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파일을 정리하다 오래된 사진 몇 장을 찾았다.

그 중 한 장면은 윤락녀가 발로 적음을 가로막는 사진인데, 잠시 놀다 가라는 장난스러운 호객행위였다.

적음은 특유의 사람살려~”를 연발하며 오히려 즐거운 비명을 질러댔다.

돈 한 푼 없는 땡초스님이란 것이 뒤늦게 알려지며 적음을 향한 일체의 호객행위는 사라졌지만,

은근히 즐기던 적음은 한편으로 서운한 것 같았다.

 

적음 최영해시인

서울의 대표적 홍등가를 기록하기 위해 청량리588에 방을 얻어 살던

 85년도 사진을 보니 당시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항상 빵모자를 쓰고 다녔으니, 동내 사람들이 스님인줄 알 리가 없었다.

아가씨가 "당신 직업이 뭐냐?"고 물으면월간 빠주간으로 청량리 특집 취재로 잠입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적음과 한 방을 쓰게 된 것은 내가 전농동으로 짐을 옮긴지 며칠되지 않아서다.

함께 머물며 글을 쓰겠다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동반자가 생겨 힘이 생겼는데, 그것도 잠깐일 뿐 허구한 날 글은 안 쓰고 민폐만 끼쳤다.

단골식당의 밥값이야 당연히 감당하지만, 내가 준다며 외상 진 술값이 한두 푼이 아니었다.

천만다행인 것은 화대는 외상이 되지 않는 점이다.

 

전농동588을 방문한 김용복, 유성준 사우와 한담을 나누고 있다.

적음 외에도 나의 작업에 관심을 가진 동료들이 가끔 방문하면, 술집으로도 활용하는 찻집에 안내했다.

그곳은 윤락업소에 바로 가기 민망한 남정내들이 잠시 들려 차 한 잔 마시며

탐색하는 장소로 활용되는데, 유일하게 적음만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돈이 없는 걸 알기도 하지만, 장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월간사진편집장으로 근무할 무렵이라 낮에는 없을 때가 많았다,

그 역시 인사동이나 다른 곳에서 술 마시며 떠돌다 밤 늦게 모습을 드러냈고,

때로는 술이 취해 새벽녘에 들어오기도 했다.

약 한 달 가까이 그런 생활을 반복하다 봉화 청량사로 훌쩍 떠나버렸다.

 

방에 모셔둔 원고지 뭉치는 그대로 두고 떠났는데, 글 한자 쓰지 않은 백지였다.

 좋은 글을 기대했으나, 연이 닫지 않는 것 같았다.

세상을 떠난 지금 생각하니, 그런 기행마저 그리움이 되어버렸다.

신촌이나 인사동에서 벌인 기행의 연장선인 셈이다.

 

85년 동아미술제 대상작품 / 조문호의 '홍등가'

내가 청량리를 찾게 된 것은 1983년 어느 날 동아일보에 실린 동아미술제공모 요강을 보면서다.

당시 '동아미술제'의 사진부문 공모는 2년 전에 주제를 공고해 합당한 작업의 시리즈로 출품하는 형식인데,

그 때 내걸었던 주제가 바로 직업인이었다.

당시는 직장 때문에 자유로이 찍을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아 퇴근 뒤 찍을 수 있는 대상을 찾다보니,

밤일하는 직업여성 청량리 윤락녀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렇게 찍은 사진을 출품해 대상을 받았으나, 난감했다.

실상도 제대로 모른 채, 당사자의 동의 없이 찍었기 때문이다.

마침 상금에다 대상 작품까지 팔아, 빈 집에 소 들어 온 격이었다.

그 돈으로 588에 방을 얻어 본격적으로 작업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588로 들어가 작업한 몇 년 동안 가족은 물론, 경제적 육체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들과 친해지고 소통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과 관계를 맺는 방법 밖에 없었다.

성병으로 '청량리 보건소'를 드나들었고, 때로는 불량배들에게 얻어맞기도 했으나 포기할 수 없었다.

 

'전농동588'; 전시 팜프렛 표지

그렇게 작업한 사진을 모아 90년도에 전농동588번지전시를 열었으나 실망했다.

당사자들이 전시회에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벌떼처럼 달려든 언론의 폐해였다.

사회 멸시에서 벗어나 사람대접 받으려 작업에 동참했으나, 그들의 삶보다 선정적인 기사로 도배했다.

청량리 윤락가가 사라질 때까지 기록하려던 당초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요즘 동자동에 살며 철저하게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그 이후 30여 년 동안 서랍에 잠들던 필름을 꺼내 사진집으로 엮은 것이 눈빛에서 발행한 청량리588’이다.

적음스님은 열반에 들었고, 588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으나 사진만 남은 것이다.

 

지금쯤 중년이 되었을 그 시절 여인들의 안녕을 빈다.

 

사진, / 조문호

 

눈빛사진가선 시리즈 11호 '청량리588'사진집 표지 / 가격12,000

 

'프로젝트 장에 가자 2' 두 번째 기획전 정선에서 열려..

 

M이코노미뉴스 김미진 2015.07.17

 

 

다큐부부사진가의 5일장 사랑하기 사진전이 열린다.

 

오일장 사랑하기 사진캠페인 프로젝트 장에가자2’는 오랜 세월에 걸쳐 전국오일장 522개를 기록한 정선의 다큐 부부사진가 정영신과 조문호의 서울전시 장에가자에 이은 두 번째 기획전이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정영신의 추억의 장터풍경과 조문호의 새로운 장터문화를 형성한 정선아리랑시장 사진들은 향수에 젖게 하는 어제와 신바람 나는 오늘의 장터문화를 함께 볼 수 있는 기회다.

 

전시관계자는 전통시장 활성화에 기여하기 위해 마련된 이번사진전에서 오일장을 사랑하는 관람객들을 대상으로 초상사진 찍어주기 퍼포먼스도 함께 진행하게 된다면서 전시 작가가 직접 촬영해 주는 장터 추억 만들기퍼포먼스는 또 다른 정선의 문화체험이 되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부부 다큐사진가 전시회는 추억의 장터풍경'정선아리랑시장의 신바람이라는 주제로 열리며 전시일정은 오는 20-815일까지다. 전시공간은 정선시외버스터미널 '문화공간'’ 지하1층 전시실이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작가가 직접 사진을 찍어주는 초상사진 퍼포먼스도 진행된다.

