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비앤 원피스아트 7번째 전시로 임춘희 개인전 『걷는 사람』展이 9월 6일 부터 10월 28일까지 열립니다. 이번전시에는 작가가 오랜 시간동안 작업실 주변을 산책하며 변화하는 자연 풍경과 환경들을 사진에 담아내고 그 기록들을 통해 작가만의 새로운 감성의 교감을 통해 작업으로 표현해 내는 과정을 담은 작품을 소개합니다.
임춘희 _ 걷는 사람 1-6_ 파브리아노지에 유채 _56×42cm×6_2022
작가의 시선에서 보는 일상의 풍경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 되었고, 매일 단순히 휴식을 위한 산책이 아닌 생명의 간절한 의지로 한걸음 내딛으며 산책길에 나선다. 그 길에 담아낸 풍경 사진들은 기록과 같이 쌓여 가고 우리는 그 발걸음에 따라 새로운 여행 길을 함께 걸어간다. ● 작가는 익숙한 작업실 주변을 매일 반복해서 걸으면서 익숙한 주변의 나무, 풀, 길, 하늘, 노을, 바람, 야생화등 흔히 볼 수 있는 자연의 모습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 모습들은 흔해서 어쩜 우리들은 그냥 지나쳐 버리게 되고 의미를 크게 두지 않는 사물들일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 모든 것들에 관심을 가지며 애정을 두고 간절히 원하는 것을 투영하듯이 반복적으로 어떤 여정을 떠나듯이 산책을 하며 눈에 담아내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작가의 회화 작품은 보는듯 깊은 감성과 교감이 일어나는건 바로 작가가 집중한 시간의 이야기와 마주하기 때문은 아닐까 한다. ● 작가는 산책을 통해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하는 인간으로서 가야할 관계 속 바른길을 가듯 그 길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듯한 느낌을 작업을 통해 보여준다. 조심스런 붓칠의 끝은 항상 그 에너지와 갈망의 거친 흩날림이 가득하고, 어디론가 향해 가려는 꿈틀댐이 느껴진다. 감추어진 표현 속에 눈망울은 더욱 간절해지고 웃음과 슬픔이 섞여 보이기도하고, 해학적으로 보이기는 거침없는 모습이기도 한 것은 작가만의 정서적 흥취가 잘 담아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임춘희_걷는 사람9_캔버스에 유채_80.5×80.5cm_2021~3임춘희 _ 걷는 사람 12_ 캔버스에 유채 _100×100cm_2023
이번 전시에서는 한점의 작품과 함께 소품과 종이위에 유화작품 6점이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영상 작품으로 작가의 산책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작가가 작업실 주변을 걸어가는 길을 작가의 발의 시선으로 영상미를 더해 제작하였다. 영상공동제작으로 아트비앤 기획, 스피키비주얼컬쳐 제작으로 완성되었다. ■ 갤러리 아트비앤
임춘희_걷는 사람10_캔버스에 유채_53×45cm_2023임춘희 _ 걷는 사람 8_ 캔버스에 유채 _53×45.7cm_2023
몸이 아파지면서일까? 불완전함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의 몸은 아프고 사회, 세상 속에서 맺고 맺어진 관계로부터 허물어진다. 생명은 나비처럼 팔랑팔랑 가벼워. 나는 불완전하다. 생명은 찬란한 불꽃처럼 타올라 화려하면서도 곧 사그라들어 꺼지는 죽음과도 친구. ● 일어서서 걸어. 이리로 갈지 저리로 갈지 여전히 길을 잃고 헤맨다. 힘없고 나약한 불완전한 존재. 자연과 사람 우리 모두 연결되어 있다.
