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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6,20-7,13

 

거리의 표정을 살피고 다니던 작가에게 어느 날 간판만 덩그러니 걸려있는 낡은 상점이 눈에 들어왔다.


김라연 / 희 망 상 회

 
살던 사람은 이미 떠나버린 빈집에, 앞날을 꿈꾸는 말 ‘희망’과 이제는 구식이 되어버린 용어 ‘상회’가 나란히 적혀있다니 생각할수록 아이러니한 조합이었다. 닳을 대로 닳아 글씨가 떨어져 나간 간판의 겉면에는 그만큼 무상한 세월이 담겨있었다. 한때는 누군가 일상을 일구던 곳이었을 텐데, 그런 곳이 주변에서 자꾸 사라져갔다. 말릴 새도 없이, 아쉬워할 새도 없이.

그럼에도 삶은 이어졌다. 쓰던 사람은 없어져도 사물은 남아 묵묵히 빛을 받으며 자신의 존재를 수긍하고 있었다. 사람이 떠난 빈 땅에는 식물이 자라나 저마다의 생(生)을 이루었다. 그러니 작가는 그릴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바뀌는 것을 막을 수야 없지만, 이 도시가 바뀌어가는 것을 똑똑히 보고 그릴 수는 있으니까 땅 위에 쌓인 건물이 걷어지고, 맨땅이 드러나고, 다시 풀이 땅을 뒤엎는 과정을 보고 상상하며 캔버스에 옮겼다. 헐벗은 사물과 장소가 보내는 시선과 마주하며, 나지막이 이름을 불러주고 기억하며, 바뀌어가는 도시의 표면을 붓질로 보듬었다. 그렇게 이번 전시는 만들어졌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아직도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변해가는 세상을 향해 성급한 대안과 분노에 찬 악다구니를 쏟아내는 대신 김라연은 차분히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음을 다해 오늘을 기록한다. 그의 희망을 듣기라도 하는지, 저 먼 곳으로 보낸 작가의 시선에 풍경은 다만 나지막한 침묵으로 답을 보낸다.

 

 김소라 (OCI미술관 수석큐레이터)

 

 

 빈 땅에 말 걸기


 

 

우리는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도시는 너무 익숙해져서 보이지 않는 것들과 너무 낯설어서 지워진 것들 사이에서 결여되었습니다. 도시의 욕망을 더듬으며 누군가는 너무 익숙해져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다시 불러보기도 하고 누군가는 너무 낯설어서 지워진 것들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상실에 대한 우울증적 숭배를 앞세워서 때로는 시대의 우울을 선언하면서 말입니다. 현재의 이미지는 그렇게 다시 한번 더 숭배와 선언 사이에서 결여되었습니다1. 그렇다고 실상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시선이 그렇게 냉철하지도 회의적이지도 않습니다. 어떠한 정치적 올바름도 우리의 삶을 위로할 수 없듯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찌꺼기는 가장 안락하고 가장 은밀한 앙금으로 가라앉아있습니다. 발터 벤야민은 사물의 아우라가 상실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시선은 모든 사물의 이미지에 남겨진 찌꺼기라는 말을 했지요. 주어진 이름을 배반하고, 통속적인 연상에 반항하며, 집단적 맹목을 거부하는, 시선은 인간의 찌꺼기이다2. 인간에게 남겨진 마지막 한 방울이 조금은 그대로 내버려질 수 있도록 행여 벌거벗겨져 있더라도, 그 사고의 여백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시작합니다.

 

스산한 가을이었던 것 같습니다3. 모래가 많아서 물이 늘 모래 밑으로 스며 내려간다고 해서 불렸던 모래내. 이제 막 들어선 아파트의 시멘트 냄새를 뚫고 다다른 곳은 아직은 다세대 촌으로 남아있는 남가좌동 시장 골목 지하의 작은 전시장이었습니다. 눅눅한 기운이 낯설지 만은 않았으나 조금 일찍 도착한 터라 가까운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던 작가에게 저는 어딘가 이방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작가는 공사장 펜스를 화폭으로 옮겨왔습니다. 그녀의 몸도 야밤의 도시 한복판으로 잠입했습니다. 한쪽에는 공사장 펜스가 (실제 용도는 옆으로 미뤄놓은 채) 그 프레임만 남아 무성한 인공 섬을 다소곳이 감싸고 있었습니다. 다른 한쪽에서 작가는 두 팔을 쭉 뻗어 도시의 미래를 지지하는 간판들에 써늘한 개입을 시도합니다. PARADOX HOTEL4. SANGDO DOOSAN WE’VE NOTHING5. 문득 간판을 수집하고 있던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작업실의 한구석이 떠오릅니다. 그곳에서 학생이었던 김라연은 무언가를 소중히 담고 있었고 반면에 무언가를 소심하게 탓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 학생의 행위를 수집이라고 하고 그 학생의 태도를 저항이라고 한다면 수집과 저항은 과연 함께 할 수 있을까요? 그 사이에 무엇이 잠식하고 있는 것일까요? 대단한 스펙타클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학생이었던 김라연의 수집과 저항 사이에서 일어나는 고요한 소요6를 비로소 만난 곳은 양재동의 한 아파트 상가의 지하 주차장이었습니다.

 

화창한 가을의 아직 지하 주차장이 들어서지 않은 비교적 오래된 아파트였던 것 같습니다7. 지상주차장이 꽤 넉넉하게 동과 동 사이에 펼쳐져 격자를 그리고 있었으니까요. 아파트 상가에서 전시장으로 내려가는 입구를 찾아 헤매다가 발견한 것은 화물용 대형 엘리베이터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자동차용 엘리베이터였나 봅니다. 화창한 가을 햇살에 비해 썰렁한 지하의 기운에 숨기운이 싸해졌고 정면 어디선가 넘쳐 흘러내릴 듯 고여있는 물웅덩이가 곧게 서있었습니다. 녹는 땅8. 그린 것과 보여지는 것의 오차를 경험할 때 그 간극에는 일종의 시적 여백이 만들어집니다. 그 여백에서 보는 이는 낯선 시각으로 다른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시각적으로 공간적으로 감각적으로 낯선 이미지와 이야기들의 파편들은 (상반된 것이 아니라) 불일치 되면서 결여됩니다. 마치 공사장 흙더미에 묻혀져 사라져버렸을 이름 모를 식물들의 이름을 조사하고 학명을 부르기 대신에 자신만의 문장으로 이름 부르듯이. 혹은 독일의 한 시골길에 피는 꽃 이름을 조사하고 둥근 덩어리에 새겨 물감을 칠하고 낯선 친구들의 손을 빌어 흰 캔버스에 굴리듯이9. 침전된 도시 경험은 언어의 파편이 만들어내는 여백으로 은폐됩니다. 어쩌면 도시 경험은 은폐될 운명에 처해있는 우리 현재의 이미지일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작가는 이름 모으기와 이름 부르지 않기를 동시에 작동시킵니다. 수집(이름 모으기)과 저항(이름 부르지 않기) 사이에 일어나는 고요한 소요란 어쩌면 작가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닌 보는 이에게 출현하는 사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2018년 봄 신한갤러리 광화문에서 김라연은 양재동 스페이스 엠의 전시장을 다시 불러옵니다. 어느 미술가가 점점 쌓여가고 있던 쓰레기를 치우고 생활오물과 무관심 속에 묻혀있던 곳을 전시장으로 개조했고 작가는 그곳에서 《사라진 것들의 이름을 부르다》를 보여줬습니다. 안타깝게도 스페이스 엠이 건물주인의 요구로 더 이상 전시장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작가는 그 공간에서 전시했던 장면을 그림으로 남기고 신한갤러리 광화문에 재배치하는 《하나 그리고 두 개의 전시》를 준비했습니다. 포크레인으로 밀어버린 빈 땅에 도시 기표를 위한 무덤을 만들어가듯이 도심 한복판에 사라질 운명의 공간을 다시 불러오고. 대지를 절단하는 펜스를 열어 봉긋한 봉우리를 만들고 무한한 지평선을 열어가듯이 생명을 다한 공간들 사이로 숨결을 불어넣습니다. 명명된(naming) 파라다이스를 접어 희망의 소명(calling)을 다 하듯이 김라연은 스스로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떠도는 이미지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019년 봄 흐드러지게 만개했던 배꽃이 거의 떨어져가던 이화여자대학교 교정을 지나 김라연의 작업실에서 저는 빈약한 흰 봉우리를 만났습니다. 어쩌면 누군가의 에베레스트 산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알프스 산일 수도 있겠습니다. 잔털이 많은 낙타 등처럼 휜 빈 땅을 뚫고 올라오는 날이 선 봉우리는 밝고 희망찬 내일을 숭배하지도 그렇다고 희망찬 내일을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흰 봉우리는 꽃이 다 떨어진 배나무의 앙상한 가지처럼 벌거벗었습니다. 동시에 흰 봉우리는 불려진 이름과 결별(disconnected)하면서 자신의 소명을 찾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고의 여백을 준비하는 제 마음은 벌거벗은 흰 봉우리에서 시작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김라연의 빈 땅은 벌거벗은 이미지들과 언어들을 위한 공간인 모양입니다. 그 빈 땅에 출현하는 이미지와 언어는 그렇게 냉철하지도 회의적이지도 않습니다. 다만 가장 안락하고 가장 은밀하게 가라앉은 앙금을 위한 작은 우주를 만들어냅니다. 그 작은 우주는 빈 땅에 말 걸기로 시작됩니다.

 

알랭 바디우, 「현재의 이미지」, 『오늘의 포르노그래피』, 강현주 옮김, 북노마드
2발터 밴야민, 「안경점」, 『일방통행로』, p.120-121, 조형준 옮김, 새물결
3도시전치 City Displacement》, 갤러리 라온, 2015년 10월 1일 – 9일
4김라연, 〈Paradox Hotel〉, 디지털 C 프린트, 2013
5김라연, 〈We’ve Nothing〉, 디지털 C 프린트, 2014
6김라연의 작가 노트 2, 《하나 그리고 두 개의 전시》, 2018 신한 영아티스트 페스타
7《사라진 것들의 이름을 부르다》, 스페이스 엠, 2017년 11월 8일-29일
8김라연, 〈녹는 땅〉, 캔버스에 유채, 162.2×130.3 cm, 2017
9김라연, 〈사라진 것들의 이름을 묻다〉, 2 채널 비디오, 9분 19초, 2015

 

배은아(큐레이터)



 작가 약력
www.rayeonkim.com
 
학력

이화여대 서양화과 박사 과정
이화여대 서양화과 석사
이화여대 서양화과 학사

 

개인전

2019 《희망 상회》, OCI미술관, 서울
2018 《하나 그리고 두 개의 전시》, 신한갤러리 광화문, 서울
2017 《사라진 것들의 이름을 부르다》, 스페이스 엠, 서울
2015 《영 아티스트 소개 우수작가: 도시전치》, 갤러리 라온, 서울

 

단체전

2018 《사물의 알리바이》, 동덕아트갤러리, 서울

《Axis 2018》, 021갤러리, 대구

2017 《Was sich abzeichnet》, Forum Alte Post, Pirmasens, 독일

《What’s Unfolding》, Arp Museum Bahnhof Rolandseck, Rolandseck, 독일

《出口戰略 (출구전략, Exit strategy)》, 스페이스 엠, 서울

2016 《Outskirts: 경계의 외부자들》, 스페이스 빔, 인천

《Made in Balmoral》, Made in Balmoral, Bad Ems, 독일

《2016 고양 레지던시 입주 작가 소개전 INTRO》, 고양 레지던시, 고양

2015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 2015》, 아트선재센터, 서울; 동송세월,

철원군 DMZ 접경지역, 강원도

《Homeless》, 홍익대 문헌관 현대미술관, 서울

2014 《new generation 2 텍스트 풍경》, Atelier 35, 수원
2013 《동방의 요괴들 트라이앵글 아트 페스티벌》, 대구예술발전소, 대구;

홍익대 홍문관 현대미술관, 서울

2011 《Frozen Music》, 스페이스 15번지, 서울

서성이다, 이화아트센터, 서울

2008 《drawing books of 20 young artists》, 미술 공간 현, 서울

 

수상/선정

2019 OCI Young Creatives 선정
2018 신한갤러리 광화문 개인전 지원
2017 서울문화재단 최초 예술 지원금 선정
2016 Künstlerhaus Schloß Balmoral, 고양레지던시 국제교환 입주프로그램,

바트엠스, 독일

MMCA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12기 입주 작가

2015 융복합 예술 창작기획사업 생태예술프로젝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주관,

국립 생태원과 협력, 갤러리 팩토리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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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6,20-7,13


 

박신영 / 출구 없는 도로에서

 

 

길을 걷다 보면 익숙한 거리가 기괴해 보일 때가 있다.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모를 길이 골목마다 뻗어 나가고, 누군가는 바삐 스쳐 지나치고, 또 어느 날에는 불쑥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체가 도로에 놓여있다가도 금세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사라지기도 한다. 어렴풋이 기시감이 들면서도 매번 새로운 도시의 풍경은 어딘지 현실이 아닌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박신영의 작업은 바로 도시의 생경함에서부터 시작한다. 지금껏 나고 자랐는데 이곳의 삶에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걸 보면, 어쩌면 내가 여기에 불시착한 존재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상상이 꿈처럼, 만화처럼, 영화처럼 이어져 화폭 위의 세계를 구축한다. 어디서부터가 현실이고 가상인지도 뒤죽박죽 섞여버렸다. 어느 거리에서든 우리는 단지 생존을 위해 헤매고 있을 뿐이니까 딱히 구분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실제 거리나 모니터 속에서라도 언젠가 보았으니 차라리 이 풍경을 ‘사실적’이라 해야겠다. 현실 세계의 메타포이자 평행우주인 박신영의 녹색 행성은 원인을 규명할 수 없는 불분명한 불안감과 불확실함으로 거리를 잠식하며, 이 여름, 우리를 출구 없는 모험의 세계로 이끈다.
 

 김소라 (OCI미술관 수석큐레이터)

 


 

현실과 상상의 중간지대, 21세기 몽유도원도



“작가로 살아간다면, 작가로 살겠다고 결정하면 혼자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시간들은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사회에서 주목하는 작가의 연령대가 너무 낮아졌어요. 이제 막 시작한 단계인데 자신의 스타일을 굳힌다거나, 주변의 반응을 고려해 유행을 여과 없이 쫒아갑니다. 호흡이 너무 빨라요. 지금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놓치는 게 아닐까요?”

