다. 최윤정은 질문한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가?' 미디어가 곧 메시지고, 기술이 도덕적 우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만큼 도덕적인 인간은 이전에 없었다! 마셜 매클루언의 논제를 기억하자. "미디어는 단지 다양한 내용을 운반하는 중립적인 컨테이너가 아니다. 미디어는 특수한 내용을, 예컨대 새로운 지각을 만들어낸다"(한병철). 최윤정의 팝 키즈는 미디어로부터 배우고, 깨닫고, 촉구된다. 팝 키즈의 인식은 디지털 미디어 체계에서 길을 잃는다. 보는 감각, 보는 방법을 잃어버렸기에 그들이 아는 세계는 포스트자본주의의 소비재들, 패스트푸드, 디즈니랜드의 캐릭터들과 할리우드의 미디어 스타로 국한된다. 그들은 소망의 충족을 소망함으로써 자본주의 경제의 첨병이 된다. 자본주의는 소망의 경제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제대로 된 세상이 아니다. 이것은 뒤집힌 세상이다. 최윤정이 제대로 본 셈이다. 이 세상은 우리의 집착으로부터 만들어진 세상이라는 사실 말이다. "세상의 실재는 우리가 세상의 사물들 속에 옮겨놓은 자아의 실재다." 스타벅스 커피와 맥도널드 햄버거, 나이키와 페라리는 집착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 외적인 실재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끝없이 집착하는가? 어떤 것이 실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팝 키즈가 소망하는, 시럽을 뿌린 경험에만 의존하는 한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헤겔이 탄식했던 대로 세계로부터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세계로부터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배울지라도, 결과는 배우기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고대인이건 현대인이건 당하는 일은 모두 동일하고 해결책은 없다. 집착의 역사다. 시몬 베유를 읽어야 한다. ● "어떤 것이 실재임을 알게 되면 더는 집착할 수 없게 된다. 집착이란 결국 실재감의 부족인 것이다." 하지만 자아에 선험적으로 각인된 불완전성으로 인해 우리는 무엇이 실재인지 알 수 없고, 알 수 없기에 집착하는 것이다. 집착에서 벗어나기 전에 우리는 외적인 실재를 볼 수 없다. 베유는 사태나 상황을 구성하는 조건들과는 다른, "인간 영혼의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과 연결된 다른 개념들이 거주하는 공간인, 영원하고 보편적이며 무조건적인 것의 영역의 존재에 대해 말한다. 이 영역에 대한 베유의 서술이다. "우주의 바깥에,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의 너머에, 모든 인간에서 발견되며, 모든 인간의 마음이 일치하는 총체적인 선(善)에 대한 하나의 실재가 있다. 이 실재로부터 이 지상에서의 모든 선이 흘러나온다." 이 공간, 이 영역에서만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것이 가능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공간이다. 존재성의 근원, 눈과 마음을 여는 지성과 풍요로운 감정….

 

최윤정_pop kids #31_캔바스에 유채_150×150cm_2010
pop kids #80(missing)_캔바스에 유채_18×26cm_2014

3. 최윤정의 팝 키즈는 몸이 부재하다. 신체적 접촉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상태다. 만지거나 포옹할 수도 없고, 걷거나 달릴 수도 없다. 안경이, 접촉이 없는 봄(seeing)이 세계를 경험하는 유일한 통로다. 하지만 이러한 접촉이 결여된 봄은 응시의 타락으로 귀결된다. 단지 소비할 뿐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닌, 실재로부터 멀어지고 소외되는 미디어 문맹의 길, 인식의 퇴화(regression)로의 치닫기다. 이 퇴화의 연대기가 더 가속화되는 중이다. ● 최윤정의 회화가 지속적으로 던져온 세상 읽기의 일환이다. 하지만 기표의 사치랄까. 아니면 반어법? 후퇴로 보이는 전진의 기술일 수도 있다. 최윤정의 회화 방식은 전략적인 뒤집어 말하기를 충분히 즐긴다. 이를테면 최윤정의 팝 키즈는 거대 기업 자본주의 아래서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힐 수 있으며, 그 희생자가 자신일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이 부서지기 쉬운 존재며 그럼에도 물적 토대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되지 않고 어떤 억압 아래서도 고결하게 남을 수 있는 자질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모르는 것처럼 군다. 이 역할극-회화에서 팝 키즈는 새로운 미디어 전장의 실감 나는 해설자(commentator)다. 이 해설자는 자아의 근원적 결함을 환기할 때 특히 놀이를 하듯 한다. 도덕적 위엄, 계몽적 분위기, 선언이나 강론의 불손함을 경계하면서 진실이 스크린 뒤에서 배음처럼 울리게 하는 방식이다. ■ 심상용

 

최윤정_pop kids #124_캔바스에 유채_53×53cm_2023
pop kids #116-달나라의 장난_캔바스에 유채_100×72.7cm_2021

최윤정 작가 문답 「현대사회의 시대적 욕망을 유쾌하게 그립니다」1) 최근에 발표하는 작품들은 주로 인물의 얼굴로 화면이 가득 차고 있다. 언제부터 이런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나? 얼굴 이전 작품들은 어떤 작품이었나? 공적 작품 발표 이후 작품의 변화를 시기별로 나눌 수 있나?

얼굴 그림은 2009년의 개인전을 통해 처음 발표했습니다. 얼굴 그림은 과거에 비해 미디어의 영향이 막대해진 현대사회를 사는 사람들의 욕망과 존재방식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 전에는 제 안의 모호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욕망에 대한 생각을 화면 한 가운데 지평선이 펼쳐진 풍경으로 그리면서 구체적인 대상이 없는 근원을 향하는 마음과도 같은 상태를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당시에 저는 문득문득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욕망의 실체가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pop kids는 미디어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현대인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을 현실화하며 만들어가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저의 생각을 바탕으로 만든 시리즈였는데요, 초기의 작품은 일방적인 미디어 환경에 노출된 다소 수동적인 인간에 대한 초상이었다면, 최근의 작품들은 자신의 관심이나 생각, 주장들을 일인미디어를 통해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로, 그간에 약간의 변화가 있습니다.