임춘희_원피스아트 : 걷는사람展_갤러리 아트비앤_2023
그림을 그리면서 느끼며 깨닫고 나를 본다. 바람 한 점 없는 황량한 벌판에 혼자다. 간혹 애절한 기도의 응답으로 자유로움을 만난다. 늘 그 순간들을 기억하며 갈망한다. 너무 투명해서 별거 없는 삶이다. ● 1월 말 오른쪽 고관절(인공관절) 수술 후 몇 개월이 지나도록 작업할 힘이 생기지 않아서 이번 전시를 앞두고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도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다시 걸을 수 있을 만큼 회복되면서 그림에 집중하며 스며들 수 있었기에 소중한 시간, 참 감사하다. (2023년 8월) ■ 임춘희
THE ONE PIECE OF ART 원피스아트 ● 『THE ONE PIECE OF ART 원피스아트』는 아트비앤의 전시기획명으로 선정된 작가의 한점 작품과 작품제작영상을 전시, 한점의 작품에 집중하며 작가의 작품세계를 보다 심도있게 조명하는 전시형 아트프로젝트입니다. 2021년 SCRATCHER 신선주 개인전을 시작으로 ASSEMBLER 박천욱, BLUE CREER 김세중, DEMETER 김나리, SILHOUETTE 주연, GOLDEN WALKING MAN 이상원까지 6인의 전시를 개최, 앞으로 원피스아트 프로젝트를 이어가 총 10인 원피스 아트 프로젝트를 완성해 갈 예정입니다. ■
유근택, 또는 회화의 반투명성에 관하여 ● 유근택의 회화 작품을 처음 본 것은 2000년 가을이었다. 이따금 방문하는 교외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젊은 모색 2000-새로운 세기를 향하여』(2000)라는 그룹전에 전시된 6점의 수묵화 연작 「긴 울타리」(2000)가 그것이다. 나는 기민한 감식안을 지닌 사람은 아니지만, 이때만큼은 굉장한 작품을 보았다고 즉시 생각하였고 고양감을 누를 길이 없었다. 이후 이 화가에 대한 극찬하는 내용을 담은 평론을 세 번이나 썼다. 이번에 쓰면 네 번째가 된다. 외국 작가에 대해 여러 번 글을 쓰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글쓰기 취향을 조금 바꿔 반세기가량 한국의 바로 옆 나라에서 비평 활동을 지속해 온 나의 비평의 배경과 기준을 다시금 표명하면서, 왜 유근택의 회화가 나에게(우리에게) 특별하고 귀중했는가를 밝히고 싶다. 기억이 가물가물 흐려지고 있는데 반세기를 되짚어 보는 일이므로, 사실관계가 어긋난 내용이, 마치 대나무 바구니에서 낱알이 쏟아지듯 등장한다 해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길 바란다.
유근택 _ 창문 _ 한지에 수묵채색 _146×103cm_2022유근택 _ 말하는 정원 _ 한지에 수묵채색 _149×101cm_2020
내가 미술비평가 활동을 시작한 1970년의 일본은 구질서를 비판・부정하는 전위적인 분위기가 한창 고조되어 두 가지 쟁점이 치열하게 부딪치는 상황이었다. 한편으로는 『도쿄비엔날레 '70』의 기획을 맡은 비평가 나카하라 유스케(中原佑介)가 1960년대부터 전개되어온 복잡다단한 반예술의 동향을 동시대 서구의 최첨단 경향을 참조하면서 탈감정화・탈지역화하여 전통예술의 방법론에 따르지 않는, 물질적 무질서의 논리화로 정리해 제시하여 비평가로서 유례없는 명망을 얻었다. 다른 한편 몇몇 동료들과 더불어 예술사상의 문명적 틀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며 나카하라가 참조한서구 최첨단 경향의 예술 상황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도, 도리어 서구 근대의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는 이원론적 세계관 그 자체를 예리하게 비판하며 '모노하(もの派)' 의 중심축을 지탱한 존재로 평가받는 한국 태생 이우환의 활동이 있었다. ● 이리하여 나카하라 유스케도 이우환도 일본의 1970년대 이후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셈인데, 두 사람에게는 각각 시대 특유의 한계가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나카하라는 자신이 주도했던 개념주의적 이론의 공격을 받고 주춤하였고, 마지막까지 '회화'와 진지하게 다시 대면할 수 없었다. 이우환도 다시 한번 회화를 서구 근대와 동일시하여 단죄한 일이 있었지만, 다행히 그의 내면의 유연한 예술가 자질 덕분에 1973년경부터 붓질의 반복으로 화면을 화가의 자유로운 움직임이나 물질의 단순한 드러냄에서 구해내는 양가적인 작품세계를 성취하는 데 성공했다. ● 나카하라의 『도쿄비엔날레 '70』에 협력했던 나는 이우환의 극단적인 반서구근대주의에 동조하기 어려웠고 다소 반감마저 느꼈으나, 본디 회화・조각에 강한 정열을 지닌 인간이었기에 이우환이 보여준 양가적 회화의 개안에는 일찍이 공감하였고 금세 그의 비평적 지지자가 되었다. 이우환의 이러한 근사한 전진에는 당시 내가 줄곧 주창한 예술 실천의 반복성이 필요하다는 견해가 다소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좀더 확실한 것은 같은 시기(1970년대 초) 서울에서 이방인 이우환과 깊이 교유한 박서보의 작업방식, 즉 캔버스 바탕에 한지를 덧바르고 밑칠한 뒤 반복적인 긋기로 충돌과 간섭을 동일한 양가적 화면으로 구축해온 이른바 '묘법(描法, Ecriture)' 회화와의 동질성을 지적할 수 있다. 