 

– 유근택 『지독한 풍경 – 유근택, 그림을 말하다』 북노마드, 2013

 


 
박신영의 그림 이야기에 앞서 작가 유근택의 말을 먼저 인용한다. 작가로서의 ‘태도’와 관련된 의견이자 조언이다. 자칫 일반화의 오류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요즘 (일부) 젊은 세대 작가에게 흔히 발견되는 조급함과 미성숙에 대한 현상을 날카롭게 지적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세태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에 100% 동의한다.
이런 전제에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신영은 유근택이나 내가 우려하는 그런 작가가 아니다. ‘호흡이 너무 빨라서 너무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 젊은 작가’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는 오히려 상대적으로 좀 느리고 심지어 또래 작가들에 비해 뒤처진 것처럼 보이기도 할 지경이다. 대기만성(大器晩成)! 박신영은 천성이 무덤덤하고 조바심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성격이다. 그러니 남이야 어떻든 상관하지 않는다. 주변 상황에 아랑곳없이 자신만의 속도로 묵묵히 화가의 길을 걷고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대로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며 살아갈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박신영이 유근택이나 김동유처럼 ‘지독한’ 작가는 또 아닌 것 같다. (2010년 성곡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타이틀이 ‘지독한 그리기’였다.) 박신영은 그저 그림 그리는 일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뿐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좋아하고 재미있고,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인지 억지로 그리지도 않는다. 그림은 이미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박신영에게 그림 그리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습관과도 같다. 아니, “독서는 습관이 아니라 쾌락이다”라고 주장한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박신영에겐 그리기가 습관을 넘어선 쾌락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좀 고리타분한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이런 라이프스타일을 일컬어 ‘운명(運命)’ 혹은 ‘숙명(宿命)’이라고 하나 보다.
아무튼 나는 박신영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몇 차례 전화통화를 했고 작업실을 두 번 방문한 게 전부다. 그러면서 아주 무미건조하게 ‘용건만 간단히’ 식의 대화를 싱겁게 나눴을 뿐이다. 그 흔한 커피는커녕 물 한 잔도 같이 마시지 않았다. 시간도 길지 않았다. 그럼에도 앞서 밝힌 것처럼 나는 박신영이라는 인물의 캐릭터를 나름대로 단정 졌다. ‘평생 동안 꾸준히 그림을 그릴 사람’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 판단은 정확하지 않고 틀릴 수도 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 피상적인 선입견일지도 모르니까. 그럼에도 이런 배경을 전제로 박신영의 그림을 찬찬히 살펴본다. 그가 그린 그림은 도통 알다가도 모를 요지경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림 그리는 재미를 뜯어보는 또다른 재미
박신영 그림의 첫인상은? 불친절하다. 구체적 형상이나 내용이 한눈에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보면 뭘 그린 그림인지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그저 그린(green) 계열 컬러와 붓 터치만 먼저 보인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하다. 일정 시간 동안 그림 앞에 서서 구석구석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그러면 보이지 않던 형상들이 하나씩 드러난다.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와 가로수, 건물과 벽돌로 쌓은 벽, 공원과 그 안에 있는 불분명한 오브제 등이 뒤엉킨 도시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캔버스 크기는 달라도 모든 그림이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모티프나 소재도 많다. 찻길과 자동차가 대표적이다. 둥근 접시모양 위성안테나, 유류저장 탱크 혹은 폐기물 처리장처럼 보이는 동그란 형상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군데군데 송전탑도 있고 나무와 숲, 부엉이도 보인다. 그리고 뜬금없이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로봇도 그려져 있다. 이런 요소는 인과관계나 동일한 스토리로 엮여 있지 않다. 서로 아무 상관없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을 뿐이다. 특히 인물도 잘 보이지 않는데, 설령 있더라도 주변 풍경과 섞여 있어서 마치 온몸을 위장한 채 은폐하고 있는 군인처럼 잘 보이지 않는다. 이런 이유에서 박신영의 그림은 가까이에서 보면 뭐가 뭔지 잘 모른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봐야한다. 그러면 붓질의 흔적과 컬러 속에서 무엇인가 어렴풋하던 형상이 조금씩 구체적으로 드러나 보이기 시작한다. 박신영은 이처럼 알쏭달쏭한 자신의 그림을 ‘풍경화’라고 명쾌하게 정의한다. 그런데 이 풍경은 실재하는 풍경이 아니다. 사실과 허구, 현실과 상상이 뒤섞여있다. 그래서 얼핏 보면 초현실적인 풍경처럼 보인다. 하지만 개념적으로는 사실적인 풍경화다. 이것이 박신영 그림의 진짜 정체다. 도시에서 포착한 이미지를 모티프로 한 박신영의 그림은 수수께끼처럼 비밀이 많다. 실제 현실과 동떨어진 상상에 의한 풍경이기 때문이다. 사실과 상상으로 만들어낸 도시 풍경은 SF 영화처럼 낯설고, 공상과학 만화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사회적 이슈나 이념적인 주장이 담긴 메시지를 담고 있지도 않다. 평소 도시풍경을 보면서 경험한 느낌을 고유한 회화적 언어로 형상화 한 것이다. 이를 통해 말로 직접 설명할 수 없는 도시의 느낌과 전통적인 풍경화가 지닌 ‘숭고미’가 관객들에게 전달되길 원한다.
박신영에게 유화는 아주 적합한 기법이다. 그는 처음으로 그린 붓 자국과 그 흔적에 반응하면서 또 다른 붓질을 중첩하고 쌓아간다. 그림이 그려지는 중간에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는 셈이다. 이런 제작방식은 즉흥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아주 치밀한 계획에 의한 것이다.

 

시공간을 초월한 심리적 풍경화
한편 이번 개인전에 출품된 대형 작품, 즉 크기가 가로 680cm × 세로 180cm에 이르는 <출구 없는 도로에서>를 보면서 안견이 그린<몽유도원도>를 보았을 때 기억이 오버랩 됐다. 현재 일본 덴리대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몽유도원도>원본은 지난 2009년 가을,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린 <한국박물관 개관 100주년 특별전>에서 단 9일 동안 일반에게 공개된 바 있다. 그때 나는 이 그림을 가까이에서 직접 봤다. 그래서 박신영의 그림을 보면서 <몽유도원도>를 떠올리게 된 것이다.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안휘준 명예교수는 우리 고미술의 우수성을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키워드로 짚어냈다. 그리고 그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산수화로 손꼽은 그림이 바로 <몽유도원도>다. 안 교수는 “동양의 두루마기(卷) 그림에서는 이야기가 오른쪽에서 시작되어 왼쪽으로 전개되는 것이 통례인데 반하여 <몽유도원도>는 그 반대로 왼쪽에서 오른편으로 이어져서 색다르다. 그것도 왼쪽 하단부 구석에서 시작하여 오른편 상단부의 구석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사선(斜線) 혹은 대각선을 따라 전개되고 있어서 매우 특이하고 독보적이다. 또한 이 사선을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왼편 하단부에서 오른편 상단부로 옮겨 갈수록 점점 웅장감이 더 커지고 고조된다. … 고원(高遠), 평원(平遠), 심원(深遠)의 삼원법이 갖추어져 있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밖에도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도원을 넓게 보이게 하기 위하여 위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부감법을 구상하였고, 가장 가까운 근경에 위치한 산의 높이는 대폭 낮추어 표현한 사실에서 안견의 뛰어난 기지를 엿볼 수 있는 점도 괄목할 만하다”고 해석하고 평가한다.

 

다소 긴 인용이었지만, 이런 해석을 박신영의 작품 <출구 없는 도로에서>에 대입해 보면 어떨까? 옆으로 긴 화면을 직선 도로가 수평으로 가로지르며 화면을 위아래로 나눈다. 그리고 이 도로를 중심으로 상상의 도시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몽유도원도>의 시선이 복합적이듯 <출구 없는 도로에서> 역시 정면, 측면, 위에서 내려다본 장면이 한 화면에 등장한다. 풍경이 뒤죽박죽이듯 이야기도 초현실적이다. 이처럼 박신영의 <출구 없는 도로에서>와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상상의 풍경화’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더불어 풍경을 바라보고 해석하고, 표현하는 작가의 시점, 그림 속에 등장하는 초현실적 요소 등 여러 측면에서 두 그림은 시대를 초월해 교감하는 점이 많다. 관객은 박신영의 그림 앞에서 실제 도시 공간을 거닐 듯 좌우, 상하로 눈길을 옮겨 가며 찬찬히 내용을 읽어 내려가게 된다. 어쩌면 꿈속에서 무릉도원을 보았다는 안평대군처럼 비현실적인 공감각을 체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친김에 이런 사족을 덧붙여 본다. 안견에게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해주었던 안평대군이 OCI미술관 전시장에서 박신영의 그림을 본다면 과연 어떤 말을 할까?


이준희(건국대 겸임교수)


 작가 약력

themuses@naver.com
 
학력

홍익대학교 회화과 석사
홍익대학교 회화과 학사

 

개인전

2019 《출구 없는 도로에서》, OCI미술관, 서울

 

단체전

2018 《공백이 가득한 행성》, 합정지구, 서울

《얼굴로부터》, 2/w, 서울

 

수상/선정

2019 OCI Young Creatives 선정
2017 최초예술지원, 서울문화재단










한윤정

Gaze & Trace


 물건 말고, ‘사건’에도 생김새가 있을까? 한윤정은 세상을 가득 채운 무형의 것들을 빤히 바라보면(gaze) 각도에 따라 실루엣도 비치고 색상도 들어오며 언뜻언뜻 그 결마저 엿볼 수 있음(trace)을 귀띔한다.

 

평생 머리 위에 이고 살면서도 깨닫지 못할 뿐, 별이 서로 부둥켜안고, 부풀고, 터지고, 흩날리는 저 밤하늘만 해도 이미 ‘사건의 생김새’이다. 있는 대로 부릅떠도 시커먼 허공에 희끗한 점 몇 개가 고작이라면 가시광선의 한계, 보는 방법의 문제에 불과하다. 감마선, X선, 자외선, 중성자선, 자기장, 중력장⋯ 갖은 각도로 뜯어보고 색을 입힌 게 바탕화면 단골 테마인 천문 사진들이다. 수채물감처럼 번진 성운, 긴 팔 휘날리는 나선은하, 그 귀퉁이 어느 한편의 ‘지구’라는 약간의 부스러기마저 서사의 궤적이며 동시에 내용이다. 이렇듯 물건과 사건의 경계는 칼 같지 않다. 사건의 아주 짧은 단위, 극히 좁은 구간의 스냅샷을 편의상 ‘물건’으로 부를 따름이다.

 

그 부스러기 지구에도 숱한 사건이 들끓는다.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들고, 베스트셀러와 유행어가 뜨고 번지며, 갖은 군상이 피고 진다. 데이터가 모이고 쌓일수록 그 판세는 제법 해상도를 차리고 점차 모양새가 읽히기 시작한다. 한윤정은 이 모양새를 추슬러,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작품을 빚는다. 홍채의 색상 값은 입체의 요철로, 지문의 흐름은 음파의 고저로, 가뭄에 신음하는 땅은 그 가쁜 심박을 도형으로 치환한다. 말하자면 자연의 문맥, 사회의 줄거리, 인류의 사연을 장노출로 담은 디지털 초상이다.

 

‘데이터’는 각지고 건조하고 단단할 것만 같은데, 그의 작업은 촉촉하고 말랑말랑하다. 사건은 정착할 줄 모르며, 변덕이 끓어넘치는 때문이다. 감상자의 홍채와 지문은 서로 겹칠 겨를 없이 저마다 뜻밖의 모양, 갖은 색상, 판이한 소리로 화답한다. 다이얼을 돌리면 수온이 오르내리고, 시간이 뒷걸음질 친다. 툭툭 밀친 돌멩이를 타고 멜로디는 늘 새로이 출렁인다. 보여 주는 방법 또한 시시각각 자란다. 버전업을 거쳐 모델은 거듭 성숙하고, 새로운 기술의 접목은 이 내러티브의 싱싱한 새 단면을 또 한 꺼풀 들춘다.

 

김영기 (OCI미술관 큐레이터)




 

시선과 흔적


 W. 칸딘스키는 소리를 색으로, 색을 소리로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예를 들어 언어가 달라도 같은 인류로서 공유하는 삶이 있다면 거기에 같은 개념의 단어가 존재하듯이, 오감의 각각 다른 감각들 사이에도 공유하는 영역(=공감각)이 있다는, 즉 오감에는 지구상의 사람들의 언어들처럼 일대일 대응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말하자면 어떤 색에 대응하는 소리를 찾아내는 일종의 ‘번역’이 가능하다는 발상이다. 그러나 공감각은 극히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우리가 더 주목해야할 사실은, 칸딘스키가 그 ‘공감각’의 공유부분이 단지 말초적인 오감들 사이에만 걸쳐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깊은 정신적 영역, 영혼의 통합적 영역에 까지 관여되어 있다고 믿은 점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음악을 동작으로 바꿀 줄 안다. 춤을 추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일대일 대응되는 공감각을 사용한 것이라고 할 수 없고, 리듬이나 감정 등 다른 요소에 의해 매개되고 또 어떤 때는 정신적이거나 초현실적 감각에 의해 소통되는 번역이다.

 

미디어아티스트 한윤정의 이전 작업들 중에서 많은 경우는 형태와 운동을 사운드로 전환 혹은 번역하는 작업이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발표해 왔던 일련의 작업들은 그러한 경향성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sound tree ring>(2013)은 새로운 형태의 ‘디지털 악기’라고 부를 만하며, 형태가 소리로 번역되고, 조형으로 작곡이 가능하다는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one> (2009)이나 <color note>(2007)는 관객의 개입이나 새롭게 설정된 연주코드에 의해 다른 규칙이 생성되도록 유도하고, 궁극적으로는 이를 통해 이미지의 생태계가 형성되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최근 작업에서 한윤정은 이전의 추상적이거나 보편적 원리보다는, 각 개체의 생체정보를 통해 생명의 내적정체성을 드러내는 작업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인터렉티브 설치 작품인 <손끝소리>(Digiti Sonus)는 개인의 지문을 3D프린터로 입체조형화하고, 그 나선형 패턴을 따라 마치 레코드판의 트랙에서 기록을 읽어내는 것처럼 소리가 발생되도록 고안하였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그것은 한 개인의 ID이기도 하고, 혹은 정체성의 상징으로도 통하는 지문에 내재된 생체의 비밀스런 코드를 매개로 해서, 그 본인=관객으로 하여금 ‘생의 심연으로부터 호출된 예기치 못했던 자신’과 만나고 놀고 소통하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그리고 이번 OCI미술관 전시에서 지문 대신 홍채를 이용한 인터렉티브 설치 작품 <Eyes>를 선보인다. 이 일련의 작품에 사용되는 지문 혹은 홍채에서 얻은 생체정보에는 게놈지도보다 훨씬 복잡하고 방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끈이론이 암시하는 것처럼 우주의 파동과 입자, 중력과 양자력, 전자기력 등이, 그리고 이런 것들의 시작과 끝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면, 생명이 탄생하고 진화해 왔던 시간은 실로 일부에 불과하고, 빅뱅이나 물질진화(material evolution) 등 너무 장대한 스케일의 시간이 그 속에 각인되어 있을지도 모르겠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미지의 자기정체성과 만나고 놀고 소통하기 위한 이 작품이 실제로는 우리를 전혀 낯선 우주와 맞닥뜨리게 할 수도 있다.

 

지문 혹은 홍채에는 우리들 인간의 과거의 내력이 축약/코딩되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작가는 물론 이 작품을 대하는 관객의 마음에도 존재한다. 그것은 그 신비한 모양이, 공감각의 경우에서처럼 일대일 대응방식이 아니라, 수학적이거나 임의로 설정된 다중코드에 의해 번역되고, 그 결과와 대면하고 소통하며 나아가서는 공감하는 일을 통해, 우리는 개개인의 삶에 대한 보다 높은 차원의 인식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자신의 생체정보의 골짜기에서 울려나오는 사운드의 잔향(殘響 : sound reverberation) 속에서, 예기치 못했던 자신의 기이한 모습에 놀라게 된다. 관객은 미지의 심연으로부터 자신을 자각하고 공간에 체현되는 자신과 만나고, 지금까지 자신이 본 적이 없었던 마음의 내면이거나 생의 뿌리였다는 생각에 경이로운 감정으로 몰입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의 시뮬레이션이고 환영이다. 원래 세상에는 가짜는 아닐지라도 오독되는 정보가 더 많다. 정글이나 자연계에서도 생명체들은 생존을 위해 가짜정보를 생산하거나 위장하고, 나아가 생명체의 내부에서도 면역체계와 바이러스의 정보전쟁이 일상적으로 수행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수행된 ‘형태에서 사운드로의 전환‘도 일대일 대응하는 단어를 번역하듯 하지 않았으므로 오역일 수도 있고, 말하자면 관객이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 환영일 수도 있다. 특히 새로운 방식의 정보는 오독되는 것이 숙명이기도 하다. 나아가 그 환영도 우리의 그림자들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처럼 자신의 생체정보가 읽히고 변환되고 반향하는 공간 속에서 자신의 심연으로부터 발신되는 그림자와 만나고 공감하는 일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한윤정은 매우 과학적인 태도로 작업하는 작가이다. 그의 작업세계를 이해하는 또 다른 키워드는 ‘디지털 시선’과 그것을 통한 ‘가시화’이다. ‘디지털 시선’이란 가시광선에 의해 한정되는 시야를 넘어, 데이터로 파악할 수 있는 모든 곳에까지 인식의 범위가 확장된다는 의미라고 생각된다. 적외선, 각종 전파 그리고 심지어 이제는 중력파까지, 센싱(sensing)에 의해 수치로 표시되는 데이터를 얻을 수 있는 모든 영역이 ‘시선’의 대상이다.

