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열린 장경호의 '묵시'전에는 반가운 손님이 많았다.

 

뒤풀이 집으로 정한 낭만에는 앉을 자리가 없었다.

전시장에서 만났던 김진하, 이정황, 안원규, 류연복, 우문명, 김정업, 박윤호, 배성일, 정동용,

황준연, 최석태, 김세규, 조준영, 정희섭, 심정수, 김재홍, 최민화, 박불똥, 전강호, 신동여씨 는 물론,

신학철 선생을 비롯하여 칡뫼김구, 나종희, 임경일, 이강군, 양상용, 김영진, 이명희, 김수길, 김정대, 강경석

서인형, 이명신, 김이하, 조경연, 박은태, 김윤기, 박영애, 임정희, 김정환, 황정아, 이재민, 이도윤, 김상천,

이현정, 김보영씨 등 많은 분이 모여 있었는데, 늦게는 현장스님, 이효상, 노형석, 하태웅씨도 오셨다. 

 

전시를 축하하는 자리지만 술로 한세상 인사동을 풍미했던 당사자는 뇌경색에 졸아 술 한 잔 마실 수 없었다.

 

다들 장화백의 빠른 회복을 바라며 대신 마셨다.

 나는 너무 마셔 이틀을 드러누웠지만... 

 

어쨌거나, 장화백 덕에 인사동 풍류객들이 모처럼 한 자리 앉아 즐겁게 마시고 놀았다.

봄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가기 싫어 생 지랄발광을 했다.

 

사진, 글 / 조문호

 

울긋불긋 꽃처럼 돋아난 화려한 물질문명에 슴이 턱턱 막혔다.

지난26일 성균관로 정문규미술관에서 열린 김재홍 초대전 깨어나는 몸, 다시 서는 거인을 보면서다.

 

  2년 전 보여준 거인의 잠에서는 갈갈이 찢기고 망가진 땅 즉 병든 국토를 이야기 했다면,

이번에 보여 준 깨어나는 몸은 썩어 문드러진 인간의 정신을 탓하는 것 같았다.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물질문명, 즉 돈의 폐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현실을 반영한 리얼리즘이 아니라 현실을 반성케 하는 리얼리즘이라 듯이,

작가 김재홍이 전해주는 시어들은 절규에 가깝다.

 

   

김제홍은 정치적 모순이나 불안한 한반도 평화, 환경의 황폐화, 물질문명에 병든 현대인의 끝없는 욕망 등

동시대인이 처한 삶의 문제점을 자신만의 문법으로 신랄하게 비판해 왔다.

 

  화산이나 지구를 멸망으로 몰아넣을 핵폭탄 등을 아름다운 꽃으로 표현한 작품에서는

보들레르 악의 꽃이 연상되었다.

 

  그대의 증오로 저주받은 이 씨앗은

나를 짓누르는 분노를 솟구치게 할지니

독기 품은 새싹이 돋아나지 못하도록

늦기 전에 이 나무를 아주 비틀어 놓으리라!“

-보들레르의 시 축복’ 중에서-

 

  그리고 마지막 남은 여행은 죽음뿐이라고 했다

죽음의 길에서 새로운 미지의 희망을 찾는다는 것은

목숨 걸고 삶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악의 꽃이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였다.

 

  김재홍이 추구해 온 일관된 작업은 우리민족이 겪어 온 역사적 사실에 기인한다.

민주화 과정을 겪는 지난한 시대적 사건에서 부터,

국토의 분단과 자연의 황폐화 그리고 핵 확산이 가져올 종말적 위기론까지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다.

 

  그가 배경으로 끌어들이는 인간의 몸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이며 세상이다.

분단의 상처나 핵폭발로 일어 날 비극적 상황을 몸의 상처로 드러낸 것이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반성케 한다.

 

  아래 글은 홍경한 미술평론가의 전시 서문에서 한 단락 옮겼다.

 

김재홍은 정치적·사회적 관계망 속에 거주하는 실존이 겪는 삶의 냉혹한 현실을 기록하고

시대의 긴급한 사회적 문제들을 품격 있게 다룬다.

또 다른 역사화로 <근정전>을 잇는 <안타까운 유산>에서처럼 그의 작품은 그 자체로 강력한 논평이 된다.

 

  물론 또 다른 특징도 있다. 바로 그의 작품은 형식상 사실주의적 경향을 따르지만 입체적 상상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입체적 상상은 상징적인 요소에 의한다. 작가는 상징을 통한 직관성을 회피하는 대신 작품마다 시어(詩語)를 심으며 현실 인식과 성찰의 행간을 만든다. 예를 들어 폭탄에 의해 깊은 웅덩이가 들어선 대지 혹은 자연의 일부처럼 보이는 몸을 그린 <거인의 잠>, <야만의 흔적> 연작은 거칠고 험난한 질곡의 역사를 다룬 진혼곡이다. 몸에 새겨진 크고 작은 기록과 생채기들은 엄혹한 현실의 투영이면서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각인될 수밖에 없었던 익명의 상흔이다.”

 

  개막식이 열린 지난 26일은 청승맞게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성균관대 부근에 있다는 말은 들었으나, 정문규씨 집 찾느라 고생 좀 했다.

어렵사리 찾았지만 많은 분들이 뒤풀이 집으로 옮기고 있었다.

 

일 이층에 나누어 내건 대형 작품에 압도되었지만 손님이 너무 많았다.

뒤늦게 작품 보랴 인사 나누랴 정신없었는데, 단양 사는 김언경씨 모습도 보였다.

 

주인공 김재홍씨를 비롯하여 박불똥, 조경연, 장경호, 박흥순, 안원규, 박상희, 이필두, 최석태,

김도수, 김영진, 최운영, 류충렬, 나종희, 황준연, 이인철, 김진하, 류연복, 이재민, 양상용, 이현정,

칡뫼김구, 성기준, 두시영, 박은태, 곽대원, 손기환, 한상진씨 등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많은 화가들이 나왔다.

 

  임정희씨는 동행한 독일 문화비평가 안드레아스를 소개시켜 주기도 했다.