 

2) 주로 그리는 인물들은 누구이며, 그것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큰 얼굴의 주인공은 구글에서 검색한 인물의 초상인데요, 좀 더 통통한 형태로 왜곡하면서 그렸습니다. 구글 검색창에서 'boy', 'girl', 'woman', 'man' 등의 단어로 검색한 결과의 이미지와 유명인의 사진, 그리고 제 자신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검색을 통해 얻은 인물의 사진은 여러 단계의 이미지 가공 과정을 거치면서 세부 정보가 사라지기도 하고, 애초에 인물 사진을 제작하는 단계에서 다양한 포토샵 효과를 사용하면서 매끄럽고, 화사한 얼굴로 만드는 점에 주목하였습니다. 가공된 이미지는 실제 얼굴보다 부드럽고 생기가 넘치는데요, 처음 제가 pop kids를 그리기 시작하던 시기에는 특히나 피부에 대한 미디어의 언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시기였습니다. 피부와 관련된 제품과 시술에 관한 광고와 정보가 인터넷에 쏟아지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2000년이 시작되던 시기에 비해서 차츰 재정비되는 도시 또한 매끄럽고 반짝이며, 화려한 색채를 갈아입는 중이라는 인상을 받고는 하였는데요, 그런 인상 때문에 저는 '현재'를 표현하고자 기획하였던 시리즈에서 붓터치를 제거하고, 화려한 색채를 사용하였으며, 광택이 있는 표면을 만들고자 노력했습니다.

 

3) 그림의 인물은 대부분 안경을 쓰고 있다. 그 안경에 그려진 이미지와 글자가 그 작품의 주제를 드러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들은 무엇을 의미하나?

일상생활에서 제 주위를 떠도는 이미지들입니다. 그 중 더 많이 미디어를 통해 언급되면서 재생산되는 이미지들인데요, 이 시리즈를 그리던 초기에는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대상들을 많이 그렸습니다. 어느 날 대중문화의 캐릭터와 유명브랜드가 과거 사회에서 신화가 차지했던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과거의 신화는 서사를 통해서 그 시대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의 프레임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대중 스타와 캐릭터, 브랜드의 서사는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4) 그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를 위해 어떤 기법이나 장치를 쓰고 있나?

안경이라는 장치는 프레임의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저는 '자유가 무엇인가?' '나는 자유로운가?'라는 질문을 이따금 해보는데요,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면서 했던 생각은 나는 언제나 자유롭지 않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언제나 어떤 보이지 않는 틀 안에서 생각하고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태어나서 공부를 하고,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은 것을 배우는데요, 경험이 많아질수록 그 프레임이 견고해진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그 프레임을 형성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미디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큰 프레임으로 눈을 가린 인물을 그리면서 현대사회의 단면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5) 작품들이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사회의 여러 상황을 담고 있거나 반영하고 있는 듯 보인다. 현재의 삶의 어떤 부분을 담아왔고, 또 앞으로 표현하려 하는가?

1990년대 후반 이후에 인터넷 환경이 보편화되고, 티비 방송의 채널 숫자도 급증했습니다. 신문, 잡지 등 인쇄 매체도 빠른 주기로 탄생하고 사라지를 반복했습니다. 우리는 이전의 사회에서 보다 매일매일 훨씬 많은 양의 정보를 받아들입니다. 다양한 분야의 이슈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던 시기를 지나 스스로 매체를 생산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환경문제 등 장기간 지속적으로 관심의 깊이를 더해가는 이슈가 있는가하면, 일정 기간 많은 사람들이 초집중하였다가 빠르게 잊어버리는 이슈들도 많습니다. 하나의 이슈에 대해 반대 주장의 논리는 넘쳐나는데 우리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구별하기 쉽지 않습니다. 저 또한 혼란스러울 때가 많지만, 넘쳐나는 이슈들의 다양한 층위를 검토하고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급변하는 환경과 더불어 제 자신의 생각도 충분한 고민을 하기 전에 다른 곳을 헤매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자유의지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것이 어디까지 가능한 일일까 하는 의문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들이 저의 어수선한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두서없이 돌아다니며 떠나지 않는 생각들입니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로 가는가? 라는 질문을 되새기며 나와 내가 속한 사회를 돌아보며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6) 그동안의 작품에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사회, 매스 미디어의 여러 다양한 국면을 단순한 색채와 구성으로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팝아트'라 구분할 수 있는데 동의하는가?

팝아트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제 작품이 팝아트의 범주 안에 있을 수도 있고 그 밖에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사회와 매스미디어의 다양한 국면과 대중의 삶에 대한 내용을 담는 작업을 팝아트로 정의한다면 저의 작품 중 pop kids 시리즈는 팝아트의 범주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작품의 생산방식은 전통적인 방식에 가깝습니다. 저는 대량생산, 주문생산 등의 산업시스템을 적극 활용하는 작업방식 보다는 현대사회의 이야기를 작업실에서 홀로 작업합니다. 작가의 고유한 작업방식에 가치를 부여하는 근대적 방식으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 초점을 맞춰서 얘기한다면 제 자신을 '팝아티스트'라고 소개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습니다. 제 작업을 보는 사람에 따라 팝아트로 보기도하고 조금 다르게 보기도 하는데요, 저는 스스로 제 자신을 어떤 양식의 작가로 규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7) 가장 최근에는 여성주의(Feminism)적 관점, 환경문제(Ecology)에 대한 비판적 접근 등 그 주제가 다양해지는 것 같다. 작가로서의 의식에 변화가 있는가? 있다면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나?

저는 사회가 개인의 사고와 삶의 방식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늑대소년의 이야기와 다른 도시로 입양되어 매우 다른 삶의 방식을 지향하는 성인으로 자란 쌍둥이의 이야기 등에 매우 동의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여러 사회적 이슈에 관심을 가지는 편입니다. pop kids 시리즈 중에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작업들이 있는데, 아무래도 제가 여성이라서 저를 돌아보면서 생각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작품에 드러나는 주제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는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매우 제한적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도시 풍경의 변화 속도만큼 여성의 사회적 역할 또한 빠르게 확대되면서 변화하였습니다. 이 시대를 사는 많은 여성들이 전통적, 보수적인 여성상과 현대적, 진보적인 여성상의 이미지 중간 어디엔가 위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확대되면서 여성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는 자아상에 대한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현재의 상황에 대한 작업들이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한 많은 문제들이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삶의 패턴으로 야기되는 문제라고 생각하는데요,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으며 동의하는 부분일 것입니다. 광우병, 미세플라스틱의 해양오염, 미세먼지로 인한 대기오염, 음식물쓰레기 처리문제,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 문제와 다양한 종의 멸종문제, 멸종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 문제 등등 수많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며 즐기는 화려한 컬러와 매끈한 표면의 광택과 환경문제에 직면하여 고민하는 우리의 모습을 한 화면에 담아 현대인의 삶의 단면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삶은 모순으로 가득합니다. 최근에는 삶의 모순된 양면에 대해 민감하게 생각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이런 생각이 앞으로 어떤 작업을 만들어갈지 스스로 생각하고 약간의 기대를 하면서 상상하는 시간을 즐기는 편입니다.

