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
부자나 거지나 잘났거나 못났거나, 밥은 먹어야 산다.
돈 없고 오갈 데 없는 노숙인은 어떻게 끼니를 해결할까?
옛날 각설이처럼 깡통 들고 밥 얻어먹으러 다닐 수는 없잖은가?
코로나가 창궐하기 전엔 무료급식이 늘렸으나, 요즘은 대개 문 닫았다.

지난 19일 오후, 서울역광장에서 노숙인들을 지켜봤다,
다들 어떻게 먹고 사는지 알아 보고 싶었다.
술 마시는 부랑자나 고참들은 밥집을 찾지 않았으나,
시간이 되니 다들 밥집으로 몰려가 줄서기 시작했다.

서울역에서 남영동 방향으로 300미터 쯤에 ‘따스한 채움터’란 밥집이 있었다.
서울시에서 제공하고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복지재단에서 운영하는 곳이었다.
오후 4시부터 밥을 주지만, 3시부터 줄을 서기 시작했다.
평소 보지 못한 노숙인들이 많았는데, 쪽방 사는 분은 보이지 않았다.

관리자의 이야기로는 한 끼에 3-4백명씩 찾는다고 했다.
밥집은 1-2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대기실이 식당보다 더 넓었다.
다들 질서정연하게 밥을 타서 먹는데, 음식은 먹을 만했다.
비록 칸막이에 갇혀 개처럼 먹지만, 먹는 시간만은 행복했다.

쪽방에서 라면 끓여 먹는 것에 비한다면 진수성찬이었다.
줄서고 기다리는 게 싫어 대충 때우는 것 같았다.

귀찮아도 먹어야 산다. 그래야 술을 마셔도 버틸 수 있다.
밥은커녕, 안주도 없이 깡술을 마셔대니 어찌 버틸 수가 있겠는가?

밥 한 끼의 행복을 모른다면, 살 자격도 없다.
사진, 글 / 조문호

 

 

 



쪽방 올라가다 길에서 송범섭씨를 만났다.




송씨는 만나기만 하면 찍은 사진들 언제 주냐며 독촉이 빗발 같다.
빚쟁이 된 것처럼 만날까 피해 다닐 정도다.




예전에는 어버이날과 추석에 했던 빨래줄 전시로 사진을 주었으나,
그 일을 방해하는 사람으로 접고부터는 사진이 잘 만들어지지 않았다.
빨래줄 전시는 협찬 받아서라도 꼭 해야 할 일이었지만,
이젠 정해진 날자가 없으니, 차일피일 미룰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몇 일전, 재난지원금 받은 게 남아, 사진을 만들어 두었기에 전해줄 수 있었다.




생각난 김에 다른 분도 주어야 할 것 같아, 사진을 챙겨 동네 한 바퀴 돈 것이다.
먼저 노숙자 아지트로 찾아가 유정희씨와 병학이 사진을 전해주었다.
병학이는 사진 둘 때가 없어 유씨가 챙겨두겠단다.




노숙하는 이의 설움이다.
몸 하나 거둘 곳 없는 사람에게 사진이 무슨 소용이랴!




공원에서 만난 이남기씨에게 사진을 주었더니,
고맙다며 음료수 한 잔 마시라고, 천 원짜리 한 장을 준다.
한 푼이라도 남에게 신세지는 걸 싫어하는 성미다,




박성일씨와 박소영씨도 만났는데, 소영씨는 식혜를 주었다. 
다른 사람 주지 말고, 보는 앞에서 마시라며 채근했다.



자기 핸드폰을 열어 이런 저런 사진을 보여주며 속삭였다.
별 일도 아닌 사소한 일을 열심히 설명해가며 수긍해 주길 바랬다.
그 만큼 외롭다는 이야기다.




요즘 공원에서 술 마시는 사람도 많이 줄어 들었다.
무료급식도, 줄 세워 배급 주는 일도 다 끊겼다.
코로나가 빈민들의 생활 환경까지 서서히 바꾸고 있다.



그들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세상 외로움은 깊어만 간다.

사진, 글 / 조문호







 






동자동에는 빈민들의 세탁물을 맡아주는 ‘돌다리골 빨래터’가 있다.
2년 전 KT에서 시설을 제공하고 서울시에서 운영비를 대는 빨래터가 공원 앞 건물 1층에 들어섰는데,

손빨래에 의존하던 쪽방 주민으로서는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세탁기 진동에 따른 소음으로 지금의 골목 가건물로 이전한 것이다.



난, 대부분의 빨래는 주말에 들리는 정영신씨 집 세탁기에 의존하지만,

공용시설이 생기고 부터 두터운 이불 세탁만 가끔 한 번씩 이용하는 것이다.

일 년에 한 두 차레에 불과하지만, 이불 개수가 많아 두 번에 나누어 맡겨야 한다.



겨울만 되면 이불을 나누어주니, 비좁은 쪽방에 이불이 4개나 된다.

딱딱한 나무침대 쿠숀을 겸해 여러 겹 깔아 사용하니, 헌 이불도 버릴 필요는 없었다.