 

  뒷풀이 집인 한국관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 넓은 식당에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이 많았다.

마침 장경호씨가 자리를 잡아 놔 끼어 앉을 수 있었는데,

그 날 뒤풀이 비용은 갤러리측에서 낸다기에 마음 편히 즐길 수 있었다.

 

  기분 좋게 마신 것 까지는 좋았으나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게 탈이었다.

옆에 앉은 손기환씨가 술잔만 비면 따라주는 바람에 정량을 한 참 초과했는데,

문제는 술이 취하면 오버 하는데 있다.

 

  평소엔 말을 잘 하지 않지만, 술이 취하면 검정되지 않은 이야기를 마구 까발리거나 고집하는 게 문제다.

그 날은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며칠 후 끝나게 될 이인철의 거리에서전시에 꽂혀,

전시 끝나는 다음 날 인사동 거리 전을 하자고 고집한 것이다.

 

  그것도 작품설치는 누가 어떻게 할 것이며 관리는 어떻게 한다는 등 구체적인 대안도 없이,

이인철, 김진하, 최석태씨 등 가까이 있는 모든 분에게 반복했으니, 얼마나 짜증나겠는가?

 

  전시장은 텅텅 비고 거리에는 사람이 넘쳐나는 문제점의 대안을 찾고 싶은 궁여지책으로,

이인철의 ‘거리에서’전을 열면 행인들에게 오래된 추억을 소환할 것으로 판단했는데,

술자리에서 거론할 문제는 아니었다.

술 취한 자의 행복한 노래 쯤으로 여겼으면 좋으련만, 미운 살 박히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술이 취해 최석태씨 도움으로 버스정류장까지 갔는데, 길거리에서 중국 통 이강군씨를 만나기도 했다.

 

  대학로에서 버스로 출발해 갈아 탄 것 까지는 좋았으나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일어나보니 목적지에서 두 구역이나 지났는데, 술김에 걸었으나 너무 무리했다.

그렇지 않아도 전시장 찾느라 많이 걸었는데, 며칠은 고생하게 되었다.

부산 같다 온 휴유증도 이틀 만에 간신히 가라앉히고 나갔는데 말이다

사람도 아닌 송장이 사람 행세하고 다니기가 너무 힘들다.

 

이 전시는 1126일까지 열리니 꼭 한 번 관람하시기 바란다.

 

사진, / 조문호

 

정복수의 자궁으로 가는 지도-1’전이 106일부터 30일까지 인사동 올미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다.

 

화가 정복수는 반평생을 억눌린 인간의 본성이나 실존에 대한 문제를 인체 구조로 표현해 온 작가다.

 

그는 탐욕의 인간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육체라는 믿음으로 인간의 절단된 몸을 그려 왔다.

 

오래전 그의 작업실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하나의 충격이었다.

마치 종합병원 정형외과에 온 것 같았다.

작업실에는 사방에 해체되고 절단된 인체가 걸려 있었다.

팔다리가 잘려 나간 형체나 표정에서 사악해지는 인간의 실체를 보는 것 같았다.

 

한편으론 짐승 같은 인간 본능의 원초적 욕망이 이글거리는 생존을 그린 투시도 같았다.

바로 병들어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이었다.

 

이번 개인전은 자궁으로 가는 지도라는 제목이 붙었다.

이건 돌아갈 수 없는 지도가 아닌가?

갑자기 존덴버 노래 ’Take Me Home, Country Roads‘가 떠올랐다.

"시골길이여 나를 집으로 데려가줘요. 나의 보금자리로..."가 아니라 어머니 뱃속으로...

 

신비한 자궁의 세계를 엿 볼 기회라며 들어갔는데, 마치 사주 보는 점집에 들어 온 기분이었다.

손금과 눈이 그려진 손바닥 그림 몇 점이 다가왔는데,

마치 스스로를 알라는 듯 묘한 뉘앙스를 풍겼다.

 

인간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출발했으나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인간 회귀의 욕망을 부추겼다.

어찌보면 길 잃은 인간들을 안내하는 지도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처음 보는 작가의 자화상도 걸려 있었다.

작품에 대한 해설은 미술평론가 김진하씨 서문으로 대신한다.

 

영원한 청춘일듯하던 인생도 종국에 는 맞닥뜨리는 게 있다. 생명체라면 모두 피할 수 없는 운명, 생장해서 성숙해지 는 만큼 소멸이 가까워지는 게 세상 이치다. 생명의 끝 지점. 자궁으로부터 출발 했으나 결코 자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그런 회귀 불가능은 더욱 회귀에의 욕망을 증폭시킨다. 그 도저함의 사막에서 마지막 한 방울 생명수가 모래 사이로 스 며들어 버렸을 때, 마침내 우리의 모든 기억에서 자궁이 지워지는 암전 상태가 된 다. 페이드 아웃. 디 엔드. 이름하여 죽음.

 

정복수의 그림엔 항상 무엇인가 하는 인간들이 즐비했다. 50여 년의 화력을 돌이켜보면 초지일관 무엇인가 행위 하는 인간을 그렸다. 뱉고, 욕설하고, 먹고, 마시고, 싸고, 싸우고, 자위하고, 섹스하고, 거부하는 인간들. 그야말로 본능의 상태에서, 짐승과 같이 생존의 원초적인 욕망이 가득한, 생래적으로 죽음과는 거 리가 먼 듯한 살아있는 인간들의 생존경연장이자 투기장이었다.

 

그 숱한 공격적 동사형의 인간을 그리던 정복수도 이제는 그의 그림의 출발 지점인 10대 시절보다 좀 더 먼 과거를 유영해보려는 모양이다. 출생의 기표인 지문과 손금이라는 나침반을 꼼꼼히 분석하면서, 또 타고 난 눈빛과 얼굴과 성정을 참조하면서, 성장하면서 경험했던 사건들과 섭취했던 온갖 욕망을 하나 둘 해체 하며 자궁으로 가는 지도를 그리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생은 회갑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는 미래에 의 욕망과 그에 비례하는 기억의 축적이 느리게 진행되고, 그 이후에는 과거로의 회귀 욕망의 증대와 추억을 망각하는 속도가 빨라지는 생태성으로 구성된 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를 화 두로 삼았으되, 결국은 그 중간 지대인 현실에서의 번뇌와 고통과 헤맴으로 인해, 자궁으로 회귀하는 길을 찾지 못하는 것 일게다.

