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 허물고 대중에 공개된 송현동 ‘열린송현녹지광장’ 2027년 정식 개장까지 공간 활용 위한 대화 이뤄져야
제4회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기간 열린 송현녹지광장에 설치됐던 '하늘소' 전망대 ⓒ김지나
김지나 [도시문화칼럼니스트]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가 얼마 전 폐막했다. 2017년 처음 시작해 벌써 4회째를 맞이한 도시, 건축 분야의 전시축제다. 갈수록 다양한 모습으로, 또 복잡하게 변해가는 도시 문제들을 각계 전문가와 시민들이 함께 고민해보는 장으로 기획됐다. 그동안 전시공간으로 활용된 장소들도 이색적이다. 서울도시건축전시관, 세운상가,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등 서울 도시개발의 여러 가지 실험을 이루어졌던 현장들이었다.
주로 실내에서 전시가 이루어졌던 지난 행사들과 달리, 이번에는 메인 전시장이 야외라는 점이 눈에 띄었다. 열린송현녹지광장이란 곳이다.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만큼 생경하게 느껴질 법한 이 공간은 서울 송현동에 생긴 넓은 녹지다. ‘생겼다’ 보다는 ‘공개됐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오랜 세월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 누구도 손대지 못했었던 땅, 부동산 시장에서는 나름 뜨거운 감자였던 ‘송현동 땅’이 바로 여기다.
하늘소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녹지광장과 주변 풍경 ⓒ김지나'페어 파빌리온'. 비엔날레 기간 열린 송현녹지광장에 설치된 파빌리온 중 하나다. ⓒ김지나
활기 채워가는 도심 속 녹지광장
작년 10월 처음 임시개방이 됐을 때만 해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서울 한복판에 드물게 남아 있던 금싸라기 땅이었지만 ‘녹지광장’이란 쓰임새는 낯설고 또 당황스러운 결정이었던 듯하다. 그러다 올해 도시건축비엔날레의 전시장으로 결정된 후, 풍경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늘소’라는 거대한 전망대가 가장 먼저 들어섰고 곧이어 다양한 형태와 색감의 설치작품들이 푸른 녹지를 조금씩 채워나갔다. ‘파빌리온’이라 불리는 임시 건축물들로, 모두 비엔날레 기간 동안에만 전시됐다가 이후 해체돼 자재들만 재활용될 예정이다.
그러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지난 두 달간은 평일 낮에도 찰나의 가을 날씨를 만끽하기 위한 사람들로 녹지광장에는 활기가 넘쳤다. 전시기간동안 광장에 전시된 작품들이 난해한 구조물로 보였을 법도 했지만, 시민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즐기는 모습이었다. 하늘소 전망대에서는 인왕산과 북악산을 품은 서울 도심의 경관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이 땅이 어떤 환경 속에 있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지하철역과 가까운 데다 경복궁과 국립현대미술관, 북촌한옥마을, 인사동으로 둘러싸인 위치도 사람들을 불러들이기에 부족한 점이 없었다. 비엔날레 관람객이 약 80만 명으로 집계됐다고 하니, 열린송현녹지광장을 찾은 사람들의 숫자도 결코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송현동은 관광객도, 업무 차 드나드는 사람도 많을 수밖에 없는 동네다. 하지만 이전에는 녹지광장 자리가 어떤 풍경이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작년 초까지만 해도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일반 사람들은 들어가 볼 수도,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도 없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서울 도심 한복판, 이토록 넓은 평지가 개발되지 않고 비어 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녹지광장을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 ⓒ김지나
공간의 미래 위한 시민 토론 이어져야
지금의 열린송현녹지광장이 되기까지, 그 과정을 살펴보면 기구하다는 표현 말고는 더 적합한 단어가 없을 정도다. 그 이름에서 나타나듯 조선시대에는 소나무가 울창한 숲이었다. 경복궁을 보호한다는 목적이었지만 조선 말기 안동 김씨 집안 소유로 넘어간 것을 시작으로 ‘숲’으로서 역할은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식산은행 사택, 미국대사관 직원숙소를 거쳐 개발을 노리고 삼성생명, 대한항공이 차례로 주인이 됐으나 별다른 진전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땅에 얽힌 각종 규제 때문이었다. 결국 서울시에서 이를 다시 매입하고 공원으로 개방하게 된 것은 자연스런 수순에 가까웠다. 서울 한복판, 우리나라 역사 도심 속 남아 있는 빈 공간에, 공공 공간 말고 또 어떤 용도를 논할 수 있었을까.