그 후 박서보와 이우환은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단순한 추상화가에 그치지 않은, 의미 깊은 양가적 회화의 수행자로서 중요하게 다뤄져왔다. 그들의 진가는 오늘날 한국 특유의 회화표현으로 전세계에 알려진 단색화의 집단적 양식성을 훌쩍 뛰어넘는 결과로 나타났고, 회화의 현대적 의의를 단둘이서 선도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때는 1970년대였다. 미국 회화에서는 미니멀리즘의 한계를 극복해낼 만한 전망이 부재하였고 여전히 '불투명성의 회화' 등이 거론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마오주의(Maoism) 영향으로 표현과 물질의 모순을 중시하는 풍조가 강해졌는데, 회화 그 자체의 고유성을 모색하는 자세는 드물었다. 그리고 어느 지역에서든 회화는 임의로 시도된 적이 있더라도 추상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일본과 한국의 현대미술도 이우환과 박서보의 귀중한 주도적 활동에도 불구하고 추상 바깥으로나아갈 수 없었다. 20세기라는 시대, 그것이 한계였을 것이다. ● 지금 생각해보면 기이한 일인데, 이런 '회화 빙하기'가 한창이던 1977년 4월 나는 잡지 『미술수첩(美術手帖)』 편집부를 설득하여 회화에 관한 특집을 마련했고, 거기에 「회화에 관한 10장(絵画に関する10章)」이라는 에세이를 기고했다. 당시 사람들은 회화가 이미 한물갔다고 생각했고 그 대신 '평면'이라고 부르는 것이 '동시대 시류'라고 여겼다. 편집부가 타협해서 특집 타이틀을 「회화의 평면과 평면의 회화(絵画の平面と平面の絵画)」라고 붙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그평면은 어떤 의미로든 추상을 뜻한다는 데에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내가 말하는 '회화' 또한 형상이나 이미지를 전제로 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선 제압하는 태도로 '회화의 본질은 반투명성이다'라고 밀어붙였다. 좌담회는 기묘하게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도쿄비엔날레 '70』의 성공 이후 위세가 당당했던 나카하라 유스케는 뜻밖의 화제(회화의 부활)에 의기소침한듯싶었고, 젊은 두 명의 비평가는 딴청 부리며 쓸데없는 잡담을 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최대의 난적이라고 생각했던 후지에다 데루오(藤枝晃雄)가 쉬는 시간에 옆에 있던 나에게 "회화가 반투명이라니, 괜찮은 말이군요"라고 말을 건넸다. ● 늙은 평론가의 감상적인 옛날 얘기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회화 부재의 30년 동안 구상을 제외한 '회화'를 놓고서 이런 논의를 진행했던 것 자체는 지금 돌이켜보니 나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는 형상과 이미지를 결여했다고 해도, 회화의 본질을 반투명이라고 보는 논의의 근거가 조금도 낡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범속한 것을 좋아하는 비평가라서 예언자적 부류를 믿지 않는다. 허나, 회화의 반투명성은 바로 지금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반투명성'이라는 말로 나는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 후 10년이 흐른 뒤 1986년 6월, 박서보의 도쿄화랑 개인전에 도록 평론글에 나는 이렇게 썼다.
뛰어난 회화는 왜 반투명인가. 마티에르(매체의 물질성)의 불투명한 벽이 드러내는 물자체의 발현을 실존적으로 긍정하는 즐거움과 그 벽의 저편에 혹은 바로 앞에 시각이 투명하게 비쳐지고, 때로는 뜻하지 않은 비전이 생기는 즐거움을 둘 다 향유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 회화는 이 양극단의 어느 쪽이든 한쪽에만 치우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모노크롬 회화는 불투명성에 치우친 예이며, 삽화나 개념도 같은 그림은 투명성에 치우친 결과다—그 중간의, 반투명성의 애매함을 견뎌야만 한다. 그애매함, 벽도 풍경도 아닌, 말하자면 창(窓)이 지닌 양가성에야말로, 회화의 깊이, 예측 불허(변덕스러움), 리얼리티, 허구성, 요컨대 회화의 풍요로움의 일체가 깃들어 있다." ● 하지만 이렇게 쓴 다음에도 일본과 한국의 풍경은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등 서브컬처의 성공에 가려진 회화를 점점 잊어버린 일본에서는 1960년대 이후 그래픽 디자인계의 인기 스타였던 요코오 다다노리(橫尾忠則)가 1982년 갑자기 피카소나 피카비아를 모방하며 창조적 회화를 그리는 작가가 되려고 의욕을 보였는데, 그 본령이 발휘되기까지 1988년 「다원우주론」, 나아가서는 2000년 이후의 「Y자형 골목길」 시리즈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래도 과감하게 고전미술의 성과를 끌어들여 형상과 이미지에 중요한 역할을 부여한 요코오의 회화 영역안에서의 횡단은 일본 현대미술계의 기이한 풍경이었다. 