 

행사 기간 동안 전시장 입구에 간이 스튜디오를 설치하여 전통시장을 사랑하는 관람객 모두에게 초상사진을 무료로 촬영해 주고 즉석에서 프린트도 해주는데 촬영일자는 720, 22, 25, 26, 27, 81~2, 7~9, 12, 15~17일이다. 촬영은 매일 오후1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한편, 정영신 작가는 지난 30여 년간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5일장 522개 장터를 기록한 사진가이며 소설가로 개인전 "정영신의 시골장터"(정선 사진굿당), '정선아리랑제 설치사진전', '정영신의 장터'(서울, 덕원갤러리), '장에가자'(서울, 아라아트) 및 다수의 단체전을 개최했다.

2002년 진선출판사에서 '시골장터이야기', 2012년 눈빛출판사 사진아카이브 '한국의 장터', 2015년 눈빛출판사의 '전국오일장 순례기'를 출판했으며 농민신문에 '정영신의 장터순례'2년간 연재했다. TBN교통방송에서 '정영신의 장터 속 이야기'2년간 방송한 바 있다.


조문호 작가는 30여 년간 사회 환경을 기록해 온 다큐멘터리사진가로 '동아미술제''아시안게임기록공모전'에서 각각 대상을 수상하였으며 '전농동588번지', '87민주항쟁', 동강백성들, '두메산골 사람들', '인사동 사람들' '장날, 그 쓸쓸한 변두리 풍경', '청량리 588'등 열여섯 번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저서로는 '동강 백성들' 포토에세이집, '두메산골 사람들' 사진집, '인사동 이야기' 사진집,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사진집, ‘전농동588’사진집 등을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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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부부사진작가의 5일장 사랑하기 '장에가자Ⅱ'전

 

정영신의 '추억의 장터 풍경', 조문호의 '정선아리랑시장의 신바람'

 

[서울문화투데이 / 강다연기자]

정영신작 장수장,1991년

 

장터 문화의 어제와 오늘을 함께 보는 다큐 사진전

 

전통 오일장을 집요한 애착으로 돌아보고 기록하는 사진작가 부부 정영신(58) 씨와 조문호(69) 씨의 장터 사진 전시회가 오는 20일부터 8월 15일까지 정선버스터미널 문화공간에서 열린다.

 

이들 부부는 정선에 거주하며 오랜 세월에 걸쳐 전국 오일장 522개를 기록해왔다.

 

정영신 작가의 '추억의 장터 풍경'에선 시장의 어제를, 조문호 작가의 '정선아리랑시장의 신바람'에선 새로운 시장문화를 만들어가는 오늘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오일장 사랑하기 사진 캠페인 '프로젝트 장에 가자Ⅱ'는, 이들의 서울전시 '장에 가자'에 이은 두 번째 기획으로 이번 전시는 정선문화원이 주최했다.

 

작가가 직접 초상 사진을 찍어주는 '장터 인증샷' 이벤트도

 

프로젝트 장에 가자 현장'에선 희망자에게 초상사진을 찍어주는 이벤트도 연다. 오는 31일(금)~8월 2일(일), 8월 7일(금)~8월 8일(토), 8월 12일(수), 8월 15일(토) 오후 1시~6시까지, 전시 작가가 직접 촬영해주는 '장터 추억 만들기' 퍼포먼스는 정선여행의 또 다른 소중한 문화체험이 될 것이다.

 

정선문화원 관계자는 "빠름, 편리함, 개인주의로 치닫는 현대문명에서 전통시장 활성화는 희망적 대안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작가 소개>

정영신 30여 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오일장 522개 장터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사진가이자 소설가로서, 개인전 '정영신의 시골 장터', '정선아리랑제 설치사진전', '정영신의 장터'(서울, 덕원갤러리), '장에 가자'(서울, 아라아트) 및 다수의 단체전을 열었다. 저서로는 <시골 장터 이야기>(진선출판사), <한국의 장터>(눈빛 아카이브), <정영신의 5일장 순례기>(눈빛)가 있다. 농민신문에 "정영신의 장터 순례"를 2년간 연재했고, TBN 교통방송에서 "정영신의 장터 속 이야기"를 2년간 방송하기도 했다. 

조문호 30여 년 동안 사회 환경을 기록해 온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동아미술제'와 '아시안게임기록공모전'에서 각각 대상 수상. '전농동 588번지', '87민주항쟁', '동강백성들', '두메산골 사람들', '인사동 사람들', '장날 그 쓸쓸한 변두리 풍경' 등 열 여섯 번의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저서로는 <동강 백성들> 포토 에세이집, <두메산골 사람들> 사진집, <인사동 이야기> 사진집,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천상병 사진집, <전농동 588> 사진집 등을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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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문화원, '오일장 사랑하기' 사진전

 

【정선=뉴시스】홍춘봉 기자 

 

 

 

 

 강원 정선문화원(원장 윤형중)은 20일부터 오는 8월 15일까지 정선터미널문화공간에서 '프로젝트 장에 가자 2' 다큐부부 사진가의 5일장 사랑하기 사진전 전시회를 연다고 19일 밝혔다.

오일장 사랑하기 사진캠페인 '프로젝트 장에가자 2'는 오랜 세월에 걸쳐 전국오일장 522개를 기록한 정선의 다큐 부부사진가 정영신과 조문호의 서울전시 '장에 가자'에 이은 두 번째 기획전이다.

정영신의 '추억의 장터풍경'과 조문호의 새로운 장터문화를 형성한 정선아리랑시장 사진들은 향수에 젖게 하는 어제와 신바람 나는 오늘의 장터문화를 함께 보여주고 있다.

전통시장 활성화에 기여하기 위해 마련된 이번 사진전에서 오일장을 사랑하는 관람객들을 대상으로 초상사진 찍어주기 퍼포먼스도 함께 진행할 예정이다.

특히 전시 작가가 직접 촬영해 주는 '장터 추억 만들기' 퍼포먼스는 또 다른 정선의 문화체험이 될 전망이다.

자세한 사항은 정선문화원 홈페이지(www.jscc.or.kr) 또는 전화(033-562-5471)로 문의하면 된다.

casinohong@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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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문화원, ‘5일장 사랑하기’ 사진전 개최

 

 

[정선=참뉴스] 이태용기자

 

 

 

강원 정선문화원(원장 윤형중)은 오는 20일부터 8월 15일까지 정선터미널 문화공간에서 ‘프로젝트 장에 가자 2’ 다큐부부 사진가의 5일장 사랑하기 사진전 전시회를 개최한다.

5일장 사랑하기 사진캠페인 ‘프로젝트 장에가자 2’는 오랜 세월에 걸쳐 전국 5일장 522개를 기록한 정선의 다큐 부부사진가 정영신과 조문호의 서울전시 ‘장에가자’에 이은 두 번째 기획전이다.

