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의식의 풍경Part2THE LANDSCAPE of THE SUBCONSCIOUS Part2

이종희展 / LEEJONGHEE / 李鍾熙 / installation

2013_1023 ▶ 2013_1102

 

 

이종희_잠재의식의 풍경_시멘트, 나무, 자동차부품, 돌, 도자기, 병_가변크기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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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_11:00am~05:00pm


장은선갤러리JANGEUNSUN GALLERY

서울 종로구 경운동 66-11번지Tel. +82.2.730.3533

www.galleryjang.com


버려진 에너지의 박제(剝製)된 아름다움 ● 차갑고 거친 시멘트, 단단함과 육중함, 그리고 그 속에 등장하는 고목들의 모습은 어떤 고지식한 조각가의 모습을 예견케한다. 마치 가벼운 현대 조각들에 반항이라도 하듯 작가는 태초의 조각가처럼 가장 무거운 돌과 가장 자연에 가까운 나무를 조각의 소재로 택했다. 나무와 시멘트는 마치 한 몸이었던 것처럼 잘 어우러진다. 실재로 작가는 멋진 나무를 구하기 위해 전국을 수소문하며 버려지는 멋진 고송을 찾아다닌다. 그 나무들은 전봉준 선생의 고창 생가이기도 했고, 소격동 기무사에서 버려진 나무이기도 했다. 각자의 히스토리를 지니고 있는 버려진 고송들인 것이다. ● 이종희는 버려진 사물에 대한 애정이 깊다. 그중에서도 특히, 어렸을 적부터 나무와 가까이 자란 때문인지 버려진 나무에 대한 애정은 더 하다. 버려진 사물에 대한 애정은 기본적으로 사물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다. 내가 쓴 물건이든 남이 쓴 물건이든, 오랜 세월 누군가에게 사용된 물건에서는 어떤 이의 삶, 그 삶의 에너지가 녹아 있다고 생각한다. 기름때 잔뜩 묻은 자동차 엔진에서 오랜 작업의 고단함, 소진된 에너지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고 하니, 그에게 그 자동차의 기름때는 마치 어느 늙은이의 아름다운 주름과도 같은 것일 게다. 늙은이의 주름 속에 세월이 흔적이 녹아 있듯, 누군가에 의해 오래 사용된 물건에는 그 물건과 사람이 함께 했던 시간들, 그 에너지들이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이종희_잠재의식의 풍경_시멘트, 나무, 자동차부품, 돌, 도자기, 병_가변크기_2013

현대미술에서 버려진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가들은 많다. 특히 최근의 따뜻한 자본주의, 나눔의 열풍 때문인지 버려진 물건, 나눠 쓰고, 바꿔 쓰기 프로젝트 등이 다양한 예술의 형태로 선보이고 있다. 그러나 조각가 이종희는 자신과 닮은 가장 육중한 조각의 형태로 버려진 사물에 대해 해석한다. 그리고 조각가답게 그 버려진 사물이 지닌 소진된 '에너지'에 집중한다. 버려진 사물들에 여운처럼 남아있는 에너지는 파편화되어 시멘트 돌 속에 압축되고 박제된다. 작가는 다 소진된 거친 에너지들의 아름다움을 차마 사라지게 놓아두지 못하고, 가장 차가워 보이는 시멘트 속에 가두어 카타르시스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종희_잠재의식의 풍경_시멘트, 나무, 자동차부품, 돌, 도자기, 병_가변크기_2013

 

 

 

이종희_잠재의식의 풍경_시멘트, 나무, 자동차부품, 돌, 도자기, 병_가변크기_2013

소진된 에너지, 그리고 그 에너지를 박제한다는 것은 곧 생명과 죽음을 의미한다. 생명과 죽음은 아주 오랜 기간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소재였다. 에너지의 박제는 마치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의 박제된 생명체를, 그 멈추어 버린 에너지는 중국 쓰춴성 지진으로 부서진 기차를 전시장에 가져왔던 장후안(Zhang Huan)의 작업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조각가로써의 정공법을 택한 이종희는 그 에너지를 시멘트와 나무로 박제시켜 거친 아름다움으로 재탄생시킨다. 그는 에너지의 박제된 아름다움에 자신의 에너지, 즉 육체노동과 숙련된 조각가의 기술을 가미하여 정통 조각가다운 방법으로 그 아름다움을 돌 속에 멈추어 있게 한다. ■ 도경민

 

 


이종희_잠재의식의 풍경_시멘트 향나무 돌 자동차부품_50×14×14cm_2013

Stuffed beauty of abandoned energy ● Cold and rough cement, hardness and massiveness, and shapes of old pine trees in them allow to foresee a straight-arrow sculptor. As if he resisted against light sculptures in modern days, the artist adopts the heaviest stone and the tree which is closest to the nature as materials for his sculpture like a primal sculptor. The tree and cement are in good harmony as though they were of one. The artist actually asks around the whole country to obtain a good tree and casts about abandoned but great old pine trees. Some of those trees were in Jeonbongjun's birthplace in Gochang and some others were ones abandoned in Defense Security Command, Sogyeok-dong. In other words, those were abandoned old trees with history of their own. ● Jonghee Lee has deep affection in abandoned objects. Among others, he is especially more affectionate in abandoned trees maybe because he was raised with trees near by. The affection on abandoned things originates basically from affection on things. Whether it is mine or other's, a thing used by someone for a long time embodies someone's life and that life's energy, I think. As he says that he discovers weariness of hard work and beauty of exhausted energy in a greasy car engine, the grease spot of that car is likely to seem like beautiful wrinkles of an old man to him. As a trace of time melts into the old man's wrinkles, a thing used by someone for long is with the time and energy spent together by the thing and its owner. ● There are a number of artists in modern art who talk about abandoned things. Perhaps from the recent warm capitalism and sharing boom, abandoned things and projects for sharing and exchanging things are displayed in many forms of art. The sculptor Jonghee Lee, however, interprets abandoned things in a form of the most massive sculpture which looks like himself. In addition, he concentrates on the exhausted 'energy' of the abandoned things like a genuine sculptor. The energy lingering on abandoned things is fragmented, compressed in cement stone and then stuffed. The artist cannot bear to let the beauty of exhausted and rough energy disappear and he traps it in cement which seems to be the coldest to seek cathartic beauty. ● The exhausted energy and stuffing that energy means life and death. Life and death has been materials with fatal attraction for a very long time. Stuffing energy reminds Damien Hirst's stuffed living things and its stopped energy recalls Zhang Huan's work which was to bring a train broken for an earthquake in Sichuan into the exhibition hall. Jonghee Lee, however, who chooses standard tactics as a sculptor, recreates that energy with rough beauty through stuffing it in cement and tree. on the stuffed beauty of energy, he adds his energy, in other words, physical labor and techniques of a skilled sculptor so he stops that beauty within the stone in a way of an orthodox sculptor. ■ Do, Kyoung-min

Vol.20131028h | 이종희展 / LEEJONGHEE / 李鍾熙 / installation


구본아展 / KOOBONA / 具本妸 / painting

2013_1030 ▶ 2013_1231

 

 

 

구본아_새1: 태엽감는새01_한지에 먹, 채색_50×30cm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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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1030_수요일_06:00pm

