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참 빠르다.

문영태화백이 세상을 떠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3년째란다.

 

지난 19일 문영태화백의 3주기를 맞아

김포 월곶면 보구곶리에 위치한 민예사랑에서 문영태 유작전이 열렸다.

두 권의 추모집, “심상석-문영태누가 몰가부를 내놓겠는가출판기념회를 겸하여...


 

그의 작품들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전시된 유작들을 둘러보며 묘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문영태화백이 옆에서 싱긋이 웃고 있는 듯 착각이 들었다.

그 전시공간은 문화백이 많은 시간을 보낸 집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 그곳에서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작품 보여 달라니까, 약 올리듯 전시나 한 번 해볼까라는 아리숭한 말을 했던 것이다.


 

전시된 작품들도 사진 촬영할 때의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전시를 준비한 미망인 장재순여사의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었다.

소품의 배치가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절제미를 보여주며 작품을 돋보이게 하였다.

이 전시를 위해 전시장 구조를 바꾸는 대대적인 공사를 벌여 재개관했다는데,

작품 배열에 얼마나 신경 썼는지, 문영태 화백의 체취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의 대표작이나 마찬가지인 상처 난 두개골을 보면, 바로 시대정신이 생각난다.

제일 먼저 문영태씨 그림을 본 것이 시대정신표지에 실린 작품이기도 하지만,

우리민족의 아픔에 앞서, 분노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미술평론가 김진하씨도 이야기했지만,

나 역시 두개골의 상처를 광주항쟁에서 피 흘린 민중의 상처로 보았다.

판화가 오 윤씨의 그림이 동적이라면

그의 그림은 정적이면서도 더 충동질 하는 매력이 있다.



 

민초들의 질긴 생명력과 한()의 정서가 묻어나는 심상석'시리즈는

우리나라 민중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스스로를 내 세우기 싫어하는 선비적 성격으로,

그 작품들이 부각되지 못한 채, 덜 평가되었다는 견해들도 생각해 볼 문제다.


 

신학철선생 말처럼, 그는 지사(志士)의 기질을 가진 사람으로 화가이기 전에 문화운동가였다.

전시와 출판기획은 물론 문화운동가로서, 저술가로서, 더 많은 활동을 펼쳐왔다.

1980년대 초반 서울미술공동체를 시작으로 시대정신’, ‘삶의 미술전’,

해방40년 역사전등 중요한 전시와 출판을 주도했다,

민족미술협회를 창립하고 그림마당 민을 운영하며

민중미술을 확장시키며 현장을 지켜 온 장본인이다.


 

90년대, 지금의 김포 문수산방에 정착한 이후에는

민속학적 문화에 바탕을 둔 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진보월간지 사회평론'문영태의 한국의 문화, 한국인의 성()'을 연재하였는데,

그의 깔끔한 문체와 독보적인 비평의 글들은 독자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 무렵에는 사진가 이지누씨를 비롯한 16명의 작가들로

'경의선모임'을 결성한 후 사진 작업도 했다.

다들, 그림이나 문학, 사진 등이 예술이기 전에 사회를 변화시키는

하나의 도구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한 작가적 문제의식은 사진집 분단풍경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그 뒤 시인 김정환씨가 대본을 쓰고 자신이 사진을 찍어 두 사람을 출판하는 등

사진작업도 열심히 한 팔방미인이다.


 

이번 유작전은 연필화 심상석’(心象石) 연작부터 사진작업인 분단 풍경까지

고인의 대표작들을 선보이는 전시인데,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석기를 연상시키는 돌의 형상으로 민중 신앙을 표현했던 심상석

광주항쟁을 겪으며 폭력에 의한 상처와 정신적 상흔을 상징하는

상처투성이의 형상으로 변해가는 과정도 볼 수 있다,


 

전시장에 걸린 작품들을 둘러보며 남다르게 친밀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생전에 벽에다 쓰 놓은 古風이란 붓글도 그렇지만,

그가 사용한 서재에서 문영태 화백을 증언하는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책이나 집기는 물론 그 어느 것 하나 그의 손 때 묻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문영태화백의 작품과 활동 자료가 담긴 심상석-문영태

그가 집필한 문집 누가 몰가부를 내놓겠는가도 출판되었는데,

뒤늦게 심상석을 펼쳐보며, 도록을 만들고 전시를 추진한

나무아트김진하씨의 안목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정확하게 분석하고 짚어 낸 그의 통찰력도 대단하지만,

찾아 낸 자료를 꼼꼼하게 정리하여

문영태화백의 전모를 제대로 살펴 볼 수 있도록 편집해 놓았다


   

 

그 날 개막식은 문영태화백 미망인 장재순여사와 아들 문지함, 김윤지 내외,

그리고 딸 문지민 등의 가족을 비롯하여 많은 선후배 화가와 학교동문,

문화예술인 10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가 박진하씨 사회로 진행되었다.



