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28일 오후8시, 봄비가 인사동을 촉촉히 적셨다. 

 

 

 

 

 


 

 

 

 

 

 

 

 


지난 15일은 봄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인사동이 흥청댔다.
이날따라 기타연주로 노래부르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그 용기에 비해 실력은 별로였다.
하나같이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는 팻말도 걸고 있으나, 너무 흔해 신빙성도 없었다.

이 날  눈길을 끈 장사는 달고나 뽑기였다.

처음 본 장삿꾼이 하나에 2,000원씩 팔고 있었는데, 손님이 줄을 섰다.

역시 인사동에서는 향수를 불러 일어 킬 수 있는 것들이 잘 팔리고, 인사동과도 어울렸다.

사람들이 붐비는 낮 시간에는 보이지 않던 까딱이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니 모습을 드러냈다.

거지답지 않게, 그도 사람 붐비는 게 싫었던 모양이다.
가물 가물한 인사동 추억들이 그리워지는 하루였다.

 

 

 

 

 

 

 

 

 

 



삼일절을 맞은 인사동은 흥청댔다.
덩달아 거리의 상점들도 부산했다.
태극기가 잘 팔리고, 지팡이 아이스크림이 잘 팔렸다.
지팡이 아이스크림은 전염병처럼 번져 나갔다.
인사동거리는 태극기 반, 지팡이 반이었다.

 

 

 

 

 

 

 

 

 

 

 

 

 

 

 

 

 

 

 

 

삼일절을 맞은 인사동 거리는 태극기물결과 만세소리로 넘쳐났다.

95년 전, 그 날의 흥분과 감격을 실감하며 시민 모두가 애국심으로 하나 될 수 있었다.
서울시가 후원하고 종로문화원이 주관한 제95주년 3.1만세의 날 거리축제는 오전 10시부터 남인사마당에서 열렸다.

국회의원 정세균씨와 종로구청장 김영종씨 등 500여명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기념식에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정암 이종훈선생의 손 이재봉씨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극단 파발극회의 3.1절기념, 인간조각 퍼포먼스와 뮤지컬 갈라쇼 "광복이 오면" 등 다양한 볼거리가 이어졌고, 페이스 페인팅으로 밀납인형처럼 분장한 학생들의 모습들이 시민들의 눈길을 끌기도 했다. 기념식 후, 인사동에서 보신각까지 대형태극기를 앞세워 가두행진에 나섰는데, 보신각에는 박원순시장, 임우철씨, 가수 한 돌 등 많은 시민들이 모여, 33차례의 보신각 종을 타종하는 것으로 행사를 마무리 했다.

그리고 쌈지길에서는 45명의 대학생으로 구성한 오케스트라가 인사동 아리랑과 애국가를 연주하며 감동의 시간을 안겨주었고, 거리 곳곳에는 여학생들의 만세 퍼포먼스가 펼쳐지기도 했다. 

이웃한 탑골공원에서 열린 민족대표33인 및 삼일독립운동 희생선열을 위한 추념식은 오후2시부터 열렸다.

한민족단체운동연합회와 민족대표33인 유족회가 주최한 추념식에는 일본의 만행 살풀이와 독립선언문낭독이 이어졌고,

군악대 연주아래 3.1절 기념노래와 만세소리가 탑골공원을 가득 메우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남인사마당 기념식과 시간 차를 두어 두 곳 모두 많은 시민들이 참석할 수 있었고,
이번 추념식은 보훈처에서 후원한 탓인지 초라하고 궁색했던 예년의 행사는 면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의 만행을 되 세긴 하루였고, 독도 생각을 가장 많이 한 하루였다.

 

 

 

 

 

 

 

 

 

 

 

 

 

 

 

 

 

 

 

 

 

 

 

 

 

 

 

 

 

 

 

 

 

 

 

 

 

 

 

 

 

 

 

 

 

 

 

 

 

 

 



내일 모래가 입춘이라는데, 인사동이 너무 춥다.

거리는 평소보다 한산했고, 사람들은 총총걸음이다.
그 찬 바람 맞으며 바이얼린 켜는 악사나 거리의 노점상이 죽을 맛일게다.

따끈 따끈한 구들방과 님의 품 속이 그리운 그런 날이었다. 

 

 

 

 

 

 

 

 


지난 3일 정오무렵, 인사동으로 나갔다.
정초에는 장이 서지 않아 자료 정리하느라 몇 일 동안을 컴퓨터와 씨름했는데, 뜻밖의 강 민선생님 부름에 얼씨구나 한 것이다.  약속한 ‘포도나무집’에는 강 민선생님과 조준영씨가 자리하고 있었고, 뒤늦게 심우성선생님도 오셨다.

강 민선생님과 심우성선생님은 한 살 터울의 친구인데도, 내가 보기에는 부자지간 같아 보였다.


그동안 조준영교수는 학회 일로 스페인을 다녀오셨다고 한다.
틈틈이 가족들 관광시키느라 힘들었는지, 눈의 실핏줄이 터져 한동안 고생했단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푸른별이야기’ 안방을 집필실로 쓰는 심우성선생님께서는 지난 년 말 출판하였다는

‘통일 아리랑’이란 책을 주셨는데, 잠자리가 마땅치 않아 인사동 부근의 여관에서 투숙하신다고 하셨다.
무슨 사정으로 이 추운 날 가출해 고생하시는지 모르겠다.
옛 시절의 방랑벽이 도졌는지 모르지만, 인사동을 고향처럼 생각하시는 분인지라 그리 불편한 기색은 없었다.