후원 / 인천문화재단


2013_1030 ▶ 2013_1105관람시간 / 10:00am~07:00pm

공아트스페이스GONG ART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8-21번지 1층Tel. +82.2.730.1144/735.9938

www.gongartspace.com


2013_1221 ▶ 2013_1231관람시간 / 10:00am~07:00pm

선광미술관(선광문화재단)SUNKWANG ART MUSEUM(SUNKWANG CULTURAL FOUNDATION)

인천 중구 중앙동4가 2-26번지Tel. +82.32.773.1310


작위와 무작위, 시간의 세례와 수묵의 새로운 표정읽기 ● 주지하듯이 수묵은 대단히 오래된 조형 방식이다. 유구한 역사적 발전과정을 통해 축적된 풍부한 조형경험을 통해 수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정한 체계를 이루었다. 특히 전통시대를 관통하며 그 고유한 심미관은 물론 감상체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들을 포괄하고 있는 수묵의 발전 역사는 바로 동양회화 전통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혹자는 이러한 수묵의 역사성과 이를 통해 축적된 풍부한 조형경험을 들어 수묵은 이미 완성된 형식이라 말하기도 한다. 사실 수묵은 어쩌면 이미 완성된 형식인지도 모른다. 또 그것은 이미 지나가 버린 전통시대의 퇴락한 유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자에도 역시 적잖은 작가들이 여전히 수묵을 작업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 이는 전통에서 비롯된 타성적 관성일수도 있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전통에 대한 맹종에서 비롯된 집착일 수도 있다. 물론 현대미술이라는 격랑 속에서 수묵의 위상은 이전과 같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묵이 이 시대의 표현 매재로서 존재하고 있을 뿐 아니라, 부단히 새로운 표정과 양태로 변화하며 새로운 시대를 호흡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전통이란 것이 보호되고 전승됨으로써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동력을 수혈함으로써 스스로 생명력을 확보해 나가는 유기체적 성질을 지닌 것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우리는 수묵이 지닌 유장한 기운과 그 저력을 새삼 평가하고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구본아_새2: 태엽감는새02_한지에 먹, 채색_30×50cm_2013

 

 

 

구본아_새3: 태엽감는새03_한지에 먹, 채색_30×50cm_2013

작가 구본아의 작업 역시 수묵을 지지체로 삼고 있다. 어둡고 침잠하는 화면은 다분히 엄숙하고 금욕적이다. 원형으로 이루어진 갖가지 형상들이 어우러져 이루어내는 형상은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이다. 그것은 톱니바퀴나 태엽과 같은 기계적 이미지들이 중첩되며 이루어내는 조형물 같다. 그러나 이들은 기계적인 정연함이나 치밀한 구조의 차가운 질서를 드러내기 보다는 오히려 쇄락하고 무너지는 처연한 상황으로 읽혀진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문명의 폐허처럼 을씨년스러울 뿐 아니라 한없는 침묵의 나락을 연상시킨다. 본래 일정한 에너지를 통해 동작함으로써 본연의 기능을 발휘하고 역할을 수행하던 기계들은 분해되고 해체되어 초라한 속살을 드러내며 그렇게 방치되어 있는 것이다.

 

 


구본아_새4: 태엽감는새04_한지에 먹, 채색_30×50cm_2013

 

 

 

구본아_새:5 태엽감는새05_한지에 먹, 채색_30×50cm_2013

그것은 죽음이요 소멸이다. 기능의 상실은 바로 목적의 소멸을 의미한다. 본래 의미 있고 가치 있던 것들은 이미 망실되고 파기됨으로써 그것은 그저 부호와도 같은 상징으로 남았다. 동력도 목적도 사라져 버린 형해 화된 형상들은 아득한 시간의 저편만을 응시하며 침묵할 따름이다. 기계는 문명의 산물이며, 인간이 행한 작위의 절정이다. 이들을 거둬들이는 것은 바로 시간이다. 인간은 창조하고 자연은 그것을 다시 거둬들여 자연으로 되돌리는 것은 불변의 원칙이다. 시간은 바로 자연이 전하는 부름이다. 시간은 느리지만 결코 서두르지 않고 빠짐없이 자연의 부름을 물질에 아로새겨 놓는다. 그리고는 아득한 망각의 저편으로 인공의 문명과 그 부산물인 물질을 되돌려 다시 자연으로 환원함으로써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확인시킨다. 그것은 "작위하지 않지만, 또 결코 작위하지 않음이 없다."(無作爲而無不作爲)는 역설적인 말로 표현되는 자연의 법칙이다. (중략)

 


구본아_Physical objects_한지에 먹, 채색_390×230cm_2012

 

 

 

구본아_Physical objects_한지에 먹, 채색_390×230cm_2012

진중한 의미와 상징으로 점철된 작가의 화면은 수묵을 통한 침잠하는 듯 한 사변적 구조를 제시하고 있다. 이미 쇄락해 버린 거대한 신전의 장식물처럼, 혹은 문명의 온기가 사라진 폐허와 같은 형상들을 아우르는 작가의 수묵은 이미 전통적인 수묵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선에 의한 조형이라는 원칙적인 방법론에서 벗어나 있을 뿐 아니라 정신적 가치로서의 수묵에 앞서 조형의 매재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그것은 사상성을 전제로 한 수묵의 심미관에서 벗어나 재료와 도구로서의 역할과 기능이 강조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작가의 작업은 다분히 감각적이며 표현적인 요소들로 점철되어 있다. 때로는 수묵이 지니고 있는 물성을 활용하기도 하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이를 묘사의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어떠한 경우든 전통적인 수묵의 운용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행위의 결과가 굳이 탈 전통을 위한 작위적인 몸짓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수묵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린 현대라는 시공에서 획득한 새로운 표정이라 함이 옳을 것이다. 작가의 경우 수묵이 지니고 있는 교조적 덕목에 앞서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의 조형적 목적이 우선하며, 이러한 요구에 충실히 반응한 결과가 표출된 것이라 여겨진다. 수묵의 정신성을 강조할 때, 당연히 수묵 자체에 어떤 정신성이 투영되어 있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운용하는 이의 사유와 결합하여 발현될 때 비로소 정신성을 지니게 됨은 당연한 것이다. 수묵이 현상에 대한 객관의 상황에서 벗어나 그윽한 사변의 세계로 삼라만상을 개괄하고, 번지고 스며드는 물성의 독특함으로 자연을 반영하는 조형 방식이라 할 때, 작가의 수묵은 비록 양태는 달리 하지만 수묵의 근본정신에 충분히 부합하는 바탕을 지니고 있다 여겨진다. 특히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있어 수묵은 단연 가장 민감하게 작용하고 반응하는 조형수단임을 상기할 때, 작가의 작업의지와 매재의 선택은 훌륭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수묵이 현대라는 시공에서 조형이라는 새로운 동력을 흡수함으로써 확보하게 된 새로운 표정일지도 모른다. 수묵은 어쩌면 이러한 과정을 통해 스스로 생명력을 유지하며 아주 오래된 시간의 이야기를 오늘에도 부단히 전해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김상철

Vol.20131030g | 구본아展 / KOOBONA / 具本妸 / painting


Around the Clock

정문경展 / CHUNGMUNKYUNG / 鄭文景 / installation

2013_1106 ▶ 2013_1112

 