정영신의 ‘추억의 장터풍경’과 조문호의 새로운 장터문화를 형성한 정선아리랑시장 사진들은 향수에 젖게 하는 어제와 신바람 나는 오늘의 장터문화를 함께 보여준다.

전통시장 활성화에 기여하기 위해 마련된 이번 사진전에서 5일장을 사랑하는 관람객들을 대상으로 초상사진 찍어주기 퍼포먼스도 함께 진행된다.

정선문화원 관계자는 “전시 작가가 직접 촬영해 주는 ‘장터 추억 만들기’ 퍼포먼스는 또 다른 정선의 문화체험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leegija@chamnews.net




 

 

프랑스의 니엡스가 처음 사진 인화에 성공한 때는 1826년. 니엡스를 만나 다게르는 이후 은판 감광제를 발명하여 빠르고 실용적인 사진 제작법을 보급했다. 당시 사진은 조물가 만들어낸 위대한 발명품이라는 평을 들었다. 화가들은 더 이상 회회가 발붙일 곳이 없다고 괴로워했다. 이스트먼에 의해 롤필름을 사용하는 카메라가 나오면서 빠른 속도로 사진기가 보급되기도 했다. 그 뒤 사진은 기록이 됐다. 개인의 기록은 최근 들어 놀라운 위력을 발휘한다. 에레즈 에이디든과 장바티스트 미셸이 지은 <빅데이터 인문학 진격의 서막>에는 2013년 4월 미국 보스턴 마라톤 대회 결승점에서 벌어진 테러의 범인을 검거한 이야기가 나온다.

우연히 찍힌 고해상도의 용의자들 사진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미 우리의 삶이 의도치 않게 기록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다 보니 기록은 사생활 침해라는 어두운 그늘도 지니게 했다. 특히 요즘 아이들은 사진에 생활의 모든 것을 담아내고 있다. 교실에서 필기 대신 칠판을 그대로 찍고, 친구들과의 일상생활도 사진으로 남겨둔다. 심지어 전혀 모르는 사람의 우스은 모습도 아무렇지도 않게 찍어둔다. 친구에게 삭제를 부탁하고 싶지만 그러는 친구가 주변에 없기 때문에 자신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진의 양면성을 보지 못한 결과다. 기록으로 남는 사진 한 장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생각하지 않는다.

봄과 겨울 사이 새봄의 출발을 알리는 봄비가 시나브로 내리고 있다. 내리는 빗물 사이사이로 그리운 얼굴들이 스며들고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를 하고 싶다. 해피 클래식. 알함브라 궁전의 회상을 클래식 기타로 연주해 본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시절부터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클래식 기타리스트 고 배영식 선생님으로부터 6년 동안 기타를 배웠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너무너무 행복하고 평화스런 시절이었다. 낮에는 구두닦이와 연탄배달, 아이스케키 장사 등으로 바쁘기만 했다. 밤에는 야간중학교를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다시 그렇게 살아라고 해도 아찔하다.

조문호 사진작가는 2015년 1월 부인 정영신(57)씨와 전국 장터 사람들을 찍은 사진전을 차렸다. 지금도 서울 인사동과 전국 장터들을 오가며 군상들을 담는다. 젊을 적부터 음악다방, 주점 등을 하며 자유인으로 살았고 대가 최민식의 작품에 이끌려 다큐사진에만 탐닉했다. 가산을 거덜 내는 대가도 치렀지만,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며 낮은 자들의 삶을 투시하는 도리를 배웠다. 항상 바닥을 생각하는 그 겸손한 시선 덕분에 80년대 풍속생활사의 가장 인상적인 기록이라 할 <청량리 588>이 나올 수 있었다. 작가는 사진 사진들을 추려 올해 2월 25일부터 3월 10일까지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전시판도 벌인다.

80년대 중반 서울 전농동 588번지. 청량리역 사창가 여성들과 동고동락했던 조문호 사진가(68)는 자신이 지켜본 30여년 전 청량리 풍경을 하나하나 렌즈에 새겨넣었다. 588의 공간 풍경을 작가가 최근 사진집 <청량리 588>(눈빛)을 출간하며 되살려냈다. 85년 동아미술제에 선보였지만, 대부분 처음 공개되는 것들이다. 1984-1988년 청량리 사창가를 세밀화처럼 그려낸 기록이고, 겉과 속이 달랐던 5공화국의 사회적 풍경이기도 하다. 작가의 시선은 줄곧 그곳 인간 군상들의 표정과 움직임을 쫓는다. 강퍅한 2층 벽돌 슬래브 쪽방 건물들 속에서 과로와 슬픔에 찌든 사창가 여성들의 고단한 얼굴과 주름진 알몸, 앳된 초보 성노동자의 단아한 얼굴 등이 휙 문 앞을 스쳐가는 남자들의 실루엣과 얽힌다.

조문호 사진작가는 지난 1978년부터 부산시 중구 남포동에서 우연적인 필연, 필연적인 우연으로 만났다. 그야말로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슬프고도 기쁜, 불행에서 행복한 사진여행으로 만났다. 접객실에서 여인들은 다 해진 의자에 앉아 남자들의 주문을 기다린다. 그들의 앞 벽면에 있는 밀대걸레와 연탄보일러 탱크 등은 구질구질하지만 엄숙한 소품과도 같다. 조 작가는 재개발의 광풍이 몰아친 2012년 이후, 대형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선 청량리에 30여년 전 이런 풍경이 있었다는 사실을 날 서지 않은 사람살이 장면들로 보여준다. 평론가 이광수씨는 사진집에 실은 글에서 작가는 윤락녀들이 아니라, 그들이 사는 시공간에 존재하는 사람을 기록한 것이라고 말한다.

사라져가는 작은 이들의 세상을 기록하는 조문호 사진작가. 소외라는 이름의 이데올로기를 말하려 하지 않고 그 속에 담긴 우리와 같은 사람을 말하려 하지 않고 그 속에 담긴 우리와 같은 사람을 말하려 하는 사실.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눌변, 그것이 조문호 사진의 완성도를 높이는 힘이다. 사진은 우리 시대의 증언이며 동시에 기록이다. 역사의 현실 앞에서 카메라로 영혼의 시를 나는 쓰고 있다. 슬픔의 힘으로 눈물의 힘으로 기록하고 증언하고 싶다. 나는 사진이다. 나는 그림이다. 나는 노래다. 조문호의 청량리,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권태원 / 시인. 사진가

010-2624-8440
ktw7519@hanmail.net
www.mariasarang.net/kwontw


최근 출간된 사진집 ‘청량리 588’에 묶인 사진들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조문호(68)씨가 찍은 1984~88년 서울 전농동 588번지 성매매 업소 밀집지 풍경이 담겼다. “세상은 성매매 여성들더러 더럽다 하지만 그들은 빈곤하고 달리 돈을 벌 수단이 없을 뿐”이란 게 조씨의 말이다. 거리에 의자를 내놓고 다리를 꼰 채 앉아 있는 성매매 여성들을 찍은 조씨의 사진. 조문호씨 제공


나쁜 짓은 강제지 매매가 아니다. 오죽하면 성-몸을 팔까. 생계는 모질고 시장은 비정하다. 언짢다. 여전히 인권이 사치인 그들의 실존이, 여성한테 들씌워진 차별ㆍ혐오 이중 굴레가.