 

그래선가, 이번 근작들에선, 정복수 특유의 이빨, 성기 노출, 사정과 같은 이미지들은 많이 소거 됐다. 대 신에 자궁으로 가는 지도’, ‘깊은 인생’, ‘너무 깊은 생각’, ‘생각의 입’, ‘생각의 핏줄’, ‘을 찾는 방법’, ‘인간 은 무시무시한 벌레등과 같은 철학적 사유를 동반하는 제목들이 등장한다. 화가도 인간인 이상 그의 나이 에 비례해서 자기 존재성이나 내면을 반영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또 그만큼 삶에 대한 내밀한 관념 과 인식을 화면에 드러내게 된다. 정복수의 근작도 이런 경향을 여지없이 반영한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정 복수의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여전히 치열하다. 힘을 빼려는 자의, 힘을 빼는 과정에 집중하는 치열성이라고 해야 하나. 그림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채굴하고, 다시 묻고, 또 그 옆의 구멍에 천착해서 관통하고 나간 뒤 근처에서 돌아오기 위한 구멍을 다시 판다. 그림 그리기에 대한 정복수의 기본적 태도다. 버리기 위해서 버 리는 것에 더 깊이 몰두하는 습관이나 체질과 같은 태도 말이다.

 

한편, 그 치열한 자궁으로의 회귀 욕망과 기억과 기록을 더듬는 정복수의 진술은 남은 삶에의 욕망이자, 더불어서 죽음의 길을 순연하게 찾기 위해 작성하는 지도다. 정복수에게 그림은 그 지도를 제작하는 것으로 부터 그 지도에 표기하는 메모와 주의사항들을 꼼꼼하게 형상으로 확인하는 절차이기도 하고. 자궁에서 나 왔을 때부터 그의 의식에 지문처럼 새겨진 죽음에 대한 메멘토 모리를 통해 끊임없이 의심-저항-확인-수 용해온 지난 50년의 작업적 변증이, 정복수에게는 자궁으로 돌아가고픈 그의 본능과 의지의 생산 과정이었 다고 하겠다. 기실, 그게 화가의 일이다. 그가 출발해서 떠나왔던 자궁 입구를 찾기 위해 그리는 삶과, 마침 내 그곳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그리기를 멈추는 것 말이다. 그 궤적을 그림으로 기록하고 표현하는 게 바로 작가적 삶과 죽음의 표지일지니, 여적 그리고픈 인간이 많다는 정복수에게 자궁으로 가는 지도는 또 새 로운 인간 유형을 탐색하는 길을 열어 줄 것이다. 67년을 걸어온 만큼 회귀하는 길 또한 만만치 않게 길 터 이니, 그가 그릴 인간들은 아직 많이 남았을 것이다. 다만, 이제는, 격렬한 본능보다는 존재를 사유하고 탐 색하는 깊은 인간형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 유추해본다.“ 김진하(미술평론)

 

전시 개막 시간을 밝히지 않아 정동지와 오후 5시경 전시장을 찾았는데,

이미 2층 전시실은 먼저 온 분들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주인공 정복수씨를 비롯하여 장경호, 장석원, 임정희, 조준영, 한상진,

김수길, 전강호, 조해인, 이재민씨 등 많은 분이 모여 있었는데,

혼잡스러워 뒤풀이 집으로 정한 '부산식당'으로 옮겨야 했다.

 

'부산식당'에는, 전시장에서 뵌 분 외에도 최석태, 황준연, 구경숙씨도 와 있었다.

그 많은 손님들 마신 술값이나 식사비가 만만 찮을텐데,

뒤늦게 나타난 올미아트스페이스 황순미씨가 계산해 버렸다.

 

여지 껏 수많은 전시 뒤풀이에 다녀 보았으나,

갤러리 주인이 화끈하게 뒤풀이 비용 내는 곳은 처음 보았다.

"돈은 이렇게 기분 좋게 쓰면 되돌아 가는 거야!"

 

정영신사진

와인을 주는 대로 마신데다 소주까지 섞었으니, 버텨 낼 수가 없었다.

정동지를 담보로 간다는 말도 없이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사진, / 조문호

 

 

 

수염이 풍부한 노인이 보이고 그 앞에 한 젊은이가 꿇어앉아 한 권의 책을 받들고 있다. 배경은 나무가 둘러있는 석굴인 듯 하다. 그림의 오른쪽 위에 큰 한자 글씨가 세로로 “석굴수서”라고 적혀있다. 석굴을 배경으로, 한 노인이 젊은 남자에게 책을 주고 받는 광경을 그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곁에 작은 글씨로 적힌 것은 그림의 내용인데, 김유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이다. 이런 저런 책들을 참고하여 살펴보니 삼국사기에서 따다 적으면서 약간의 변개를 거쳤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 부분에서 해당하는 내용을 보자.

 

▲ 이도영 1883-1933, 석굴수서, 비단에 색칠, 85. 3x 182. 2센티미터, 1922,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초대작, 이홍근 기증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진평왕 28년에 김유신의 나이 17살이 된 때이다. 옆 나라들이 침범하는 것을 보고, 의분이 북받쳐 적도들을 평정할 뜻을 품고 홀로 중악의 석굴로 들어가 재계하고 하늘에 고해 맹세하였다. “적국들이 도의가 없어 승냥이와 호랑이가 되어 우리 강토를 어지럽히니 평안할 날이 없었습니다. 저는 일개 미천한 신하로 재주와 힘은 보잘것없으나 나라의 환란을 없애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사오니, 바라옵건대 하늘은 굽어 살피사 저를 도와주소서.”