 

8) 그동안 비슷한 구도와 표현방식으로 인해 관람자에 강렬한 인식을 남기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편에선 표현 형식이 틀에 갇혀 다소 단조롭게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이에 대한 작가의 생각과 대응은?

처음 얼굴을 그리기 시작한 시간으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이 사실이지만, 중간에 사고가 있어서 몇 년 동안은 거의 그림을 그리지 못했습니다. 처음 시리즈를 계획하면서 비슷비슷한 얼굴 100점 이상을 그려서 전시하는 기획이 머릿속에 있었는데, 아직 그 전시를 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도 못할 것 같습니다. 다른 새로운 전시에 대한 아이디어도 몇 가지 있었는데, 아파서 누워있는 동안 제 머릿속에서 전시가 이루어지고 끝났습니다. 기존에 제가 몰두했던 생각이 한편에 있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거나 새로운 경험을 통해 전에 하지 않았던 생각도 하는데요, 최근에 기존의 작업에서 조금 변화된 형태의 작품 제작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다음 전시에서 어떤 형태로 작품이 완성될지 저도 조금 기대하고 있습니다.

 

9) 작가에게 미술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왜 그림을 그리는가?

시각예술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저의 20대의 많은 시간을 빼앗았던 질문인데요. 자세하게 기억나지 않는데, 이런 저런 자료들과 작품들을 보면서 이것도 시각예술 저것도 시각예술, 이것도 시각예술... 여러 예술을 공통적으로 포괄할 수 있으면서 제 자신을 설득할 수 있으며, 제가 해야 하는 시각예술에 대한 목표는 '한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표현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 뭐라도 정해야 어떤 예술을 할 것인가에 대해 방향을 정하고 제 길을 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지금도 유효한 생각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려고 노력한 점이 우선이었지만, 저 또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이 사회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일이 그림을 그리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답을 구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저 많은 시간을 들여 세상을 세심하게 들여다보고자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하면서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10) 세계의 미술인 중에서 누구의 무엇을 좋아하는가? 왜 거기에 관심이 가는가?

바바라 크루거, 낸 골딘, 뱅크시, 뒤마, 루시앙 프로이트, 김홍도, 신윤복 등 너무 많습니다. 시각적 충격 또는 즐거움을 주는 것과 더불어 인간에 대해, 인간 사회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을 좋아합니다. 작품을 통해 소설책에서 발견하는 기쁨과 슬픔, 희망과 좌절, 부조리, 불안, 웃음 등을 작품을 마주하는 순간에 이해하고 느끼며, 이야기 너머 미지의 세계를 상상하는 것을 즐깁니다. 신윤복이 선택한 양반을 그리는 고상하지 않은 양식을 보면서 그 사회에 대해 여러 가지 상상을 하며 친구와 수다를 떨던 시간이 매우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는데요, 그의 그림에 있는 유머가 특히 강력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Vol.20230417b | 최윤정展 / CHOIYUNJNG / 崔允禎 / painting

숨, 비로소 숨을 쉬다

 

박승비展 / PARKSEUNGBEE / 朴升丕 / painting 

2021_0901 ▶ 2021_0907

 

 

박승비_氣 숨결Ⅰ_장지에 혼합재료_162×130cm_2020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HGALLERY H

서울 종로구 인사동9길 10

Tel. +82.(0)2.735.3367

www.galleryh.onlineblog.naver.com/gallh

 

 

절대 자유의 세계를 찾아서: 숨쉬기와 마음 빗질 ● 박승비 작가의 이번 전시는 숨을 쉬는 행위를 통해 원기(元氣)를 흡입함과 동시에 정신이 원기 속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지극한 즐거움을 얻게 되는, 그 결과 인간이 스스로 자아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고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절대 자유인인 지인(至人)이 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박승비 작가의 사유 및 작업의 시작과 끝은 숨쉬기, 즉 식(息)의 중요성에 대한 자각이다. 식(息)은 코의 모습을 본뜬 자(自) 자(字)와 마음을 뜻하는 심(心) 자가 결합된 것이다. 코를 통해 공기가 들어가고 나가며 숨쉬기를 통해 심장이 뜀으로써 인간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목숨이라는 말은 목을 통해 숨이 들어가 생명을 유지한다는 의미로 숨쉬기는 인간의 생존에 절대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코를 통해 공기를 들이마심으로써 몸속에 산소가 공급되고 심장이 뛰게 된다. 인간은 연속으로 숨을 쉴 수 없다. 따라서 숨을 쉴 때는 한번 공기를 들이마시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들이마셔야 한다. 숨을 고르게 하는 것은 건강을 위해 가장 중요한 호흡법이다. 스스로 그러하다는 뜻을 지닌 자연(自然)이라는 말은 고른 숨쉬기를 통해 얻은 자유로운 경지를 뜻한다. 스스로 자(自)는 코 비(鼻)의 옛 글자이다. 코로 숨을 편안하게 쉴 때 모든 것은 자연스러운 상태가 되는 것이다.