이제 여기 새로운 녹지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지난 두 달 동안 보고 느꼈다. 앞으로도 크고 작은 문화예술 행사들이 예정돼 있다. 하지만 ‘송현동 땅’이 앞으로 어떤 공간이 돼야 할지,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정부나 지자체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통보하는 방식은 재고해야 한다.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충분한 시민적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은 결과물은 또 다른 갈등을 낳을 뿐이다.
다행인 것은 이번처럼 유휴공간이 생겼을 때 임시 개방기간을 가지고 시민들이 실제로 사용해볼 기회가 주어지는 사례들이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반환 미군기지인 원주 캠프 롱, 벽돌공장 건물이었던 연천 DMZ피스브릭하우스, 이번 안양 공공미술 프로젝트 전시장인 옛 농림축산검역본부 등 이슈도 다양했다. 이런 시도들이 임시방편으로 끝나지 않고 시민들의 경험을 실제 개발계획에 반영할 수 있도록 고민이 필요하다. 열린송현녹지광장이 정식 개장하는 2027년까지 이 땅의 미래에 대한 많은 대화가 오고가는 여건이 마련되길 바란다.
넷플릭스가 오리지널 시리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 담긴 특별한 힐링 포인트를 전하는 토크 이벤트를 진행했다. 7일 오후 인사동 코트에서 열린 힐링 토크에는 이재규 감독과 박보영 배우, 김지용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백은하 배우연구소 소장과 함께 우리 모두에게 전하는 따뜻한 공감과 위로의 메시지까지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입체적인 캐릭터와 정신질환에 대한 현실적인 묘사 속에서도 웃음과 위로를 통해 정신병동에 대한 편견을 따스한 온기로 녹인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백은하 소장은 "누구도 처음부터 그리고 끝까지 환자가 아니며, 퇴원을 하고 난 이후에도 현실에서의 싸움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 작품"이라는 감상평으로 힐링 토크의 시작을 알렸다.
이재규 감독은 "이번 시리즈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부딪히는 모습들을 통해 일상성을 강조하고 싶었다. 경제지표가 올라갈수록 행복 지수도 동반 상승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우리나라는 반대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며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자책 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또 우리 일상 가까이에 아픈 마음을 가지고 있는 분들을 건강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이번 시리즈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박보영 배우는 "다은이는 저와 맞닿아 있는 부분이 참 많은 캐릭터라 그녀의 성장을 응원한 동시에, 칭찬 일기를 쓰면서 저 또한 새로운 발견과 힐링을 느꼈다. 매 회 등장하는 직장인, 취준생, 워킹맘 등처럼 각자의 삶에서 고군분투하고 계신 모든 분들에게 응원을 전한다"는 따뜻한 소감을 전했다. 김지용 전문의는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의 차별점이 "스스로 인식하지 못했던 편견을 직면하면 불편한 감정을 느낄 수도 있는데, 그런 부분을 스스럼없이 현실적으로 묘사해준 작품"이라는 관람평과 함께 "정신질환을 앓고 계신 분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전했다.
배우 박보영, 이재규 감독, 김지용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넷플릭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황과 불안장애 등 정신질환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시청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다양한 장치들을 구현했다. 이재규 감독은 "팔이 부러지거나 감기에 걸리면 다른 사람들이 쉽게 알지만, 정신질환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아픔을 시각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많이 고민했다. 실제 병동에서 본 모습들을 반영하기 위해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환자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그들이 느끼는 증상을 스크린에 담기 위해 다양한 촬영 시도를 했다"고 말했다.
김지용 선생님 역시 "사회불안장애로 힘들어하는 환자가 느낄 마음을 동물원에 갇힌 동물처럼 표현한 부분이 와닿았다. 환자들이 느끼는 증상을 단순화하고 시각화해서 보여주는 장면들이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시청자들에게 전하는 힐링의 말을 묻는 백은하 소장의 질문에 이재규 감독은 "오늘 이 자리처럼 극을 놓고 많은 분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더욱 늘어났으면 좋겠다. 더 나아가 우리 사회도 마음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사회적인 인프라가 더욱 늘어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지용 전문의는 "공개 직후 국내 넷플릭스 시리즈 1위에 오르며 정신질환과 정신병동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좋은 메시지를 파급력 있게 전하는 것을 볼 수 있어 기뻤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정신건강에 대한 우리나라의 인프라를 돌아보고, 더 많은 투자로 이어지는 사회의 작은 변화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겸재정선미술관은 겸재 정선(1676-1759)의 화혼畵魂과 작품 세계, 그 시대의 정신과 전통을 조명하여 오늘을 창조적으로 여는 전시를 계속 개최해 왔습니다. ● 겸재 정선이 끝없는 실험정신으로 정진해 새로운 미술의 길을 개척했듯, 여성민 작가 또한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창조하기 위해 새로움에 집중하는 모습이 겸재와 닮아있습니다.