    

축사에 나선 민중미술가 신학철선생은 정갈한 선비 같은 모습으로

세상을 바라본 작품하나하나에 그의 인격이 들어 있다고 했다.

그가 그린 상처 난 뒤통수는 분단의 아픔이 아닌가 생각한다며,

통일과 민주화에 열정을 쏟던 그 때 모습이 그립다고도 했다.


    

이재권동문은 학창시절을 회상하며,

영태는 함석헌선생의 장자관을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심취해있었다고 한다.

그림을 보는 관점이나 칼라를 보는 관점도 장자처럼

천하를 너그럽게 놓아두기에 있었다고도 추억했다.


 

그 외에도 성기훈 마을이장과 김정환시인, 김진하, 이인철, 홍선웅씨 등

많은 분들이 그의 업적을 기리며 추모의 인사말을 했고,

자리를 마련한 장재순여사의 감사 인사도 따랐다.

집안 곳곳에 그이의 손길이 남아 더 마음이 아프다

사무친 그리움을 달래기도 했다.


 

그 외 참석한 분으로는 류충렬, 김명희, 박불똥, 안창홍, 장경호,

이재민, 손기환, 김영중, 박정현, 양정애, 정재숙, 정동용, 김 구,

한상진, 김재홍, 최경태, 김종길, 양상용, 노광래, 편근희, 정영신,

나종희, 김영진, 송용민씨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늦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그 전에는 유흥준씨가 다녀갔다는 이야기도 했고,

밤늦게는 유연복씨와 김준권씨가 왔다는 소식도 들었다.


 

문영태화백의 유작전은 오는 62일까지 김포 보구곶리에 위치한

겔러리 민예사랑’(010-5357-5256)에서 열린다.

여행하듯 훌쩍 떠나시어최북단 마을의 정취에 빠져 좋은 전시 한 번 관람하기 바란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글 : 조문호
























































































































































그날 찍은 사진들이 하나같이 한변의 촛점이 선명하지 않아 카메라가 고장난 줄 알았는데,

나중에 렌즈를 살펴보니, 막걸리 자욱이 선명하네.

난, 소주를 마셨는데, 그기 왜 막걸리가 들어갔을까?

아마 카메라는 막걸리가 마시고 싶었던 모양이지.

나만 취하면 그만이지, 너까지 취해 버리면 난 어떻해!

사진 물어 내놔~













 

 

 


최북단마을 김포시 월곶면 ‘민예사랑’에서 다음달 2일까지 열려...

[서울문화투데이]2018년 05월 22일 (화) 13:34:56 정영신 기자 press@sctoday.co.kr

 

‘문영태추모위원회’에서 기획한 문영태 유작전이 지난 19일 오후4시, 북한을 눈앞에 둔 최북단마을 김포 월곶면에 자리한 갤러리 ‘민예사랑’에서 개막되었다. 이 유작전은 인사동에서 ‘민예사랑’을 운영하는 미망인 장재순씨가 미술관을 새롭게 개관하며 마련하였다.

민중문화운동가이기도 했던 문영태화백의 유작전에는 80년대 작업한 연필화 ‘심상석’(心象石) 연작에서 부터 사진작업 ‘분단 풍경’까지 고인의 대표작을 한자리에 모아 보여준다.



▲ 심상석-상황, 종이에 연필, 53X53cmX4


3주기에 맞춰 마련한 문영태 유작전 개막식에는 많은 선후배 화가와 학교동문, 문화예술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가 박진하씨의 사회로 진행했다. 축사에 나선 민중미술가 신학철선생은 “선비 같은 모습으로 세상을 바라본 문영태의 작품하나하나에 그의 인격이 들어 있다.

다른 사람은 그의 그림을 어떻게 볼지 모르지만 내 눈에는 분단의 문제로 보인다. 그의 ‘심상석’(心象石) 연작은 어떤 표현도 가능하기에 아직까지 유효하다고 본다. 모더니스트임에도 불구하고 통일과 민주화에 열정을 쏟은 그의 모습이 보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 자화상,종이에 연필, 31X49cm, 2002


이재권 동문은 ”대학 다닐 때의 문영태는 함석헌선생의 장자관을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심취해있었다. 그의 그림 속에도 도를 보는 관점, 칼라를 보는 관점이 장자처럼 ‘천하를 너그럽게 놓아두기’에 있다고도 했다.


린다노클린은 "예술의 목표는 그 시대의 모습을 분석하고 묘사하는 것이며, 예술은 구체적인 모습을 갖는 그 시대의 세계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이상이나 상징보다는 사회적 제 조건과 보다 간접적이고 실질적인 관계가 있다"고 밝힌바 있다.