 


정문경_Fort_used clothes, mixed media_270×300×300cm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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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1106_수요일_05:00pm

본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시행중인『Emerging Artists: 신진작가 전시지원 프로그램』의 선정작가 전시입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노암갤러리NOAM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 133번지Tel. +82.2.720.2235~6

www.noamgallery.com


옷으로 만들어진 요새, 어설픈 우리들의 아지트로 초대합니다. ●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멀쩡한 내 방이 있었는데도, 나는 내 방 구석 어딘가에 보자기와 이불 같은 것으로 얼기설기 나만의 공간을 만들려고 했다. 그리고 그 안에 나만의 이야기를 가득 담았다. 나의 보물들과 인형친구들, 장난감들이 꼬깃꼬깃 숨겨 놓았다. 지금 생각하면 작고 초라한 귀퉁이 천막집을 더 닮았던 것 같지만,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았던 온전한 나만의 공간이었다. 그 안에서 나는 행복했으며, 편안했다. 아마 그래서 더욱 기억에 생생한지도 모르겠다. 일곱 살 언저리쯤의 이야기다. ● 지금 생각해보면 그곳은 일곱 살 꼬맹이의 아지트였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안전한 은신처. 그렇게 소중했던 나만의 공간이었건만 살면서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정문경의「요새 Fort」은 그렇게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나의 아지트를 다시 끌어내었다. ● 물론 정문경의「요새 Fort」는 나의 아지트와는 다르다. 갖가지 옷으로 야무지게 만들어진 텐트형의 조형물은 오래 전 나의 아지트를 닮아 있는 것 같지만, 작가는 이 공간을 아지트가 아니라 '요새'라고 부른다. 하지만 요새, 즉 Fort가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에 튼튼하게 만들어 놓은 방어시설'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정문경의「Fort」는 요새라고 부르기에는 어딘가 어설퍼 보인다. 그런데 그 어설픔이 자꾸 시선을 잡는다.

 

 


정문경_Fort_used clothes, mixed media_270×300×300cm_2013_부분

작가는 '요새'라는 개념이 단순히 방어나 보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세상과 격리시켜 가두는 수단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Fort」는 옷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세상과의 격리도, 단절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옷은 기본적으로 그 사람의 일상과 긴밀하게 닿아 있는 것이다. 개인의 옷은 개인의 취향은 물론, 각각의 개인의 사사로운 추억과 기억, 나아가 그 개인이 속한 사회와 공동체의 특성까지도 반영한다. 때문에 '옷'에 대한 이야기는 단순히 더위와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기능적인 의미를 훨씬 넘어서 훨씬 복잡한 의미의 층위로 빠져들기 마련이다. 예술가들이 예술작품에서 공동체와 개인의 개성을 담지 하는 소재로 옷을 종종 사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여기에서 정문경은 옷의 안과 밖을 뒤집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옷을 오리고 붙이면서 일반적인 옷의 기능성이나 사회적 의미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있는 그대로의 옷이 아닌 안과 밖이 뒤집혀진, 오려지고 붙여지고, 연결된 옷. 그 옷은 이미 작가의 손에 들어왔던 처음의 그 옷이 아니다. ● 이런 이유로 정문경은 요새가 보호막이자 단절을 의미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Fort」안에서는 단절이 아닌 관계망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래서 그 안에 들어서면 나는 혼자일 수 없다. 이미 요새를 이루고 있는 옷들의 이야기, 옷 주인들의 이야기가 '옷'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함께 연결되어 있고, 때문에 들으려 하지 않아도 옷 '안으로' 들어가 자연스럽게 옷의 주인들과 연결된다. 오래전 나의 아지트가 나만의 공간이었다면, 정문경의 요새는 그렇게 우리들의 아지트가 된다. ● 이렇게 옷의 안과 밖. 정확하게는 안으로부터의 시선과 밖으로부터의 시선에 대한 이야기가 덧붙여지면서 작품의 이야기는 조금 다른 길로 접어든다. 사실 안과 밖, 표면과 이면은 정문경 작가에게 새로운 키워드는 아니다. 인사미술공간 전시에서 선보였던 안과 밖이 뒤집힌 거대한 곰돌이 푸(Pooh) 인형작업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작가에게 안과 밖에 대한 관심은 꽤 오래되었다. 안과 밖이 뒤집어지면서 귀여운 캐릭터 인형들이 오히려 낯설게 다가오고, 그 인형들이 배치되어 있는 공간까지 어색하게 만들었다면, 이전 전시에서 보여 졌던 뒤집혀진 캐릭터 인형과는 달리, 이야기가 '옷'이라는 소재에 집중하게 되면서 단순히 낯설게 하기를 넘어 개인의 이야기뿐 아니라 개인으로부터 출발된 집단에게로 이어진다. 작가는 뒤집어진 옷은 옷의 내부에서 바라볼 때 가면의 이면과 닮았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뒤집어진 옷은 표면이자 이면이고, 오려지고 붙여져 서로 연결된 개인들의 옷의 접합은 인간관계의 망을 닮아 있기에 함께 이어진 옷은 개인을 넘어 집단 혹은 사람들의 관계망을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다.

 

 


정문경_Rain drop_used clothes, mixed media_250×270×270cm_2013

다시 정문경의「Fort」안으로 들어가 보자. 보호막이자 안전막인 요새 안에는 작가의 지인으로부터 받은 옷들의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작가는 요새를 만드는데 쓰인 옷들을 꽤나 오랫동안 모아왔다고 했다. 부모님의 옷은 물론, 형제, 친구들까지 그녀를 중심으로 한 인간관계의 망이 옷들을 통해 압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옷을 주었던 친구가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아이의 옷도 자연스럽게 정문경의 옷 컬렉션에 포함되었다. 그래서 단순히 옷을 모은 것이 아닌, 기억과 추억, 일상과 관계를 모은 것이 되었다. ● 이번 전시『Around the Cloc』에서 소개된 또 하나의 작업「Rain Drop」역시 비슷한 맥락에 닿아있다. 옷으로 만들어진 우산을 펼치면, 우산 안에는 마치 빗줄기가 내리는 것처럼 옷의 소매들이 가득 차 있다. 알록달록, 스트라이프의 총천연색의 긴팔 옷자락 빗줄기. 비를 맞는 대신 그 안에서 서면 감춰져 있던 이야기들이 소곤소곤 쏟아져 내리는 것 같다. ● 비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는 우산,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는 요새. 이처럼 우산도 요새도 사람들을 외부로부터 보호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외부로부터의 보호라는 것이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언젠가 외부로 나가기 위한 잠정적, 혹은 일시적인 단절이다. 외부와 연결되어 있다는 전제가 있기에 외부로부터의 단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문경의 설치작업은 일상으로 파고들어 관객으로부터의 잠정적인 휴식의 공간, 일시적인 단절의 공간을 제공한다. 작가가 관객에게 제공하는 일시적인 피난처이다. 잠시 상상에 빠져 일상을 잊어도 좋다.