이번 여성민 작가의 『비자림에 관한 고찰-인간의 탐욕으로부터』 전시는 '겸재 화혼 재조명'의 세 번째 기획전시로, 그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는 제주에 위치한 비자림을 다각도로 고찰한 작품을 새롭게 선보입니다. 이번 전시가 그의 다양한 창조적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뜻깊은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 아무쪼록 작가가 던진 화두를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공감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 겸재정선미술관
여성민_나팔꽃이 나무들 사이에 피었습니다 1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5.5×33.4cm_2023
에메랄드빛 바다와 오름, 봄기운이 가득한 유채꽃밭, 소담한 돌담길과 아름다운 해안도로, 비자림 산책길. 제주의 풍경은 언제나 소박한 듯 영롱하게 아름답고, 정겨우며 평화롭다. 제주도 중앙에 자리한 한라산을 오래 타면, 잎과 줄기를 잃은 나무 그루터기에 앉길 꺼려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자라다가 잘려 나간 나무의 '한'이 서려 있을지 모른다는 이유에서다. 제주시 구좌읍 비자숲길 55는 비자림이 위치한 주소이다. 비자림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체오름, 거친오름, 밧돌오름, 안돌오름, 거슨세미가 위치해 있고, 남쪽으로는 칡오름, 민오름, 족은돌이미, 큰돌이미, 비치미오름이 분포해있다.
한라산 중턱에 있는 수십 킬로 늘어서 있는 비자림 나무는 왜 잘려 나갔어야만 했을까? 기후변화 탓에 죽어 가는 것도 아니고, 가뭄에 수분 보충이 어려워서 죽어가는 것도 아닌데, 아름다운 숲은 인간의 필요라는 목적 아래, 인간의 탐욕이라는 톱에 의해 잘려 나갔다. 제주도 한라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비자림의 수많은 나무는 교통의 편리함이라는 목적 아래, 인간의 욕심과 무책임을 갈구하는 손과 그 손에 들린 탐욕이라는 톱에 의해 베어져 나갔다.
여성민_비자림에 잘려 나간 나무들의 추억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33.4×21.2cm_2023여성민_비자림에 잘려 나간 나무들의 추억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33.4×21.2cm_2023
자동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배기가스와 매연은 하늘의 색을 어둡게 만들었고, 그 하늘 아래 살아가는 사람과 동물, 농작물뿐만 아니라 제주도 우리의 땅에도 많은 해를 입혔다. 환경오염은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점차 심화되고, 결국 우리 자신을 파괴의 길로 이끈다. 역설적으로, 이 땅이 우리와 후손들에게 내린 선물인 자연이 파괴되는 이유는 인간의 '필요'때문일 것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무엇이고, 왜 필요한 존재인가? 비자림의 나무들은 왜 인간의 탐욕으로 잘려 나갔는가?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비자림의 나무들은 왜 잘려 나갔는가?
질문에 답을 해야 할 우리가 먼저 유념해야 할 점은, 나무를 자르고, 풀을 베어낸 톱을 가진 것, 흐르는 물을 머무르게 해 자연의 법칙을 파괴한 것, 그 굴레 속에서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밀고 있는 것도 인간이지만, 단단히 묶인 밧줄과도 같이 얽힌 오염과 파괴, 그리고 파멸의 굴레를 끊어낼 칼을 지닌 것도 인간이라는 점이다. 제주 비자림에서 톱에 의해 잘려 나간 나무들을 보면서, 인간이 탐욕으로 인해 행한 환경의 파괴는 우리의 후손들이 고스란히 돌려받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갈라지고 부러져도 버티고 있는 나무는 각박한 세상을 묵묵히 견디며 자기 치유의 시간을 갖으며, 삶에 찌든 사람들에게 또는 여행자들에게 치유의 시간을 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비자림에서 잘려 나간 나무들이 살아왔던 세월이 남긴 나이테를 보며, 우리의 후손에게 그토록 아름답고 귀한 생명이 한때 살아 숨 쉬었음을, 알리기 위해 이를 작가의 망막에 담아 표현해본다. ■ 여성민
작품 소개 ● 서울이라는 대도시는 대한민국의 수도이기도 하지만, 본인이 태어나서 30년 넘게 생활해온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본인이 오랫동안 생활해온, 고도의 자본주의 정신이 물질화 된(되고 있는)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 곳곳을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 기법을 사용하여 사진 형식을 기본으로 하는 디지털 이미지로 표현하였다. 현재, 대도시(=메트로폴리스)로 거듭나고 있는 서울에서는 재현 가치를 우선으로 하는 상품 세계의 판타스마고리아(환영)와, 상품 세계를 만들어내는 사회가 근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판타스마고리아(환영)가 도시를 가득 메우고 있으며, 이는 서울을 단순히 삶을 영위하기 위한 공간이 아닌, 초현실적인 장소로 탈바꿈시킨다. 상품 세계 그 자체 뿐 아니라, 상품이 전시되는 방식과 그 전시 공간, 그리고 전시 공간이 되는 도시를 중심으로 상품 세계 전반의 판타스마고리아(환영)가 펼쳐지는 것이다. 상품의 판타스마고리아(환영)는 상품 세계를 바라보는 산책자의 시선뿐만이 아니라 그 도시 공간을 구성하는 불특정 다수인 대중들에 대한 경험까지 확장시키는데, 결국 도시의 판타스마고리아(환영)적 이미지는 도시의 건축물들, 도시를 배회하는 대중들, 그리고 상품들에 의해서 규정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대도시 서울 곳곳의 장소들에서 환영적으로 펼쳐지는 이미지들을 사진 형식을 기본으로 하는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 기법으로 제작해 보았다.