▲ 장재순'민예사랑'대표 Ⓒ정영신


민중문화운동가였던 문영태는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한 뒤 1980년대 ‘서울미술공동체’를 시작으로 ‘시대정신’, ‘삶의 미술전’, ‘해방40년 역사전’을 추진하였고, 민족미술협회를 창립하고 ‘그림마당 민’을 운영하면서 출판과 전시기획, 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활동을 펼치며 동시대의 삶을 성찰해왔다.


▲ 천지인 115X77X20cm 상석에 조각 1995


화가 박건씨는 1980년 문영태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의기투합해 <시대정신>창간호를 발간하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미술운동가들이 함께 만든 최초의 민중문화운동 담론지로서 나중에 ‘민미협’과 ‘민예총’으로 가는 다리역할을 했다고도 한다. 또한 문영태는 “공공성과 민중문화에 대한 존중감이 높은 선배였다”고 기억했다.



▲ 나무화랑 대표이자 평론가 김진하씨 Ⓒ정영신


‘나무화랑’을 운영하는 미술평론가 김진하씨는 "‘문영태의 심상석 연작은 1977녀부터 1983년까지 종이에 연필로 그린 작품으로 ‘심상석’은 마음의 형상이 새겨진 돌, 혹은 돌에 새겨진 마음이다. 어떤 것이든 무형의 마음이 구체적사물인 돌로 치환하는 마음과 돌이 인과 혹은 등가의 의미를 띄는 단어이다.


▲ 심상석-결합, 종이판화, 44


타제 마제석기를 연상시키는 ‘심상석’작품은 대체적으로 무겁고 심각하다며, 마음이나 정서에 상처 입은 사람들의 한, 혹은 물리적인 폭력에 의해 몸과 두개골 등에 상흔이 새겨진 사람들, 일상적인 삶의 무게와 민중적 생명력에 관한 작가의 시선이 복합적으로 얽혀져 있다.

단단한 돌에 풍화작용처럼 마음의 흔적이 심상(心象)으로 새겨진다는 것은 뭇 생명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생존에의 의지가 긴 세월 인고의 세월을 부침하며 견딘 결과라며, 문영태의 심상석에서 기층 민중들의 질긴 생명력과 한(恨)의 정서가 동시에 묻어난다고 작가론에 적었다.



▲ 심상석 78-3, 종이에 연필, 168X122cm, 1978


특히 문영태는 1990년 경의선모임이란 공동작업체를 만들어 사진 작업도 했다. 문영태가 주축이 되어 사진가 이지누, 화가 박불똥, 유연복, 최민화, 김기호, 김태희, 남궁산, 백창흠, 박 건, 송진헌, 유은종, 이정희, 조경숙, 공예가 김원갑, 이송열, 미술평론가 라원식씨 등 열일곱명이 참여하였는데, 그 결과물로 ‘눈빛출판사’에서 ‘분단풍경’사진집을 펴냈다.

▲ 국도 7번 도로변- '분단풍경'사진집에서


‘분단풍경’ 사진작업 이후로는 김포 월곶리 자택에 칩거하며 평소 관심가진 전통적인 민중성과 민속적인 글쓰기를 통해 기층 민중들의 생활사에 기반 한 민속민예문화를 연구하면서 상처받은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위무할 수 있는 문화를 꿈꾸었고, 그런 민초들의 생명력에서 서로를 보듬는 미술의 민중성을 지향해 왔다.


▲ 시대정신 창간호,1983-1987


새롭게 자리잡은 ‘민예사랑’개관과 문영태 3주기 유작전을 축하하는 자리에는 ‘민예총’이사장 박불똥씨, 화가 신학철, 장경호, 이인철씨, 사진가 조문호, 판화가 홍선웅, 미술평론가 김진하, 동영상을 제작한 양정애씨등 ‘문영태추모위원회’를 비롯한 친지와 많은 지인들이 찾아 와 고인을 추모하며 유작전을 관람했다.



▲ 김포 월곶리 '민예사랑' 전시된 작품 Ⓒ정영신


이날 추모전시에서는 ‘나무아트’대표 김진하씨가 만든 자료집 <심상석·문영태>와 문집 <누가 몰가부를 내놓겠는가―한국의 문화, 한국인의 성>(몰가부-자루 빠진 도끼)라는 책이 출간되기도 했다.

책에는 1990년대 ‘분단풍경 : 열일곱 사람의 경의선 사진작업’ 그룹을 결성하고 분단된 국토의 현장을 직접 답사하며 찍어둔 필름들, 시인 김정환과 공동으로 펴낸 <이 시대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두 사람>, 1996~98 월간 <사회평론 길>에 연재한 ‘문영태의 한국의 문화, 한국인의 성(性)’, 2001년 사진가 이지누와 공동으로 발간한 계간 <디새집>에 연재한 ‘궁시렁 궁시렁 문영태의 집 이야기’ 등 문영태선생의 후반기 글쓰기 작업까지 한데 모아서 엮었다.



