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OCI YOUNG CREATIVES

민진영_박경진 2인展

2014_0612 ▶ 2014_0709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4_0612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수송동 46-15번지

Tel. +82.2.734.0440

www.ocimuseum.org

 

 

나는 소망한다. 의미가 생성되는 장소를 ● 민진영의 작품에 등장하는 대상은 집이다. 그녀의 작품은 다락방이나 계단 등의 공간에 대한 기억을 표현한 것이 많다. 그러다보니 건축적 형태를 지니고 있으나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건축공간이 아니라 심리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도 끝도 없이 무한 반복하는 계단작업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과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결합해 놓은 것으로서 지하공간에 있을 때는 밝은 빛을 찾아 위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을, 그러나 막상 옥상으로 올라갔을 때는 땅으로 내려가고 싶은 심리적 동요를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양가감정은 두 개의 지붕이 하나의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지붕과 지붕」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바닥이 지붕으로 이루어진 이 집은 거주할 수 있는 집이라기보다 집에 대한 작가의 기억과 그것이 만들어낸 복잡한 심리상태를 나타낸다. 그래서 이 집은 대지 위에 세워지지 않고 허공에 매달려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제작한 동기에 대해 보편적인 집에 대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기억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했다. 즉 어린 시절 집에 대한 기억이 두 지붕을 하나로 결합한 형태로 만들도록 했다는 것인데 아마도 한 채의 집에 여러 가구가 함께 살았던 경험으로부터 이러한 형태가 나온 것은 아닐까. 또 작가는 각 집마다 그들만의 고유한 가정사가 있기 마련인데 두 개의 집을 하나로 결합한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처를 남들이 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작했다고도 했다. 이런 점은 그녀의 작품이 건축의 재현이 아니라 마음의 표상임을 드러낸다. 주기적으로 켜졌다 꺼졌다 하는 조명은 이러한 심리의 은유라고 할 수 있다. ● 육각형의 긴 터널처럼 보이는「지붕과 지붕 사이」는 2009년에 제작한「그에게는 아이가 없다(He has no child)」의 연장선에 있다. 감성적이면서 내러티브가 있는 제목의 이 작품의 기본 형태는 역시 집이다. 그러나 이 집은 견고한 재료로 건축된 것이 아니라 텐트로 만들어진 가설물이다. 터널처럼 긴 형태의 임시 주거공간의 양 끝에는 각각 다른 영상이 투사되고 있다. 한쪽에는 슬라이드를 이용한 29컷의 표지판이 3초 간격으로 반복되고 있고, 맞은 편 벽의 창으로는 터널 속 영상이 반복된다. 공사중, 야생동물조심, 어린이 보호 등 사람들에게 익숙한 픽토그램을 작가가 개인사와 결부시켜 임의적으로 변형한 이 표지판은 작가와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민진영_연약함, 위대함_레진, 아크릴, 섬유, 조명_365×146×89cm_2014

 

 