희귀종이었던 요코오를 예외로 놓고 생각해보면, 일본은 여전히 이우환의 양가적 추상회화 이상의 가치를 몰랐던 것이다. ● 이미 아셨을 것이다. 2000년 가을, 유근택의 작품과 만난 일이 내게 어느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나. 이우환과 박서보에 의해서 가까스로 견지되어 온 회화의 반투명성이라는 미적 요소가, 그와 맞먹는 수준의 의미 있는 붓질과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한층 솔직한 구상 표현의 붓질로 더할 나위 없이 섬세하고 깊이 있는 성찰로서 성취된 것이다. 당시의 유근택 그림은 앞서 박서보 평론에 서 언급했듯이, 필시 "벽도 풍경도 아닌, 말하자면 창이 지닌 양가성"으로 살아 숨쉬었다. 작업실 창문을 통해 정점관측하듯이, 매일 관찰하는 숲속 오솔길과 지나가는 사람의 그림자. 일상에서 쉽게 마주치는 시시하고 밋밋한 것들은 화가와, 화가가 매일 산책길에서 관찰하는 풍경 사이의 보이지 않는 창틀에 의해 (그리고 그것을 대변하는 울타리에 의해) 이원화되며, 그 이원성이 작가와 대상세계와의 말소하기 어려운 시간의 엇갈림—산 자와 죽은 자의 엇갈림에 이르는 거리—으로서구조화되고 있음을 정감 있게 보여준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과 그려진 풍경 사이의 치명적이고 비극적인 거리를 의식하는 것은 이 화가의 타고난 예술적 감성에서 기인한 듯싶다. 우리는 화가가 초년생 시절에 그린 놀라운 대작 「유적-토카타(질주)」(1991)에서 그러한 거리의 인식을 이미 명확하게 회화적으로 처리했음 알고 있다. 할머니에게서 매일 들었던 한국 시민의 비극적인 역사를 주제로 다루고 있는 이 대형 작품이 드러내는 것은 결코 말해진 이야기(narrative)가 아니다. 이야기로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 차원을 내포한 사건에 대한 통찰로 구성되어 회화적으로 가공된, 한 편의 창작물이자 비극이다. 이 벽화 같은 작품의 첫 부분과 끝부분이 그리스 비극에 으레 붙는 코러스를 연상시키는 무수한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로 메워졌고, 더욱이 고문을 연상시키는 장면에 겹친 부처의 얼굴 등, 사상(事象)의 단일성・일원성을 넘어선 핵심적인 필치가 회화 특유의 중층적 생기를 자아낸 것을 놓칠 수 없다. ● 이 작품 이후 일상생활의 관찰과 공상, 허구에서 포착해낸 다양한 주제・형상・이미지가 유근택 작업에 엄청나게 중요한 피와 살이 되었다. 그러한 작품들을 나는 비평가로서 이례적이지만 놀라움과 감동으로 받아들였다. 그림이 극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형상 묘사의 밀도가 뛰어나서 그런것도 아니다. 농밀한 동아시아적인 전통적인 수묵과 과감한 현대적 도시 풍경이 편견 없이 공존 하기 때문만도 아니다. 화면에 끌어들인 모든 요소들이 서로 녹아들 수 없는 시제(時制)를 지니며, 말하자면 내재적인 상호 비판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는 사람과 그려진 것 사이의 불가피한 시간차를 메울만한, 그러한 붓질의 투입. 그의 회화는 결코 하나의 이야기로 끝맺은 적 없고, 끝나지 않는 세계로의 관여로 감동을 준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유근택의 작품에서는 그림이 자기 그림을 비판하며, 그 비판의 척력(斥力)으로 화면은 잘 보인다고도, 보이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는 반투명의 중간지대로 부유하듯, 가상성을 드러내고 있다. ● 하나만 예로 작품을 다뤄보겠다. 2007년 이후 이따금 제작된 「자라는 실내」 시리즈. 사람이 사는 넓은 서양식 거실과 그 거실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공간을 다 채운 채로 부유하는 다양한 종류의 자잘한 나뭇가지. 살아있는 인간의 의지나 감정을 무시하고 끝없이 자라나는 식물의 거대한 군집과 평온한 거실 공간 사이에 기묘한 휴전 상태가 성립한다. 두 개의 공간 표상과 생명 원리가 명 료하게 이층으로 나뉘어 서로가 서로의 생존 원리를 위협하면서 어느 한쪽에게 일방적인 지배권을 내맡기지 않는다. 그림을 보는 사람은 어디에 자리 잡으면 좋은가. 어느 쪽으로 리얼리티를 느껴야 하는 것인가. 무언가 보인다는 것의 이중성, 의미를 지닌 공간의 비결정성.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잠재된 양가적 애매함을 이토록 명확하게 제시해 보인 회화가 일찍이 있었던가. 이와 같 은 회화를 앞에 두고 우리는 일원적으로 말하는 것의 무의미함을 깨달으며 세계의 깊은 다양성과 초월성으로 이끌리는 게 아닐까.