작가 및 기법 소개 ● 현대 도시의 풍경을 이미지로 표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의 일환으로 '판타스마고리아' 기법을 사용하여 '플라뇌르' 시리즈를 진행 중에 있는데, 플라뇌르(flaneur)란 '거리 산책자'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현대의 도시를 상상력과 직관을 지닌 채 누비고 다니는 예민하고 고독한 사람을 의미한다. '플라뇌르' 시리즈 작업은 대도시(=메트로폴리스) 곳곳에 잠재되어 있는 자본주의적 욕망을 이미지로 드러내 보이는 일로써, 항상 새로운 것 같지만 사실은 같은 것들의 반복일 뿐인 '반복 동일성'의 신화가 지배하고 있는 고도화된 상품 자본주의의 공간으로서, 대도시의 다양한 모습들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본인은 이것을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 명명하고자 한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모종의 환영과 그로 인한 욕망으로 인하여 작동하는데, 그러한 환영과 욕망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추동하는 근본적인 요인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불가항력적이고 애매모호한 감정을 이미지를 통하여 표현해보고자 한다.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는 환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판타스마(Phantasma)에서 유래한 단어로 환등상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의미를 지닌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 기법은 우리가 직접 발을 딯고 살아가는 현실을 기반으로 하여, 단순히 사람의 눈(=망막)에 비치는 외부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기 보다는, 카메라라는 기계의 눈(=렌즈)을 빌려 인지적으로 작동하는 초현실의 모습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사진이라는 매체는 기본적으로 '레디메이드'이기 때문에 위와 같은 작업 방식에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보통 아우라를 상실시키는 것으로 알려진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다시끔 아우라를 복구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 본인은 작업을 통하여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모습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언뜻 보면 경계가 명확하고 확실해 보이나,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모든 것들이 뒤엉켜 섞여있다. 경계라는 것은 모종의 인위적인 사회적 약속이며 언제나 고정적이지 않고 상황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인 것으로, 그러한 경계가 불명확하고 모호한 세계, 가상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가상이 되는 소위 '포스트모던'한 디지털 세계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러한 세계 감정을 모두와 함께 공유하고자 한다. ■ 전강희
익명의 시간을 노정(路程)하는 찰나의 무늬 ● 여기, 도시를 유영하며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통해 도시 공간의 서사를 더듬는 차가운 시간이 있다. 1. 카메라의 셔터가 눌리는 순간, 사진 프레임에는 시간의 영속성이 박제된 이미지로 탈각되어 갇힌다. 그것으로써 사진 이미지의 운명이 결정되어 버린다면 사진 이미지는 우리 세계에서 공진(共振)하지 못하고 화석화된 시간 속에 영원히 서식하게 될 것이다. 사진의 속성이 순간의 가시적 세계를 투명(transparent)하게 '기록'하는 소임으로만 수렴될 때 벌어지는 일이다. ● 비평가이자 기획자이며, 그 역시 사진가였던 존 사코우스키(John Szarkowski 1925~2007)는 그가 1962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기획한 <사진가의 눈>이라는 전시에서 '사진'이 과거에 머문 단순한 기억의 파편이 아니라 과거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이며, 멈춰 있는 현재를 통해 다가올 미래를 그려 볼 수 있는 '현재성'을 담지한 컨텍스트임을 설파 했다. 사진의 살아 있는 생명력을 말하고자 했던 그의 견해처럼 사진이 만들어 가는 이미지는 인간과 자연의 생활세계에 관여하며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 생명력을 얻은 사진의 힘으로 하나의 장소에 귀착해 그 공간에 스며드는 사람과 풍경을 긴 시간을 들여 하나하나 포획해 겹쳐 가는 전강희의 작업은, 구체적 해명이 쉽지 않은 장소성에 얽힌 일상의 핍진성을 증폭하는 힘을 갖는다. 동시에 특정한 시공간에 깃든 인간 군상과 사물들의 움직임을 켜켜이 포갬으로써 얻어지는 '이미지의 불투명성'으로 현대 자본주의의 체계에서 미약해져만 가는 인간 존재의 함량을 표징 하려고 한다.