작가는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경기도 성남으로 이사했다. 당시 분당 신도시가 한창 건설 중이었기 때문에 작가는 아주 자연스럽게 공사현장의 풍경에 익숙해졌다. 우리가 흔히 '드럼통ï이라 부르는 금속용기 속에 시멘트로 빚은 산과 구릉을 배치하고 그 주변을 비계와 안전그물로 감싼「특이한 대상(unusual objectⅡ)」 역시 신도시 건설현장에서 목격한 장면을 재연해 놓은 것이다. 그것은 건축 산업이 호황을 누리던 시대에 볼 수 있었던 일상의 풍경이자 작가가 어린 시절 주변에서 늘 보았던 풍경이기도 했다.「그에게는 아이가 없다」는 한 벽면에 투사된 공사장의 삽이나 기중기, 화물열차, 버스 등과 같은 픽토그램 또한 어린 시절 일상적으로 보았던 공사현장에 대한 기억을 반영하고 있다. 다만 이 그림문자들이 작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금씩 변형되면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개발된 픽토그램은 제목이 암시하듯 개인의 경험을 고백하는 상징이자 기호로 전치된다. 3초 간격으로 화면을 스쳐 지나가는 이 픽토그램들은 개발, 건설 등을 통해 새로운 문명이 생기는 것에 대한 동경과 사라져가는 자연에 대한 그리움이란 양가적 감정을 표현한 것이자 동시에 아버지와 작가 사이에 있었던 불편함을 단순한 이미지로 토로한 은유의 결과물이다. 맞은편 창문에 상영되고 있는 터널의 이미지 역시 기억이 무의식의 심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입구이자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이다. 질주하는 자동차의 소음보다 더 크게 들리는 슬라이드 프로젝터의 기계음은 작가가 걸어놓은 수수께끼이자 자기고백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감추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즉 텐트로 상징되는 임시주거공간과 픽토그램 사이에 가로놓인 그 간극 속에 개인사가 은밀하게 스며들고, 동일한 영상이 반복되는 터널의 이미지는 이 개인사의 미궁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이지만 정작 그 세계로 들어가기에 작가가 깔아놓은 복선이 많기 때문에 그 내용을 파악하기 쉽지 않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자신의 개인사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과 숨기고 싶은 것이 밝혀졌을 때 느낄 수 있는 부끄러움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마음의 진자운동과 같은 상태를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건축적 구조물이자 마음의 상태가 만들어낸 심리의 건축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 민진영의 작품에 중요한 요소로서 빛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감성과 감정, 심리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작품에 인공조명을 도입하는 경우가 많다. 빛에 대한 기억은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5세 때 시내에서 만취한 채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아버지를 모시고 집을 찾아 어두운 산길을 헤맨 일이 있다고 한다. 아직 어린 아이였지만 안전한 집을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아버지를 이끌고 출발했는데 산간지역이라 집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드문드문 켜진 불빛을 보면서 간신히 집을 찾아갔다는 것이다. 그때 느꼈던 공포와 불빛이 제공하는 안도감, 마치 막막한 어둔 밤바다를 비추는 등대의 불빛처럼 반갑고 고마운 불빛이 그의 작품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노출시키는 장치로서, 개인들의 역사를 밝히는 길잡이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민진영_어둠의 깊이_아크릴, 섬유, 조명_80×61×41cm_2014
 

 