 

한윤정이 이번에 선보이는 또 하나의 작품 <Drought in California and Korea>(한국과 캘리포니아 가뭄)은 두 지역 가뭄의 관계성을 파악하기 위한, 디지털 시선에 의한 가시화작업이다. 1980년대부터 관심을 끌었던 과학적 가시화(scientific visualization)는 말 그대로 과학연구의 수단으로 추구되었던 미션이다. 가시화는 자잘하게 흩어진 생각들을 하나로 모아서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매우 유효한 작업이다. 예를 들면 지구환경이나 온난화 등의 문제를 일목요연하게 이해하기 위한 가시화가 그것이다.

그런데 ‘가시화’는 미술의 중대한 사명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 있거나, 있다고 믿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 그것들을 가시화하는 것. 대표적으로 교회와 사원에 수없이 그려지거나 조각된 신상들이 그 대표적 사례들이다.

한윤정은 이 작업에서 촬영과 측정한 각종 데이터를 디지털처리하고, 한국과 캘리포니아 두 지역에서 일어나는 같은 종류의 현상에서 차이점과 유사한 점 그리고 관계성을 발견해 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작업으로 측정된 데이터 혹은 해석된 결과가, 전술한 지문이나 홍채처럼, 장대한 지구의 역사가 빚어낸 생체정보의 연장선상에서 설명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굳이 가이아이론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두 지역은 서로 다른 생리적 특성을 지닌 개체일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이 전시의 타이틀을 ‘시선과 흔적’이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인 것 같다. 이처럼 자연과 우주의 내면과 순환 관계, 그리고 시간이 만들어낸 흔적에 숨어있는 내러티브는 새로운 의식의 탐험, 감상자의 자각을 위한 스토리텔링이다. 이 작가처럼 인체의 생체정보로부터 새로운 예술의 내러티브를 모색하거나, 존재의 출발점으로부터 먼 여정의 흔적을 통해 우주와 자연과 나를 각성하도록 인도하는 작업이야말로, 우리시대의 예술이 세상에 기여하는 가장 의미있는 발걸음이라고 생각된다.

 

이원곤  (미디어예술론 / 단국대학교 교수)




 

오선영

Rainbow Forest


 알록달록 큼직한 롤리팝 사탕 하나 쥐어 주니 서럽게 흐느끼던 하늘도 뚝 그친다. 세어 보니 더도 덜도 말고 딱 일곱 빛깔, ‘빨주노초파남보’가 틀림없다. 그래서 무지개(rainbow)라 불렀다. 음성 언어는 이야기를 장면으로, 수백 가닥을 일곱 다발로, 다시 이들 모두를 달랑 한 마디로 수렴하곤 한다. 속된 말로 ‘싸잡아 퉁치려’ 든다.

 

무지개. 그 어감이 왠지 발그레하고, 감빛이 돌고, 샛노랗고, 푸르께하며, 거무죽죽하다. 달착지근한 과일향이 솔솔 풍기니 하늘도 울다 문득 반쯤 덥석 베어 문다. 오선영의 언어는 발산한다. 단어 하나가 움터 장면들이 줄지어 꽃피고 이야기 향기가 사방으로 물씬 퍼진다. 널브러진 몇 조각 연분홍 꽃잎으로 장미 반 찔레 반 동화 속 덤불숲을 두르고, 녹 투성이 열쇠 하나로 해 질 녘 외진 저택의 휘황한 대문 너머 빛바랜 설화를 열어젖힌다.

 

일반적으로 ‘이미지’란 대상을 호출하는 시각적 단서에 가깝다. 복숭아 그림은 복숭아의 초상이다. 그러나 오선영의 복숭아는 복숭아면서 못다 핀 장미 꽃망울이고, 도자기로 구운 물감 덩어리이며 펑 터진 가슴의 잔해이기도 하다. 애써 코앞에 따다 놓은 달은 봐도 봐도 그냥 달일 뿐이다. 적당히 사이도 두고, 때론 흐린 날도 있고, 침침히 달무리도 져야 토끼가 방아도 찍고, 두꺼비도 뛰고, 사자도 산다. 오선영은 이야기를 잘 빚어 실루엣을 차려 잡는 대신, 이토록 넓게 펴 바르고 불규칙하게 부서뜨린다. 그물이 촘촘하다고 대어를 낚는 게 아니다. 낭만 어부 오선영은 흔적과 자취를 굵게 꼬아 성글게 얽은 회화 그물로 더욱 씨알 굵은 이야기 뭉치를 포획하려 든다.

 

이야기가 한바탕 들끓으며 사방으로 튄 흙탕물 자국 같은 그림들은 경쾌하고 산뜻하면서 즉흥적이고 또한 격정적으로 다가온다. 두께가 주는 마티에르를 과감히 반납한 오선영의 터치는 단지 특유의 섞임과 결을 통해 물성을 인증하곤 한다. 수정할 겨를 없는 일필휘지一筆揮之의 승부. 에스키스를 거듭하고, 순서를 가다듬고, 색상을 저울질한다. 너덜거리는 작업 진행 수첩은 ‘계획적이지 않아 보일 계획’으로 빽빽하다. 무심한 몰입의 중첩은 묘사를, 철두철미한 가늠은 즉흥과 격정을 낳는다니 사뭇 역설적이다.

 

김영기 (OCI미술관 큐레이터)

 


틈이 만드는 끊임없는 틈, 입 벌린 상처, 미끄러지는 기표


“문자는 야생에서 볼 수 없다”

– Sigmund Freud, Die Traumdeutung, 1899.

 

우리는 ‘말하는 존재’(parlétre)다. 말(언어)은 자신과 세계의 의미를 고정하는 도구다. 하지만 이 고정은 강제적이고 편의적인 고정이기에 우리는 늘 말의 실재(the Real)를 파악하는 데 실패한다. 결국 로고스(λόγος, 말, 이성)로는 온전한 실재에 다가설 수 없다. 이것이 말이 가진 불가능성이다. 작가 오선영은 바로 이 지점을 감지한 듯하다. 작가는 “잔인한 인간사를 각종 미사여구로 풀어내는” 신화, 전설, 우화, 동화 등의 고전 환상문학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특정 소재와 그것의 의미를 고정하는 단어에 주목한다. 익히 알고 있듯이, 고전 환상문학에서는 숲, 정원, 저택, 장미, 화살, 별, 시체, 고양이 등과 같은 특정 소재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이 소재들은 성향이 다른 작품에서 거듭 등장함으로써 그 내적 의미의 깊이와 너비를 확장해 나간다. 이 소재들은 문학작품에서 문자(기표;記標)라는 형태로 잠시 잠깐 의미(기의;記意)에 고정된다. 하지만 이 소재들이 내포하고 있는 암시, 은유, 상징 등은 문자의 일상적 의미를 초과하여 범람하고, 결국 임시적 고정점은 의미의 물결을 따라 한없이 떠밀려간다. 언어를 뛰어넘어 대상에 도달할 수 있는 신적 직관을 갖고 있지 않은 ‘말하는 존재’는 실재에 접근할 수 없는 유한성(말; 언어)을 도구로 사용하고 있기에, 결코 대상의 실재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언어와 실재 사이에 있는 메꿀 수 없는 틈, 그 ‘입 벌린 상처’에서 오선영의 작업은 시작된다.

 

단어의 정령(精靈) 불러내기

오선영의 작업은 한마디로 ‘단어 속에 숨죽이고 숨어 있던 정령(精靈)을 불러내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먼저 오래전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전해 내려오다 하나의 텍스트로 자리 잡은 고전 환상문학을 집어 든다. 그리고 거기서 자주 등장하는 상징성 있는 명사를 수집하는 것으로 작업을 시작한다. 그는 “지시하는 대상이 가시적으로 존재하지만 상상 속에 추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순간 설레게 하는 명사”를 하나씩 수집해 나간다(작가노트). 이 명사들은 가시적인 대상을 지시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지만, 사실상 어떤 대상이라기보다는 추상적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수집 행위에는 기표와 기의의 불일치성, 기표와 실재의 불일치성에 대한 인식이 달라붙어 있다. 작가는 이렇게 수집된 명사들의 이미지를 맥락 없이 화면 안으로 불러온다. 그럼으로써 무의미하게 분절된 한 편의 이야기를 완성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어떤 의미도, 서사적 맥락도 없는 작가의 이야기가 마치 특정한 사건을 내포하고 있는 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감상자에게 긴장감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왜 맥락 없는 이미지의 조합들이 사건이 되고, 긴장감을 불러올까? 소쉬르(Saussure) 이래로, 단어나 상징 그 자체에 의미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어와 단어, 또는 상징과 상징 사이에서 의미가 존재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오선영이 맥락 없이 나열한 (수집된) 단어의 이미지들도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에서 파생되는 어떤 의미가 하나의 새로운 사건을 발현시키며 이야기 구축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러한 판단은 사실 의미 형성의 일반적인 구조적 분석일 뿐이다. 오선영의 작업은 여기에서 한 단계 더 심층으로 들어가야 한다.

 

흔들리는 기표, 끊임없는 생성되는 틈; 단어의 역사성과 기표의 불완전성

(감상자에게 긴장감을 일으키는) 이 새로운 사건을 심층적으로 분석해보면, 내적 작동 기저와 외적 작동 기저가 결합하면서 형성된다고 볼 수 있다. 내적 작동 기저는 작가가 수집한 ‘단어(명사)의 역사성’과 언어라는 ‘기표의 불완전성’이고, 외적 작동 기저는 작품에서 드러나는 ‘유동적 표현성’으로 보인다. 이 내외적 작동 기저가 오선영 작업을 독특한 지점으로 이끄는 동력으로 기능한다고 판단된다.

내적 작동 기저 중 하나인 ‘단어의 역사성’은 작가가 선택하는 문학작품의 특성과 맞닿아있다. 여기서 작가는 현재에서 한걸음 물러난다. 오선영은 역사성을 가진 고전 환상문학(전설, 신화, 우화, 동화 등)을 택하고 거기에서 특정 단어를 추출한다. 그래서 그 단어들에는 역사성이 스며있다. 작가는 자신이 추출한 단어가 “19세기 라파엘 전파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These were] symbolized reminiscent of nineteenth century’ Pre-Raphaelite paintings.)”라며, 자신은 “도상학적으로 작품을 정밀하게 구성했다(My paintings elaborated iconography)”고 말한다(석사학위 작업론). 그의 작업에는 역사성과 고전성이 깔려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작가가 과거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학 장르(고전 환상문학)와 그것에서 추출한 단어들, 그리고 도상학적 접근. 이러한 과거를 향하는 역사성은 서정적/고전적/장식적/표현주의적인 작가의 외적 표현성과 맞물리며 어딘가 낯설지 않은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오선영의 작품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것은 이러한 조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내적 작동 기저, 즉 ‘기표의 불완전성’이 이 낯설지 않은 작품을 일순간 낯선 “신비한 풍경”으로 변화시킨다. 여기서 작가는 현재에 서 있다. 기표(문자, 혹은 기호로서 이미지)는 늘 불완전하다. 기표는 그 기표의 앞과 뒤에(혹은 주변에) 존재하는 기표들에 의해 의미가 확정될 뿐이며, 언어의 창고에 있는 ‘대체 가능한 기표’(동의어)에게 언제든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늘 흔들린다. 그리고 기의와 기표 사이에 상상적 관계(임의적 연결 가능성, 은유나 상징)로 인해 틈을 가지게 된다. 이 틈은 다른 기표들과 관계 맺으며 끊임없는 또 다른 틈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기표는 언제나 불완전하다. 작가는 추출한 명사(단어) 중 “순간 떠오르는” 명사들을 조합하거나, 뉴스, 잡지에서 우연히 보게 된 동시대 사건의 이미지들과 결합하면서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때 이 ‘기표의 불완전성’, 그 멈추지 않는 흔들림과 끊임없이 생성되는 틈은 ‘단어의 역사성’으로 인한 발생하는 진부함(cliché)을 걷어내고, 임의적이고 가변적이며 변화무쌍한 새로운 사건을 출현시킨다. 우리가 그의 작업을 클리셰로 느끼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끊임없이 틈을 만들며 흔들리는 기표들의 관계, 그 기표의 분절적 관계가 들려주는 새로운 열린 이야기를 듣기(보기) 때문이다.

 

녹아내린 완결과 미결 사이의 장벽; 유동적 표현성

오선영의 작업은 완결과 미결 사이의 장벽을 녹이면서 우리 앞에 놓인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사건으로 이끄는 외적 작동 기저라 할 수 있다. ‘유동적 표현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외적 작동 기저는 사건의 전개를 열어놓듯이 작업의 완결을 열어놓는다. 그리다만 듯한 화면, 무심코 칠한 듯한 붓자국, 흘러내리는 물감, 비어 있는 캔버스의 공간, 간략하게 그린 듯한 스케치……. 작가의 작품은 (관례상) 미결된 상태로 우리를 마주보고 서 있다. 하지만 이 미결된 상태는 결코 미완성이 아니다. 계획된 미결이기 때문이다. 즉흥적으로 보이는 오선영의 표현 방식은 사실 치밀한 계획에 따라 진행된다. 그는 작업을 위해서 꼼꼼하게 사전 스케치를 하고, 표현 방식과 그것이 가져올 예상 효과를 적는다. (나는 공들여 스케치하고 관련 내용을 꼼꼼하게 적은 작가의 스케치 노트를 직접 보았다.) 이러한 계획된 미결은 그의 작업을 완결된 느낌으로 만든다. 작가의 표현성은 묘사와 물성연구를 가로지르고, 완결과 미결을 넘나들고, 스케치와 채색을 동일 선상에 놓는다. 이 유동적 표현성은 ‘단어의 역사성’과 ‘기표의 불완전성’과 맞물리며 화면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사건을 미결인 채로 영원히 열어놓는다.

작가의 유동적 표현성은 평면을 넘어 입체로도 향한다. 하지만 일반적 입체는 아니다. 그가 추구하는 입체는 (은유적으로) ‘평평한 입체’다. 그의 작업 중에는 도기(陶器) 기술을 사용한 입체 작품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데, 다면체 형태로 ‘여러 평면들’이 결합한 구조물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다시 말해, 여전히 입체가 평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작가는 평면 작업에서 두꺼운 임파스토(impasto) 없는 평평한 표현성(flatness)을 추구한다. 이러한 특성이 고스란히 입체로 전이(轉移)되면서 소위 ‘평평한 입체’로 이어진 듯 보인다. 작가는 말한다. “그림과 도자기가 장식적인 부분, 낭만적인 부분이 혼용되는 경우가 있고, 다른 재료이지만 서로 레퍼런스(상호 참조)가 된다.” “이질적인 면들[특성들]이 상호작용하는 듯하다.”(작가 인터뷰) 두 양식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의미다. 이러한 평면과 입체라는 이질적인 양식의 상호작용은 완결과 미결을 넘나드는 유동적 표현성에서 파생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오선영은 이번 전시에서 하루를 시간 순서에 따라 전시하면서 “일상으로 침투하는 낭만적 풍경”을 선보인다. 그가 보여주는 하루는 틈을 끊임없이 만들며 기표를 끊임없이 미끄러트리는 유동하는 하루일 것이다. 완결과 미결의 경계 없는 열린 하루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는 하루에 목격자로 초대하는 오선영의 초대장을 쥐고 있다.
 