 

 


정문경_Rain drop_used clothes, mixed media_250×270×270cm_2013_부분

흥미로운 지점은 전체 작업 과정에서 정문경이라는 작가의 위치와 역할이다. 그녀의 사람들로 만들어진 이 '요새'의 공간에 정작 그녀의 이야기는 빠져있다는 점이다.「Fort」안에 정문경은 없다. 오히려 그녀는 과정상에 존재한다. 지인들로부터 옷은 수거하고, 종류별로 색깔별로 분류하고, 그 옷을 깨끗하게 빨아 빳빳하게 다림질 하는 과정, 그리고 마치 지도를 그리듯 옷과 옷을 연결하고 짜 맞추는 과정에서만 작가는 존재한다. 작가는 하나하나의 옷에 담긴 이야기들이 모여 요새가 되어가는 과정 안에만 있다. ● 그렇게 요새가 만들어지면, 작가의 존재는 슬며시 사라진다. 이제 남은 이들의 몫이다. 한 땀 한 땀 옷들을 연결하던 작가의 손길을 느껴보는 것, 불빛 사이로 비춰진 옷들을 통해 바라보는 바깥세상, 하나하나의 옷들을 보면서 옷의 주인을 상상해 보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초대된 관객의 몫이다. ● 물론, 정문경이 만들어낸「Fort」는 우리에게 안전을 담보하지 못한다. 세상은 상상보다 험악하게 변하고 있으며, 우리는 생각보다 더 많이 상처받은 채 살고 있다.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옷으로 만들어진 알록달록한 이 요새는 어쩌면 아주 짧은 시간동안 바깥세상을 잊을 수 있는 곳인지도 모른다. 그곳은 영원한 안식처는 아니다. 언젠가는 요새를 떠나 다시 처절한 삶의 현장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렇게 돌아와 마주한 요새 밖의 세상은 더욱 징글징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의 관계, 옷이 담고 있는 이야기에 잠시 일상을 잊고 미소를 지을 수도 있다면, 커다란 바늘을 가지고 사람들 사이 관계의 지도를 그리는 작가의 커다란 손을 상상하며 싱긋 웃어볼 수도 있다면 한번 쯤 그 요새 안에 머물러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정문경_Fort_used clothes, mixed media_270×300×300cm_2013

정문경_Rain drop_used clothes, mixed media_250×270×270cm_2013

 

 

 

정문경_Flags_used clothes, mixed media_가변크기_2012

문득 이 모든 것들이 어설픈 요새이기에 가능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바람과 추위조차 막아줄 수 없는 어설픈 요새, 그러나 잠시나마 마음속에 따듯한 온기를 전할 수 있는 그런 요새이기에 자꾸 시선이 간다. 자꾸 마음이 간다. 잔뜩 내려앉은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그 안에서 누군가와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진다. ■ 신보슬

Vol.20131106e | 정문경展 / CHUNGMUNKYUNG / 鄭文景 / installation


화려한 시대, 우리들의 페르소나 The Splendid Age, Our Persona

강래오展 / KANGRAEO / 姜來旿 / painting

2013_1030 ▶ 2013_1105

 

 

강래오_Paradox of Paradox #1_한지에 혼합재료_162×130cm_2013

초대일시 / 2013_1030_수요일_06:00pm

본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시행중인『Emerging Artists: 신진작가 전시지원 프로그램』의 선정작가 전시입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경운동 64-17번지Tel. +82.2.733.1045~6

www.grimson.co.kr


내재화된 폭력의 공간에 개입하는 예술의 역할 ● 강래오의 작품에 등장하는 방들은 가장 사적이고 은밀한 개인의 방인 동시에 외적 폭력이 지배하는 고문실이나 취조실처럼 보인다. 차가운 사선 무늬가 들어간 바닥, 무표정한 사무가구처럼 보이는 철조 책상, 낮은 천정과 어두운 조명등은, 꽃무늬 벽지, 욕조, 소파 등 가정의 소품들이 주는 안락함을 침범한다. 인물들은 폭력과 억압의 희생자인 듯 보이는 동시에 묘하게 가해자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작품들에 자주 등장하는 삼각형의 두건은 KKK단의 그것과 유사하지만, 눈구멍이 없다. 이 점 때문에 마치 사형집행 직전에 희생자에게 뒤집어씌우는 두건처럼도 보인다. 반가부좌를 틀고 욕조에 앉아 있는 인물은 명상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고문실에 감금된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 가해자와 피해자, 안과 밖의 구별을 붕괴시키는 이러한 이미지들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작가가 묘사하고 있는 공간은 당구장이나 감옥, 실험실 등 특정한 목적이 있는 구체적인 장소를 연상시키지만 한편으로는 기묘하게 비일상적이고 초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기하학적으로 구성된 공간은 자세히 보면 원근법에 맞지 않는 비뚤어지고 비합리적인 공간이다. 기묘한 낯설음과 친밀함의 이러한 교차는 작품의 색조와 재료에서도 비롯된다. 화면을 지배하는 특유의 가라앉은 청회색은 호분, 흙, 분채 등 동양화나 자연적인 재료에서 온 것들이다. 부드럽고 빛나는 표면은 장면에 감도는 불길하고 폭력적인 분위기와 상충되는 듯하지만, 이러한 폭력성이 사적이고 안온한 공간을 침투해 들어간다는 느낌을 잘 표현한다. 이상하리만치 차분한 색조와 반짝이는 표면, 그리고 꼼꼼히 묘사된 옷자락이나 인체 표현 등은 거리 두기의 냉담함과 근접 개입의 불편함을 동시에 선사한다. 사포로 문질러서 물감을 균열시키고 벗겨낸, 피부 표면의 처리나 꼼꼼한 드로잉에 의한 마무리는 인물이나 공간의 폭력성과 모순되는 듯하면서 그것과 역설적인 관계를 맺는다. ● 공간 여기저기에는 사물들이 흩어져 있다. 화분 속에서 솟아난 손들, 벽에 박혀 있는 나무들, 상자들, 바닥에 늘어져 있는 돼지나 개, 유모차를 타고 있는 팬더 같은 동물들. 이러한 사물과 동물들은 어떤 특정한 의미를 상징하는 기호가 아니라 오히려 그 무의미함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불길해 보인다. 내용이 비워지고 상호연관성을 상실한 이 사물들은 그 사물적인 특성만으로 존재한다. 하이에나, 토르소, 벌거벗은 인간들, 방독면, 부처상, 풍선 등이 가늠할 수 없는 공간들에 흩어져서 일종의 물화된 풍경을 이룬다.