 

박승비_氣 숨결Ⅱ_장지에 혼합재료_41.3×53cm_2020
박승비_숲 - 숨Ⅰ_장지에 혼합재료_90×72.3cm_2020

우리말에 기(氣)가 막힌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기색(氣塞)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기가 막힌다는 숨이 막힌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기는 공기, 대기를 뜻하지만, 숨 또는 숨 쉴 때 나오는 기운을 뜻하기도 한다. 『논어(論語)』 「향당(鄕黨)」 편에는 공자(孔子)가 조정에 드나들 때 바른 몸가짐을 하고 예의를 지키는 모습을 서술한 구절이 나오는데 그 중 "숨소리를 죽여(낮추어) 마치 숨을 쉬지 않는 것처럼 하셨다[屛氣似不息者]"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 표현을 통해 기(氣)와 숨[息]이 오래전부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는 글자 안에 쌀 미(米) 자가 들어있는데 본래 쌀알처럼 미세한 것이 수증기나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을 의미했으며 나중에 공기, 대기, 숨, 우주 만물의 생명력과 같은 것으로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박승비 작가는 숨쉬기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기와 숨 사이의 연관성에 주목하였다. 「氣, 숨결」 연작은 기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공기이며 이것을 들이마시는 것이 숨쉬기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생명 에너지가 아무런 방해 없이 자연스럽게 대지에 물 흐르듯 흘러가고 인간은 이 기를 마심으로써 숨을 쉬게 된다. 이 연작에 보이는 마치 눈[眼]처럼 둥그런 모양의 물체는 기(氣)의 상형문자이다. 「숨」, 「숨 쉬다」에는 한글로 숨 자가 그려져 있다. 숨 한 글자는 단순하지만 인간이 태어나면서 처음 쉬는 숨처럼 사람이 생명체로서 본격적인 삶을 살아가는 극적인 순간을 알려주고 있다. 아이는 엄마 배 속에 있다가 처음 숨을 쉬면서 인생을 시작한다. 숨, 이 한 글자는 오늘의 우리를 만들어 준 가장 중요한 시작이었다. 숨을 쉼으로써 우리는 산다.

 

박승비_非想非非想處 비상비비상처 無何有之鄕 무하유지향_장지에 혼합재료_106×23cm_2020

숨을 쉬지 못하면 인간은 죽는다. 숨은 곧 생명을 유지해 주는 힘이다. 아울러 숨을 쉬는 것은 구속, 속박, 억압으로부터의 탈출이자 해방이다. 숨을 쉬는 것은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이다. 공기는 자연에 떠도는 기(氣)이다. 따라서 숨을 쉬는 것은 기를 흡입하는 것이다. 공기는 원기(元氣)이다. 원기는 만물을 형성하는 근원이다. 『예통(禮統)』에는 "천지는 원기가 만들어낸 것이다. 만물은 모두 여기에서 나왔다(天地者, 元氣之所生, 萬物所自焉)"라고 원기의 역할이 적혀 있다. 천지와 만물을 만들어낸 것은 다름 아닌 원기이다. 숨을 쉬는 것은 단순히 산소를 흡입하는 것이 아니다. 숨을 쉬는 것은 하늘과 땅에 흐르는 만물을 소생시키는 에너지인 원기와의 만남이다. 숨을 쉼으로써 인간은 자연의 생명력인 원기와 일체가 되며, 인간의 정신은 자유롭게 원기 속에서 노닐게 된다. 우주 만물의 근원적 생명력인 원기가 충만(充滿)한 곳은 숲이다. 나무, 풀, 이끼, 냇물 등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끊임없이 원기를 만들어내는 곳이 숲이다. 기문(氣門)이라는 용어가 있다. 기문은 기가 출입하는 곳이다. 기가 막힌다는 것은 기가 출입하는 문인 기문이 닫힌 현상을 말한다. 기는 문을 통해 어떤 제약도 없이 사통팔달(四通八達)함으로써 이 세상에 살아있는 생물에 생명력을 공급한다. 원기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막힘도 없이 원기는 세상에 퍼져야 한다. 숲에는 원기의 흐름을 막는 어떤 장애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박승비_水魚之交 수어지교 美與惡 미여오_장지에 혼합재료_75×17cm_2020
박승비_安 안_장지에 혼합재료_53×23cm×3_2020

숲에서 숨을 쉼으로써 원기와 일체가 된 사람은 휴식(休息), 안식(安息)의 즐거움을 느낀다. 휴식, 안식은 모두 평안한 숨쉬기를 지칭한다. 특히 휴식이라는 용어 중 휴(休) 자는 인간[人]과 나무[木] 글자가 합쳐진 것으로 사람이 나무 그늘 밑에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무가 울창한 숲에서 사람은 나무 밑에서 숨을 고르게 쉬면서 자유롭고 평안하며 행복한 기쁨을 느끼게 된다. 박승비 작가의 「숲 숨」, 「숲 숨결」은 수목이 번성한 숲에서 숨을 쉬면서 원기를 흡입하고 자유로운 몸이 되는 체험을 그린 것이다. 박승비 작가에게 숲은 절대적 자유의 쉼터이다. 이 쉼터에서 그는 모든 세속의 번뇌를 넘어선 절대적인 고요함, 즉 정적(靜寂)의 세계를 발견하였다. 숲은 고요하다. 사람이 침범하여 소리를 내지 않는 한 숲은 조용하고 자연의 소리만이 들린다. 고요한 숲에서 사람은 평안함의 희열을 느낀다. 박승비 작가의 「적정(寂靜)」은 원기가 충만한 숲에서 생각과 언어가 모두 끊기고 옳고 그름의 시비를 넘어 마음과 몸이 극도로 고요한 상태에 이른 경험을 그린 것이다. 화면에는 영자(英字)인 'silence'가 그려져 있다. 「안(安)」은 박승비 작가의 말처럼 "모든 생각이 멈춰지고 호흡이 고르게 되면서 이르는 편안한 상태"를 보여준다. 안(安)은 안식(安息), 즉 평안한 숨쉬기를 의미한다. 숨이 고르게 되면 모든 잡다한 생각이 사라지고 사람은 절대적인 자유와 행복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박승비_氣 숨결Ⅴ_캔버스에 혼합재료_90.6×72.4cm_2021
박승비_숨결 - 기억_캔버스에 혼합재료_162×130cm_2021

