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언덕으로

신장식展 / SHINJANGSIK / 申璋湜 / painting

2014_0618 ▶ 2014_0629

신장식_저 언덕으로-우주인플레이션 cosmic inflation; 중력파 gravitational wave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2×291cm_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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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식 블로그_blog.naver.com/artsjs

 

 

초대일시 / 2014_0618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노암갤러리

NOAM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 133번지

Tel. +82.2.720.2235~6

www.noamgallery.com

 

 

 

"저 언덕으로"는 / "깨달음의 저 언덕으로 건너감"에서 나왔다. // 저 언덕은 / "아리랑 고개"일수도 있고, / "금강산"일수도 있고, / "수행의 완성, 최상, 최고에 이르는 삼매"일수도 있다. / "pāramitā 波羅蜜"에 대한 나의 해석과 행(行)일수도 있다. //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 고통의 이 세상에서 고통이 없는 저 피안의 세계로, / 현실의 차안(此岸)에서 이상의 피안(彼岸)으로 향하는 / "희망의 아리랑"이다. ■ 신장식

 

신장식_저 언덕으로 - 금강산 천화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20×333cm_2014

 

신장식_저 언덕으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7×162cm_2013

 

신장식_비오는 만물상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5×182cm_2014
 

 

언젠가 신장식은 자신에 대해 "내 인생에 50대는 길 위의 수행자다."라고 말한 바 있다. 나로서는 그가 종교적 발심으로 스스로를 수행자로 규정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가 "예술가의 길도 수행자의 길이며, 그림도 수행의 도구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을 찾으러 세상을 그렇게 다니고 동서고금을 헤맸나? 조금의 빛이라도 표현해낸다면 좋겠다. 나는 그림으로 '희망의 아리랑'을 노래하고 싶다."라고 했던 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말한 수행자는 '길을 찾는 사람'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 스스로 길 위의 수행자가 되기를 원했던 것처럼 신장식은 여행을 좋아한다. 그에게 있어 여행은 단지 일상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재충전을 위한 휴지(休止)의 시간이거나 열심히 일한 자신에게 제공하는 보상(報償)이 아니다. 그는 무언가를 찾는 사람이고, 그 대상이 떠오르면 계속 몰입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는 산치대탑에서 무불상시대 석가모니부처가 보리수나 발자국, 법륜으로 표현된 것을 발견했고, 탁실라박물관에서 헬레니즘과 로마미술이 불교와 습합하여 나타난 간다라불상을 발견했다. 사르나트박물관에서는 5세기 인도 불교미술의 걸작과 만났으며,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을 때는 이 길에서 죽어간 무수하게 많은 구법승들의 고행과도 만났다. 탈레반이 출몰할지도 모를 간다라지역의 길기트에서 마애불을 보았을 때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가 함께 했던 여행이 결코 고행은 아니었다. 어쩌면 실크로드에 대한 낭만적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즐거운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실크로드에서 돌아온 후 그는 혼자 경주 남산으로 갔다. 서산마애불과 같은 부조의 경우 빛의 양과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인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시간을 달리하며 그곳을 찾기도 했다. 비단 불상뿐만 아니다.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의 전거(典據)를 찾아 열심히 불교공부에도 매진하고 있다. 그래서 최근 그의 대화주제는 온통 불교로 가득하다. ● 금강산여행이 열리기 전 금강산을 그릴 때도 그랬다. 금강산과 관련된 많은 자료를 모으고, 조사, 연구하며 그것을 화면 위에 재구성했다. 이러한 열정은 금강산 개방 후 수많은 현지답사를 통해 그를 '금강산화가'로 만드는 동력이기도 했다.

 

신장식_삼매 Samãdhi_캔버스에 한지, 아크릴채색_73×117cm_2013

 

신장식_저 언덕으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2×146cm_2014

 

 

 

 

신장식_아리랑-기원_캔버스에 한지, 아크릴채색_227×364cm_1992

 

 

 

열정이 과도하면 집착이 될 수 있지만 불상을 그리는 것도 어떤 원력(願力)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는 신앙심에 이끌려 예배의 대상인 불상을 그리고 있지는 않다. 어쩌면 불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깃들어있는 깊은 사유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불상을 방편으로 삼았는지 모른다. 마치 데카르트(René Descartes)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이러한 앎에의 욕구란 동기가 작용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직관적이면서 동시에 분석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 아리랑으로부터 금강산, 그리고 불상에 이르기까지 신장식의 그림 속에서 갈등과 대립은 없다. 그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그가 찾는 것은 '희망의 아리랑'이다. 예술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분명하게 단언할 수 없지만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빛과 같은 것을 찾아가는 것. 그것에 대해 도달하기 위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도 있고(위빠사나), 집중할 수도 있고(사띠), 그것조차 여의고 지극히 무념무상한 상태(사마디)에 들 수도 있다. 예술의 길과 선정의 길은 다르다. 그 다름이 예술을 풍요롭게 만드는 요인이지만 현실의 고통을 넘어서 궁극으로 가고자 하는 것에는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반야바라밀은 불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에도 필요한 것은 아닐까. ■ 최태만

 

 

Vol.20140618d | 신장식展 / SHINJANGSIK / 申璋湜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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