나흘 후 홀연히 거친 베옷을 입은 노인 한 분이 나타나서 물었다. “이곳은 독벌레와 맹수가 들끓어 두려운 곳인데, 귀한 소년이 이 외진 곳에 무슨 까닭으로 왔느냐?” “어르신께서는 어디서 오셨습니까? 존함을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정한 곳 없이 인연에 따라 오고 가며, 이름은 난승이라고 한다.” 유신은 그 말을 듣고 범상치 않은 사람인 줄을 알고, 다시 절하고 나아가 아뢰었다. “저는 신라사람입니다. 나라의 원수를 보니 마음이 아프고 머리가 근심으로 가득차서, 이곳에 와 무슨 계제를 만날 것을 바랄 뿐이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어르신께서는 저의 정성을 가엾게 여기시어 방술을 일러주소서.”

 

노인은 잠자코 말이 없었다. 유신은 눈물을 흘리며 부지런히 간청하기를 예닐곱 번이나 하였다. 그제야 노인은 말문을 열었다. “그대는 아직 어린데도 삼국을 아우를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어찌 장하다 하지 않으랴.” 이윽고 비법을 주면서 다시 말하였다. “삼가 함부로 전하지 말라. 만약 의롭지 못한 데에 쓴다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을 것이다.” 노인은 말을 마치자마자 곧 떠나 2리쯤 멀어지니, 유신이 쫓아가 둘러보았으나 보이지 않고 오직 산 위에 오색빛만 찬연하였다.

 

               - 김부식 외,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앞머리에서, 이강래 옮김, 한길사,751~2쪽

 

이 열전은 조선 시대 말기에 내용이 더해져 소설로도 만들어졌다. 이도영이 태어날 무렵이었다.이정균이란 분이 지었고, 그가 사망하는 해인 1899년에 간행하였다. 이 소설은 뒤에 나온 이런저런 김유신 전기소설의 원본이 되었다.

 

이 그림을 그린 이도영은 1884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여러 곳의 군수를 지냈으며, 할아버지는 오늘날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판윤을 지냈다. 조선시대 내내 고위 벼슬자리를 차지한 8대 권문세가의 하나인 연안 이씨 문중이다. 이도영은 신식 화폐를 제조하기 위해 설립한 전환국의 분석과에서 공부하고 여러 애국계몽단체에서 활동하다가 만화를 그리기도 한, 당대 미술가들과는 분명 구별되는 남다른 행적을 보였다.

 

이 그림은 우리 근대 본격 역사화의 하나이다. 더욱이 일본 강점기에 우리 역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한 분위기에서 그려진 것이라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있다. 우리 근대 회화에서는, 이전에 소개한 이여성의 사례(최초 조선역사 회화가 이여성의 <격구>)를 제외하면 역사화라할 만한 것이 없다. 이순신, 논개의 단순한 인물초상화나, 최치원이나 을지문덕 같은 인물에 일본 옷을 입혀 그려서 오히려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하는 어처구니 없는 예만 있을 뿐이다. 이런 사정을 살피면, 일찌기 그려진 이도영의 이 그림은 더욱 돋보이는바가 있다.

 

▲ 석굴수서 부분
 

김유신의 젊은 시절 일화를 다루었다는 점 말고도 이 그림이 눈길을 끄는 요소가 또 있다. 김유신 옆에 있는 좁고 높은 탁자 위에 있는 토기와 그 뒤의 질그릇들이다. 이 그림과 거의 동시에 그려진 <고색찬연>이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기물들과 같은 성격을 띠는 소재로, 이는 이도영의 남다른 시도라 평가할 수 있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토기는, 제작연도를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는 최초의 토기이다. 이도영의 그림은 그러한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그림에 반영한 희귀한 사례중의 하나다. 일본 강점이라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런 노력은 이도영을 넘어서 대세를 이루지 않았을까?

 

이도영은 이후에 김정희가 글씨 쓰는 모습을 그리거나, 장승업이 그림 그리는 장면을 그려서 자신이 살아간 가까운 시기의 우리 문화영웅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보는 사람들에게 각인하고자 하였다. 이 또한 당시 어느 누구도 시도한 적이 없는 노력이다.

 

이도영은 젊은 시절에 시사만화와 신소설들의 표지 그림, 그리고 그 속에 든 삽화 분야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중년무렵인 1920년대 들어서는,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신라나 가야의 질그릇이나 고려 청자를 비롯한 우리 특유의 종(뒤에 조선종 내지는 한국종이라는 학명을 획득했음)을 그린 첫 화가다. 우리 눈앞에 수천년 전 조상들의 삶의 자취를 드러내며, 이민족 지배하일지라도 민족문화를 지키자고 호소하는 듯한 민족적 역사화의 선구자였다.

 

이 그림은 일본 강점기부터 1970년대 사이에 손꼽는 미술품수집가였던 이동근의 소장품이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됐다. 이를 기려서 낸 소장품 도록에 단색으로 소개되었지만 실제로 전시된 적이 없었다. 필자가 민족미술가로서의 이도영을 처음 소개하였고, 근래에 비로소 전시를 통해 잠시나마 우리 눈 앞에 드러났다.

 

그럼에도 이도영을 친일분자로 분류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그러할까?

 

지금은 고인이 된 재일 역사학자 강동진은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사>(한길사, 1980)에서 이도영이 총독부의 부름에 20차례 가깝게 오간 기록이 있다고 하였다. 병탄 전야에 벌인 그의 만평 활동(관련기사 <이것이 웬 세상이야>, 이도영의 미술행동), 앞으로 소개할 <고색찬연>을 비롯하여 간헐적으로 계속된 민족적인 그림들 등을 염두에 둔다면 그를 직업적 친일분자로 단언한 것이 과연 균형 잡힌 판단인지를 살피게 한다. 이도영에 관한 이런저런 행적을 살펴서 실체를 파악하기에 동참해 주시기를 바란다

 

미술평론가 최석태 |

[출처] 뉴스아트 (https://www.news-art.co.kr)

최석태의 WHY YOU

꼬리가 묶인 채 서로 죽이려는 야수는 왜 그렸나?