작가가 특별히 집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가족과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독신세대가 늘어나면서 원룸이나 독신자아파트가 늘어나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집은 역시 한 가족이 거주하는 공간일 경우가 많다. 그곳은 노동에 지친 내 육신이 쉴 수 있는 공간이자 가족 간의 연대가 실천되는 작은 공동체이자 은신처이며, 내 신체와 피부의 연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천막으로 산봉우리를 만들고 그 내부에 일정한 간격으로 꺼졌다 켜졌다 하면서 각각의 봉우리로 옮겨가는 조명을 설치한「Individuality in Mountain」은 '집=가족=안식처ï란 등식을 위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관념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작품이다. 작가에 따르면 이 작품은 일본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코레다 히로가츠(是枝裕和)의 영화「아무도 모른다」로부터 모티브를 얻은 것이라고 한다. 영화 속에서 아버지는 각자 다르지만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네 형제가 허름한 아파트로 이사를 온다. 어머니는 아버지 없이 네 형제를 키운다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집을 빌릴 수 없었기 때문에 집주인에게 남편은 해외에 근무하고 있으며, 아들과 단 둘이 산다는 거짓말로 간신히 허름한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남자를 만난 어머니가 아이들을 무책임하게 방치한 채 떠나버리자 남겨진 네 아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다. 결국 굶주림에 지친 막내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고까지 당해 죽자 나머지 세 아이들은 죽은 막내의 시신을 여행가방에 담아 공항으로 가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실화를 바탕으로 가족 간의 사랑, 신뢰, 존중, 보호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이 영화를 모티브로 했다는 점에서 그만큼 작가 자신도 가족의 의미에 대해 심각하고 진지한 고민과 성찰 아래 이 작품을 제작했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작품에서 각 봉우리를 하나의 집이자 가정으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의 연장은 곧 사회이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존재이면서도 가족은 때로 혈족적 유대를 해체할 정도의 서먹함, 불편함, 서운함, 실망과 분노의 진원지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각자 독립된 개체로 존재하는 봉우리를 넘나들고 있는 불빛은 관계의 단절에 의해 야기된 가족해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소통의 신호이지 않을까.「집을 읽다Ⅲ」에서 원형의 비닐하우스를 따라 빛이 움직이는 구조물은 집을 지시한다기보다 집과 그 속에서 살고 있는 가족에 대한 작가의 이러한 불편한 마음을 상징한다. 몇 개의 지지대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비닐하우스 구조물은 집이라기보다 동굴에 가깝다. 이러한 동굴로서의 집은 주거공간이라기보다 공중에 매달린 누각이거나 계속 원점으로 회귀하도록 설계된 터널이다. 비록 투명하지만 동굴을 연상시키는 이 구조물은 집에 대한 공포, 세상에 대한 막막하고 불편한 심리의 표현이다.「집을 읽다Ⅰ」의 바퀴가 달린 계단 두 대로 연결된 터널 혹은 아케이드 역시 정주가 아니라 유동적인 가족관계를 은유한다. 어떤 한쪽에 압력이 가해질 경우 아슬아슬하게 지탱되던 균형이 무너지고 위에 놓인 터널과도 같은 구조물조차 추락할 것만 같은 위기는 그가 느끼고 있는 불편함의 근원이 집이라는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의 관계에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구조물을 투명한 비닐로 만든 것은 들키고 싶지 않은 개인의 내밀한 감정이나 감추고 싶은 치부가 거주하는 장소가 실제로는 투명하기 때문에 은폐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민진영_Between roof and roof_아크릴, 섬유, 이동조명_28×110×24cm_2012~14

 

 

민진영_연약한 공기_영상, 섬유, 스틸_60×240×57cm_2014_부분
 

 

집을 중심에 놓고 자신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는 양가감정에 대해 말하고 있는 민진영이 정작 표현하고자 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은신처이다. 비닐로 만들었든 천막으로 만들었든 집은 그의 피난처이자 은신처이며 몸과 마음이 되돌아가서 쉴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런 점에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심리적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공간일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사회주의 국가가 된 폴란드 바르샤바의 1956년을 시대배경으로 마레크 플라스코가 쓴 소설 『제8요일』의 여주인공 아그네시카는 "벽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사면의 벽, 아니 삼면이라도 좋겠지? 삼면이라도 방이 될 수 있을까? 그런 방에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그런 방이 어디 없을까?"라고 되뇌인다. 이 소설은 공산주의의 감시와 억압 앞에서 느끼는 평범한 연인들의 절망과 허무를 표현한 것이지만 민진영에게 필요한 것은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방이 아니라 마음의 피난처이다. 그래서 그가 표현한 집은 마음의 영역이 생성되는 터전이라고 볼 수 있다. 바다를 매립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테트라포드에 마치 광배처럼 원을 그리며 순환하는 빛의 길을 결합해 놓은「코라」는 이러한 생성으로서의 공간을 해명하는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코라(chora)는 원래 플라톤이 『타마이오스』에서 어머니인 코라가 아버지인 형상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식들인 우주가 형성된다고 말했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특정한 장소를 일컫는 것이라기보다 출발, 시작, 원인으로서의 터전을 의미한다. '코라 세미오틱ï이란 여성주의적 의미생성의 개념을 제안한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는 코라를 무의식을 조명하는 중요한 열쇠로 파악했다. 크리스테바는 잔혹극과 광기의 연극을 추구한 아르토(Antonin Artaud)를 연구하면서 코라에 대해 집적소(réceptacle)로서 가변적인 장소(lieu)를 나타낸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코라는 사회적으로 질서 잡힌 모든 상징체계로부터 벗어나 가장 근원적인 차원의 생성의 과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크리스테바는 코라의 두 가지 성격에 대해 첫째, 형이상학적인 틀(matrix)로서 측정할 수 없는 태초의 물질이 구성되기 이전의 땅이자 카오스가 생성의 운동을 전개하는 장, 둘째, 움직임과 정지가 이루어지는 코라는 언어적인 관점에서 욕망으로부터 분절되며 '비표현적인 총체ï라고 정의했다. 이런 관점을 따라가자면 코라는 좁게는 임신과 출산을 가능하게 하는 여성의 자궁이자 언어로 규명할 수 없는 무의식이 활동하는 에너지가 생성되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테트라포드는 다리를 벌리고 있는 여성의 인체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에너지가 외부로 발산되기보다 내부로 집적되면서 분열과 융합을 거듭하는 공간이자 장소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는 이 구조물에 대해 '바다의 습기를 빨아들이는 기구ï라고 했는데 어쩌면 그것은 혼돈과 질서가 결합된 운동의 지속으로서 카오스모스를 형태로 표현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벗어나고 싶지만 다시 돌아와야 할 장소, 그곳은 나의 집일수도 있고 유동하는 내 마음이 잠시 머물러야 할 영역일 수도 있다. 집은 내 몸을 보호하기 위한 물리적 장소라기보다 의미가 생성되는 내 마음의 영역이다. 그래서 나는 소망한다. 물결치듯 일렁거리는 내 마음 속의 에너지가 새로운 의미로 거듭나는 장소로서의 집을. ■ 최태만