2. 이번에 선보인 「플라뇌르(Flanuer) 서울」 연작에서도 그러했고 이전의 작업에서도 전강희는, '플라뇌르'의 사전적 의미처럼 한가롭게 공간을 배회하는 산책자의 가벼운 태도를 견지하며 피사체에 대한 감정의 개입을 극도로 경계하는 작업 방식을 보여준다. 감정의 개입이 차단당한 채 무수히 겹쳐진 사진 이미지들은 멀리서 관조하면 덧칠의 덧칠을 거듭한 거친 마티에르로 이루어진 먹먹한 풍경화처럼 다가온다. ● 이미지의 과잉을 하나의 프레임 안에 허용해 이미지의 선명성을 흐려 이미지의 형태를 소거하는 전강희의 독특한 방식은, 김아타(본명: 김석중, Atta Kim 1956~ )가 2005년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8시간의 장노출을 이용해 뉴욕 타임스퀘어를 지나 간 수많은 자동차들과 사람들의 형태를 먼지처럼 뭉개버린 사진 이미지와 겹쳐지곤 한다. 하나는 이미지의 과잉을 통해, 다른 하나는 이미지의 결핍이라는 상반된 방식을 통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멸한다.'는 이른바 존재론적 숙명을 사진 이미지로 증명하려 한다. ● 전강희는 이미지를 끊임없이 수렴하는 방식으로, 김아타는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탈락시켜 흔적만 남기는 상반된 방식으로 작업을 기술(記述)한다. 그러나 죽음이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라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속 언명처럼 두 작가의 사진 이미지에는 공히 장엄한 시간의 흐름에서 그 곳에 있었으나 부재(不在)할 수밖에 없는 익명화 되어 가는 존재들의 불길함이 담긴다.
3. 이미지의 과잉에 가까운 중첩을 통해 그 공간을 혼돈의 세계로 만드는 전강희의 풍경은 늘 쓸쓸하다. 거리를 배회하는 사람들의 얼굴과 신체는 파편화 되어 있고, 공간은 산만하게 흩어져 있다. 미분화 되어 있는 이미지로부터 이미지가 담고 있는 감정의 선을 따라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미지를 향한 이미지 외부로부터의 정서적 관여가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전강희의가 구축한 이미지의 세계는 극적이기 보다 무심하다. ● 전강희가 자신 밖의 외부를 바라보는 방식이자 개념으로 끌어들인 '플라뇌르' 즉 산책(자)의 본질은 공간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주관적 감정을 최대한 억제하고 사물과 사람을 관조하고 관찰하려는 태도를 유지하는 플라뇌르는 전강희의 작업에서 적정한 작업 기술(技術)이자 도시의 공간들을 편견 없는 공평한 감정의 무게로 들여다 볼 수 있는 태도가 된다. ● 사진 프레임 속 일반적인 풍경 이미지들은 개별 작가가 주목하고 있는 시선과 목적이 어렵지 않게 발견되거나 읽혀진다. 반면, 전강희의 작업에서는 좀처럼 풍경에 관여하는 화자의 시선을 마주하기 어렵다. 이미지는 그 자체로 발화(發話)되는 이야기가 있는데 전강희의 풍경 이미지에서는 자기 억압처럼 이야기는 발화되지 않고 삼켜진다. 역설적으로, 다채로운 서울의 공간을 부유하는 전강희의 플라뇌르는 우리를 둘러싼 풍경과 공간을 자기 객관화라는 과정을 거치도록 하면서 비로소 균등하게 공간을 바라보는 시선을 갖게 한다. ■ 김용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