앞에서 알미늄박지에 긁어 그린 그림 가운데, 전쟁 중 저질러진 양민 학살을 고통스럽게 보여주는 그림을 이미 살펴본 바 있다. 그 그림의 화면 오른쪽에 어머니인지 아내인지 모르겠으나 큰 비중으로 그려진 여자의 얼굴이 있고, 짧고 굵은 선으로 흐르는 눈물을 표현한 것에서 나는 눈을 떼기 어려웠다. (관련기사 이중섭 <눈물>, 원통한 떼죽음을 은박지에)

 

▲ 눈물, 담배를 싸는 알루미늄 박지에 긁어서 새기고 색칠, 10x15센티미터,&nbsp; 대구 인당박물관 소장. 이중섭, 백년의 신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2016. 6. 3-10. 3, 도판 125
이렇게 처참한 동족상잔, 골육상쟁을 그린 그림이 또 있다. 

아래 그림을 보면, 두 마리의 네발 짐승이 아래위로 그려져 있다. 이들의 꼬리는 묶여 있고 짐승의 머리 부분은 사람의 상체로 설정되어 있다. 이들 사람인지 짐승인지 모를 괴물은 손에 망치와 칼을 쥐고 서로 해치려는 것으로 보여 우리를 놀라게 한다. 섬찟한 느낌이다.

 

▲ 이중섭, 꼬리가 묶인 채 서로 해치려는 괴물들, 종이에 잉크와 수채, 그림만 26x26센티미터, 소장자 모름
이중섭은 서로 해치려는 두 마리의 짐승을 그리면서 그 꼬리가 서로 묶인 것으로 연출함으로써 이들이 처한 상황을 넌지시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서로를 스스로 묶었는가? 누군가가 강제로 묶었는가? 이들은 왜 한 손에 서로를 해치는 흉기를 들고 휘두르고 있는가?

그런데 이렇게 서로 다른 짐승의 꼬리를 연결하는 발상을 한 그림이 또 있다. 그 그림은 이중섭이 1941년 6월 2일자 엽서에 그려 보낸 그림이다. 특이하게도 이 그림에 등장하는 세 마리 짐승들의 꼬리는 서로 연결되어 그려져 있고 여인이 그것을 손잡이처럼 들어올리고 있다.

 

한 방향으로 달리는 세 마리 짐승 그림이 1941년에 그려진 반면, 이번에 소개하는 서로 해치려는 두 짐승의 그림은 1950년 이후 휴전으로 전쟁이 멈춘 시기를 전후하여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들의 꼬리는 확연하게 묶여 있다. 조금만 더 잡아당기면 풀기 어려운 옭매듭이 되어버릴 것만 같다.

 

▲ 꼬리 부분이 옭매듭 직전으로 엉켜있다.
시간 차를 두고 그려진 그림들에서, 이중섭은 짐승의 꼬리를 통해 무슨 말을 하고싶었던 것일까? 해방 이전에는 평화로운 통일 조국에 대하여 희망을 가졌었는데, 해방 이후 엉켜버린 정국 속에서 걱정스럽고 실망한 마음을 표현한 것일까?

원래 그림을 다시 보자. 일견 잔인해보이는 설정 이면에 중섭은 좀 더 생각하게 하는 장치를 마련했다. 칼과 망치를 들고 서로 해하려 하는 장면이지만 둘의 얼굴 표정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민하게 한다. 그들의 얼굴 표정이 잔인한 짓을 할 때의 표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손에 망치를 든 괴물의 다른 손은 칼 든 상대편 팔을 잡으려는 듯 뻗어있으나 표정은 마뜩찮은 듯 찌푸려져 있다. 칼을 든 괴물은 상대방의 손을 피하려는 듯하다. 쌍방이 다 곤혹스러운 표정이다.

 

이 그림은 소재 말고 또 다른 점도 특이하다. 한글가로풀어쓰기로 이름을 그림의 맨 위, 그것도 가운데에 적었다. 그리고는 이름의 좌우로 네모난 종이 형태에 맞추어 테를 둘렀다.

그림에 곁들인 색칠도, 위아래 짐승들의 몸통 색은 상대방이 걸쳐입은 저고리 색과 같게 칠했다. 그런데 색칠한 방법은 다르다. 저고리는 세로로 몸통은 가로로 그려진 느낌이라서, 같은 색이지만 칠이 다르도록 구성했다. 배경은 차가운 색으로 선택해 그림 전체의 어두운 분위기를 강화하고 있다.

 

이 그림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한 내용이 있다.

나라의 절반을 꺾어 한배새끼가 서로 목을 자르고 머리를 까고 세계의 모든 나라가 어울림을 해 피와 불의 회오리바람을 쳐 하늘에 댔던 그 무서운 난리

- 함석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사상계, 1958. 8 (임헌영,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문학가 임헌영과의 대화, 한길사, 2021, 98쪽에서 재인용)

 

6. 25 전쟁이 이런 전쟁이었다고 절규하는 듯한 말이다. 함석헌의 이 말이 나오기 수년 전 어느 때에 화가인 이중섭은 이 처참한 상태를 그린 것이다.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가 당하는 이 처참함을 세계에 내놓아 증거하고 싶다는 마음을 적어보내기도 한 이중섭이었다. 

 

크지 않은 종이에 그려진 이 그림은, 분명 전시나 책자로 발표하기 위해 그린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기만 하고싶지는 않았던 이중섭이 주위 사람에게 그려준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런 그림이 좋은 바탕재료 위에 비싼 물감으로 그려진 그림보다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림의 제목은 필자가 붙인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분이 더 좋은 이름을 궁리해 내기를...