 

 

민진영_연약한 공기_영상, 섬유, 스틸_60×240×57cm_2014_부분
 

 

인재(人災)를 성찰하는 회화 - 반경 0km 혹은 좌표0000 ● 박경진의 회화는 재난, 특히 인재와 그것이 유발하는 사회, 심리적 영역을 탐구한다. 지진, 해일과 같은 자연재해 또한 전쟁, 테러, 사건 사고와 같은 사회적 재난처럼 구조, 대비 소홀로 이내 인재로 변환되기 쉽다는 점에서, 그것들로부터 야기된 공포, 불안, 혼란은 자못 심대하다. 인재란 우리가 터너(William Turner)의「난파선」,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의「메두사의 뗏목」의 경우처럼 자연 재해의 공포 이면에서 찾아졌던 자연에 대한 숭고(sublime)의 차원을 훌쩍 뛰어넘는다. 재난이기 보다는 인재를 탐구하는 그의 회화는 차라리 뉴욕의 9.11테러 혹은 후쿠시마의 대지진과 쓰나미를 잇는 원전 폭발의 공포에 대한 직접적인 기억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할 것이다. 그런 만큼, 그의 회화에 드러난 재난은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못한 채 현재를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근접한 과거의 유산으로부터 발원한다. 그런 면에서 박경진의 회화에 나타난 재난이란 공동체의 삶을 일순간에 붕괴시키는 폭압적 사건에 대한 결코 '망각되지 못하는 집단 기억의 귀환ï이며, 집단 구성원들의 심층에 트라우마로 자리 잡아 그들의 삶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악몽 같은 현실의 재생ï이 된다. 박경진이 작가노트에서 밝히고 있듯이, 후쿠시마 원전 폭발은, "미디어를 통해 인재(人災)와 관련한 사건 사고를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듯 허구적으로 받아들이던 태도"로부터 자신에게도 발생할 수 있다는 인식의 변화를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작가에게 이러한 인식의 변화를 구체화시킨 것은 최근의 세월호 침몰 사건이었다. 허구와 현실이 혼재된 채 미디어를 통해 받아들였던 재난이 인재라는 현실로 확연히 인식되게 만든 두 사건은 박경진의 최근 회화를 인재 시리즈에 골몰하게 만드는 주요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 재난 미술 - 예술의 사회학과 관계 미학. 인재 시리즈에 천착하기 이전의 박경진의 작업은 자본주의 구조와 사회적 현상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드러내는 특정 인물군의 집단초상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졸업식」, 「29연대 훈련병」,「가을신상패션쇼」, 「모터쇼」와 같은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교복, 군복, 유니폼 속에서 위계화된 집단의 속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정면성, 전신상과 같이 전형화된 유형학(typology)적 초상은, 제 각기 다른 표정을 하고 있는 개별자들을 익명화시켜 군상 속으로 사라지게 만든다. 기념사진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몸에 재배치되는 이러한 사회적 계보학(genealogy)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은폐한 채, 작가의 말처럼 '패키지 된 추억ï에 대한 소비와 더불어 '일시적 추억의 열람ï만을 가능하게 할 뿐이다. 우리에게 '집단화된 기억ï을 공유하게 만드는 발원지는 일련의 정치, 사회적 사건들이다. 그것의 본질은 대개 은폐되어 있지만,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본질적 국면을 더듬어 추적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맥락과 인간 사이의 상호관계성을 읽어낸다. 일련의 사건이 거대 사고이거나 인재일 경우는 그 파장이란 자못 심각하다. 기존의 사회적 구조를 재편할 필요성이나 맥락을 재질서해야만 할 당위성마저 제기되는 것이다. 인재를 회화적 주제로 탐구하는 박경진의 작품에는 이러한 사회학의 지평이 펼쳐져 있다. 예술이 사회를 대면하는 루카치(György Lukács) 류의 예술사회학, 혹은 예술의 사회 참여적 역할을 모색하는 부리오((Nicolas Bourriaud)식의 역동적인 '관계미학(Esthétique relationnelle)ï의 관점이 담겨져 있다. 그의 작품은 실제의 정치에 의해서는 결코 성취될 수 없는 목적점을 지향하는 랑시에르(Jacques Ranciere)식의 '정치적 예술ï 혹은 '비판적 예술ï의 메타정치와 같은 행보를 이어나가기조차 한다. 박경진의 예술을 통한 비판적 발언은 사회 구조적 모순에 대한 저항을 통한 변혁을 꾀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불가항력의 천재지변과 같은 1차적 재난을 뒤따르는 인재로서의 2차적 재난, 그것을 은폐하는 권력의 폭압과 미디어의 음모, 그리고 대중 스스로 그들에게 은폐된 채널을 복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품은 인간과 사회의 상호작용의 관계성과 그것을 탐구하는 예술의 역할의 효용성에 대한 문제 제기라 할 것이다.