 

 


강래오_Paradox of Paradox #2_한지에 혼합재료_130×162cm_2013

 

 

 

강래오_우리는 밤을 뒤섞어 만든 고깃덩이다_한지에 혼합재료_130×162cm_2010

 

 

강래오_바깥(배설)에 대한 사유_한지에 혼합재료_120×260cm_2012

작가가 묘사하는 공간이 취조실이나 고문실 같은 분위기라는 점에서, 작품들은 얼핏 독재정권 하에서 저질러진 전근대적 형태의 폭력을 언급하는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종류가 다르다. 피해자는 동시에 가해자로, 방관자는 연루자로, 개인을 보호하는 공간은 개인을 공격하는 공간으로 돌변한다. 강래오가 묘사하고 있는 폭력은 말하자면 폭력의 탈근대적 형태로서, 여기서 폭력은 일종의 병리적 징후로 나타난다. 작가는 폭력의 정당화와 내면화가 일상화된 동시대 상황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폭력은 사회 밖에서 오는 위험이 아니라, 사회 자체가 초래해 내면화한 자기 파괴로 드러난다는 데 그 의미의 심각성이 있다. 우리가 너무 쉽게 허용한 폭력은 때론 물리적 실체성을 띠지도 않으며, 어떤 한계를 지니지도 않고, 특정한 목적도 없이 출몰한다. 폭력을 통제하려 한 사회가 더 철저히 폭력적이게 돼 버린 이 역설이 지금 우리가 당면한 심각한 문제이다"(강래오). ● 이러한 종류의 병리적 형태의 폭력은 노골적인 물리적 폭력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차원에서도 나타난다. 노동의 조건 그 자체가 폭력적이라는 사실은 근대적 상황에서는 은폐되어 있었으나, 탈근대적 상황에서는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공장의 비인격적 환경은 휴식의 인격적 환경을 침범한다. 우리는 사무실에서만큼이나 유원지에서도 강요된 오락을 수행한다. 바야흐로 '사적인 것'은 소멸하고 있다. 또한 '공적인 것'의 정당성 역시 침해되고 있다. 강래오의 작품은 이러한 동시대적 환경에 대한 고발이며 비판이다. 실험맨 복장을 한 인간들이 양복입은 남자의 잠을 방해하려고 한다(혹은 영원히 잠들게 하려고 한다). 당구장에 모인 두건 쓴 남자들은 게임을 하는 동시에 자신들에게 부여된 역할을 억지로 수행하는 중이다. ● 작가는 또한 이러한 폭력이 인간에 대한 폭력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과 자연환경에 가해지는 폭력으로 번지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러한 종류의 폭력은 이 세계 전체를 위험에 빠뜨린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더하다. 예를 들어 원전 마피아와 일본정부의 공모가 만들어낸 후쿠시마 원전 사태는, 결국 지구상에 살고 있는 생명 전체의 생존 문제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극단적인 암울함을 선사했다. 역설적인 것은, 이러한 상황이 전체주의 사회가 아니라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더 폭력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과거 체르노빌 사건 때 사회주의 소련은 모든 주민들을 강제로 소개시킴으로서 피해를 최소하고자 했으나, 자유 민주주의 국가 일본은 모든 것을 개인적인 선택으로 돌렸다. 바로 이러한 선택의 자유가 더욱 큰 재난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자유와 폭력의 공존이라는 이 역설은 원전사고라는 특수한 경우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쉽게 목격된다. 학교, 지하철, 극장 등 가장 진부한 일상의 무대에서 벌어지는 무차별적인 테러는 개인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정지시키지 않고서는 예방이 불가능하다. 테러는 일상과 폭력의 경계선을 무너뜨리는 탈근대적인 폭력의 전형이다. ● 이러한 탈근대적 폭력의 성격을 우리는 르네 지라르의『폭력과 성스러움』에 나오는 '희생의 위기(sacrificial crisis)'라는 개념을 통해 이론화해볼 수 있다. 지라르는 폭력의 문제를 통해 문화의 기원을 추적하려고 하는데, 그가 보기에 모든 문화의 기원은 폭력이다. 폭력의 희생자를 성스러운 존재로 만들어 공동체 외부로 축출함으로써 문화가 유지된다는 것이 그의 논지이다. 희생자를 공동체에서 몰아내고 성스러운 존재로 만드는 과정은 외부와 내부의 경계선을 구축하는 작용을 한다. 토템숭배와 같은 원시부족의 풍습에서 발견되는 희생제의(sacrificial ritual)는 희생물에게 공동체 전체의 구성원을 대리하는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공동체를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 만약 이러한 제의가 없다면, 상호적 복수의 형태로 폭력이 범람하여 사회는 위기에 처할 것이다. 지라르에 따르면, 현대의 사법제도는 고대의 희생제의를 이어받고 있다. 범죄를 저지른 바로 그 당사자를 처벌한다는 점에서, 복수의 정면충돌을 피하는 고대의 희생제의보다 오히려 현대의 사법제도가 더욱 철저하게 복수의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

 

 


강래오_탐욕을 즐기고 미래를 보류하다_한지에 혼합재료_130×162cm_2012

 

 

 

강래오_무수한 '너'를 만나는 날은 죽음 뒤에 온다_한지에 혼합재료_162×130cm_2012

문제는 희생제의의 기능이 실패할 때 발생한다. 연쇄적 복수를 억제하는 법적, 물리적 권위가 기능을 상실할 때 희생의 위기가 발생한다. 순수한 폭력(희생제의, 사법제도)과 불순한 폭력(상호적 복수)를 구별하는 경계선이 무너지며 상호적 복수로서의 내적 폭력이 공동체를 위협한다. 합리적인 제도와 이성적인 집행은 붕괴되고 원초적인 상호 폭력이 전면에 노출된다. 지라르에 따르면, "희생의 구별, 순수함과 불순함 사이의 구별은 다른 모든 차이들을 말살되지 않고서는 말살될 수 없다. 동일한 폭력적 상호성의 과정이 전체를 삼켜버린다. 따라서 희생의 위기는 구별의 위기로 정의할 수 있다...희생의 위기에 숨겨진 폭력성은 궁극적으로 구별의 파괴로 이어지며, 이 파괴는 다시 새로운 폭력에 기름을 붓는다. 요컨대, 희생제도에 악영향을 주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토대 그 자체에, 사회적 조화와 균형이 의존하고 있는 원리에 위협을 가한다."(르네 지라르의『폭력과 성스러움』) 공동체의 위기는 지라르가 '괴물스러운 쌍둥이(monstrous double)'라고 부르는 것들의 범람으로 발현된다. 괴물스러운 쌍둥이들은 가해자이자 피해자이며, 공적 역할의 수행자이자 사적 복수의 수행자들이다. 희생의 위기가 초래되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별만이 아니라 표면과 깊이의 구별 역시 붕괴한다. "체계의 기능이 밖으로 드러나면, 체제는 그것이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불투명성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한다. 내부 작동원리가 명확히 보인다는 것은 체계에 위기가 왔다는 신호이다." (르네 지라르의『폭력과 성스러움』) ● 지라르가 현대사회에 대해 많은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우리 시대를 희생의 위기가 발생한 시대로 정의할 수 있다. 공간과 인물, 사물들의 기묘한 배치에 의해, 외부와 내부,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 폭력과 일상의 기묘한 혼합을 보여주는 강래오의 작품은 이러한 위기를 적절하게 이미지화하고 있다. 또한 강래오의 작업은 동시대의 일반적인 상황만이 아니라 특수한 한국적인 상황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고문실이나 취조실 같은, 한국 근대사를 관통하는 특정한 공간의 이미지와 사물들 속에서 반향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폭력은 중앙정보부의 고문실이 아니라 백주대낮 길거리에서 발견된다. 쿠데타에 의해 집권한 것이 아니라 선거에 의해 집권한 정부가 행사하는 노골적인 폭력성은, 법에 위반되는 폭력이 아니라 법 그 자체가 폭력적이라는 사실을 확연히 드러내준다. ● 우리는 최근 1-2년 사이에 한국사회를 형성하는 문화적 분위기에 눈에 띄는 변화가 왔음을 목격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소위 '일베 문화'라는 전대미문의 문화의 부상이다. 타인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성과 윤리적 후안무치로 대변되는 이 문화는, 희생의 위기 혹은 병리적 폭력의 극명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병리적 사회에서는 특정한 행동만이 아니라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 자체가 붕괴한다. 유신의 복귀로 요약되는 퇴행적인 정치 형태, 타인에 대한 감정이입의 상실을 보여주는 악플 등등.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공격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공격성은 너무나 노골적인 것이어서, 일상 그 자체가 폭력에 의해 침윤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예술의 역할은 무엇인가? ● 작가 강래오는 그것을 "물화되어가는 인간들에 대해서 그들의 죽어가는 의식을 일깨워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문제에 대해 말하지 않고, 비판을 행하지 않음은 그 문제에 순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의 안위와 안녕을 위해 타인의 생명이 위협 받고 있음에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개인들의 이기심을 이용하려고 하는 세력들에게 더 큰 힘을 실어주며, 부당한 폭력은 근절되지 않고 오히려 정당화하게 만든다. 나는 이번 작업을 통해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고 반성하며, 다시 이를 문제화시켰다"(강래오). 첫 번째 개인전을 여는 작가의 포부치고는 매우 야심차고 전방위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작업에 대해 진지한 반응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 ■ 조선령