인사동 구석 구석을 살피고 다닌 선생님 덕분에 최근의 따끈따끈한 인사동 정보도 입수 할 수 있었다.

조계사 맞은편, 농협 윗 골목에 ‘화목’이란 식당이 있는데, 한끼에 3,000원을 받는단다.
땅값 비싸기로 소문난 인사동에서 3,000원짜리 식사가 있다는 말에 귀가 번쩍 띄었는데,
"그냥 들어가면 5,000원을 받으니, 사전에 식권을 구입해야 한다"며 식권까지 보여주셨다.
90,000원을 주고 식권 30장을 한꺼번에 구입하는 애로는 있지만, 일단 음식이 먹을 만 하다는 것이다.
가까운 시일 내에 한 번 먹어보고, 블로그에 상세하게 소개할 작정이다.

2차로 ‘노마드’로 자리를 옮겼으나 대문이 걸려, 옆 커피집에서 기다려야 했다.
오후5시가 지나서야 자리를 옮길 수 있었고, 김명성씨와 권영진씨가 차례로 나타났다.

'아라아트' 김명성씨는 신특수씨의 대규모 전시 신청을 받고, 빈 자리가 없다는 반가운 고민도 했다. 

 

요즘은 낯 술에 영 맥을 못 춘다.

점심 때 마신 소주 탓인지 몸이 힘들어 더 이상 버텨 낼 수가 없었다.
지난번 한정식선생님과의 오찬회에서도 백세주에 맛이 가, 온갖 주정을 부리다 결국 그 이틀 날 자리에 드러눕지 않았는가.

 

"백세주가 내 한테 쥐약인줄 알민서도 마신 내가 미친넘이지!
새해 다들 몸조심하시고, 술도 에껴서 오래~오래~ 무입시더~"

 

 


 

 

 

 

 

 

 

 

 

 

 

 

 

 

 

 


고영준씨는 내가 처음 서울로 올라와  만난 사진가들 중 어느 누구보다 가장 절친했던 사우다.

80년대 초반, 그가 한국사진작가협회에서 일 할 때였다.

 

쥐꼬리만 월급으로 사는 주제에 내가 회사에 면접보러 간다니까 "옷이 그래가지고는 않된다"며

자기 카드로 양복을 사주었던 그런 인정많은 친구다. 

 

그 당시 인사동의 '꽃나라'흑백 암실에 드나들던 사진인 모임이었던 '진우회'(일명:진로회) 맴버로 시작하여  

'한국환경사가회'와 충무로에 있었던 '한국현대사진가회'까지 오랜 세월 같이 일해 왔다.

지금도 사진을 전업으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은데, 그 당시는 여유있는 사람 아니면 버텨내기 힘든 시절이었다.

 

10여년 전 느닷없이 태국으로 돈 벌러 간다며 자기가 아껴 입던 옷가지를 골라 와 내게 전해 주었다.

그 곳은 더운 나라이기에 정장이 필요없다지만, 그 속 깊은 마음을 모를리가 없었다.

이 친구, 처음에도 옷을 사 주더니 떠나면서 까지 옷을 주어, 영원한 작별인사가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는 가끔 한국에 다니러 올 때 만났는데, 태국에서 벌인 사업이 궤도에 올라 돈 걱정없이 산다기에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몇일 전 아내의 핸드폰으로 그가 한국에 왔다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요즘은 장터 촬영으로 바쁜 나 날을 보내기에, 지난 일요일에서야 그를 인사동에서  만날 수 있었다.

지난 번 서울대학병원에서 심장수술을 받은 적이 있는데,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정기검진 때문에 왔다고 했다.

 

그 좋아하는 술을 끊은지는 오래지만, 심장수술로 담배마저 끊고 이제 목숨 끊는 일만 남았다며 실없이 웃었다.

사동집에서 술 한 잔 없는 만두전골로 재미없는 식사를 하고, 허리우드에서 커피 한 잔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자판기 스타일의 커피를 주문했는데, 비슷하다며 가져 온 이름도 모르는 커피는 맛보다 크림 문양이 일품이었다.

 

 그동안 살아 온 이야기들을 주고 받다, 태국에서 사진은 찍지않고 골프치는데 소일 한다는 그의 말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물론 사람들과의 유대관계도 무시할 수 없을지 모르나 그건 아니다 싶었다.

언젠가 틈을 내어 그의 주변 상황을 살펴 본 후, 다시 카메라를 잡도록 설득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는 선배 사진가들의 안부로 화제를 바꾸었고, 선배들이 찍어두었던 사진 활용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되었다.

특히 사회 구석 구석을 돌아다니며 사회 생활상의 단면을 찍어 온 다큐멘터리사진들이야 말로

지금은 세월의 무게에 그 가치가 날로 높아가지만 스스로 과소평가하거나, 생활고에 쫓겨 거뜰 떠 볼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사회에 전혀 주목받지 못한 채 사장되어가는 들의 원고를 찿아내야 한다는데 생각이 모아졌다.

이 사진들을 발굴하려면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전문가들의 도움은 물론,

그 원고들을 검토하여 고르는 것에서 부터 옛 필름들을 스캔하고 수정하는 일들이 간단치가 않다.

결국은 돈이 필요했다. 본인들이 세상을 떠나면 사장되기 쉬운 한국사의 중요한 기록물 수집은

정부에서 발 벗고 나서야 하는데, 누가 그들의 목에 방울을 달 것인지 그것이 문제였다.

 

요즘 이사장 선거로 바람 잘 날이 없다는 '한국사진작가협회'는 도대체 무엇하는 단체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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