 

최석태 미술평론가 

[출처] 뉴스아트 (https://www.news-art.co.kr)

최석태의 WHY YOU

▲ 박수근,&nbsp; 벚꽃, 종이에 유채, 26x119센티미터, 1961년

 

박수근은 겨울 느낌의 화가인가? 적어도 가을 느낌을 포함한 겨울 느낌의 화가인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스무살에 그려 <봄이 오다>라는 이름을 붙여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 입선에 든 박수근에게 겨울 느낌의 화가라니? 그로부터 5년 뒤에 봄 나물을 캐는 소녀들을 그린 그림 <봄>을 그린 박수근이 아니던가! 이 소재는 1950년대 초에도 되풀이 그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수근은 나목의 화가다. 추워지면서 잎을 떨군 나무를 우리는 보통 나목이라고 한다. 불에 타거나 포탄을 맞아 죽은 나무를 고사목이라고 하지만, 이런 나무도 나목이라 한다. 그런 상태의 나무를 많이, 자주 그렸던 화가이고 등장하는 인물들도 침묵하는 분위기이니 그의 그림에 대하여 겨울 느낌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벛꽃>이라는 그림은 그 소재부터 봄에 피는 꽃을 그린 것이니 앞에서 한겨울 느낌의 화가라는 말은 분명 거짓이거나 과장일 수 있다. 그러나 봄이 왔다고 봄인가? 봄 다워야 봄이지! 이 그림은 봄꽃을 그렸을 뿐 아니라, 그려진 상태까지도 보통의 박수근 그림과는 달리 봄다운 싱그러움이 확연하다.

 

그림 전체에서 느껴지는 밝은 분위기는 물론 물감이 칠해진 느낌도 박수근의 여늬 그림과는 다르다. 방금 흰색의 회를 바른 것 같은 화면이다. 화강암 같은 재질감과 색감이 아니라, 밝은 바탕 위에 이 바탕칠이 마르기도 전에 붓이 아니라, 분명 연필로 윤곽선 긋기를 감행했다.

 

그런 뒤 충분히 마르기를 기다려 꽃과 잎에 해당하는 부분에 각기 어울리는 색깔을 발랐다. 그랬기에 색깔들은 반들반들한 바탕 위에 미끄러지는듯 발라졌다. 이 색깔들은 상당히 묽다.

 

이 그림은 1961년에 그려졌다. 그림의 윗부분에는 흰 꽃이, 그 아래 대부분은 분홍 꽃인데 모양은 다르다. 서로 종류가 다른 벚꽃으로 보이는 것으로 보아, 봄에 그려진 것이리라. 분홍 벚꽃을 그린 방식은 당시 유행하던 놀이였던 화투패에 그려진 벚꽃 그림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같기도 하다.

 

▲ 박수근,&nbsp;&nbsp;벛꽃의 부분화
 

박수근은 곧 있을 쿠데타를 모른 채, 지난 해 봄부터 펼쳐진 새로운 분위기 속에서 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4.19 공간이라고 하자. 1960년 봄, 이 벅찬 국면을 맞은 시인 김수영은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의 사진을 벽에서 떼어내 밑씻개로 쓰자고 소리 높여 노래했다.

 

이때로부터 10년 뒤인 1970년에 박수근이라는 화가를 잊기 힘들 정도로 좋은 인물로 그려낸 소설 <나목>을 써낸 박완서는 지난날을 돌아보는 글에서, 1960년 4월 이래 기쁨에 차 날마다 거리를 거닐며 쏘다녔다고 했다.

 

바로 그 한 해 전에 태어난 나에게는 박정희가 죽은 뒤, 그리고 1987년 6월항쟁의 시기가 이런 비슷한 느낌이었다. 실패하였기는 해도, 1919년 3월 만세 혁명의 다음에도 이 비슷한 분위기였을 것이다. 동학혁명의 한 시기, 전주성을 접수하여 해방했을 때도 그랬으리라.

 

일본의 강제 점령하에서 태어나 살았던 박수근의 삶에서는 광복의 시기에 잠시 그랬을 것이다. 10년도 더 지나 지긋지긋했던 이승만 독재의 그늘에서 살았던 박수근이기에 더 그랬을 것 같다. 그는 북한 치하에서 중학교 교사이면서 기초 단위 대의원이기도 했으므로, 초등학교만 나온 것으로 알려진 자신의 신상을 내세워 침묵하고 지내왔다.

 

▲ 자신의 그림 앞에 앉아 있는 생전의 박수근 화백.
 

이런 기법으로 그려진 그림은 1960년 봄의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는데, 박정희의 쿠데타로 그 봄의 분위기가 사라진 뒤에도 계속 그려졌다. 물론 그 이전부터 시작되어 날이 갈수록 정갈해져 가는 화강암 같은 재질감의 그림을 완성하려는 노력과 병행하였다. 이전의 그림에 비해 좀 더 밝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성이 빠른 이 기법은 아직은 잘 알려지지 않은 박수근의 다른 면모다.

 

이런 기법으로 그려진 그림은 그가 사망하는 1965년까지 5년 남짓 동안 대략 20점 정도이다. 그런데 그 20점은 박수근의 그림들 가운데 꽤 소외되어 있다. 이전과는 너무 다른 화풍으로 인해 박수근의 그림이 아니라는 사람도 있었고, 마지못해 박수근의 작품임을 인정하더라도 도록에 제대로 싣지 않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이 아름다운 그림들은 판로를 찾기 어려워 잘 유통되지 않았다. 그러나 박수근의 작품에는 태작이 없다. 새로운 화풍의 20점도 마찬가지이다. 고유한 화법에 회화적 요소를 좀 더 많이 가미해 조화롭게 적용한 수작이다. 희망과 즐거움이 넘실거리는 새로운 화풍의 박수근 그림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감상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최석태 / 미술평론가
[출처] 뉴스아트 (https://www.news-art.co.kr)

오늘은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한 잔 하는 날이다.

평일인데도 거리에 사람이 많은걸 보니, 코로나 퇴조에 힘입어 경기가 살아나는 것 같았다.

 

가로수 사이에 걸린 ‘아리랑 미술제’ 현수막이 그나마 문화의 거리임을 말하지만,

화랑이나 표구점 등 인사동의 대표적 상점들은 파리만 날렸다.

 

거리에는 버스킹 나선 젊은 음악가의 바이올린 곡이 애잔하게 울려 퍼진다.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기쁨'을 연주했으나 아무도 관심주지 않았다.