▲ 좌)'심상석-문영태'도록표지, 우)'누가 몰가부를 내놓겠는가' 책표지


문영태선생의 유작전은 김포시 월곶면 보구곶리 ‘민예사랑’에서 다음달 2일까지 이어진다.

전시문의 (010-5357-5256 민예사랑)




 




고인이 된 문영태 화백의 장녀 지민이가 시집갔다.
지난 3일 오후6시, 장재순여사의 장녀 문지민양과
기노준, 이연화씨의 장남 기선호군의 결혼식이 충무로 ‘한국의 집’ 마당에서 열렸다.

좀 늦어 식전공연은 보지 못했지만, 전통혼례의 멋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수 있었다.
기럭아비로부터 기러기를 전달 받은 신랑이 신부 방 앞에다 두고 큰절을 하니 장재순여사가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 때서야 팔을 올려 얼굴을 가린 신부가 조심스럽게 걸어 나왔는데, 수모가 부축은 하지만 행여 넘어질까 불안했다.

요즘이야 결혼 전에 만나는 것은 물론 잠자리까지 하는 커플들도 많겠지만,

백년해로할 상대를 두고 벌어지는 팽팽한 긴장감이 꽤 괜찮은 것 같았다.






정갈한 혼례를 위해 신랑 신부가 손을 씻은 후, 상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마주보고 앉았는데,

상 밑으로 마주보는 두 사람의 은근한 눈길이 사랑으로 가득했다. 건네주는 술잔에도 정념이 넘쳤다.

마치 속으로 “넌 오늘 죽었어”하는 것 같았다.

‘한국의 집’ 전통혼례는 옛 격식 그대로 진행되는데다, 고풍스러운 한옥 마당에서 치러 져

일반예식장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맛볼 수 있다.

이날도 많은 하객들이 참석했지만, 오랜만에 우리문화의 정수를 느끼는 좋은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아는 분으로는 장재순여사 가족을 비롯하여 화가 이인철 내외와 홍선웅, 정영신씨 등 몇 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결혼은 예식장에서 치루는 것 보다, 우리의 멋을 제대로 느끼는 전통혼례가 바람직하다.

특히 외국인 신랑신부를 맞는 혼주들이 선호하는 현상이지만,

한국인으로 태어나 우리 전통혼례를 한 번 치러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나 역시 전통혼례를 치루지 않았으나, 세월이 지나고 나니 후회스러운 생각도 들었다.

하나의 형식에 불과하겠지만, 우리선조들의 결혼관과 정신을 이어받았다면,

요즘처럼 이혼을 밥 먹듯 하지는 않을 것이란 나름의 판단 때문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이웃이 가까워 신랑신부를 잘 알아 소개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요즘은 다들 바쁘게 사니 새로 맞이하는 신랑이나 신부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혼례가 끝난 후 하객들에게 인사드리며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도 만들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남았다.



 


지민이 결혼으로 온 가족은 물론 친지들이 다 모인 자리에 문영태화백이 살았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고 코 끝이 찡했다.

그나저나 아들 지함에 이어 딸 지민이 까지 시집보내는 장재순 여사의 외로움은 또 어찌할고?

예전의 대가족제처럼 한 집에서 사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민아 서로 의지하며 잘 살아라.
네 아버지가 저승에서 지켜보며, 싱글벙글 좋아하실 것이다.
부디 백년해로하길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아래는 ‘한국의 집’ 전통혼례에 소요되는 비용이다.
필요하신 분들은 참고 하시길...

전통혼레 비용은 기본비용이 1.200,000원이고, 선택사항으로 미용과 사진촬영 등 부대비용을 백 만원 이상 잡아야 한다. 그리고 신랑신부 혼례복 대여비가 50만원, 수모 인건비가 20만원, 폐백비용도 50만 원정도 소요된다. 식전공연으로는 부채춤이 50만원, 사물놀이는 40만원, 판소리는 10만원으로 선택사항이다. 피로연 비용은 일인당 4만원부터 6만원까지 세 종류가 있다.




지난4일 열린 7차 ‘광화문 미술행동’에서 내세운 슬로건은 ‘새로운 나라로!’였다.

새로운 나라가 되기에는 세월이 걸릴 것 같지만, 일단 박근혜 부터 구속시키고 황교안을 사퇴시키자.