 

 


강래오_'그대' 불행에 연루된 자들_한지에 혼합재료_162×260cm_2010

ㆍ수묵회화 맥 잇는 김호석 작가 30일부터 '아라아트'에서 개인전

 

 

생생한 표정과 더불어 관람객을 압도하는 머리카락의 세밀한 붓질은 붓털이 2~3개인 세필로 그리되, 한 번의 실수도 용납이 안되는 작업이다. ‘포로’, 147×208㎝



검은 먹물의 짙고 옅은 번짐만으로 화면이 살아나고, 아낀 몇 가닥의 선은 절제함으로써 오히려 생생한 기운을 품고 있다. 은은한 쌀 빛깔의 전통 한지와 먹의 농담이 어우러지면서 텅 빈 여백이 꽉 차게 느껴진다. 미술계 안팎에서 화법이나 재료, 화풍 등 전통 수묵회화의 맥을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수묵화가 김호석(56)의 작품들은 농익은 수묵화의 맛을 제대로 드러낸다.

하지만 그저 눈에 보이는 수묵화 맛에만 취한다면 작품을 절반만 즐기는 것이다. 그가 미술계의 찰진 평가를 받는 것은 전통의 맥을 이 시대 사람들의 일상에서 찾아내고, 시대정신으로 재해석해 발언한다는 데에 있다. 실제 동양 수묵화의 핵심은 사물의 외형만이 아니라 사물이 지닌 본질이나 이치, 작가의 정신성을 담아내는 것 아닌가.

김 작가가 30일부터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일상적 소재로 사의(寫意)까지 추구한 작품들로 개인전을 마련했다. ‘그리움이 숨 막혀 그림이 된 김호석 붓’이란 전시명은 소설가 김성동이 지었다. 수묵화의 참맛을 느끼도록 작품들은 이례적으로 액자없이 배접한 한지 그대로 내걸려 작가의 강한 자부심도 내비친다.

  

▲ 일상 소재서 시대정신 찾아
전통 배채법으로 인물화 그려
“붓은 나를 지탱하고 치유해”



작품 ‘탁주에 발을 씻다’는 인간이 천시하는 파리들을 통해 인간의 이중성과 오만, 부조리함, 나아가 세태까지 꼬집는 작품이다. 한용운의 시 ‘파리’가 생각난다. ‘(…) 나는 작고 더럽고 밉살스런 파리요/ 너는 고귀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어여쁜 여왕의 입술에 똥칠을 한다/ 나는 황금을 짓밟고 탁주에 발을 씻는다/ (…)/ 너희는 나를 더럽다고 하지마는/ 너희들의 마음이야말로 나보다도 더욱 더러운 것이다/ (…).’

딸이 엄마의 흰 머리카락을 뽑아주는 ‘포로’, 바람 목욕하는 시어머니와 며느리를 표현한 ‘바람 목욕’을 보면 저절로 가슴이 훈훈해진다. 세필로 한올 한올 그려낸 머리카락, 생생하기 그지없는 표정은 구도자같은 작업의 결과물이다. 화목한 가족의 정이 오롯이 드러나면서 팍팍한 세태를 잊게 하고, 시어머니-며느리-딸로 이어지는 우리 삶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스님의 뒷모습을 담은 ‘허허’는 수묵화의 정수로 살아감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고, 사랑을 나누는 파리 두 마리만으로 125×111㎝의 큰 화면을 채운 ‘생명’은 공간 장악의 힘과 더불어 널찍한 여백에 사랑의 숭고함, 아름다움을 담았다. ‘법’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좌상인데 얼굴이 없다. 선을 최대한 적게 긋고 먹의 농담만으로 표현한 작품은 논란이 그치지 않는 법의 잣대, 겉모습에 매몰돼 내면을 보지 못하는 우리들을 꾸짖는 듯하다.

‘허허’, 188.5×95.5㎝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등을 수상한 그는 수묵화로 이 땅의 사람, 삶을 그려왔다. 민주화 현장, 거리의 사람들 속에서 시대정신을 찾아나서기도 했다. 사실 그는 조선시대 초상화의 맥을 잇는 작가로 유명하다. 뒷면에 수십번의 정교한 붓터치를 함으로써 화면 위로 인물이 은은하게 살아나게 만드는 배채법을 쓴다. 이 기법으로 김구 등 역사적 인물은 물론 성철·법정 스님, 노무현 전 대통령 등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번 작품전에 나온 인물도 황톳물을 걸러 만든 살굿빛 안료를 사용해 배채법으로 그린 것이다.

“사실 작품마다 은유가 깊게 담겼다. 붓질과 먹을 줄임으로써 중의적 의미를 살리고자 했다. 늘 그렇듯 현실을 맞받아치되 그 너머까지 표현하려 애썼다. 견뎌내기 결코 쉽지 않은 모욕을 겪고, 겉모습 속에 숨겨진 추악한 단면들을 보고 있다. 나를 지탱시키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붓이다.” 김 작가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재직 때 전통회화 수업시간에 성희롱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해임됐지만 복직 판결을 받았고, 최근 학교 측의 정직에 맞서 소송을 벌이고 있다. “많은 이들이 포기하라고 하지만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게 있다”는 그는 “작가는 결국 작품으로 말한다는 다짐을 거듭한다”고 밝혔다. 11월5일까지. (02)733-1981

 

[경향신문]도재기기자



    

 

 

ㆍ수묵회화 맥 잇는 김호석 작가 30일부터 개인전

검은 먹물의 짙고 옅은 번짐만으로 화면이 살아나고, 아낀 몇 가닥의 선은 절제함으로써 오히려 생생한 기운을 품고 있다. 은은한 쌀 빛깔의 전통 한지와 먹의 농담이 어우러지면서 텅 빈 여백이 꽉 차게 느껴진다. 미술계 안팎에서 화법이나 재료, 화풍 등 전통 수묵회화의 맥을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수묵화가 김호석(56)의 작품들은 농익은 수묵화의 맛을 제대로 드러낸다.