유근택_자화상_한지에 수묵채색_40×29.5 F 56×45.5×4cm_2018
형상과 이미지를 과감하게 도입한 방식이 유근택의 작품세계를 새로운 영역으로 이끌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회화의 반투명성을 고양시킨 내재적 비판은 1980년대 이후 이우환의 기상학적 회화나 1990년대 이후 박서보의 이른바 '지그재그' 회화에서 원리적으로 수행된 방식이었다. 유근택의 등장이 세대의 단절이 아닌, 좀더 뜻깊은 발전적 계승을 성취한 결과라고 한다면, 그것은 한국이나 일본이 경험할 수 있었던 멋진 역사적 쾌거가 아닐까 생각한다. ■ 미네무라 도시아키 번역 / 김정복
요즘은 3D 디지털 그림으로 바꾸어 신식 작업을 하는데, 아날로그 시절로 되돌리고 싶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미술평론가 김진하의 상세한 평으로 대신한다.
“이인철의 1980년대 목판화 - 거리에서 보낸 한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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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만한 사람은 알듯 이인철은 부산수산대학 출신이다. 그림판에 넘치는 그 흔하고 뻔한 미대 출신이 아니다. 그런데도 대학을 졸업하고 무작정 상경해서 화가가 되었다. 서울에서 처음 만난 일군의 화가들이 민중미술 운동의 중심이 되는 작가들이었다. 『서울미술공동체』라는 미술운동 단체 멤버들이었고, 이인철도 창립회원으로 가입해서 함께 활동을 시작한다. 1984년경이다. 이어서 1985년 전국단위 문화운동 단체인 『민족미술협회』가 창립되면서 이인철도 자연스레 민미협 회원이 된다. 이는 시위하는 바가 크다. 미술계와 별 인연이 없는 사람이 현실 비판적인 미술운동에 자연스럽게 몸을 담근다는 거, 그의 기질 혹은 사유에 사회나 역사에 대해 곧추선 의식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는 근 4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인철 작업을 관통하는 주제 의식의 뼈대이기도 하다. 역사적 사실, 동시대 현실, 그리고 미래에의 전망을 통시적으로 통찰하면서도 동시에 당대 현실에 미술로 개입하고 실천하는 행동 말이다.
1980년대의 저항 이후 지금까지 제도권 화단의 아웃사이더로 표류하면서도 이인철은 초지일관 현실과의 접점을 찾는 내용의 작업을 지속해왔다. 상업성과는 거리가 먼 괴롭고도 지난한 과정이었다. 80년에는 목판화로 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컴퓨터그래픽으로 스스로를 더 고립시키며 작업해 왔다. 물론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제도권 화단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했다. 리얼리스트로서 미학적 이념을 현실에 정착시키려는 작가 의식은 현실과의 불화를 동반할 수밖에 없는 범, 그 지난하고도 외로운 과정이 자신의 미학적 입장을 작업에 정착시키는 것이기에.
이번 전시와 이 도록은 그런 이인철의 활동 중에서 초기인 1980년대 부터 90년대 초반까지의 목(고무)판화 작업으로 구성된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수도 있는 기간이다. 그의 『서울미술공동체』와 『민족미술협회』 회원 시절의 주요 장르다. 당시 목판화는 민중미술의 핵심으로 대 사회적 메시지와 복수미술로서의 가능성에 크게 고무된 장르였다. 1985년부터 시작된 이인철의 목(고무)판화는 1990년대 초반까지 대략10여년간 진행되었다. 이 시기 이인철은 한국 판화사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킬만한 독자적 양식과 기법의 작업을 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부터의 디지털 작업으로의 전환은 이인철의 판화작업을 이후 좀처럼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시간은 30여 년이 흐르고 이인철의 판화작업들도 우리들의 뇌리에서 상당 부분 잊혀졌다. 아쉬운 일이다. 그래서 본 나무아트 프로그램인 <한국현대목판화 발굴 프로젝트>의 두 번째 작가로 이인철의 목판화를 조망해보고자 한다.