이번 전시의 핵심 작품들인 「氣, 숨결」 연작은 장지에 흙을 발라 먹 또는 먹과 분채를 가한 후 표면을 긁어낸 작품으로 기(氣)는 마치 자유로운 물, 생동하며 우주를 떠도는 에너지의 흐름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원기를 들이마시면서 형성된 숨결은 바로 이 거대한 에너지의 흐름에 동참하는 것이다. 원기와 일체가 되면서 정신은 생동하는 에너지 속에서 자유롭게 여행을 하게 된다. 종병(宗炳, 375-443)은 「화산수서(畵山水序)」에서 절대적인 정신의 자유로움을 '창신(暢神)'이라고 불렀다. 창신은 글자 그대로 정신이 막힘없이 펼쳐지는 것을 의미한다. 종병은 산수화의 기능은 인간의 창신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만취(萬趣)가 신사(神思)에 녹아 있다. 내 다시 무엇을 할 것인가? 창신(暢神)을 할 따름이다(萬趣融其神思, 余復何爲哉, 暢神而已)"라고 하면서 웅장한 산봉우리와 구름 낀 숲을 그린 산수화를 감상하면서 사람은 정신의 자유로운 펼쳐짐을 경험하게 된다고 말하였다. 「氣, 숨결」은 바로 창신의 경지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水魚之交」 또한 「氣, 숨결」과 동일한 메시지를 전해주는 작품이다. 물고기는 물을 만나 살아간다. 인간이 숨을 쉬어야 살 수 있듯이 물고기는 물을 만나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물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흐른다. 물은 약동하는 생명력 자체이다. 마치 원기와 같이 물은 생동하는 에너지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숨을 쉬면서 원기와 일체가 되듯이 물고기는 물을 만나 하나가 된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며 살아가듯이 사람은 원기 속에서 정신의 절대적 자유를 만끽하게 된다. 물과 원기의 흐름 속에서 모든 경계는 사라지고 만물은 하나가 된다[萬物齊同]. 인간을 억압하는 제도, 사유, 관습은 모두 원기를 만나게 되면 허상이 되어 사라진다. 숨통이 트인다는 것은 사회적, 관념적 구속(拘束)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숨을 쉬는 것은 절대적 자유의 획득을 의미한다. 이때 우리를 짓눌러왔던 관념들, 가령 미(美)와 추(醜)와 같은 개념은 완전히 상대화되면서 원기 속에서 소멸한다. 「美與惡」과 「唯與呵」는 아름다움과 추함은 우리가 인위적으로 만든 헛된 개념임을 비판한 작품이다. 정신이 절대적인 자유를 누리게 되면 우리를 속박해 왔던 고정관념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박승비_숲 숨결Ⅰ_장지에 분채_162×130cm_2021
박승비_숲, 숨결01_장지에 분채_162×130cm_2021
박승비_氣, 숨결Ⅷ_장지에 혼합재료_91×73cm_2021

박승비 작가가 2018년에 연 개인 전시인 「양양도도(陽陽陶陶)」전에 내놓은 작품인 「신유원기중(神遊元氣中)」은 그가 오랫동안 추구해 온 자연과 세계에 대한 성찰을 압축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정신이 자유롭게 원기 속을 유영(遊泳)하는 것을 뜻하는 '신유원기중(神遊元氣中)'은 장자(莊子)가 이야기한 소요유(逍遙遊)의 경지이다. 소요유는 정신의 자유로운 노닐기이다. 특히 '자신을 비워 세상에서 노니는[虛己遊世]' 것은 자아를 버린 지인(至人)이 무한한 공간 속에서 어떠한 제약도 없이 우주의 원기와 하나가 되는 절대 자유를 의미한다. 지인이 누리는 이러한 절대 자유가 곧 양양도도(陽陽陶陶)이며 지락(至樂)이다. 「양양도도전」에 출품된 박승비 작가의 다른 작품인 「지락(至樂)」에는 "무릇 그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지극한 아름다움과 지극한 즐거움을 얻게 되고 지극한 아름다움을 얻어 지극한 즐거움의 경지에 노니는 사람을 지인이라고 한다(夫得是至美至樂也 得至美而遊乎至樂者 謂之至人)"라는 글이 적혀 있다. 2015년에 박승비 작가가 연 개인 전시인 「다시 봄, 노닐다」에 출품된 개구리를 소재로 한 연작인 「봄」과 「내 마음의 봄」은 개구리를 통해 자유롭게 노니는 것의 지극한 즐거움을 다룬 작품들이다. 봄비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개구리는 곧 지인(至人)과 신유(神遊)의 상징이다. 어떤 속박과 제약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개구리를 통해 박승비 작가는 인간이 가야 할 절대 자유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박승비_MindfulnessⅠ_장지에 혼합재료_117×91cm_2021
박승비_氣 숨결Ⅸ_캔버스에 혼합재료_60×50cm_2021

박승비 작가는 '신유원기중'과 같은 원기에 대한 근원적 탐색을 넘어 자신의 자연과 우주를 바라보는 관점과 불교적 세계관을 융합하여 절대 자유의 경지를 보다 심층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는 「제행무상(諸行無常)」, 「무(無)」,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서 세상의 만물은 순간마다 생멸(生滅),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교적 화두를 던지고 있다. 생각이 없는 것도 있는 것도 아닌, 또한 밝음과 어두움의 경계가 사라진 세상에서 만물은 상대화된다. 유무(有無)에 집착하는 것은 우리의 어리석음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인연을 통해 만들어졌다. 따라서 인연이 사라지면 그 실체 또한 없어지는 것이다. 즉,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없는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박승비 작가는 이러한 불교적 세계관과 숨 쉬는 것의 상징성을 결합하여 원기 속에서 일체가 됨으로써 인간은 모든 경계를 벗어나 절대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원기가 가득한 숲에서 숨을 쉬면서 얻게 되는 마음의 평화[心齋], 정신의 여유로움과 평안함[虛靜]은 절대 자유의 경지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安」, 「淸凉」은 만물에 대한 편견과 집착에서 벗어난 청정한 마음의 경지[淸淨心]를 표현한 작품이다. 호흡과 명상을 통한 숨쉬기는 우리를 헛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그러나 박승비 작가는 이와 같은 묵직한 주제를 그림에서 심각하게 다루지 않는다. 한자의 옛 글자인 상형문자, 금문(金文), 전서(篆書)를 활용해 그는 자신의 메시지를 간결하게 전한다. 따라서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은 그림이자 글씨, 즉 이 두 가지가 합체된 '서화(書畵)'이다. 서화는 본래 근원이 같았다[書畫同源]. 고대 중국에서 그림과 글씨는 한 몸이었고 분리되지 않았다. 상형문자 자체가 문자이자 그림이었다. 박승비 작가는 그림과 글씨가 서로 분리되기 이전의 원시적 상태였던 시간으로 돌아가 그림과 글씨의 근원을 살펴보고 있다. 원기 속에 모든 것이 하나가 되듯이 충만한 기의 흐름 속에 그림과 글씨의 경계는 무너지고 이 둘은 하나가 된다.