하지만 그저 눈에 보이는 수묵화 맛에만 취한다면 작품을 절반만 즐기는 것이다. 그가 미술계의 찰진 평가를 받는 것은 전통의 맥을 이 시대 사람들의 일상에서 찾아내고, 시대정신으로 재해석해 발언한다는 데에 있다. 실제 동양 수묵화의 핵심은 사물의 외형만이 아니라 사물이 지닌 본질이나 이치, 작가의 정신성을 담아내는 것 아닌가.

김 작가가 30일부터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일상적 소재로 사의(寫意)까지 추구한 작품들로 개인전을 마련했다. ‘그리움이 숨 막혀 그림이 된 김호석 붓’이란 전시명은 소설가 김성동이 지었다. 수묵화의 참맛을 느끼도록 작품들은 이례적으로 액자없이 배접한 한지 그대로 내걸려 작가의 강한 자부심도 내비친다.

                                                         생생한 표정과 더불어 관람객을 압도하는 머리카락의 세밀한 붓질은 붓털이 2~3개인

                                                         세필로 그리되, 한 번의 실수도 용납이 안되는 작업이다. ‘포로’, 147×208㎝

 


▲ 일상 소재서 시대정신 찾아
전통 배채법으로 인물화 그려
“붓은 나를 지탱하고 치유해”


작품 ‘탁주에 발을 씻다’는 인간이 천시하는 파리들을 통해 인간의 이중성과 오만, 부조리함, 나아가 세태까지 꼬집는 작품이다. 한용운의 시 ‘파리’가 생각난다. ‘(…) 나는 작고 더럽고 밉살스런 파리요/ 너는 고귀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어여쁜 여왕의 입술에 똥칠을 한다/ 나는 황금을 짓밟고 탁주에 발을 씻는다/ (…)/ 너희는 나를 더럽다고 하지마는/ 너희들의 마음이야말로 나보다도 더욱 더러운 것이다/ (…).’

딸이 엄마의 흰 머리카락을 뽑아주는 ‘포로’, 바람 목욕하는 시어머니와 며느리를 표현한 ‘바람 목욕’을 보면 저절로 가슴이 훈훈해진다. 세필로 한올 한올 그려낸 머리카락, 생생하기 그지없는 표정은 구도자같은 작업의 결과물이다. 화목한 가족의 정이 오롯이 드러나면서 팍팍한 세태를 잊게 하고, 시어머니-며느리-딸로 이어지는 우리 삶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스님의 뒷모습을 담은 ‘허허’는 수묵화의 정수로 살아감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고, 사랑을 나누는 파리 두 마리만으로 125×111㎝의 큰 화면을 채운 ‘생명’은 공간 장악의 힘과 더불어 널찍한 여백에 사랑의 숭고함, 아름다움을 담았다. ‘법’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좌상인데 얼굴이 없다. 선을 최대한 적게 긋고 먹의 농담만으로 표현한 작품은 논란이 그치지 않는 법의 잣대, 겉모습에 매몰돼 내면을 보지 못하는 우리들을 꾸짖는 듯하다.

‘허허’, 188.5×95.5㎝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등을 수상한 그는 수묵화로 이 땅의 사람, 삶을 그려왔다. 민주화 현장, 거리의 사람들 속에서 시대정신을 찾아나서기도 했다. 사실 그는 조선시대 초상화의 맥을 잇는 작가로 유명하다. 뒷면에 수십번의 정교한 붓터치를 함으로써 화면 위로 인물이 은은하게 살아나게 만드는 배채법을 쓴다. 이 기법으로 김구 등 역사적 인물은 물론 성철·법정 스님, 노무현 전 대통령 등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번 작품전에 나온 인물도 황톳물을 걸러 만든 살굿빛 안료를 사용해 배채법으로 그린 것이다.

“사실 작품마다 은유가 깊게 담겼다. 붓질과 먹을 줄임으로써 중의적 의미를 살리고자 했다. 늘 그렇듯 현실을 맞받아치되 그 너머까지 표현하려 애썼다. 견뎌내기 결코 쉽지 않은 모욕을 겪고, 겉모습 속에 숨겨진 추악한 단면들을 보고 있다. 나를 지탱시키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붓이다.” 김 작가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재직 때 전통회화 수업시간에 성희롱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해임됐지만 복직 판결을 받았고, 최근 학교 측의 정직에 맞서 소송을 벌이고 있다. “많은 이들이 포기하라고 하지만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게 있다”는 그는 “작가는 결국 작품으로 말한다는 다짐을 거듭한다”고 밝혔다. 11월5일까지. (02)733-1981


Ignite the Frame

2013 건국대학교 회화과 졸업展

 2013_1030 ▶ 2013_1105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Ignite the Frame-2013 건국대학교 회화과 졸업展 블로그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3_1030_수요일_05:00pm

참여작가

강도영_강지혜_강효경_김민지_김설희_김성덕

김영균_김예지_김은경_김태경_박은지_박총명

박예슬미_배수라_배한솔_신가애_유지나

윤영선_이미현_이수민_이지연_이채현_이현주

장유림_전영남_전수민_조아라_주다희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이즈GALLERY IS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2-1(관훈동 100-5번지)Tel. +82.2.736.6669/737.6669

www.galleryis.com


현대 사회와 인간에 대한 성찰과 메시지 ● 매해 수만 명에 이르는 미술대학 학생들이 그동안 학업을 통해 갈고 닦은 최고의 작품을 졸업전시를 통해 선보인다. 학생들의 개성과 가치관에 따라 다양한 작품들이 출품되지만, 지역에 따라 또는 학교에 따라 구별되는 특성을 보이기도 한다. 이는 아마도 대학이라는 특정한 공간에서 함께 부딪히며 고민하고, 작품을 제작했던 공동의 경험이 작품을 통해 발현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이 어떠한 고민을 얼마나 진지하게 작품으로 승화해 내느냐는 졸업 전시의 성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일 것인데, 이러한 점에서 이번 건국대학교 학생들의 졸업 작품전은 여러모로 주목되는 전시이다. ● 좁은 구멍에서 꿈틀거리며 단일 개체로 살아가는 개불과 해삼의 의인화,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입을 다물어 대화하지 않는 일그러진 가족의 모습, 외형적 규격에 맞지 않아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린 다양한 농산물들로 차려진 식탁. 건국대학교 학생들이 그리는 현대사회와 현대인들의 모습이다. 점점 더 복잡해지는 사회구조 속에서 오히려 극도로 개인화 되어가는 우리들의 모습과, 인간의 외모조차 성형을 통해 규격화되고 상품화된 아름다움을 좇는 현대사회의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강도영 / 강효경 / 강지혜 / 김민지

 

 

김설희 / 김영균 / 김은경 / 김예지

 

 

김성덕 / 김태경 / 박예슬미

 

 

 

박은지 / 배수라 / 박총명 / 배한솔

이러한 사회 비판의 목소리는 학생들 자신에 대한 성찰과 탐구로부터 시작되었다. 흘러내리는 물감자국과 일그러진 얼굴의 모습으로 무의식의 자아를 표현하거나, 마른 선인장의 모습을 빗대어 힘들지만 앞으로의 삶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기도 하였다. 자아성찰과 내면 탐구는 미술작품에 있어 오래된 주제이자 소재이지만, 건국대학교 학생들이 보여주는 자신에 대한 탐구는 극도의 경쟁과 부조리로 가득 찬 현대 사회에서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미래를 건설하고자 하는 건전한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관객들로 하여금 커다란 울림을 준다. ● 고무적인 것은 이들이 현대사회의 모습을 비관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아름드리나무들이 둘러싸인 숲 속에 마련된 편안한 의자 혹은 아늑한 집 한 채, 자신을 태워 주변을 비추는 초로 비유된 자신의 모습 등은 이들이 몸과 마음이 지친 자신과 현대인들을 위해 마련한 치유와 쉼의 공간이자 희망의 메시지로 젊은 세대로서 더 나은 미래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의지의 표명이다.