광장갤러리에 설치된 걸개그림은 판화가 김준권씨의 ‘청죽’을 비롯하여 30년 전에 그린 김진하씨의 작품도 먼지 털며 나왔고,

정비파씨의 독수리 무리도 경주에서 날아왔다. 박홍규, 김봉준, 김 억, 류연복, 손기환, 유대수, 윤여걸, 이철수, 홍진숙,

홍선웅씨 등 대가들의 그림이 줄줄이 내 걸렸다. 이젠 알미늄 틀도 만들어져, 다들 반듯하게 걸렸으나,

김진하씨의 작품만 바람난 여인 치맛자락같이 펄럭였다. 오히려 흔들리는 형상에 더 눈길이 끌리더라.


오는 정월대보름 날 열릴 8차 프로젝트에서는 ‘광장갤러리’를 시와 사진으로 꾸밀 예정이다. 

서예퍼포먼스와 함께 춤판도 벌일 예정이나 매주 예술행동에 소요되는 비용 또한 만만찮다.

세화를 찍고, 판화를 파는 등 다방면으로 후원금을 모아 왔으나, 적자를 면키 어려웠다.

가난한 작가들의 예술저항이라 십시일반 나누는 시민들의 도움이 절실한 실정이다. 

‘궁핍현대미술광장’에서 열린 세화로 꾸민 판화전은 관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판화가 류연복씨는 세화 찍느라 바빴고, 옆에서는 김가영씨가 열심히 도왔다.

이날은 반가운 분들도 연이어 등장하셨다.

원로 시인 강 민선생을 비롯하여 백기완, 황석영씨와 함께 조선의 삼대구라로 꼽히는 방배추(방동규)선생,

시골서 상경한 홍석화씨, 맹문재교수, 양문규시인, 장영도이사도 함께했다.

이른 점심을 먹고 나왔으나 ‘청진동해장국’으로 따라갔다. 신축건물이라 옛 분위기는 오간데 없고, 밥값만 비싸졌더라.

맹문재씨가 카드로 결제했지만, 만원씩이나 하는 해장국은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아니나 다를까 자리를 비웠더니, ‘광화문 미술행동’의 서예퍼포먼스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여태명씨의 서예퍼포먼스는 끝 난 뒤였다.

여태명씨는 ‘탄핵대길. 안민다경’을 써 놓았고, 박수훈씨는 탄핵농자지대본’을 쓰고 있었다.

예술가들의 글과 그림 위에 시민들이 쓰는 자유발언대 참여도 이어졌다.

이날 김준권씨를 비롯하여 장경호, 송경동, 김남선, 김진하, 깁봉준, 정덕수, 김 억, 김 구, 양혜경, 정영신, 장순향,

김영배, 이광군, 장진영, 이윤엽, 이재민씨 등 많은 예술가들이 일을 도왔고, 신학철, 신상철, 박 철, 권 홍, 최석태,

하형우, 김보영씨 모녀도 모습을 드러냈다. 고생하는 후배들을 위해 신학철선생께서 한 턱 쏘았는데,

술 한 잔에 맛이 가 꾸벅꾸벅 졸다 돌아와야 했다. 아직 몸이 정상은 아니었다.

오는 정월대보름날 열릴 15차 촛불집회의 ‘광화문예술행동‘을 기대하시라.
김준권씨는 충북 옥천에서 행진에 사용할 깃발용과, 광화문 달집용 대나무를 벌채하는 사진이 페북에 올라왔다.

정월대보름의 신명난 굿판이 기다려지는 하루다.

사진, 글 / 조문호

























[김준권씨 페북에서 스크랩]

[김준권씨 페북에서 스크랩]





































































[김준권씨 페북에서 스크랩]

[김준권씨 페북에서 스크랩]










지난 22일부터 이박 삼일 동안 서해안 최북단에 위치한 고 문영태화백 자택에서 놀았다. 

2018년에 열릴 그의 추모전을 대비한 유작을 촬영하기 위한 나들이였는데, 지난 늦가을에 이어 두 번째 걸음이었다.

지난번에는 문화백의 자료들만 찍었고, 이번에는 그의 모든 작품을 찍으러 갔다.

추모전 준비위원장을 맡은 이인철씨와 장경호씨가 동행한 자리에서 김진하, 홍선웅씨도 만났다.

장재순여사가 맡긴 카드로 다들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간 크게도 옆에 있는 장어 집에 들어 간 것이다.

인근에는 식당이 그 뿐이기도 하지만, 은근히 몸 보신한다는 생각들도 있었을 것이다.

솔직히 돈 생각해서 그런지, 맛은 없더라. 반가운 분들과 소주 한 잔하는 맛이 더 죽였다.

오후부터 시작된 촬영 작업은 순조로웠으나, 이튿날은 달랐다.
대부분 유리 없는 액자들인데, 작품에 먼지투성이였다.
붓으로 먼지 털어 낸 장경호씨와 이인철씨는 가루 좀 마셨을 것이다.
그러나 종이에 핀 곰팡이 자국은 지울 수가 없었다.