2. 19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진행된 이인철의 목판화와 리놀륨(Linoleum)판화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철저하게 사진적 몽타주를 극사실로 재현한 판각법과, 외곽선에 의한 형태로 인물의 성격을 드러낸 <바람 부는 날, 1985><짤라 버릴까부다, 1986><마누라 나도, 1987><갈증, 1988><어떤 수인, 1988> 등과 같은 일련의 형식이 있다. 이런 위트·풍자·해학 등으로 군부독재 시기를 비틀며 비판한내용의 선각 작업이 대략 1985~1988년경 먼저 시도된 형식이고, 동시대를 응시하면서 불의한 권력에 의한 모순을 정면으로 담아낸 증언이자 기록의 정밀한 판각법이 86~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는 경향이다. 이 글에서는 이인철 특유의 양식이자 대표작으로 여겨지는 정교한 형식의 판화를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겠다.
먼저 눈에 띄는 건 역시 과도기적 특징의 작업이면서도 반5공·반미·반제를 선명한 콘트라스트 형식으로 도상화한 <거부의 몸짓, 1985><스포츠 공화국의 상과 하, 1986><자유의 여신상, 1986><안녕히 가세요, 1987><반전 반핵, 1989> 등과 같은 작품이다. 작가가 의도한 메시지와 80년대 민중미술에서 두드러지는 대하서사적 시각 문법이 선명하다.
이어서 좀 더 정교해진 칼맛으로 형상화한 동시대 현실 풍경. 80~90년대 거리에서 마주치는 현상들에 대한 일상적 서사성이 두드러지는 작품들이 이어진다. <머물지 못하는 사람들, 1985><불꽃으로 다시 살아나, 1989><죽음의 변주곡, 1989><역사의 기록, 1989><젊은 날의 초상-1, 1991><체포, 1991><죽음, 죽음, 죽음, 1991><젊은 날의 초상-2, 1992>등과 같은 동시대 민중의 삶의 모습이나, 시위현장과 거기서 산화한 젊은이들에 대한 진중한 슬픔의 묘사가 눈에 띈다.
특히 이인철의 판화 중 가장 큰 대작인 <젊은 날의 초상-1><젊은 날의 초상-2>는 한국 리얼리즘 목판화의 백미라고 여겨진다. 시위 현장에서 백골단과 젊은 육체를 부딪치며 전투를 벌이는 청년들과, 이어서 그 청년 중 누군가의 상여가 거리를 행진하는 장면이다. 운구하는 대학생들의 슬프고도 엄숙한 표정에서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의 반독재 투쟁 풍경이 전형화되어 드러난다. 많은 대학생과 노동자들의 격렬한 전투와 더불어 고문·분신·투신 정국에서 젊은 꽃송이들의 스러짐은, 결국 그들이 싸웠던 거리에 숭고하고도 장엄한 비극적 장면을 살아남은 우리에게 남겼다. 불의에 ‘저항’하다가 그 힘에 굴복하지 않은 ‘죽음’은 장엄하다. 박종철이 그랬고, 이한열도 그랬다. 뿐인가 숱한 민주열사와 노동자들의 외침과 죽음 또한 그랬다. 이인철이 거리에서 취재한 이 두 점의 작품이 어떤 최루성 장치 없이 사실만을 건조하게 제시하면서도 우리에게 먹먹한 가슴의 통증을 남기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인철은 바로 이 두 장면을 통해서 1980~1990년대 초반의 시대성을 정교하게 반영해냈다. 단단하고 빈틈없이 정밀한 형태감. 목판의 나뭇결과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칼의 운행(등장인물의 얼굴과 의복 부분)은 마치 한지 위에 얹힌 세필의 먹 필선이나 동판화 에칭의 그것처럼 빈틈없이 정갈하다. 동시에 단단한 형태감과 유연한 칼의 운행은 밀도 높은 화면을 견인해냈다. 목판화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서사적 내용과 기술과 숙련성이 두루 엮여서 수준 높은 미적 전형성을 확보한 리얼리즘의 수작이라 하겠다.
이런 서사성과는 달리 서정성을 담지한 리얼리스틱한 일군의 작품들도 중요하다. 오월 광주의 회한을 격렬한 감정과 회한으로 표현해낸 <죽음의 변주곡, 1989><마침내 망월동에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다, 1991>, 노동자와 도시 서민의 아픔과 슬픔의 소외된 일상성을 포착한 <우리들의 일상, 1987><산성비가 내린다, 1989><보이지 않는 손, 1990><김씨, 1991><동트는 새벽에, 1990><신혼의 이씨, 1992><가족, 1992><거리풍경, 1991><술집 풍경, 1992><아침, 1992> 등의 다소 건조한 서민들의 계급적 서정으로 연결된다. 모두 이웃들의 모습을 연민으로 바라본 시선이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감정적 입장(주관적 표현성)을 절제하면서 대상과의 일정한 거리두기의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려는 의도가 도드라진 작업들이다. 그중에서도 풍경인 <마침내 망월동에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다>와 인물인 <김씨, 1991><신혼의 이씨, 1992>가 주목된다. 전자는 작가의 내적인 분노와 슬픔이 격렬한 표현적 풍경으로 상징화된 점이, 후자는 노동자의 실존적 고민이 은밀하고 고요하게 배어나오고 있다는 점에서 상호 대비되면서도 동시에 돋보인다.