안진국(미술비평)


2016 OCI YOUNG CREATIVES
박석민_이은영展

2016_0623 ▶ 2016_0717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6_0623_목요일_05:00pm


작가와의 대화 / 2016_0709_토요일_02:00pm


박석민 『New satellite - 모형 궤도』展

이은영『멀리 있는 산이 가까이 보이면 비가 온다』展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수송동 46-15번지

Tel. +82.2.734.0440

www.ocimuseum.org



박석민-New satellite - 모형 궤도 - 섬광, 일상의 궤도를 위협하는 낯선 구멍 ● 일상의 풍경이나 어떤 상황을 연상시키는 박석민의 그림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작은 섬광들이 존재한다. 그의 그림에서는 가로등이나 먼 곳의 전광판, 혹은 떨어져나간 벽보나 방치된 건축 폐기물 등이 현실에서의 우발적 상상을 부추기는 듯한데, 작가는 이를, "도시 환경 내부의 누락되고 유기된 지점"이라 말한다. 도시의 밋밋한 풍경을 배회하는 작가의 시선은, 오히려 길들여진 거대한 풍경에서 예기치 않게 발견되는 작은 얼룩들에 초점을 둔다. 하루가 멀다 하고 헐고 새로 짓기를 반복하는 도시 속 공간들은, 특유의 역동적인 변화마저 집어삼켜버리는 스펙터클한 환영 밑에 은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소소한 변화와 차이가 만들어내는 일상의 작은 반짝거림으로 거대한 환영을 깨부수려 했던 20세기 아방가르드들의 출현이 벌써 역사 속 한 장면처럼 느껴질 만도 한데, 이러한 "시각성"에 대한 불신과 폭로는 동시대의 작가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과제로 다뤄지고 있다. 박석민은 꿈쩍도 하지 않을 도시의 풍경에 맞서, 한 발 뒤 혹은 한 발 앞을 서성이며 풍경의 환영이 붕괴되는 지점을 찾으려 한다. 환영의 질서를 이탈한, 현실의 또 다른 궤도를 탐색하는 그의 시선은 언제고 무심한 풍경 배후에 들어설 찰나의 기회를 엿보는 중이다.


박석민_Event field_캔버스에 유채_224.4×162.2cm_2016


빛, 응시를 차단하는 낯선 섬광 ● 'New Satellite-모형 궤도'라는 제목의 이번 전시에서는, 현실의 어떤 상황들을 관찰하는 작가 특유의 시선이 강하게 묻어난다. 이를테면, 네 개의 캔버스를 이어붙인 큰 폭의 「Phantom Pain」(2016)은 전시의 시작을 알리는 위치에서 한 장소에 대한 복잡한 응시의 구조를 살피고 있다. 안정된 장방형의 구조는 텅 빈 객석 뒤로 영사기가 놓여있는 극장 내부를 보여준다. 이때 영사기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강렬한 빛은, 공간 깊숙이 들어가는 화면의 원근감을 상쇄시키며 안정된 현실을 임의로 분할해버리는 비현실적 공간을 창출한다. 박석민은 「끊임없이 도주하는 공간의 방식」이라는 제목으로 기술한 작가노트에서, "물리적인 환경과 비가시적인 영역의 경계를 확장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현실에 잠재되어 있는 "구조의 오류"를 형상화하거나 재배치하는 초현실적 상상에 대해 짧게 설명한 적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Phantom Pain」은 작가가 말한 경계의 확장과 구조의 오류를 형상화한 예로들만 하다.


박석민_Co-orbit_캔버스에 유채_180.2×200.4cm_2016



빛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은, 3차원의 현실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우리의 나태한 시선에 모종의 타격을 가한다. 빛은 흔히 누구도 그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없게 차단하면서 철저히 외부로만 시선을 유도한다. 「Phantom Pain」에서, 영사기의 작은 구멍으로부터 공간을 가로지르며 쏟아져 나오는 빛의 구조는 현실의 일부를 감쪽같이 숨긴 채 우리의 시선이 그 주변만 맴돌게 한다. 하지만 박석민은 이내 보는 이의 시선을 빛이 조명하는 현실의 주변부로부터 빛이 차단하고 있는 현실의 이면으로 집요하게 유도한다. 예컨대, 화면 가장 안쪽에 드리워진 그림자부터 뒷벽 양쪽 기둥에 그려진 기하학적 패턴, 천장과 벽면에서 반복되는 건축적 구조, 객석 의자에 적용된 원근감의 표현 등 공간에서 연쇄적으로 반복되는 삼각형 구조가 끝내 응시를 차단하는 빛의 내부로 우리의 시선을 끌어들이고 만다. 여전히 그곳은 진공 상태의 밀실처럼 접근 불가이기에, 우리를 눈멀게 하는 낯선 섬광을 응시하는 순간 현실에 길들여진 안정된 시선은 일제히 붕괴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박석민의 말대로라면, 현실에서 "있을 것 같지 않은 실재"를 상상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그 시선의 붕괴가 일어나는 지점이 된다.


박석민_공중감각_캔버스에 유채_148×258.2cm_2016


틈, 차이를 매개하는 장소 ● 박석민은 길들여진 응시가 붕괴되는 찰나의 경험을 현실 공간에 내재해 있는 일련의 구조로 시각화하고 있다. 때문에 그의 그림에서 빛이 구조화 하는 공간들은 일상에서 겪는 시지각적 차원의 모호함과 복잡함을 설명해줄 중요한 단서가 된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현실에 출몰한 낯선 섬광들은 스스로 자신의 배후를 철저히 숨긴 채 그 주변을 더욱 선명하게 조명하곤 하지만, 결국 현실과 현실의 이면 둘 다를 의심케 하는 불안정한 틈새의 장소가 된다. 그게 작가가 말한, "도시 환경 내부의 누락되고 유기된 지점"이며 마치 섬광처럼 한순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우연한 상상의 출구인 셈이다. 「Back Room」(2016), 「The Door」(2015), 「Quiet Room」(2016), 「Fatamorgana」(2016) 등과 같은 일련의 작품들은, 실제의 현실 공간에 잠재되어 있던 구조를 분석해내 그것을 재구성하고 여러 시점에서 재해석하여 얻어낸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때 현실을 배회하며 작가가 목격한 또 다른 현실의 공간은, 익숙함과 익숙하지 않음의 경계가 교묘하게 지워진 채 초현실적 공간의 파편화된 구조를 함축한다. 이는 「Phantom Pain」에서 끝없이 연쇄하는 시선의 이동을 말했던 것처럼, 현실에 잠재되어 있는 낯선 실체가 일으키는 작은 파열은 현실의 공간을 순식간에 전복시켜 시선을 사방으로 흩어버릴 정도의 파괴적인 힘을 보여주기도 한다.


박석민_Back room_캔버스에 유채_100×70cm_2016


「공중감각」(2016)이나 「Political Corner」(2016)의 경우, 현실에서 배제되거나 누락된 공간에 대한 구조적 접근은 또 다른 의미로 확장된다. 높은 철탑과 건물의 꼭대기에 불안하게 서 있거나 걸터앉은 인물들의 시선은 가파른 공간의 구조를 재차 반복하면서 이 상황에 과도하게 누적되어 있는 불안함의 실체를 상상케 한다. 이처럼 예상지 못한 곳에서 반짝하는 것들, 그것이야말로 현실에 드리워진 이상한 모순이며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부조리한 섬광인 것이다. 철탑 너머 혹은 건물 꼭대기의 존재가 현실에 떨어뜨리는 시선은, 보통 박석민의 그림에서 가로등과 전광판의 불빛, 떨어져나간 벽보, 방치된 건축 폐기물처럼 쉽게 응시할 수 없거나 미처 체감하지 못하는 현실에서의 시각적 부조리를 강하게 환기시킨다. 공간의 층이 훨씬 더 복잡하게 얽혀있는 「Event Field」(2016)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 그림은, 공간의 논리를 붕괴시킬 만큼 왜곡되고 어긋난 시점들로 한없이 부자연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관계들 사이사이를 촘촘히 채우고 있는 얼룩 같은 틈새들 때문에 켜켜이 누적된 현실의 부조리한 풍경을 그냥 지나치기는 분명 쉽지 않다. 얼핏 시각적 과잉상태로까지 보이는 박석민의 그림 앞에서, 우리의 시선이 끊임없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연쇄하는 이유도 어쩌면 수많은 얼룩과 틈새들이 끈끈하게 맺게 된 새로운 구조적 관계 때문일 수도 있다.


박석민_Quiet play_캔버스에 유채_100×70cm_2016


이처럼 누적된 일상의 풍경과 그 안팎의 구조를 살피는 박석민은, 흥미롭게도 작업 과정에서 또한 동일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여러 개의 캔버스를 켜켜이 펼쳐놓고 동시에 작업한다. 그러다 보니 각각의 상관없는 풍경들이 때때로 캔버스 위를 오가는 그의 손끝에서 느슨하게나마 서로 만날 일이 생긴다. 더러는 물감이 튀어 다른 그림 표면에 예상지 않은 물감 얼룩을 남기기도 하고, 에어브러시를 뿌리다가 통제할 수 없는 돌발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는 사이, 애초에는 없던 낯선 섬광들이 익숙한 공간에 돌연 등장하기도 하고, 그렇게 잠깐의 반짝거림 때문에 현실의 부자연스러운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도 잦다. 그래서인지 박석민은 더 이상 재미있을 것도 없이 다 비슷비슷해진 일상의 풍경을 계속 오가면서, 마치 섬광처럼 그 현실 풍경의 진부함을 위협할 만큼 찢겨져 나간 작은 구멍들을 찾으려 한다. ■ 안소연


이은영_어찌하여 그렇게 많은 서로 다른 장소들이, 어찌하여 어떤 날이 다른 날에 융합하는 것일까_

조형토에 세라믹 펜슬, 벽면에 목탄, 조명_가변설치_2014~5



이은영-멀리 있는 산이 가까이 보이면 비가 온다 - 은유적 단편들 ● 여러 매체들이 상호조응 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이은영의 작품들은 작가가 섬세하게 접어 넣은 이야기가 있지만, 그 이야기를 관객이 그대로 읽기는 힘들다. 관객은 이야기를 소비하는 자가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야 할 협력자로 존재한다. 작품을 이루는 요소들은 그 자체로는 불완전한 채 연결을 통해서만 작동한다는 점에서 (상호)텍스트적이다. 작가가 단순히 자기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전시장은 마치 구획된 방들처럼 각각의 영역에서 방점이 달리 찍혀진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자기표현에 연연하지 않는다. 이은영에게 자신은 오히려 타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자신으로 나타난다. 특히 작가는 타인의 슬픔에 깊이 감정이입 된다. 작품들에는 우리의 민감한 사회적 문제들이 은유적 단편에 실려 있다. 이러한 문제를 제기한다고 해서 예술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곧 나의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사회적 문제에 무뎌지는 감각을 다시 각성하는 효과를 준다. 적절하게 제기된 질문은 이미 답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 이은영의 작품에서 이야기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동물인 경우가 많다. 벽이나 천에 그려지거나 세라믹으로 만들어진 동물형상은 인간을 대신하여 말한다. 목탄과 흑연으로 그려진 2차원 상의 이미지와 고온으로 구워져 단단하게 된 세라믹은 설치라는 현대미술의 보편화된 어법을 빌어 연결된다. 완결 감을 주는 회화이기 보다는 과정 중에 있는 드로잉과 단단한 덩어리들은 그것이 가령 몸통과 머리 같은 관계로 자연스럽게 연결될 때조차 이질적 접합으로 다가온다. 같은 종류가 나온다면 반복을 통해 이질화된다. 가령 여러 마리의 토끼나 까마귀가 집합되어 있는 이미지는 잠재적인 움직임이 있으면서 분열적이다. 세라믹도 마찬가지여서, 그릇같이 무엇인가를 담는 기능을 가진 완결된 형태가 아니라, 동물의 머리처럼 유기체의 일부분이 뚝 떨어져 나온 형태다. 심지어 연속적으로 출렁거려야할 바다도 조각 케익처럼 잘려져 배치된다. 각각은 접합되기 위해 잘려지며, 다른 것과 접합되어 형태나 의미가 작동될 때, 잘린 면은 단절이 아닌 열린 면이 된다.


이은영_이것은 당신의 잘못이다_천에 흑연 드로잉_150×100cm×2_2016_부분


열림은 자유와 동시에 방황을 낳는다.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예기치 못한 타자들과 대화해왔던 작가에게 이미지의 유목 뿐 아니라, 형식상의 유목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필연적이다. 작가는 천에 그려 어딘가에 걸려 지고 다시 둘둘 말아 또 다른 곳에서 펼쳐놓는 간편한 방식을 유목민으로부터 힌트를 얻었다. 단편으로 떠도는 이미지들의 결합을 통해 서사를 엮는 방식은 캔버스라는 완결된 형식 보다는 걸개그림이나 벽에 일시적으로 있다가 지워지는 방식 등을 택하게 했다. 그러나 단편들이 있는 그대로, 즉 아무런 방향타도 없이 방치되는 것을 원치는 않는다. 칠레의 현실참여 시인 네루다의 시 한 문장을 인용한 작품 제목 「어찌하여 그렇게 많은 서로 다른 장소들이, 어찌하여 어떤 날이 다른 날에 융합하는 것일까」(2015)는 꿈결 같은 낯선 파편들을 융합하여 현실까지도 살펴보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이은영의 작품에는 숲, 산, 바다, 동물 등 자연의 이미지가 편재하지만, 그 연결망이 자연스럽지는 않다. 이미지 또는 의미의 단편들은 미로같이 배치되어 있곤 한다. ● 2차원과 3차원 간의 접합은 잠재적인 것이 급작스럽게 현실로 도약하거나 그 반대의 과정으로 다가온다. 풍경이 그려져 있는 벽면에 붙은 동물의 머리는 그 존재방식의 차이에 의해 환상이 현실화된 것 같다. 그러한 과정은 전경과 후경의 관계를 통해서도 실험된다. 현실적인 것이 저 멀리 깔려있을 때도 있고, 종잡을 수 없는 파편들이 전경을 가득 차지 할 때도 있다. 그리고 그 자리는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강조하고 싶은 대목에 따라서 말이다. 전시 공간이 넉넉한 경우에는 관객의 동선이 이야기의 순서를 결정짓기도 할 것이다. 관객이 전시공간을 한 바퀴 돌고, 왠지 마음이 동하여 다시 돌게 되었을 때 마치 한 번 더 읽은 시집처럼 행간의 의미가 다시금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예술과 달리 공간예술에서의 서사는 제한적이다. 그렇지만 응축적이다. 형태만 보면 기괴하고 징그럽기까지 하다. 무채색의 거친 선들이 동물의 털과 겹쳐질 때 더욱 그렇다.