 

 

[정희진의 낯선 사이]성적 자기 결정권과 무관한 성

결혼 제도 바깥의 성에 대한 규제는 국가가 가족에 어디까지 개입할 것인가의 문제다. 최근 ‘간통죄’(이상한 단어다) 위헌 판결은 이 법이 가족을 보호하는 데 더 이상 효력이 없음을 인정한 것 같다. 국가에 가족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나라처럼 사회복지 비용을 전적으로 가족 내 여성의 성역할 노동으로 떠넘기는 사회에서, 가족은 가장 안전한 세원(稅源)이다.

우리는 미국과 달리 배우자의 ‘외도’(더 이상한 단어다)가 가정을 파괴하지 ‘않는다’. 가족이 친밀한 공동체라기보다는 자녀양육, 입신양명의 단위로 도구화되었기 때문에 혼외 사랑은 가족 붕괴의 범퍼다. 집 밖에서의 친밀감으로 내부의 갈등과 지겨움을 견뎌내는 것이다. 이번 판결은 개인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보호해서가 아니라 가족 해체에 대한 국가의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준 예다.

성적/자기/결정권은 자유에 관한 권리가 아니다. 무엇이 성적인 것인지, 나는 누구인지, 결정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근대 인문학을 총동원해도 규명하기 어려운 문제다. 이 단어가 출현한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성적 자기 결정권’은 시민권 운동에 이은 1970년대 미국의 성 해방 투쟁에서 등장했다. 이 권리는 그간 성적으로 억압되었던 여성과 동성애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성애자 남성은 5000년 동안 ‘해방’되어 왔기 때문에 애초부터 논외였다. 일반 남성에게 성적 자기 결정권은 권리가 아니라 기득권이다.

이후 1990년대 초 한국 사회. 법정에서 “나는 사람이 아닌 짐승을 죽였어요”를 외친 어린이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성폭력특별법 제정 운동에서 성적 자기 결정권은 중요한 개념이었다. 여성의 성을 순결 차원으로 보는 현실에 대한 저항이었다.

특별법 이전에도 처벌법(소위 정조에 관한 법)이 있었지만, 이때 성폭력은 여성 개인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 아니라 순결을 빼앗는 것을 의미했다. 여성의 성은 자신의 몸에서 분리되어 남성들 사이에서 ‘뺏고 빼앗기는’ 대상, 즉 남편, 가족, 국가의 소유물이라는 인식이다.

이처럼 성적 자기 결정권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당연한 권리가 아니다. 모든 자유가 그렇듯 타인의 권리와 충돌한다. 이 때문에 다른 인권 개념처럼 약자의 권리일 때만 의미 있는, 상황에 따른 권리다. 간통죄, 성매매 모두 성적 자기 결정권과 무관하다. 성매매방지법이 시행된 2004년에도 논란은 대단했다. 여성의 몸을 구매하는 것을 인권(행복 추구권)이라고 주장한 남성들, 생존권 차원에서 합법화를 요구한 일부 여성들, 성산업의 심각성과 여성에 대한 폭력 현실을 지적한 여성들이 있었다. 문제는 대화가 불가능한 현실이다. 남성은 생계 차원에서 성 판매를 하지 않는다.

남성들 간의 차이는 보편적인 ‘계급 문제’로 인식되지만, 여성들 간의 차이는 ‘여성 문제’로 치부된다. 남성 간의 계급투쟁은 당연시되지만 여성에게는 ‘자매애’가 강요된다. 성산업에 종사하지 않는 여성이 관련 발언을 하면 내용과 상관없이 남녀, 여성주의자, 종사자 모두에게 비난받는다. 언제나 당당한 집단은 구매 남성들이다.

10여년 전 여성부나 현재 여성가족부를 포함한 성매매 반대 입장의 주요 내용은, 당시 여성부의 표어대로 “성을 사고파는 것은 범죄입니다”다. 나는 이 문구에 늘 당황한다. 성매매가 범죄인 것은 성을 매매해서가 아니다. 성매매는 성별, 성차별 제도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정권이 아니라 여성 인권 문제다. 성(몸) 매매가 왜 불법인가? 누구나 노동과 임금을 교환해서 먹고산다. 남녀가 같은 일에 종사해도, 여성이 ‘더 파는 것’처럼 보이는 성차별이 있을 뿐이다. 손발, 머리 등 몸의 어느 부분을 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어떤 이들은 ‘지식인’이고, 어떤 이들은 ‘노가다’로 분류된다. 거듭 강조하는 바, 성매매는 매매가 아니라 성별이 문제다.

너무 비대하고 괴이해서 국제사회에서도 특이한 사례인 한국의 성산업 규모까지 문제 삼을 능력은 없다. 다만 찬반 주장 이전에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구매자와 판매자가 압도적으로 남녀로 나뉜 직업이 성매매 말고 또 있는가. ‘창녀’와 ‘창남’은 같은 지위의 단어인가. 같은 인구수와 역사를 갖고 있는가. 성매매 제도는 여성 전반을 성적 낙인 속에 가둘 수 있는 여성 혐오의 시작이다. 왜 이 직종은 자영업이 힘든가. 왜 인신매매가 흔한가. 왜 기술이나 지식, 근무 연수가 아니라 나이가 소득을 좌우하는가.

성매매는 자기 결정권과 무관하다. 남녀의 성에 대한 이중 잣대에서 출발하는, 인권의 보편성에 대한 가장 오래된 질문이다.


[경향신문] 정희진 / 여성학강사

 

 

 

[양선희의 시시각각] "최고 악질 포주는 나라다"


“최고 악질 포주는 나라다.” 어느 집창촌 여성의 말이다. 대한민국은 건국 이래 성매매를 법으로 금지했다. ‘성매매 특별법’ 이전에는 ‘윤락행위 등 방지법’이 있었다. 성매매 특별법에선 인신매매 등 강제 성매매의 경우엔 피해자를 보호하고, 성매수자인 남성도 처벌한다. 하지만 과거엔 성매매 여성들만 불문곡직하고 처벌했다. 성매매 여성들은 툭 하면 단속에 걸려 벌금을 바치니 나라가 악덕 포주라는 거다. 법으로만 보자면 성매매 여성에겐 ‘성매매 특별법’보다 ‘윤락행위 등 방지법’이 훨씬 가혹했다.