거리에서 공윤희, 임태종, 조준영, 김재홍씨 등 아는 분도 여럿 만났다.

 

인사동의 멋과 분위기를 맛보려면 구불구불 미로처럼 이어지는 골목으로 들어가야한다.

숨 가쁜 세월 속에서도 기와를 걷어내지 않은 천장 낮은 한옥 주막이 군데군데 둥지 틀고 있다.

 

흙 뭍은 토기나 무명화가의 그림까지 너그러이 품을 수 있는 그런 공간이다.

거친 흙벽과 창호 문살 사이로 번지는 불빛조차 포근하다.

 

아직은 고즈넉한 분위기의 술집이나 찻집들이 남아있어, 인사동 고유의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다.

주막에는 지난 시절의 낭만과 향수를 한 자락씩 깔고 앉은 예술가들이 모여 인생과 예술을 노래한다.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정적 이미지가 아니라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동적 이미지를 연출한다.

 

안국역 6번 출구의 개구멍 같은 샛길, 벽치기 골목은 언제나 취객들로 북적댄다.

담배 피울 수 있는 장소를 찾다보니, 골목자체가 술집이 된것이다.

 

이날 모이기로 한 장소도 담배 연기 자욱한 벽치기 골목의 ‘유목민’이었다.

 모이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열명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 모임을 주도하는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전강호, 공윤희, 조해인, 김명성, 

임태종, 이명희, 김수길, 정복수씨 등이 모여앉아 술잔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조준영시인이 부지런히 연락했으나, 여러 사람이 부도냈다고 한다.

그 날 새벽녘 까지 술을 마셨다는 장경호, 김구, 임경일씨 등 몇몇은 아예 집에 드러누웠단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창예헌’ 조직도 이제 한 물 갔다.

‘창예헌’의 뿌리는 2000년 가을, 정선 만지산에서 개최한 ‘동강주민들을 위한 굿마당’이 발단이었다.

 

김명성씨가 서울에서 버스 두 대에 인사동 예술가 70여명을 태워 왔는데,

행사장인 귤암분교에는 동강 지역 주민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붐볐다.

귤암리 가는 길은 차가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그때 그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한국사진굿당’이란 조직을 만들어

가을이 되면 ‘만지산 서낭당 축제’를 열었으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제반 경비문제도 있었지만, 거리가 먼 지역적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그 이후 한 동안 흐지부지하다 2013년 가을 무렵에야 새로운 조직인

‘창예헌’ 발기총회를 인사동 ‘아리랑’에서 개최한 것이다.

 

구중서, 민 영선생 등 원로작가 열여덟 분을 고문으로 모시고

150여명의 조직을 재정비한 인사동 사람들의 모태가 발족한 것이다.

 

단양 사인암과 전북 완주에서 가을축제를 열기도 했고,

인사동에서 천상병시인을 추억하는 ‘인사동 백년을 걷자’ 축제도 열었다.

 

그러나 이사장을 맡은 김명성씨 사비에 의지해 모든 것이 이루어지다보니, 조직 결집력은 떨어졌다.

결국 김명성씨가 운영하는 ‘아라아트’가 중국자본에 넘어가자 ‘창예헌’ 조직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 이후부터 정기적인 인사동 모임이 없어, 조준영시인이 발벗고 나선 것이다.

모든 술값을 김명성씨가 부담하던 것에서 벗어나, 참여한 분에게 만원씩 거두기로 한 것이다.

 

그 돈으로 술값 내기란 턱없이 부족하지만, 참여의식을 높이기 위한 조준영씨의 고육지책이었다.

긴 세월 김명성씨가 부담해온 탓에 다들 공짜에 길들었을까?

 

이 날도 십여명에게 받은 돈으로 43만원을 계산하는 일이 벌어졌지만, 조준영씨가 떠 안았다.

술 자리가 파할 즈음에야 이인섭선생도 나타났고, 지방 촬영 갔던 정영신씨도 나타났다.

'인디프레스' 개막식에 가서 술이 그나하게 취한 서인형씨와 최석태씨도 나타났고,

노광래씨 까지 등장했으나 모자라는 술값 정산에는 도움되지 않았다.

 

인사동 모임에 활력이 생기려면 젊은 피가 수혈되어야 하는데, 다들 너무 늙어 버렸다.

연락하는 조준영씨도 환갑을 지난지가 한참 지났고,

여자라고는 씻고 벗고 하나 뿐이라는 연극배우 이명희도 벌써 할머니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도 노래 부른 대폿집 주모역은 결국 하지 못할 팔자인 것 같다.

 

대폿집  마담이 아니라 대폿집 할멈이면 어떤가?

인사동 술꾼들 바가지 씌우려면 아무래도 할멈이 제격이지 않겠는가?

나 역시 힘이 딸려 벽치기 골목에서 벽치기도 못 칠것 같다.

어즈버 가는 세월 누가 잡을 수 있겠나?

 

사진, 글 / 조문호

 

귀로, 귀가, 고목과 세 여인 등 다양한 제목으로 소개된 작품
배경, 구도, 서명 위치까지 어머니의 길을 향해 배치

▲ 박수근 귀로, 나무와 세 여인, 천에 유채, 41. 5x 79.5센티미터, 1962, 개인 소장. 흔히 '귀로'라고 하지만, '귀가' 혹은 '고목과 세 여인'이라고 붙인 곳도 있다.
 

눈이 내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화면 중간을 차지하고 있는 헐벗은 나무 뒤로 길을 걷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땅도 하늘도 구분이 되지 않을뿐더러 온통 뿌옇다. 보통의 박수근 그림과 달리 이 나무는 그림의 아랫변을 땅으로 삼아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나무 아랫부분 밑둥과 가지의 윗부분은 박수근이 잡아낸 장면의 바깥으로 뻗어 있다.

 

나무 뒤로는 머리 위에 무언가를 이고 있는 세 여인이 걷고 있다.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약간은 지쳐 보인다. 여인네들은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함지 같은 것을 머리에 얹었으나 위가 볼록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팔 것을 다 팔아 거의 비어버린 함지를 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하루가 저물 무렵, 눈이 약간 오는 때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 같다.