 

박승비_氣 숨결 鳶飛魚躍 연비어약_장지에 혼합재료_53×23cm×2_2021
박승비_氣 숨결 마음을 빗다01_장지에 분채, 혼합재료_53×41cm_2021

박승비 작가는 바로 자연과 우주의 근원인 원기 속에서 모든 경계가 사라지는 양상을 그림 속에 담고 있다. 고른 숨쉬기는 바로 이러한 과정의 시작이다. 평안한 숨쉬기를 통해 마음은 고요해지고 자유로워진다. 숨이 고르게 된 후 행하는 명상(冥想) 과정을 통해 사람은 '정관자재(靜觀自在)'의 경지에 도달한다. 정관자재는 조용히 사물과 현상을 관찰하면서 스스로 진리를 깨닫고 어디에도 속박받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 상태를 지칭한다. 그러나 정관자재의 경지는 늘 마음이 흔들리게 되면 순식간에 무너진다. 따라서 항상 생각을 비워내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은 세계가 고정된 실체가 없는 무상(無常)이며 일체 만물은 끊임없이 생멸변화(生滅變化)하여 한순간도 같은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을 자득(自得)하고 세상의 모든 번뇌, 미혹,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마음을 닦는 일이다. 박승비 작가는 정관자재의 경지를 유지하기 위해 항상 마음을 올바로 챙기는 일의 중요성을 「mindfulness」와 「氣, 숨결 - 마음을 빗다」 연작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 「mindfulness」는 '마음챙김'의 중요성을 물이 가득 찬 도자기를 통해 표현한 것이다. 사람은 마음을 늘 정화(淨化)해야 하며 정화된 마음은 맑은 기(氣)로 분출된다고 박승비 작가는 생각하고 있다. 「氣, 숨결 - 마음을 빗다」는 흐트러진 마음을 가지런히 하는 것, 즉 마음에 빗질을 함으로써 정관자재의 경지를 항상 유지하려는 박승비 작가의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그림 표면에 보이는 선(線)들은 바로 마음 빗질의 흔적이다. 마음 빗질은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관련된다. 항상 마음을 빗질하면 인간 번뇌의 근원인 무지(無知), 즉 무명(無明)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눈에 보이는 것은 실체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이 깨달음은 자신을 의지처로 삼고 항상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유지될 수 있다.

 

박승비_氣 숨결 마음을 빗다02_장지에 분채, 혼합재료_53×45.7cm_2021
박승비_氣 숨결 마음을 빗다Ⅳ_장지에 분채, 혼합재료_53×41cm, 53×23cm_2021

박승비 작가의 「제행무상」, 「비상비비상처」,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자등명 법등명」은 세계는 무상이라는 것에 대한 자각, 무명에서 벗어나 사유마저 끊긴 세계의 발견, 철저한 자기 사색과 수양, 마음 빗질의 중요성을 강조한 작품이다. 숨을 평안하게 쉬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정관자재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마음챙김에 힘쓰고 마음에 빗질을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모든 것에 구애받지 않는 절대 자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은 모든 생각이 끊어진 고요한 상태로 박승비 작가가 추구하고자 하는 경지를 보여준다. 박승비 작가의 그림 주제는 표면적으로는 무거운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지만 자연스러운 숨쉬기처럼 그의 작품은 경쾌하고 청량하다. 코로나가 창궐하는 숨쉬기 어려운 세상에서 박승비 작가의 흥취(興趣)가 번뜩이는 작품들은 우리의 숨통을 뻥 뚫어주는 생기발랄한 청량제와 같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 장진성

 

박승비_숲 숨결Ⅱ_장지에 분채, 혼합재료_106×23cm×3_2021
박승비_無眼耳卑舌身意 無色聲鄕味觸法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_ _장지에 혼합재료 73×60.8cm_2020

작업노트 ● 작업을 시작하면서 숨을 고르게 한다. 화면 위에 색을 올리고, 흙을 쌓아 올리고, 다시 긁어내고, 무수히 반복되는 작업 속에 어느 사이엔가 가쁜 숨이 잦아들고 숨 쉬는지조차 가늠이 안된다. 모든 형상 있는 것들은 변한다는 無常을 마음에 두고 작업을 한다. 점차 형상을 지워나가면서 화면은 점점 단순해진다. 단순해진 화면에 마음을 모은다. ● 작업을 통해서 생각을 비워내고 마음을 고요히 한다. 비워진 만큼 보는 많은 사람들이 편안하길 소망한다. (2021년 여름이 끝나가는 즈음에) ■ 박승비

 

 

Vol.20210903i | 박승비展 / PARKSEUNGBEE / 朴升丕 / painting

조병완展 / JOBYONGWAN / 曺秉浣 / painting 

2020_0205 ▶︎ 2020_0211


조병완_아리랑19-대화_천에 채색_112×162cm_2019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80804d | 조병완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2월 11일_10:00am~01:00pm



갤러리 H

GALLERY H

서울 종로구 인사동9길 10

Tel. +82.(0)2.735.3367

blog.naver.com/gallhhongikgalleryh.modoo.at



2006년 무렵부터 등장한 호랑이를 까치와 함께 기원의 뜻을 담아 그리다가 2011년 쯤엔 '놀러온 호랑이'로 전환하여 그리게 되었다. 그렇게 2015년 무렵까지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호랑이, 축구하는 호랑이, 전동휠을 타는 호랑이, 컴퓨터로 영화를 보는 호랑이, 모필을 잡고 그림을 그리는 호랑이 등등 인간세상에서 즐겁게 노는 호랑이를 그렸다. 그 호랑이를 쉬게 하는 동안 사람들의 염원을 담은 돌무더기나 탑, 민불, 절간이 있는 풍경 따위를 그렸다.