 그럼에도 성매매 여성들이 현행법에 훨씬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건 법 자체의 문제보다 ‘생계형 성매매’에 대해 가혹해진 환경 때문일 거다. 과거 나라는 성매매에 대해 이중적이었다. 법으론 금지하면서도 집창촌은 번성했다. 보건소들은 주기적으로 여성들의 위생검사를 해줬고, 미군부대 주변의 성매매 여성들에겐 이 법을 적용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선별적 단속으로 벌금을 거둬들였고, 그 안에서 벌어졌던 착취는 적당히 묵인했다. 성매매산업은 그렇게 위법과 묵인 사이를 교묘하게 오가며 인신매매까지 일삼을 정도로 악랄해졌다.

 2000년 종암경찰서에 김강자 전 서장이 부임했던 때를 기억한다. 그는 지금 생계형 성매매 여성들을 위한 ‘제한적 공창제’를 주장하지만 당시엔 ‘성매매와의 전쟁’이 뜨거운 아이콘이었다. 그는 관내 대규모 집창촌이었던 미아리 텍사스와의 전쟁을 선포했고, 한동안 그가 업소 단속을 지휘하는 장면이 전파를 탔다. 그랬던 그가 어느 순간 단속보다 성매매 여성들의 보호자로 돌아섰다. 포주들과 마주 앉아 화대의 분배 비율과 휴일 등의 영업 원칙을 정했다. 미아리 텍사스를 벗어나려는 여성들은 빠져나오도록 했고, 자활훈련도 지원했다. 그 모습에 ‘공권력은 저렇게 활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를 또렷이 기억하는 건 나도 그보다 10년 앞서 종암서에서 경찰기자를 시작했고, 처음으로 집창촌과 성매매 여성들을 접했으며, 이후 그곳은 내게 숙제처럼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의 나도 아마 최근 인터넷 댓글에 넘치는 ‘몸 팔아 편하게 돈을 번다’며 질타하는, 정의감에 불타는 청춘의 대열에 있었을 거다.

 그러나 그들을 보면 알게 된다. 성매매밖에 할 게 없는 ‘실존적 삶’이라는 게 있다는 걸 말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던 순간의 막막함과 먹먹함을 잊을 수가 없다. 혹자는 쉽게 말한다. “의지를 갖고 식당에서 설거지라도 하면 먹고살 수 있다.” 한데 종일 설거지라도 할 수 있는 체력도 못 타고난 데다 부모 복까지 없는 여성도 있다. 뼈와 근육이 약해 늘 앉아만 있는 성매매 여성이 있었다. 그가 사회에서 무엇을 한다는 말인가.

 여성가족부는 탈성매매 여성들의 자활을 지원한다. 지난해 868명이 취업이나 진학을 했고, 월 60만~90만원을 받는 일자리 제공 사업에 562명이 참여했다. 성매매 특별법이 탈성매매를 돕고 빠져나올 길을 제시한 건 분명하다. 그러나 생계형 성매매 여성들은 범죄자로 규정해 삶의 터전에서 내쫓는다. 탈성매매의 의지조차 가질 수 없는, 우리 사회 가장 후미진 곳에 사는 그들을 어디로까지 내몰아야 하나.

 “성매매는 공공에 유해한 직업으로 보호받을 수 없다.” 최근 위헌심판 청구 중인 성매매 특별법의 매도자 처벌 조항(제21조 1항)이 합헌임을 주장한 변호사의 논리다. 정의로운 말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란 그렇게 일도양단으로 나뉘지 않는다. 구질구질해도 삶은 삶이다. 이 조항의 위헌성은 의문이다. 사회마다 지향하는 풍속의 기준이 있고, 풍속이 문란해지는 건 막아야 한다.

 하지만 약자들의 생계 문제를 법 조항만으로 판단해선 안 된다. ‘실존적 삶’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입법과 정책이 그래서 필요하다. 그들은 제일 약한 국민이다. 나라는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 헌재에만 맡겨놓지 말고 입법부와 정부가 정책적으로 ‘어떻게’에 대한 고민을 제발 해주기 바란다.

[중앙일보] 양선희 논설위원

[스크랩 / 한국일보 4월17일]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고귀하다.

우리는 때로 사회적으로 서로를 나누며 서열과 가치를 매기곤 한다.
사진작가 조문호는 그 서열의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소외된 사람들에 렌즈를 돌린다.
강원도 두메산골 사람들을 찍거나 인사동 풍류객들을 조명하며 잘 알려지지 않은 세상을 살핀다.

작가 조문호가 지난 21일 출간한 책 '청량리 588'도 우리 사회의 주류에서
한 발짝 떨어져 나온 이들의 이야기다.

老작가를 만나다

'청량리 588'은 출간과 함께 지난 25일부터 10일까지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전시가 열렸다.

인터뷰를 위해 전시장에서 만난 조문호 작가는 진한 녹색의 외투와 갈색 모자,
그리고 보라색 스카프를 걸치고 있었다.

길게 삐져나온 머리카락과 입술 위 정리되지 않은 수염이 그의 자유로운 삶을 대변했다.

스스로를 70세에 가까운 노인이라고 지칭했지만 인터뷰 내내 눈을 지그시 마주하고,
가끔은 이야기 중 상념에 빠지거나 이를 드러내고 천진하게 웃는 모습이 어린 소년 같았다.

'청량리 588'은 1984년부터 89년까지 5년간 윤락녀들의 생활을 담은 사진들이다.
인터뷰는 사진을 찍으면서 겪었던 일들과 사진에 대한 생각, 그리고 철학을 담았다.

[ 작가와의 대화는 경어체였으나, 편의상 평어체로 작성되었습니다.]

 

 

80년대 홍등가 '청량리 588'

- 왜 많은 직업군 중 '윤락녀'를 촬영하게 됐는지?

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다. 다른 부분(직업군)은 다른 사진가들이 다 손을 댔다.

그런데 윤락가는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자칫하면 이 부분은 묻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 83년도인가 동아미술제에서 사진부분 공모를 발표했다. 그 주제가 '직업인'이었다.

나도 그들을 직업인으로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기회에 한 번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같은 주제로 30년 전 전시회를 열었다가 금방 닫고, 올해 다시 전시를 가진 것으로 들었다.

시대상과도 관련이 있는가, 혹은 개인적인 이유인가?