그런데 냉정하고도 차갑게 대상과 일정한 거리두기를 유지하는 관찰자 시점에서 극사실적인 기법을 구사하는 이인철의 형식에서, 이렇듯 작품을 보는 이의 감정을 자극하는 서정성이 도드라지는 점이 놀랍다. 서사적인 장면이든 서정적인 화면이든 가리지 않고 이인철의 화면에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는 뜻이다. 그 이유가 뭘까. 1980년대라는 시대를 함께 겪은 정서 때문일까. 아니면 그와 나의 세계에 대한 개별적 인식이나 감성이 어떤 공통의 분모를 가져서일까.
단언하기 어렵지만 유추해본다면, 그것은 아마도 생래적으로 폭력적 현상에 대한 거부라는 본능의 바탕에, 저항에의 의지와 현실 인식이 더해서였을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당시 민중미술이나 비판적 형상성을 추구하던 작가들 상당수가 그랬다. 아니, 1987년 6월 혁명에 임하던 시민 거의 모두의 태도가 그랬다. 그런 각자의 뜨거운 경험과 겹치는 이인철의 도상에서, 인간적 감정을 함께 공유하게 되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이인철의 이런 서정적 형상성은, 그림의 단순한 소재를 넘어서서 타자와 공유 가능한 정서적 지점을 포착해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홀로 격리된 골방이 아닌 시민과 동지들이 “거리에서” 함께 보고 겪었던 지점, 현장을 즉물적으로 겪었던 체험을 이인철 특유의 목판화 형식으로 진술함으로 확보하게 되는 전형성으로 말이다. 이는 이인철의 목판화가 90년대 이후 그의 디지털 회화와 조형적 문법이나 양식이 아닌 태도로서 구별되는 이유이기도 하다(물론 이 말은 그의 디지털 회화와 비교하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이인철의 디지털 회화는 또 그 나름대로 독립적 장르적 특성과 장점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오해 없으시길…).
3. 리놀륨(Linoleum)은 정교한 칼의 운행이 유효한 재료다. 목판에 비하자면 상대적으로 편한 판(Plate)의 유연한 질료감 때문이다. 이인철은 그런 고무판의 속성을 잘 활용했다. 그러나 이인철은 단단하고 다소 거친 목판화에서도 그 정교한 호흡을 놓치지 않았다. 이인철 판화의 독자적 형식을 산출한 이 재료와 칼의 구사 기법은, 공학자나 건축설계자의 그것처럼, 혹은 한땀 한땀 뜨는 수예처럼 한칼 한칼의 운행이 꼼꼼하고 정밀하게 계산된 결과다. 기계적으로 보일 만큼 절제를 동반한 형태감과, 칼의 구사와, 제판 기법은 이인철의 체질적 특성과 맞는 것이기도 하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과 그것을 판면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개인적이고 주관적 표현성보다는, 마주한 현상을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인 대상성으로 분석하고 서술하려는 리얼리스트의 판각법에 잘 어울리는 장르란 뜻이다. 또 시각적인 맛과 효과를 유도하는 이인철의 계산된 칼질의 매력(꼼꼼한 장인성)에 바탕한 것이라, 이는 기존 민중미술의 거칠고도 속도감 있는 기법이나 언술들과는 다른 매력을 동반한다. 그리고 이런 특징들은 이인철이 90년대 중반 판화와 결별하고 극한적인 장인성과 디테일을 요하는 3D 회화로 그의 미디어를 이주하는 체질적 원인도 된다.
리놀륨과 목판화는 기본적으로 밑그림-판각-프린팅이라는 과정으로 구성된다. 밑그림에서는 작품의 내용·화면구성·언어 등이 결정되고, 판각에서는 작가의 체질·표현법·어법 등이 드러난다. 그리고 프린팅에서는 잉킹과 찍기라는 균질한 복수성의 기계적 프로세스가 반복된다. 한마디로 회화적 감성과 몸을 통한 노동, 그리고 규칙적이고도 정교한 장인성이 필요한 장르라는 의미다. 이인철의 작업은 이 셋 모두 담기에 적합한 양식과 주제를 띈 조형적 특성을 가졌다. 당연히 자신의 판화 감수성과 심미적 체중이 판 위에 실렸기에 이인철 특유의 맛이 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돌아보면, 이인철의 판화는 1980년대 민중미술 목판화의 다소 단순한 형식적 흐름에서 이탈해서 독자적인 표현법의 한 지점을 점유했다고 여겨진다. 이는 민중미술 목판화사에서 귀한 실례다.