유리 속에 든 작품들은 더 심했다.
상장이나 일기장까지 다 챙겨두는 꼼꼼한 그가
작품들은 왜 이렇게 허술하게 보관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자연 속에 풍화되어가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싶었을까?

촬영 덕분에 이틀 밤을 술로 지냈다.
첫 날밤은 인천의 ‘광장, 환대의 문지방’전 개막식에 가서 시동을 걸었고,
둘째 밤은 강화읍내까지 원정 가 퍼 마셨다. 화가 최경태씨 까지 불러내어...
대리운전에 끌려 들어오다, 동네 어귀에서 기다리던 박 건씨와 함께 들어왔는데,
그 뒤는 술이 취해 그런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마지막 날인 토요일은 광화문광장에 가야하는 날이라 마음이 바빴다.
날씨가 추워 그런지, 일의 진척이 안 나갔다. 찍긴 찍었으나 뒷맛이 개운치 않더라.
안 돼면, 다시 한 번 쳐들어가야지 뭐..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1일, 북한을 눈앞에 둔 서해안 최북단에 자리한 김포 월곶면 보구곶리의 고 문영태화백의 자택을 찾았다.

짱짱한 나이에 세상을 떠나 주위의 안타까움을 샀던, 그의 추모전을 위한 자료와 작품들을 촬영하기 위해서다.

지난 달 미망인 장재순여사의 제안으로 평소 가까운 지인 아홉 명이 문영태화백 추모전을 위한 준비위원회를 만들었는데,

추진위원장을 맡은 민미협 회장 이인철씨로 부터 연락 받은 것이다.

약속대로 금능역에서 이인철씨를 만나 함께 떠났는데, 꼬불꼬불 낮 익은 길 따라가니,

미망인 장재순여사는 정원을 가꾸고 계셨고, 류충렬화백이 먼저 와 계셨다.
붉은 단풍잎들이 곳곳에 흩어 진 고인의 저택은 처연했다.

문형의 손길이 느껴지는 곳곳에서 삶의 무상함을 본 것이다. 도대체 사는 게 무엇인지...

점심 식사 후, 시작한 촬영 작업은 이웃 사는 판화가 홍선웅씨도 도와주었다.

장재순여사가 꺼내주는 자료 상자를 이인철, 류충렬씨가 분류하여 나에게 넘겨주었는데,

얼마나 자료를 꼼꼼히 챙겨두었는지 초등학교 때 받은 상장까지 다 모아두었더라.

스케치 북에서부터 일기와 작업노트, 판화와 메모지 등 자료의 분량이 너무 많아 한나절이 후딱 가버렸다.

자료들에서 평소 문형의 치밀함을 엿 볼 수 있었는데, 몇 자 적어 놓은 낙서조각에도 삶의 지혜가 담겨 있었다.

작품들은 꺼내 보지도 못하고 만찬장으로 갔는데, 회에다 고급와인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 얼마 만에 만나는 호화 만찬이던가?

술 한 잔의 가격을 안다면 도저히 목에 넘길 수가 없는 와인을 쭉쭉 들이키는 호사를 떨었는데, 기분 좋게 취했다.

고인의 영정사진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으니, 마치 문형과 마시는 듯, 옛 생각이 새록새록 했다. 

뒤늦게 나타난 화가 박건씨의 코믹한 제스처에 한 바탕 웃기도 했다.

술도 취했지만 자정이 넘어, 살아생전 문형이 사용하던 방에서 하룻 밤 지냈다.
평소 술이 깨야 자는 습관 때문에 잠을 못 이뤄, 이 생각 저 생각 빠져든 것이다. 

문형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는데. 내일 서울에서 벌어질 촛불시위를 물어보았다,


“내일 쯤, 그 년이 하야 할까?”

“택도 없는 소리, 그 뻔뻔스러운 상판대기 한 번 보소! 쉽게 물러 날 년인가...”
“그렇다면 강제로 끌어내려야지, 촛불을 햇불로 바꿔 청와대까지 쳐 들어가야지”

사진, 글 / 조문호


































[스크랩 / 한겨레신문]

1985년 7월20일 ‘한국미술 20대의 힘 전’이 전두환 정권의 탄압으로 제지당하자 출품 작가 30여명이 서울 안국동 아랍미술관 전시장에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이날 경찰은 끝내 전시장을 봉쇄하고 30여점의 출품작을 강제로 철거해 갔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민족미술인협회가 결성됐다. 사진작가 박용수씨 제공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84년 ‘삶의 미술전’ 끝나자
새로운 미술운동 논의 무르익어
‘해방 40년 역사’ 전국 순회전 열고
민중미술 논의 물꼬 ‘민미협’ 결성
‘민족미술’ 발행·토론회 정례화…
‘그림마당 민’ 운영 등 기틀 잡아