그 전 전시는 사실 실패다.
전시를 하게 된 동기도 그들(윤락녀)의 목소리를 전하고 싶었고,

사람대접 받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오프닝 때도 그녀들이 참석하기로 했다. 자축하자고 했다.

그런데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하면서 선정적인 보도가 느니까 주눅 들었는지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실패라 생각하고 거들떠보지도 않고 처박아뒀다.

중간에 출판사에서 책을 만들자는 제의가 들어왔는데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다 30년이 지나니까 이것도 우리 사회의 기록이고 자료라는 생각이 들어 이번에 책을 내게 됐다.

그 때 그녀들을 보고 싶기도 하고...

- 30년 전 전시와 지금 전시 분위기가 다른가?

사진 선정부터 달랐다. 그 때는 주로 얼굴위주였다.

이번에는 책을 만들다보니 전체적 그림을 보여주는 사진을 선택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예술지상주의다. 나는 예술보다는 사람들의 삶을 더 좋아한다.

 

 

 

 

- 촬영 허가는 어떻게 받을 수 있었나?

직업여성이고 건달이고 마음 주면 안 통할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도 진정성이 보일 때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아니겠나?


- 꽤 긴 시간동안 같이 생활을 했겠다.

거기를 찍기는 5년을 찍었어도, 살기는 5달 밖에 못 살았다. 왜냐면 방세가 비싸니까.

지금도 빈털터리지만 그 때도 돈이 없으니까. 다큐멘터리 작가는 가난하다.

그나마 5달도 있을 수 있었던 게 동아미술전에 작품을 출품했는데 대상을 받았다.

상금을 100만원 받았고, 동아일보에서 작품 산 돈도 받았다.

그 돈으로 방을 얻고 그 친구들에게 다 썼다.

결국 돈 더 쓰고, 그 집에서 나와 왔다 갔다 하면서 찍었다.

 

 

- 손님은 어떻게 촬영한 것인지?

손님들은 찍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걔들이 카메라 안보이게 제 몸으로 손님 눈을 가려줘서 찍을 수 있었다.

- 사진을 찍을 때 사진전과 책에 대한 계획이 있었나?

이런 다큐멘터리 사진들로 그녀들이 당당하게 나설 수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그녀들도 동의했고. 그랬는데 막상 문을 여니 그렇지 않았다.

내가 왜 이 짓을 하나 싶었다. 불태워버릴까 했는데, 그냥 처박아두길 천만 다행이다(웃음)

- '청량리 588' 전시와 책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들을 불쌍하게 보지도 말고, 천하게 보지도 말아라. 그냥 같은 사람으로 대해준다면 좋겠다.

그리고 우려되는 점이 요즘은 SNS에 사진을 가볍게 올린다.

하지만, 그 진위가 왜곡되면 (성노동자에 대한) 모욕이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몸을 팔고 있는 것 아니겠나. 방법이 다를 뿐이지.

 

 

 

청량리 588'의 여인들

- 그녀들에 관해 시대의 희생양이라고 했는데?

그렇다. 단지 부모를 잘 못 만난 죄 뿐이다. 거기에 가고 싶어 간 사람이 누가 있겠나?

- 지금 연락되는 분은 없는지?

아무도 없다. 요즘처럼 핸드폰이 있고 하면 어떻게 해서든 다 연락이 됐을 텐데....

-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는가?

정숙이. 걔가 도움을 많이 주었다.

어느 날 정숙이와 다투어 방에 가보니, 촛불을 켜놓고, 몇 시간 동안 말을 안 하고 앉아있더라.

참! 힘든 고문이었다. 걔는 시간이 돈인데, 손님을 안 받고 있으면, 그 부담을 고스란히 자기가 물어야해

생활은 더 어려워지니까.


 

 

 

 

 

- 힘들었던 만큼 애착이 가겠다.

그렇다. 어제는 매체에서 기자들이 와서 현장에 한 번 가보자고 했다.

가보니까 서너 집만 남은 줄 알았는데, 더 많은 것 같더라고...

물론 낮이니까 영업 안하는 집도 있겠지만, 낮에도 몇 사람 나와 있고 그랬다.

심지어 60이나 먹은 노인도 오고 20대 총각도 오고 다양한 사람이 왔다 갔다 했다.

그런데, 지구상에 인간이 있는 한 (윤락행위는) 없을 수 없다.

 

어제 갔을 때도 가슴이 먹먹했다.

30년이 지나도 하나도 바뀐 것이 없다 싶었다. 사회적 시선이나 그네들 삶이나...

사람을 찍는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조문호

- 사진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사진 할 생각 없었다. 부산에서 음악주점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 집 단골로 사진작가 최민식 선생이 있었다.

어느 날 선물로 '휴먼 1집'이라는 개인사진집을 주더라. 보니까 이거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더 강하다'는

것을 말하더다. 그래서 사진을 시작하게 됐다. 사진이라는 게 돈이 안 된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더하다.

그래도 나는 가치 있다고 생각하니까 (계속 한다).

- 다큐멘터리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가 있다면?

최민식씨 사진의 초점이 사람들이었다. 보통 사진가들을 보면 주변의 기록을 너무 우습게 안다. 

가족은 물론, 사진 행사에도 카메라 가지고 오는 작가가 별로 없다.

그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데 그건 아니다. 그 또한 세월이 지나면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나는 인사동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술을 마셔도, 아무리 취해도 카메라를 떨어트리지 않는다.

카메라가 막걸리에 얼룩져 그렇지, 항상 내 손에 잡혀있다.

 

 

 

 

-사진작가가 되지 않았다면 무엇을 하고 있을지??


정처 없지 뭐. 지금 아내 만나기 전엔 실패도(이혼)했다.

지금은 같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를 만났다. 생각이 같으니까 너무 좋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마누라는 장터만 30년 찍었다. 돈 떨어지면 인사동에서 개기고(웃음)

가난하면 아내가 힘들지만, (많은 사진들이 있으니까) 나는 항상 부자라고 생각한다

 

 

 

 

- 조문호에게 카메라는 어떤 의미인가?

카메라는 기계일 뿐이다. 화가로 치면 붓이랑 마찬가지다. 자기 이야기를 담아낼 뿐이다.

그래서 무슨 렌즈고 그런 거 아무 필요 없다. 자기 손에서 편하게 찍을 수 있는 카메라면 좋다.

- 다음 작품으로 준비 하고 있는 것은 있나?

지금 하는 것도 마무리 못하고 있는데 무엇을 찾고 있겠나(웃음).

인사동과 장터도 계속 찍어야 하지만, 청량리 588도 철거할 때까지 기록해야  한다.

- 꿈이 있다면?