이은영_망각은 없다_천, 벽에 드로잉, 세라믹_가변설치_2015


관객에게 무엇인가 말하기 위해 등장한 캐릭터들은 돌연변이나 괴물처럼 생겼다. 도약과 비약은 자연은 물론 노동과도 구별되는 예술의 특징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그와 비슷한 과정은 우연적 사건이나 꿈에서나 발견될 뿐이다. 얼마 전에 열렸던 '나의 멋진 2014년 운세'전(2014, 제네바)이나 '검은 털 짐승에 관한 꿈' 전(2015, 부산)처럼, 우연이나 꿈은 작업의 중요한 자원이 된다. 잘린 소머리나 토끼들이 바글거리는 이미지 등도 작가의 꿈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해석(또는 해몽)은 문화에 따라 각기 다를 것이다. 작가는 의미를 중시하는데, 관객에게 각기 다르게 다가올 대상들이 떠도는 작품에서 해석은 어디까지 열려있어야 하는 것인가. 의미는 잃어버린 고리를 찾는 것에서 가능하다. 특히 무의식과 꿈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작품 해석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신분석학일 것이다. ● 정신분석학자 제이 그린버그와 스테판 밋첼이 쓴 『정신분석학적 대상관계 이론』에 의하면, 해석은 잃어버린 부분을 찾기 위한 작업이다. 저자들에 의하면 정신분석학은 본질적으로 해석적 학문이다. 분석과정은 치료자와 환자가 공동으로 환자의 삶을 탐구하는 것이며, 환자의 삶 속에서 잃어버린 부분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이은영은 프로이트나 융 같은 정신분석학자들의 꿈에 대한 이론이 너무 환원적이라고 느꼈다. 꿈에 대한 상징주의적 독법은 대중문화에서 곧잘 가져다 쓰는 상투형으로 귀결되기 쉽다. 그러나 예술의 어법은 다르다. 그러나 예술 역시 소통의 과제가 있기에, 너무 멀리 나아가선 안 될 것이다. 소통이란 타자와의 소통을 말한다. 통상적인 타자(너)부터 자기 안의 타자(무의식), 절대적인 타자(신) 등 타자의 계열은 무한하다. 동식물 등 자연 역시 타자화 된 존재이다. 특히 한국에서 미술대학을 마치고 10여 년간 독일, 프랑스, 스위스 등에서 학업과 작업을 병행해온 이력을 볼 때, 이은영에게 가장 큰 화두는 타자와의 소통이었을 것이다.


이은영_망각은 없다_천에 흑연 드로잉_210×160cm_2015


동물에 비해 불완전하게 태어나는 인간에게 타자는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정신분석학적 대상관계이론』에 의하면 식물이 흙, 물, 햇빛과 접촉하면서 자라나듯이, 자아는 현실 또는 내적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 자란다. 이은영의 작품에서 이질적인 것들이 접촉하는 지점들은 타자와의 관계를 보여준다. 타자와의 성공적인 관계를 탐색함으로서 치유를 도모하는 정신분석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자신들을 고갈시키지 않으면서 의사소통을 하고, 타자에게 함몰되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발견하고 타인에게 착취당하지 않으면서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위니캇)를 고민한다. 이 문제는 기존의 어법을 배우면서 자기만의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작가가 운명처럼 가지고 가야하는 것이다. 특히 작품만큼 내가 보는 시점과 타자가 보는 시점이 다른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 차이만큼이 의미이겠지만, 대개는 자기 독백으로 끝나고 만다. 해석이나 소통의 문제는 타자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 『정신분석학적 대상관계이론』에 의하면 '관계들이 위치하는 곳'(코헛)이 자기이며, 안정된 자기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응집성, 항상성, 탄력성을 느낄 수 있게 도와주는 타자'(코헛)가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열정인 욕동(drive)보다는 관계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욕동보다 관계구조 모델을 중시하는 흐름은 연구의 단위를 개인이 아니라, 중요한 타자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하는 관계적 모체로 본다. 타자와의 완전한 관계에서 얻어지는 것은 다정함, 안전함, 그리고 쾌락의 전체성 등으로 간주된다. 대인 관계적 교류는 현실적 자기, 이상적 자기, 현실적 대상, 이상적 대상이라는 네 가지 경험적 요소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대상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정신분석학은 인간이 타자들과의 관계에서 겪었던 경험, 자신의 이미지, 이상적인 타자에 대한 환상, 자신에 대한 과대적 환상, 현실과 상상으로부터 나온 내면의 소리 등을 통해 자기의 내용을 구성함을 알려준다. 이은영은 이러한 타자와의 통로를 표현하기 위해 인간이 이미 극복했다고 여겨지는 동물성(자연)을 호출했다.


이은영_2015.04.20._세라믹_11×21×28cm_2015


그러나 그녀의 작품에서 동물이라는 도상은 동물보다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과도한 욕망을 표출한다. 자연은 필요 이상을 욕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러한 자연을 통해 공감, 또는 거리감을 유도했다. 작가는 의인화, 사물화 된 동물을 통해 무의식적 과정부터 정치철학에 이르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동물과 동물의 서식처가 자주 등장하는 이은영의 작품은 사회계약 이전의 단계, 즉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는 자연적 상태'(홉스)가 감지된다. 근대는 자연을 이성이나 계몽으로 극복해왔다고 믿어져 왔지만, 적정선이라고는 없는 '권력에의 의지'(니이체)는 인간사회에서 사라진 적이 없다. 작가는 우화적 형식을 통해 어느 시대에나 보편적일 수 있는 이야기를 추려내고자 한다. 그래서 그녀는 어느 나라 사람도 알아 볼 수 있는 자연의 형상을 택했고, 누구나 꾸는 꿈과 그 해석과정, 그리고 근자에 우리가 함께 겪었던 사회적 사건을 작업에 들여왔다. 그러나 도상을 알아본다 해도 그 의미가 모두 명확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이은영의 작품은 작가가 몇몇 단서를 던져주면 관객이 나름대로 엮어가는 방식이다. ● 그러나 경계가 부재한 무한한 확장은 동시에 죽음이기도 하다. 너무 열어 놓는다면 무의미에 가까워진다. 현대미학에서는 무의미의 의미도 논해지곤 하지만, 이은영의 작품 내용에 대한 의지는 강력한 편이다. 그녀는 작가의 책임을 말한다. 그래서인지 작품에는 세월호, 4대강, 쌍용차 사태 등, 해외에 체류해 있는 동안 한국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한 의식이 작품 곳곳에 박혀있다. 작가의 그러한 지향성이 망명 시인 네루다에 대한 공감을 낳았을 것이다. 그러나 '리얼리즘이라기보다는 알레고리'(작가)라서 명백하게 읽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동물이 등장하는 상상과 현실에 대한 이야기는 우화나 알레고리의 형식을 갖추게 한다. 의미를 향한 징검다리는 적절한 간격으로 놓여 있어야만 한다. 간격은 타자들이 개입될 수 있는 여지도 부여한다. 작가의 설명이 없이는 수수께끼처럼 다가오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떤 맥락에서는 예언적일만큼 정확하게 다가오는 이야기도 있다. ● 가령 피처럼 붉은 꽃을 두른 돼지 세 마리가 등장하는 「금빛 씨앗」(2013)은 수 년 전 작품이지만, 북한의 핵실험과 로켓이 발사되는 요즘의 사건과 결부되어 다시 보여 진다. 자유주의 사회로부터 제공된 원조식량인 옥수수가 자기에게 다시 떨어질 수 있는 미사일로 변모하고, 어리석은 사건을 추동한 권력자들은 죽었지만, 다시 권력의 맛을 본 쥐가 돼지로 변해간다는 우화다. 독법과 이해를 중시하는 작품은 그림책의 형식을 띄기도 한다. 관객이 작가의 세계로 진입해서 그 안을 탐색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방이라는 방식도 그렇다. 책이나 방은 다양한 것을 한자리에 묶어낼 수 있는 형식이다. 드로잉, 세라믹 등 여러 형식이 등장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풍경이라는 방식을 통해 이질적인 것들 간의 어울림을 꾀한다. 설치의 경우,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달이 조명으로 처리되어 다양한 요소들을 풍경으로 응집하는 효과를 준다. 이은영의 작품은 자연이나 우주의 자원을 광범위하게 활용하면서도 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고갈되지 않은 이야기 거리로 풍부하다. ■ 이선영



Vol.20160623d | 2016 OCI YOUNG CREATIVES-박석민_이은영展




육감 六感 Sixth Sense

OCI YOUNG CREATIVES 5주년 기념展
2015_0305 ▶ 2015_0505 / 월요일 휴관

 

 

1부 초대일시 / 2015_0305_목요일_05:00pm

2부 초대일시 / 2015_0409_목요일_05:00pm

 

 

1부 / 2015_0305 ▶ 2015_0331

참여작가

강동주_김은형_김지민_김진기_김채원

김혜나_나광호_박미례_신정필_애나한

오유경_유현경_이미정_이제_이주리

임주연_장파_정경심_정혜련_최영빈

 

2부 / 2015_0409 ▶ 2015_0505

참여작가

강상우_김효숙_남혜연_민진영_박경진

빈우혁_양유연_이우성_이지영_이현호

정소영_정윤경_조태광_조혜진_한승구_황지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Tel. +82.2.734.0440

서울 종로구 수송동 46-15번지

www.ocimuseum.org

 

 

여기 서른여섯 명의 작가들은 다시 한 번 자신들의 작업 세계를 거침없이 쏟아내고자 모였다. 각자의 지난 데뷔전시에서 뚜렷한 개성을 드러낸 작가들은 저마다의 주제와 방법론에 대한 성장과 변화를 거듭하여 깊이 있고 감각적인 작업 활동을 이어왔다. 이들이 작품을 통해 탐구하고 이끌어내려는 주제는 어느 하나로 규정짓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다양하다. 일상, 풍경, 욕망, 성(性), 도시, 사회성, 기억, 꿈, 지질학, 동물 등 인간에 대한 탐구와 더불어 동시대의 여러 가지 이슈들을 회화, 입체 및 설치, 사진, 영상의 다층적인 방식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이러한 갖가지의 주제와 성찰의 방식 가운데에서도 이를 관통하는 한 가지는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 안에서의 삶의 모습과 그 이면에 담긴 사회·심리적인 의미들을 포착해내는 예민하고 직관적인 감각이라고 생각된다. ● 직관력 또는 영감이라 부를 수 있는 '여섯 번째 감각(六感, Sixth Sense)'은 누구에게나 허락되지는 않는다. 육감은 단순히 비이성적이고 찰나적인 '느낌'으로 치부될 수 있지만 사실 이것은 세계에 대한 통렬한 시각, 끈질긴 관찰, 다층적인 경험 등 오감의 다양한 과정과 깊은 무의식의 세계가 결합하여 비로소 나타나는 감각의 열매라고도 볼 수 있다. 만져지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분명히 그러한 것 같은' 통찰을 가능하게 하는 다분히 초감각적인 능력과 끈질기고도 깊은 성찰을 통해 36명의 작가들은 우리 사는 삶의 여러 얼굴들을 간파하고 드러낸다. 또한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들의 다양한 색깔의 작품들을 여섯 가지의 주제 아래에서 살펴보게 되는데, 전시의 타이틀인 '육감'은 '여섯 번째 감각'의 의미와 더불어 삶에 대한 '여섯 가지의 느낌', '여섯 가지 이야기'라는 의미도 내포한다. ● 1부 전시에서는 먼저 친숙한 삶의 모습과 우리 내면에 관한 세 가지의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것은 익숙한 장소나 매일 반복하는 행위들에 관한 작가들의 독특한 생각이 돋보이는 작품들로 구성된 '일상, 비(飛)일상' 이다. 여기서는 평범한 일상에 내재한 삶의 크고 작은 의미들을 가늠해보게 된다. 우리의 자유로운 상상력에 관한 이야기는 '기묘한 세계'에서 만나보게 되는데, 작가들은 인간의 깊은 내면에 잠재해 있는 꿈과 희망, 억눌린 생각들을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빛과 색채의 작품들로 표상한다. '욕망의 순간들'에서는 성이나 소비 등에 얽혀있는 인간의 내밀한 욕망의 방을 엿볼 수 있다. 과욕을 탐하는 순간들과 더불어 인간의 본질과 맞닿아 있는 욕망을 드러내는 작품들을 통해 궁극적으로 실존에 대해 생각하도록 한다. ● 2부 전시에서는 보다 더 외부 세계에 관한 관심을 아우르는 세 가지의 이야기를 공유하고자 한다. '변이된 풍경들'에서는 심리적 요소, 다층적인 차용의 방식, 독특한 자연관 등을 통해 우리 주변의 자연 풍경을 새롭게 변형하는 작가들의 동시대적인 풍경화를 선보인다. 우리가 머무는 공간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집, 공간 그리고 그림자' 섹션에서는 육체와 정신의 안식처로 기능해야 할 집의 근본적인 의미를 짚어보고, 특히 현대 사회 안에서의 집과 도시 공간을 독특한 조형 언어로 탐구하거나 그 속에서의 인간 소외, 불안 등의 문제들을 다룬 작가들의 작품을 살펴본다. 여섯 번째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 관한 작품들로 펼쳐진다. 작가들은 그들이 놓인 사회적, 정치적인 상황을 예리한 감각으로 인지하고 작품을 통해 발언하기도 하며 사회 속 자아와 타자의 관계를 깊이 있게 환기하여 보는 이들과 공감하도록 한다.

 

강동주_땅바닥 드로잉 Ground drawing_종이에 연필_30×21cm_2013~4

김혜나_I'm thinking_캔버스에 유채_91×116.8cm_2011

 

이제_서울의 달 A Moon of Seoul_캔버스에 유채_45.5×53cm_2014

임주연_Untitled_리넨에 유채_130.3×97cm_2014

정경심_사과 Morning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5×52.5cm_2013

 

일상, 비(飛)일상 ● 삶은 언제나 예측불허이지만 익숙한 장소를 다니며 매일 만나야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소소한 삶을 꾸려야하는 일들은 어느새 반복적인 하루하루를 살아가도록 한다.「일상, 비(飛)일상」에서는 일상이라 불리는 이 삶의 과정들을 권태로움으로 치부하지 않고 숨겨진 의미들을 찾아내는 작가들의 이야기를 펼친다.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일상이 무료해질 때면 우리는 가끔 하늘을 날며 삶을 한눈에 내려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비(飛)일상'은 반복적인 삶을 열심히 살아가지만 동시에 조금 멀리서 그 위를 훨훨 날며 일상의 현장을 새로움으로 통찰하는 것 같은 작가들의 사유 방식을 의미한다. 지극히 가까워서 보이지 않았던, 다시 생각하지 않았던 일상적 장소와 사물과 우리의 행위에 관하여 되돌아보고자 한다. ● 날마다 보고 걷는 땅은 우리에게 주목받지도, 특별하지도 않지만 강동주는 땅을 수많은 발걸음이 거쳐 가는 일상의 지표이자 기록으로 받아들인다. 발걸음에 그슬린 작은 자국들이나 한때는 우리에게 작은 기분전환을 주었던 껌 자국들까지도 섬세하게 표현한 연필 드로잉 연작을 통해 반복과 변화, 만남과 지나침 등에 대한 삶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일상의 의미는 기쁨과 아픔, 미묘한 감정들이 뒤섞인 다소 추상적인 일기 형태로도 나타난다. 김혜나는 일상적 경험과 기억들을 절제된 회화로 표현하는데, 함축적인 선과 형태의 변화를 통해 경험에 대한 보편적이면서도 작가만의 독특한 감각을 드러낸다. ● 사소함과 익숙함으로 여겨지는 주변의 사물은 신정필과 오유경의 입체 작품을 통해 색다른 시각으로 다가온다. 신정필은 주변에서 문득 시선을 끄는 사물을 관찰하여 아주 작은 단위로 분할하고 이를 새로운 재료로 만든 후 재조립하는 작업을 한다. 본래와는 완전히 다르게 바뀐 사물을 만들어냄으로써 주변을 바라보는 인간의 '눈' 즉 익숙한 시각을 전복하고 일상성의 본질을 성찰한다. 오유경은 A4용지, 종이컵과 같은 오브제를 활용하여 일상의 사물이나 새로운 형상들을 입체로 만들어낸다. 얇은 트레싱지로 고안해낸 사다리는 본래의 기능을 잃은 투명한 오브제로서 자리한다. 사소함과 중요함, 익숙함과 새로움, 무거움과 가벼움 등 일상에 대한 양가적 가치를 탐구한다. ● 매일 아침 옷을 입고 어디론가 가고,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오는 우리의 생활은 이제, 임주연, 정경심 작가의 회화 작품에 담겨있다. 찬바람이 부는 새벽 출근길, 삼삼오오 모여 삶을 내려놓는 저녁의 포장마차 등 고독한 또는 행복한 삶의 순간은 이제의 회화에서 볼 수 있다. 무심한 듯 찰나의 붓질들로 그려진 잔잔한 일상들을 통해 우리의 보편적인 공감을 이끌어낸다. 우리의 존재를 드러내기도 때론 감추기도 해주는 옷을 입고 벗는 단순한 행위는 임주연의 작품 속에서 '순간성'이라는 중요한 화두로 드러난다. 얼굴은 나타나지 않은 채 옷을 입고 벗는 신체적 행위들을 사진으로 연속 촬영하여 다시 빠른 붓질의 회화로 표현함으로써 찰나의 시간을 담아낸다. 우리의 일상에서 빠질 수 없고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은 '먹는 것'이다. 정경심은 밥상 회화 연작으로 먹는 행위와 일상적 욕망, 인간의 정에 관하여 오랫동안 탐구해왔다. 작품「seasoned bean sprouts」에서는 만원 버스에 탄 사람들이 복잡한 상황에서도 제각각 무엇인가를 열심히 먹고 있는데, 일상의 고단한 밥벌이로 얽히고설킨 우리 삶의 소박한 모습들을 유머러스하게 담아낸다.