 

■ 새로운 미술운동의 기운과 민미협의 태동

 

‘용태 형’은 그가 즐겨 부르던 ‘청포도 사랑’처럼 부드러우면서 정감이 많았다. 그는 조직을 운영하는 일에는 판단력이 신속하고 단호했지만 누구에게나 자상했다. 1984년 6월 <삶의 미술전>(관훈미술관·아랍미술관·제3미술관)을 기획하면서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문영태, 강요배, 박세형과 함께 우리는 여러 차례 기획모임을 하면서 작가의 자료를 수집하고 출품 작가를 선정했다. 이 과정에서 성완경 선배와 용태 형에게 조언을 듣곤 했다.

 

‘삶의 미술전’은 “삶과 유리된 미적 가치관을 양성한 모더니즘을 비판하면서 총체적 삶의 맥락 속에서 미술을 정립해 나갈 것”을 주장한 전시였다. 군부독재정권 속에서 현실을 외면한 채 서구 모더니즘의 형식주의 미술에 매몰된 제도권 미술에 대한 도전으로 새로운 미술운동으로서의 가치관과 창작론을 모색하고자 한 것이다.

 

‘삶의 미술전’을 계기로 새로운 미술운동에 대한 논의가 점점 무르익어 갔다. 많은 미술인들이 인사동의 건국다방 앞에 있던 평론가 원동석 선생의 미술자료실을 들락거렸다. 주재환, 손장섭, 김정헌 등 현발 동인들을 비롯해서 선화랑에서 발간하는 <선미술>의 주간을 맡고 있던 유홍준, 그리고 광주의 홍성담과 최열, 동인 ‘임술년’과 ‘두렁’의 회원들과도 가끔씩 자리를 같이하곤 했다.

 

84년 우리는 <해방 40년 역사전> 전국 순회전을 기획했는데, 또 지방 순회전시회 때마다 세미나도 열었다. ‘역사를 보는 작가의 시각’(황석영·광주), ‘작품에 있어서 형식의 제 문제’(홍선웅·광주), ‘역사와 예술’(염무웅·대구), ‘작가와 역사’(이철수·대구), ‘역사화의 주제의식’(성완경·부산), ‘작가와 시대정신’(문영태·부산), ‘작품에 있어서 주제 표현의 제 문제’(원동석·마산) 등의 주제로 지역 미술인들과 대화를 나눴다.

 

이 전시회를 통해 민중미술에 대한 논의가 전국 단위로 활성화되었으며 훗날 ‘민미협’이라는 미술전문가 집단을 결성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 ‘힘전 사건’과 젊은 미술인의 결집

 

사무국장 연임 마다한 용태형
뉴욕 가서 ‘민중판화전’ 기획
판매대금 민미협 활동비로 보내
유홍준과 콤비플레이 운영비 숨통

 

85년 7월 안국동에 있었던 아랍미술관에서는 <한국미술 20대 힘 전>이 열렸다. 그런데 종로경찰서에서 전시장을 봉쇄하고 30여점의 작품을 강제 철거해 버렸다. ‘힘 전’ 사건은 군사독재정권이 자행한 첫번째 민중미술 탄압 사례로 꼽히며, 이로 인해 미술인들의 조직적인 대응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한 달 뒤인 8월17일 우리는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민족미술 대토론회를 열고 민미협 창립의 필요성에 합의하고 창립준비위원회를 설치하기로 결의했다. 그 덕분에 ‘힘 전’에 참여했던 20대의 젊은 미술인들이 민미협에 적극 가입하며 주도적인 구실을 하게 되었다.

 

‘힘 전’ 며칠 전인 7월5일, 나는 이른바 ‘민중교육지 필화사건’으로 유상덕(작고)·김진경(전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고광헌(전 한겨레신문사 사장) 등 30여명의 교사와 함께 학교에서 해직당했다. 그러자 선배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내게 민미협 창립 준비위원회 총무를 맡겼다. 그리고 여러 대학신문에 미술운동론을 쓰고 있던 미술평론가 최열에게는 사업과 홍보를 책임지게 했고, 사무국장은 당연히 용태 형의 몫이었다. 서서히 사무국 체계가 갖춰지고 운영위원회와 대의원 조직이 편제되면서 그해 11월22일 120여명의 미술인들이 서울 여의도 여성백인회관에서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 창립총회를 했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억압이 극에 달하던 시절이었다. 민미협이 출범하면서 용태 형은 그 특유의 친화력으로 조직을 다져 나갔다.