조병완_아리랑18-산책1_천에 채색_80×100cm_201


조병완_아리랑18-산책2_천에 채색_80×100cm_2018

조병완_아리랑18-흥겨운 날4_천에 단청, 아크릴채색, 오일바_80×100cm_2018


조병완_아리랑18-흥겨운 날5_장지에 단청, 아크릴채색, 오일바_80×100cm_2018


어린 시절 노송으로 우거진 솔숲이 우리 동네의 바로 옆에 있어서 소나무에 올라 새알을 꺼내기도 하고 등성이의 소나무에 매어진 그네를 타기도 하면서 어린 시절을 지냈다. 어른이 되어 고향에 갔을 때에는 노송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 노송들이 사라져버린 동산은 내 고향에 대한 상실감을 더 크게 했다. 한동안 고향에 가기도 싫었고 가서 동산을 쳐다보면 우리 동네가 아닌 다른 동네에 서있는 느낌이어서 참으로 쓸쓸했던 것이다. 소나무를 좋아하는 나는 어디에서든 노송들을 보면 바로 지나치지 못한다. 그래서 노송들을 그리며 그림으로 솔숲을 산책하게 된 것이다.



조병완_아리랑19-응시_천에 채색_112×162cm_2019


조병완_아리랑19-노송 사이_천에 채색_150×483cm_2019


노송들을 그리다 보니 어릴 적 그 노송들의 자태와 뛰어다니던 솔숲이 새록새록 이야기를 한다. 거기에서 자치기도 하고 땅따먹기, 못치기, 딱지도 치고 연도 날리고 팽이도 친다. 더위도 팔고 불깡통도 돌리고 망월이야 하고 외친다. 썰매도 타고 서리도 하고 오곡밥도 얻으러 다닌다. 저 옛일들이 또는 오늘의 것들이 주춤주춤 나오거나 아스라해진다. 그러면 소나무들은 덩실거리고 이거냐 저거냐 따지지 말라고 몸을 흔들어댄다. 이제 노송들이 내게 공간을 내어주며 시절을 맘껏 풀어놓으라고 한다. 노송들의 공간은 모든 것이 가능한 여백으로 나를 맞는다. (2020년 1월) ■ 조병완



Vol.20200205c | 조병완展 / JOBYONGWAN / 曺秉浣 / painting








정정식展 / CHUNGCHUNGSIK / 鄭正植 / painting
2019_0626 ▶︎ 2019_0702


정정식_우주중심_캔버스에 유채_90.5×50cm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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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9_0626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H

GALLERY H

서울 종로구 인사동9길 10 3층 제1,2관

Tel. +82.(0)2.735.3367

blog.naver.com/gallhhongikgalleryh.modoo.at



한 알의 딸기에서 우주를 보다 ● 보이지 않는 소실점을 향하여 무한대로 뻗어나간 스트라이프 무늬같은 기하학적 토대, 그리고 바다와 사막, 또는 우주를 배경으로 과일이 행성이나 항성, 위성처럼 두둥실 떠 있는 정정식의 그림은 극대세계와 극소세계, 견고함과 취약함 등을 대조시키는 가운데, 만물이 엮여지는 상보적이거나 대칭적인 결합관계를 표현한다. 화면 안에 인간이나 인간의 자취는 없으며, 인간을 기준으로 한 규격이나 차원 역시 무시되고 있지만, 대개 화면 앞쪽이 수직으로 절단되어 흘러내리는 물, 또는 모래들로 인해 그림은 관객을 향해 펼쳐진 광대한 무대 같은 느낌을 준다. 사진과 유사한 정밀한 재현기술을 구사하는 방식은 세계를 들여다보는 창이라는 고전적인 회화의 역할에 충실하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자신의 상상세계를 관객 앞에 가져다주며, 관객은 투명한 창을 통해 그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그의 상상은 광활한 시공간을 다루고 있지만, 작품의 구성요소는 매우 구체적이다. 상상이라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보여주기 위해 대상은 보일 듯이, 잡힐 듯이 구체적이어야 했다.


정정식_전망대_캔버스에 유채_50×100cm_2017

정정식_한국현대사B_캔버스에 유채_60×120cm_2019


그는 작가 노트에서 '현실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상상의 공간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재현은 어떤 대상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관념이나 개념도 재현될 수 있다. 인물, 정물, 풍경 등 화가로서 갈고 닦은 기본기는 상상의 재현을 위한 중성적인 수단이 되었다. 정정식의 작품을 특징짓는 명약관화한 가시성은 비가시적 세계의 투사물이다. 외부를 향하든지, 내부를 향하는지와 관계없이, 창으로서의 미술의 역할은 각종 인터페이스를 채우는 하이퍼 리얼의 세계가 도래했어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정정식의 작품에 있는 초현실주의의 코드는, 가령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이 그러하듯이, 비가시성이 가시성에 비해 반드시 더 난해하거나 심오한 것은 아님을 예시한다. 초현실주의는 정정식의 작품에 면면히 존재해 왔다.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이 담긴 80년대의 작품조차 그러했다. 요즘 작품들은 정물이나 인물, 풍경 등의 기본기가 충실하게 내장되어 있는, 극사실과 초현실의 경계에 서 있다.



정정식_행성탐험_캔버스에 유채_65×117cm_2018

정정식_관계_캔버스에 유채_50×100cm_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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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손도 부지런한 몽상가이다. 많은 시간을 상상하는데 보내지만, 자신만의 엉뚱한 상상력을 그럴듯하게 재현하는 기술력의 터득과 그것의 발휘에 게으른 작가는 아니다. 가령 딸기 형태가 남성의 생식기처럼 변모해 있는 한 작품을 보면, 우주의 격세 유전적인 생식력을 과일로 표현한다는 내용은 실제의 딸기나 남성의 골반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재현 기술을 통해 설득력을 발휘한다. 그의 상상풍경에는 인체 해부학과 정물, 풍경이 모두 들어가 있다. 상상이 적극적으로 개입되는 지점은 대상의 규모와 차원의 변주이다. 상상은 대상의 상식적인 기준을 뒤집는다. 대상의 구체성은 남겨두고 차원과 규모만을 뒤 틀은 형식적인 특성으로 인해 그의 작품은 대중성을 확보한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생명과 사물, 우주의 이치를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2010년에 열린 개인전 부제 '신비한 과일가게'처럼, 관객으로 하여금 과일가게 들른 듯한 가벼운 태도를 권한다.