 

박경진_반경 0 Km #.10_캔버스에 유채_130×166cm_2014
 

 

인재 원점 - 반경 0km 혹은 좌표0000. 그의 인재 시리즈 작품이 예술 안의 문제보다는 예술 밖의 관계, 즉 사회적 맥락에 더 골몰한다는 점에서, 부리오의 관계미학에서 변환의 상호관계성으로 주창되는 이행성(transitivity은 그의 회화에 있어 주요한 조형적 실천이 된다. 사전적 정의에서 이행성이란 "집합의 세 원소 a, b, c에 대해 a R b와 b R c 관계가 성립하면 a R c의 관계도 성립되는 것"과 같은 "다른 상태로 전환하는 특성"이다. 부리오의 미학에서 그것은 예술작품이 관객, 사회 등 예술작품 밖에서 이질적인 것들과 맺는 변환적 관계이다. 박경진에게 있어, 미디어를 통해 접하던 재난 특히 인재를 현실에서 맞닥뜨리게 된 경험은, 자신의 최근작에서 인재 사건에 관한 허구와 실재의 간극을 무너뜨리고 사회 맥락 속 인재의 다양한 주제의식과 더불어 그것의 다차원적 이행성을 탐구하게 만든다. ● 그의 시리즈 작품 「반경 20km」와 「반경 0km」에는 이러한 이행성이 잘 드러나 있다. 전자는 박경진이 인재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던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ï가 야기한 '재난 원점(原點)ï인 동시에 접근 금지 구역을 의미한다. 이것은 물리적 공간임과 동시에 삶과 죽음이 존재와 부재가 교차하고 있는 상징적인 관계 공간이다. 인간의 접근이 금지된 후쿠시마의 제1핵발전소 20킬로미터 이내 공간은 사람이 살지 않는 부재의 공간이자, 구출되지 못한 가축들이 배회하는 유배지이기도 하다. 지진과 쓰나미로 폐허가 된 건물, 폐가와 운명을 함께 한 동물의 주검, 방사능 오염수와 원전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흰색 방호복으로 중무장한 사람들, 스산한 풍경으로 비어있는 대형마트 앞을 떠도는 소들, 아스팔트 위를 방황하는 돼지 떼... 그는 일본 원전 사고를 보도한 각종 미디어의 사진들을 참조해서 캔버스 위에 팩트를 재현하고 현재적 역사를 기록한다. 그런 점에서 반경 20km는 자신의 작품의 메시지가 관객과 맺고 있는 상징적 관계 지점이기도 하다.