연례 행사처럼 치루는 봄철 대청소가 이번에는 차일피일 미루다 늦어졌다.

코구멍한 쪽방 청소가 큰일은 아니지만, 겨울 내내 밤배연기에 찌든 이불 세탁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염치 불구하고 침구를 모두 꺼내 맡겼는데, 다음 날 깨끗하게 세탁해 비닐로 포장까지 해 두었다.

모두 공짜라 황송하기 그지없는데, 일하는 분들까지 친절해 몸 둘 바를 모르겠더라.



덕분에 포근한 이부자리에서 편안하게 잠들 수 있게 되었으나,

서울역에서 노숙하는 분들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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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10일 / 서울역 / 추교부

대궐 같은 집에서 진수성찬 받았다.
아름다운 여인네와 사랑도 했다.

역무원 발길질에 단잠을 깼다.
꿈도 꿀 수 없는 팔자다.


사진, 글 / 조문호

꿈은 아래 이덕영씨가 꾸었고, 윗 사진은 최근 찍은 추교부씨



2016년 10월 4일 / 서울역 / 이덕영

2016년 11월 29일 / 동자동 / 이기영



왜 영악하게 살지 않았냐고 탓하지 마라.
왜 악착같이 벌지 않았냐고 탓하지 마라.

내 비록 빈 털털이라 멸시 받고 살지만,
그렇게 비굴하게 살지는 않았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돈에 고개 숙이거나

돈에 영혼을 팔지는 않을 것이다.


사진  / 조문호



가진 것도 갈 곳도 없다.
아무런 생각도 없다.

삶의 욕망조차 잃었으니,
짐승보다 못하다.

욕망에 병든 세상
이 무슨 모순인가?

사진, 글 / 조문호



한 동안 동자동에 있지 않아, 모처럼 동네 마실 나갔다.
꽃샘추위가 지난지도 한 참인데, 무슨 놈의 바람이 이리도 부는지,
다시 두꺼운 옷을 꺼내 입어야 했다.




부랑자 병학이가 거처하는 주차장 구석자리부터 찾았다.
얼마 전 어느 독지가에게 기증받은 텐트가 반가워, 
집들이 턱으로 술 한 잔 사겠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자리 있던 텐트는 어디 갔는지 사라지고 이불만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다.
옆에서 술 마시던 유정희씨가 죽은 사람 만난 듯 반긴다.




“아이! 어데 갔다 이제 옵니까?”라며 호들갑을 떨어 벌금 때우려 교도소에서 한 보름 섞다 나왔다고 했더니,
‘아! 몸 고루며 휴양하고 오셨구나. 그런 자리 날 좀 보내주지"라며 너스레를 떨어댄다.




그 것도 부재자 투표를 못하게 해 삼십 만원 손해 보고 왔다고 했더니,
“그까짓 투표 때문에 왜 돈을 날리냐”며 길길이 뛴다.
하기야! 그들에겐 선거 같은 건 관심도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삼십 만원이면 한 달이나 살 돈인데...




그나저나, 병학이 텐트는 어디 갔냐고 물었더니, 구청에서 철거해 갔다는 거다.
추워 술을 많이 마신 모양이라며, 자는 모습을 가리켰다.




아니,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주차장 구석의 텐트는 왜 가져간단 말인가?
텐트를 쳐 주어도 신통찮을 판에 어렵사리 구한 텐트마저 뺏는가?
물어물어 구청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더니,
주민 신고가 들어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4월2일 찍었던 병학이 텐트-

참 무서운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이라도 더 가진 놈이 없는 놈을 핍박하는 살벌한 세상이다.




서울역으로 건너갔다.
다들 양지바른 곳에 모여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컵라면으로 끼니 때우는 사람, 막걸리로 시름 달래는 사람, 자는 사람,
아무런 생각 없이 멍 때리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이었다.




마스크도 없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걸 보니,
전염병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말은 먼 나라 이야기 같았다.
하기야!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벼랑 끝 인생, 두려울 게 뭐 있겠는가?




정치하는 놈들은 노숙인들 죽고 사는 문제는 관심 없고,
오로지 총선결과 계산기 두드리며 도둑질해먹을 궁리나 하고 있으니,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더러운 세상 확 뒤집어 버리고 싶었다.




당연한 권리주장도 못하는 부랑자들 선동이나 할까보다.
폭동 일으켜 교도소가면 이런 개고생은 안 할 것 아닌가?
 
사진, 글 / 조문호














저작권 한국일보]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의 배경이 된 서울 마포구의 ‘돼지쌀슈퍼’ 옆 오르막길. 영화가 아카데미 4관왕을 수상하며 신드롬을 일으키자 지자체들은 나서서 영화의 배경이 된 지역을 관광 코스로 개발하겠다고 발표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부자들이 가난을 탐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해 본 일이었다. 그들의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한다는 건 미쳐 몰랐다.”