정정식_들판위의 포도_캔버스에 유채_60×120cm_2010

정정식_사랑스러운관계_캔버스에 유채_75×161.5cm_2010


딸기는 그의 '과일 가게'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다. 작품 「삼각관계+탐험」(2011)에서, 구름층으로 표현된 우주를 마주한 대기권에 딸기 셋이 삼각관계를 이루고 있다. 작품 「삼각관계」(2010)에서 인간세계를 상징하는 기하학적 무늬 위에 딸기 셋이 놓여 있는데, 짝을 이루지 못한 딸기 하나는 터져나간다. 작품 「해변의 딸기」(2010)에서는 옅게 칠해진 해변 풍경 위에 여자 하체 모양의 딸기가 떠있다. 그의 작품에서 씨를 밖으로 다 내보이는 불그레한 딸기는 욕망의 상징이며, 그것들이 자리하는 우주 역시 욕망이 지배한다. 작품 「행성」(2010)은 호수의 물이 화면 경계로 쏟아지는 가운데 거대한 복숭아 하나가 칠 흙 같은 우주에 다른 작은 행성들이 같이 떠 있다. 포도는 다수의 소우주로 이루어져 우주에 대한 풍부한 상징이 된다. 작품 「떠다니는 포도」(2010)에서 공중에 붕 떠있는 포도 알 하나는 푸른색 지구로 변모한다.



정정식_신의 테이블_캔버스에 유채_116.8×91cm_2010~9


작품 「행성의 나들이」(2010)에는 수평선 아래의 부드러운 모래 마루들 위에 거대한 포도송이가 있으며, 가지로부터 떨어져 나온 포도 알은 푸른 빛 행성이 된다. 작품 「행성탐험」(2012)에서 푸른빛 지구 위에 포도송이의 알들이 행성처럼 배열된다. 단자(monad)적 우주는 포도나 딸기 한 알에도 내재해 있다. 작품 「레몬」(2010)은 광대한 시공간의 지평에서 한 쌍의 레몬이 쌍둥이 행성이자 빵빵한 젖꼭지처럼 보인다. 과일가게에 서로 다른 과일들이 배열되어 있듯이 서로 다른 세계와 그 세계가 가능하기 위한 각각의 기준들을 인정하자고 제안한다.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은 바람이나 동물을 매개로 번식을 한다. 특히 과일은 그 안팎에 씨를 내장하며, 동물을 유혹하여 과육을 먹게 하고 소화가 되지 않는 씨앗은 배설을 통해 번식한다. 이렇게 다른 것을 통한 매개로 이동하는 식물의 전략은 우주적 차원에 까지 이른다. 우주에 항성처럼 둥둥 떠 있는 과일들이 의미하는 바가 그것이다. 그리고 번식력 강한 그것들은 우주처럼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정정식_옛날 옛적에_캔버스에 유채_116.8×91cm_2019


정정식의 작품에서 여성, 또는 남성의 하체와 중첩되곤 하는 불그레한 딸기는 다수의 씨를 밖으로 드러내면서 다산의 생식력을 뽐낸다. 행성 같은 무기물질로 변모하는 딸기는 어느 과일보다도 쉽게 물러지고 상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그래서 과일은 바로크 시대 유럽의 정물화에서 덧없음에 대한 알레고리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는 과일에서 덧없음이나 죽음에 대한 경고보다는 우주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상징을 본다. 정정식의 작품에서 광물질적인 영원성은 유기물의 순간성과 중첩된다. 그는 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를 보고, 찻잔 속에서 폭풍을 발견하는 낭만주의 시인, 또는 자연에서 프랙탈이나 카오스 현상을 연구하는 과학자의 비전을 가지고 있다. 화실 안에 떠도는 먼지나 안드로메다 성운과의 차이는 없다. 그의 화실에서 본 미완성 작품에는 한 화면에 빅뱅과 딸기가 공존한다. 작가는 '하나의 딸기는 한 번의 빅뱅의 결실물'이라고 말한다. 거리가 먼 대상, 또는 범주 간의 교통은 그의 작품에서 흔히 일어난다.



정정식_우주 탄생_캔버스에 유채_65×117cm_2017


공간적으로 거대세계와 미소세계가 중첩되듯이, 시간적으로 영원과 찰나가 중첩되는 것이다. 순간을 고정시키는 회화는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중첩시키지만, 그 안에 압축된 시간성이 있다. 그는 양자 간의 순환을 말한다. 정교한 재현의 기술은 쉼 없는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상징하기 위한 도구가 된다. 극대와 극소의 우주 사이에 인간이 위치하지만, 인간이 직접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부분적으로, 비유적으로 나타날 뿐이다. 그는 어릴 때 보았던 녹조류 가득 낀 연못 속의 금붕어를 떠올리면서 그 한정된 우주를 전부로 살고 있는 금붕어의 인식과 인간중심주의를 비교한다. 작품 도처에서 배반되는 것은 인간적 척도이다. 인간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개념을 보다 확장하자는 것이다. 정정식은 몸이나 정신에 있어서 나 자신을 초월하는 격세유전적인 관계에 대해 말한다. 나를 '수 없이 살아간 인류의 체험의 집합체'로 간주하는 그의 생각은, 인간을 진화의 매개물로 삼는 생물학적 유전자(the selfish gene)나 인류의 체험이 전달되는 문화적 유전자(meme)의 개념과 유사하다. ● 조상의 체험 또한 유전자에 입력되어 나에게 반복된다는 가설은 윤회적 사고에 닿아있다. 윤회적 사고에 의하면,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다른 삶과 체험의 시작이다. 육신과 정신은 돌고 돈다는 사상은 종교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격세유전적인 상징은 신비하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자연의 법칙에 내장되어 있다. 모든 것이 돌고 돈다면, 모든 것이 크기도 순환할 것이다. 가령 미세한 딸기에서 우주가 생성될 수도 있고, 우주가 소멸 할 때 과일 한 알 같이 작은 것으로 소멸될 수 있다. 시초와 끝을 가지는 직선적이고 단선적인 시간-역사관은 부정된다. 그의 작품에서 시간의 개념도 인간이 만든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시간은 그대로이고 지구, 행성, 인간이 흘러갈 뿐이다. '1초나 억만년이나 인간의 잣대'에 불과하며, 찰나와 무한은 하나이다. 순간을 고정시켜 영원화 하는 영원한 현재에 대한 비전은 초현실주의적인 그의 작품에 가득하다. ■ 이선영


 

Vol.20190626j | 정정식展 / CHUNGCHUNGSIK / 鄭正植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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