 

1985년 7월20일 전시장에서 철거·압수당한 ‘한국미술 20대의 힘 전’ 출품작들이 서울 종로경찰서에 쌓여 있다.

 사진작가 박용수씨 제공

 
 

용태 형은 86년 1년 동안 사무국장을 맡았지만 그사이 많은 사업을 추진해 민미협의 기틀을 다져 놓았다.

 

가장 주목할 만한 사업을 꼽자면, 민미협 기관지인 <민족미술>을 발행해 새로운 미술운동으로서 민중미술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이 기관지를 통해 회원의 전시와 기획전에 대한 평가와 함께 소집단 미술운동과 지역현장 운동을 소개했다. 또 30년대~80년대의 중국 신목판화운동사, <일본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미술가회의전>(JAALA)의 작품과 교류를 소개해 사회변혁운동으로서 민중미술운동에 대한 시각을 국제적으로 넓혀 나갔다.

 

둘째로는 민족미술 대토론회를 정례화시켜 조직운동의 방향과 창작론, 미술의 대중화 실천방안을 모색하고 지역 미술인들과 연대를 강화해 나간 점이다. 이 대토론회가 지금까지도 해마다 민미협의 정기 행사로 이어진 것은 이처럼 출범 때부터 그 중요성이 높게 평가받아온 덕분이다.

 

셋째로는 민미협의 전시공간인 그림마당 민을 만들고 운영했다. 그림마당 민은 많은 운영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회원 모두가 힘을 모았지만 이를 총지휘한 것은 당연히 사무국장인 용태 형과 운영위원장을 맡았던 유홍준 선배였다. 나는 지금도 이 두 선배의 콤비 플레이가 없었다면 민미협과 그림마당 민이 그렇게 많은 활동을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때 ‘민미협·그림마당 민의 1년 결산 대차대조표’(86년 12월15일)를 보면 총수입과 총지출이 각각 3352만원이었다. 지금 화폐로 환산하면 약 2억원에서 3억원은 될 것이다. 그만큼 많은 사업을 활발하게 벌였음을 알 수가 있다. 이런 모든 것은 회원 모두의 노력의 결과이지만 그 출발 시점에 용태 형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다.

 

■ 6월항쟁과 민예총 결성의 모색

 

87년 민미협 제2기에 들어서면서 용태 형은 나를 사무국장으로 추천했다. 돌이켜보면, 앞서 86년 수많은 일들이 민미협과 그림마당 민에서 벌어졌고 용태 형은 과로로 인해 휴식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마침 평론가 엄혁의 주선으로 캐나다 토론토의 에이 스페이스 화랑에서 ‘김용태·김봉준·박불똥 3인 초대전’(1987)이 이뤄졌고, 이어서 3월에는 뉴욕의 마이너 인저리 화랑에서 초대전이 잡혀 있었다. 용태 형은 3월 뉴욕 전시를 위해 출국했고 전시가 끝난 뒤 뉴욕과 로스앤젤레스(LA)에서 한국청년연합을 이끌고 있던 윤한봉(작고) 선배와 만나 <뉴욕 민중판화전>을 기획했고, 그 수익금을 민미협에 보내주기까지 했다. 어디를 가나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용태 형의 성격이 잠깐 다니러 간 이국땅에서 민중판화전까지 주선한 것이다.

 

87년 3월 민미협이 고 박종철군 추모를 위한 <반고문전>을 열자, 경찰은 그림마당 민을 봉쇄하고 작품 30여점을 철거해 버렸다. 그리고 4월 전두환 정권은 집권 연장을 위해 ‘4·13 호헌조처’를 발표했다. 민미협은 즉각적으로 ‘우리 모두의 소망을 모아서 어둠을 밝히자’라며 ‘시국에 관한 237 미술인 선언’을 발표했다. 그리고 이어서 민미협을 포함한 문화 6단체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축소은폐 조작 사건’에 대한 규탄대회를 열었다. 이후 6월항쟁까지 군부독재 타도를 향한 투쟁의 열기는 뜨거워만 갔다. 반고문전부터 6월 투쟁까지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인생에서 이때처럼 바빴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당시 가장 생각나는 사람은 뉴욕에 가 있던 용태 형이었다.

 

이처럼 국내 사정이 급박하고 점점 치열해지자 용태 형은 뉴욕 전시를 마치자마자 귀국했다. 그리고 민미협과 문화 6단체의 투쟁에 힘을 보탰고 직접 국민운동본부 집행위원으로 참가했다. 그러나 87년 대선이 야권분열에 의한 민주정권 교체의 실패로 막을 내렸고, 용태 형은 뭔가 모색을 하는 듯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문화예술인들의 역량을 모아 민예총을 건설해야겠다는 것이다.

 

홍선웅 판화가·전 민예총 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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