 


신가애 / 유지나 / 이수민 / 윤영선

 

 

 

이지연 / 이현주 / 이미현

 

 

전수민 / 이채현 / 장유림

 

 

주다희 / 전영남 / 조아라

이러한 의미에서 건국대학교 학생들은 이번 전시의 제목을『Ignite the frame』이라 명명하였다. 그동안 학생의 신분으로 가졌던 여러 가지 한계의 틀을 불태워 버리고 새로운 세계로의 힘찬 출발과 동시에 기존의 사회 그리고 미술계가 가지는 틀을 넘겠다는 의지의 다짐인 것이다.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사회에 대한 깊은 고민, 그리고 미술가로서 갖추어야 할 수준 높은 기법적 숙련도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이번 건국대학교 학생들의 "Ignite the Frame"전은 예비 미술 작가로서 성공적인 출발을 보여주는 전시라 하겠다. 한 가지 제안을 하자면, 앞으로 미술가로서, 또 한 사람의 사회 구성원으로서 가져야 할 사회적 역할, 그리고 미술이 가져야 할 공공적 가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가치 있는 역할을 하는 미술 작가로 성장해 달라는 것이다. 한국 미술계를 이끌 차세대 작가로서 많은 가능성을 보이며 첫 발을 내딛는 건국대학교 학생들에게 많은 기대와 격려를 보내는 바이다. ■ 고홍규

Vol.20131030b | Ignite the Frame-2013 건국대학교 회화과 졸업展


'위 아래를 보다'-제주의 부분 풍경

'Looking Up and Down'-Partial Landscapes of Jeju Island

김정은展 / KIMJEONGEUN / 金廷恩 / painting

2013_1023 ▶ 2013_1028

 

 

 


김정은_겨울산 Winter Mountain_

나무패널, 삼베, 황토, 천연옻칠, 난각, 칠(漆)판에 옻칠기법_120×90×4.5cm_2012~3

초대일시 / 2013_1023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 스페이스GANA ART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19번지 2,3층Tel. +82.2.734.1333

www.ganaartspace.com


내 마음이 닿고 시선이 머무는 곳 제주에서 느낀 소소한 느낌과 감각들을 부분 풍광 안에 담아냈습니다.

 


김정은_거먹돌꽃1 Moss Flowers on the Black Rocks 1_

나무패널, 삼베, 황토, 천연옻칠, 칠(漆)판에 옻칠기법_60×90×4.5cm_2011~2

나는 느낀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나는 느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나는 느끼고 생각하고 그린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 현대는 방대한 정보의 시대이다. 세대와 세대로 명확한 시작과 끝이 있는 삶의 순환 고리를 거쳐 감에 있어 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언어적 유희 혹은 특정 현상에 집중하거나, 작가 자신의 주변잡기적 주제를 거론하고, 그 시기를 살아가는데 있어서의 사고에 포커스를 맞춘다. 자연의 거대한 메커니즘을 인지하지 못하고 각자의 편향된 지식과 담론들을 양산한다. 원론적 논의와 관계에 관한 재해석. 펼쳐보기, 뒤집어보기, 어렵게 보기, 쪼개보기, 지워보기... 이런 생각을 하는 나조차도 찰나의 시계에 머무는 극히 작은 부품일 뿐이다. 전체를 읽을 수도 정의 할 수도 없다. 한 점에 불과할 뿐이다.

 


김정은_밤벚꽃 Cherry Blossoms at Night_

나무, 삼베, 천연옻칠, 난각, 나무 쟁반에 건칠, 옻칠기법_59×59×8cm_2011~2

현재의 예술은 소유하는 소비자와 평하는 평론가, 노출시키는 언론에 의해 상품화되고 기록된다. 지금보다 여러 제한과 제약이 난무하던 시대에는 어떤 개론이나 이즘이 동시대상을 대변하는 정의로서 학습될 수 있었다면 현재는 유행이 있을지언정, 집단 최면과 같은 저질의 집단 패닉상태에서나 가능할 법한 단편화된 사고가 보편화될 수 없는 시대이다. 문화의 세계화는 불가능한 어리석은 이상향이다. ● 내 한계적 사고 안에서는 방대한 정보의 일부를 차용하여 선택적 재현을 하는 것이 작가다. 현재 제주의 풍광을 주로 그린 나 또한 지극히 일부분을 표현한 것일 것이다.

 


김정은_제주의 풍경 Scenery in Jeju_

나무패널, 삼베, 황토, 천연옻칠, 칠(漆)판에 옻칠기법_90×120×4.5cm_2011~3

 

 

 

김정은_길2 Road 2_나무패널, 삼베, 황토, 천연옻칠, 칠(漆)판에 옻칠기법_90×120×4.5cm_2012~3

학습되었던 미술은 서구적 사고와 방법을 지향하고 우선시 되어왔다. 그렇게 형성된 미의식의 불완전함을 알게 된 20대부터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의 결과물들은 찾아 채우는 과정의 부산물들이다. 옻칠이 가진 무궁무진한 가능성, '전통'이라는 의미, 이어 가야하는 세대의 책임이 무엇인지에 대해 작가가 생각하는 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 옛것도 전통이지만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시간의 흐름 저편에서는 전통일 것이다. 전통이란 머물러 한곳에 고여 있는 것이 아니라 현 세대에서 이어져 발전되고 끊임없이 생산되어야 한다. 전통기법 중에 하나인 옻칠을 차용하여 회화작업의 폭을 넓히고 건칠기법을 이용한 입체조형물을 만들어 입체 위에 회화를 입힌다는 관점으로 작업에 임했다.

 


김정은_오름1 Oreum 1_삼베, 황토, 천연옻칠, 건칠기법_48×68×18cm_2011~3


우리고유의 전통적 자산들이 현재도 같이 살아 숨쉬고 성장하는- 발전적 맥을 지향하는 한국화작가(동양화 서양화의 개념 구조에서 벗어나 한국에서 자라 한국적 정서를 갖고 그림을 그리는 작가)로의 역량을 키워 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성장통의 전시이고자 한다. ● 다른 이들과의 감각적 소통- 보는 시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소리의 청각, 향기의 후각, 맛의 미각, 만지는 촉각으로 이어지는 감각의 향연이었으면 한다. ■ 김정은

 


김정은_숲길 안에서 In the Forest Trail_장지를 덧댄 캔버스에 유채_60.6×72.7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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