개인적인 꿈은 없다. 나는 행복하니까. 큰 꿈이 있다면 다들 잘 산다면 좋겠다.

돈이 많다고 잘 사는 건 아니다. 주변에 돈 많은 친구들은 나보다 걱정이 더 많다.

돈 때문에 머리를 싸맨다. 그런 거 보면 다행이다 싶을 때도 있다.

 

일단 집안이 편하고, 자기 하고 싶은 거 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 못 하는 게 제일 불행하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살겠나. 죽고 나면 아무 소용없다.

주위 친구들 죽는 거 보면, 그렇게 아웅다웅하며 살다 죽을 때, 뭘 가져가나 싶다.

가족들끼리 원망하고... 그래서 옛 노래 말에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가 참 솔직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제발! 자유롭게 열심히 일하고, 재밌게 놀아라.

 


작가의 눈은 깊었다. 정숙이를 이야기할 때나 꿈을 이야기할 때 그의 눈은 청년처럼 반짝였다.

'직업을 불문하고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일흔의 노작가는 말했다.

'붉은색 조명 아래 그녀들은 언제쯤 세상의 차가운 시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http://www.youtube.com/watch?v=Pau-zvFYzio

 

[MBC 인터뷰 내용 중 어휘가 잘 못되거나 내용이 충실하지 못한 것은 일부 수정했다 /사진가 조문호 ]

[시사저널 NO 1326,  2015.3.17-3.24]

 


[인터뷰] 1980년대 홍등가 풍경 찍은 사진작가 조문호

 

 

송화선기자 spring@donga.com

 

 

1983년, 사내는 서른여섯 살이었다. 뒤늦게 시작한 사진 작업에 빠져 부산살림을 정리하고 서울에 온 지 1년쯤 된 참이었다. ‘월간사진’ 편집장을 맡으며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가족의 이해는 얻지 못했다. 지독한 가난과 남편의 무심함에 지친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부산으로 떠나버렸다.

 

“생각해보면 삶의 나락이었죠. 그때 여기서 위로와 안식을 얻었어요.”

 

어느새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사내와 바로 그곳,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588번지(답십리로 11길) 근처 한 카페에서 마주 앉았다. 당시 서울 제일의 홍등가로 손꼽히던 곳, 3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젊은 여인들이 색색의 등불아래 서서 오가는 사내들을 불러들이고 있는 이른바 '588'이다.

 

조문호 작가(사진)는 젊은 날 그 거리에서 자신의 소매를 붙드는 여인들과 인연을 맺었다. 신세타령 듣고 속내를 나누다 몸과 마음까지 주고 받았다. 그렇게 1년여간 부대낀 기록을 동아미술제에 출품해 1985년 사진 부문 대상을 받았다. 조 작가를 만난 건 당시 기록들을 모아 지금 서울 인사동에서 사진전 '청량리 588'을 열고 있기 때문이다. 눈빛출판사에서 같은 제목의 사진집도 펴냈다.

 

588의 직업인 

 

30년 전 그가 남겨둔 기록의 더께를 열었다. 그 안에 담긴 건 누구나 볼 수 있는 뻔한 뒷골목 풍경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그늘 중에서도 가장 음습한 곳., '집창촌'이라 불리는 그 거리에서 먹고 자고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만져질 듯 생생히 담겨 있다.  조 작가는 " 그 해 동아미술제 사진 주제가 '직업인'이었다. 나는 588 여인들'이야말로 이 주제에 적합한 피사체라고 여겼고,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꾸밈없이 찍고자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의 카메라 앞에 선 여인들은 열심히 '일'하고, 대가로 받은 돈으로 생계를 꾸리며, 남는 것은 알뜰히 모아 고향 어머니에게 부치던 이들이었다. 한 여인은 그의 작업에 대한 얘기를 듣고 "직업인이라는 주제가 마음에 든다"며 여기서 일하는 게 다른 건 다 괜찮은데 나를 구더기처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견디기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이들의 도움 덕에 조 작가는 여인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화장을 고치고 '직업적 노동'을 수행하는 순간의 모습가지 렌즈에 담았고, 그중 6점을 동아미술제에 출품했다. 1985년 3월 19일자 '동아일보'는 조 작가의 동아미술제 대상 수상 소식을 전하며 '홍등가'는 감히 어느사진가가 손대기 어려운 상황 하의  직업인을 심층적으로 깊이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진이었다'고 평했다.

 

그동안 어느 누구도 촬영하지 못한 뒷골목 사람들의 삶을 낱낱이 기록한 건 분명히 작업의 장점이었을 것이다. 그중 몇몇 작품은 센세이셔널하기도 하다. 그러나 많은 사진 중에서 가장 눈에 띈 건 오히려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차분히 앉은 채 정면으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는,  마치 렌즈 너머 작가를 응시하는 듯 보이는 한 여인의 표정이었다. 조 작가는 그 사진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 아이가 바로 정숙이"라고 했다.  처음 그의 작업에 공감을 표했고, 친구들을 소개하며 적극적으로 응원해 준, 조 작가가 지금도 잊지 못하는 한 여인의 이름이다. 조 작가는 최근 펴낸 사진집 서문에 '정숙아! 혜련아! 당신들의 모습이 담긴 이 사진집을 혹시 보게 되면 내게 연락 한 번 주렴, 내 비록 거지 처지일지라도 소주 한 잔 살게'라는 편지를 남겼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고 함께 청량리 거리를 걸으면서도 '혹시 정숙이가 여기서 뭐라도 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닌가 몰라요"하며 주위를 휘휘 둘러보곤 했다.

 

한국 현대사의 뒷골목

 

"우리는 그 시절, 이 작업을 통해 588에서 일하는 여인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없앨 수 있기를 바랐어요. 하지만 현실의 벽이 높았죠. 1990년 프랑스문화원에서 '전농동 588번지 기록전'이라는 사진전을 열면서 이 여인들을 초대한다고 하자 언론의 관심이 온통 여인들에게만 집중됐어요. 결국 아무도 전시회에 오지 못했고, 제 시도가 실패했다는 걸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날 이후 조 작가는 588에 가지 않았다고 했다. '정숙이'도 만나지 못했다. 자신의 의도가 세상 안에서 왜곡돼 그들에게 상처로 남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 기억 때문에 그동안 촬영한 사진과 필름도 꺼내 보지 않았다. 최근 588을 다시 떠올리게 된건, 곧 그 공간이 영영 사라진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조문호사진작가의 사진 속에는 1980년대 '588'에서 살아가던 이들의 민낯이 생생히 담겨 있다.