박완서가 1975년 발표한 소설 ‘도둑맞은 가난’의 그 유명한 대목이다. 가난에 가족을 잃은 주인공은 함께 공장에 다니며 동거하던 남자친구 상훈이 실은 잘 사는 집 도련님이자 대학생이었고, 아버지 명령에 따라 방학 동안 가난 ‘체험’을 하러 온 것을 알게 된다. 상훈은 주인공에게 돈을 건네며 “덕택에 진귀한 경험을 했다”고 말한다.

가난은 누군가에겐 당면한 위기이자 목을 죄어오는 실감이지만, 한 발짝 떨어져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진귀한 경험이자 드라마틱한 장면이다. ‘쪽방촌 체험’을 진행하고 ‘기생충’이 흥행하자 영화 속 재개발 지역을 관광지로 개발하겠다는 서울시, 선거철만 되면 낙후한 재래시장과 쪽방촌을 배경으로 찍힌 사진을 홍보에 활용하는 정치인. 누군가의 삶을 전시하고 감상하는 ‘가난 포르노’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늘 반복돼 왔다.






'가난 사파리' 저자 대런 맥가비. 돌베개 제공


영국의 래퍼 겸 작가 대런 맥가비는 이 같은 행태를 ‘가난 사파리’라고 부른다. 책 ‘가난 사파리’는 스코틀랜드 빈민지역에서 태어나 하층계급의 삶을 살아온 저자가 기록한 자신의 성장담이자, 가난 문제를 빈곤사업에 종사하는 전문가와 정치인에게만 맡겨두는 현실을 꼬집은 사회비평서다.

책은 2017년 영국 런던 켄징턴 북부에 있는 24층 높이의 임대아파트 그렌펠 타워에서 발생한 대형 화재 참사 이야기로 시작한다. 고층 아파트가 부를 상징하는 한국과 달리, 영국에서 고층 공공주택은 자신만의 주택을 갖기 힘든 빈민층의 집단 거주지다. 타워 주변은 영국에서 경제적으로 하위 10%에 드는 가장 낙후한 지역이었고, 주민 대부분이 저소득층과 이민자들이었다. 79명이 사망하고 74명이 부상당한 이 끔찍한 참사 후 언론은 그렌펠타워와 하층계급 사람들을 집중조명했지만 여론의 관심은 금방 휘발됐다. 맥가비는 “진열창 앞 안전한 거리에서 원주민을 잠시 둘러보는 사파리가 끝나고 나면 모두가 그에 대해 서서 잊어버리고 만다”며 ‘사파리 투어’와 다를 바 없는 사회의 가난 서사를 꼬집는다.

알코올중독자였던 어머니의 지속적인 학대와 방치, 이로 인한 트라우마로 맥가비는 어린 나이부터 알코올과 약물 문제를 겪었으며 노숙인 주거지원을 비롯해 각종 국가지원을 받았다. 때문에 맥가비의 책은 가난을 상투적으로 분석해온 종전의 글쓰기와 다를 수밖에 없다. “나 같은 사람은 책을 쓸 수 없다”는 흔한 편견을 향한 자기고백에서 시작된 글은 소년원, 폭력 가정, 억압적인 학교, 감옥과도 같던 고층 공공주택, 거리에 있는 소년범, 노숙자, 중독자, 학대 생존자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가난 사파리

대런 맥가비 지음ㆍ김영선 옮김

돌베개 발행ㆍ354쪽ㆍ1만6,500원



빈민지역을 둘러싼 여러 모순을 언급하며 맥가비는 정부와 시민단체를 비롯한 사회가 가난한 지역과 가난한 이들을 어떻게 소외시키고 고립시켰는지 지적한다. “사생활은 우리 같은 사람들은 손에 넣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사치재가 된다. 존엄성이란, 있는 사람들한테다 해당되는 것이었다.” “정치적 무관심은 흔히 하층계급과 연관되는 특징이지만 우리는 왜 그런지 거의 검토하지 않는다.” “빈곤산업에서는 선량한 사람들도 사회적 박탈로부터 어마어마한 돈을 번다. 가난을 뿌리 뽑는 게 아니라 낙하산으로 와 ‘업적’을 남겨야 성공할 수 있다.” 이런 문장들을 통해 맥가비는 자신이 직접 겪은 생생한 분노를 통렬한 비판으로 승화시킨다.

책이 가난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답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 답을 국가나 정치인이 갖고 있지도 않다. 오히려 맥가비는 “가난은 경쟁하는 소수의 정치적 팀 사이에 벌어지는 게임이 됐다”며 “정치 스펙트럼상 어느 쪽인지와 무관하게 온갖 당사자들이 이런 게임을 벌인다”고 가난을 정치공학적으로 이용할 뿐인 좌우파 모두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러나 맥가비의 말처럼 “가난은 게임도 아니고 곧 없어질 것도 아니며 이곳에 계속 머물 터이며 개선되지 않으면 상황은 더 나빠질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가난한 세계를 져버릴 수가 없다. 그리고 물론, 그 세계를 바꿀 힘은 다른 누구도 아닌 가난하거나 가난했던 우리 손에 달려 있다. 맥가비가 아마 그 증거일 것이다.

한국일보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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