 

 오유경_Symbolic ladder_트레이싱지_220×110×60cm_2009

신정필_제 3의 눈 The third eye_철, 레진, 형광등_140×118×140cm_2012

 

김은형_지그프리트 Siegfried_화선지에 수묵_75×75cm_2015

김채원_스페이스 오딧세이V Space Odyssey V_영상_600×500×400cm, 00:03:30_2014

 

기묘한 세계 ● 일상의 담담한 고리들 안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환상과 초현실의 세계에 대해 생각한다. 인간은 대부분 자유로운 상상을 허락지 않는 현실적인 원칙에 의해 살아간다. 그러나 시각예술은 사회적 규율이나 권력관계 등 '현실원칙'을 지배하는 명료한 언어적 법칙에서 외면되거나 재현되지 못하는 심리적 트라우마나 어두운 상상, 황홀감, 환상 등을 '표상'할 수 있다. 현실의 억압에 반대하고 이를 드러내고자 하는 열망은 초현실적인 표현들로 나타난다. 작가들은 조형 요소들을 시각적으로 기이하고 비현실적으로 연출하지만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상황과 구조를 반영하는 것이기에 오히려 현실을 더욱 명료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 답답한 현실의 공간은 김채원, 애나한, 정혜련 작가의 작품에서 상상의 세계로 변모한다. 김채원은 일상의 오브제와 디지털 이미지를 접합하여 상상 속 우주의 풍경을 복잡다단한 설치와 영상 작품으로 표현한다. 변이를 거듭한 작은 단위의 형태들은 질서와 혼돈이 공존하는 독특한 환상의 세계를 나타낸다. 그 어떤 작은 공간에서도 그곳만의 에너지와 미묘한 뉘앙스를 읽어내는 애나한은 빛과 색채의 섬세한 변화, 착시효과 등을 활용하는 설치 작품을 통해 드라마틱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어린 시절의 꿈에서 빠질 수 없는 '놀이공원에 대한 환상'은 정혜련의 설치 작품에서 나타난다. 작가는 사회의 억압으로 인해 망각하게 된 유년기의 환상과 꿈을 독특한 비정형의 입체, 설치작품으로 표현하여 자유로운 감성을 증폭시킨다. ● 꿈의 이미지는 김은형, 이주리의 드로잉과 애니메이션 작품에서 매우 세밀하고 기묘한 형상들로 드러난다. 음악, 철학, 종교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생각을 자동기술의 방법처럼 화면 안에 풀어내는 김은형은 드로잉과 종이 입체, 애니메이션을 통해 상상의 형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자유롭게 유영하는 꿈의 이미지를 표현한다. 이주리는 작품속에서 기괴한 인물, 파편적 신체가 흩어져있는 기묘하고도 음습한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내는데, 현실의 공사장을 모티프로 한 초현실적 공간인 작가만의 '땅'을 구축하여 내밀한 꿈과 무의식, 권력과 억압에 대해 이야기한다. ● 원초적 세계에 대한 갈망은 나광호와 박미례의 회화에서 드러난다. 나광호는 어린아이들이 그린 그림에서 수집한 순수한 조형 요소들을 디지털 프로세스를 거쳐 다양한 방식으로 변용하는 회화에 집중하면서 다듬어지지 않은 선과 형태, 색채를 탐구한다. 박미례는 동물들의 다양한 형상을 속도감을 지닌 강렬한 회화로 표현하며 다양한 초현실적 형상들을 함께 배치함으로써, 새로운 꿈의 세계를 나타내면서도 동물들의 치열한 약육강식의 세계와 순환의 생존 구조를 통해 우리 인간의 모습을 비추어 통찰한다.

 

 

 나광호_Vincent van Gogh_캔버스에 유채_162×112cm_2013

박미례_천국과 지옥사이 Between heaven and hell_캔버스에 유채_200×420cm_2014

이주리_Dark Fantasy_종이에 아크릴채색, 드로잉 연작_55×40cm×20_2012_부분

 

애나한_Paradoxical hurdle_천 거울, 형광등, 시트지, 실사, 카페트_210×400×400cm_2014

정혜련_연쇄적 가능성 Serial possibility_혼합재료_가변설치_2014

 

욕망의 순간들 ● 인간이라면 누구나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하는' 본성 즉, 욕망을 지니고 있다. 본래 식욕이나 성욕 등의 욕구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이며 삶에서 자연스럽게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용한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는 때로 이런 자연스러운 욕구가 과도한 욕망의 형태로 드러나기도 한다. 우리의 눈을 자극하며 넘쳐나는 광고들, 팽배해지는 물질 만능주의적인 사고, 피상적인 자극에만 민감하게 반응하는 생각 등은 맹목적인 과소비를 부추겼고 쾌락만을 추구하는 성욕과 성 상품화를 불러일으켰으며, 폭식과 거식이라는 병리적인 식욕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욕망의 순간들」에서는 이러한 욕망의 과잉과 병리적인 형태를 꼬집어 드러내는 동시에 욕망에 대해 좀 더 본질적인 성찰을 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인다. 우리의 내면 깊이 자리하여 삶의 패턴에 적지 않게 영향을 주지만 인식하지 못하거나 부정하고 살아가는 욕망의 얼굴들을 드러내어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솔직한 이야기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 소비 과열과 중독은 우리의 마음의 창으로 대변되는 '눈'을 변화시킨다. 김지민은 반짝이는 도자기 표면을 지닌 얼굴에 명품, 고급 승용차 등의 패턴으로 가득 찬 눈동자의 인물상들을 주로 환조로 나타내는데, 이를 통해 상품가치와 소비욕구에 사로잡힌 현대인의 모습을 표현한다. 인간에게 지나칠 정도로 반짝이는 이러한 욕망의 얼굴이 있다면, 김진기의 작품에 나타나는 그 모습은 사뭇 다르다. 김진기는 인간의 뒷모습을 회화 본연의 특징인 물감의 덧칠, 흘러내리는 기법 등을 통해 극도로 비참한 아브젝트(abject), 욕망의 모습으로 표현한다. 회식 이후의 테이블, 쓰레기 하치장 연작을 통해 김진기는 휘몰아치는 감정, 갈등 그리고 욕망의 너저분함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 인간의 욕망은 신체와 성(性)에 대한 이야기로도 집중된다. 장 파는 인간 존재와 세계에 내재한 상실, 무력, 좌절 등의 이야기를 적나라한 욕망의 신체, 낮선 풍경 등을 담은 회화로 표현한다. 특히 인간의 삶과 욕망을 벌거벗은 신체와 해골 등으로 표현한「낮의 유령들」시리즈는 인간의 실존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들을 성찰한다. 최영빈은 회화를 통해 인간의 신체를 추상화하거나 파편적으로 변형하는 회화 작업에 집중한다. 작가만의 방식으로 왜곡시킨 신체를 표현함으로써 언어로 규정하기 어려운 자아의 정체성과 숨겨진 욕망을 드러낸다. 유현경은 억눌린 욕망에 대한 이야기에 관한 회화에 집중한다. 수치심, 역겨움, 연민, 조심스러움 등의 감정은 얼굴 없는 사람, 발가벗은 사람의 초상, 성적인 행위와 관련한 형상들로 나타난다. 이미정은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성을 유희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기준, 금기에 대한 모범생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개인만이 가질 수 있는 주체성을 탐구하고자 한다. 이로써 억압된 개인의 주체성을 드러낸다.

 

김진기_회식릴레이 2차 Leftover-2nd round_패널에 혼합재료_110×130.3cm_2010

김지민_Holic female_디지털 프린트_50×50cm_2015

이미정_Still life with dildo_피그먼트 프린트_60×42.5cm_2014

 

 

유현경_남자와 여자 Man and woman_캔버스에 유채_194×250cm_2012

최영빈_멀리서, 틈없이 From Far Away, Without a Distance_캔버스에 유채_137×170cm_2014

장파_절반의 세계 The Half Known World_캔버스에 유채_100×80cm_2014

 

 

변이된 풍경들 ● 주변의 일상, 우리의 상상 그리고 내밀한 욕망의 모습들을 지나면 한 발짝 너머 우리를 둘러싼 풍경들이 보인다. 다소 익숙한 정취를 기대한다면 조금 낯선 풍경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변이된 풍경들」에서 선보이는 작품들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풍경들을 그대로 재현하는 풍경화를 넘어 작가들의 독특한 사유로써 변형된 풍경을 담은 동시대적인 풍경화이다. '변이(變異)'의 본래 의미는 '생물의 형태나 성질이 변하는 것'인데, 이 섹션에서는 작가들이 자연의 존재를 관망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호흡하며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인식하여, 다양한 요소들로써 주변 풍경을 새롭게 제시한다는 것에 주목하였다. 작가들은 현대사회에서의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치밀하게 파헤치거나 인간의 소외와 상처를 메마른 풍경으로 환유하기도 하며, 개념적이고 상상적인 자연을 만들어 새로운 세계를 펼치기도 한다. ● 풍경화의 주 소재인 숲은 삶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담아낼 수 있는 장소가 된다. 빈우혁은 아픈 상처의 기억을 숲으로 환유함으로써 미묘한 심리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주로 거주지 주변을 거닐며 포착한 숲, 호수, 하늘을 목탄과 채색을 활용하여 나타내는데, 이를 통해 관람자가 아픔을 공유하고 치유를 경험하도록 이끈다. 무심코 지나칠만한 평범한 숲과 그 안의 작은 인공물에 주목하는 이현호는 집요하고도 성실한 관찰과 사유로 풍경에 내재한 언어와 운율을 읽어낸다. 이로써 주변 풍경에 대한 우리의 무감각하고 권태로운 시각을 경계하며, 일상성의 본질을 상기시킨다. ● 현대사회 안에서의 인간과 자연의 영역에 대한 작가들의 다층적인 탐구는 다양한 주변 이미지들을 결합시킨 새로운 풍경과 독특한 자연관을 만들어낸다. 정윤경은 회화를 통해 자연과 인간이 공생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경(景)'이라는 동양적 자연관으로 표현한다. 자연과 인간의 이미지가 하나 되어 얽힌 풍경인 정원술(topiary)로 현존하는 건축물처럼 자연을 인간의 영역으로 자연스레 흡수시키고 기호화함으로써 자연과 문화 그리고 인공물과 유기체로 불리는 상극의 에너지가 공생하는 이미지를 구현한다. 조태광은 자연과 인공, 원초적 시각과 인간이 만든 시각 사이의 관계를 끊임없이 연구해왔는데 주로 따듯한 색감과 함께 특유의 패턴화된 나무로 이색적인 숲과 자연을 구성한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아 고요하지만 생명력이 있는 원초적 자연을 통해 자연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시각을 경계하면서도 유토피아적 풍경에 다다르고자 소망한다. 황지윤은 상상력과 여행의 경험을 바탕으로 산수화, 민화, 바로크 양식 등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기법들을 변용하여 환상적인 풍경을 구현한다. 나무나 산, 강 등 주변의 친숙한 풍경들을 소재로 하지만 동물의 무리를 바위덩어리나 나무로 표현하는 등 색다른 요소를 첨가하고 특유의 몽환적인 구성과 색감을 사용함으로써 다양한 상징과 암시로 가득한 수수께끼 같은 풍경을 펼친다.

 

빈우혁_Neuer See 33_캔버스에 목탄, 과슈_197×223cm_2014

이현호_옆차도 Road Side-landscape_한지에 채색_130×162cm_2014

정윤경_Vert of Walls Ⅱ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연필_130×130cm_2012

 

 

조태광_무지개 끝 어딘가에 Somewhere Over the Rainbow_

리넨에 아크릴채색_112.1×162.2cm_2014

황지윤_Wind_캔버스에 유채_193.1×112.1cm_2014

 

 

집, 공간 그리고 그림자 ● 익숙한 듯 낯선 주변 풍경들을 지나 들어온다면 우리가 머무는 공간을 생각하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는 가족 개념의 해체, 무분별한 개발, 불황으로 인한 잦은 이동 등으로 인해 육체와 정신이 휴식하는 삶의 터전과 공간이 위협받는다. 특히 집은 단순한 장소와 공간의 개념을 넘어 개인만의 독특한 정체성과 가치관이 형성되고, 가족관계를 이루는 곳이자 쉴 곳이라는 의미가 깃든 터전이지만 때론 불안과 상처로 얼룩진 공간이 되기도 한다.「집, 공간 그리고 그림자」에서는 인간의 삶에서 가장 근본적 공간인 집의 다층적인 의미들을 짚어내고 특히 도시 공간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그에 드리워진 심리적인 그림자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 ● 빠르게 변하는 도시공간은 독특한 공간의 변화에 관심을 갖고 지형도를 탐구하게 만들었으며, 그 안의 인간의 삶이 어떠한가에 대한 지속적인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김효숙은 끊임없이 새롭게 구성되는 도시의 불안정한 건축 공간을 디테일한 회화로 표현한다. 얽히고설킨 수많은 건축적 파편들에 파묻혀 공황상태로 부유하는 인물들을 통해 현대 도시 공간에서의 인간의 소외와 어두운 삶의 단면을 표상한다. 도시의 재건축과 삶의 터전에 대해 꾸준히 탐구하는 조혜진은 도시 개발로 인해 들어서던 고층아파트를 간유리와 철제로 다시 만들어낸다. 이 재료들은 개발로 인해 자리를 잃고 허물어진 낡은 집들, 폐가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아련한 빛이 첨가된 투명한 건축물을 통해 껍데기만 남은 도시의 어두운 모습 속 인간의 소외와 부재를 상기시킨다. 정소영은 자연의 생성원리를 통하여 도시의 생성과 건축의 의미를 탐구한다. 작가는 지구과학과 지질학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도시에서 채집한 지형, 질서, 표정을 지질학자의 지도, 대지 변형사 모형, 암석 표본, 지형도의 형식으로 제작한 설치와 사진작품에 담아낸다. ● 특정 공간에 대한 기억과 같은 심리적인 요소들은 은유적으로 작품에 나타나기도 하며, 반대로 내면의 아픔, 기쁨, 다양한 상상들이 공간으로 시각화되기도 한다. 어린 시절 집에 관한 아픈 기억에서 작품을 시작하는 민진영은 빛을 활용한 입체작품들로 집과 공간에 대한 기억을 시각화한다. 개인적 기억 뿐 아니라 무의식적 기억이 축적되는 은신처라는 보편적 집의 의미를 상기시키면서 우리가 사는 집과 공간, 가족에 얽힌 다층적인 의미를 담아낸다. 내면의 감정들을 무대 세트 공간으로 연출하는 이지영은 힘든 수공으로 만든 세트에 상징적 색채와 형상, 인물들을 배치하여 '마음의 방'을 연출한다. 작품「Love Seek」은 사랑의 기쁨과 기다림, 불안에 관한 감정을 단풍나무 씨앗으로 형상화하여 감정의 빛과 어두움, 기쁨과 슬픔이라는 양면적 감정을 섬세하고도 드라마틱한 공간으로 나타낸다.