 

 

2012년 12월, 서울시는 전농동 588번지일대 재정비 계획을 세웠다. 예정대로라면 2017년에는 그 자리에 60층 높이의 초고층 건물이 들어서고, 주상복합 마천루들이 주위를 두르게 된다. 마침 출판사로 부터 사진집 출간 제의를 받은 조 작가는 이번엔 거절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한국 현대사의 한순간을 담은 기록으로 이 작업을 세상에 꺼내 보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야, 자신만큼이나 노인이 됐을 그 시절 여인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본다고 했다.

 

10년 전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정영신씨와 결혼해 가정을 꾸린 그는 요즘 평생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인생의 굴곡을 함께 건넜던 이들도 부디 행복했으면 하는 게 조 작가의 바람이다. 그리고 사진작가로서, 588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 다시 한 번 뒷골목 풍경을 기록해두고 싶다는 꿈도 갖고 있다. 이제는 30여 년 전 그 시절처럼 그들 안에 들어가 부대끼며 살아갈 수는 없겠지만, 기록자로서의 구실은 다하고 싶다고 한다.


[아트&아트인] 80년대 사창가 공개한 사진작가 조문호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기자]

서울 청량리 일대 집창촌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사진전이 인사동 아라아트 2층 전시관에서 열린다. 사진작가 조문호가 1984-1989년까지 전농동588번지 일대 홍등가를 담은 이번 전시는 ‘청량리588’이란 제목으로 관객을 만난다.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우리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멸시 받았던 윤락녀는 그들 역시 인간임을 말하고 있었다.

 


사진작가 조문호의 ‘청량리 588’사진전이 오는 3월 10일까지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 2층 전시실에서 열린다. 서울 동대문구 일대 집창촌의 모습을 담은 67점의 사진은 전시와 함께 ‘청량리 588’(눈빛출판사) 사진집으로도 출판되었다.

“그들도 똑 같다”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어 온 조 작가는 당시 홍등가를 찍기 위해 현장에 기거했다. 건달들의 폭력과 성병 등 숱한 고난이 동반됐지만 조 작가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매춘을 우리 사회의 필요악으로 보았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성매매는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생활고에 찌들려 몸을 팔았던 윤락녀는 시대적 희생양으로 부각됐다. 조 작가는 “가난한 것이 죄일 뿐 누가 그들의 얼굴에 침을 뱉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처음엔 냉대했던 그곳의 여성들은 서서히 조 작가에게 마음을 열었다. 조 작가가 카메라를 들었을 때 이들은 이미 서로를 누이동생으로 불렀다. 때문에 조 작가는 성매매 여성들의 생활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친근한 방식으로 기록할 수 있었다.

조 작가는 “그들도 똑같은 사람이며, 우리의 이웃이고 가족”이라고 강조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멸시 섞인 시선, 얼굴조차 마주보기 싫어하는 사람들의 천대가 윤락녀를 사회로부터 격리시킨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 작가는 편견을 바로잡기 위해 애썼다. 몸 파는 창녀가 아니라 하나의 직업인으로 봐달라며 5년을 공들였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높았다. 힘들게 찍은 사진을 모아 1990년 2월 전시회를 가졌으나 언론은 매춘이란 호기심에 무게를 두고 ‘선정적인 보도’로 일관했다. 조 작가와 생각을 같이하며 “사람대접 받게 해 달라”고 했던 사진의 주인공들은 전시회에 나타나지 않았다.

성난 조 작가는 필름을 창고에 처박았다. 사진집 출판 제의도 거절했다. 자신의 작품이 춘화와 같은 이야깃거리로 변질될 것이 두려웠고, 무엇보다 행여 잘 살고 있는 누이동생들의 삶이 망가질까봐 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조 작가는 먼지 쌓인 필름을 다시 꺼냈다. 그들의 목소리를 한 번 더 세상에 전하고 싶었다고 한다. 조 작가는 “사진에 찍힌 그때 그 사람도 보고 싶고, 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도 듣고 싶다”며 “전시장에 찾아와 자신이 찍힌 사진을 찾아 갔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고 말했다.

‘청량리 588’ 사진전 전시
집창촌 직접 머물며 촬영
성매매 여성들 애환 담아

훌륭한 사회사적 기록물인 조 작가의 작품은 1985년 ‘동아미술제’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기쁨과 뿌듯함에 조 작가는 사진의 모델이 되어준 여성들을 상대로 남김없이 상금을 썼다고 한다. 전시 서문을 쓴 이광수 부산외대 교수는 “그들이 받은 것이니 그들에게 돌려줘야겠다는 심산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조 작가의 사진은 기술적으로 뛰어 난 사진이 아니다. 어찌 보면 촌스럽기까지 한 구성과 스타일은 오히려 그의 작업을 돋보이게 한다. 인간에 대한 한없는 애정과 애틋함이 녹아 있는 사진들을 보다 보면 1980년대의 정취가 눈시울을 자극한다. 엄혹한 군사독재 시대, 국가의 최우선 정화 대상이었던 이들은 한곳에 모여 아등바등 살고 있었다. 우리와 똑같이 살고 싶은 욕구에 충실한 생명이었던 것이다.

 



조 자가는 자신의 작가노트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 정숙아! 혜련아! 나의 연인이기도 동생이기도 했던 너희가 보고 싶다. 연락 한 번 주렴. 내가 소주 한 잔 살게. 그리고 부디 행복하게 살기 바란다.”

사회사 기록

그간 아시안게임, ‘민주항쟁, 두메산골 사람들, 5일장, 강원도 동강, 인사동 등을 소재로 작업해 온 조 작가는 이번 전시로 한국 사진사의 큰 족적을 남겼다. 향수에 젖고 싶은 성인이라면 전시가 열리는 ‘아라아트’를 찾아보면 어떨까. 단 19세 미만은 관람불가다.

angeli@ilyosisa.co.kr

 

[조문호 작가는?]

 

조문호 작가는 1947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30여 년간 사회 환경을 기록해 온 다큐멘터리 사진가다. 1985년 동아미술제에서 ‘홍등가’로 대상을 수상했다.

1986년 ‘아시안게임 기록사진 공모전’ 대상과 2007년 강원다큐멘터리 사진가로 선정된 바 있다. 주요 전시로는 민주항쟁 기록전(1987), 전농동588번지 기록전(1990), 동강백성들 사진전(2001), 태풍 루사가 남긴 상처 사진전(2002), 두메산골 사람들 사진전(2004), 인사동 그 기억의 풍경전(2007) 등이 있다.

이외에도 수많은 기획, 단체전에 참여했다. 저서로는 포토에세이집 <동강 백성들>, <두메산골 사람들>, <인사동 이야기>, 천상병사진집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등이 있고, <월간 사진> 편집장과 한국환경사진가회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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