 

▲ 부분화. 나무의 주기둥 한가운데 앞쪽으로 뻗은 가지들이 모두 잘려 있다.
 

나무줄기 한가운데에 크고 작은 가지들이 나뉘어 뻗어간다. 그런데 앞부분에 가지들이 조금만 남은 상태로 잘려져 있다. 굵기로 보아 어느 정도 자란 뒤에 잘려진 것같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더니, 바람 잦아지라고 위로 뻗는 가지 세 개만 남겼을까?

 

나무의 전체 모습이 옆으로 누워 있는 것으로 보아, 순탄하게 자랐을 것 같지는 않다. 이 나무 곁을 지나가는 아낙네들처럼 어려운 삶을 살았던 것일까? 해를 맞으려 왼쪽으로 향한 가지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아낙들은 해를 등지고 걷고 있다. 눈 내리는 흐린 날이 아니었다면 앞쪽으로 그림자가 있었을 것이다.

 

박수근은 나무를 가운데 두고, 공간이 넓은 왼쪽에 두 사람 오른쪽에 한 사람을 배치했다. 왼쪽부터 각각 노랑, 빨강 그리고 검정 저고리를 입혔는데, 이 저고리 색들만이 이 그림에서 눈에 띄는 색깔이라고 할 수 있겠다.

 

▲ 부분화. 열 번쯤 덧그려 입체감을 만든 화면 사이로 다양한 색이 보인다
.

거의 회갈색인 전체 화면에서 검다시피 한 나무와 세 사람의 옷 빛깔 만이 조금 눈에 띄는 담담한 색조의 그림이다. 이를 미술평론가 박용숙은 배경을 색채의 장식으로 메꾸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래서 생긴 것이 보는 사람의 상상속에서 넓게넓게 펼쳐지는 공간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많은 색을 볼 수 있다. 박수근은 이 많은 색이 전체 색조를 넘어서지 않으면서 은은하게 드러나도록 수천 번 붓 작업을 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어둡지만 밝고, 보일 듯 말듯 수많은 색깔만큼이나 많은 감정을 끌어올린다. 그러면서도 차분할 수 있는 것은 작가가 수천 번의 붓 작업으로 마음을 달래주고 있기 때문이다.

 

간격을 달리하였지만 세 사람을 마치 줄 세우듯 배치했고, 화면 아랫변에서는 약간 올려 그렸다. 수근의 다른 그림과 달리, 발이 닿는 부분에 아무런 표시를 하지 않고 배경과 균질하게 처리하였다. 죽은 상태인지도 모르는 나무를 지나, 눈 내리는 으스름에 세 사람이 가는 길이 끝없이 적막해 보이게 하기 위한 것 아닐까? 길은 이미 지나온 길을 포함하여 앞으로 더 멀리 어디론가 이어질 것 같은 느낌이다. 나무와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균질하게 처리함으로써 생긴 심리적 공간이다.

 

▲ 부분화, 나무의 주 기둥 바로 왼쪽에 박수근 화백의 서명(흰색 화살표)이 보인다.
 

그는 여기에 더해 이 그림에만 있는 특징이라 할 조처를 덧붙였다. 그림을 다 그린 다음 써넣는 이름은, 보통 그림의 아래이거나 어느 쪽이든 귀퉁이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세 사람의 발걸음이 이어지면서 툭, 채일 수도 있는 위치에 적어놓았다. 아주 드문 예다. 이 그림의 전체 구도는 이 이름쓰기(서명)의 위치와 더불어 특이한 모습이다.

 

박수근은 1960년에 일어난 학생혁명 이후, 전에 없던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 작품은 새로운 그림을 그리던 시기인 1962년에 그려졌다. 하지만 칠하고 말리고 그 위에 다시 칠하고 말리는 일을 되풀이하는 박수근 특유의 화법에서 나오는 질감과 색감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그 결과는 흔히 화강암이라고 부르는 쑥돌의 느낌이다.

 

▲ 수석 전문가인 설화취선님의 탐석(探石) 블로그(m.blog.naver.com/wlstnddjs)에서 제공한 다양한 쑥돌 사진. 좌상단의 쑥돌은 이끼가 많이 낀 상태이다.
 

화가는 아들에게, 아비가 추구하는 색감과 질감은 이런 것이다 하며 쑥돌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수근에게는 구현하고자 하는 명확한 이미지가 있었고, 이를 한평생 추구했던 것이다.

 

박수근의  이 그림에 대한 평은 많지 않다, 그런 가운데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박수근 작품 중에서도 걸작에 속하는 작품이라고 했다. 동의한다.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 여인들이 아침저녁으로 오가는 길이 이제는 그쳤겠지만, 그 당시에는 얼마나 하염없이 길게 이어졌을까! 아이들과 지아비를 먹여살리기 위해 그렇게 이어진 애씀이 그들의 일상을 위험에서 건져내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 그림의 가로 길이는 80센티미터이다. 박수근의 작품들 가운데 꽤 큰 편이다. 어느 정도인지 실감하려면 양손의 손바닥을 펴서 손목을 굽히지 않고 서로 붙여보자. 그 길이와 비슷하다. 수근은 길고 긴 어머니의 길을 작품의 크기, 색, 구도, 심지어 자신의 서명 위치까지 모든 것을 동원하여 표현했던 것이다. 


나에게는 이 그림을 비롯해 박수근의 그림에 많이 등장하는 머리에 무언가를 인 여인을 보면 바로 떠오르는 여인이 있다. 광복 직전에 정신대를 피하려고 16살의 나이에 노총각이던 내 큰 외삼촌과 맺어졌다가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피폐해져 늘 아팠던 남편을 대신해 물고기를 사다 새벽부터 온 산중턱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팔아서 가족을 먹여 살렸던 키 크고 고우셨던 나의 큰 외숙모님이다. 내 주변 친지들 가운데 가장 많이 고생하신 그 분을 어찌 잊으랴.


최석태 / 미술평론가 
[출처] 뉴스아트 (https://www.news-a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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