당시 민중미술 진영에서 판화가로서 이인철은 나름의 이런 독자성을 확보했던 상태라, 그의 이 반전에 가까운디지털로의 궤도 변경은 신선한 충격으로 동료 작가들에게 회자 되곤 했다. 그만큼 이인철 판화의 정밀한 칼맛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많은 이들에게 이미 인정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인철은 과감하게 그 장르에 이별을 고하고, 90년대 중반 민중 미술계에서는 전인미답이었던 첨단 3D 디지털 회화(이자 디지털 판화)의 생소한 장르로 이주한 것이었다.
새로운 장르로의 선택과 전회는 물론 작가로선 긍정적인 도전이다. 그러나 한편 그 길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위험한 장정이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물과 식량, 지도나 나침반조차 없이 길 없는 픽셀의 사막에 무모하게 진입한 것이니까. 그게 30여 년 전이다. 당시 첨단이었던 3D 프로그램들은 이제 보편적인 일상적 기술이 되었고, 또 많은 사람이 구사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이인철의 3D 회화작업이 자신만의 정체성과 독자성을 유지하며 지속되고 있는 것은 분명 긍정적이다. 이인철이 미디어 자체에 탐닉하는 스타일리스트가 아니라, 끊임없이 동시대 현실의 모순을 포착하고 저항하는 내용을 작품으로 구현하고 발언하는 ‘작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서로 다른 장르, 즉 물리적·물질적 판화와 비물질적인 디지털이지만 이를 관통하는 이인철식 세계관과 리얼리즘의 구현이라서 그렇기도 하고.
그러나, 상대적으로, 목판화계에선 이런 이인철의 공백이 아쉽다. 80년대 왕성했던 민중미술과 비판적 형상미술 목판화의 미술운동으로서의 신명과 전투성은 90년대 초반 문민정부 시기 이후 점차 화단 변방으로 사라지고, 바뀐 사회 문화적 환경으로 인해 여러 목판화 작가들도 생계를 위해 지방이나 시골로 거처를 옮기면서 사실상 목판화는 그 시대적 소명을 다한 것처럼 보이는 시기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이인철의 장르 변경도 다른 작가들의 이주와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다만 타 작가들은 지역에 은거했더라도 조각도를 갈며 은인자중 계속 목판화를 지속했음에 비해, 이인철은 디지털회화로 장르를 바꾼 점만 달랐을 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이인철의 목판화 공백을 아쉬워하는 것이다.
90년대 초중반 만개한 목판화 기량이 절정일 때, 그리하여 그 이후를 더 기대하던 터에 갑자기 조각도를 놓고 총잡이 ‘셰인’처럼 떠난 칼잽이 목판화가 이인철이 말이다. 비록 그는 디지털 회화로 자기 길을 표표히 갔을지라도, 남아서 그 뒷모습을 보는 이의 아쉬움은 얼마나 컸을 것인가. 하물며 지속적으로 80년대 이후 목판화의 진행을 비평적으로 주목하는 나 같은 사람은 한국현대목판화에서 사라진 리얼리즘의 정수를 아쉬워하는 것이다. 이인철은 한국현대목판화사에서 정원철과 더불어 가장 정교한 목판화 판각법을 구사한 작가다. 그래서 짧은 10여 년간 100여 점만의 목판화를 남긴 게 더 아쉽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10년 정도 더 작업해서 작품을 300점 정도라도 남겼다면 1990년대 목판화사는 훨씬 풍부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4. 어떤 시대든 그 시대를 견디는 건 모든 이들이 힘들지만, 그들을 관찰하고 작업으로 옮기는 작가는 더 아프고 괴롭다. 함께 겪은 통증을 작업으로 진술하거나 표현하는 이중고통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인철은 엄혹했던 1980년대에 부조리한 권력과 폭력이 작동했던 사회의, 사람살이에 대한 관찰과 이미지 채집을 멈추지 않고 작업으로 남겼다. 그것은 통증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응시한 결과로, 안락한 머무름이 부재한 ‘거리’라는 공간에서 타고난 아웃사이더의 더듬이를 가진 채 떠도는 불편한 리얼리스트의 모습이다. 거리에서 사람들의 삶을 보고 표현하는 표류記는 쓸 수 있으되 정착記는 쓸 수 없는, 그야말로 ‘작가’로서 감내해내야만 하는 태도로 무장한 모습으로 말이다. 어렵고 힘들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지난 시기 이인철 목판화를 일별하다가 보니, 그에게 위로의 술 한잔 사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