 

박경진_반경 0 Km #.9_캔버스에 유채_130×166cm_2014
 

 

한편, 「반경 0km」시리즈 작품들은 현실의 팩트(fact)와 구성한 사건이라는 픽션(fiction)이 한데 어우러진 것들이다. 이 시리즈물은 재난을 대면한 예술가의 재해석이 전면에 자리한다는 점에서 박경진의 작품세계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실제로 일어났던 인재들, 예를 들어 미국의 9.11테러, 보스턴마라톤 폭탄 테러, 한국의 구제역 사건, 용산 참사, 대구 지하철 참사 등의 재난 이미지들이 혼성적으로 교차하는 듯한 화면은 원래의 역사적 시공간을 탈각시키고 허구의 시공간 속에 들어와 자리 잡는다. 그것은 '반경 0kmï라는 이름으로 표상된다. 핵무기가 폭발한 피폭 중심지를 지칭하는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ï라는 군사용어가 9.11테러의 발생 원점을 의미하면서 사용된 것처럼 박경진의 '반경 0kmï는 모든 인재의 발생 원점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이다. 이것을 x축과 y축이 교차하는 데카르트좌표로 표기하면 p(0,0)이, 3차원 공간좌표로 표기하면 p(0,0,0)이 될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를 지나는 경선을 0°로 설정하고, 적도를 지나는 위선을 0°로 설정한 구분 자체가 가능하지 않다. 그저 사건 발생의 원점으로서의 좌표 00이자, 좌표000인 것이다. 여기에 시간을 부여하는 t축을 결합시킨 불가능한 우리의 좌표 p(0,0,0,0)은 박경진의 '반경 0kmï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다.

 

박경진_반경 0 Km #.12_캔버스에 유채_50×60.5cm_2014

 

박경진_반경 20 Km #.8_캔버스에 유채_50×60.5cm_2013

 

박경진_반경 20 Km #.2_캔버스에 유채_61×72.5cm_2012

 

 

이것은 수많은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인재들이 우리 인류의 삶의 지층에 아직 끝나지 않은 상흔(傷痕)으로서의 짙은 트라우마(trauma)를 남겼다는 점에서, 그것은 오늘날의 인재 원점에 집결되어 다시 유령처럼 출현한다. 천재지변이야 어쩔 수 없다 할지라도 인재란 분명코 치유되어야만 할 오명의 유산이다. 번화한 도시로 뛰쳐나온 소들, 집단 주검을 검안하는 방호복의 사람, 생존의 몸부림이 역력한 아우성치는 사람들, 화염에 휩싸인 재난 앞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은 실재의 사건을 형상화한 것이 아님에도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모습ï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분명 시뮬라크르라는 허구일진대 작가 박경진이 만들어내는 리얼리티의 환영을 입고 우리의 현실 속으로 뛰어든다. 구체적 묘사가 생략된 미완성적 화면, 넓은 붓질의 즉발적 표현 언어는 '이미 일어났지만, 일어나서는 안 될 인재ï라는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효율적으로 담아내면서, 우리에게 분노, 충격, 슬픔을 응축시킨 인재 원점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요청한다. ■ 김성호

 

 

Vol.20140612f | 2014 OCI YOUNG CREATIVES-민진영_박경진 2인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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