 

 

김효숙_꿈의 도시 City of Dreams, Reasonable Spac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227×363cm_2011~4

민진영_Between roof and roof_천, 아크릴, LED_24×28×110cm_2012

이지영_The moment_잉크젯 프린트_127×200cm_2014

 

 

정소영_Material Ⅵ-Ⅷ plaster_시멘트, 착색 스톤, 투명유리, 반반사유리_80×70×45cm_2013_부분

조혜진_섬 Island_스테인리스 골조에 수집한 간유리, 철대문, 물__180×42×40cm, 198×45×47cm, 170×50×36cm_2013_부분

 

 

우리가 사는 세상 ● 개인이 머무는 공간까지도 위협받는 현대사회에서는 세상 살기가 참 어렵다. 뿐만 아니라 나를 둘러싼 정치, 사회적 상황과 인간관계 등의 외부적 요소들은 본래의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과는 다르게 나를 이끌거나 압박한다. 누구나 타자와 관계를 맺으며 사회의 체계 안에서 살아가게 되기에 사회, 정치적인 상황, 권력, 타인의 욕망 등에 의해 자아는 끊임없이 영향을 받으며 왜곡되기도 하고,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모습을 돌아보는 과정은 피할 수 없다. 때로는 본래 모습과 가치를 잊고 가면을 쓰고 살아가며, 어두운 정치적 상황들로 개인성이 무시되기도 한다. 또한 인간이 만들어놓은 사회적 울타리로 인해 오히려 인재를 겪게 되는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우리가 사는 세상」섹션에서는 개인적 가치와 자유로운 개인적 욕망을 억누르는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대해 사유하고 진정한 자아의 가치를 모색하는 이야기들을 살펴본다. ● 라캉의 이론대로 어린아이가 거울을 보고 처음으로 자아와 타자를 인식하듯이 개인의 주체성은 사회 속 다양한 타자와의 관계성을 통해 변형되기도 하고 더 뚜렷이 드러나기도 한다. 때로는 기억 속 깊이 새겨진 사회적 상황이 현재 개인의 정체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강상우는 오래전 기억속의 정치적 상황과 관심을 현재의 맥락에서 다시 상기시킨다. 특히 유년 시절의 정치적인 만화로 인해 군부독재 상황 등의 어두운 기억들이 자리 잡았음을 인식하고, 만화의 캐릭터와 내용을 평면과 입체로 유머러스하게 표현하여 개인의 '작은 기억'을 통해 공동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이를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닥친 사회, 정치적 상황을 되돌아보도록 한다. 남혜연은 사회적 체계 안에서의 인간의 모습과 그 감정을 영상 작품으로 표현한다. 개인의 욕망이 아닌 사회적 요구나 권력관계에 의해 감정과 욕망을 억누르는 억압적인 상황에서 개인이 겪는 부자연스러움과 어려움을 밑 빠진 물통에 물 붓기, 불안정한 의자에 앉아 식사하기 등으로 나타낸다. 유사한 맥락으로 한승구는 자아를 은폐하고 타인의 욕망에 구속되어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가면으로서의 얼굴'로 나타낸다. 단단한 가면으로 제작된 얼굴 입체와 영상을 통해 자아의 문제, 허상과 실체의 문제를 탐구하며 개인의 존재와 사회와의 관계성, 진정한 자아 찾기를 모색한다. ● 하루에도 몇 번씩 접하는 뉴스의 사건사고들을 통해 우리는 좌절하고 분노하거나 불안에 휩싸이기도 하며 일부러 무관심해지기도 한다. 사회적 사건들은 개인의 생각과 삶의 지표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 박경진은 회화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 죽음을 경험하는 인재(人災)의 상황과 그 공포에 주목한다. 그는 원전 폭발, 구제역, 세월호 등의 실재사건과 우리 생활 반경에 맞춰 상상한 허구가 혼재된 다양한 인재 사건들을 표상한다. 이를 통해 삶의 터전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근본적인 두려움을 상기시키며 경각심을 망각한 우리 사회의 무기력증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도록 한다. 양유연은 인간 내면의 상처와 상실감에 관한 회화에 집중하는데 공황상태의 얼굴, 피가 맺힌 상처, 총을 겨누는 사람들 등으로 시각화한다. 작품은 개인적인 상처를 인식하면서 시작되지만 궁극적으로는 다양한 사회적인 사건과 심리적 트라우마의 관계를 성찰하면서 현대사회에서 한 인간이 겪는 고독과 회의를 생각하도록 한다. 이우성은 회화를 통해 젊은 세대가 마주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공허함, 불안, 희망 등에 대해 지속적으로 발언해왔다. 특히「세상은 내가 꿈꾸게 하지 않는다」와 같은 작품은 세월호 사건을 대하는 젊은 작가로서의 애통함을 표현한 것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과 그 안의 우리 삶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끈다.

 

 강상우_Best Friends_목재, 필름지, 포스터물감_66×35.5×38.5cm_2014

남혜연_Self-Portrait-Eating, Walking, Drinking, Sitting_단채널 영상, 나무 액자, 아이패드_2006~14

한승구_Mirror mask_포멕스, 합성수지, 합판, MAC, 프로젝터_가변설치_2014

 

 

박경진_반경 20Km #.8 Radius 20Km #.8_캔버스에 유채_50×60.5cm_2013

양유연_Point 2_장지에 채색_80×80cm_2015

이우성_세상은 내가 꿈꾸지 않게 한다 The World that Does Not Allow Me to Have a Dream_천에 과슈_166×300cm×2_2014

 

 

'일상', '초현실', '욕망', '풍경', '공간', '사회'라는 이 여섯 가지 평범한 이야기들은 마치 주술사의 그것과 같은 작가들의 감각을 통해 독특한 색깔로 덧입혀졌다. '육감' 전은 서른여섯 명의 작가들이 각자 작업에 대한 독특한 방법론을 가지고 있지만 이렇듯 여섯 가지의 이야기들로 삶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에 특히 주목하였다. 동시에 작가들이 비슷한 범위의 이야기들을 각양각색으로 표현한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도록 다양한 작품들 사이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 하고자 하였다. 물론 이들의 작품은 여섯 가지의 이야기만으로는 끝낼 수 없는 수많은 기호와 의미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삶을 향한 이들의 민감한 '육감'은 끊임없이 변해가고 더욱 깊어질 것이기에 이것으로 한계를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젊은 작가들이 치열하게 고민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어느 정도 조망해 볼 수 있다는 것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육감'전은 세계에 관한 작가들의 무한한 '영감'과 예민한 '육감'으로 빚어진 이야기들을 제시하며, 이로써 보는 이들이 삶의 다양한 모습들을 만나보고 공감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 김지예

 

 

Vol.20150305b | 육감 六感 Sixth Sense-OCI YOUNG CREATIVES 5주년 기념展

 

 


2014 OCI YOUNG CREATIVES

민진영_박경진 2인展

2014_0612 ▶ 2014_0709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4_0612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수송동 46-15번지

Tel. +82.2.734.0440

www.ocimuseum.org

 

 

나는 소망한다. 의미가 생성되는 장소를 ● 민진영의 작품에 등장하는 대상은 집이다. 그녀의 작품은 다락방이나 계단 등의 공간에 대한 기억을 표현한 것이 많다. 그러다보니 건축적 형태를 지니고 있으나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건축공간이 아니라 심리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도 끝도 없이 무한 반복하는 계단작업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과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결합해 놓은 것으로서 지하공간에 있을 때는 밝은 빛을 찾아 위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을, 그러나 막상 옥상으로 올라갔을 때는 땅으로 내려가고 싶은 심리적 동요를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양가감정은 두 개의 지붕이 하나의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지붕과 지붕」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바닥이 지붕으로 이루어진 이 집은 거주할 수 있는 집이라기보다 집에 대한 작가의 기억과 그것이 만들어낸 복잡한 심리상태를 나타낸다. 그래서 이 집은 대지 위에 세워지지 않고 허공에 매달려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제작한 동기에 대해 보편적인 집에 대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기억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했다. 즉 어린 시절 집에 대한 기억이 두 지붕을 하나로 결합한 형태로 만들도록 했다는 것인데 아마도 한 채의 집에 여러 가구가 함께 살았던 경험으로부터 이러한 형태가 나온 것은 아닐까. 또 작가는 각 집마다 그들만의 고유한 가정사가 있기 마련인데 두 개의 집을 하나로 결합한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처를 남들이 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작했다고도 했다. 이런 점은 그녀의 작품이 건축의 재현이 아니라 마음의 표상임을 드러낸다. 주기적으로 켜졌다 꺼졌다 하는 조명은 이러한 심리의 은유라고 할 수 있다. ● 육각형의 긴 터널처럼 보이는「지붕과 지붕 사이」는 2009년에 제작한「그에게는 아이가 없다(He has no child)」의 연장선에 있다. 감성적이면서 내러티브가 있는 제목의 이 작품의 기본 형태는 역시 집이다. 그러나 이 집은 견고한 재료로 건축된 것이 아니라 텐트로 만들어진 가설물이다. 터널처럼 긴 형태의 임시 주거공간의 양 끝에는 각각 다른 영상이 투사되고 있다. 한쪽에는 슬라이드를 이용한 29컷의 표지판이 3초 간격으로 반복되고 있고, 맞은 편 벽의 창으로는 터널 속 영상이 반복된다. 공사중, 야생동물조심, 어린이 보호 등 사람들에게 익숙한 픽토그램을 작가가 개인사와 결부시켜 임의적으로 변형한 이 표지판은 작가와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민진영_연약함, 위대함_레진, 아크릴, 섬유, 조명_365×146×89cm_2014

 

 

작가는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경기도 성남으로 이사했다. 당시 분당 신도시가 한창 건설 중이었기 때문에 작가는 아주 자연스럽게 공사현장의 풍경에 익숙해졌다. 우리가 흔히 '드럼통ï이라 부르는 금속용기 속에 시멘트로 빚은 산과 구릉을 배치하고 그 주변을 비계와 안전그물로 감싼「특이한 대상(unusual objectⅡ)」 역시 신도시 건설현장에서 목격한 장면을 재연해 놓은 것이다. 그것은 건축 산업이 호황을 누리던 시대에 볼 수 있었던 일상의 풍경이자 작가가 어린 시절 주변에서 늘 보았던 풍경이기도 했다.「그에게는 아이가 없다」는 한 벽면에 투사된 공사장의 삽이나 기중기, 화물열차, 버스 등과 같은 픽토그램 또한 어린 시절 일상적으로 보았던 공사현장에 대한 기억을 반영하고 있다. 다만 이 그림문자들이 작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금씩 변형되면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개발된 픽토그램은 제목이 암시하듯 개인의 경험을 고백하는 상징이자 기호로 전치된다. 3초 간격으로 화면을 스쳐 지나가는 이 픽토그램들은 개발, 건설 등을 통해 새로운 문명이 생기는 것에 대한 동경과 사라져가는 자연에 대한 그리움이란 양가적 감정을 표현한 것이자 동시에 아버지와 작가 사이에 있었던 불편함을 단순한 이미지로 토로한 은유의 결과물이다. 맞은편 창문에 상영되고 있는 터널의 이미지 역시 기억이 무의식의 심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입구이자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이다. 질주하는 자동차의 소음보다 더 크게 들리는 슬라이드 프로젝터의 기계음은 작가가 걸어놓은 수수께끼이자 자기고백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감추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즉 텐트로 상징되는 임시주거공간과 픽토그램 사이에 가로놓인 그 간극 속에 개인사가 은밀하게 스며들고, 동일한 영상이 반복되는 터널의 이미지는 이 개인사의 미궁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이지만 정작 그 세계로 들어가기에 작가가 깔아놓은 복선이 많기 때문에 그 내용을 파악하기 쉽지 않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자신의 개인사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과 숨기고 싶은 것이 밝혀졌을 때 느낄 수 있는 부끄러움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마음의 진자운동과 같은 상태를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건축적 구조물이자 마음의 상태가 만들어낸 심리의 건축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 민진영의 작품에 중요한 요소로서 빛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감성과 감정, 심리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작품에 인공조명을 도입하는 경우가 많다. 빛에 대한 기억은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5세 때 시내에서 만취한 채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아버지를 모시고 집을 찾아 어두운 산길을 헤맨 일이 있다고 한다. 아직 어린 아이였지만 안전한 집을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아버지를 이끌고 출발했는데 산간지역이라 집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드문드문 켜진 불빛을 보면서 간신히 집을 찾아갔다는 것이다. 그때 느꼈던 공포와 불빛이 제공하는 안도감, 마치 막막한 어둔 밤바다를 비추는 등대의 불빛처럼 반갑고 고마운 불빛이 그의 작품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노출시키는 장치로서, 개인들의 역사를 밝히는 길잡이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민진영_어둠의 깊이_아크릴, 섬유, 조명_80×61×41cm_2014
 

 

작가가 특별히 집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가족과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독신세대가 늘어나면서 원룸이나 독신자아파트가 늘어나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집은 역시 한 가족이 거주하는 공간일 경우가 많다. 그곳은 노동에 지친 내 육신이 쉴 수 있는 공간이자 가족 간의 연대가 실천되는 작은 공동체이자 은신처이며, 내 신체와 피부의 연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천막으로 산봉우리를 만들고 그 내부에 일정한 간격으로 꺼졌다 켜졌다 하면서 각각의 봉우리로 옮겨가는 조명을 설치한「Individuality in Mountain」은 '집=가족=안식처ï란 등식을 위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관념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작품이다. 작가에 따르면 이 작품은 일본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코레다 히로가츠(是枝裕和)의 영화「아무도 모른다」로부터 모티브를 얻은 것이라고 한다. 영화 속에서 아버지는 각자 다르지만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네 형제가 허름한 아파트로 이사를 온다. 어머니는 아버지 없이 네 형제를 키운다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집을 빌릴 수 없었기 때문에 집주인에게 남편은 해외에 근무하고 있으며, 아들과 단 둘이 산다는 거짓말로 간신히 허름한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남자를 만난 어머니가 아이들을 무책임하게 방치한 채 떠나버리자 남겨진 네 아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다. 결국 굶주림에 지친 막내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고까지 당해 죽자 나머지 세 아이들은 죽은 막내의 시신을 여행가방에 담아 공항으로 가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실화를 바탕으로 가족 간의 사랑, 신뢰, 존중, 보호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이 영화를 모티브로 했다는 점에서 그만큼 작가 자신도 가족의 의미에 대해 심각하고 진지한 고민과 성찰 아래 이 작품을 제작했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작품에서 각 봉우리를 하나의 집이자 가정으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의 연장은 곧 사회이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존재이면서도 가족은 때로 혈족적 유대를 해체할 정도의 서먹함, 불편함, 서운함, 실망과 분노의 진원지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각자 독립된 개체로 존재하는 봉우리를 넘나들고 있는 불빛은 관계의 단절에 의해 야기된 가족해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소통의 신호이지 않을까.「집을 읽다Ⅲ」에서 원형의 비닐하우스를 따라 빛이 움직이는 구조물은 집을 지시한다기보다 집과 그 속에서 살고 있는 가족에 대한 작가의 이러한 불편한 마음을 상징한다. 몇 개의 지지대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비닐하우스 구조물은 집이라기보다 동굴에 가깝다. 이러한 동굴로서의 집은 주거공간이라기보다 공중에 매달린 누각이거나 계속 원점으로 회귀하도록 설계된 터널이다. 비록 투명하지만 동굴을 연상시키는 이 구조물은 집에 대한 공포, 세상에 대한 막막하고 불편한 심리의 표현이다.「집을 읽다Ⅰ」의 바퀴가 달린 계단 두 대로 연결된 터널 혹은 아케이드 역시 정주가 아니라 유동적인 가족관계를 은유한다. 어떤 한쪽에 압력이 가해질 경우 아슬아슬하게 지탱되던 균형이 무너지고 위에 놓인 터널과도 같은 구조물조차 추락할 것만 같은 위기는 그가 느끼고 있는 불편함의 근원이 집이라는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의 관계에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구조물을 투명한 비닐로 만든 것은 들키고 싶지 않은 개인의 내밀한 감정이나 감추고 싶은 치부가 거주하는 장소가 실제로는 투명하기 때문에 은폐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민진영_Between roof and roof_아크릴, 섬유, 이동조명_28×110×24cm_2012~14

 

 

민진영_연약한 공기_영상, 섬유, 스틸_60×240×57cm_2014_부분
 

 

집을 중심에 놓고 자신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는 양가감정에 대해 말하고 있는 민진영이 정작 표현하고자 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은신처이다. 비닐로 만들었든 천막으로 만들었든 집은 그의 피난처이자 은신처이며 몸과 마음이 되돌아가서 쉴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런 점에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심리적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공간일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사회주의 국가가 된 폴란드 바르샤바의 1956년을 시대배경으로 마레크 플라스코가 쓴 소설 『제8요일』의 여주인공 아그네시카는 "벽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사면의 벽, 아니 삼면이라도 좋겠지? 삼면이라도 방이 될 수 있을까? 그런 방에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그런 방이 어디 없을까?"라고 되뇌인다. 이 소설은 공산주의의 감시와 억압 앞에서 느끼는 평범한 연인들의 절망과 허무를 표현한 것이지만 민진영에게 필요한 것은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방이 아니라 마음의 피난처이다. 그래서 그가 표현한 집은 마음의 영역이 생성되는 터전이라고 볼 수 있다. 바다를 매립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테트라포드에 마치 광배처럼 원을 그리며 순환하는 빛의 길을 결합해 놓은「코라」는 이러한 생성으로서의 공간을 해명하는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코라(chora)는 원래 플라톤이 『타마이오스』에서 어머니인 코라가 아버지인 형상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식들인 우주가 형성된다고 말했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특정한 장소를 일컫는 것이라기보다 출발, 시작, 원인으로서의 터전을 의미한다. '코라 세미오틱ï이란 여성주의적 의미생성의 개념을 제안한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는 코라를 무의식을 조명하는 중요한 열쇠로 파악했다. 크리스테바는 잔혹극과 광기의 연극을 추구한 아르토(Antonin Artaud)를 연구하면서 코라에 대해 집적소(réceptacle)로서 가변적인 장소(lieu)를 나타낸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코라는 사회적으로 질서 잡힌 모든 상징체계로부터 벗어나 가장 근원적인 차원의 생성의 과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크리스테바는 코라의 두 가지 성격에 대해 첫째, 형이상학적인 틀(matrix)로서 측정할 수 없는 태초의 물질이 구성되기 이전의 땅이자 카오스가 생성의 운동을 전개하는 장, 둘째, 움직임과 정지가 이루어지는 코라는 언어적인 관점에서 욕망으로부터 분절되며 '비표현적인 총체ï라고 정의했다. 이런 관점을 따라가자면 코라는 좁게는 임신과 출산을 가능하게 하는 여성의 자궁이자 언어로 규명할 수 없는 무의식이 활동하는 에너지가 생성되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테트라포드는 다리를 벌리고 있는 여성의 인체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에너지가 외부로 발산되기보다 내부로 집적되면서 분열과 융합을 거듭하는 공간이자 장소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는 이 구조물에 대해 '바다의 습기를 빨아들이는 기구ï라고 했는데 어쩌면 그것은 혼돈과 질서가 결합된 운동의 지속으로서 카오스모스를 형태로 표현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벗어나고 싶지만 다시 돌아와야 할 장소, 그곳은 나의 집일수도 있고 유동하는 내 마음이 잠시 머물러야 할 영역일 수도 있다. 집은 내 몸을 보호하기 위한 물리적 장소라기보다 의미가 생성되는 내 마음의 영역이다. 그래서 나는 소망한다. 물결치듯 일렁거리는 내 마음 속의 에너지가 새로운 의미로 거듭나는 장소로서의 집을. ■ 최태만

 

 

민진영_연약한 공기_영상, 섬유, 스틸_60×240×57cm_2014_부분
 

 

인재(人災)를 성찰하는 회화 - 반경 0km 혹은 좌표0000 ● 박경진의 회화는 재난, 특히 인재와 그것이 유발하는 사회, 심리적 영역을 탐구한다. 지진, 해일과 같은 자연재해 또한 전쟁, 테러, 사건 사고와 같은 사회적 재난처럼 구조, 대비 소홀로 이내 인재로 변환되기 쉽다는 점에서, 그것들로부터 야기된 공포, 불안, 혼란은 자못 심대하다. 인재란 우리가 터너(William Turner)의「난파선」,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의「메두사의 뗏목」의 경우처럼 자연 재해의 공포 이면에서 찾아졌던 자연에 대한 숭고(sublime)의 차원을 훌쩍 뛰어넘는다. 재난이기 보다는 인재를 탐구하는 그의 회화는 차라리 뉴욕의 9.11테러 혹은 후쿠시마의 대지진과 쓰나미를 잇는 원전 폭발의 공포에 대한 직접적인 기억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할 것이다. 그런 만큼, 그의 회화에 드러난 재난은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못한 채 현재를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근접한 과거의 유산으로부터 발원한다. 그런 면에서 박경진의 회화에 나타난 재난이란 공동체의 삶을 일순간에 붕괴시키는 폭압적 사건에 대한 결코 '망각되지 못하는 집단 기억의 귀환ï이며, 집단 구성원들의 심층에 트라우마로 자리 잡아 그들의 삶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악몽 같은 현실의 재생ï이 된다. 박경진이 작가노트에서 밝히고 있듯이, 후쿠시마 원전 폭발은, "미디어를 통해 인재(人災)와 관련한 사건 사고를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듯 허구적으로 받아들이던 태도"로부터 자신에게도 발생할 수 있다는 인식의 변화를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작가에게 이러한 인식의 변화를 구체화시킨 것은 최근의 세월호 침몰 사건이었다. 허구와 현실이 혼재된 채 미디어를 통해 받아들였던 재난이 인재라는 현실로 확연히 인식되게 만든 두 사건은 박경진의 최근 회화를 인재 시리즈에 골몰하게 만드는 주요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 재난 미술 - 예술의 사회학과 관계 미학. 인재 시리즈에 천착하기 이전의 박경진의 작업은 자본주의 구조와 사회적 현상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드러내는 특정 인물군의 집단초상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졸업식」, 「29연대 훈련병」,「가을신상패션쇼」, 「모터쇼」와 같은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교복, 군복, 유니폼 속에서 위계화된 집단의 속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정면성, 전신상과 같이 전형화된 유형학(typology)적 초상은, 제 각기 다른 표정을 하고 있는 개별자들을 익명화시켜 군상 속으로 사라지게 만든다. 기념사진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몸에 재배치되는 이러한 사회적 계보학(genealogy)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은폐한 채, 작가의 말처럼 '패키지 된 추억ï에 대한 소비와 더불어 '일시적 추억의 열람ï만을 가능하게 할 뿐이다. 우리에게 '집단화된 기억ï을 공유하게 만드는 발원지는 일련의 정치, 사회적 사건들이다. 그것의 본질은 대개 은폐되어 있지만,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본질적 국면을 더듬어 추적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맥락과 인간 사이의 상호관계성을 읽어낸다. 일련의 사건이 거대 사고이거나 인재일 경우는 그 파장이란 자못 심각하다. 기존의 사회적 구조를 재편할 필요성이나 맥락을 재질서해야만 할 당위성마저 제기되는 것이다. 인재를 회화적 주제로 탐구하는 박경진의 작품에는 이러한 사회학의 지평이 펼쳐져 있다. 예술이 사회를 대면하는 루카치(György Lukács) 류의 예술사회학, 혹은 예술의 사회 참여적 역할을 모색하는 부리오((Nicolas Bourriaud)식의 역동적인 '관계미학(Esthétique relationnelle)ï의 관점이 담겨져 있다. 그의 작품은 실제의 정치에 의해서는 결코 성취될 수 없는 목적점을 지향하는 랑시에르(Jacques Ranciere)식의 '정치적 예술ï 혹은 '비판적 예술ï의 메타정치와 같은 행보를 이어나가기조차 한다. 박경진의 예술을 통한 비판적 발언은 사회 구조적 모순에 대한 저항을 통한 변혁을 꾀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불가항력의 천재지변과 같은 1차적 재난을 뒤따르는 인재로서의 2차적 재난, 그것을 은폐하는 권력의 폭압과 미디어의 음모, 그리고 대중 스스로 그들에게 은폐된 채널을 복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품은 인간과 사회의 상호작용의 관계성과 그것을 탐구하는 예술의 역할의 효용성에 대한 문제 제기라 할 것이다.

 

박경진_반경 0 Km #.10_캔버스에 유채_130×166cm_2014
 

 

인재 원점 - 반경 0km 혹은 좌표0000. 그의 인재 시리즈 작품이 예술 안의 문제보다는 예술 밖의 관계, 즉 사회적 맥락에 더 골몰한다는 점에서, 부리오의 관계미학에서 변환의 상호관계성으로 주창되는 이행성(transitivity은 그의 회화에 있어 주요한 조형적 실천이 된다. 사전적 정의에서 이행성이란 "집합의 세 원소 a, b, c에 대해 a R b와 b R c 관계가 성립하면 a R c의 관계도 성립되는 것"과 같은 "다른 상태로 전환하는 특성"이다. 부리오의 미학에서 그것은 예술작품이 관객, 사회 등 예술작품 밖에서 이질적인 것들과 맺는 변환적 관계이다. 박경진에게 있어, 미디어를 통해 접하던 재난 특히 인재를 현실에서 맞닥뜨리게 된 경험은, 자신의 최근작에서 인재 사건에 관한 허구와 실재의 간극을 무너뜨리고 사회 맥락 속 인재의 다양한 주제의식과 더불어 그것의 다차원적 이행성을 탐구하게 만든다. ● 그의 시리즈 작품 「반경 20km」와 「반경 0km」에는 이러한 이행성이 잘 드러나 있다. 전자는 박경진이 인재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던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ï가 야기한 '재난 원점(原點)ï인 동시에 접근 금지 구역을 의미한다. 이것은 물리적 공간임과 동시에 삶과 죽음이 존재와 부재가 교차하고 있는 상징적인 관계 공간이다. 인간의 접근이 금지된 후쿠시마의 제1핵발전소 20킬로미터 이내 공간은 사람이 살지 않는 부재의 공간이자, 구출되지 못한 가축들이 배회하는 유배지이기도 하다. 지진과 쓰나미로 폐허가 된 건물, 폐가와 운명을 함께 한 동물의 주검, 방사능 오염수와 원전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흰색 방호복으로 중무장한 사람들, 스산한 풍경으로 비어있는 대형마트 앞을 떠도는 소들, 아스팔트 위를 방황하는 돼지 떼... 그는 일본 원전 사고를 보도한 각종 미디어의 사진들을 참조해서 캔버스 위에 팩트를 재현하고 현재적 역사를 기록한다. 그런 점에서 반경 20km는 자신의 작품의 메시지가 관객과 맺고 있는 상징적 관계 지점이기도 하다.

 

박경진_반경 0 Km #.9_캔버스에 유채_130×166cm_2014
 

 

한편, 「반경 0km」시리즈 작품들은 현실의 팩트(fact)와 구성한 사건이라는 픽션(fiction)이 한데 어우러진 것들이다. 이 시리즈물은 재난을 대면한 예술가의 재해석이 전면에 자리한다는 점에서 박경진의 작품세계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실제로 일어났던 인재들, 예를 들어 미국의 9.11테러, 보스턴마라톤 폭탄 테러, 한국의 구제역 사건, 용산 참사, 대구 지하철 참사 등의 재난 이미지들이 혼성적으로 교차하는 듯한 화면은 원래의 역사적 시공간을 탈각시키고 허구의 시공간 속에 들어와 자리 잡는다. 그것은 '반경 0kmï라는 이름으로 표상된다. 핵무기가 폭발한 피폭 중심지를 지칭하는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ï라는 군사용어가 9.11테러의 발생 원점을 의미하면서 사용된 것처럼 박경진의 '반경 0kmï는 모든 인재의 발생 원점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이다. 이것을 x축과 y축이 교차하는 데카르트좌표로 표기하면 p(0,0)이, 3차원 공간좌표로 표기하면 p(0,0,0)이 될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를 지나는 경선을 0°로 설정하고, 적도를 지나는 위선을 0°로 설정한 구분 자체가 가능하지 않다. 그저 사건 발생의 원점으로서의 좌표 00이자, 좌표000인 것이다. 여기에 시간을 부여하는 t축을 결합시킨 불가능한 우리의 좌표 p(0,0,0,0)은 박경진의 '반경 0kmï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다.

 

박경진_반경 0 Km #.12_캔버스에 유채_50×60.5cm_2014

 

박경진_반경 20 Km #.8_캔버스에 유채_50×60.5cm_2013

 

박경진_반경 20 Km #.2_캔버스에 유채_61×72.5cm_2012

 

 

이것은 수많은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인재들이 우리 인류의 삶의 지층에 아직 끝나지 않은 상흔(傷痕)으로서의 짙은 트라우마(trauma)를 남겼다는 점에서, 그것은 오늘날의 인재 원점에 집결되어 다시 유령처럼 출현한다. 천재지변이야 어쩔 수 없다 할지라도 인재란 분명코 치유되어야만 할 오명의 유산이다. 번화한 도시로 뛰쳐나온 소들, 집단 주검을 검안하는 방호복의 사람, 생존의 몸부림이 역력한 아우성치는 사람들, 화염에 휩싸인 재난 앞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은 실재의 사건을 형상화한 것이 아님에도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모습ï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분명 시뮬라크르라는 허구일진대 작가 박경진이 만들어내는 리얼리티의 환영을 입고 우리의 현실 속으로 뛰어든다. 구체적 묘사가 생략된 미완성적 화면, 넓은 붓질의 즉발적 표현 언어는 '이미 일어났지만, 일어나서는 안 될 인재ï라는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효율적으로 담아내면서, 우리에게 분노, 충격, 슬픔을 응축시킨 인재 원점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요청한다. ■ 김성호

 

 

Vol.20140612f | 2014 OCI YOUNG CREATIVES-민진영_박경진 2인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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